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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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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17. 새순


“피트, 안에 있어요?”
“네. 들어와요.”

천막 안으로 들어간 키르케는 바뀐 벽걸이를 보고 감탄했다. 천막 안은 벌써 봄이 찾아왔다. 진홍빛 행렬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피트는 호방하구나. 키르케는 뒷짐을 지고 벽걸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외풍을 막고,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거는 벽걸이는 주인의 안목과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물건이다. 벽걸이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어머, 벽걸이 바꿨네?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강렬한걸.”

키르케는 벽걸이를 매만졌다. 흔히 벽걸이로 쓰는 천은 아니었다. 거칠었다. 그래서 바위와 매, 그리고 산양 문양이 더 돋보였다. 수를 놓은 실도 투박했다. 험준한 절벽 위에 선 듯했다.

“네, 날씨가 따뜻해져서…….”
“벽걸이 걸 때 얘기하지 그랬어요.”

키르케가 방긋 웃었다.

“이 정도는 저 혼자서도 거뜬히 할 수 있어요.”

피트는 두 손을 내저었다. 혼자서도 세 사람 장정 몫은 거뜬히 해내는 일손. 피트의 자랑이었고, 그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피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슨 일이든 악착같이 해냈다. 집안이 변변치 않고, 물려받은 재산도 얼마 되지 않는 그가 사람들에게 배척받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제 말뜻은 같이 골랐으면 더 즐거웠을 거란 뜻이에요. 살림은 여러 사람 손을 타는 게 좋다잖아요?”
“카펫도 다른 걸 깔고 싶은데, 그땐 키르케를 부를게요.”
“좋아요. 그런데 저도 저지만, 톰한테 물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쨌든 같이 살 맞대고 사는 사람인데.”

키르케는 피트의 삐져나온 귀밑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만지작거렸다. 피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 주인은 카잔스키니까……. 제 생각이 짧았네요. 벽걸이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야겠다. 허락 안 받았거든요.”

피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펫은 어떤 걸로 바꿀까, 즐거운 고민에 푹 빠졌는데 흥이 다 식어버렸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즐거웠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 여러 차례 벽걸이를 바꿔 거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뿌듯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네.”
“네?”
“좋아요, 하나씩 차근차근히 해 보자고. 모자는 다 만들었어요?”

키르케는 허리를 양손으로 짚고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네. 모피로 모자를 만든 건 처음이라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살던 곳은 여기만큼 춥지 않아서 조끼면 몰라, 모자까지 모피로 만들진 않거든요.”
“어디 봐요.”

피트는 선반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구석에 숨겨 둔 상자를 꺼냈다. 톰에게 들킬까 봐 모자를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놨다. 키르케가 눈을 반짝였다. 피트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상자를 열었다. 실타래와 자질구레한 옷감 위로 모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보기 드문 검은 여우의 모피를 댄 모자였다. 털이 촘촘했고,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러웠다. 여우 모피는 냄새가 썩 좋지 않은데, 모자에 쓴 모피는 좋은 냄새도 났다. 옥사나가 준 모피였다. 옥사나는 피트가 이 혹독한 땅의 매서운 추위를 탈 없이 견디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뜻 내주었지만, 피트는 톰의 모자와 조끼를 만드는 데 전부 써버렸다. 조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키르케는 모자를 들고 꼼꼼하게 살폈다. 언뜻 보기에는 검박하고 단정한 듯하지만, 손이 대단히 많이 간 물건이었다. 이 작은 모자 하나에 비단실이 적어도 여섯 개는 쓰였다. 채도가 다른 은회색 실을 여러 개 써서 불빛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은빛 별무리로 보였고, 가까이서 보면 그 각기 다른 생김새가 낱낱이 드러났다.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키르케는 시선을 피트의 손으로 슬그머니 옮겼다. 손끝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바늘로 찔린 자국도 보였다. 키르케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피트의 눈동자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


피트는 모자를 가슴에 품고 힘껏 달렸다. 톰이 론과 함께 강가로 목욕을 하러 갔다고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곧 만날 수 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뿌듯한 건 오랜만이었다. 키르케는 피트가 만든 모자를 보고 자신이 본 모자 중에 가장 멋지다고 말했다. 키르케는 타타흐 사람 중에서 자수 솜씨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니, 이만하면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다.

저 멀리,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물방울이 날갯짓했다. 톰과 론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웃옷을 벗고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피트는 톰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숨소리까지 죽이며 몰래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눈이 부신 햇살 아래 물에 흠뻑 젖은 탄탄한 나신을 보고 피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찔한 광경에 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다 건장했다. 체격은 론이 더 컸지만, 톰도 그 못지않게 몸이 좋았다. 골격이 크고 반듯했다. 넓은 등과 어깨에 주근깨가 흩뿌려졌고, 기다란 팔은 잔근육이 조밀하게 잡혀 단단했다. 가슴에는 체모가 햇살을 받아 빛났다. 머리카락처럼 밝은색이었다.

그들이 힘껏 물을 퍼 올릴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렸다. 힘차게 박동하는 생명. 젊음이 찬란했고 야성이 넘쳤다. 피트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자꾸만 시선이 갔다. 톰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 무심코 저 품에 안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쳤나 봐. 피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뭐지? 톰, 저기 저거 네 신부 아니야?” 

바위 위로 삐죽 튀어나온 새카만 정수리를 발견하고 론이 우뚝 섰다. 그는 눈썰미가 좋았다. 시력도 매처럼 좋았다. 아주 멀리 떨어진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긴 토끼 한 마리도 거뜬히 발견했다. 톰은 물기로 흥건한 손을 털어내며 론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트! 너 거기서 뭐해!”

론이 손을 입에 갖다 대고 크게 외쳤다. 이래서야 더는 몸을 숨길 수도 없다. 피트는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네가 여기 오면 어떡해? 여긴 남자들 씻는 곳이라고.”
“볼 것도 없는데 유난 떨지 마. 그리고 나도 남자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나 톰이랑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듣기로는…….”

론이 말끝을 흐렸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바자르에서 주워들은 꺼림한 말로 괜히 톰과 피트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본 적도 없는데 확신해? 그럼 어디 직접 보고 지껄여 봐.”

발끈한 피트가 대뜸 옷을 벗기 시작했다. 론은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인마! 너 뭐 하는 짓이야? 워어,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이스! 네 신부 좀 말려라!”
“슬라이더, 눈 감아.”

톰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말했다.

“진작 눈 감았다.”

론은 그도 모자라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톰은 옷을 벗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피트를 말리느라 진땀을 쏟아냈다. 톰이 간곡하게 애원해서 다행히 피트는 고집을 꺾었지만,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론을 노려보며 허튼 말을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 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철부지구먼.”

론은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뜨겁고 길었던 달 기우는 밤을 보냈으니, 이제 좀 차분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허튼 꿈이었다. 아마 피트는 늙어도 저 성미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론은 물 밖으로 나와 벗어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톰도 뒤따라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피트. 길이라도 잃었어?”

톰이 자상하게 물었다.

“아니. 너 찾았어.”
“나? 무슨 일이야.”

톰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웠다. 몸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발을 까딱거렸다. ‘얼씨구…….’ 론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며 속으로 씨근거렸다.

“자.”

피트는 가슴 속에 감췄던 모자를 꺼내 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모자. 보면 몰라?”
“그래, 안다. 그런데 이건 왜?”
“구스 모자를 만들었는데, 천이 좀 남아서 네 것도 만들었어. 아깝잖아.”

피트는 일부러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손이 빠른 사람은 하루 이틀이면 만들 모자를 꼬박 보름을 붙잡고 있었단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생색을 내기 싫었고, 그 사실을 알면 톰 카잔스키가 기분이 들떠서 으스대는 꼴을 보기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만한데, 턱을 들고 호령하는 꼴을 어떻게 잠자코 보겠는가. 그러니까 이 모자는 닉의 모자를 만들다가 짬짬이 만든 것이어야만 했다. 실은 닉의 모자는 만들지도 않았다. 모자에 어울리는 조끼가 떠올라서 그걸 붙잡기 시작했다.

“고맙다.”

톰은 갓난아기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모자를 매만졌다. 그는 피트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이 모자를 만들었는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가장이라면 집안의 대소사를 훤히 꿰고 있어야 하고, 여인들 고달픔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옥사나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를 놓을 때마다 옆에 톰을 앉혀놓고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톰은 비록 직접 옷을 짓고 수를 놓는 재주는 없지만, 보는 눈은 제법 좋았다. 빗집 하나를 만드는 데도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지도 잘 알았다.

“마음에 안 들면 안 써도 돼.”
“아니다. 마음에 들어. 그렇지 않아도 새 모자가 필요했는데, 정말 고마워. 머리가 다 마르면 바로 쓸게.”
“무슨 소리야, 톰. 이틀 전에 할머님이 새 모자를 만들어 주셨잖아?”

론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적 없어. 네가 착각했겠지.”

톰은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착각이라고?” 론이 신발과 검을 둔 자리를 흘끔 보며 되물었다. 곧 봄이라며 옥사나가 만들어 준 새 모자가 있었다. 톰은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두 팔을 들었다.

“그냥 써 봐. 어떤지 눈으로 봐야 알지.”

피트가 말했다. 톰은 잠깐 망설이다가 머리 위에 모자를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기껏 피트가 만들어 준 모자인데, 망가트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마음만 같아선 품에 간직하고 다니다가, 피트가 생각이 날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었다.

“어때?”
“크거나 작진 않네.”
“보기에 괜찮아?”
“밉진 않아.”

톰의 질문에 피트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모자는 톰에게 잘 어울렸지만, 막상 그가 쓴 모습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좀 더 큼지막한 문양을 쓸걸, 완만하게 모양을 잡을걸. 톰은 이목구비가 화려하고 턱이 단단해서 그쪽이 더 어울렸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색은 마음에 들었다. 키르케의 조언을 듣길 잘했다. 다음에는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피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있잖아.”

피트는 슬며시 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벽걸이 바꿔도 돼?”
“벽걸이?”

톰은 고개를 숙여 피트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피트는 톰의 귀에다 손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응. 날씨가 따뜻해져서 좀 밝은색을 걸면 보기 좋을 것 같아. 화사할 거야.”
“얼마든지. 새 벽걸이를 사다 줄까? 원하는 게 따로 있어? 질감이나 색이나, 뭐든.”
“아니야. 그런 데 괜한 돈 쓰지 마. 정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만들면 돼. ……카펫도 바꿔도 돼?”

피트는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피트의 태도에 톰은 기뻤다. 조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톰은 피트에게 이 세상에 값진 것을 전부 주고 싶었다. 하늘도, 땅도, 수천 마리의 양도, 지칠 줄 모르는 말도. 세상에 아름답고 애틋한 것은 모두 피트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그럼. 네가 보기에 좋은 걸로 바꿔라. 그런 살림살이는 네 눈이 닿는 곳이니까, 보는 네 마음에 들어야 좋다.”

톰은 더는 온몸을 송두리째 잠식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실실 웃는 그를 보고, 론이 몰래 토하는 시늉을 했다.

“너는?”
“나?”
“그래, 네가 보기에는…… 몰라, 네 취향이 어떤지. 내 마음엔 드는데 네 마음엔 안 들면 어떡해?”

피트가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톰은 얼른 그의 어깨를 다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이게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도 너와 같아.”
“사실 벽걸이는 이미 바꿨어. 카펫은 좀 더 생각해볼게. 그럼 난 간다!”

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톰의 콧잔등을 딱 튕겼다. 그리고 톰이 자신을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얼른 몸을 뒤로 빼냈다. 톰은 아쉬운 마음에 빈손을 쥐락펴락했다.

“어디 가?”
“쿨라 보러. 쿨라는 정말 멋있어. 늙어서 털이 좀 바랜 것도 멋져. 의젓하고, 믿음직하고. 사람이라면 반했을 거야.”

피트는 뒷짐을 지고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러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덩달아 흔들렸다. 톰은 자신의 손으로 피트의 머리카락을 풀고 쓸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굽이굽이 물결 이는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 설레는 환상.

“또? 설마 아버질 보러 가는 건 아니지?”

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에게 맞설 만큼 당차고 배짱이 좋은 신부를 원했다.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의미 없이 내뱉은 숨소리 하나에도 사람들이 벌벌 떨 정도로 위압적인 아버지에게 거침없이 들이받을 수 있는 그런 신부를. 피트가 알렉세이와 격 없이 지내는 건 좋은데, 어찌 된 까닭인지 자신보다 아버지를 더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게다가 단둘이 나가는 일도 잦았다. 불편했다. 괜히 화가 났다.

“어르신이 목양견 훈련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대.”
“그건 나도 가르쳐줄 수 있는데. ……쿨라가 마음에 들어?”
“응.”

피트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쿨라도 괜찮은 놈이지만, 하길라도 쓸만해. 왜, 주둥이가 길고 눈썹이 누런 놈 있잖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놈이라, 훈련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하길라랑 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하길라를 데리고 갈게. 내가 가르쳐줄게.”
“됐어, 어르신이랑 벌써 약속했는걸. 넌 네 볼일 봐. 갈게.”

피트가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매버릭.”

톰은 앞으로 뻗은 손을 차마 거두지 못했다. 피트의 뒷모습이 점점 더 작아졌다. 이내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톰은 힘없이 손을 내렸다. 아쉬움에 입이 바짝 말랐다. 피트는 신기루 같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점점 더 그를 갈망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톰은 애꿎은 땅만 걷어찼다. 피트를 사로잡는 것보다 맨손으로 늑대를 때려잡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이야, 쟤는 마음이 있으면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서툴지만 괄괄한 게 꽤 귀엽네.”

론이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건들거렸다. 그가 보기에 톰과 피트의 미래는 지금 이 따사로운 햇볕과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칼을 겨누며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던 피트가 아닌가. 이제는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고, 모진 말을 퍼붓지도 않는다. 이만하면 좋은 징조다.

“내 아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톰이 쌀쌀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나저나 역시 몸이 열리면 마음도 열린다더니. 그동안 고생 많았어, 톰.”

론은 멋쩍게 웃으며 톰의 등을 툭툭 치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톰의 얼굴이 어딘가 떨떠름했다. 겸연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듯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듯한 복잡한 표정.

“표정이 왜 그래?”

론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톰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열없이 웃었다.

“뭐?”

론은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매버릭이 두려워해서 안지 않았어. 아내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안고 싶지 않아. 우리는 아직 젊고 한창때야. 매버릭이 준비되거든 그때 아이를 가져도 늦지 않아.”
“발정기였잖아. 발정기! 그게 뭔 줄 몰라? 애 가질 때 됐다고 오는 거다, 발정기! 네가 바라던 일 아니었나? 짝짓기 철이면 개도 짝을 맺는다.”

론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했다.

“너무 노골적인데. 듣기 거북하군.”

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톰의 다리 사이를 힐끔 보며 넌지시 물었다.

“아이스, 너 설마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
“나는 건강해.”

톰이 드물게 발끈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그래, 그건 아니겠지.” 론은 흠흠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뺨을 찌르는 톰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래, 그 대단한 물건이 보기만 좋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 세상이 너무 각박한 거지.’ 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두 사람은 신발을 신고 검과 잡다한 물건도 마저 챙겼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희망에 찬 노래를 속삭였다. 귀가 간질거렸다. 그들은 동쪽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아이스.”
“어.”
“곧 봄이잖아.”
“그렇지.”
“날이 따뜻해져도 그 모자 쓰고 다닐 거야?”

론은 톰이 손에 쥔 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름에도 쓰고 다닐 거다.”

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뇌가 익어도 난 모른다.”
“참견하지 마라.”
“아니다. 날이 따뜻해지면 또 새 모자를 만들어 줄지도 모르잖아.”

론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톰은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이봐.” 하고 말하며 론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손을 까딱거렸다. 톰도 제자리에 섰다. 론은 모자를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어디 보자…… 이야, 솜씨가 좋네. 잘 만들었어, 아주. 내 것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피트가 왜 네 모자를 만들어줘?”

톰이 볼멘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왜?”
“나의 형제여, 너무나도 즐겁구나.”

론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론은 아예 배까지 잡고 웃어댔다. 땅이 울릴 정도였다. ‘날 골리는 거군.’ 톰은 이를 으득 갈았다. 모자가 찌그러질까 봐 손에 힘을 주진 않았다.

“이봐, 톰. 네가 좋은 아내를 얻어서, 그리고 그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돼서 정말 잘됐어. 나도 더없이 기쁘다. 이제 너도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사랑이라고?”
“그래,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사랑. 그 말을 곱씹으며 톰은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이라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피트의 달 기우는 밤이 끝난 아침, 알렉세이가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때때로 홀로 초원으로 나가 저무는 별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 그의 가슴 속에 사무친 영원한 사랑. 살아서는 떨쳐낼 수 없는 아득한 눈동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절멸하고 홀로 남은 것처럼.

 
***


쿨라와 피트는 연인처럼 친근했다. 피트가 커다란 나뭇가지를 저 멀리 던지면, 쿨라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왔다. 피트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힘껏 잡아당기면 쿨라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악착같이 이를 물었다. 풍성한 꼬리가 강풍에 나부끼는 것처럼 쉬지 않고 흔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아예 볕이 잘 드는 곳에 벌렁 드러누워서 함께 뒹굴었다.

“개를 훈련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나.”

알렉세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피트가 제멋대로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정도가 심했다. 자길 두려워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상대는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듯한데, 좋아해야 할지 불쾌하게 여겨야 할지 긴가민가했다.

“조금만 더 놀고요.”
“일없으면 나는 가보마.”

알렉세이가 휙 돌아서자 피트는 얼른 달려가서 그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가지 마세요, 다 놀았어요. 이제 가르쳐주세요. 얌전히 잘 배울게요.”

옷깃을 질질 잡아당기는 모양새가 쿨라가 나뭇가지를 물고 늘어지는 것과 똑같았다. “어르신, 어르신. 제발요. 네?” 하고 피트가 응석을 부렸다. “하아…….” 알렉세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트를 뿌리치려고 그의 손을 잡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멈칫했다.

“손이 차갑다. 추우냐?”
“아니요.”
“원래 손발이 차가운가 보군.”

알렉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 끼운 장갑을 꺼냈다.

“타마라도 그랬지.”

알렉세이는 피트의 손에 장갑을 끼워줬다.

“어르신 장갑은 저한테 너무 커요.”

피트는 헐렁한 장갑을 흔들면서 투덜거렸다. 알렉세이의 눈에 피트가 착용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들어왔다. 남쪽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화려하고 섬세한 장신구를 착용하는데, 피트의 장신구는 소박했다. 투박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세공은 엉성했고, 보석도 질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아마도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그러겠지. 알렉세이는 착잡했다. 젊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부리는 게 보기 좋다. 알렉세이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서 제 눈에 보기 좋은 것은 전부 타마라에게 선물했다. 타마라가 몸이 무거워서 뛰지도 못하겠다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래도 한사코 그녀의 품에 온갖 아름다운 보석을 안겨주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치장하는 데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아름다움을 뽐낼수록 좋다. 모두가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

“곧 봄이 온다. 톰한테 장신구를 사달라고 말해라. 봄에는 홍옥이나 비취로 만든 장신구가 잘 어울린다. 너한텐…… 비취가 더 어울리겠군.”
“톰은 어르신을 닮았네요.”

피트는 작게 웃었다.

“그래. 안쓰러울 정도로. 제 어미 얼굴을 빼닮은 것처럼, 성격도 닮았더라면 사는 게 그리 힘들진 않겠지. 타마라는 마음이 너그럽고, 들꽃 한 송이에도 기뻐하는 소박한 여자였으니까.”

타마라. 내 생명의 불꽃, 봄의 단비, 여름의 신록, 영원한 청춘.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비록 그녀의 육신은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녀의 다정한 미소와 싱그러움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마라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르신이랑 톰은 욕심이 많아요?”
“아주 탐욕스럽지. 만족할 줄 모른다.”

알렉세이는 자조했다.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미소였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요. 욕심이 없으면 사는 데 아무런 불만도 없고 뭘 바꿀 생각도 안 들거든요. 불만이 있어야 뭐든 하고, 그런 사람들이 대대로 이름을 남겨요. 어르신도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으세요?”

피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라면 그런 각오로 살아야지.”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계속 욕심 많고 심술궂게 사셔야지. 남들 원망 많이 산만큼, 오래 사실 거예요.”
“너는 정말 건방지구나. 얌전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꾀를 부리고, 말하는 것도 그래. 듣기 좋은 말인가 하면, 독이 있다. 참 영악하기 짝이 없어. 이런 건 천성이라 고쳐 쓰지도 못해.”
“그래서 싫으세요?”

피트의 곧게 뻗은 눈썹이 휘어졌다. 무뚝뚝하고 엄격한 사람을 골리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알렉세이가 저 때문에 얼굴을 찌푸릴 때마다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됐다. 고생이야 어디 내가 하겠나. 톰이 애를 먹겠지.”

알렉세이는 모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태함. 꼭 한여름 나무 그늘에 누워 세상 시름일랑 모두 잊고 늘어지게 낮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겁 없고 시건방진 어린애가 신통한 재주가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살살 어루만지는 그런 재주. 보기 드물고 값진 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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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알렉세이 제때 결혼해서 서른일곱살임
어르신 소리 듣고 있고 톰은 늙었다고 노망났다고 뭐라 하지만 사실 젊음
2023.02.24 09: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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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때마다 존잼 알렉세이가 핫중년이라 아이스가 견제하는구낰ㅋㅋㅋㅋㅋ 찐 어르신이였으면 안 그랬겠지
[Code: 815e]
2023.02.24 10:13
ㅇㅇ
쭈뼛쭈뼛하는 매브 ㅈㄴ사랑스럽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223]
2023.02.24 11: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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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앙아앙 야밤에 내 센세가 왔다가셨잖아 ㅅㄹㅅㄹ
[Code: f213]
2023.02.24 12: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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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글몽글 봄 같은 글 고마워 선세!
[Code: 1d2a]
2023.02.24 17: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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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너무너무 재밌어 센세 간질간질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ㅠㅠㅠㅠㅠㅠㅠㅠ 피트가 알렉세이와 사이 좋은 것도 보기좋아 ㅠㅠㅠㅠ 얼른 톰이 피트에게 장신구 선물해줬으면 ㅠㅠㅠㅠㅠㅠㅠ
[Code: 9684]
2023.02.24 18: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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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귀걸이 산 거 안줬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아이스야 참 자각이 늦구나 그 염병을 떨고서도 아직 사랑인 줄을 모르다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긴 쟤도 기껏해야 스무살 애니까 뭐 .....? 근데 아부지 나이 ㄹㅇ 충격적이넼ㅋㅋㅋㅋㅋㅋ 중장년으로 상상하고 봤는뎈ㅋㅋㅋ앜ㅋㅋㅋㅋㅋㅋㅋ 견제 인정ㅋㅋㅋㅋㅋㅋ너무웃겨
[Code: 29f3]
2023.02.24 22: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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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악 진짜 너무너무너무좋다...
[Code: 9ffe]
2023.02.27 15: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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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반전!!!! 알렉세이 서른일곱!!!!물론 저때의 서른일곱과 지금의 서른일곱을 같이 생각하면 안되겠지만ㅋㅋㅋㅋㅋ왜 이리 좋죠ㅋㅋㅋㅋ한층 더 맛있어 졌습니다ㅋㅋㅋㅋ알렉세이 나이 보니 아이스는 아직 애샛기긴 하네요ㅋㅋㅋㅋ왜 저리 매브가 새엄마가 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나 했더니ㅋㅋㅋㅋ그리고 아이스가 사랑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저어하는게 아이스가 본 사랑이 저렇게 고독하고 처절한 형태였으니...ㅠㅠㅠㅠㅠ사랑의 실체를 보기 전에 본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버지의 끝간데 없는 고독이었으니 이미 매브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랑 자체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네요ㅠㅠㅠㅠ
[Code: 7db3]
2023.03.11 00: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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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피트랑 알렉세이 대화하는 부분 넘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fc06]
2023.04.02 05: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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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벽걸이랗 카펱 허락받는 피트 너무 귀여워!!! 아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렉세이는 톰나이때 이미 톰이 두세살이였구만!!톰 얼른 서둘러라!! 시아버지랑 정을 쌓아가는 피트 너무 보기좋네요ㅋㅋㅋ톰 긴장타라...
[Code: 7892]
2023.04.17 23: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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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ㄷㄷㄷㄷ37..17...톰이 우려할만하군ㅋㅋㅋ
[Code: 30d4]
2023.05.25 04: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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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진짜 너무 귀엽다 센세ㅠㅠㅋㅋㅋ근데 알렉세이 너무 젊은거 아니야?ㅋㅋㅋㅋㅋ알렉세이도 멋있다 순정남
[Code: dad1]
2023.08.09 12: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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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렉세이랑 피트 같이 있을때 그저 웃긴데 또 아이스가 즈그 아부지 견제하는게 이해되기두 하고ㅋㅋㅋㅋㅋㅋㅋ 아이스도 너무 귀엽다ㅋㅋㅋㅋㅋ 근데 사랑을 너무 두려워말길ㅠㅠ
[Code: 2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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