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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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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천막으로 들어가자마자 톰은 피트를 침대 위에 앉히고 그의 겉옷을 벗겼다. 피트는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톰은 안에 받쳐 입은 짙은 푸른색 튜닉으로 손을 옮겼다. 천이 얇고 부드러워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슴은 야트막한 언덕처럼 둥글었고, 허리가 가늘었다. 탄탄한 허벅지는 선이 부드러웠다. 옷을 마저 벗기려다가 톰은 피트와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매버릭.”

목소리가 떨렸다. 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피트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뺨은 발그스레했고, 벌어진 입술은 붉었지만 달아오른 그 얼굴엔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막막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매브…….”

톰은 옷깃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허공에 머문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톰은 재차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숨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러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움푹 패도록 꽉 움켜쥐었다. 피트는 고개를 숙이고 제 허벅지 위를 마구 긁었다. 톰은 옷을 벗기는 대신에 피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추워. 몸은 뜨거운데, 추워. 이상해.”

피트는 이불을 그러쥐고 몸을 웅크렸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육신을 빌려 입은 것만 같았다. 주변이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린데 톰의 윤곽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높은 광대뼈와 쑥 들어간 뺨, 다부진 턱과 곧게 뻗은 어깨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피트는 톰을 와락 껴안고 그의 등을 맘껏 쓸어내리고 싶었다. 불길처럼 일어난 충동에 피트는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 세상이 펼쳐졌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 흰 구름 아래로 노을 저문 초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공으로 발을 디디면, 마침내 꿈꾸던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추락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하지만 피트는 도저히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완전히 연소하지 않은 과거의 음울한 그림자가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무서워. 나 이제 죽는 거야?”

피트는 서럽게 흐느끼며 톰을 붙잡았다. 톰은 복잡한 심경으로 피트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피트는 저도 모르게 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파고들었다. 그의 따스한 체온과 체취, 그리고 희미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니.”
“죽기 싫어.”
“내 허락 없이는 넌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톰은 피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말했잖아. 네가 나에게서 달아나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거라고. 평생을 전부 바쳐서라도 너를 찾아낼 거야.”
“아…….”

피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톰은 다시 피트를 품에 안고 그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에 톰은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의 이름과 진정성, 그리고 아득히 먼 미래를. 톰은 살아있는 모든 것과 죽어가는 모든 것에 기도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슬피 우는 피트를 지킬 힘을 달라고.

 
***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보름달이 떴다. 은백색 달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췄다. 부정과 죄악은 땅 밑으로 숨고, 순수하고 결백한 것들만이 달빛 드리운 울타리 안에서 아침을 기다렸다.

피트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아득한 열기에 휩싸여 혹독하게 앓았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새끼 양처럼 톰의 손에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나아가 하나로 이어지고 싶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고, 태어났을 때 그대로 알몸이 되어 톰과 이어지면 이 고통스러운 갈증이 멎으리라는 것을. 언제나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외로움도 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톰도 피트와 같았다. 그는 피트를 전부 가지고 싶었다. 피트의 안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비밀스러운 마음과 바람을 뿌리고 싶었다. 달 기우는 밤을 맞이한 몸은 마치 비옥한 땅처럼 보였고, 계절의 변화를 따라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젊은 방랑자에게 평생 갈망했던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톰은 피트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다들 이러고 살아?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해?”

피트가 열없이 웃으며 물었다. 체념한 듯한 말투였다. 그는 까마득한 미래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언제나 웃음으로 가득한 단란한 가족을 꿈꿨는데 그 꿈이 모래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래. 모두 순리대로 산다.”

톰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가 좋다고, 이렇게 힘든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꼭 짐승이 된 기분이야.”

피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전부터 톰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좀 더 그 냄새를 맡고 싶어서 자꾸만 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니 아랫배가 짜르르 울리고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몸이 자꾸만 허물어졌다.

“서로 깊이 이해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면 기분이 좋아진대. 세상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하더군. 상대가 더 각별해지고, 말하지 않은 속마음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해.”

톰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도 지금껏 달 기우는 밤을 혼자 보냈다. 톰은 젊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자신의 야망과 포부만큼이나 욕망도 격정적이었지만,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자신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러므로 언젠가 재로 돌아가는 날이 올 때까지, 오직 아내만을 바라보며 그이에게 자신을 전부 주겠노라고 일찍이 결심했다. 그러니 견딜 가치가 있는 밤이었다.

“너는 날 알고 싶어?”

피트가 젖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알고 싶다.”

톰은 괴롭게 고백했다.

“얼마나?”
“전부.”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톰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좀처럼 쉬지 못하고 떠는 피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렵게 물었다.

“너는?”
“……알고 싶어. 네가 어떻게 우는지, 어떻게 웃는지 궁금해.”

피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간신히 대답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톰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뜨거웠다. 산화되지 않는 목마름.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 톰을 원하고, 그를 이해하고, 그의 그림자가 되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앓았던 외로움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무서워. 내가 변하는 게 무서워. 널 알게 되면, 더는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남지 않을까 봐 두려워. 난 사실 겁이 많아. 근데 용감한 척하는 거야.”

피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톰은 그의 뺨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장가를 부르는 것처럼.

“넌 강하고 아름다워. 선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다. 너는 언제나 너야. 궂은날에도, 맑은 날에도.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에도. 네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잃지 마라.”
“어떤 건……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했단 걸 알게 돼.”

귓가에 감겨드는 목소리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피트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만남과 이별, 미소와 눈물. 자신의 두 팔로 부둥켜안았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살아서는 그들의 온기를 느낄 수 없지만, 대신에…….

“늘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잃고 나서야 무엇보다도 소중했단 걸 깨닫고…… 그리워하면서 슬퍼해. 그러니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해. 매일 말해줘도 부족해. 곁에 있을 때, 더, 더, 많이 말해줄 걸 후회하고…….”

피트는 웃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혼자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랑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 내가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만큼, 그 사람도 나를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행복한 만큼 그 사람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내 소중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피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톰의 품이 요람처럼 안락했다. 그는 아직 말을 모르던 시절, 강보에 싸여 올려다보았던 하늘이 떠올랐다.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의 손, 강물처럼 굽이굽이 흐르던 아버지의 노랫소리.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간직해온 가장 행복했던 순간. 영원한 봄. 소생하는 생명과 약동하는 대지. 톰에게서 젖은 흙냄새가 났다.

 
***


피트의 달 기우는 밤은 꼬박 사흘 동안 이어졌다. 더는 둘만의 비밀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두 미숙한 청춘이 함께 나아가길 바라며 말을 아꼈다. 톰은 깨어있는 동안 내내 피트의 곁을 지켰고, 선잠을 잘 때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톰은 피트를 안지 않았다. 그는 피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었고, 언젠가 피트가 스스로 두려움을 떨쳐내고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톰은 피트가 전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고, 세상 모두가 자신처럼 피트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것이다.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던 피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희게 질린 손으로 잠이 든 톰을 흔들었다.

“톰, 톰…….”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작고 애달픈 목소리였지만, 톰은 대번에 일어났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피트의 얼굴이며 어깨,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살폈다. 달 기우는 밤을 심하게 앓는 사람 중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해를 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트의 몸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동자는 맑았다.

“찝찝해. 땀을 너무 많이 흘렸어. 찬물로 씻고 싶어.”
“아직 이르다. 대신 수건을 적셔서 닦아줄게.”
“……네가?”
“너만 괜찮다면.”
“그래…….”
“…….”
“괜찮아.”
“…….”
“그렇게 해줘.”

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 물을 끓이고 깨끗한 수건을 챙겼다. 어두컴컴한 천막 안에 불을 밝히니 울긋불긋한 피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달이 기울고 있었으나 잔열이 남아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였다.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톰은 끊임없이 자문하며 천천히 피트의 옷을 벗겼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이 벗겨지는 소리와 숨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이윽고 피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톰은 오직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설원에 다다랐다. 그가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희열이 번졌다. 볼썽사납게도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톰은 이 감격을 세상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갈팡질팡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의 모습이 피트에게 미덥지 못하게 보일까 봐 가슴을 졸였다.

“아.”

피트가 작게 신음했다. 젖은 흙에 파묻히고 싶었다. 톰은 어찌나 긴장했는지 턱을 파르르 떨었다.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인내하는 얼굴이 애처로웠다. 피트는 가만히 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피트는 팔을 들었다. 톰은 발갛게 일어난 피트의 팔뚝 안쪽과 쑥 들어간 겨드랑이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어느새 미지근해진 젖은 수건이 도드라진 갈비뼈를 지나 아랫배로 향했다. 피트가 작게 기침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톰은 희미한 비린내를 맡았다.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날것의 냄새. 손길이 은밀한 곳에 가까워질수록 그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결국, 견디지 못한 피트가 몸을 잔뜩 웅크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 악물지 마라. 이가 상한다. 힘들면 차라리 날 물어라.”

톰이 말했다. 피트는 힘겨워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톰은 자신이 피트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했다. 피트를 대신해서 앓고 싶었다. 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 신음하던 피트는 그의 옷깃을 옆으로 젖히고 어깨를 물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톰은 피트의 흥분과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다. 곧 멎을 것처럼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던 등과 가슴이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매버릭.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톰은 피트의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그는 젖은 피트의 관자놀이와 머리카락에 정신없이 입 맞췄다. 이내 톰은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나는 기쁘다.”
“왜? 내 몸이 멀쩡해서?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어서?”

피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럼?”
“네가 나를 믿어줘서.”

톰은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고마워.”

톰은 울먹이며 말했다.

“네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게. 너를 세상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고, 지켜줄게.”
“약속하는 거야?”
“그래, 약속한다.”

톰은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피트는 문득 먹구름이 잔뜩 낀 잿빛 하늘도 제법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궂은 날씨는 싫었는데, 이제는 조금 좋아졌다. 흐린 하늘이 있으므로 맑게 갠 하늘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있잖아, 톰. 날 왜 데리고 왔어?”

피트는 안개에 취해 물었다.

“우연히 바자르에서 양을 잡는 널 발견한 순간…… 갑자기 세상이 멈추고, 해가 저문 것처럼 어두워졌는데 너만이 달처럼 밝게 빛났어.”
“…….”
“너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전부 너였다.”
“…….”
“너를 따라가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 나는 행운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살지만, 그 답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나는 일찍이 내가 가야 할 곳을 알게 됐어.”

톰은 겸허하게 고백했다. 자신의 이름과 집안의 이름을 내려놓고, 그저 풍요로운 땅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어느 이름 없고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


달이 완전히 기울고, 마침내 아침이 밝았다. 피트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어스름이 가득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이제 익숙해졌다. 모처럼 머릿속이 맑다. 찌뿌듯하던 몸도 개운해졌다. 지난 시간이 오래전 일만 같았다. 피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막을 등진 톰의 그늘 진 얼굴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눈썹이 둥글게 휘고, 입꼬리는 우스꽝스럽게도 씰룩거리고 있었다.

“아침이야?”
“응.”

톰의 미소가 청량했다. 피트는 손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톰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얼른 피트의 몸을 손으로 받쳤다. 피트는 피식 웃으며 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켰다. 제 뜻대로 몸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너는 햇빛 아래 있을 때 예쁜데.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서…….”

피트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몸 추스르는 대로 함께 나가자. 원 없이 봐라.”
“봄이 오면 화관 만들어 줄게. 나는 봄꽃이 좋아. 작고 귀여워. 여름에 피는 꽃은 화려하지만 금방 질려.”

피트는 눈을 비비며 내키는 대로 재잘거렸다. 화관을 쓰고 돌아다닐 톰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종일 쓰고 다니게 할 것이다. 모두 볼 수 있도록.

“그래. 기대할게.”
“봄이 오면…… 지금은 안 돼. 졸려. 아직 몸이 무거워.”
“고생 많았어. 좀 더 자라.”

톰은 피트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때, 피트가 두 손으로 톰의 얼굴을 감싸더니 그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절로 입술이 벌어지는 찰나, 피트는 손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피했다.

“매버릭.”

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멍하니 제 입술을 더듬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먹했다. 피트는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물었다.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넌 알아?”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야가 만 갈래로 잘게 쪼개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피트의 뺨을 감싸고 가까이 다가갔다. 양이 풀을 뜯는 것처럼 느릿하고 평화로운 입맞춤. 갈증이 가셨다.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고 그들은 서로를 낱낱이 알게 되었다. 혀가 엉키며 숨결이 스며들고,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말이 입안에 녹아내렸다.

“……뭐라고 말한 거야?”

피트가 물었다.

“네 이름을 불렀다. 네 이름을 부르고 싶어서.”

톰은 신실하게 읊조렸다.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몸이 허공에 걸렸다.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전율이 일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었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울림이 가슴에 새겨질 때까지.

 
***


천막 문을 걷어 젖히고 밖으로 나온 톰은 알렉세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알렉세이의 굳게 다문 입술과 얼굴에 드리운 그늘도 지금 이 순간 톰의 기쁨을 꺾지 못했다. 평소라면 어깨가 무겁고 가슴이 저릿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슨 대수인가. 자신은 세상을 가졌다. 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이제 끝이 난 모양이군.”
“예.”

알렉세이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톰을 응시했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톰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종용했다. 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숨이 막혔다. 그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피트를 억지로 안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설혹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 않을 것이다.

“톰.”

알렉세이가 저벅저벅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부정하겠지만, 너는 누구보다 날 닮았다.”

알렉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잘했다.”

그 말에 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처음이었다.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제야 자신을 인정했다. “아버지.” 톰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알렉세이는 스쳐 가는 바람처럼 자리를 떴다. 톰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멀어져가는 알렉세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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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2.21 00: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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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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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0: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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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울란바토르다..센세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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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0: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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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덕분에 삶의 의미를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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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1: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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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드디어 거사를 치루겠군하며 들어온 내자신이 우주의 먼지가 돼버린 것 같아ㅠㅠㅠㅠ이 숭고하고 성스럽기까지한 순애 앞에서 거사운운하며 들어온 나붕이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질정도로 압도적이다ㅠㅠㅠㅠ서로에게 사랑조차 뛰어넘어 종교가 된 순간을 목도한 기분이야ㅠㅠㅠㅠ정말 아이스에게는 매브가 세상 전체고 종교라서 안지않는 것도 가능했구나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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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1: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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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와의 장면도 너무 좋았어ㅠㅠㅠㅠ더이상 아버지의 인정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게...ㅠㅠㅠㅠ억지로 매브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스의 세상을 얻을 수 있었다는게 너무나도 감동적이야ㅠㅠㅠㅠ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게 서로의 영혼을 나눠가지는 장면같아서 너무 좋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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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3: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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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짱이다... 근데 피트 달기우는밤 자체가 처음이었던거같다... 알렉세이가 9화에서 피트 달기우는밤 몇번 맞아보지 못했을거라고 예상하는 부분은 나왔지만 이번화 피트 반응 보니까 아예 처음이었나 싶음ㅋㅋㅋㅋㅋ 톰카잔스키 한층더 파렴치해졌...을뻔! 순애벤츠라 둘 모두에게 다행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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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7: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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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울면서 고백하는거 대꼴.... 하 너무 아룸다운 글이햐 센세........ 어떻게 이렇게 쓰지 진짜 너무 행복하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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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10:04
ㅇㅇ
충격... 달기운김에 그냥 바로 따먹어버리면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를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톰의 태평양사랑........... 썩은 마음을 반성합니다...
[Code: c223]
2023.02.24 10:06
ㅇㅇ
어케.. 어케 이렇게 아름다울수있는거임????!!???ㅠㅠㅠㅠㅠㅠㅠㅠ 문장문장마다 넘실거리는 감정에 숨막혀ㅠㅠ 너무 벅차오르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223]
2023.02.24 16: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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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센세 묘사 하나하나가 반짝이는 보석같아요....봄의 꽃들같아요....
[Code: 6076]
2023.02.24 17: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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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이 울면서 고백하는거 미칠것 같다....센세 최고야
[Code: 9684]
2023.03.10 23: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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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서 벅차오르니까 눈물이 다 맺히네 아ㅋㅋㅋㅋㅋ 톰이랑 피트 드디어 키스했다 크ㅠㅠㅠㅠㅠ 톰 키스하고 나니까 세상 다 가진 기분으로 아버지 앞에서 이실직고 했는데 알렉세이 거기서 아들 인정해주는 거 진짜 존멋.. 카잔스키 부자의 뜨끈한 거리감 짠하고 감동적이야 아니 근데 센세 필력 도대체 머선일임 표현이나 묘사가 진짜 황홀해서 상상력 더 풍부해짐 체고야.....
[Code: 778e]
2023.03.16 15: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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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힛싸 중에 제일 애달프고 그래서 너무 좋다.. 애 힛싸 온다고 침을 졸라 좔좔 흘렸던 내 자신이 쪽팔릴만큼..
[Code: 7c2c]
2023.03.30 22: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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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센세 일단 너무 좋다는 것을 알아줘..여기 모든 어절이 소중해 음절하나한 음미하면서 보느라 시간이 곱절은 걸리는 것 같아. 사랑한다는 말만 안했지 이렇게 절절한 고백이 다 있나ㅠㅠㅠ
[Code: 6768]
2023.04.17 23: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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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진짜 사랑해..와 진심 대작
[Code: 30d4]
2023.04.26 00: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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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ㅠㅠㅠㅠㅠㅠㅠ센세는 신이다...
[Code: 0fb7]
2023.05.25 04: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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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카잔스키.. 하 정말 이런 상남자를 보았나 자고로 남자라면 이래야하지! 크으으으으으 센세 나 기립박수 치고있어!!!! 브라보!!!!
[Code: dad1]
2023.08.09 12: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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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숭고함과 전율이 이런걸까 진짜 아름다움에 숨도 못쉬고있었어
[Code: 2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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