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30449487
view 4248
2023.03.07 21:33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늑대와 달

25. 빛의 그물


부스럭거리는 인기척 소리에 잠에서 깬 알렉세이는 침상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언제나 머리맡에 검 한 자루를 놓고 잠이 든다. 머리와 심장은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둔다. 칼자루를 쥔 알렉세이는 자세를 낮추고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문으로 향했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알렉세이는 천막 문을 어깨로 열어젖힘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아!”

푸르게 날이 선 칼날 너머로 녹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짙푸른 두건이 검에 베여 쩍 갈라지고, 풍성한 머리채를 고정한 끈도 끊어져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피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너로구나.”

알렉세이는 급히 몸을 뒤로 물리고 검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도 적잖이 당황했다. 피트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피트는 떨어진 두건과 끈을 주섬주섬 주웠다. 반으로 갈라진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피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알렉세이는 옷걸이에 걸린 숄을 그에게 던졌다. 피트는 숄을 칭칭 감아 머리카락을 감췄다. 엉성하게 감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삐져나왔다. 알렉세이는 못 본 체했다. 그는 방안에 촛불을 밝히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피트는 주석으로 만든 촛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삼지창 모양의 촛대였는데 양각으로 새긴 넝쿨이 화려했다. 알렉세이는 피트가 촛대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나머지 두 개의 초에도 불을 밝혔다. 방안이 한층 더 환해졌다.

알렉세이는 맹물을 마시고 피트는 차를 마셨다. 피트는 차가 미지근해지도록 후후 불어 식혔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손등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도 피트는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촛대를 구경하며 한가하게도 시간을 보냈다. 결국, 성미 급한 알렉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날 찾아온 것일 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기다리고 있어요.”
“무얼?”
“어르신 마음이 누그러질 때까지요.”

피트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카펫에 손바닥만 한 검은 얼룩이 보였다. 아마도 핏자국. 누구의 핏자국인지 안다. 연신 기침을 하느라 들썩거리던 톰의 어깨가 눈에 선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슴이 미어졌다.

“네가 그런다고 당장 내 노여움이 풀리지 않는다.”

알렉세이는 피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 그도 피트를 따라서 핏자국을 응시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적잖게 피를 토했는데, 알아서 바샤 영감을 찾아갔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톰은 바샤 영감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연하게 행동할 것이다. 인내하는 그 속이 어떤지는 모른다. 점멸하지 않는 불덩이를 삼키고 있을지, 뼈저리게 자책하고 있을지.

“알아요. 그래도 기다릴 거예요.”

피트는 고집을 부리며 버텼다. 알렉세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물만으로는 갈증이 해결되지 않아 술을 찾았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홧홧하게 태웠다. 하지만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러니 골치 아픈 현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피트는 오돌토돌한 입천장을 혀로 핥았다. 긴장한 탓에 자꾸만 입이 말랐다. 두렵기도 했다. 핏자국을 보니 새삼 알렉세이가 얼마나 무자비한 사내인지 실감이 났다. 일전에 자신에게 불복한 부족 젊은이들을 말에 매달아 만신창이가 되도록 굴리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타타흐 부족의 악명이 누구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분명해졌다. 타타흐 부족이 휩쓸고 간 땅에는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자신에게 맞선 적들의 목을 베어 기둥에 걸어 전시했고, 배를 갈라 내장은 들개 먹이로 던져주는 남자다. 다시는 자신에게 맞서지 못하도록. 다만 자식에게도 이렇게까지 무자비할 줄은 몰랐다.

알렉세이는 희게 질린 피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요가 일었다. 술이 섞여 공기가 혼탁해졌다. 알렉세이는 술잔을 탁 소리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피트가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무서우냐?”
“네.”

알렉세이의 물음에 피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렉세이는 낮게 웃었다.

“그렇다면 도망쳐라. 붙잡지 않겠다.”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왜?”
“지기 싫어서요.”

피트는 덜덜 떨면서 알렉세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서 말이냐?”
“네.”

피트는 결연하게 말했다. 알렉세이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술잔을 쥔 손이 투박했다. 드문드문 흉터가 보였다. 오래전에 만들어져 흐릿해진 흉터, 근래 살을 갈라 불룩하게 튀어나온 흉살. 피트는 작게 딸꾹질했다. 알렉세이라면 한 손으로 제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스레 목덜미가 짜릿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꼭 벌레에 쏘인 것처럼 뺨이 따끔거려서 알렉세이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문질렀다. 피트는 고집이 대단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겁에 질려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버텼다. 축축하게 젖은 눈망울이 순진해 보였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내 얼굴 가죽이 뚫릴 것 같으냐?”

알렉세이가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비바람과 세월은 이기지 못해요.”

피트는 굴하지 않고 받아쳤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알렉세이는 술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는 다시 맹물을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타는 듯한 가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다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외투를 집어 피트의 어깨에 걸쳤다. 피트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 그만하자. 네 머릿속은 훤히 보인다. 톰을 대신해서 용서라도 빌러 왔겠지. 헛수고다.”

알렉세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용서를 빌려고 온 게 아니에요.”

피트는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알렉세이는 다시 피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부모는 당연히 혼을 내야죠.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게 부모의 도리잖아요.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구해야 해요.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높다란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빛은 총명하고 강단 있었지만, 두려움은 차마 어쩌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트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르신 아들이…… 톰이 잘못을 저질러서 어르신을 노엽게 했다면, 톰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거예요. 저는 나서지 않을 거예요. 어르신이 용서해주실 때까지 그냥 옆에 같이 있어 줄 거예요.”
“톰을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려고 온 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날 찾아왔지?”
“알려드리려고요.”

피트는 심호흡했다.

“톰한테 상처를 주지 마세요.”

이번에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경고다. 그리고 도전이다. 알렉세이는 피트의 같잖은 도발에 코웃음 쳤다.

“내가 그놈에게 모질게 굴면 네가 나를 질책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네.”
“어떻게 말이지?”
“당장은…… 어르신 말 갈기를 다 땋아버렸어요. 고삐에는 방울을 달고요. 애들이랑 같이 수를 놓은 예쁜 숄도 덮어줬어요.”

피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알렉세이는 기가 막혔다.

“……정말이냐?”
“밖에 침도 뱉었어요.”
“너, 내가 정말 무서운 게 맞느냐?”

알렉세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가관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자신에게 맞서는 기백을 높이 사려고 했더니, 당차게 벌인 일이 애들 장난이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시답잖은 장난조차 치지 못한다만.

“네, 무서워요.”

피트는 힐끔 알렉세이의 눈치를 살폈다. 알렉세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옷깃을 매만졌다. 피트는 서슬 퍼런 그의 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눈이 뒤집혀서 드잡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아까 어르신이 칼을 겨누셨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아서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어르신은 강한 분이세요. 저보다 훨씬. 당장은 어르신과 정면으로 맞붙어서 이길 자신이 없어요. 톰은 잘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르신은…….”

피트는 열없이 웃었다. 그래, 당장은 이기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는 언제나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참 이상하구나.”

알렉세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네가 톰을 원망하는 건 타당하다. 네가 복수를 한다고 해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너는 내 아들이 매를 맞고 괴로워하니 슬퍼하는구나. 새삼 그 애와 마음이라도 통한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피트는 겸허하게 고백했다.

“그건 저한테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피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알렉세이는 낯뜨거워서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조만간 저 버릇은 고치라고 일러줘야겠다. 그게 본인에게도 좋다. 몸가짐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괜한 소리를 듣는 것보다야 낫다.

“그냥 톰이 계속 기침을 하니까 속이 상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괜찮다고만 말하니까 답답해서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저는 마음 아픈 게 싫어요. 아직 어리지만, 살면서 마음 아픈 일을 너무 많이 겪었어요. 물 한 모금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게 뭔지 알아요.”
“그게 나에게 맞서겠노라고 선언한 이유냐?”
“네.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어르신이 미워져요. 어르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저한텐 마음 아픈 일이에요.”
“그래, 네 마음이 아파서 톰의 몸이 상하는 게 싫다는 말이지.”

알렉세이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피트의 말을 곱씹었다. 신기할 정도로 단순한 아이다. 부자지간의 정을 생각하라느니, 수장의 체면을 생각하라느니, 톰도 어엿한 어른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느니, 그런 번드르르한 이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피트가 그런 이유를 들먹이며 자신과 톰의 관계를 중재하려고 나섰다면, 알렉세이는 크게 호통을 칠 작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상대로 얕은꾀를 부리며 말재간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드는 것을 경멸했다.

다듬지 않은 원석 같은 마음. 흙더미에 묻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잊힌 채 쓸쓸하게 사랑을 기다려온 촌스러운 청춘. 아마도 제 아들은 모나고 투박한 원석의 가능성을 알아보았으리라. 시련을 겪어 마모되고 사람들 손을 타며 다듬어져 언젠가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 그런 가능성.

풋풋한 사랑은 눈물겹다. 알렉세이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도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가슴 졸이던 오래전을.

“이제 톰을 향한 증오가 전부 사라졌느냐?”

알렉세이가 물었다. 피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원망해요. 앙금이 다 풀린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어르신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톰이 살면서 저한테 갚아야 할 빚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에요. 그렇다고 해서 톰이 저한테 속죄하길 바라는 건 아니에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게 보여주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차분히 진심을 털어놓는데 마음이 쓰라렸다. 아일라우를 위해서 만들었던, 불에 타버린 모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랑과 그의 가족. 경사를 함께 축하하려고 자리에 모였다가 변을 당한 이름 모를 사람들. 안다. 살면서 때때로 그 사람들의 서글픈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세울 것이다. 행복의 절정, 그들의 비명이 눈을 가릴 것이다. 그러니 잊지 않을 것이다. 가슴 속에 그 사람들의 무덤을 세웠다.

“부탁도 드릴게요.”

피트는 고개를 조아렸다.

“톰을 상처 주지 마세요.”

피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톰은 한심한 남자예요. 자존심이 강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죽는 줄 알아요. 항상 남들한테 잘난 모습만 보여야 하는 줄 알아요. 그래야 사람들이 자길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자기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알아요.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는 사람인데.” 
“…….”
“저러다 속병이 나서 죽어요. 죽으려거든 화창한 봄날에 자식들이랑 손자들 지켜보는 자리에서 눈 감아야지 그렇게 죽으면 안 돼요.”
“…….”
“전 어르신 뜻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제 마음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어르신 마음을 헤아릴 수 있도록 가르쳐주세요. 요령 부리지 않고 배울게요. 톰이 부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제 힘만으로는 안 돼요. 어르신이 도와주셔야 해요.”
“고개 들어라.”

알렉세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매버릭.”
“……네?”

알렉세이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별명에 피트는 깜짝 놀랐다.

“네 친구, 닉 브래드쇼는 널 매버릭이라고 부르더군.”
“네, 맞아요.”

피트는 얼른 대답했다. 알렉세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말했다.

“나도 너한테 부탁이 있다.”
“말씀하세요.”
“우리 집안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느냐?” 
“아…….”

피트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너만 좋다면, 존 브래드쇼에게 너를 우리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정식으로 혼담을 넣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겠다. 네게 간곡히 부탁한다. 가족이 되어다오. 그래야 죽어서 타마라를 볼 면목이 선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내다.”

알렉세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외풍이 스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완고한 얼굴에 망설임과 간절함이 서렸다.

“어르신네 손자를 낳아달라고요? 싫어요.”

피트는 생긋 웃었다. 알렉세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다문 입술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피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 딸이 좋아요. 예쁜 손녀를 낳아드릴게요.”
“고얀 것. 또 나를 골렸구나.”

알렉세이는 맥이 탁 풀렸다.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땀이 배어 나와 축축했다. 오랜만에 긴장했다.

“톰을 닮은 딸이면 아주 예쁠 거예요. 금발에 피부가 하얗고, 입술은 도톰하고.”
“아이는 꼭 낳지 않아도 된다. 너부터 행복해져라.”

알렉세이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였다. 그는 아내를 잃은 그 순간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만남으로 정든 얼굴과 작별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괴로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알렉세이는 그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토록 박제하여 품고 살아가는 남자였다.

“전 언제나 행복해요. 방금 더 행복해졌어요. 아버지를 세 분이나 모시게 됐잖아요.”
“아버지를?”
“네. 친아버지, 존 아저씨, 어르신.”

피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감은 숄이 흘러내렸다. 알렉세이는 말없이 숄을 집어 피트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피트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숄을 단단히 감아주었다. 피트가 작게 딸꾹질했다. 알렉세이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체했다. 조만간. 조만간 반드시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일러둘 것이다.

 
***


톰의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움직일 때마다 뼈가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적어도 갈비뼈가 두 대는 금이 갔을 것이다. 강렬한 햇살도 살을 후벼파는 것처럼 아팠다. 눈이 따가워서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갈비뼈를 부여잡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톰을 보며 론이 안쓰럽다는 듯이 물었다.

“톰, 괜찮나?”
“조금 불편한 것뿐이다.”

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번 일은 어르신이 심하셨어.”

론은 속이 상해서 씨근덕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존 브래드쇼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에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다니. 톰의 몰골이 어찌나 처참한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뺨은 까슬까슬하고, 안색은 창백한데 왼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피에 잠긴 것처럼 시뻘겠다. 아침에 톰의 얼굴을 본 어린아이가 무섭다고 울 정도였다.

“괜히 나서지 마라. 너까지 봉변당해서 코라도 부러지면 어떡할래?”

톰이 점잖게 타일렀다. 론은 답답한 나머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두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말을 묶어둔 곳으로 향했다. 키가 껑충한 닉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 옆에 무어라 조잘대고 있는 피트도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서둘러라. 갈 길이 멀다.”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차림새의 알렉세이가 쌀쌀하게 말하며 말에 올랐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었고, 수염도 보기 좋게 다듬었다. 덥수룩했던 머리카락도 짧게 잘라 다부진 턱선과 곧은 목이 잘 보였다. 일족의 수장이라는 지위 때문인지 그는 서른일곱 살이라는 나이보다 다섯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제 나이로 보였다.

“아버지, 무슨 일로…….”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져 톰은 어안이 벙벙했다.

“존 브래드쇼에게 네 혼담을 넣을 거다. 가는 길에 이고르 형님도 합류하실 거다.”

이고르는 티무르와 옥사나의 차남이다. 부친인 티무르를 빼닮아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넉살이 좋았고, 발이 넓었다. 이고르 카잔스키가 합류한다는 것은 알렉세이가 이 혼담을 진지하게 논할 의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언변이 뛰어난 이고르가 초장부터 잘못 쌓아 벌어진 이 난관을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알렉세이라면 눈앞에 칼날이 들이닥쳐도 하지 못할 말을 이고르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알렉세이는 이고르가 존 브래드쇼를 설득해주리라 희망을 걸었다.

“아버지.”
“이 얘긴 끝났다. 더는 지체하지 마라.”

알렉세이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때, 구불구불한 말의 갈기가 눈에 들어왔다. 간밤에 말의 갈기를 땋아버렸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그는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피트에게 쓴소리를 했다.

“매버릭. 덜 풀렸지 않느냐.”
“그 정돈 직접 푸세요.”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 위에 가볍게 올랐다.

“망할 것.”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즐거워하시는 거 다 알아요. 눈썹이 처졌거든요.”

피트가 킥킥거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살짝 들며 허벅지와 종아리를 조여 타르르크의 몸을 압박했다. 신이 난 타르르크가 앞발을 높게 쳐들었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조심해라. 말에서 떨어진다.”
“제가요? 그럴 리 없어요.”
“방심하지 마라.”
“제가 말에서 떨어진다면, 그건 제가 죽을 날이 됐다는 뜻이에요.”
“불길한 소리도 하지 마라.”

알렉세이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러다 피트가 정말 말에서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피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타르르크가 힘껏 뛰었다. 그 반동에 피트의 귀걸이가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알렉세이는 혀를 차며 앞서나갔다. 홀연히 사라지는 알렉세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말에 올랐다. 그는 간신히 피트를 따라잡았다.

“피트. 어떻게 된 일이지? 아버지께서는 분명 내게…….”
“아버님한테 널 남편으로 달라고 했어. 그게 다야.”

피트는 미소로 진실을 교묘하게 가렸다.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 생기가 넘쳤다. 톰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끙끙 앓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든 것이 허상 같다. 행복이 손에 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도 박동하며 저물었다가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에 겸허해졌다.

“톰.”

피트는 해가 떠오르는 능선을 바라보며 톰을 불렀다.

“응.”
“너한테 매일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주홍빛 동녘이 피트의 초록색 눈동자와 어우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전부 담겼다. 세찬 바람에 두건 밑단에 매단 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꼭 손짓하는 것처럼.

“적어도 30년은 매일. 그래야 죽을 때, 너 때문에 분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아.”

피트는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래 살아.”

피트의 얼굴에 드리워진 빛이 그물처럼 너울거렸다. 약진하는 생명을 전부 사로잡은 그물. 길을 잃고 방랑하는 쓸쓸한 남자를 실어 아침이 부서지는 저 능선 너머 머나먼 미래로 데려가 줄 것이다. 해가 기울고 촘촘한 그물망이 풀어지면, 사랑을 약속하는 무한한 강이 기다리고 있다.

=

뻘설정 

티무르 195cm/옥사나 176cm
알렉세이 192cm/타마라 160cm
톰 183cm/피트165cm-> 170cm

매버릭은 어째 대를 이을수록 카잔스키 남자들 키가 작아지는데 자기 피까지 섞여서 애가 더 작아지면 어떡하지 진지하게 고민 중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3.08 00:36
ㅇㅇ
모바일
와 센세ㅠㅠㅠㅠㅠ 미쳤다 진짜 이걸 읽으면서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미운데 읽는 내내 행복했어ㅠㅠ 피트랑 알렉세이가 대화 나누는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음ㅠㅠ 진짜 따뜻하고 잔잔하고 동시에 힘있는 글 같다ㅜㅜ 톰은 ㄹㅇ 피트한테 잘해라,,, 매일 듣고 싶다는 말 매일 해주란말야..! 혼담 넣으러 가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진짜 너무 생생해서 텍스트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대하 드라마 한편 뚝딱임ㅠㅠ
[Code: 5df6]
2023.03.08 00:48
ㅇㅇ
모바일
미친...난 샌세의 글을 읽을 때 행복해...
[Code: f9b2]
2023.03.08 01:36
ㅇㅇ
모바일
미친...너무좋아...이 센세는 예술을 쓰신다.....막문단까지 진짜 감탄하다가 좋아서 울다가 은은한 찌통에 짠해지다가 너무 좋아요 센세
[Code: dd0a]
2023.03.08 01:47
ㅇㅇ
모바일
와씨 톰 카잔스키 겁나 부럽다 저런 반짝이는 원석을 평생 끼고 살며 찬란하게 빛나는 것까지 다 볼 거 아냐 부럽다
[Code: d39e]
2023.03.08 10:00
ㅇㅇ
모바일
벌써 2세 키 걱정하냐고ㅠㅠㅠㅠㅠㅠㅠ아 너무 좋다 진짜
[Code: 0e0b]
2023.03.08 11:30
ㅇㅇ
모바일
진짜....어떡해요 센세 나붕 지금 너무좋아서 입가에선 미소가 안떠나고 그냥 아무말도 못하겠어요.....센세는...센세는 나붕만의 보석이야....센세는..진짜 최고야...진심으로...진짜....
[Code: f46e]
2023.03.09 01:21
ㅇㅇ
모바일
톰 카잔스키 당장 매시간 3번씩 피트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복창하도록 실시
[Code: 5d57]
2023.03.10 13:24
ㅇㅇ
모바일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Code: e53a]
2023.03.20 00:43
ㅇㅇ
모바일
와..... 톰 입장에선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을텐데 다음날에 해결이 되어버렸대 진짜 안믿길듯ㄹㅇㅋㅋㅋㅋ 피트야 말 너무 잘해서 놀랐자나.. 어떻게 누가 들어도 기특해 할 말 만 하냐 감탄이 절로 나옴 크 결국엔 알렉세이가 먼저 가족이 되어 달라고 말 꺼내게 만들고 큰 일 했다... 어름아 매브 평생소원 들어줘라
[Code: 5681]
2023.04.02 07:05
ㅇㅇ
모바일
조만간 찐 사이버지한테 잔소리 듣게 생겼구낰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알렉세이랑 피트 독대하는 부분 긴장하면서 봤는데 진솔하고 영특한 피트덕에 잘 풀렸네 남편으로 달리고 했데 ㅋ ㅑ
[Code: e75e]
2023.04.18 12:39
ㅇㅇ
모바일
아니 이거 진짜 돈주고 봐야되는 것 같아ㄷㄷㄷㄷ센세 사랑해 고마워ㅠㅠㅠㅜ개개개존잼
[Code: 10ce]
2023.04.27 01:23
ㅇㅇ
모바일
붕키는 이미 사랑을 약속한 무한한 강에 정수리까지 푸욱 잠겨있어요 센세ㅠㅠㅠㅠ아 너무 좋아ㅠㅠㅠㅠ
[Code: c987]
2023.05.25 05:58
ㅇㅇ
모바일
ㅠㅠㅠㅠㅠ허으ㅡ흐르으아ㅏ인 나 이 가족 너무 좋아 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e41]
2023.08.09 13:36
ㅇㅇ
모바일
허어억 센세ㅠㅠㅠㅠ 피트는 정말 겨울을 무찌르는 봄처럼 강인하고 싱그럽구나ㅠㅠㅠㅠ 이 빛에 알렉세이와 아이스 모두 따라갈 수 밖에 없는거겠지ㅠㅠㅠㅠ 아이으 능력있고 강인하묜서도 상처투성이인데 생명력 가득한 피트와 함께 치유되고 행복해지길ㅠㅠㅠㅠㅠㅠ
[Code: 1b90]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