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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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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닉이 걷는 연습을 시작하면서 피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의 가슴은 천진한 희망으로 부풀었다. 닉의 미래는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캐롤과 브래들리와 함께하는 단출한 저녁 식사. 닉이 흥얼거리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자신의 미래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피트는 닉의 앞에서 되도록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의 다사다난한 삶에서 행복한 기억을 떠올렸고, 그 기억은 곧 화제가 되어 세상 밖에 흩뿌려졌다. 피트의 행복은 단순했다. 브래드쇼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호기심 많고 친절한 낯선 사람들의 성화를 피해 달아난 피트는 전리품을 한가득 꺼내놓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곳 사람들은 씀씀이가 컸다. 피트에게 값비싼 비단실도 망설임 없이 턱턱 안겨주었다. 질 좋은 가죽도 여러 장 받았다.

“실이랑 옷감을 잔뜩 받았어. 이걸로 브래들리 모자랑 옷을 만들려고. 그사이 좀 컸으려나? 애들은 빨리 자라니까.”
“브래들리 옷 말고 네 옷을 만들어야지. 옷감이 생겼다 하면 맨날 브래들리 옷만 만들잖아.”

닉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그의 말을 오해한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혹시 내가 입은 옷 더러워? 몰랐어.”
“아니, 예쁘기만 하다.”
“그럼 왜?”

피트의 물음에 닉은 대답하지 못했다. 피트는 닉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곧 알아차렸다. 자신의 청춘이 브래드쇼라는 이름에 고착되어 영원히 같은 자리를 맴돌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이다.

“구스. 내가 결혼해서 아이가 생겨도 너랑 캐롤, 그리고 브래들리는 여전히 내 가족이야. 난 브래들리를 내 자식만큼 사랑할 거고.”

피트는 닉의 무릎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닉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속이 시커멓게 탔다. 닉은 피트 본인보다 그의 결혼을 기대했다. 악단의 요란한 음악 소리와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의 비틀거리는 춤사위, 그 속에서 축복받으며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피트의 앳된 얼굴. 닉이 언제나 바라던 순간이었다.

“네 배로 낳은 자식이 너무 예뻐서 우리 브래들리 까맣게 잊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
“당연히 내 자식인데 예뻐하지! 하지만 브래들리도 똑같이 예뻐할 거야.”
“그럼 그냥 브래들리한테 시집갈래? 한 10년만 기다려.”
“구스, 왜 그런 말을 해.”
“너 어디 못 보내겠다.”

닉이 눈시울을 붉혔다. 피트는 떨리는 손으로 닉의 바짓자락을 그러쥐었다. 입술이 떨렸다. 차마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기어이 닉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이 자꾸만 쏟아졌다.

“내 다리만 멀쩡했어도 너 데리고 진작 도망쳤을 텐데.”
“난 괜찮아. 카잔스키도 아직 나한테 손대지 않았고, 여기 사람들도 나한테 잘해줘. 아마 카잔스키 때문에 잘해주는 거겠지만, 그래도.”

피트는 닉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닉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트를 힘껏 껴안았다. 닉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피트의 뒤통수를 감쌌다. 닉의 흐느낌에 피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트는 닉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고, 닉 역시 피트에게 자신이 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더는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분명 다른 좋은 집안을 알아보고 계실 거야. 나도 다리가 다 낫는 대로 알아볼게. 정 안 되면 정말 브래들리한테 시집와. 너한테 딱 어울리는 놈으로 키울게.”
“브래들리 울겠다.”
“싫다고 그러면 혼쭐을 내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을 울었다. 밖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비파의 가느다란 선율. 잠 못 이루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아버지의 자장가. 양들도 곤히 잠든 밤, 엎드린 개들이 눈을 빛내며 길게 울었다. 바람결에 봄소식이 실려 왔다.

 
***


오늘따라 바자르는 유독 붐볐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고, 좌판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길가에 묶인 말들은 하나같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높게 들었고, 낙타는 아무 데나 침을 뱉었다.

톰과 론은 시장 구경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바자르에 올 때면 사람들이 부탁한 물건을 먼저 사고, 그다음은 각자 필요한 물건을 샀다. 때때로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워낙 무뚝뚝한 성미라,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고 본론만 간단히 얘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톰이 테르반테이 마을을 침략하고, 카자흐 아일라우의 신부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인근에 파다하게 퍼졌다. 장차 타타흐 부족의 우두머리가 될 남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모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부에 대해 궁금해했다.

두 달 전에 주문한 화살촉과 검을 받으러 들른 대장간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불을 지핀 것은 대장간 주인이었다. 늘 술에 취한 것처럼 시뻘건 안색에 몸집이 비대한 남자는 소문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수량은 전부 맞는군. 수고했소.”

톰은 침침한 눈을 비비고 화살촉을 자루에 담았다. 옆에서 론이 검을 챙겼다. 묵직한 쇠붙이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톰은 약속한 잔금을 마저 치르고 말에 짐을 실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꼭 오랫동안 굶주린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신부는 싱싱하답니까?”

대장간 주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이 번들거렸다. 그가 던진 노골적인 질문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하나같이 떠들길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무슨 뜻이지?”

톰이 싸늘한 눈초리로 대장간 주인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얼마 전에 신부를 잡아 왔다고 들었소. 그것도 남자라지? 예, 오메가 말이오. 같은 사내라도 오메가들 아랫도리는 다르다던데. 여자들이랑도 다르고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조임이 아주 끝내준다고 하더군.”

대장간 주인은 두 손을 들어 엉덩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이봐, 탄센.”
“자네 좀 지나치군.”
“그래, 뻑뻑해서 들어가지도 않으면 어쩐다?”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휘파람까지 불었다. “이 자식들이…….” 론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도나도 말을 얹었다. 그들은 대낮부터 은밀한 잠자리 이야기를 고대했다. 분위기가 광적으로 달아올랐다. 대장간 주인이 어서 말해보라며 손목을 흔들었다. 톰은 잠깐 숨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푸르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좌판이 순식간에 엎어졌다. 순식간에 대장간 주인을 쓰러트린 톰은 무릎으로 그의 불룩한 배를 꾹 누르며 칼끝을 바닥에 찍었다. 칼날이 대장간 주인의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우윽, 윽, 크흑…….”

대장간 주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톰은 고통스러워하며 바동거리는 그의 목을 졸랐다.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바닥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힘껏 걷어찼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웃고 떠들지?”

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저 없이 평온한 말투였다. 경박한 웃음이 가시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바닥에 처박힌 대장간 주인을 위해 나설 의리 따윈 없었다.

“아내는 나의 기쁨이다. 매일 신선한 활력을 안겨주지. 대답은 이만하면 충분한가?”

톰이 묻자 대장간 주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톰은 가볍게 혀를 차고 그를 놓아주었다. 론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대장간 주인은 볼썽사납게 눈물을 찔끔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결혼 선물 고맙네, 주인장.” 론은 멀쩡한 좌판에서 대장간 주인이 성심껏 만든 단검 한 자루를 챙겼다. 대장간 주인은 감히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방정맞은 촉새들이 소동의 잔가지를 물고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혼란스럽던 시장은 질서를 되찾았다. 대장간을 들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수월했다. 상점의 주인들은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물건을 내어주었고, 아름다운 신부를 얻은 걸 축하한다며 덤을 얹어주기도 했다. 그 어떤 사람도 더는 저속한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볼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짐을 잔뜩 실은 말이 벌써 피곤하다며 꾀를 부렸다. 론은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며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였고, 그제야 흡족해진 말은 당당하게 몸을 펴고 튼튼한 몸을 자랑했다.

“자, 이만 돌아갈까.”
“아직. 들를 데가 남았어.”
“어디?”

겨우 말을 달랬는데 이번에는 톰이 문제였다. 계획이 어그러지자 론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톰이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내는 론을 억지로 끌고 간 곳은 장신구를 파는 가게였다. 가게 주인은 낯선 손님의 등장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평소 바자르에 들러도 찾을 일이 없던 곳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가게 주인도 타타흐 부족의 악명과 카잔스키 가문의 이름에 대해선 빠삭했으므로, 곧 정신을 차리고 유들유들한 낯으로 톰을 대했다.

손에 쥔 적 없는 물건. 톰은 가게 주인이 가지고 온 장신구들을 살펴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무엇이 피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줄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방황하던 시선이 마침내 한곳에 멈췄다. 터키석을 세공해서 만든 귀걸이였다. 간절히 염원하는 봄의 하늘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이걸로 하지. 얼맙니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주실 것으로 믿고, 오늘은 새로운 인연을 기념하는 뜻으로 제가 성의를 표하리다.”

가게 주인이 침을 튀겨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잘됐네. 어서 가자고.” 론이 하품을 하며 재촉했다. 하지만 톰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춤에 찬 지갑을 꺼냈다.

“가치 있는 물건은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하지. 더군다나 의미 있는 물건이라면. 아내에게 줄 선물을 거저 얻고 싶진 않습니다.”
“에구, 이러실 필요 없는데…….”
“주인장 말대로 앞으로 자주 찾겠습니다.”

톰은 기꺼이 값을 치렀다. 금화를 건네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넘치는 행복 속에 여유로운 미소. 그저 어렵게 얻은 기쁨에 감사하며 오욕을 부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제야 가게 주인은 긴장을 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옷감과 실, 그 밖에 도구를 파는 포목점이었다. 선반에 색색의 아름다운 비단이 자태를 뽐냈고, 실타래에 걸린 실에선 향기가 진동했다. 가게 입구에 걸린 작은 종이 바람이 불 때마다 꼭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톰은 부족 사람들이 부탁한 실과 옷감을 전부 사고 쓸만한 가죽도 몇 장 샀다. 론도 새 옷을 지을 옷감을 넉넉하게 샀다. 이어서 톰은 피트에게 줄 실을 골랐다. 아직 덜 나은 손으로 한 땀씩 수를 놓는 그 얼굴을 상상하며. 뾰족한 바늘 끝이 천을 통과할 때, 피트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톰에게는 각별하고 짜릿한 기억이었다.

“파란색 실을 왜 이렇게 많이 사?”

론이 톰의 손에 들린 실을 보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톰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매버릭이 파란색 실을 많이 쓰잖아.”
“이제 붉은색 실을 쓰게 해야지. 손목도 많이 나았으니 슬슬 문신도 새기고.”

말에 뼈가 있었다. 피트는 이제 톰의 아내이니,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카잔스키 집안의 가풍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 론의 생각이었다. 야생마는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주인이 생기면 과거는 잊어야만 한다.

“나도 마음만 같아선 당장 그러고 싶다만, 그랬다간 매버릭이 내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될 것 같아서. 아버지도 나도 같은 카잔스키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미처 생각 못 했던 게 있다.”

시름에 잠긴 톰의 얼굴에 론은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건들거리는 투로 물었다.

“뭔데?”
“매버릭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젊고, 돈 많고, 건강하고, 힘이 센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해.”
“하지만 매버릭이 점잖은 늙은이를 좋아한다면? 그건 내가 당장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20년은 기다려야 하잖아.”
“아아, 이제야 네가 갑자기 수염을 기르니 어쩌니 한 이유를 알겠다. 그래서? 어르신이랑 네 신부가 눈이라도 맞았대?”

론은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로 섰다.

“아니.”
“그럼 뭐가 문젠데. 설혹 매버릭이 너보다 어르신을 더 좋아한다고 해도, 수장 어른이 관심 없으면 그만이야.”
“아버지는 늙었어. 노망이라도 나면?”

톰이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그의 얼굴에 론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스.”
“늘그막에 추해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천벌 받을 놈. 부자지간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어르신이랑 너한테 딸린 식구가 몇인지 자각 좀 해라.”

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굴레처럼.”

어느덧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지친 태양이 서쪽 하늘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회색빛 하늘에 무정한 별들과 반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13. 달걀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나. 자리에 누운 피트는 이불을 은은하게 타오르는 화로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바자르로 떠난 톰은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떠난 빈자리가 심심했다. 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후련함이 그립기도 했다.

낮 동안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들과 함께 양을 치러 가고, 키르케와 천을 짜고, 저녁이면 옥사나와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골라 따로 챙기고, 닉에게 갖다주면 잠시나마 이야기할 틈이 생겼다. 이야기 샘은 마르지 않았다. 둘이서 함께 어렸을 때 장난을 쳤던 얘기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비로소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면,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다.

곁에 적막과 어둠만이 도사릴 때면, 잊고 싶은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얀 거품이 말라붙은 어머니의 입가를 기억한다.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고운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고, 화사한 미소도 저물어 침묵만이 맴돌던 그 순간을. 어린 피트는 싸늘하게 식어 딱딱하게 굳은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쓸쓸한 회상에 잠겨 훌쩍훌쩍 우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피트는 얼른 눈물을 그치고 눈물을 질끈 감았다. 익숙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보폭이 넓고 우아한 걸음걸이. 피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매버릭.”

커다란 손이 피트의 정수리를 덮었다. 피트는 잠든 체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톰은 피식 웃었다.

“안 자는 거 다 안다.”
“어떻게 알았어?”

피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귀가 움직였어.”

톰은 발그스레 물든 피트의 귓바퀴를 가리켰다. 인상을 찡그릴 때나 웃을 때나, 쫑긋 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피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귀를 매만졌다. 우습게 보였을까? 괜한 생각이 들었다. 흠흠. 톰이 헛기침하는 소리에 피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톰은 품에서 헝겊으로 싼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

피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헝겊을 풀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달걀이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삶은 달걀이 안에 들어 있었다. 유목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걀은 귀했다. 닭은 이동하며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가축이었고, 깨지기 쉬운 달걀은 관리도 번거로웠다. 그러니 정주민들이 사는 마을에서나, 혹은 바자르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바자르에서 샀다. 네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대서.”

톰은 말을 아꼈다. 사실은 귀걸이를 가장 먼저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피트의 앞에 있으니, 쑥스러운 마음에 달걀을 먼저 주고 말았다.

“구스가 쓸데없는 소릴 했네.”

피트는 입술을 삐죽이며 달걀 한 알을 집어 서슴없이 톰의 이마에 때렸다. “너.”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톰이 얼굴을 붉혔다. 피트는 키득거리며 금이 쩍 갈라진 껍질 틈으로 손톱을 넣었다.

톰은 피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트는 달걀 껍데기를 한곳에 모았다. 새하얀 달걀 속살에 반질반질 윤이 돌았다. 동시에 피트의 눈동자도 반짝였다. 피트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곧 입안에서 탱탱한 흰자가 으스러지고 고소한 노른자가 잘게 부서졌다. 모처럼 누리는 호사스러운 기분이었다.

“퍽퍽해. 얼마나 오래 삶은 거야?”

피트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글쎄.”
“난 반숙이 좋은데.”
“몰랐다. 다음엔 반숙으로 삶아줄게.”
“너는 안 먹어?”
“나는 배가 불러서.”
“그래, 나 먹을 것도 부족해. 넌 손도 대지 마.”

뾰족한 말에도 톰은 그저 웃었다. 피트가 삶은 달걀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며칠 간의 고생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삶아 본 적 없는 달걀을 삶겠답시고 요란을 떤 보람이 있었다. 뿌듯함으로 가슴이 뻐근했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무지무지 맛있어.”
“삶은 달걀이 좋아?”
“응, 좋아해.”

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멍하니 그를 들여다보던 톰은 손을 뻗어 피트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피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았다.

“왜.”
“껍질이 붙어서.”

톰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톱에 붙은 달걀 껍데기를 가볍게 튕겼다. “바보같이 웃지 마.” 피트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톰은 웃기만 했다. 손끝에 닿은 피트의 보드라운 뺨이 마음에 들어 다시금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피트는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톰의 단단한 턱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는 깨지기 쉬운 연약한 보석을 다루듯이 피트의 뺨을 어루만졌다. 피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막 안이 후텁지근해졌다.

“손이 왜 이렇게 거칠어?”

피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날이 건조해서 그런가 보다.”

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피트의 뺨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만지지 마.”
“여기도 붙었네.”

궁색한 변명이었다. 손톱을 튕겨봤자 먼지만 부옇게 일어났다.

“아파.”
“미안해.”

피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톰은 손을 황급히 떼어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피트는 거듭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피트가 용기를 내어 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텄네. 이러고 다녔어? 아프지도 않아?”

피트는 갈라진 톰의 손등을 문질렀다.

“좀 따갑긴 한데, 이 정도는 괜찮다.”

톰은 얼굴을 붉히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이대로 피트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너야 괜찮겠지. 근데 이 손으로 날 만지니까, 내가 아프단 말이야.”

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향했다. 톰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괜히 손을 쥐락펴락했다. 피트는 선반에서 연고가 든 작은 화장 용기 한 개를 찾아 다시 톰에게로 돌아왔다. 납작한 용기 뚜껑을 열자 안에는 유백색에 불투명한 연고가 들어 있었다.

“매버릭…….”
“가만히 있어.”

피트는 톰의 손등에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톰은 아찔해진 나머지 눈을 감았다. 손등에 닿는 피트의 숨결은 뜨거웠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장미꽃 향기가 났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했다. 그러던 중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톰은 슬며시 눈을 떴다. 피트는 톰에게 연고를 건넸다.

“너 줄게. 바르고 다녀.”
“넌?”
“난 하나 더 있어.”

피트는 씩 웃었다.

“네 몸이 고단한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빈다고 무슨 소용이야. 잘난 체하지 마. 부르튼 손을 하고서는. 남 신경 쓸 시간에 네 행복이나 찾아.”

피트는 그렇게 말하며 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그러더니 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코를 킁킁거렸다.

“이제 냄새가 안 나네.”
“씻었어. 매일 씻어. 지저분하게 살진 않아.”

망할, 슬라이더. 톰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론과 종일 붙어 다녀 그의 체취라도 묻었나 싶었다. 모처럼 피트가 경계심을 풀고 살갑게 다가왔는데, 천금 같은 기회를 허탈하게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유난스러운 톰의 반응에 피트는 깜짝 놀랐다.

“그럼?”
“바자르 가기 전에 들렀을 땐, 좋은 냄새가 났는데. 향이 다 날아갔어.”
“그 냄새, 마음에 들었어?”
“그냥. 냄새가 좋았어.”
“마음에 들었구나.”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밤이 깊어졌다. 어둠 속을 활보하는 들짐승들도 가만히 숨을 죽였다. 열기에 상기된 피트의 뺨과 축축하게 젖은 눈이 자꾸만 톰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도 한창때의 청년이니, 들끓는 혈기는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피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피트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감히 그에게 손을 댈 마음이 없었다. 톰은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피트가 톰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디가?”
“자야지.”
“어디 가서 자는데. 슬라이더랑 자?”
“아니.”
“그럼?”

피트는 물끄러미 톰을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경계심도 없는 무구하고 말간 얼굴. 톰은 탄식처럼 숨을 토해냈다.

“추워. 그냥 여기서 자.”

피트는 슬며시 손을 놓았다. 그의 눈동자는 가늠할 수 없는 덫과 같았다. 톰은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하루살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트막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 아늑한 요람처럼 느껴졌다.

톰은 피트를 끌어안았다. 피트는 달아나지 않았다. 톰은 힘을 주어 피트를 꽉 껴안았다. 이번에도 피트는 달아나지 않았다. 맞닿은 가슴에 잔잔한 울림이 전해졌다. 미숙한 청춘이 봉오리를 맺는 순간이었다.

“매버릭.”
“응.”
“나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일이 오는 것이 막막했는데.”

톰은 쓸쓸하게 웃었다. 만족을 모르는 엄격한 아버지의 차디찬 시선. 다정한 말을 건넬 줄 모르는 굳게 다문 입술과 거칠고 딱딱한 손. 단 한 번도 여느 부모처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이 없는 남자였다. 톰의 성취는 당연하고, 그의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므로 혹독한 체벌이 기다렸다.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엔 언제나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갈망이 버거웠다. 때때로 숨이 막혀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고는 했다. 이름 없는 필부가 되어 늙어 죽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

인생의 끝이 너무나 멀고 험준해 보였다. 그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에 얼마나 고배를 마셨던가. 톰 카잔스키에게 인생이란 의무였고,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업적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톰은 목이 멨다. 눈꺼풀 아래가 활활 타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는 이 격통을 숨이 멎도록 만끽하고 싶었다.

“요즘은 설레.”
“…….”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을 기대하며 잠들어. 내일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이제야 알았어? 나는 매일 그런데.”

피트가 웃었다.

“네 덕분이다.”
“아…….”
“매일 밤 네가 웃는 모습을 기대하며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웃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좋은 꿈일 거야.”
“…….”
“나는 이런 감정을 뭐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
“확실한 건, 그래.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어. 살아왔음에 감사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감사한다.”

피트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 수천 개의 별이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피트는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나먼 지평선의 끝. 쓸쓸하고 아름다운 잿빛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2.16 23: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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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센세는
세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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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23: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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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진짜 센세 우리 이젠 지하실에서 떠나지 않기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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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23: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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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로또돼서 센세한테 20층짜리 지하실 지어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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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00: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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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ㅜㅜ 진짜 감탄만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쓰는거야 ㅠㅠㅠㅠㅠㅠㅠ 풋풋하고 싱그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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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00: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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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너무좋아서 죽었음ㅠㅠㅠㅠㅠㅠㅠ 하 얘들아 사랑을해라....
[Code: 017c]
2023.02.17 00:4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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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ygall.com/img/30088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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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02: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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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09: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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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재밌다
[Code: 905a]
2023.02.18 00: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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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개 존 잘이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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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8 03: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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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나봐 진짜 댓글을 안 쓸 수가 없음 필력 도랐음 두 번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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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8 05: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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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ygall.com/img/421747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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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00: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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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네가 웃는 모습을 기대하며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웃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좋은 꿈일 거야.”
“…….”
“나는 이런 감정을 뭐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
“확실한 건, 그래.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어. 살아왔음에 감사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감사한다.”


>>>> 와 진짜 미친거 아니냐고 백년해로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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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04: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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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를 위해 전방에 함성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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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09:54
ㅇㅇ
얘들 연애하네.... 왐마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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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09:54
ㅇㅇ
유목아이스매브에게 내 수명을 다 떠넘겨주고싶다 제발 백년해로해주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986a]
2023.03.10 11: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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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썸타는거 내가 다 간지럽고 뜨겁넼ㅋㅋㅋㅋㅋㅋ 이랬던 애들이 나중에 찐으로 부부된다 생각하니까 미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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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9 04: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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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아 너 그거 사랑이다
[Code: a8f2]
2023.03.30 06: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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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톰이 하는 그루밍에 핸드크림도 추가될 예정..사랑을 깨달아가는 아이스보니까 나도 가슴이 근질근질해 센세는 사랑전도사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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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7 22: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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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ㅌㄷㄷㄷㄷㄷㄷ센세 계좌 당장계좌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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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1 20: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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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센세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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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5 03: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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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너무 좋아요 욕나와요 센세 나 잠깐 누울게 심장 터질 거 같다ㅇ<-<
[Code: a358]
2023.08.09 11: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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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센세 진짜 너무 아름다워서 눈뮬이 나ㅠㅠㅠㅠ 그저 감사해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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