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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9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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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톰은 피트의 옆에 걸터앉았다. 촛불에 비친 그림자가 음산하게 슬렁거렸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냘픈 외풍 소리가 귀를 찢을 듯한 굉음처럼 들렸다. 간간이 피트의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톰은 피트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차마 그를 만질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피트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피트가 신음하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허우적거리는 움직임이 애처로웠다. 톰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이번에도 피트의 손을 잡지 못했다. 톰의 잇새로 울분에 찬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열에 들떠 고통스러워하는 피트의 얼굴. 자신의 품에 안겨 차갑게 식어가던 피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순간 톰은 압도적인 두려움에 휩쓸렸다. 인간의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태풍.

생지옥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톰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 꺼져가는 피트의 숨소리, 병색이 짙은 얼굴, 이리저리 흔들리는 촛불, 모든 것이 자신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듯했다.

톰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피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식당한 그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가던 피트. 그 날의 떨림이 생생했다. 이곳은 더는 영예로운 전당도, 안락한 보금자리도 아니다. 비탄과 탄식의 성소. 톰은 정상에 올랐다가 그대로 추락한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사지가 뜯겨나간 채 피로 물든 땅을 기어가는 고통. 사랑이란 어째서 극도의 행복을 안겨주고 뒤이어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몰아세우는가. 톰의 어깨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뒤척이던 피트가 의식을 되찾은 모양인지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톰을 찾았다. 톰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피트의 손을 잡았다. 세상이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잿빛으로 뒤덮인 땅에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강물은 잔잔하게 흘렀다. 요동치는 피트의 눈동자. 톰은 지옥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한 쌍의 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트.”
“톰…….”

톰의 얼굴을 보고 피트는 힘없이 웃었다. 톰은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애써 의연하게 말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세상이 강물에 잠겨도 자신만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

“피트, 내 얘기 잘 들어라.”
“…….”
“네 배 속에 아직 아이가 있다.”
“……뭐? 나 유산한 거 아니었어?”

피트의 목소리가 높다랗게 갈라졌다.

“그 아이는 슬프지만 이미 떠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뜻이다.”

톰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피트의 얼굴에 희망이 스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갈비뼈 아래 쑥 들어간 납작한 배. 여전히 이곳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 그러면 아직, 아직. 다른 아이는 아직…….”
“남은 아이도 무사하다고 장담할 순 없다. 그 아이도 이미 죽었는데, 네 배 속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후투가 어른의 말씀으로는 배 속에 아이가 이미 죽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꺼내야 한다고 하셨다. 그냥 두면 네가 위험해진다고 하셨다.”
“아이가 무사할 수도 있잖아.”
“무사하다고 해서 이대로 지켜만 볼 순 없다.”
“무슨…….”

피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톰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괴롭게 입을 열었다.

“당장 아이를 갖는 게 아니었다. 이건 내 잘못이다. 네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아이를 가지게 했어.”
“아니야, 너도 몰랐잖아.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알고 있었잖아, 우리 둘 다. 왜 그런 말을 해?”

피트는 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일 론이 의원을 데리고 올 거다.”

톰은 힘겹게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이 아이도 죽은 형제 곁으로 보내주자.”
“지금 아이를 지우라는 소리야?”
“네 목숨이 위험하다.”
“제발 알아듣게 말해줘.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피트는 톰의 양팔을 붙잡고 그를 흔들었다.

“매버릭, 네가 그간 아팠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를 가져서다. 아이를 낳으면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산달은 아직 멀었지. 그러니까 네가 잘못되기 전에 아이를 보내줘야만 한다.”
“안 돼. 그렇게는 안 돼.”

피트는 대번에 톰의 말을 잘랐다. 흥분한 그는 울먹이면서 톰의 어깨를 때렸다.

“어떻게 나더러 아이를 보내주라는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내가 아이를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이제야 가족을 갖게 됐단 말이야. 남들처럼 살 수 있게 됐단 말이야.”
“고집부리지 마라, 피트.”

톰의 목소리도 어느새 울음으로 가파르게 떨렸다. 절망하는 피트를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이미 한 아이를 먼저 보냈어. 그런데 남은 아이마저 보내줘야 한다고?”

피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톰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그는 울음이 북받쳐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톰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울음을 삼켰다. 피트는 원망스럽다는 눈초리로 톰을 응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못해. 난 그렇게 못해. 그러면 애가 너무 불쌍하잖아. 걔는 혼자잖아.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밤하늘을 외롭게 떠돌아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 혼자라는 게 얼마나 무섭고 괴로운 일인데. 내 자식한테 그런 고통을 겪게 하라는 말이야? 혼자 둘 수 없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거야. 절대 내 자식을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이 순간 톰은 범람하는 눈물을 가까스로 막고 있던 둑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와 함께 죽겠다고 말하는 피트가 미웠다. 아니다. 자신은 피트를 미워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듣고도 여전히 피트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피트를 보고도 마음이 식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갈구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그래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아이가 불쌍하니 따라 죽겠다는 소린가?”

톰이 언성을 높이며 되물었다. 깜짝 놀란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나, 나한테는, 나한테는, 가, 가족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피트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대체 뭐야. 나는 네 가족이 아니란 말인가?”

톰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물었다.

“톰…….”
“네 가족이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괜찮다는 뜻인가?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보다, 너와 같은 피가 흐르는 아이가…… 더 소중하다는 뜻인가?”

톰은 어린애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럽게 울었다.

“피트, 너더러 나를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너를 의심했다.”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너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너는 행복하지 않을까.”
“…….”
“누구라도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톰은 마른침을 삼키고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피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피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
“너여서다.”
“…….”
“누구도 아닌 너라서 사랑하는 거다.”
“…….”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모르는데, 나를 두고 떠나겠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
“네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
“나는 외로움도 모르고, 두려움도 모르는 사람 같나? 너는 모른다. 그 날, 네가 독약을 삼켰던 그 날, 내 품에서 식어가는 네 몸을 붙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몰라. 너를 묻어주고 나도 뒤따라가려고 했다.” 
“…….”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 너 없이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 더는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고 고독뿐인 내 삶이 지긋지긋하고 힘겨워서……. 나한테는 주어진 과업이 있는데, 그 과업을 반드시 완수해야만 하는데……. 오로지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나를 떠받들며 듣기 좋은 말을 지껄여도 네가 나를 보며 웃어주는 것만 못하니까!”

기어이 톰은 오열하며 소리를 질렀다. 톰이 이렇게도 울 수 있는 사람이었나. 피트는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다른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이처럼 울고불고 괴로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톰이어서 더더욱. 슬픔과 설움에 북받쳐 흐느끼는 그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기뻐서 더 미안했다. 톰이 이다지도 절실하게 자신을 원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돼서, 그의 인생에 자신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돼서 기뻤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 매버릭. 네 남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강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비겁하고 나약한 남자다. 그래서 네 사랑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톰은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그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괴로워해서 안쓰러운 마음에 피트는 손을 뻗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어떻게 해야 이 서글픈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을까.

“톰……. 미안해,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미안해, 더는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잃어버린 게 너무 슬퍼서, 너무 슬퍼서…….”

톰은 몸을 뒤로 물리며 피트의 손길을 피했다.

“왜, 왜 나를 피해? 날 피하지 마.”

피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톰은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등을 돌렸다. 피트의 얼굴을 보면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그에게 함락당하고, 또 마음을 농락당할 것이다.

“날 만지지 마라. 네가 나를 만지면…… 나는 또 무력해지고 말아. 나는 너를 거스르는 법을 모른다.”

톰은 주먹을 있는 힘껏 쥐었다. 손등의 뼈마디가 희게 질리고 핏줄이 불거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전부 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었다. 사랑이 괴로웠다.

“피트, 너는 그저 포도 넝쿨 아래에서 웃었지. 너를 보고 사랑에 빠진 건 순전히 나다. 그러니까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톰.”
“피트, 정말 괴로운 게 뭔지 알아?”

톰은 쓸쓸하게 웃었다. 피트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답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위로하고자 던지는 질문.

“톰…….”
“나에게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온다면. 결국,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널 만나려고 그 생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스스로 내 목을 조르는 한심한 짓거리를 또다시 되풀이할 거라는 사실이다.”
“톰, 미안해…….”
“나한테 사과하지 마라.”
“…….”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네 마음속에 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비참해진 내 꼴이 조금이라도 가엾다면, 더는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부탁이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마지못해 나를 두고 떠나겠다는 네 말을 들어주고 말 거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을 증오하겠지.”

그 말을 남기고 톰은 피트로부터 도망쳤다.

 
***


톰은 강가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이윽고 강가에 다다른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수면 위로 애처롭고 형편없는 어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인간의 의지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톰은 비로소 왜 자신의 아버지가 날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지 알게 됐다. 순환하는 물결 아래 한낱 인간의 애통함은 어떤 소란도 되지 못한다. 그렇게 미물이 되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만 단장의 슬픔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니까.

톰은 주먹을 쥐고 땅을 힘껏 내리쳤다. 비통했다. 피트를 두고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당장은 그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피트와 마주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자신은 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매달릴 것이고, 이 순간에도 피트는 빠르게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이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피트가 마음을 놓고 의지할만한 남자가 못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

사랑하는 게 아니었나. 톰은 끅끅거렸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피트에게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만 자신이 패자다. 숨통을 옥죄이는 이 고통은 전부 피트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길 원하는 욕심 때문이다. 피트의 사랑을 원한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톰은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못 들은 체했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톰은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았다. 그것이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톰.”

알렉세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톰을 불렀다. 톰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오셨습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머니께 들어 대강은 알고 있다. 피트는…….”

알렉세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거운 감정. 이 순간 알렉세이의 눈에는 톰을 제 아들이라기보다는 같은 슬픔을 아는 동등한 남자로 보였다.

“피트는 아이를 지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지키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살아도 아이와 함께 살고, 죽어도 아이와 함께 죽겠다고 말하더군요.”

톰은 쓰게 웃었다. 알렉세이는 말없이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톰은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머니도 피트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아무리 제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해답을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고만 있던 질문이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꺼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톰은 숨을 고른 다음 북받치는 울음을 참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 아버지와 저는 여느 부자지간과는 다르지요. 아버지께서는 제게 늘 엄격하셨고, 저도 아버지께 인정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즐거워하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너무 예전 일이라 가물가물합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우습다. 톰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아버지에게 위로라도 받고 싶은 것인가. 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 해준 적 없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차라리 게으른 양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는 것이 낫다.

“저는 일찌감치 아버지의 애정을 얻는 것은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리라 결심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때때로…….”

그런데도 자꾸만 말하게 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아니다. 아버지여서다. 아버지가 지금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서다. 아버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으므로. 톰은 끝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께서도 제가 죽고 어머니께서 살기를 바라셨습니까?”
“네 말대로 나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널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신중하게 말했다.

“타마라 대신에 네가 죽길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상치 못한 알렉세이의 말에 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알렉세이 역시 자식인 자신이 죽고, 아내인 타마라가 살기를 바랐으리라 생각했다. 알렉세이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들을 향한 애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연민조차 보이지 않았다. 알렉세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것은 오직 이십여 년 전 그의 곁을 떠난 초연한 사랑의 얼굴뿐이다.

“타마라가 죽은 건 타마라의 운명이 거기까지여서다. 타마라의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다.”

알렉세이의 음성이 사뭇 비장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죽고 피트가 살기를 바랍니다. 이런 제 마음이 결과적으로는 피트를 더 슬프게 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제가 부끄러우시겠지요.”

톰은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너와 나는 다른 것뿐이다.”

알렉세이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아버지도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이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너도 나와 같이 생각하리라 믿는다. 톰, 너와 나는 경우가 다르다. 타마라는 내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차라리 낫다. 하늘을 원망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
“내가 아비로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새삼 아버지의 자격을 운운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세이는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바닥 안에 갇힌 숨결에 고독함이 깃들어 있었다. 뒤늦게 아들을 향한 사랑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는 아들을 아들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아들을 한 사람의 남자로서 인정하게 되었고, 그의 슬픔을 이해할 따름이었다.

“톰. 살다 보면 네 의지와 힘만으로는 타개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아버지.”
“지금은 슬픔에 눈이 멀어 애써 외면하고 있다만, 너도 모르지 않겠지.”

알렉세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렉세이는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처럼 비극을 선고해야 하는 이 순간이 곤혹스러웠다.

“생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고 해도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다. 톰,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거머쥐고 싶은 네 마음을 이해한다.” 
“…….”
“그러나 아이가 죽는다고 해서 피트가 살 수 있으리란 장담은 하지 마라. 너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각오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두고 떠나는 것을 말이다.”
“못하겠습니다.”

톰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저 믿고 싶습니다. 아이를 신에게 내어주면, 피트는 제품에 남아있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들아, 한심한 소리 그만해라.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알렉세이가 대번에 역정을 냈다.

“제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톰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네 아내 앞에서만이라도 울지 마라.”

알렉세이는 차갑게 일갈했다.

“내가 지금도 후회하는 건…… 토모치카와 작별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웃는 얼굴로 보내줘야 했다. 만약에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웃는 얼굴로 토모치카를 보내줬을 것이다. 떠나는 토모치카의 마음이 무겁지 않도록.”

알렉세이는 타마라가 죽고 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자신만이 부르던 애칭인 토모치카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타마라는 토마였고, 자신은 알료샤였다. 그러나 토모치카에게 자신은 료슈카였고, 타마라는 자신에게 토모치카였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타마라를 토모치카라고 부르지 않은 까닭은, 그녀를 토모치카라고 부르는 순간 언젠가의 나약한 료슈카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이별을 앞에 두고 무너져내렸던 그 날의 료슈카로.

“아버지도 후회를 하십니까?”

톰 역시 지금껏 알렉세이에게 묻지 않았으나, 그가 타마라를 토모치카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조금 전 터뜨린 울분을 가라앉히고 겸허하게 되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하며 살아간다.”

알렉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타마라의 손을 잡아줄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는 타마라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지만, 자신의 곁에는 타마라의, 토마의, 토모치카의 이름과 얼굴을 물려받은 아들이 있다. 비록 서럽게 우는 아들의 손을 잡아주진 못하더라도, 흐느끼는 어깨를 다독여 줄 수는 있다. 알렉세이는 톰의 등을 두드렸다.

“내 슬픔에 취해 그때는 미처 몰랐다. 슬퍼하는 나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토모치카의 마음이 어땠을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갓 태어난 아이와 못난 남편을 두고, 토모치카도 떠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죽음을 앞두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두렵고 슬펐을 텐데…….”

알렉세이의 음성이 절절하게 끓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타마라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던 타마라의 얼굴을. 그녀의 마지막 말을. 알렉세이는 다시 눈을 떴다. 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는 안다. 토모치카가 내가 자책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웃으면서 작별을 고했다는 것을.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깨닫고 난 후에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고, 너도 장성해서 더는 품 안에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른 꿈을 그렸다.

“그러니 아들아. 너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마라.”

진심으로 호소하는 말이자 부탁이었다. 그 목소리가 톰의 가슴에 와닿았다. 그도 이제 와서 자신의 아버지와 애틋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죽지 못해 사는 남자의 고독을 이해하고, 그의 쓸쓸함에 더는 돌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아니며, 자신 역시 아버지가 아니다. 각자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 슬픔이다. 이 슬픔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슬픔마저 사랑의 한 조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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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타마라의 애칭은 토마, 토모치카
그래서 아들에게 톰이라는 이름을 지어줌
2023.06.08 17: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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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57화 보고 알렉세이랑 톰 이야기하는거 다시 보러왔어.. 어흐흑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89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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