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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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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8. 아버지와 아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드리워진 땅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힘차게 달리던 말들의 발걸음이 익숙한 초지의 풀 내음을 맡고 느려졌다. 말 등에 실린 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게으른 말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졸음을 털어냈다. 고삐를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사람 때문에 발끈한 말이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사나운 말은 채찍질에 못 이겨 도로 몸을 낮췄다.

알렉세이 카잔스키는 아들의 혼담을 논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올해 세 번째였다. 재작년에 거절한 칼라쉬 집안에서 막내딸을 얘기하며 두둑한 지참금을 약속했다. 막내딸은 앞서 얘기가 나왔던 차녀보다 아름다웠고, 조용하며 순종적인 여자였다. 평판도 좋아 눈독을 들이는 집안이 꽤 많았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성에 차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 근방에서는 빠르면 열두 살, 보통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이면 결혼식을 올리고 진정한 성인으로 대우받는다. 스무 살인 톰은 이미 혼기가 지났다. 순전히 알렉세이의 욕심 때문이었다. 톰이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오로지 카잔스키 가문의 이름만을 본 주변에서 혼담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톰이 자라며 차차 인망을 얻고, 그 이름이 알려지자 얘기하는 지참금의 액수도 크게 늘었다. 

알렉세이가 요구하는 조건은 까다롭고 엄격했다. 그는 사돈이 될 집안의 세력과 평판은 물론이거니와 지참금, 그리고 신부의 됨됨이까지 따졌다. 신부가 훌륭하면 지참금이 부족하거나 집안이 변변치 못했다. 집안이 훌륭하면 신부의 인물이 아쉬웠다. 그렇게 거절한 혼담이 수십 건이었다.

주변에서 톰을 홀로 늙어 죽게 할 생각이냐며 이만 고집을 꺾으라고 성화였지만, 알렉세이는 완고했다. 당사자인 톰도 결혼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니,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는 말로 늘 주변의 야단법석에서 빠져나갔다. 부족의 차기 후계자가 여태 짝을 찾지 못했으니, 사람들은 점점 더 조바심을 냈다.

그러던 차에 톰이 자신의 신부를 찾았다고 선언했다. 부족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알렉세이는 반대했다. 그런데 언제나 제 뜻을 묵묵히 따르던 아들이 처음으로 뜻을 거스르겠다고 말했다. 알렉세이는 크게 노했으나 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알렉세이였다. 성에 차지 않는 상대라도 아들의 신부로 들여야만 했다. 자식의 짝을 찾아주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이자 권위. 그 발판을 잃을 수 없었다.

때마침 칼라쉬 집안에서 다시 혼담을 주고받자고 연통을 보내왔다. 알렉세이에게는 무너진 권위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떠났고, 톰 역시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칼라쉬와의 혼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톰이 기어이 약탈혼을 감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급히 달려왔으나, 화살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후였다.

먼 길을 다녀온 아들을 맞이하는 옥사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차가웠다. 살가운 적 없는 모자였다. 주고받는 말에는 온기가 없었고, 마주하는 시선에도 애틋함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옥사나였다.

“톰이 신부를 데려왔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혼사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의 뜻 역시 거스를 수 없지.”
“칼라쉬와 혼담을 논했습니다.”
“지참금이 아까우냐?”

옥사나가 넌지시 물었다. 칼라쉬 집안의 가장 카한은 세속적인 사람으로 이윤에 밝았다. 재산을 불리는 재주가 있어 물려받은 재산을 갑절로 늘렸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명예였으니, 어떻게든 카잔스키 가문과 인연을 맺어 집안의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당연히 알렉세이에게 약속한 지참금은 막대했다.

“수장은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알렉세이가 일갈했다.

“영원한 건 없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너도 죽는다.”

옥사나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응수했다.

“제가 살아있는 한, 우리 부족의 수장은 접니다.”
“그렇다면 우두머리로서 자비를 베풀어라.”
“누구에게 말입니까?”
“톰이 데려온 전부 잃었다. 이제와서 돌려보낸다고 한들, 어느 집안에서 그 애를 데려가겠느냐?”
“물론 톰은 그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아버지인 제가 정할 것입니다.”

알렉세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옥사나는 천막을 나서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았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대면할 때이다.
 
***


“칼라쉬와 얘기가 끝났다. 칼라쉬의 여식과 혼인해라.”

알렉세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는 칼자국이 선명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도 걱정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톰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애정일랑 조금도 없는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 톰이 사는 내내 우러러보아야만 했던 얼굴이다. 단 한 번도 포옹해준 적이 없으므로, 톰은 아버지의 품과 체온을 몰랐다.

“저는 이미 아내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거역하겠다는 게냐?”
“아버지께서는 곧 손자를 보실 겁니다.”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만의 잔치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가야 할 모든 사람을 위한 잔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야만 비로소 정식으로 부부로 인정받았다. 그러니 톰이 피트를 자신의 아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녀도, 아이가 없는 이상 피트는 그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알렉세이에겐 이 사태를 수습할 마지막 남은 기회였다.

“태어날 아이가 우리 핏줄이라는 보장은 없다.”
“제 아입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피를 봤습니다.”

톰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알렉세이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도 제 아들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쯤은 진작 예상했다. 톰은 자신하고 있지만, 어차피 말뿐이다.

“네게 일 년을 주겠다. 만약 정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우리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동안 너는 네가 데려온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보상을 약속해라. 그리고 그 아이의 재가를 도와라. 제대로 된 짝을 찾아주란 말이다.”

알렉세이는 제 뜻을 관철했다.

“저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겁니다.”
“뭐라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습니다. 평생 아내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아껴주겠다고요. 아버지 역시 어머니께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톰은 진중하게 말했으나, 알렉세이는 그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들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평생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그리움 속에 살아가는 나약하고 미련한 남자라고 말이다. 

아내 타마라가 죽고, 알렉세이에게는 여러 번 혼담이 들어왔다. 알렉세이는 젊었고, 그에겐 무수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용맹한 전사이자 훌륭한 일손을 키워내는 것 역시 알렉세이의 마땅한 의무였다. 일족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사랑은 전부 타마라에게 주었으므로, 알렉세이는 더는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재혼하지 않았고, 재산을 물려받고 대를 이을 후계자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톰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네가 같다고 생각하느냐?”

알렉세이가 형형한 눈으로 톰을 노려보았다. 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아버지와 다르고, 제 아내도 어머니와는 다릅니다.”
“다르다?”
“제 아내는 산양처럼 싱싱하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겁니다.”
“감히 네 어미를 모욕하지 마라. 타마라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유일한 흠이라면 겨우 본 자식이 너라는 것뿐이다.”
“아니요, 어머니의 흠은 아버지를 사랑했단 겁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믿었고, 그래서 일찍 가신 겁니다.”

알렉세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톰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톰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쓰러지며 바닥에 놓인 의자와 집기도 함께 휘말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랑을 모르는 놈이 사랑에 대해 말해? 너는 네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아느냐? 타마라가 너를 낳았다. 타마라 없인 너도 이처럼 방자하게 굴지 못한다.”

알렉세이는 쓰러진 톰의 멱살을 잡고 힘껏 일으켰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알렉세이의 성난 눈초리에도 톰은 꿈쩍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말에 이성을 잃은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르신!”

난데없는 소란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론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톰이 알렉세이에게 멱살이 잡힌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허둥지둥 부자를 떼어놓았다.

“진정하세요,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론, 너는 이놈의 젖형제라는 놈이 일을 그르치는 걸 말리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부추겨?”
“어르신 말도 듣지 않는 놈을 제가 무슨 수로 말리겠습니까?”
“너희 젊은 놈들이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우두머리인 제 뜻을 거역하면서 아들과 규합한 젊은 놈들. 젊은 혈기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일을 벌이는 놈들이야 발에 채는 돌덩이처럼 흔하다. 젊다면야 그런 객기 한두 번쯤이야 부릴 수 있다. 그러나 우두머리에게 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랜 세월 다듬은 견고한 질서가 무너진다면, 혼란이 찾아온다.

“오해는 마십시오. 톰은 진작 결혼해야 했습니다. 부족의 우두머리가 될 친구인데, 여태 짝도 자식도 없으니 그간 모두 초조했습니다. 때마침 톰이 마음에 든 상대가 있다고 하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 그게 답니다.”

론이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부족의 젊은이들이 톰을 지지한다고 해서 수장을 갈아치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렉세이를 따르는 장년층은 굳건했고, 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 역시 알렉세이의 이름이었다. 만약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다면, 외부의 적이 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올 것이다. 론은 그런 개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후계자? 하, 오만하기 짝이 없군. 카잔스키가 어디 이놈뿐이냐? 사지가 온전하고 건실한 조카가 여럿이다. 반드시 내 씨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예, 그렇다면 얘기가 더 단순해지는 거 아닙니까? 후계자가 될 놈도 아닌데 굳이 대단한 집안과 사돈 맺으실 필요 있습니까? 이참에 톰을 버리십시오. 아무렇게나 살게 말입니다.”
“론 커너! 혀가 잘리고 싶다면 더 지껄여라. 예브게니아가 기뻐할 거다.”

알렉세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론에게 검을 겨누었다. 론은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을 들었다. 알렉세이의 칼끝이 예리하게 빛났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어르신. 용서해주십시오.” 론이 갈라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제야 알렉세이는 검을 거두어들였다.

“일 년이다. 내 말 명심해라.”

알렉세이가 톰에게 말했다. 톰은 말없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조용히 타오르는 잿빛 눈동자에 알렉세이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타마라와 닮은 얼굴로 자신처럼 말하고, 자신처럼 행동하고, 자신에게 맞서는 아들과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다. 차라리 생김새도 자신을 닮았더라면, 모든 게 쉬웠을 텐데.

론은 비틀거리는 톰을 부축하여 서둘러 천막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알렉세이는 엉망이 된 천막 안을 두리번거리며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타마라의 목걸이를 꺼냈다. 청금석으로 만든 그 목걸이는 타마라가 아이를 가졌단 소식에 알렉세이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타마라는 마지막까지 그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으면, 작별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기나긴 겨울, 가뭄으로 잿빛이 된 동토, 굶주린 양이 우는 소리. 모두 배가 고파 얼굴이 싯누렇게 뜨고, 추위에 부르튼 코끝과 손가락이 거칠거칠했다. 동이 틀 우렵, 아이 우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쇠락하는 한 해의 끝자락에 태어난 아이는 건강했고,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함께 죽음이 찾아왔다.

산실로 쓴 천막 안은 후텁지근했고, 피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아이를 받은 산파는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대야에도 핏물이 가득했다. 타마라는 지친 얼굴로 알렉세이를 맞이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보였다. 알렉세이는 타마라의 영혼이 그녀의 육신에서 서서히 떠나고 있음을 알았다.

―왜 우는 거야? 오늘처럼 좋은 날. 우리 아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잖아. 웃는 얼굴로 반겨줘야지. 당신, 애 얼굴도 제대로 안 봤다며?
―이제 우린 지금처럼 만나지 못한다.
―그게 어때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잖아.
―……그 날이 오늘은 아니다.
―료슈카, 미련한 사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야. 
―떠나기엔 일러. 우린 아직 이루지 못한 게 많다.
―이룬 게 왜 없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당신과 잠깐 헤어질 생각을 하니 슬프지만, 곧 다시 행복해질 거야. 
―타마라, 가지 마라.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료슈카.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이 오면, 힘껏 껴안아 줄게. 그리고 사랑을 나누자.
―타마라.
―…….
―타마라.
―…….

타마라는 웃는 얼굴로 떠났다. 알렉세이는 죽은 타마라의 몸을 껴안고 목놓아 울었다. 타마라의 황금빛 실타래와 같은 풍성한 머리카락, 맑은 호수와 같은 눈동자, 사과 빛 뺨, 따사로운 봄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소금처럼 귀한 미소. 이제 보내주어야만 하는 것.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얼굴. 평생 그리워할 이름, 타마라.
 
***


오랜만에 돌아보는 방목지는 평화로웠다.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려 풀이 많이 자랐다. 가축들은 살이 오르고, 사람들은 느긋해졌다. 양이 우는 소리가 정다웠다. 목청이 좋은 것을 보니 혹독한 겨울이 와도 무사히 살아남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물에 젖은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 낯선 얼굴이라면, 아들이 데려온 문제의 신부밖에 더 있겠는가.

“어르신네 망아지예요.”

피트의 품에 안긴 망아지가 애처롭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물에 흠뻑 젖은 망아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에게는 호된 시련이었다. 망아지는 어미의 품 대신에 피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너로구나.”

알렉세이는 피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물에 빠졌나 보군. 왜 죽게 두지 않았지?”

그리고 피트가 품에 안은 망아지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여기서 신세 진 게 있으니 도리는 해야죠. 어르신 아들은 밉고 싫지만요.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는 아직 잘 모르니까, 싫지는 않아요. 좋지도 않고요. 그리고 망아지가 죽으면 어미가 슬퍼할 거예요.”

피트는 조심스럽게 망아지를 땅에 내려놓았다. 망아지는 피트의 다리에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알렉세이는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작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망아지라서 그래요.”
“아니, 너 말이다.”
“제가요?”

피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몇 살이지? 이게 다 자란 게냐?”
“열일곱 살이에요. 제가 작은 편이긴 하지만, 앞으로 더, 더 자랄 거예요.”
“이렇게 자그만데 튼튼하긴 어디가.”

알렉세이의 못마땅한 눈초리에 피트는 발끈했다.

“뭐라고요? 저는 누구보다 건강해요. 그리고 사람 가축 보듯이 훑어보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네가 건방지다는 건 잘 알겠다.”
“그런 소린 많이 들었지만…… 적어도 어르신네 아들처럼 막돼먹진 않았어요.”
“그놈은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내 수치야. 죽게 뒀어야 했다. 그랬다면 오늘의 이 수모도 없었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자식인데 말을 그렇게 하세요?”

사이가 별로 안 좋은가? 알렉세이의 매정한 말에 피트는 괜히 마음이 쓰였다. 옥사나는 톰을 무척 아꼈고, 톰도 옥사나에게 깍듯해서 화목한 집안인 줄 알았는데 미처 몰랐던 복병이 숨어 있었다. 불화는 남의 일이라도 싫다. 아무리 미운 사람의 일이라고 해도 싫다.

“그 시답잖은 놈이 고른 것 치곤 씩씩하군. 그래도 너무 작아. 이래서야 애를 낳다 죽겠다. 애가 애를 낳는 꼴이니.”

알렉세이는 혀를 끌끌 찼다. 산도가 좁아 출산에 애를 먹는 남자 오메가가 그래도 봐줄 만한 건, 여자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좋아 일손으로 부릴만하단 것인데 이렇게 작아서야 일도 마음 편히 시키기에 글렀다.

게다가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이 무렵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지만, 처음 피트의 얼굴을 보았을 땐 기껏해야 열다섯쯤 된 줄 알았다. 젖비린내 나는 이 얼굴을 보고 마음이 동한 아들놈이 파렴치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피를 봤다는 건 역시 거짓말이군.’ 알렉세이는 확신했다. 아이를 낳기는커녕 남자를 받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다. 되바라진 것을 보니, 먼 훗날이 기대는 된다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피트에게 내린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피트의 집안이 좋고, 재산이 많아도 역시 지금 당장은 칼라쉬의 여식 쪽이 낫다.

“어르신이나 아들놈이나 왜 이렇게 앞서가요? 누가 이 집안 애 낳아준대요? 망아지나 챙기세요.”
“감히 나한테 대들지 마라. 나는 네가 딛고 있는 땅의 주인이다.”
“그렇다면 저는 손님이에요. 부족의 수장이나 되는 분이 손님 대접 형편없이 해서 인심이 야박하다고 손가락질받고 싶진 않으시겠죠?”

피트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손님 대접을 얼마나 잘하느냐는 유목민들에게 자신의 됨됨이와 재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제 배는 곯아도 손님 배는 풍족하게 채우는 것이 그들의 덕목이었고, 나아가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알렉세이도 더는 여유로울 수 없었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한 피트의 얼굴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뒤틀린 판국에 속을 들쑤신 꼴이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 싸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톰과 론이었다. 풀어놓은 양들이 배가 부를 때가 됐으니, 데리고 돌아갈 생각으로 발길 했다가 꽤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만났다.

“어, 네 신부랑 어르신이군. 가봐야 하지 않겠어?”
“아버지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분이니, 매브를 대놓고 괄시하진 못하실 거다. 그리고 두 사람도 친해져야지.”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드는데…….”

론은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알렉세이가 쩌렁쩌렁 호통치는 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피트는 주눅이 들지 않고 또박또박 받아쳤다. 슬슬 겁을 집어먹은 양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알렉세이가 이처럼 흥분한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아이스, 너는 저 꼴을 보고 싶어서 저런 꼴통을 납치한 거지?”
“명랑하고 좋잖아. 데리고 살면 심심할 일은 없을 거야. 아버지도 매일 열받으실 테고. 아버지에게 저렇게 맞설 정도니 더 바랄 게 없어.”

톰은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었다. 겨우 피가 멎은 입술이 도로 터져 다시 피가 스멀스멀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톰이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상처를 손으로 더듬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보다 입안에 터진 상처가 더 커서, 침을 삼키는 것도 고역이었다. 코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슬슬 말려야겠는데. 둘 중 하나 열 받아서 쓰러지기 전에.”

과열되는 분위기에 론은 조마조마했다. 얼마 전에 실컷 피를 봤으니, 당분간 시체 치울 일이 없길 바랐다. 안달을 내는 론과 달리 톰은 태연했다.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아버진 늙었어. 이제 그만 사실 때도 됐지.”
“천벌 받을 놈.”
 
***


“제가, 어!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부족의 우두머리라고 어른 대우를 해주려고 하는데 어르신은 도저히 답이 없네요. 어르신네 아들이 왜 그 모양인지 이제야 알겠어요. 어르신은 당신 아들이 수치니, 뭐니 하지만, 제가 보기엔 둘 다 똑같아요. 오만하고, 무례하고, 비겁해요.”

피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망아지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피트의 바짓단을 물고 늘어졌다. 망아지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피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알렉세이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래? 그렇다면 너도 네 부모를 닮았느냐?”
“……네?”

알렉세이의 날카로운 질문에 피트는 일순 맥이 탁 풀렸다. 쇳소리 나는 카랑카랑한 음성이 제 가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톰 카잔스키는 말투가 점잖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듣기 싫지는 않은데, 알렉세이는 목소리 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지. 자식은 부모가 가르치지 않은 것도 보고 배운다. 말해봐라. 네 부모는 널 어떻게 키웠지?”
“…….”
“협상에 능한 사람이란 건 알겠다. 그러니 너처럼 하자 많은 물건을 용케도 해치웠겠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사돈 될 집안이라고 해서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오물투성이 돼지우리에서 살만 피둥피둥 올라 야성도 기개도 죄다 잃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정주민을 혐오했다. 전사라면 지붕 아래에서가 아니라, 말 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초목, 두 다리가 달린 인간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남자든 여자든 여우 한 마리 정돈 잡을 줄 알아야 하고, 생명을 취해 생명을 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섭리였다.

“저는 부모님이 없어요.”
“아.”
“어릴 때…… 부모님이랑 일가친척이 전부 돌림병으로……. 아버지 친구분께서 굶어 죽어가던 저를 구해주시고 지금까지 키워주셨어요.” 
“…….”
“돌아가신 부모님도, 그리고 브래드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평생 올바르게 사셨어요. 저는 그분들을 존경해요. 그분들은 최선을 다해 절 가르치시고 키워주셨어요.”
“나는…….”

알렉세이는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찌를 기세로 덤벼들던 피트가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니 입맛이 썼다. 울어서 봐줄 만한 건 갓난아기뿐이고, 그 외에는 버겁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한곳에 머물지 않는 어르신네 보시기엔 제가 변변찮겠죠. 하지만 우리도 겨울이면 양과 말을 데리고 초지를 찾아요. 브래드쇼 아저씨는 건초를 사신 적이 없어요. 순전히 아저씨 힘으로 땅을 찾아 가축들을 먹이셨어요.”
“…….”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는 법을 배웠어요. 불씨를 지키는 법도, 글도, 셈을 하는 법도 전부 가르쳐주셨어요.”
“…….”
“제가 시건방진 건, 순전히 제 천성 때문이지 그분들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맹세컨대 부끄럽게 살진 않았어요.”

기어의 피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바람 같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손목이 부러지고,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처량한 상처투성이 고아가 울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피트는 뒷걸음질하며 눈물로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알아요. 톰 카잔스키가 절 납치했으니 저는 톰 카잔스키의 재산이죠. 어르신 재산이기도 하고요. 제 처지는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절 키워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이런 모욕을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피트는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더니 허리에 찬 단도를 빼냈다.

“뭘 할 작정이지?”
“아저씨와 아주머니 허물은 되지 않으려고요. 저 때문에 곤경에 처하시는 걸 지켜만 볼 순 없어요. 그리고 어르신은 저도 욕보일 수 없을 거예요.”

피트는 칼끝을 제 목에 겨누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거군.’ 이래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알렉세이는 단도를 든 피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주자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파들파들 떨렸다.

“피는 충분히 보지 않았나. 정 피를 보고 싶다면 나를 찔러라. 수모를 당한 건 너지, 내가 아니다. 허망하게 죽는다고 해서 네 부모가 기뻐할 것 같나? 게다가 뭐 하나 이룬 것도 없는 변변찮은 자식을.”
“제가 이룬 게 왜 없어요?”

알렉세이의 말에 피트가 반문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데.”

알렉세이는 눈을 크게 떴다. 타마라.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피트에게 타마라가 겹쳐 보였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닮은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다지도 가슴이 미어지는 까닭은…….

“……지금은 어르신 아들 때문에 불행하지만, 곧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
“그놈 때문에 슬퍼할 거 없다.”

알렉세이는 피트의 손목을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듀크 미첼과 나제쥬다 미첼의 아들 피트예요.”
“피트, 너는 내 손님이다. 네 안전과 평안을 약속하마. 내 땅에 머무는 동안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한결 누그러진 알렉세이의 목소리와 부드러워진 그의 시선에 피트는 다소 놀랐다. 어쩌면 소문처럼 잔인하고 무자비하기만 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잿빛 눈동자는 먹구름 낀 하늘, 반가운 비 소식을 가지고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때, 인기척이 두 사람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버지. 아내가 우는 모습은 저만 보고 싶으니, 이 사람 데리고 말을 보고 오겠습니다.”

톰은 알렉세이에게 등을 보이며 피트와 알렉세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피트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자, 아예 피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피트는 톰에게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알렉세이의 애틋한 추모도 동시에 끝이 났다. 그는 휘파람을 불어 말을 불렀다. 멀찍이 떨어져 하염없이 바람을 맞고 있던 말이 조용히 걸어왔다. 말 위에 올라탄 알렉세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


“하아아…….”

피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한 탓에 힘이 빠져 몸이 축 늘어졌다. 젖은 옷 때문에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더 불쾌한 건 등에 닿는 톰의 가슴팍과 자신을 감싼 그의 두 팔이었다. 두 사람이 등에 올랐으니 버거울 만도 한데, 톰의 말 바타르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시할 기세라고 생각했는지 힘차게 걸어 나갔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다. 두 사람 다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무슨 얘길 하는지 듣게 됐어. 아버지는 완고하고 고지식한 분이시지. 게다가 나 때문에 언짢으셨던 차고. 너한텐 미안하게 됐다.”

톰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피트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말짱한 얼굴이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지금쯤 엄청나게 미안해하겠지? 무뚝뚝하고 자존심 강한 분이라 사과는 절대 안 하시겠지만, 얼굴 보면 다 알아. 그래도 뭐, 다 자업자득이지. 원래 부모 욕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너.”

톰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트가 크게 상처받은 줄 알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차였다. 어쩌면 피트와의 관계를 개선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연한 피트의 얼굴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런 꼬장꼬장한 어르신은 꼭 골려주고 싶더라. 그리고 너희 아버지께서 아주 틀린 건 아냐. 난 확실히 시건방져.”

피트는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흥얼흥얼 말을 이었다. 신이 난 눈치였다.

“일부러 운 거야?”
“응.”
“아버지 당황하는 게 보고 싶어서?”
“응.”

피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톰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하고 피트를 힘껏 껴안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온몸의 혈관이 펄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통쾌함, 짜릿함, 유치하면서도 원초적인 감정. 술에 취한 것보다 갑절은 더 기분이 좋았다.

“너는 정말이지 최고의 아내다. 봐, 너 때문에 심장이 뛴다.”
“세게 안지 마, 숨 막혀.”

피트는 톰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바동거렸다.

“아버지 같은 분한텐 너 같은 며느리가 필요하지. 슬슬 기가 죽을 때가 되셨어. 매버릭, 나와 쭉 살아줘. 진심이다. 내게서 도망갈 생각 마라. 땅끝까지 쫓아갈 거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야.”
“어르신이나 너나 왜 이래? 미친 사람 같잖아. 서로 싫어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야?”

간신히 톰의 품에서 빠져나온 피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강인한 전사고, 훌륭한 우두머리다.”
“사랑은?”
“아버진 평생 그 사랑에 매몰되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사셨지. 사랑일랑 어머니께 전부 바쳐서 내게 줄 사랑은 남지 않으신 분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분이실 줄은 몰랐어. 막연한 소문만 듣고 네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닐 많이 사랑하셨구나. 그래도 너한텐…… 너무하셨네.”

아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다정해 보였던 건 착각이 아니었나. 피트는 알렉세이의 잿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울렁거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알렉세이는 타마라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구스가 캐롤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았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비록 지금은 그 꿈이 초라해졌지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막연한 희망이 피트를 이 막막한 절망 속에서 버티게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그야 그래도 자기 자식인데 너무 차갑게 대하시잖아.”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가르침을 소홀히 하신 건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 세상 사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 사랑이 어머니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서운하게 여긴 적은 없어. 아버지께서 내게 엄격하신 건 그만큼 나에게 기대하고 계신다는 증거야.”

때때로 그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지만. 톰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피트에게 혹여나 나약하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까…… 네가 괜찮다면, 나도 뭐라 말 얹을 순 없겠네. 아무튼, 의외라고.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너희 집안 사람들은 사랑 같은 거 모를 줄 알았거든.”
“사랑……. 그게 뭐가 대수지.”

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응?”
“아버지의 이름이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 때문일 거다.”
“뭐…….”

피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사랑하고 그리워한다고 해서 양이 저절로 자라고, 말의 배가 부르는 건 아니지. 사랑만 해서는 겨울을 날 수 없어.”

톰은 단호하게 말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피트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한 상처를 들쑤시는 건 아닐까 싶어 말을 돌려야만 했다.

“네 어머닌 어떤 분이셔?”
“모른다. 나를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나셨거든. 내가 아는 건…….”

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난 어머니를 닮았다고들 해.”
“그래, 네 아버지랑은 별로 안 닮았더라.”
“그래서 어머니가 궁금해질 때면, 강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는 했다.”

강물 위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애틋한 마음은 없었다. 그저 어머니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으니, 그 사실에 감사할 뿐. 그래도 인간의 본능만은 어쩌지 못해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또래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이제 나는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을 때보다 나이가 더 많다.”

타마라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른 죽음이었으나, 특별한 죽음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다. 태어난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다.

“아버지께 어머니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꿈이지만, 나는 서로 부대끼며 함께 늙어가야 할 당신의 현실이지. 삶이 고단할수록 꿈은 아름답지 않나. 아버지 이상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아름다우실 거다.”

톰의 말에 피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무어라 또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욱신거렸고, 코끝이 시큰했다. 이번에는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래?”

피트가 말이 없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억지로 울었더니 좀 졸려서.”
“눈 붙여. 춥지 않게 안아줄게. 아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감기 들라.”
“됐어. 이 정도론 끄떡없어. 그냥 가. 아니다, 내릴래.”

확실한 건 더는 톰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피트는 톰이 붙잡을 새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혼자 울고 싶어졌다. 구스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숨고 싶었다.

“같이 말을 보러 가기로 했잖아.”
“내가 왜?”

피트가 쌀쌀맞게 되물었다.

“새끼 양 구경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나.”

톰은 며칠 전에 론과 함께 새끼 양을 구경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피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양에게 타사간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타사간은 늙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지.”
“뭐가 다르단 거지?”
“달라. 카잔스키, 한마디만 하자.”

피트는 땅을 툭툭 걷어차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야. 살아야 원망도 하고, 욕도 하니까. 아버지 살아계실 때, 많이 미워해.”
“신선한 관점인데.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실컷 증오할 수 있을 때 증오해. 죽고 떠나면 그럴 수도 없어.”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여전히 나를 원망하고 있군.’ 톰은 숙연해졌다. 그는 말에서 내려 피트에게 다가갔다. 답답했다. 겨우 가까워졌나 했는데, 피트는 또 훌쩍 달아났다. 멀어진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또 널 화나게 했구나.”
“화난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네 얼굴 보기 싫어서 그래.”

피트는 톰의 손을 뿌리치고 쏜살같이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매버릭!”

톰은 점점 멀어져 가는 피트의 등에 대고 외쳤다. 피트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이 점점 가빠져 왔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기까지 끌고 오고, 왜 도망가지 말라고 그러고, 왜 영원히 함께 살자 그러고……. 날 사랑할 것도 아니면서.’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 피트는 순식간에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젖은 옷이 흙투성이가 됐다. 그러니 더 서러워졌다. 쓰라린 무릎을 부여잡고 피트는 씨근거렸다. 왜 울음이 터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톰 카잔스키가 자신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게다가……. 피트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도 모르는 톰의 어머니가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눈을 감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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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2.16 17: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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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센세 와줬어 ㅠㅠㅠㅠㅠㅠㅠ 센세 이즈유? 나 너무 행복하다 ㅠㅠㅠ
[Code: 0705]
2023.02.16 17: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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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나 아들놈이나 왜 이렇게 앞서가요? 누가 이 집안 애 낳아준대요? 망아지나 챙기세요.”

피트 성격 정말 매력있어 이렇게 당당하고 당돌하고 꾸밈없는 존재라서 아이스가 한 눈에 반한거 아니냐고 ㅋㅋㅋㅋ 옥사나에 이어 알렉세이까지 매며들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존잼
[Code: 0705]
2023.02.16 17: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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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아이스의 말에 매버릭이 울고 싶어진건 그만큼 매버릭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을 누구보다 원하고 바라왔기 때문이 아닐까? 얘들 빨리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졌으면 ㅠㅠㅠㅠㅠㅠ
[Code: 0705]
2023.03.10 01: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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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그래서 더 속상해서 운 듯 바버들 빨리 서로 사랑해라ㅠㅠㅠㅠ
[Code: 50bc]
2023.02.16 17: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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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ㅠㅠㅠㅠㅠㅠ 재업은 사랑이야ㅠㅠㅠ
[Code: 6a9b]
2023.02.16 18: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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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ㅠㅠㅠㅠㅠㅠ 오늘 나 붕키 생일인 줄 알았잖아 ㅠㅠㅠㅠㅠㅠㅠ 일단 손 좀 내밀어봐 ㅠㅠㅠㅠㅠ
[Code: a896]
2023.02.16 21: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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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은 사랑입니다 햐 보고또봐도 존잼이야ㅠㅠ 아이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행동은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인걸 빨리 깨달으라고ㅠㅠㅠㅠ
[Code: 6e5c]
2023.02.16 23: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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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센세 재업해줘서 고마워ㅠㅠㅜㅜㅜㅜ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나타나주다니 너무 기쁘다ㅜㅜㅜㅜㅜㅜㅜㅜ 재업은 사랑
[Code: 4078]
2023.02.24 0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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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혈압을 올려 암살을 시도하는 최고의 아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cc39]
2023.02.24 00: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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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부정하는 톰의 말에 왜 기분이 안 좋아지겠어ㅠㅠㅠㅠㅠㅠ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인거야 피트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c39]
2023.03.10 01: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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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그게 사랑이야 이 바부들아!!!!!!! 힝 울지마라 피트야ㅠㅠㅠ
[Code: 50bc]
2023.03.30 05: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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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센세필력 덕분에 시아버지x며느리도 맛있겠다 하면서 봄
아휴..사랑하는 사람가 함께하는게 단 하나의 꿈인데..톰 갈길이 멀다
[Code: af23]
2023.04.02 02: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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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라가 너를 낳았다. 타마라 없인 너도 이처럼 방자하게 굴지 못한다. >>> 여기서 알렉세이의 심정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진다ㅠㅠㅠ 유일한 사랑이 남긴 유산이자 죽음의 원인인데 아들놈은 사랑이 하찮다고생각하기나하고말이야ㅠㅠㅠㅠ ㅋㅋㅋㅋㅋㅋ근데 며느리로 아버지 혈압뻠삥시켜주는 불꽃효자놈ㅋㅋㅋㅋ
[Code: 44fb]
2023.04.17 19: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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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ㄷㄷㄷㄷ센세 진짜 천재다
[Code: bae6]
2023.05.25 03: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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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미 사랑하고 있잖아 첫사랑이라 눈치 못 챈거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a358]
2023.06.01 04: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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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글이다
[Code: 71d2]
2023.08.09 11: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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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너는 사랑을 하고있다고오ㅠㅠㅠㅠ 근데 시아버지 혈압 올리는 최고의 아내 진짜ㅋㅋㅋㅋㅋㅋ
[Code: d957]
2023.08.13 11:23
ㅇㅇ
나는 쓰레기야 시아버지와 며느리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88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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