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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5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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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늑대와 달


18. 초승달 아래


톰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연기가 매워 눈물이 찔끔 났다. 그는 냄비 안에 든 삶은 달걀을 꺼내 찬물이 든 그릇에 담았다. 따가운 눈을 비비며 그는 입을 우물거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달걀을 넣고 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불 앞에 쪼그려 앉아 매캐한 연기를 견디며 달걀 장수의 말대로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제법 얼굴이 익은 달걀 장수는 달걀을 삶을 때 소금을 한 숟갈 넣고, 식초도 넣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껍질이 깨지지 않고 보기 좋게 삶아진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달걀 표면이 실금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그릇 안에 든 얼음이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내며 녹았다. 톰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릇을 흔들며 달걀을 식혔다. 피트가 반숙이 좋다고 해서, 달걀 장수의 조언대로 삶았는데 그 결과는 껍질을 까기 전까지는 모른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릇이 식었다. 얼음은 전부 녹아 사라졌다. 톰은 새로 산 그릇에 삶은 달걀을 옮겨 담고, 그 위에 진분홍색 천을 덮었다. 천막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밤이 깊어 대부분 잠들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미숙한 사랑은 달빛 아래 천천히 커졌다.

천막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는 피트의 등이 보였다. 가벼운 잠옷 차림이라 몸의 굴곡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톰은 불쑥 달 기우는 밤에 보았던 피트의 나신이 떠올라 괜스레 몸이 달아올랐다.

“왔어?”

피트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위로 쭉 뻗은 눈썹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눈썹을 정리했네.’ 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잔털을 뽑아내고 끝을 가늘게 손질한 눈썹이 보기 좋았다. 왜 이 밤중에 눈썹을 정리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자꾸만 시선이 간다. 괜히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목에 돌이 걸린 것처럼 불편해졌다.

톰은 천막 가운데 놓인 상 위에다가 그릇을 내려놓았다. 피트는 상이 차려진 곳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공처럼 데구루루 굴러서 왔다. ‘맙소사. 가관이군.’ 톰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피트는 가장 크고 보기 좋은 것을 따로 골라냈다. 내일 닉에게 줄 것이다. 그다음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은 키르케를 위해 남겼다. 세 번째로 보기 좋은 달걀이 제 몫이다.

피트는 톰의 이마에다 삶은 달걀을 깨버렸다. 이미 각오했던 바라 톰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달걀을 편하게 깨라고 단단한 그릇도 새로 사고, 상도 바꿨는데 피트는 고집스럽게 제 이마에 대고 달걀을 깼다.

차라리 닭장을 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톰은 피트가 삶은 달걀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불편하게 쪼그려 앉아 연기와 싸운 보람이 있었다. 피트는 입이 작아서 한 번에 많이 삼키지는 못하지만, 입안에 든 것을 우물거릴 때 뺨이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것이 귀여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피곤한 줄도 몰랐다.

피트가 말도 없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 톰은 뒤로 나자빠졌다. 피트는 톰의 몸 위에 올라타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가 무언가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 얼굴을 또 바짝 갖다 댔다. 톰은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분을 망치는 데는 아버지의 고압적인 얼굴만 한 게 없다. 피트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입술이 달싹거렸다.

“있잖아.”
“응.”
“있잖아.”
“응.”
“아니야.”

맥이 탁 풀렸다. 눈썹 정리했는데……. 괜한 짓 했어. 피트는 실망스러움에 툴툴거리며 몸을 옆으로 뒤집었다. 촛불 몇 개 의지하고, 눈이 침침한 가운데 족집게로 눈두덩이에 듬성듬성 난 잔털을 죄다 뽑았는데, 따갑기만 따갑고 별다른 소득이 없다. 별론가? 키르케한테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매버릭. 눕고 싶거든 침대에 누워라.”
“오늘은 바닥에서 잘래.”
“매버릭.”
“너도 바닥에서 자.”
“너는…… 내 말은 곧 죽어도 들을 생각이 없지?”
“그래.”
“내가 하는 말이면 뭐든 반대로 하고 싶고?”
“잘 아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벌렁 누운 피트를 보고 톰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이 따뜻해졌지만, 밤공기는 아직 차갑고 바닥도 차갑다. 이 무렵이면 따사로운 햇볕에 깜빡 속아 방심했다가 호되게 감기를 앓는 사람들이 종종 생긴다. 피트의 우는 얼굴은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아파서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19. 천둥 치는 밤


—카잔스키, 왜 그랬어…… 왜.

창백하게 시든 피트의 얼굴에서 생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피트는 고통스러워하며 피를 토해냈다. 톰은 피트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초점을 잃고 식어가는 눈동자. 신음하는 입술. 

죽음과 직면한 톰은 손에 든 검을 떨어트렸다. 굳건한 바위산이 무너지고, 초목이 시들고, 강물이 말라 죽은 물고기들이 누런 배를 뒤집고 갈라진 바닥에서 펄떡거렸다. 세상이 맹렬한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이 싸늘하게 식은 피트의 몸을 집어삼켰다.

“헉…….”

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아프도록 문질렀다. 요즘 매일 같이 악몽을 꾼다. 그 악몽 속에서 피트는 자신의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모든 반짝임을 잃어버리고, 한 줌 재로 돌아갔다. 피트가 죽어가며 남긴 원망, 세상에서 영원히 잊힐 그의 짧은 생애, 차가운 손. 그 모든 것이 톰을 한없이 심란하게 했다.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톰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면서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새벽이 밝아올 무렵, 톰은 기어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어린 풀잎이 깔린 땅은 부드럽고 따스했지만, 그는 한기를 느꼈다.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이끌어주던 길잡이 별이 자취를 감췄다.

톰은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막막한 두려움과 직면했다.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피트가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고, 자신이 끌어안으면 피트의 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입을 맞추면 불이라도 번진 것처럼 활활 타올라서 온기를 잃은 잿더미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참을 수 없다. 피트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순환이었다. 봄이 완연하니 추운 겨우내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짝을 만나 세상에 흔적을 남길 때가 왔다.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갸름하게 휘어진 눈매, 늘 퉁명스레 쏘아대는 입술이 자꾸만 부추겼다.

만약에 피트를 영영 잃어버린다면. 톰은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이 뜨거웠다. 때때로 먼 곳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잿빛 눈동자. 상심에 잠긴 쓸쓸한 얼굴. 그 고독한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될까 봐 두려웠다. 이제 피트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


피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날이 따뜻해지니 낮에 곧잘 졸렸다. 아무래도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었다. 배가 부르다 못해 가슴까지 뻐근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호두 두 알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리는 소리가 났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양들이 꾸벅꾸벅 졸았다. 양들이 발 구르는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피트는 푸릇푸릇 돋아난 새싹들이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들었다. 저마다 이 눈이 부신 세상을 활개 치며 맘껏 소리를 내는데, 톰은 조용했다.

요즘 들어 톰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잘 웃지도 않았다. 봄이라도 타는 건가. 생각해보았지만, 그래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피트는 밤마다 톰이 몰래 밖으로 나가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잠든 걸 확인한 뒤, 외투만 걸치고 훌쩍 떠나면 아침이 밝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피트는 밤새 싸늘하게 식어가는 옆자리를 더듬으며 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제도, 그저께도, 꼬박 열흘을. 어느새 톰과 함께 잠드는 게 익숙해져, 그가 없는 밤이 길고도 외로웠다. 바스락거리는 바람 소리와 먼 곳에서 굶주린 늑대가 우는 소리가 무서워서 귀를 틀어막고 오들오들 떨기도 했다. 늑대 우는 소리는 싫다. 옛날 생각이 난다. 혼자서는 죽은 어머니를 업지도 못했던 나약하고 어린 그 시절이.

어젯밤은 유독 늑대 한 마리가 집요하게 울어댔다. 피트는 톰을 찾으러 갈까 망설이다가 관뒀다. 그가 자신을 피해 숨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옷장에서 톰의 옷 한 벌을 꺼내 그를 대신해서 꼭 끌어안고 누웠다. 희미한 톰의 체취. 젖은 흙냄새.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그 냄새에 집중하니, 더는 늑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체온만은 어쩌지 못해서. 피트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껴안았다. 팔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힘이 더 세졌으면 좋겠다.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안을 수 있게. 톰이 자신을 부둥켜안을 때처럼.

“어제, 자다 말고 어디 간 거야?”

피트가 넌지시 물었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일이 생겨서 바빴다.”

톰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얼버무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픈 양이 생겼어. 놈만 그런 건지, 전염병이라도 생긴 건지 당분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그게 다야?”
“그래.”
“그래…….”

피트는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흙을 뒤집었다. 시커먼 굴에서 개미 한 마리가 더듬이를 세우고 기어 나왔다. 피트는 나뭇가지로 길 하나를 터서 개미가 그쪽으로 가도록 유도했다. 길을 발견한 개미는 먹이를 찾아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해. 짜증 나. 피트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꽃가루 때문인지 자꾸만 눈물이 찔끔 나왔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어금니가 으드득 갈리도록 세게 물었다.

 
***


늦은 오후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끼며 흐려지더니, 밤이 되자 하늘이 쩍 갈라지며 천둥이 쳤다. 그 소리가 땅이 울릴 정도로 요란했다. 겁 많은 짐승들은 일찌감치 바위틈이나 토굴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잠귀 밝은 젖먹이는 목청껏 울어댔다. 사지를 비틀며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쩔쩔매는 서툰 부모의 어깨가 근심으로 무거웠다.

양들을 가둔 울타리가 난리 통에 무너졌다. 소란이 일었다. 손이 한가한 남자들이 무너진 울타리를 두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모였다. 천둥소리에 놀라 달아난 양은 잘못이 없다. 당장 몸을 피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그 수가 너무도 많아 문제였지만.

톰도 옷을 갖춰 입고 현장으로 나왔다. 앞서 도착해 손해를 파악 중이던 론이 톰을 발견하고 뜨악했다.

“톰,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론은 삿대질했다. 톰은 그의 어깨 너머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스를 노려보았다. 한스는 울타리 담당이었다. 바로 이틀 전에 톰이 북쪽 울타리가 낡았으니 수리를 하라고 일러두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났다. 엄중한 질책이 두려워 한스는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너!” 외치며 한스를 뒤쫓는 톰을 론이 가로막았다.

“돌아가라, 톰. 천둥 치는 밤에 아내를 혼자 두지 마.”

론은 근래 톰이 피트를 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사랑에 섣불리 참견할 수 없으므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천둥이 요란한 밤, 톰은 피트의 곁에 있어야 했다. 론은 천둥을 무서워하던 겁많은 아내를 떠올렸다. 귀를 틀어막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가엾은 모습을.

“피트는 강한 사람이야. 천둥소리에 겁먹지 않아. 양들은 몇 마리나 도망쳤지?”
“돌아가라고 말했다.”

론이 드물게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톰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그에게 론이 다시 말했다.

“여긴 내가 책임지고 맡을 테니까 넌 가서 네 아내를 챙겨.”
“양들이 멀리 가기 전에 얼른 찾아야 해.”
“이 자식아!”

더는 참을 수 없어 론은 톰의 멱살을 잡아챘다.

“넌 혼자서 태산도 받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네가 그렇게 잘났어?”

론이 쩌렁쩌렁 외쳤다. 천둥도 위축될 기세였다. “슬라이더.” 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론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론은 톰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꺼져! 여긴 얼씬도 하지 마.”

론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늘 쾌활한 남자가 한 번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미련한 자식.’ 론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때때로 톰이 애처롭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려는 그가 안쓰럽고 답답하다. 한 번도 힘이 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속이 오죽할까. 차마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저러다 톰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른 막대한 책임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힘들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도 좋을 텐데. 그리고 묵묵히 뒤따르는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면 좋을 텐데. 론은 마른기침을 했다. 목이 칼칼했다.

 
***


톰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달도, 별도, 구름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곳으로. 하지만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현실이 끝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톰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막으로 돌아왔다. 등롱을 든 피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톰은 제 눈을 믿지 못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피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느슨하게 묶은 두건 사이로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빠져나와 물결처럼 흘렀다.

“천둥소리에 놀라서 깼어?”

톰이 물었다.

“천둥소리 때문에 깨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어.”

피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밖에 나왔어.”

톰은 피트의 안색을 천천히 살폈다. 혹여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혼자 울지는 않았는지, 덜컥 열이라도 오르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다소 창백했지만, 눈빛은 맑았다.

“일어나니까 네가 자리에 없어서, 너 찾으러 나왔어.”

피트는 팔에 걸고 있던 숄을 펼쳐 톰의 어깨에 걸쳤다. 피트의 손이 스치자 톰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차마 톰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어서.

“울타리가 무너졌지?”

피트가 물었다. 톰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양들은 다 찾았어? 몇 마리나 도망갔어?”
“잘 모르겠다. 지금 론이랑 다른 사람들이 찾고 있어.”
“같이 가자. 울타리 고치는 거 도와줄게.”

피트는 등롱의 손잡이를 고쳐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 덮개 밖으로 퍼져나온 빛이 두 사람의 앞길을 환하게 밝혔다. 톰은 제자리에 오도카니 섰다. 그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북받쳐 올랐다. 

가슴이 먹먹했다. 허물일랑 없는 피트의 말간 얼굴이 숭고하게 보였다. 피트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원망도 하지 않았고, 자신을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닥친 시련 앞에 방황하는 자신에게 불빛을 밝혀주었다. 톰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톰이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자 피트는 등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피트는 짓궂게 웃으며 톰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래, 카잔스키. 설마 천둥이 무서워서 그래?”
“피트.”
“겁쟁이.”
“피트, 너는 정말이지…….”

톰은 밀려드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처롭게 떨었다. 그는 거듭 한숨을 쉬며 피트의 이름만 읊조렸다.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피트의 이름이 곧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천둥 치는 밤하늘 아래 방황하는 처량한 남자. 그 떨림이 멎을 때까지 곁에 머물러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피트는 톰을 마주하고 섰다. 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손으로 톰의 귀를 막아주었다. 

“이러면 천둥소리 안 들릴 거야. 키만 큰 겁쟁이. 맨날 잘난 체하면서. 그래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천둥이 멎을 때까지.”

환한 미소가 등불보다 더 밝았다. 톰은 피트를 품에 안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휘둥그레 떠진 피트의 눈이 얇은 눈꺼풀 아래 까무룩 잠겼다. 피트는 톰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차가운 옷보다 그 주인의 품이 훨씬 따스하고 좋았다. 피트의 뺨이 씰룩거렸다. 톰이 입천장을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자신이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 홍옥수


집을 짓던 거미가 잠깐 숨을 돌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촘촘하게 엉킨 거미줄에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넓은 품 아래, 알렉세이와 피트가 있었다. 피트는 요즘 톰보다 알렉세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는 법은 전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톰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렉세이한테 배울 게 아주 많았다. 그는 노래도 잘 불렀고, 악기도 훌륭하게 연주했다.

피트가 어제부터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알렉세이는 마지못해 한동안 찾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인 돔브라를 들고나왔다. 돔브라는 길쭉한 배를 반으로 가른 듯한 몸뚱이에 목이 길고, 두 개의 줄을 퉁겨 연주하는 악기다. 알렉세이는 그 두 개의 줄을 자유자재로 튕기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했다.

바지런히 줄을 뜯던 알렉세이의 손이 멈췄다. 피트의 노랫소리도 덩달아 멈췄다. 피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렉세이는 더는 들을 것도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 불러라. 음이 틀렸다.”
“또요? 아까는 가사가 틀렸다면서요.”

피트가 높다란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했다.

“음정도 가사도 박자도 다 틀렸어. 가장 심각한 건 음정이고. 너처럼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본다.”

목소리는 맑고 또랑또랑한데 이상스럽게도 노래는 어설프다. 보통 목소리가 좋으면 노래도 곧잘 부르는 법인데, 피트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처음에 알렉세이는 피트가 자신의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보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피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그러니 뭐라 말은 못 하겠다만, 계속 듣고 있자니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가 연주를 할게요. 어르신이 노래를 부르세요.”

피트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세이의 손에 들린 돔브라를 휙 낚아챘다.

“시건방진 것.”

알렉세이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으로 줄을 잡았다. 악기는 그럭저럭 연주했다. 결코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노래보단 나았다. 알렉세이는 팔짱을 끼고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다. 쉰 음성이 또 다른 악기처럼 들렸다. 한참 돔브라를 연주하는 데 열중하던 피트가 돌연 손을 내려놓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그러지?”

알렉세이가 물었다. 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어르신 아들은 요즘 바쁜가 봐요.”
“그래?”
“아니면 제가 질렸거나.”

피트는 쓸쓸하게 웃었다.

“잘됐어요. 사람 착각하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선 긋는 게 저한테도 좋죠. 어차피 전 겨울이 되면 돌아갈 거니까요. 어르신 아들이 좋은 혼처를 알아 오면 더 일찍 떠날지도 모르죠. 예단은 거의 다 타버렸지만, 그래도 제 사정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데려갈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사는 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아요.”

피트는 신코로 땅을 툭툭 차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속에 담아 둔 말을 전부 쏟아내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란해졌다.

“톰은 네게 나쁜 사람이군.”

알렉세이의 말에 피트는 열없이 웃기만 했다.

“새삼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지? 톰이 널 피하기라도 하는 게냐?”

알렉세이가 물었다.

“바쁘대요. 양이 아프다나……. 내일은 망아지가 아프겠죠. 모레는 사냥매가 아플지도 모르고요.”
“네가 말을 걸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겠지.”
“어떻게 아셨어요?”

피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세이는 팔짱을 풀고 피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맵시 있게 모양을 낸 눈썹, 뺨에 얼룩진 분 자국. 수줍음에 몸을 감췄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며 은근히 재촉하는 희미한 향기. 피트의 장신구도 눈에 들어왔다. 알렉세이의 눈에 차지 않는 소박한 물건이었지만, 피트가 가진 것 중엔 제일 좋은 것이었다. 아끼느라 자주 착용하지 않았는지 자잘한 흠집 하나 없었다. 

알렉세이는 속으로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타마라는 자신이 돌아올 때를 맞춰, 몰래 몸단장을 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다시 빗고, 화장을 했다. 집안일로 바쁜 와중에 짬을 내는 거라 늘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때때로 분을 잘못 칠해 얼굴이 얼룩덜룩할 때가 있었다. 타마라의 콧잔등에 하얗게 일어난 얼룩을 볼 때마다 알렉세이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피트, 따라와라.”

알렉세이가 턱짓했다. 피트는 폴짝폴짝 정신없이 뛰며 그의 뒤를 따랐다. 활기찬 건 좋다만, 지나치게 활기차다. 게다가 지칠 줄을 몰랐다. 알렉세이는 골이 다 지끈거렸다. 자신의 주변에 피트 같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피트 하나로 충분했다.

알렉세이는 피트를 자신이 기거하는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성역과도 같은 곳. 그의 천막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옥사나, 의원인 바샤 영감. 아들인 톰도 알렉세이의 천막에 감히 발을 들이지 못했다. 물론 피트는 그런 사정을 잘 몰랐다.

천막 안은 알렉세이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를 온전히 간직한 곳이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깨끗하게 관리한 내부는 밝았다. 장인이 만든 고풍스러운 가구, 오밀조밀한 문양이 펼쳐진 미색의 벽걸이와 사막의 모래처럼 깔린 카펫. 모두 공들여 만든 것이었지만, 하나같이 낡은 티가 났다.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천막 안을 두리번거렸다. 의외였다. 알렉세이라면 색이 어둡고 진중한 느낌으로 실내를 꾸밀 줄 알았는데, 밝고 따뜻했다. 들꽃이 흐드러진 꽃밭 위에 선 듯했다. 차갑고 선이 굵은 남자의 방이라기보다는, 가냘프고 뺨이 붉은 소녀의 방처럼 보였다.

“벽걸이랑 카펫이 멋지네요. 어르신이 직접 고르신 거예요?”
“아니.”
“그럼요?”
“아내가 골랐다.”

알렉세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죄송해요…….” 피트는 우물쭈물 말했다.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다.” 알렉세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천막 안의 살림살이는 전부 타마라의 손을 거친 것이다. 타마라가 좋아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색으로 가득 채웠고, 그녀의 손때가 묻은 가구들이 세상을 떠난 주인을 추모하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알렉세이는 타마라의 흔적이 남은 세간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이 싫어서 직접 쓸고 닦고 관리했다.

알렉세이는 물푸레나무로 만든 문갑을 열어 안에서 패물함 하나를 꺼냈다. 피트는 멀뚱히 서서 알렉세이를 지켜보며 눈을 깜빡였다. 알렉세이는 패물함을 피트에게 건넸다.

“자, 받아라. 이제 네 것이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이미 어르신께는 분에 넘치도록 신세를 지고 있어요.”

피트는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급구 사양했다. 알렉세이는 패물함을 열었다. 금으로 모양을 내고 홍옥수로 장식한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귀걸이가 안에 들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한층 더 고풍스럽게 보였다. 

“봄이다. 젊은이들은 멋을 부려야 좋아. 그래야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찾을 수 있다.”

알렉세이가 말했다. 피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 이리 다오.” 알렉세이가 다시 말했다. 피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렉세이는 팔찌 한 쌍을 피트의 손목에 채웠다. 이어서 그는 피트의 등 뒤로 걸어가 목걸이도 채워주었다. 귀걸이는 피트가 직접 차도록 했다.

 
***


“피트, 안에 있느냐?”
“네, 할머님.”

옥사나의 방문에 피트는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어쩐 일이세요?”
“네 옷 한 벌 지었다. 이제 날이 따뜻해졌는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무겁지.”

일전에 네 옷을 지으라고 줬던 가죽이랑 천은 죄다 톰의 옷을 만들어 버렸고. 옥사나는 그 말을 삼키며 가지고 온 옷을 피트에게 건넸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네. 어르신은 장신구를, 할머님은 옷……. 피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챙기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감사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를 끓일게요.”
“못 보던 목걸이구나. 가만, 목걸이뿐만이 아니군.”

옥사나의 시선이 피트가 착용한 장신구에 머물렀다. 옥사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눈에 익숙한 물건이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혼수품이었다. 타마라가 시집왔을 때, 그녀에게 앞으로 잘 지내길 바란다며 물려주었다. 타마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물건이 오늘에서야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네. 어르신께서 주셨어요.”

그런 사연을 모르는 피트는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천막 안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고 향긋한 차 냄새가 풍겼다. 피트는 잽싸게 움직여 푹신한 방석을 깔고, 옥사나를 상석에 앉혔다. 소박한 상 위에 놓인 주전자와 찻잔이 아직 따뜻했다. 피트가 조금 전까지 차를 마시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자질구레한 바느질거리가 가득했다.

피트는 새로 물을 끓이고 선반에서 작은 차합을 꺼냈다. 백자로 만든 차합이었는데, 톰의 말로는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고 했다. 피트는 톰의 씀씀이가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했다. 차합 안에는 아끼느라 향만 맡아보고, 실제로는 우려본 적 없는 비싼 찻잎이 들어 있었다. 입에 맞으면 또 사다 주겠다고 톰이 말했으나, 마셔 본 적이 없으니 입에 맞는지도 몰랐다.

개완도 새로 꺼냈다. 차합처럼 백자로 만든 개완이었는데 주둥이가 얇고 선이 유려했다. 결혼 선물이라며 론이 준 것이다. 피트는 론도 씀씀이가 헤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둘이 사이가 좋은 모양이었다. 지긋지긋한 한 쌍이다. 차라리 둘이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면 좋았을 텐데.

잠시 후 물이 끓었다. 피트는 먼저 새로 꺼낸 개완에 옥사나가 마실 차를 우렸다. 그다음 자신이 마실 차를 우렸다. 비싼 찻잎은 쓰지 않고, 한 번 우려낸 찻잎에 다시 물을 부었다. 피트는 찻잎이 아까워서 한 번 우리면 적어도 세 번은 다시 썼다. 그러면 차는 맹물과 다를 게 없었다.

“자, 네가 이걸 마셔라.”

옥사나는 피트가 공손히 내민 개완을 도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네? 하지만…….”

피트는 주뼛거렸다. 옥사나는 가볍게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너보다 오래 살았단다, 얘야. 당연히 너보다 좋은 차를 많이 마셨지. 너도 그래야 한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차를 마셔라. 그래야 안목이 생긴다. 안목이 있어야만 아이들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어.” 
“…….”
“네 자식이 변변찮게 살길 바라진 않지 않으냐. 당장에 배가 부르고 따뜻하다고 현재에 만족하며 머물지 마라.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

옥사나의 진심 어린 조언에 피트는 울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개완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네 마음 씀씀이는 기특하구나. 너는 참 착한 아이야.”

옥사나는 피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그를 다독였다. 옥사나는 피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주었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옥사나는 피트의 자수를 봐줬다. 틀린 곳을 찾아주고, 바탕에 어울릴 실을 추천했다. 그리고 간단한 문양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피트는 배움이 빨랐다. 해면처럼 빨아들였다.

“잘 어울리는지 보게 입어 봐라.”

차를 다 마시고, 옥사나가 말했다.

“지금요?”
“그래.”

피트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었다. 안에 입은 속옷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찢어진 곳은 꼼꼼하게 꿰맨 상태였다. 옥사나는 흡족했다. 피트는 옷을 갈아입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역시. 키가 좀 자랐구나.”

옥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가 짧아진 것이 자꾸만 마음이 쓰였는데, 예상했던 대로였다. 겨울이 지나고 피트는 성숙해졌다. 아직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전에는 없던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말요? 전 살이 쪄서 옷이 작아진 줄 알았어요.”

피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앞으로 한 뼘은 더 자라겠죠?”
“아니. 그만큼 자라진 않을 것 같구나.”

옥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피트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흐려졌다. “그래요…….” 피트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건 아래 늘어트린 땋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잔머리가 삐져나왔다. 옥사나는 손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앉아라. 머리를 다시 손질하자. 지저분하게 다니면 못 쓴다.”

피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옥사나는 여러 갈래로 땋은 피트의 머리카락을 전부 풀었다. 머리숱이 하도 많아서 꼭 밤하늘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은하수가 흐르는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옥사나는 피트의 머리를 세심하게 빗고 한 가닥으로 크게 잡았다. 그러자 피트가 고개를 흘끔 돌렸다.

“왜 한 갈래로 땋아요?”
“그게 더 어울린다. 이제 너도 어른이다. 애들처럼 하고 다닐 순 없잖으냐?”
“그치만…….”

피트는 말끝을 흐렸다. 어린아이들과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대개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는다. 그리고 끝단마다 작은 구슬을 달았다. 몸을 움직일 때면 구슬이 짤랑짤랑 흔들리는 광경이 꽤 볼만했다. 

결혼한 여자들은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았다. 큼지막하게 땋은 다음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거나 위로 틀어 올려 모양을 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는 여자는 나이가 아주 많아서 비록 결혼하지 않았지만, 어른으로 대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피트는 어렸다. 아직 결혼 적령기였고, 그의 손목에는 친정의 문양을 새긴 문신만이 새겨졌다. 그러니까 옥사나의 말뜻은 자신을 카잔스키 집안의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비록 톰과의 사이에 아이도 없고,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카잔스키 집안의 문양도 새기지 않았지만.

“얌전히 있어라.”

옥사나는 피트의 정수리를 빗으로 딱 소리 나게 때렸다. 피트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매를 맞고 나서야 피트는 얌전해졌다. 입은 쉬지 않고 투덜거렸지만.

“이제 됐다. 머리숱이 많아서 모양이 풍성하게 잡히는군.”

옥사나는 따로 챙겨온 머리끈으로 피트의 머리카락 끝단을 묶었다. 열매 모양의 술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피트는 손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낯설었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 근육을 마구 씰룩거리고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러다가 옥사나에게 또 한 대 쥐어박혔다.

“할머님, 제가 눈썹을 정리했는데요.”

피트는 얼얼한 머리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어요.”

피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료샤는 알고 있다.”

옥사나는 피식 웃었다.

“어르신도 별다른 말씀 없으셨는걸요?”
“그 애는 원래 말주변이 없다.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녀석이야. 봐라, 너한테 봄이 왔으니 그에 어울리는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까지 주었잖느냐. 네가 스스로 가꿀 마음이 생겼다는 걸 알고 챙겨주는 거다. 다른 뜻도 있다만.”
“다른 뜻은 뭔가요?”
“그건 알료샤도, 나도 나설 일이 아니다. 너도 곧 알게 될 테니, 기다리려무나.”

옥사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대체 뭘까? 피트는 가슴이 이상스레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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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2.2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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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천둥이 멎을 때까지.” 이렇게 말하는 피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ㅠㅠㅠㅠㅠ 센세 너무 너무 재밌다 센세는 천재야 ㅌㅌㅌㅌㅌㅌ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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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03: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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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키스까지 해놓고 왜 또 피하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아부지 진짜 매력쩐다.... 톰 카잔스키 분발해야 해...!! 귀걸이 언제 줄 거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버지한테 받은 장신구 보고 또 질투 쩔게 하려낰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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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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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기돋게 납치해서 데려와놓고 삽질 거하게 하는 톰 너무 귀엽고 풋풋하고....근데 피트가 죽는 꿈은 왜 꾸는 거지? 톰의 심층심리란 도대체...... 아 다 됐으니까 빨랑 피트 꾸민 거 알아주라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억지로 데려왔으면 예뻐해조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b58]
2023.02.26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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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 배려가 보기 좋다 ㅠㅠㅠㅠㅠ 톰 피트 둘 다 너무 많은 생각하지말고 직진해버렷 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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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07: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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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는 준비가 됐는데 톰은 그걸 몰라주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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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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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자나!!!!카잔스키 알았자나!!!!혼자 속으로 생각하지말고 말을하라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진짜 이번에 어른들 도움받아 대차게 꾸미고갔는데도 암말안하면너진짜 부족에서 쫒겨난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304]
2023.02.26 09: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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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해라 이녀석들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쑥쓰러워하는 초딩들가탴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29ac]
2023.02.28 20: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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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에 알렉세이 너무 험악하고해서 알렉세이 나올때마다 긴장했는뎈ㅋㅋㅋㅋㅋㅋㅋ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ㅠ피트 인정받는듯해서 내가 다 행복함 이제 톰멍청이카잔스키만 지 마음 인정하고 피트랑 천년만년 양치고 행복하게살면되겠어ㅜㅜ 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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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20: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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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옥산나가 한뼘은안클거라고 존나단호하게말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빵터짐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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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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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순환이었다.

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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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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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바버 겁쟁이 사랑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네ㅋㅋㅋㅋㅋ 피트 속상해서 눈물 찔끔 흘리는 거 어쩔거야ㅠㅜ 그래도 어르신들이 잘 챙겨주시고 마음 써 주는 거 좋다
[Code: 0524]
2023.04.02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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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밀려드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처롭게 떨었다 이 문장 너무 좋아!! 시할머니랑 시아버지가 한껏 꾸며준 피트보고 감동받아서 톰 또 우는거 아니야?!ㅋㅋㅋㅋㅋㅋ
[Code: 7892]
2023.04.18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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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진짜 최고다..천재야
[Code: 4d29]
2023.05.25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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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흐뭇하닼ㅋㅋㅋㅋㅋ
[Code: dad1]
2023.08.0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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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아악 너.무.조.아!!! 한줄기 등롱보다 밝게 아이스의 밤에 빛을 비춰주는 피트ㅠㅠㅠㅠ 아이스야 네 아버지 견제만하지말고 분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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