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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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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6. 몽상가


옥사나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차가운 물이 담긴 대야에 담갔다. 흠뻑 젖은 수건을 비트는 옥사나의 손은 그녀의 성정만큼이나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옥사나는 차가운 수건을 피트의 이마에 올렸다. 피트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결에 흘리는 앓는 소리가 안쓰러웠다. 드문드문 찾는 이름은 낯설었다.

병이 날 만도 하지. 옥사나는 혀를 찼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정신을 놓지 않은 것이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그 어떤 말도 피트 미첼에게는 조롱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니 옥사나는 괜한 말을 아끼기로 했다.

피트의 곁에 남겠노라고 고집을 부리는 톰을 쫓아내고, 옥사나가 병구완을 자처한 까닭은 두 가지였다. 톰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 주인공인 그가 빠질 수 없었고, 설혹 톰이 피트 곁에 머문다 한들 그들 사이는 더 악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톰과 피트의 관계는 더더욱 그랬다.

앳된 얼굴이 옥사나의 기억 속 그리운 얼굴과 닮았다. 옥사나는 잠든 피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무 일찍 슬픔을 알고, 너무 일찍 체념을 배운 얼굴이다. 좋은 시절이라면 마냥 천진했겠지만, 삶은 언제나 메마른 초원과 같다.

“구스…….”

피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옥사나는 피트의 손을 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일어났느냐.”
“누구세요?”

피트가 가물가물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얼굴과 처음 듣는 목소리에 당황한 것도 잠시,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옥사나의 눈이 축축이 젖어서이니 했다. 주름지고 투박한 손은 따뜻했다. 피트는 잠결에 어렴풋이 느꼈던 부드러운 손길의 주인공이 옥사나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난 옥사나 카잔스키다.”
“톰 카잔스키의 어머니 되세요?”
“그런 말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단다, 얘야.”

옥사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옥사나는 시답잖은 아부에 기뻐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감히 그녀에게 시시한 말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도 없었다.

“네?”

피트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꾸밈일랑 모르는 무구한 표정이었다.

“아부는 못 하는 성격이군.”

옥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피트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옥사나의 기분이 들뜰 일은 없다만.

“나는 톰의 할머니다.”
“아.”

피트는 말끝을 흐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원수의 조모이니 원수나 마찬가지인 셈. 하지만 피트는 웃어른이나 존경받을만한 사람에게는 깍듯했고, 이렇게 몸져누워있는 게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엄정한 옥사나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옥사나는 피트의 어깨를 눌러 그를 도로 자리에 눕혔다. 힘이 좋았다. 양 한 마리는 너끈히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트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옥사나가 워낙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누웠다.

“이 자수, 네가 직접 수 놓았느냐?”

옥사나가 피트의 웃옷에 수놓은 문양을 가리켰다.

“네.”
“오랜만에 보는 문양이군.”
“이 문양을 아세요?”
“알다마다. 내 친정에선 산양을 이렇게 수 놓았지.”
“어떻게…….”

피트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일족이 모두 죽고 난 이후로 이 문양을 알아본 사람은 처음이었다. 피트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문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피트의 손끝이 아주 야무지다며 분명 좋은 신랑감을 만날 거라고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네 외조모 파르메나는 나와 사촌지간이었다. 파르메나는 몽상가였지. 노래를 아주 잘 불렀고,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었어. 네 얼굴을 보니 파르메나 생각이 난다. 그래, 파르메나도 너처럼 눈동자가 녹색이었다. 얼굴이 아주 예뻐서 그 애가 지나가면 남자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어.”

파르메나는 초여름 같은 사람. 새벽이슬을 머금은 푸른 초원. 뭉게구름 같은 양 떼에 에워싸여 지저귀는 새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 싱그러운 미소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어제와 같이 생생했다.

“엄마도 제가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어요.”

피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웃음이 많고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피트를 무릎에 앉혀두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외할머니는 어린 피트의 이상 속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녀가 되었다.

“너도 파르메나처럼 꿈을 꾸는 걸 좋아하니?”
“네. 하지만 이젠…… 안 꿀래요. 어차피 제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니까요.”
“현명하구나. 삶의 목표는 꿈을 꿀 때가 아니라 깨어있을 때 이룰 수 있는 거란다.”

옥사나가 차갑게 말했다. 파르메나가 옛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랑을 꿈꿀 때, 옥사나는 쇠약한 가축을 잡아 다가올 겨울을 대비했다. 파르메나가 남편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때, 옥사나는 남편에게 영원한 신뢰를 약속했다. 물과 기름처럼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옥사나는 파르메나를 사랑했다.

“제 목표가 뭔지는 아세요?”

피트가 물었다. 옥사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트는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옥사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피트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과연 톰 카잔스키의 조모였다. 맹렬한 들불 앞에서도 초연할 사람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일주일을 달리면 제르메갈 부족이 있다. 족장인 하길드는 내 아들 알료샤와 앙숙이다. 하길드의 삼남은 모자란 놈이라 다들 차남인 세나메브가 뒤를 이을 거라고 말하지. 달리 더 알고 싶은 게 있느냐?”
“세나메브라고 톰 카잔스키와 다를 게 있나요?”
“너와 이해관계는 통하겠지.”

옥사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피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못 할 거야 없지만, 이래서야 입맛이 영 쓰다.

“어르신 말씀대로 세나메브가 장차 제르메갈 부족의 우두머리가 될 남자라면…… 눈앞에 작은 토끼를 잡겠답시고 살찐 여우를 놓치진 않겠죠. 그리고 지금 전 작은 토끼만큼의 가치도 없어요.”
“가능성은 늘 염두에 둬라. 네가 크게 되길 기대한다.”

만약에 피트가 세나메브 하마르의 아내가 된다면, 피트를 단단히 사로잡지 못한 자신의 손자가 못난 탓이다. 제르메갈 부족의 말발굽에 짓밟힐 운명이라면 더는 초원을 누빌 자격이 없으니 재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톰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톰을 향한 옥사나의 신뢰와 기대는 절대적이었다. 옥사나는 단지 절망의 수렁 속에서도 기어이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고 싶었고, 피트가 삶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길 바랐다.

“어르신은 자하로프보다 카잔스키로 훨씬 더 오래 사셨잖아요.”
“그렇지.”
“저를 잡으시려면 덫을 놓는 게 아니라 활을 쏘셔야 할 거예요.”
“착한 아이구나.”

옥사나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요?”

피트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럼. 어른의 말을 공손히 듣고, 네 소신을 말할 줄 알잖느냐.”
“건방진 게 아니라요?”
“소신을 밝히는 것과 건방진 건 다르지. 건방진 걸 귀엽게 보는 사람도 있다만, 나는 아니다. 하지만 쓸데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풀이 죽은 모습을 보는 것보단 건방진 쪽이 낫다.”

옥사나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톰 카잔스키도 어르신과 같나요?”
“그 애는 나를 많이 닮았지.”

피트의 눈이 반짝였다. 그 머릿속이 눈에 훤히 보였다. 당장에 곡기부터 끊고, 매일 곡소리를 내고, 가뭄에 메마른 땅처럼 말라가길 자처할 작정이겠지. 옥사나는 피트의 어깨까지 이불을 올려주며 충고했다.

“일부러 청승을 떨 생각이면 관둬라. 늑대가 풀만 뜯다가는 죽는다. 자, 다시 눈을 붙이렴.”

옥사나는 피트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피트의 눈꼬리에 눈물이 어룽어룽 고였다. 그리운 자장가였다. 수십,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입과 입을 통해 대대로 내려온 오래된 노래.



7. 새끼 양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끼니를 때우는 일은 자연의 섭리다. 살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고, 잠을 잔다. 태어나면서부터 깨우친 단순한 이치였다. 풍요롭지 않은 환경이니 먹을 것으로 사치를 부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침은 대개 빵과 치즈, 따뜻한 차로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는다. 식욕이 왕성한 사람은 잠도 깨지 않은 채로 고기를 찾지만, 피트는 아니었다. 며칠 동안 카잔스키를 거덜 낼 작정으로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치우긴 했지만, 슬슬 한계였다. 밤새 고열에 끙끙 앓다가 겨우 열이 내린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톰이 쟁반 가득 들고 온 아침 식사를 코앞에 두고 피트는 입이 까끌까끌했다. 꼭 모래를 잔뜩 씹은 것만 같았다. 속이 메스꺼웠고, 머리가 조금 아팠다. 톰을 내쫓고 싶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보란 듯이 바싹 구운 고깃덩이를 집어다가 단도로 슥슥 잘랐다.

“뭐 하는 거야?”
“다쳤잖아.”

피트가 묻자 톰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왼손으로 먹으면 돼.”
“해주고 싶어서 그래.”
“마음대로 해.”

피트는 툭 내뱉고는 왼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는데, 따뜻한 차 한 모금을 홀짝이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물론 눈앞에 어른거리는 톰의 얼굴은 여전히 싫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톰은 고기를 자르는 데 열중했다.

“내가 새야? 고기를 왜 이렇게 잘게 쪼아?”

접시 위에 잘게 썰린 고기 조각을 가리키며 피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미안. 너는 입이 작아서 크게 자르면 삼키기 힘들 줄 알았다.”
“날 화나게 하고 싶어?”
“아니. 넌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야나를 보며 웃는 얼굴, 예뻤다.”
“…….”
“다시 보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하면, 나한테도 그렇게 웃어줄 수 있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톰이 직설적으로 나올 때마다 적잖이 당황스럽다. 피트는 고개를 돌렸다. 네가 혀를 깨물고 죽는 꼴을 보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렇게 말하려다가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져서 관뒀다. 대신에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음.”
“뭐 해? 먹여준다며. 아.”

피트가 재촉하자 톰은 허둥지둥 잘게 썬 고기 한 조각을 피트의 입에 넣어주었다. 피트는 우물거리며 고기를 씹었다. 살이 연해서 입안에서 잘게 녹았다.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누르는 독특한 향이 감돌았다. 피트는 접시를 들고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달라.”
“별로야?”

톰은 덜컥 조바심이 일었다. 뭐라도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향신료를 듬뿍 친 것이 오히려 악수를 둔 꼴이 된 걸까.

“아니. 그냥 평소에 먹던 거랑 냄새가 달라.”

피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톰은 점점 더 조마조마해졌다.

“향신료를 뿌렸거든.”
“그 비싼걸? 내가 먹어도 돼?”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행히 향신료 냄새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넌 내 아내잖아.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해야 한다. 집안의 중심은 너야. 네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고, 나도 보람을 느낀다.”
“애가 마음만 먹는다고 덜컥 생겨?”
“그러니 빨리 나아야지.”

바위산의 몽상가. 톰에게도 자하로프의 피가 섞였다. 그도 파르메나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손이었다. 피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톰에게 헛꿈은 그만 꾸라며 비아냥거리려다가 확신에 찬 그의 미소 앞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어깨는 좀 어때.”
“괜찮다. 참, 슬라이더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고 싶으면 날 거세시키는 쪽이 빠를 거라고 전해달래. 확실하게 하라는 뜻이지.”
“슬라이더?”
“덩어리.”
“그 냄새 나는 놈?”

피트가 정색했다.

“슬라이더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 유독 슬라이더한테 박하게 구는군.”
“주는 것 없이 싫은 놈 있잖아.”
“슬라이더는 나만큼이나 널 걱정한다.”
“널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피트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것을 보니,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아 톰은 마음이 놓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간밤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옥사나로부터 피트의 열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물을 삼킬 수 있었다. 옥사나가 퀭한 톰의 얼굴을 보고 한숨이라도 더 자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지만, 톰은 피트의 아침을 차려주어야 한다며 마다했다. 론이 유난이라며 쓴소리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따지고 보자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너도 이제 우리 식구니, 슬라이더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나 톰은 그런 자신의 수고를 피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피트가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대단치 않은 일이다. 피트는 자신의 아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하고 나 사이엔 아직 아무것도 없어. 애도 없고, 애 생길만한 일도 없고, 아무 감정도 없어.”
“감정이 없다는 건 틀린 말이지. 지금 넌 내가 죽도록 원망스럽지 않나?”
“말이라고 해?”
“종일 내 생각만 하잖아.”
“뭐?”

피트는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하면 나한테서 달아날 수 있을까, 어떻게 복수를 해야 통쾌할까. 너라면 날 묻을 자리도 이미 알아보고 있을 것 같은데……. 인정해. 네 머릿속엔 온통 나 뿐이야. 나도 마찬가지고.”

톰은 피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진짜 미친놈이야.”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가 두려워 피트는 뒷걸음질 쳤다.

“그래.”
“악령이라도 들렸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잘 모르겠군.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진 않는데.”
“그만 먹을래.”

피트는 말을 돌렸다. 톰이 무어라 말을 붙이려고 하자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톰은 하는 수 없이 피트가 먹다 만 접시를 치웠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유독 크게 났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얼굴. 그늘이 드리운 톰의 얼굴은 어두웠다. 피트는 지금의 적막이 불편했다. 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옥사나에게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세나메브 하마르에게 의탁이라도 해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살아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카잔스키의 죽음? 그가 죽어도 삶은 이어진다.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복수는 무의미하다.

“……지난번에 나한테 준 꿀, 구스한테도 나눠 줄 수 있어?”
“입에 맞았어?”

톰이 멈칫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근데 구스는 좋아할 것 같아.”
“알았다. 네가 직접 가서 줘.”
“내가?”
“뭘 그렇게 놀라. 설마 내가 너와 브래드쇼가 못 만나게 할 줄 알았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서 봐. 브래드쇼가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네가 수발을 들어줘도 괜찮지. 그쪽이 너도 그 친구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
“무슨 자신감이야? 구스랑 내가 무슨 작당을 벌일 줄 알고? 네가 아무리 잘난 체하며 으스대봤자, 너도 목숨은 하나뿐이야. 허세 부리지만.”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톰이 말끝을 흐렸다. 망설이는 그의 얼굴에서 피트는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다. 마냥 단단할 줄 알았는데……. 괜스레 부러진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럼?”
“너한테 잘해주고 싶어서 그래.”

진심이었다. 피트에게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형체가 없는 모호한 감정. 손에 쥘 수 없는 온기에 연연하며 죽어가는 것은 부질없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에 휩싸여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열기에 매몰되어 사랑만 하며 살기에는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런데도 포도 넝쿨 아래 양을 손질하던 피트의 뺨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과 야나를 향한 그의 미소를 떨쳐낼 수 없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순간 전신을 휘감았던 아찔함과 떨림이 생생했다. 피가 들끓었다.

“나는…….”

톰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피트의 뺨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붙은 것이 보였다. 떼어주려고 손을 뻗자, 피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새파랗게 질린 피트의 얼굴을 보고 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손목을 부러뜨린 것 때문인지 피트는 무의식중에 자신을 겁내고 있었다. 억지로 다가간다면 피트가 영영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톰은 착잡한 심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다. 이만 가볼게.”
 
***


천막 밖으로 나온 톰은 땅을 걷어찼다. 말라비틀어진 풀이 뽑히고 싯누런 흙먼지가 일어났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확신이 점점 흐려졌다. 겁에 질린 얼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 바라는 것은 그게 다인데, 야나도 쉽게 얻어낸 그 미소가 자신에게는 황금처럼 귀했다.

무심코 주먹을 꽉 움켜쥐었더니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 톰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안달이 난 게 얼마 만인지. 첫 말을 길들일 때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멀리서 론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유달리 보폭이 넓은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며 먼지를 몰고 왔다. 허공에 휘두르는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싱글벙글 웃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톰은 서둘러 손을 펼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론을 맞이했다.

“톰, 좋은 소식이 있다. 조금 전에 새끼 양이 태어났어. 어미를 닮아 몸집이 크고 다리가 튼튼해.”

론은 웃옷에 젖은 손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테르반테이 마을을 떠나기 전, 출산을 앞둔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기쁜 소식을 안겨주었다. 초산이고 몸집이 작아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특했다.

“어미는?”

톰이 물었다.

“어미도 무사하다.”

론은 씩 웃었다.

“잘됐군.”
“넌? 이번엔 어디 찔린 데 없나? 어찌나 팔팔하고 기운이 넘치는 신부인지, 이러다 네 몸이 남아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론은 팔짱을 끼며 특유의 건들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톰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멀쩡해.”
“그런데 안색이 왜 이렇게 어두워?”
“내가?”
“무슨 일 있어?”
“일은.”
“네가 싫대?”
“그거야 당연히…….”

세차게 흔들리던 피트의 눈동자가 떠올라 숨이 턱 막혔다. 톰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각한 그의 얼굴을 두고 론은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뭐가 문젠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넘겨주려고 했는데, 놀라더라.”
“당연한 거 아냐? 뭘 기대했던 거야. 널 좋아할 리가 없잖아.”

론은 톰을 빤히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다.”

톰은 쓴웃음을 지었다.

“새삼 마음까지 얻고 싶어서 그래?”
“…….”
“애가 생기면 없던 마음도 생겨. 어쩔 수 없이 부대끼고 살아야 하니까. 미적거리지 말고 애부터 만들어.”
“…….”
“애당초 자식 볼 거 기대한 거 아냐? 네 신부는 젊고, 건강하고, 생기가 넘치고, 외모도 보기 좋아. 탐이 날만 하고, 쟁취할 가치가 있어. 그게 남의 잔치를 잿더미로 만든 이유잖아.”
“그렇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다.”
“어, 음.”

톰의 말에 론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톰이 감정에 휩쓸려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기행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톰은 반드시 해답을 찾을 것이고,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 상심한 그를 보자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역시 순리다. 톰은 자신의 젖형제다. 톰의 어머니 타마라가 출산 후 과다 출혈로 죽고, 론의 어머니인 예브게니아가 대신 젖을 물려 키웠다. 예브게니아는 론을 눕혔던 요람에 톰을 눕혔다. 예브게니아에게 톰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둘째 아이를 대신해 자신에게 찾아온 신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론에게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시켰다. 쇠약해져 죽음을 앞두고, 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역시 톰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였다. 그러니 론에게는 톰의 고뇌를 자신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인데……. 어쩔 수 없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나도 마음이 적잖게 쓰이던 차야. 남의 인생 짓밟으며 원한 살 각오는 했다만, 이 정도로 기분이 더러워질 줄은 몰랐거든.”

론은 손바닥을 비볐다.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이윽고 결심이 선 그는 천막에 대고 크게 외쳤다.

“이봐, 새끼 양이 태어났어!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뭐 하는 거야, 슬라이더.”

당황한 톰이 론의 팔을 붙잡았다.

“새끼 양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론은 톰의 손을 뿌리쳤다. “이봐, 꼴통!” 그리고 다시 외쳤다. 톰은 갑작스레 두통이 일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피트는 유독 론을 싫어하는데, 일이 어떻게 풀릴지 도무지 예상되지 않았다.

“새끼 양?”

피트가 천막 문을 걷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경계심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호기심을 차마 억누르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뺨이 상기되었고, 눈동자가 유달리 반짝였다.

“그래, 조금 전에 태어났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눈도 초롱초롱하고, 몸은 통통해.”

론이 너스레를 떨었다.

“새끼 야앙?”
“보러 가자.”
“좋아.”

피트는 흔쾌히 밖으로 나왔다. “앞장서.” 그는 옷을 단단히 여미며 론에게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톰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봤지? 새끼 양 싫어하는 사람은 없댔잖아.”

론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피트는 톰을 지나 론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론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르자 보란 듯이 또 걷어찼다. 두 사람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막역해 보였다. 톰은 멍한 눈으로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1.22 00: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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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랑 톰이랑 연결고리가 옥사나라니 미친설정이다 센세는 천재만재하버드이심이 분명함....매브 행동 하나하나에 절절매면서 조마조마하는 아이스도 너무 맛있고 자기피하니까 어쩔줄모르는것도 너무좋아요아아아아악
[Code: 817b]
2023.02.24 00: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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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기대하지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가 있냐고( ˃̣̣̣̣o˂̣̣̣̣ )( ˃̣̣̣̣o˂̣̣̣̣ )( ˃̣̣̣̣o˂̣̣̣̣ )
[Code: cc39]
2023.03.10 01: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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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씨 개재밌다 옥사나와 매브의 연결고리도 매브 반응에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아이스도 그런 아이스의 고민을 같이 생각하고 해결해주려는 론까지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이 몰입감 높여줘서 스크롤 내리는게 아까워.. 개존잼
[Code: 50bc]
2023.03.30 05: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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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물이 언급될 때마다 버릴 관계성이 없네 센세 너무 재밌어여
[Code: af23]
2023.04.02 02: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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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몽상가의 피가 흐르는 카잔스키 너무 좋다ㅠㅠㅠㅠ
[Code: 44fb]
2023.04.17 19: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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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미쳤네 센세 진심 완벽
[Code: bae6]
2023.05.25 02: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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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이 둘 사이를 좀 말랑하게 만들어주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든든하다 슬라이더!!!
[Code: b868]
2023.08.09 11: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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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나 너무 멋있고 따뜻해... 그리고 사랑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개척가 톰 카잔스키라니ㅠㅠㅠㅠ
[Code: d957]
2023.08.13 11:01
ㅇㅇ
신랑 죽이던 아이스 왜이렇게 여기서 짠하냐 ㅠㅠㅠㅠㅠㅠㅠ 모든 캐릭터가 생생해 갓작이야 갓작
[Code: 88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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