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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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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4. 문양


약속대로 톰은 길을 떠나기 전 닉을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닉의 부상은 꽤 심각했다. 혼자서는 서 있는데 고작이라 론의 부축을 받아 겨우 움직였다.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눈동자에는 희망이 서려 있었다. 절망스러운 상황도 그의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을 꺾지는 못했다.

“구스!”

피트는 한달음에 달려가 닉을 끌어안았다.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얼싸안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지냈는데 수십 년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리웠다. 두 사람이 재회의 기쁨을 나눌 동안, 톰과 론은 문가에 서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매브, 괜찮아? 왜…… 왜 이렇게 얼굴이 부었어? 살이 찐 건가?”

닉은 피트의 얼굴을 더듬으며 요리조리 뜯어 보았다. 톰 카잔스키가 피트를 거칠게 대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우려와 달리 피트의 얼굴은 하얗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살이 좀 붙은 듯했다. 며칠 사이에? 가능한 일인가? 닉은 의아했다. 피트는 멋쩍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럴 사정이 있어.”
“네 친구가 이틀 사이에 양 한 마리를 혼자 다 잡아먹었거든.”

론이 불쑥 끼어들었다. 닉은 고개를 숙였다.

“매브?”
“저 덩어리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뭐라고? 덩어리? 나보고 덩어리라고 한 거야?”

허를 찌르는 말에 울컥한 론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런 모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목 뒤가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옆에 선 톰은 입을 틀어막은 채 웃음을 참느라 고전 중이었다. 그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론은 더욱더 부아가 치밀었다.

“여기 덩어리가 너 말고 또 있어?”

피트가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와, 세상에. 심장이 다 아프다.”

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구스, 저 덩어리는 나한테 한 대 얻어맞아서 심통을 부리는 거야. 덩치만 컸지, 약골이거든.”
“아이스, 난 역시 네 신부가 맘에 안 든다. 버릇 좀 고쳐.”
“때리진 않을 거라니까.”

톰이 어깨를 으쓱했다. 닉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톰과 론에게 삿대질했다.

“이 천벌 받을 놈들. 곱게는 못 죽을 거다. 누구 버릇을 고쳐? 얘가 어떤 앤데. 우리 브래드쇼 집안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운 앤데.”
“때리지 않는다고 말했어.”

톰이 진지하게 말했다.

“웃기지 마. 애가 얼마나 고생 했으면 며칠 사이에 얼굴이 이렇게 부었어? 분명 학대했지?”

닉은 피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겉보기에 눈에 띄는 상처는 없으니, 일부러 상처를 내지 않으려고 이불에 둘둘 말아 발길질이라도 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말 못 들었나, 미련하게 처먹고 살이 찐 거라니까.”
“넌 닥쳐, 덩어리야!”

닉은 다가오는 론을 밀치고 피트를 감쌌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이 시련에서 구하소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론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매브가 이 결혼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네놈들이 망쳤어. 매브의 꿈을 짓밟았다고.”

톰을 노려보는 닉의 눈빛이 형형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다. 닉이 호락호락 이 결혼을 인정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닉 역시 톰이 넘어야 할 시련이었다. 사막의 황금을 쟁취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톰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장담하는데 나와 사는 게 만 배는 더 행복할 거다. 잘해주지. 맹세할 수 있어.”
“애가 좀 많이 먹었다고 벌써 구박하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까짓 양이야. 아일라우보다 내가 더 부자야. 배곯게 할 일은 없어. 옷감도 계절마다 잔뜩 주고, 색실도 넘치게 구해 줄 거야. 손이 심심하진 않을 거다.”
“우리 애는 매랑 산양만 수 놓아.”
“잘됐네. 나는 매 문양을 좋아하니까.”
“너희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묘하게 흘러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잠자코 듣고 있던 피트가 입을 열었다. 닉은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했다. 피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닉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야야, 매브…….” 닉은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피트는 그가 정말 쓰러질까 봐 얼른 부축했다.

“아무튼 브래드쇼. 자네는 내 아내의 친구고, 내 손님이니까 야영지에 도착하면 성대한 만찬을 열어주지. 지내는 동안 불편한 건 없을 거야. 당분간 우리 부족과 함께 머물러줘.”
“난 네 아내가 아니야.”
“곧 네가 먼저 몸이 달아 나한테 안길 거다.”
“혀가 잘려도 그런 소릴 할 수 있는지 보자.”

피트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톰에게 겨누었다. “어어! 이봐!” 당황한 론이 피트를 말리려고 팔을 뻗었다. 피트는 자세를 낮춰 론의 손을 피하고 톰에게 달려들었다. 좁은 천막 안에서 남자 넷이 엎치락뒤치락하니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자신을 노리는 칼날을 간신히 피한 톰은 피트의 손목을 낚아챘다.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가 났다. “진정해.” 톰이 입을 여는 순간, 피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

피트의 벌어진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뿔싸. 톰은 서둘러 손을 놓았다. 무심코 힘을 세게 줬는지 피트의 손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일에 모두 당황했다. 누구도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구스…… 나 아파. 왜지?”
“세상에, 매브! 손목이 부러졌잖아!”

닉이 호들갑을 떨었다.

“내 손목? 나 손목 부러졌어?”

피트는 멍한 눈으로 부러진 손목을 응시했다.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고의는 아니었어.”

톰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 개자식, 말로는 행복하게 해주겠다느니 그러면서 손찌검을 해?”

닉이 톰의 멱살을 잡았다. 당장에라도 톰의 숨통을 끊어놓을 기세였다. 이 순간, 분노에 휩싸인 닉은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이봐, 난 정말…….”

톰은 뒷걸음질 치며 말을 아꼈다. “너 괜찮아?” 론이 피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피트의 어깨를 감쌌다. 새끼 양을 다루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쥐면 부서질 듯, 입김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피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세잖아.’

눈물이 찔끔 고일 정도로 아픈데,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피트는 부러진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냥 잡기만 했는데 손목이 부러졌어. 난 튼튼한데.’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건 자산이자 자랑이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부모는 죽어 없고, 내세울 재산도 없는 피트의 혼담이 성사된 까닭도 그의 강인한 생명력 덕분이었다. 그러니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의 손목을 꺾어버린 상대가 나타나자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초원의 전사, 달빛 아래 사냥감을 노리는 회색 늑대, 카잔스키의 이름이 뜬구름 같은 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버릭.”

비록 강인한 늑대의 우두머리는 닉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쩔쩔매고 있다만.

“미안하다.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
“이번 일은 실수야. 정말 부러질 줄은 몰랐어.”
“됐어.”

피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난 괜찮으니까 구스나 봐줘.”

피트는 등을 돌렸다. 괜스레 어색한 기분이 들어 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힘에서 밀려 분한 걸까? 모처럼 울타리 안에 온순한 양이 아니라 야성을 잃지 않은 늑대를 만나 가슴이 설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슬라이더, 일리야를 데리고 와.”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했다. 착잡했다. 자신했는데, 마음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힘을 과시하지 않더라도 피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평생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초원을 달릴 반려자였지 주눅이 든 노예가 아니었다.

 
***


닉과 피트는 마주 보고 앉았다. 잠깐이지만 시간이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자는 건 론의 생각이었다. 피트의 손목이 부러진 일로 론은 의기소침해졌다. 당사자인 톰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데, 마치 자신이 피트의 손목을 부러뜨린 것처럼 심하게 자책했다. 그는 거칠고 호방한 성격이었지만, 모질고 차가운 남자는 아니었다. 잔정이 많았다. 우정을 갈라놓고 짓밟을 성미는 되지 못했다.

죄책감과 연민으로 마련된 자리여서일까. 평소처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닥만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피트는 손목에 댄 부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닉에게서 피 냄새와 상처에 짓이긴 약초 냄새가 났다. 마음이 먹먹했다.

“피트, 실은 너한테 말 못 한 게 있어.”

닉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뭔데?”
“카잔스키가 아버지한테 혼담을 넣었어. 아버진 당연히 반대하셨지. 아일라우 집안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아버진 무엇보다도 네가 정착해서 살길 바라셨거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 널 평생 따라다닌 공허함도 다 지난 일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어.”

닉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부상 때문에 체력이 떨어진 데다 조금 전 소동으로 흥분했으니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었다. 자신 때문에 괴로워할 피트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괜히 네 맘만 어지럽게 한다고 너한텐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닉은 잠깐 뜸을 들였다. 존 브래드쇼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카잔스키 집안에서 보내온 선물을 돌려주고, 정중히 거절했다. 아일라우 집안에도 이 일에 대해 알렸다. 오로지 피트를 위해서.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발가벗은 채 내던져진 것보다야 뭐라도 쥐고 있는 쪽이 낫다. 이제 당사자인 피트도 전말을 알아야 할 때다. 알력이 오가는 치열한 싸움일랑 모르고,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닉은 진심으로 피트가 새로운 가족을 만나 행복하길 바랐다.

“구스, 넌 다리를 다쳤고 난 손목이 부러졌어. 우린 이 근방 길도 몰라. 타르르크가 힘이 좋긴 하지만, 우리 둘을 태우고 먼 길을 갈 순 없어. 이 상태로 도망쳐 봤자 얼마 못 가서 잡힐 거야.”

피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타타흐 부족 야영지까지 가야 해. 일단 거기서 네 다리부터 치료하자.”
“피트, 이 정돈 가만히 내버려 둬도 나아. 네 발목 잡고 싶지 않다. 손목은 어쩔 수 없지만, 다리는 자유롭잖아. 기회를 봐서 도망쳐. 이대로 가다간 카잔스키 문양을 새기고 살아야 해.”

누구라도 좋았다. 닉은 피트라면 그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짝을 만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꿈이 좌절되었다고 해서 또다시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일라우가 인연이 아니라면, 어딘가에 진정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닉은 그 가능성을 믿었다.

“안돼.”

피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매브.”
“너 결혼할 때…… 캐롤이랑 약속했어. 너랑 나, 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놀아도 괜찮대.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도 상관없대. 하지만 해가 지면 티끌 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으로 돌려달라고 했어. 넌 나한테 가장 소중한 친구고, 우린 형제나 다름없지만…… 네가 돌아가야 할 집은 캐롤과 브래들리가 있는 곳이야.”

사랑하는 브래드쇼 집안의 사람들. 밤하늘의 길잡이 별, 메마른 지평선 너머 기다리고 있는 샘물, 꺼지지 않는 불씨. 그들을 슬프게 할 순 없다. 닉은 오래 살아야 하고, 아들의 손자를 돌봐야 하고, 캐롤과 백발이 되도록 사랑해야만 한다. 피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물론 아저씨랑 아주머니도 널 걱정하시고. 그분들이 날 어떻게 키워주셨는데, 은혜를 갚진 못할망정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순 없잖아.”
“네 평생 소망이 뭔지 아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잔인한 놈들이야. 마을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놈들이라고. 난 네가 이런 놈들이랑 사는 꼴 못 봐.”
“구스. 네가 잘못되면 아저씨랑 아주머니, 캐롤, 그리고 브래들리 볼 면목 없어. 나 자신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야. 넌 내가 평생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살길 바라?”

피트는 닉의 손을 잡았다.

“내가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카잔스키 원하는 대로 얌전히 살겠다는 거 아냐. 넌 집으로 돌아가야 해. 가장이잖아. 가족들을 돌봐야지. 그러니까 일단…… 너 다 낫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 생각할래.”

닉은 더는 피트에게 달아나라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피트를 와락 껴안았다. 지금 피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품을 내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 괜찮아?”
“슬퍼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잖아.”
“놈들이 채비를 마치려면 좀 더 걸릴 거야.”
“…….”
“누가 보면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다고 말해줄게.”

닉은 피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피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울음에 어깨가 떨렸다. 숨이 가빠졌다.

“카자흐 아일라우는 꽃을 좋아했대. 아일라우네 집엔 정원이 있고, 봄이면 꽃이 가득 피었대.”
“그래.”
“캐롤이 꽃 문양 몇 가지를 알려줘서 모자에 수를 놓았어.”
“그래.”
“그 모자, 난리 통에 잃어버렸어. 아마 타버렸을 거야.”

벽에 걸 천은 넝쿨 문양, 카페트는 산양 문양, 여우 가죽으로 지은 조끼에는 매 문양……. 알록달록 색실을 감으며 캐롤과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 달빛을 벗 삼아 밤이 늦도록 수를 놓다가 바늘에 손끝을 찔렸다. 이만 자라며 캐롤이 실과 천을 빼앗아 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허공에 수를 놓았다. 그 지난 밤이 그리웠다. 피트는 닉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카자흐 아일라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5. 휘파람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흘렀다. 들풀 위에 쪼그려 앉은 작은 아이의 뺨이 홀쭉했다. 함께 온 말이 지루한지 바닥을 툭툭 차며 심통을 부렸다. 아이는 개의치 않고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두 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카락이 탐스러웠다. 지평선을 응시하는 아이의 눈동자에 그리운 얼굴이 담겼다.

“톰! 톰!”

아이는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말의 검은 갈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말의 발굽에 땅이 진동했다. “톰!” 아이는 작은 몸으로 목청껏 톰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윽고 톰이 탄 말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아이의 뺨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야나, 잘 지냈니?”
“네! 신부는요? 신부는 데려왔어요?”
“그럼. 매브, 이 애는 울벡네 막내 야나야.”

톰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긴 피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목이 부러졌다는 이유로 톰이 고삐를 잡지 못하게 해서였다. 타르르크의 금빛 털이 그리웠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 지금쯤 자신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톰의 말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하고 신중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야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피트에게 인사했다. 이 근방에선 잘 쓰지 않는 푸른색 실로 수 놓은 신부복이 신기했고, 톰과 함께 말을 탄 것도 신기했다. 톰은 안장에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다. 역시 신부는 특별하구나. 야나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이처럼 특별한 사람이 생기겠지, 기대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나도 반가워.”

피트는 피식 웃었다. 톰 카잔스키야 밉살스럽지만, 뺨이 발그레 물든 여자아이는 귀여웠다.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가 꼭 새끼 양 같았다.

“야나,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톰이 야나에게 물었다.

“새끼 양 몇 마릴 잃어버렸거든요. 엄마가 전부 다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래요.”

야나의 눈썹이 축 처졌다. 잠꾸러기 야나. 야나는 유독 잠이 많아 양을 치다가 한눈을 파는 일이 흔했다. 오늘도 그랬다. 그간 단단히 벼르고 있던 야나의 어머니는 이번 기회에 딸의 버릇을 고쳐놓을 작정이었다.

“양은 내가 찾아서 돌아가마. 넌 먼저 가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돌아왔다고 알려다오.”
“네!”

톰의 말에 야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공을 굴리고 활을 쏘고, 말을 타는 건 재미난 일이지만 무리를 이탈한 양을 찾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아직 노는 것이 더 좋고 궁금한 것이 잔뜩 있는 어린 나이였다. 야나는 톰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말 위에 올라탔다. 주인을 닮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말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


마침내 야영지로 돌아온 톰은 가장 먼저 자신의 조모인 옥사나를 찾았다. 옥사나 카잔스키는 바위처럼 단단한 여자였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으며 늘 엄숙했다. 하나뿐인 손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사히 돌아온 손자의 얼굴을 보고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건네는 인사말은 지극히 건조했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간 별일 없으셨어요?”

톰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옥사나와 톰은 포옹을 나누었다. 타타흐 족의 우두머리인 알렉세이가 자리를 비우고, 톰 역시 무리를 떠나 있는 동안 부족을 돌본 것은 옥사나였다. 그녀를 향한 타타흐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심은 대단했다. 평판을 놓고 보자면 알렉세이보다 옥사나 쪽이 더 좋았다. 그녀에겐 오랜 지혜와 두터운 신망이 있었다.

“일없다. 누가 돌아오지 못했지?”
“아샤, 한스, 야크벡, 바훌룸보가 떠났습니다.”
“말은?”
“세 마리를 잃었습니다.”
“잘했다.”

옥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피해가 이만하면 경사라고 말해도 좋았다. 죽은 청춘들을 대신할 아이들이 곧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아이들은 떠난 이들보다 더 강인한 전사가 되어 이 땅을 누빌 것이다.

“예. 아버지는요?”
“네 아버진 그간 소식 없었어. 알렉세이가 돌아올 때까지 며칠만이라도 편히 지내렴. 돌아오면 한동안 골치 아플 테니 말이야.”
“예, 각오는 했습니다.”

톰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는 이 결혼에 반대했다. 알렉세이는 톰이 세력이 크고 강한 부족의 신부를 맞이하길 바랐다. 예단을 기대했고, 가축을 기대했다. 신부의 친정과 가족의 잔을 나눌 순간을 고대했다. 단순히 톰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쪽이 부족에게도 이로운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의 반대에도 톰이 약탈혼을 강행할 수 있던 건 전적으로 옥사나의 지지 덕분이었다. 옥사나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라 믿었고, 톰은 훌륭한 개척자가 되리라 믿었다.

“네 신부는? 그 애 얼굴이 보고 싶구나.”

새로운 식구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옥사나는 톰이 선택한 그의 신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돌을 던질 때가 됐다. 한동안 시끌벅적할 것이다.

“그게…… 야나랑 아이들이 데려갔어요. 아내가 입은 옷이 신기한가 봐요. 키르케도 같이 갔으니 말썽은 없을 겁니다.”

톰은 멋쩍게 웃었다. 키르케에게 피트가 짐을 풀고 단장할 수 있도록 부탁했는데,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피트도 아이들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로 아이들을 대했다.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피트가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 한편으로는 기뻤다.

“저녁 식사 자리에선 볼 수 있겠지?”
“예.”
“아이들 칭얼거리는 소리가 그리워. 넌 너무 조용해서 심심한 아이였지.”

옥사나가 넌지시 말했다. 얼른 증손자를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할머닌 오래 사실 테니, 앞으로 애들 떼쓰는 소리 지겹도록 들으실 겁니다.”
“착한 녀석.”

톰의 입담에 흡족한 옥사나는 드물게 웃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하게 한 적 없는 손자가 기특했다. 톰은 옥사나에게 유산이었다.

 
***


천막 문이 열리자 피트는 자리에서 퍼뜩 일어났다. 자신을 응시하는 경계심 가득한 눈에 톰은 쓴웃음이 났다. 그는 피트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먼지와 때를 씻어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피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키르케에게 부탁하길 잘했다. 다만 신부복을 제 손으로 벗기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옷은?”
“애들한테 줬어.”

톰이 묻자 피트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아쉽네. 너한테 잘 어울렸는데.”
“봐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 그 옷도 더는 필요 없어.”
“이 문양은…….”

톰은 슬며시 피트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본 적 없는 낯선 문양이었다. 신부복과 같이 푸른색 실로 수를 놓았다. 이 역시 드문 일이었다. 타타흐 족은 주로 붉은색으로 수를 놓았다. 붉은색이 상서로운 색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타타흐 족뿐만이 아니라 이 일대의 부족들이 대부분 붉은색을 좋아했다. 푸른색을 선호하는 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쓰는 사람이 나만 남은 문양이야. 우리 일가는 전염병 때문에 전부 죽었거든. 나만 살아남았어.”

피트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덤덤한 말씨와 달리 그늘이 진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톰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피트는 괜한 감상에 젖는 게 싫어 말을 돌렸다.

“구스는? 바샤인가, 그 영감님한테 상처 보여줬어? 상처가 덧나진 않았대? 다시 걸을 수 있지?”
“앞으로 내 안부를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거야.”

톰이 피트에게 다가서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브래드쇼가 아니라 네 걱정을 할 때다.”

톰이 다시 말했다. 피트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피트를 응시했다.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피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열이 올라 머릿속이 멍했다. 그렇다고 해서 톰에게 기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피트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톰의 어깨를 찔렀다.

“이젠 네 걱정을 해야겠네. 괜찮아, 카잔스키?”

스멀스멀 비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피트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톰은 숨을 참고 단숨에 검을 뽑았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어깨가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톰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날을 잡아 자루 쪽을 피트에게 건넸다.

“네가 날 밀어낼수록 나는 널 더 원하게 돼.”

톰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피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이 미끄러져 단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피트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찰나, 톰이 피트의 몸을 붙잡았다. 열로 들뜬 얼굴이 붉었고 숨이 거칠었다.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톰은 착잡한 심정으로 피트를 부둥켜안았다. 피트는 톰을 밀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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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1.13 04: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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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그저 천재라는 말 밖엔...드립아니고 진짜로 필력 문학 이런말로도 설명하기엔 부족해....센세는 그냥 천재도 아니고 경이로운 천재시다
[Code: c431]
2023.01.13 09: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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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색실을 감으며 캐롤과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 달빛을 벗 삼아 밤이 늦도록 수를 놓다가 바늘에 손끝을 찔렸다. 이만 자라며 캐롤이 실과 천을 빼앗아 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허공에 수를 놓았다. 

피트ㅠㅠㅠㅠㅠㅠ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정말 바라고 꿈꿨던것같은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도 타의로 피바람이 불었는데 결혼까지........ 내가 다 안타깝다......
[Code: 3405]
2023.01.13 10: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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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몰입도... 센세 사랑해
[Code: f44e]
2023.01.13 16: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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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추천할수없음
[Code: 17fd]
2023.01.13 16: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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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진짜 센세 약탈해서 가둬놓고 무순만 쓰게 하고싶다
[Code: 17fd]
2023.01.13 20: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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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하도 날 세우고 긴장하고 하느라 마지막에 컨디션 안 좋아진거니..정말 둘이 잘 어울리고…근데 아맵 둘이 계속 싸웠으면 좋겠는데 연애도 했으면 좋겠고..진짜 내맘을 뭘까..?.??
[Code: 95dd]
2023.01.13 20: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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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 신부복 봐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 그 옷도 더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 정말 안쓰럽다…ㅠㅠ 그나마 아이스 말 무시 안하고 따박따박 대답은 잘 하는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그나저나 아이스 정말 자신만만 알파메일…아이들한테 친절하고…부족도 잘 다스릴 정도로 리더쉽있고 말 안장에 허락하는 사람 자신 이외에는 피트뿐이란게 너무 설레..
[Code: 95dd]
2023.01.13 21: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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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 ㅠ 매브가 가여운데 난 아이스매브 둘이 잘되길 강력히 원해 ㅠㅠㅠㅠㅠ 무의식적으로 힘 한번 줘서 잡았다고 손목이 부러질정도면 카잔스키 얼마나 힘이 센 거냐고ㄷㄷㄷ 피트도 지지않고 어깨 칼빵 놔버렸엌ㅋㅋㅋㅋㅋㅋㅋㅋ 피트가 얼른 톰한테 마음을 열면 좋겠는데 어떻게 계기를 만들어나갈지 기대된다
[Code: 3880]
2023.01.14 01: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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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진심 센세 글이 한글자한글자 너무 좋아서 돌아버릴것같은데 어쩌죠...캐롤이랑 매브 수놓는장면 왜이렇게 기억에 남지ㅜㅜㅜ매브가 이제 가족이 될 자기 신랑 생각하면서 수놓은것들....선물하려고 꽃을 수놓은 모자도 이제는 결코 돌아갈수없는 길 저편에 두고.... 매브 진짜 사람이 강단있어서 약탈직후부터 지금까지버텼지 진짜 정신놓고 쓰러질만하다ㅜㅜㅜㅜㅜ그리고 신부복을 자기손으로 벗기지못해 ㅇㅏ쉬워하는 톰까지ㅌㅌㅌㅌㅌㅌ캬아악 너무좋다
[Code: c631]
2023.01.14 14:38
ㅇㅇ
좋아서 기절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4화까지 눈 깜빡도 안하고 빡 뜨고 있겠스빈다 (눈부릅)
[Code: 4b02]
2023.01.14 22:37
ㅇㅇ
하루세번 복습하는중
[Code: b14f]
2023.01.14 22:38
ㅇㅇ
애 많이 낳을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남자오메가 애 낳다 많이 죽는다며... 아이스야 너 이거 괜찮은거냐...
[Code: b14f]
2023.01.18 22: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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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보고싶어요
[Code: 3b84]
2023.01.19 00: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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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쳤다 존잼ㅋㅋㅋㅋ
[Code: 3278]
2023.01.19 00: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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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력 미쳤어 붕키 지금 말타고 달리는중
[Code: 3278]
2023.01.20 01: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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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ygall.com/img/489155471
[Code: 04e8]
2023.03.10 00: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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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날 밀어낼수록 나는 널 더 원하게 돼.”
그래 니들이 그럴수록 나는 너무 좋다..ㅋㅋㅋㅋㅋㅋㅋ하 독기품은 매브한테 결국 한입 물려버린 아이스는 식 올리기도 전에 아내한테서 영광의 상처 두개나 얻었네 벌쎀ㅋㅋㅋㅋㅋㅋㅋ
[Code: f2c4]
2023.03.11 0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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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따
[Code: 51a4]
2023.03.30 04: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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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왕아ㅏ와와ㅏㅏ 단둘이 있을때마다 긴장감 대박이야
[Code: f08e]
2023.03.30 04: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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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며칠사이에 신랑 몸에 칼빵을 두개나 놨네...
[Code: f08e]
2023.04.17 19: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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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ㄷㄷㄷㄷㄷ그저 감탄뿐
[Code: bae6]
2023.05.25 02: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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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 외 쓰러졌지?!!! 뭐야무ㅜ야
[Code: b868]
2023.08.09 11: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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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의 단꿈을 꿈꿨던 매브 안쓰러ㅠㅠ 아이스야 네 업보 잘 청산하자
[Code: d957]
2023.08.13 10:34
ㅇㅇ
매브 카잔스키의 강인함에 끌리는거 같은게 ㅋㅋㅋㅋㅋ

근데 알렉세이가 과연 피트를 어찌 대할지 걱정이다
[Code: 28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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