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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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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22. 사냥


봄의 축복 아래 비쩍 마른 양과 망아지들이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가축들은 목초지에 돋아난 푸릇푸릇한 새싹을 빠르게 먹어 치웠다. 들짐승들도 살이 올라 통통해졌다. 부쩍 키가 자란 아이들이 기둥에 그은 선을 가리키며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가 하면 치열하게 겨울을 버틴 노인이 따사로운 햇살에 폭 안겨 영원히 잠들기도 했다.

이처럼 기쁜 날. 톰과 론, 닉과 피트는 닉의 회복을 축하하는 뜻으로 사냥 내기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활을 잡은 닉의 감회는 남달랐다. 피트는 어찌나 들떴는지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제법 듣기 좋게 불러서 닉은 놀랐다. 그는 피트가 웬만큼 노래를 부를 수 있기까지 알렉세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랐다. 욕심이 많아서 이 노래 저 노래 전부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피트에게 알렉세이는 우선 하나만 제대로 익혀보자고 간신히 설득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알렉세이는 인내심이 대단하고 끈질긴 사냥꾼이었다.

“먼저 다섯 마리를 잡는 쪽이 이기는 거다.”

옥사나가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녀는 이번 내기의 심판을 보기로 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을 통제할 지혜로운 힘이 필요한 법이다.

“더 잡을 수 있어요.”

피트가 아쉬운지 입술을 비죽였다.

“욕심내지 마라, 얘야. 토끼도 자랄 시간을 줘야지. 씨를 말려버리면 사람도 배를 곯는다.”

옥사나는 웃으면서 피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으므로 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풀어 옥사나에게 맡겼다. 톰이 선물해준 귀걸이는 마음에 쏙 들지만, 치렁치렁해서 뛸 때는 불편했다.

“아이스, 네 아내가 단단히 작정했는데.”
“아쉽게 됐어. 뛸 때 귀걸이가 흔들리는 게 보기 좋은데.”
“작작 해라.”

작게 귓속말하던 론이 오만상 찌푸리며 질색했다. 이래서야 제대로 사냥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톰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줄곧 피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도 아쉽다는 것처럼.

닉과 피트는 사냥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피트는 화살통을 등에 메고 타르르크 위에 올랐다. 온순한 타르르크가 드물게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었다. 승부욕이 강한 건 주인인 피트와 같았다.

뒤이어 닉도 말에 탔다. 그는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맛을 다셨다. 긴장감 탓에 입이 바싹 말랐다. 주머니에서 작은 소금 조각 하나를 꺼내어 입 안에 넣고 굴리니 곧 침이 고였다. 한결 편해졌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우리 먼저 간다!”

피트는 멀뚱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톰과 론에게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 톰은 여유로운 미소로 피트를 먼저 보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점점 작아지는 피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이스, 정신 차려라. 어서 출발해야지. 지금은 마누라 잡을 때가 아니라 토끼 잡을 때야.”

답답한 나머지 론은 톰의 팔을 붙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보고 가자.”

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론은 손을 털며 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겹겹이 싸맨 두건 아래로 굵게 땋은 머리카락 한 갈래가 말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안장 위에서 들썩거리는 둥글고 탄탄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피트는 키가 크고 살이 붙더니 한층 육감적으로 변했다. 이제야 론의 눈에 찰 만한 그런. 비쩍 마른 젖먹이는 흥미 없다. 풍만한 몸매에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여자야말로 보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피트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애는 잘 낳겠네.”

휘유, 론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 피트는 확실히 변했다. 예전보다 골반이 더 벌어졌다. 저만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그렇지?”

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저렇게 건강하니.”
“슬라이더. 이제 그만 봐라.”

낄낄 웃는 론에게 톰이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차갑게 말했다. 나무라는 듯한 톰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아, 좀…….”

론은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톰은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걸어둔 화살을 챙겼다. 론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끌고 왔다. 말 위에 오르려던 톰이 불쑥 떠오른 것이 있는지 등자에 발을 걸다 말고 내려왔다. 

“왜? 뭐 문제 있나? 오늘 아침에도 확인했는데.” 

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을 나가기 전 말을 정비하고 활과 화살, 그리고 검을 점검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빈틈없이 확인한 줄 알았는데 철두철미한 톰이 보기에 무언가 모자란 것이 있는가 했다.

톰은 말도 없이 론을 말에서 거칠게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론은 어안이 벙벙해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그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며 소리쳤다.

“왜 그래!”
“론, 앞으로 말조심해라.”

톰은 엄중하게 경고했다. 론의 혀라도 뽑아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잿빛 눈동자가 서늘했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 그늘만 짙게 드리워졌다. ‘이건 괜한 말이 아니군…….’ 론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을 넘기야 넘었지. 론은 순순히 인정하며 반성했다. 

세상에는 자기 아내를 눈요깃거리 삼고 지저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경솔하게 지껄이는 파렴치한 남자들이 넘쳐난다. 아내의 아름다움을 남들에게 자랑하며 재물을 뽐내듯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그런 남자들. 하지만 적어도 톰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사람에게 한없이 진중한 남자였다. 무엇보다도 피트를 아꼈다. 론은 톰이 이처럼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은 어쩌지 못해서 그는 씩씩거리면서 말 위에 올랐다.

 
***
 
닉과 피트는 옥사나가 일러준 대로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이 근방은 한동안 사냥을 하지 않아 짐승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졌다고 했다. 톰과 론은 반대쪽으로 갔다. 그쪽은 한동안 제법 들쑤신 곳이라, 짐승들이 유독 날랬다. 옥사나는 그 사실을 닉과 피트에게 말하지 않았다. 피트는 아직 이 일대 지리를 잘 몰랐고, 닉은 얼마 전에야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다. 이래서야 정정당당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옥사나가 생각하는 공평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피트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환상적이었다. 모든 근심이 겨우 먼지 한 줌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숨결이 아찔해서 좋았다. 언제나 새롭고 각별한 이 감각. 살아 숨 쉰다는 것은 축복이다.

“저쪽이야, 매브!”

닉이 우측을 가리키며 외쳤다. 피트는 눈을 부릅떴다. 사냥을 나갈 때 짐승을 찾아내고 모는 것은 닉의 몫이었다. 저 멀리, 굴에서 나온 토끼 한 마리가 앞날을 예감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피트는 타르르크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면서 화살을 꺼내어 토끼에게 겨눴다. 한 발. 빗나가면 다음은 없다. 피트는 신중하게 활을 당겼다. 허공을 뚫고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토끼의 정수리에 꽂혔다.

“잘했어!”

닉이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잡은 토끼를 챙기러 얼른 움직였다. 말에서 내린 닉은 즉사한 토끼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역시.”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다 잡겠다. 그치?”

피트가 눈을 반짝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럼, 그럼. 어휴, 역시 네가 최고야.”

닉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예감이 아주 좋았다. 피트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고, 자신의 몸 상태도 좋았다. 그는 토끼의 발에 밧줄을 감아 단단히 묶고 말에 매달았다.

두 사람은 기세를 몰아 순식간에 토끼 두 마리를 더 잡았다. 그들은 승리를 자신했다.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만끽하는데 멀리서 싯누런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먼지바람 사이로 톰과 론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브래드쇼! 피트!” 

론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저 자식들이 왜 여기 왔지?”

닉이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톰과 론이 말을 멈췄다. 그들의 등 뒤로 강렬한 빛 한 줄기가 쏟아졌다. 검게 흐려진 형상에 무언가 번뜩였다. 닉은 씨근덕거리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먼지 때문에 콕이 칼칼했다.

“우리가 이겼어.”

론이 토끼를 매단 줄을 잡고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정확히 다섯 마리였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 뻔뻔했다.

“봐라.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너희 꼴이 어떻게 됐지?”

론이 이죽거렸다. 닉과 피트는 말을 잊고 입을 뻐끔거렸다. 벌써? 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론이 워낙 실없는 말을 곧잘 하고 행동이 허술해서 내심 무시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게다가……. 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톰이 탄 말에 늑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덩치가 큰 놈이었다.

“변명이라도 해 봐. 치맛자락 나풀거려서 활쏘기에 불편하던?”

론이 조롱했다. 닉은 웃었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겨 론을 겨냥했다.

“브래드쇼, 뭐 하는 거야. 설마 날 쏠려고?”
“눈을 감아도 너 하난 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거 보여주려고.”

이 자식 진심인가? 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론의 울대뼈가 꿀렁거렸다. “그만해.” 하고 피트가 닉을 말렸다. 그제야 닉은 활을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쾌활하게 웃었다.

“바지 갈아입어야겠다. 치마라도 빌려줄까?”

닉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있는 론에게 지나가는 투로 툭 내뱉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아.” 긴장감이 풀린 론은 됐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닉은 사람 대하는데 허물이 없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피트와 달리 붙임성이 좋았다. 하지만 오늘 이 모습을 보니 괜히 피트와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다.
 
***


마침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어서 그곳에 들러 잡은 토끼를 손질하기로 했다. 길눈 밝은 론이 앞장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톰은 피트와 나란히 가고 싶었지만, 닉이 문지기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차마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닉 브래드쇼가 무사히 자리에서 일어난 덕분에 피트의 걱정이 줄어든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제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 요즘 좀처럼 피트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내지 못해서 아쉬웠다. ‘빨리 돌려보내야 하는데.’ 톰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닉은 처자식이 있는 남자이니, 언제까지 여기 머물 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 아깝다! 내 다리만 멀쩡했어도 저딴 놈들은 쉽게 이겼을 텐데.”

닉은 내기에서 진 것이 분한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맞장구를 치며 함께 씩씩거렸을 피트의 안색이 어두웠다. 피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네가 다치지 않았어도 우리가 졌을 거야.”
“뭐? 매브, 너답지 않게 왜 나약한 소릴 하고 그래. 분하지도 않아?”

닉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했다. 고삐를 쥔 피트의 손등이 잔뜩 힘을 주어 새하얗게 질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냥이라면 자신 있었다. 고아라며, 오메가라며, 자신을 무시하는 마을 남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준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평소에는 말도 섞지 않던 사람들이 사냥을 나갈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근한 체를 하며 웃는 얼굴로 자신을 찾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 난생처음으로 뼈저린 패배를 맞이했다. 덩치만 크고 냄새나는 놈과 무뚝뚝한 겁쟁이에게.

“분해. 카잔스키는 꼭 굼벵이 기어가는 것처럼 말을 달리는데 나보다 훨씬 빨리 잡았어. 그 냄새 나는 놈도 미련하게 생겨서는 몸이 빨라.”

피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릿속으로 자신과 닉이 왜 패배했는지를 분석했다. 톰과 론의 말은 훌륭했지만, 타르르크가 갑절은 더 훌륭하다. 세상에 타르르크보다 뛰어난 말은 없다. 화살도 빠르게 쏠 수 있도록 무게를 줄였고, 깃도 새로 갈았다.

활시위를 너무 팽팽하게 달았나. 피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힘을 더 주려고 어젯밤 활시위를 다시 맸는데 그게 패인인가 싶었다. 키가 더 자라서 힘도 더 세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부담스러웠다.

“그야 저 자식들은 이 일대를 훤히 꿰고 있잖아. 우리보다 유리했다고. 게다가 우리보다 사냥할 일도 훨씬 많고. 사는 환경이 다르잖아. 쟤네는 밥 먹듯이 쌈박질하고 활 쏘는 놈들인데.”

닉이 말했다.

“그래도 분해. 내가 저 새끼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으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거야. 근데 졌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저 개새끼들보다 약한 거야. 빌어먹을!”

피트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대체 왜? 매버릭, 정신 차려. 요즘 나태해졌지, 매버릭. 이러면 안 돼.” 그것도 모자라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와. 진짜 화났잖아, 얘.’ 닉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일라우와의 결혼을 앞두고, 시집가려면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며 말조심하더니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놓였다. 피트가 톰 카잔스키에게 마음이 생겨 그에게 이상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처럼 군답시고 몸을 낮출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쟤네 밥에 독이라도 탈까? 아니면 자고 있을 때 베개로 얼굴 눌러버릴까? 말만 해.”

닉은 ‘저 개새끼들’을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하하.”

피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닉이 건강을 되찾고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좋다. 세상에 닉처럼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신 없을 것이다. 살면서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닉의 존재를 대신할 순 없다.

“구스, 기분이 이상해.”

피트는 톰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입을 열었다.

“진 건 분한데, 우리가 이겼으면 더 화가 났을 것 같아.”
“너보다 나약한 남자는 싫은 거지?”

속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우와의 혼담이 성사되고, 피트는 기뻐하는 한편으로 그가 싸움과는 거리가 먼 남자라는 것을 내심 아쉬워했다. 그러다 곧 자기가 이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라며 다신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줄곧 바랐겠지. 닉은 피트의 마음을 헤아렸다. 피트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을 건강한 남자. 용맹하고 강인한 초원의 전사. 닉도 피트에게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한 남자였다. 물론 톰 카잔스키가 그런 남자인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모르겠어.”

피트는 얼굴을 붉혔다. 말 등에 묶여 축 늘어진 늑대의 팔다리가 보였다. 덩치가 정말 큰놈이다. 이빨도 크고 날카로웠다. 아마도 무리를 호령했을 우두머리.
 
***


양 한 마리는 넉넉잡아 삼십 분, 그보다 몸집이 작은 토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손질을 끝낼 수 있다. 유목민들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어른들이 가축을 잡는 걸 보며 배운다. 말 타는 걸 배울 무렵이면 검을 잡고, 어설프게나마 어른들 옆에서 도축하는 흉내를 내며 자연스럽게 익혔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다.

손질은 닉과 론이 맡았다. 사냥의 열기로 흥분해서인지 가죽을 벗기는 손이 거침없었다. 피트는 옆에서 차를 끓였다. 톰은 지친 말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호숫가로 갔다. 토끼를 손질하던 닉과 론이 불이 붙어 서로 자신이 더 잘났다며 언성을 높였다. 피트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관심을 끄고 톰이 떠난 방향만 응시하며 가만히 기다렸다.

언제 돌아올까. 시간이 꽤 흘렀는데 톰이 돌아오지 않았다. 말들이 목이 많이 말랐던 모양이다. 물에 빠져 죽은 건 아닐까? 괜스레 초조해져 속이 불편했다.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숨을 고르는데 느릿느릿 걸어오는 톰의 모습이 보였다. 피트는 무심코 벌떡 일어나려다가 도로 앉았다. 그리고 톰을 기다리지 않은 척, 시치미를 뚝 잡아떼며 차를 홀짝였다.

톰은 그늘에 말을 묶어두고 피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서서 움찔거리는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피트, 잠깐만.”
“왜?”

피트가 고개를 들고 톰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뺨이 아팠다.

“따로 할 얘기가 있어.”

톰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 내가 한 말, 명심하고 있지?”

닉이 육포를 씹다 말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으응.”

피트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톰, 브래드쇼랑 나는 정리 다 끝내면 먼저 영지로 갈게. 알아서 와라.”

옆에서 론이 끼어들었다. 한창때지. 방해꾼은 사라져야지. 론은 톰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며 씩 웃었다. 닉은 대번에 딱 잘라 말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매브, 정리 다 끝내기 전에 돌아와라.”
“브래드쇼. 넌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잖아. 좀 너그러워져라. 내 친구는 여태 아내도 자식도 없이 살다가 이제 좀 잘해보려고 한단 말이다. 축복해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데, 눈치 좀 챙기지.”

론이 구구절절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톰의 편을 들었다. 간절히 호소하는 눈빛으로.

“치마 입고 싶어?”

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더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고 있던 육포를 휙 집어 던졌다. “난 10초 만에 수말을 거세시킬 수 있어.” 닉은 눈을 내리깔며 턱 끝으로 론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있던 론은 슬그머니 다리를 오므렸다.

“구스, 나 기다리지 말고 슬라이더랑 먼저 가!”

그런데 그런 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트는 손까지 흔들며 명랑하게 말했다.

“뭐? 매브, 매브!”

당황한 닉이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톰이 그 사이에 피트를 냉큼 말에 태워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바람 같았다. “허어어…….” 허탈한 나머지 닉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어른들 말씀 틀린 게 하나 없어.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는 거야.”

아까 전의 수모를 갚아 줄 건수를 잡아 능청스레 떠들던 론은 단도를 빙그르르 돌리는 닉의 싸늘한 눈초리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다리 사이가 허전했다.
 
***


톰과 피트는 함께 호숫가를 거닐었다. 벌써 하루살이가 낮게 비행했다. 늦은 봄, 이른 여름. 수면 위에 부서지는 빛 조각이 환상적이었다. 바람은 차분하고, 세상은 고요했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다며 피트를 데리고 나온 톰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는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온 손을 연신 바지에 훔치고, 괜히 모자를 벗었다가 쓰기를 반복했다. 답답해진 피트는 걷다 말고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할 얘기가 뭔데?”
“손 이리 줘.”

톰의 말에 피트는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톰은 피트의 마음이 변할세라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톰은 주머니에서 알이 큼지막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는 가여울 정도로 손을 덜덜 떨며 피트의 손가락에 어렵게 반지를 끼웠다. 피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마음에 안 들어?”

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근데 어디 다녀올 때마다 자꾸 뭘 사다 주니까…….”

피트는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주고 싶어서 그래.”

톰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러다 내가 너희 집안 다 거덜 내겠네.”

피트는 웃으면서 손을 쫙 펼쳤다. 눈이 확 뜨일 정도로 예뻤다. 살면서 이렇게 비싼 걸 차고 다닐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은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저런 옷을 걸쳐 보고 톰이 선물한 장신구를 달아 볼 때마다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요즘 거울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즐거웠다.

가슴이 뜨겁다. 그저 말갛게 웃으며 기뻐하는 피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톰은 끌어오르는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피트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피트가 잽싸게 빠져나오며 거리를 벌렸다.

“안 돼.”
“왜. 내가 도로 싫어졌어?”

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구스가 네가 내 몸에 손대게 하지 말래. 나한테 손대면 네 손가락을 다 부러뜨린댔어.”
“그러는 브래드쇼는 너한테 손대도 괜찮아? 그 친구도 남자고, 처자식도 있어.”
“구스는 구스잖아.”
“아무리 그래도 머리를 빗겨주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저께 톰은 우연히 닉이 피트의 머리를 빗겨주는 걸 목격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피트는 느슨하게 풀어진 자세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낯뜨겁게도 맨발로.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밉보이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 그 날밤, 톰은 속이 부글거려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닉이 피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란 건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나 오메가가 머리를 푼 모습을 보여주는 건 오직 남편 앞에서만이다. 발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배에서 태어난 사이라도, 어릴 때면 몰라 장성하면 조심해야 한다. 이런 고민을 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이고, 차마 론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속 좁게 굴지 마.”
“브래드쇼의 아내는 그래도 괜찮대?”

거북한 마음에 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둘이 같이 내 머리 빗겨 줄 때도 있어. 가끔 안나 아주머니도 같이. 그럼 빨리 끝나. 난 머리숱이 많아서 혼자서 손질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피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안나는 닉의 어머니다. 닉은 안나에게 머리 땋는 법을 배웠다. 안나 브래드쇼는 아들에게 피트가 어디 가서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늘 지켜보고 챙겨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쭉 닉이 피트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어주고, 옷차림을 봐주다가 캐롤과 결혼하고 나서는 부부가 같이 매달렸다. 오빠와 남동생만 있는 캐롤은 자매가 생긴 것 같다며 좋아했다.

“그래, 알았다.”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톰은 눈을 내리깔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질투하나?’ 피트는 그런 톰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알렉세이도, 톰도 자기 때문에 화가 났을 때 제일 재밌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진지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서 콧김을 뿜어대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 더 골려주고 싶지만,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피트는 톰의 허리끈에 슬며시 손가락을 걸었다.

“내가 널 만지는 건 구스도 뭐라고 말 안 했거든.”

피트는 톰의 허리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톰의 허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휘어졌다. 피트는 톰을 쓰러트리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톰의 모자가 비뚤어졌다. 피트는 모자를 벗겨 멀리 던져버렸다. 자기가 만들어 준 모자를 잘 쓰고 다니는 건 좋지만, 그래도 역시 눈이 부신 금발 머리를 보고 싶었다.

“매버릭.”
“넌 가만히 있어.”

피트는 흙장난을 하는 것처럼 톰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톰의 가슴이 짜르르 울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피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못마땅해진 피트는 톰의 코를 틀어막았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참는 톰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며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톰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혀를 집어넣었다. 한 손은 톰의 이마에 얹고, 한 손은 그의 턱을 매만지면서. 

톰이 낮게 신음했다. 축축하게 젖은 흙 위로 열 개의 깊고 날카로운 길이 파였다. 톰의 손톱 밑에 새카맣게 흙이 꼈다. 피트는 톰의 단단한 가슴을 더듬었다. 그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기뻤다.

“널 만지고 싶어.”

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참아.”

피트는 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안고 싶다.”

톰이 괴롭게 말했다.

“참아.”

피트는 씩 웃으면서 톰의 머리카락을 개를 쓰다듬듯이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리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톰의 뺨이며 턱, 여기저기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입술에 살갗이 들러붙었다 떨어지는 그 감촉이 간질간질했다. 뺨을 스치는 톰의 숨결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마음대로 만질 수 있어서 기뻤다.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고, 그를 어루만진다는 것이 이처럼 행복한 일인지 지금껏 몰랐다. 톰을 마구 주무르며 아래로 슬슬 내려가던 피트는 엉덩이에 무언가 딱딱한 게 닿아 멈칫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무언가. ‘또.’ 피트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는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그거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내가 건드릴 때마다 자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안고 있을 때도…… 닿거든. 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야.”
“미안해. 이건 내 뜻대로 안 된다.”

당황한 톰은 헛기침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그도 자꾸만 이성과는 다르게 앞서가는 몸 때문에 민망했다.

“내가 네 눈앞에서 사라지면 괜찮아져?”
“아니. 네가 내 곁에 없어도, 널 생각하면…….”
“그럼 어떡해?”

피트가 칭얼거리는 투로 물었다. 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생각하면 곧 괜찮아져.”
“…….”
“아버지 얼굴만 떠올려도 피가 식거든.”
“너, 정말 어르신 존경하는 거 맞아?”
“물론이다.”
“그래. 어르신 생각하고 있어. 나 잠깐 어디 다녀올게.”

피트는 냉큼 톰에게서 떨어졌다. 톰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피트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려고?”
“몰라도 돼.”

피트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떠났다. 홀로 남은 톰은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꿈을 꾼 것처럼 멍했다. 아니,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포도 넝쿨 아래 햇살처럼 웃던 피트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한 나머지, 그가 자신의 품에 안긴 꿈을. 눈을 뜨면 자신은 테르반테이 마을 한복판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신을 짓밟고, 손에 피를 묻힌 채로. 그래, 지금 이 순간이 꿈이고 불길로 뒤덮인 결혼식이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면…… 그 현실에서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피트를 품에 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


등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피트를 발견한 톰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가까워질수록 피트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득한 밤하늘의 유일한 별. 톰은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다다른 피트를 벅찬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네가 나한테서 달아난 줄 알았다.”

톰이 말했다.

“도망가면 세상 끝까지 찾아온다며.”

피트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 손에 든 건 뭐야?”
“저번에 약속했잖아. 화관 만들어 준다고.”

피트가 뒤로 살짝 물러나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름 모를 들꽃을 엮어 만든 화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손톱만큼 앙증맞은 흰색 꽃, 꽃잎이 하늘하늘한 보라색 꽃, 흐린 하늘을 닮은 꽃, 드문드문 엮인 푸른 줄기와 잎사귀. 톰은 작은 꽃송이를 바지런히 엮는 피트의 손을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피트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어때?”

톰이 쑥스러워하며 물었다.

“역시 금발은 예쁘네.”

피트는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톰의 머리카락이 더 돋보였으면 해서 일부러 색이 선명하니 밝고, 모양새가 화려한 꽃은 고르지 않았다. 기대했던 대로 소담한 꽃송이가 톰의 금발 머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의 회색 눈동자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검은 머리가 좋아.”

톰이 말했다.

“그래?”

피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응.”
“검은 머리가 예뻐.”
“내가 검은 머리라서 마음에 들었어?”
“아니. 네가 검은 머리라서 검은 머리카락이 좋아졌어.”

톰이 소탈하게 웃었다. 그러자 피트는 돌연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톰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화관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바동거렸다. 중심을 잡고 바로 선 톰을 향해 피트가 눈을 흘기며 볼멘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너는 정말 미친놈이야.”
“매버릭. 내가 뭘 또 잘못했어?”
“하여튼 미친놈.”

피트는 씨근덕거리며 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톰은 부랴부랴 그를 뒤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피트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피트와 함께 있을 때면 꼭 미로를 헤매는 것 같다. 환상적이고 고즈넉한 자신만의 미로.
 
***


우리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새끼 양 한 마리를 간신히 안으로 밀어 넣은 야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톰을 발견했다.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유난히 톰을 따르는 야나는 톰만 보이면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야나는 톰이 하는 것이라면 뭐든 따라 했고, 톰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면 덩달아 관심을 기울였다. 당연히 피트에게도 관심이 아주 많았다. 피트는 언제나 특이하고 예쁜 옷을 입었고, 좋은 냄새가 난다. 야나는 그래서 톰이 피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톰이 좋아하는 것이면, 자신도 좋다. 피트가 좋았다.

“톰! 톰! 피트도 있네? 안녕하세요!” 

야나는 반가운 마음에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래, 안녕.” 톰이 부드러운 말씨로 인사했다. 피트도 손을 흔들었다.

“톰, 화관을 왜 썼어요?”

야나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톰이 쓴 화관을 손으로 가리켰다. 톰은 어깨를 으쓱했다.

“피트가 만들어줬다.”
“부럽다. 정말 예뻐요.”

야나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피트가 만든 화관은 자신의 어설픈 솜씨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섬세하고 예뻤다.

“네 것도 만들어 줄까?”

피트가 넌지시 물었다.

“아니요! 대신에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제가 직접 만들래요. 피트처럼 예쁜 화관을 꼭 만들어 보고 싶어요.”
“좋아.”

피트는 야나가 퍽 마음에 들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기특했다. 게다가 싹싹하고 성격이 밝다. 딸을 낳는다면 야나 같은 아이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이쿠.”

그때, 우리 문을 닫고 나온 야나의 증조부 아즈단은 톰을 보자마자 탄식하며 자신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 그는 손에 쥔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며 기어이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톰, 너희 집안 남자들은 신혼 때마다 꼴사납게 구는구나. 티무르도, 알렉세이도, 이제는 너까지. 뭐, 봄만 되면 정신이 어디 팔렸는지 푼수처럼 들떠서는 채신머리없이. 카잔스키 집안 전통이라도 되는 게냐?”

아즈단은 타타흐 부족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살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얼 보아도 초연한 것은 아니었다. “말세야, 말세. 우리 부족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아주 가관이다.” 하고 아즈단이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티무르는 옥사나가 준 팔찌를 부적이라며 차고 다녔고, 알렉세이는 타마라가 준 큼지막한 꽃 한 송이를 귀에 꽂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톰은 화관을 쓰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어째 대가 이어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또 다른 카잔스키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과연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암울했다.
 
***


저녁 식사 시간. 카잔스키 가족들은 옥사나의 천막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오늘 저녁은 톰과 피트가 잡아 온 토끼로 만든 스튜와 구이, 그리고 점심으로 먹다 남은 만두와 말린 과일이었다. 늘 이렇게 호사스럽게 먹는 것은 아니다. 날이 날이다 보니, 기분을 내는 것이다. 

요리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몫이지만, 때가 되어 그릇과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는 것은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의 몫이다. 옥사나는 그릇에 스튜를 담아 가장 먼저 알렉세이의 자리에 놓았고, 그다음은 톰과 피트의 자리에 놓았다. 구운 고기도 나눴다. 자리를 잡고 앉은 옥사나가 숟가락을 들면,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를 할 때이다.

톰은 노릇노릇 잘 익은 토끼 다리를 잡고 칼로 슥슥 잘랐다. 그는 큼지막한 덩어리를 피트의 접시 위에 슬쩍 올렸다.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던 피트는 물끄러미 톰을 응시했다. 톰은 말없이 한 조각을 더 올려줬다. 그러자 피트도 고기를 썰어 톰의 접시 위에 올렸다. 톰이 다시 고기를 썰어 피트의 접시 위에 놓았다. 피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일부러 잘게 썬 고기 조각을 톰의 접시에 놓았다. 톰도 웃으면서 질세라 다시 고기를 썰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접시 위에 고기가 수북하게 쌓였다. 접시가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톰, 피트.”

가만히 지켜보던 옥사나가 엄중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밥상 앞에서 어린애들처럼 굴지 말고 어른스럽게 굴어라.”

좋을 때니, 크게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옥사나가 점잖게 나무라자 두 사람의 얼굴이 빨개졌다.

“예, 할머니. 죄송합니다.” 

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조심할게요.”

피트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힐끔 맞은 편에 앉아 묵묵히 스튜를 마시는 알렉세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피트의 눈이 빛났다.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피트는 자신의 접시를 들고 알렉세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드실래요?”
“그래.”

알렉세이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피트는 얼른 쪼르르 달려가 알렉세이의 빈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맞바꿨다. “다 드셔야 해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요.” 하고 피트가 말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알렉세이는 두말하지 않고 혼쭐을 냈을 것이다. 아니, 감히 그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이제 피트가 버릇없이 구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피트가 자신에게 대들지 않는다면 아쉬울 정도로. 다른 사람들처럼 주눅이 들어 공손하게 구는 피트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피트가 구운 고기는 평소 알렉세이가 먹던 것과 조금 달랐다. 색이 더 짙었고, 향이 강했다. 본인은 부정하고 있으나, 알렉세이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어렸을 때는 입이 하도 짧아서 옥사나가 꽤 애를 먹었다. 지금도 늘 먹던 것이 아니면 잘 손을 대지 않았지만, 피트의 성의가 있으니 먹기로 했다.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알렉세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강렬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뚫는 것도 모자라 뇌까지 후벼파는 듯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게다가 맵고, 달고, 짰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알렉세이는 경악했다. 혀가 얼얼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온몸을 들썩이며 기침을 해댔다.

“큭.”
“알료샤, 괜찮으냐?”

옥사나가 물 한잔을 알렉세이에게 건넸다.

“예, 어머니. 사레들려서 그럽니다.”

알렉세이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옥사나는 그의 기침이 가라앉을 때까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알렉세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고기 누린내가 역겨워서 먹기 싫을 때가 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누린내가 그리웠다. 간신히 진정된 그는 피트에게 물었다.

“피트, 넌 매운 게 좋으냐?”
“네.”
“정말?”
“네.”
“입이 맵거나 속이 따갑지는 않고?”
“네.”

무구한 눈동자를 보고 알렉세이는 알 수 있었다. 피트는 조금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톰이 준 향신료와 설탕이 비싸고 귀한 것이니, 어른들 먹는 음식이라고 아낌없이 쓴 것이다. 그리고 자극적인 맛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알렉세이는 겨우 삼킨 고기를 피트는 맛있게 먹었다.

앞으로 이런 걸 먹어야 하는 건가. 알렉세이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기를 마저 씹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피트의 눈과 귀를 피해 몰래 기침하는 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자는 눈이 마주쳤다. 톰은 멋쩍게 웃었다. 알렉세이는 물잔에 물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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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3.02 20: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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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꽃 꽂고 다닌거 존나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 '또' 발기해버린 톰 카잔스키 씨 절레절레 ........... 아빠생각해서 가라앉힌다는거 왜케 웃기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매친놈 톰 카잔스키 이 매친놈은 찐입니다
[Code: 2ef2]
2023.03.02 22: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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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스키들 다 제대로 감겼네 근데 안 감길수가없잖아매브정말너무사랑스럽다사항을해라ㅜㅜㅜㅜㅜ
[Code: 95ba]
2023.03.03 03: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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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하루하루를 센세 아매 보는 맛에 산다........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너무재밌어ㅠㅠㅠㅠㅠㅠㅠ
[Code: cdca]
2023.03.04 0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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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ㅠㅠ 또 감사합니다.. 난 얘네가 너무 궁금해ㅜㅜㅜㅜㅜ
[Code: 082a]
2023.03.04 03: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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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짜 자기가 이기지못한게 심통나면서도 자기 남자가 자기보다 약한건 싫은 피트 마음 너무 이해가고 진짜 최고다....대대로 아내 팔불출인것도 진짜 개발려요 센세...
[Code: 9f29]
2023.03.08 10: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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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하면 피가 식지만 존경은 하는 아버지 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e5bf]
2023.03.12 11: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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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생각하면 발기가 가라앉는 아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96cd]
2023.03.16 01: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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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네가 검은 머리라서 검은 머리카락이 좋아졌어.”
톰이 소탈하게 웃었다. 그러자 피트는 돌연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 톰 탈골 되겠닼ㅋㅋㅋㅋㅋㅋ 자기가 뭘 또 잘못했냐고 되물으며 부랴부랴 쫓아가는 거 너무 귀엽고 재밌어ㅠㅠㅠ 얘네 자꾸 이러는 거 넘 좋앜ㅋㅋㅋㅋㅋㅋㅋ 으이그 귀여워♡♡♡ 그 와중에 앞으로 이런 걸 먹어야 하는 건가 하고 착잡해하는 알렉세이도 넘 웃기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부자 둘 다 말 도 못하고 참냐곸ㅋㅋㅋㅋㅋㅋ
[Code: eb8e]
2023.04.02 06: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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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고기썰어주면저 키득거리는겈ㅋㅋㅋㅋㅋㅋ너무 귀여워!!!!이미 신혼이잖아!!얼른 식 안올리고 머하냐!ㅋㅋㅋㅋㅋㅋㅋ
[Code: fb76]
2023.04.18 01: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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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그 시절에 살다온것같아 개좋아ㅠㅠㅠㅠ
[Code: b1fa]
2023.04.26 16: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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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때마다 꼴사납게 구는 카잔스키남자들 너무너무 커여워서 광대 터질것 같아욧센세ㅜㅜㅜㅜ
[Code: 6efa]
2023.05.25 05: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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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는 매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렉세이랑 톰 눈 마주치는거 넘 귀여웤ㅋㅋㅋㅋ카잔스키부자 사랑햌ㅋㅋㅋ
[Code: 1e41]
2023.08.09 13: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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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현실적인 개척자들은 어디가고 사랑에 칠렐레 팔렐레 정시누놓은 카잔스키들만 남았나욬ㅋㅋㅋㅋㅋㅋㅋㅋ 넘웃기고 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스 그리고 아버지 취급대체 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1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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