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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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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23. 아침


일주일 전에 태어난 양은 어리광이 심했다. 새벽부터 톰에게 치대며 놀아달라고 보챘다. 어미는 기진맥진해서 엎드린 채로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이 무렵 새끼들은 지칠 줄 모른다. 톰은 새끼 양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새끼 양은 그 소리를 따라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가느다랗게 우는 소리가 제법 귀여웠다.

구릉처럼 깔린 양 떼 너머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들꽃처럼 잔약한 인영이 보였다. 톰은 새끼 양의 정수리를 지그시 누르며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피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봄비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두건은 목에 아무렇게나 칭칭 감은 상태였다. 톰은 홀린 것처럼 피트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세수만 하려다가 물이 따뜻해서.”

피트는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오는 길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

얼굴이 빨갰다. 톰은 피트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하루 중 찰나, 새벽의 냄새. 고요히 흐르는 물의 신선함. 반들거리는 머릿기름의 향기. 그 아래로 꼼지락거리는 발이 보였다. 신발이 낡았다. 조만간 새로 신발을 만들 좋은 가죽을 구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톰은 피트의 머리를 두건으로 싸맸다.

피트는 물끄러미 톰을 올려다보았다. 톰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피트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살짝 들린 둥근 코가 보기 좋았다. 벌어진 입술은 언제나 듣기 좋은 숨결을 들려준다. 피트의 투덜거림이 톰에게는 노래처럼 들렸다.

“매버릭. 행복해?”

톰이 피트의 두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피트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쑥스러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당연하지. 닉이 무사히 다 나았잖아. 사실 다시 예전처럼 걷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구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안했을 거야.”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응?”
“나와 함께 살아서 행복한가 물었다.”
“그건…….”

피트는 대답을 망설였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얼굴. 톰은 조바심 때문에 목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피트의 두 손을 잡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신기루처럼.

“달리 묻지. 네가 보기에 나는 믿을만한 남잔가?”
“사람들이 왜 너를 따르는지 알겠어.”

톰이 다시 묻자 피트는 에둘러 대답했다.

“내가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모르지. 아무리 너라도 그런 건 막상 닥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훌륭한 아버지이지만 형편없는 남편일 수 있고, 좋은 남편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인 건 아냐.”

피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좋은 남편이 될 것이고,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네.”

피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당당하게 선언하는 톰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의 결심에 자신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만약에 정말 톰과 평생 함께 살게 된다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도 전부 톰의 뜻대로 해야 하는 걸까. 제 배로 낳은 아이지만, 톰의 이름을 물려받을 아이니까. 그러나 그 서운함은 이내 먼지처럼 사라졌다. 

순종은 아내의 미덕이라고 배웠다. 집안의 가장인 남편이 결정을 내리면 아내는 그 뜻을 따를 뿐. 별 볼 일 없는 사내들도 가장이랍시고 떵떵거리며 산다. 하물며 일대에 널리 알려진 타타흐 부족의 차기 우두머리가 될 남자는 오죽하겠는가. 톰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지,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넌더리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톰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라면……. 피트는 차마 묻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다.”

톰이 다시 말했다.

“또?”

피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톰이 망설였다. 그는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입천장을 핥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기어이 길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윽고 톰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말이다.”
“응.”
“네가 사랑할만한 남자인가?”

피트의 입술 사이로 뜻 모를 감탄이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그 행간에 모든 망설임이 담겼다. 피트는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꼭 치통을 앓는 듯한 얼굴. 톰은 피트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당장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 살면서 언젠가. 내일이어도 좋고, 모레도 좋고, 10년이 흘러도 좋아. 죽기 직전이라도 좋다. 나를 사랑할 수 있겠어?”
“정말 죽을 때까지 날 놔주지 않을 작정이야?”
“아버지께서는 네 재가를 책임지라고 하셨지만, 난 다른 남자에게 널 보낼 마음이 조금도 없다. 아버지께서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갈 길은 하나뿐이다. 아버지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그래야 끝이 난다. 내가 죽는다면 넌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기대하지 마라.”

톰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는 아버지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각오를 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릴 각오도 했다.

“나는 그럴 가치가…….”
“그럴 가치가 있다.”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피트에게 톰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한다. 너는 내가 살면서 원한 것 중 가장 가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널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어.”

톰은 피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피트는 앞니를 혀로 핥았다. 목이 조금 말랐다. 자신의 등을 부여잡는 톰의 손이 무거웠다. 톰은 피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더 미룰 것 없다. 약속은 약속이야. 닉 브래드쇼가 건강을 회복했으니, 가족들에게 보내줄게. 가는 길에 변을 당하지 않도록 데려다줄 거다. 그리고 닉 브래드쇼의 아버지에게도 내가 직접 사과드리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피트는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다들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야.”

이제야 브래드쇼 가족들을 볼 면목이 생겼다. 만약에 닉이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면,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다. 피트, 너도 함께 가자.”
“나도?”
“응. 브래드쇼 집안의 사람들은 너한테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톰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피트는 얼떨떨한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도망갈지도 모르니 당연히 데려가지 않을 줄 알았다. 평생 브래드쇼 내외와 캐롤, 그리고 브래들리를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쁨이 무지개처럼 몸을 휘감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피트는 비틀거리며 톰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톰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카잔스키.”
“내 이름은 언제야 제대로 불러줄래?”
“고마워, 톰…….”

톰은 피트의 입술을 찾았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숨결 속에 고맙다는 말이 섞였다. 서로 숨이 뒤섞이면 세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땅이 갈라지고 폭우가 쏟아져 산이 잠긴다고 해도. 엉성하게 감긴 두건이 허물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피트는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아도 톰의 얼굴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못내 지우지 못하는 아쉬움. 사랑한다고 말해줬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 한마디면 전부 다 괜찮을 텐데. 무섭고 난폭하게 대해도, 온몸에 피를 뒤집어써도, 사랑한다고만 말해준다면. 매일 사랑한다고만 말해준다면, 비싼 장신구도 좋은 옷도 향유도 필요 없고, 하루에 빵 한 조각만 먹고 차 한 모금만 마셔도 행복할 텐데. 언제야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24. 책임


“매버릭은?”

닉 브래드쇼가 빈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을 보고, 톰은 울타리를 고정하다 말고 물었다. 닉이 가는 곳이라면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피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무른 흙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내린 울타리가 삐걱 소리를 내면서 기울어졌다. 닉은 황급히 울타리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애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데리고 갔어.”
“아이들이랑 잘 지내는군.”

톰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울타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이만하면 강풍이 불어도 끄떡없을 것이다. 톰은 뿌듯한 마음에 기지개를 쭉 켰다. 닉은 울타리에 거슬거슬 일어난 가시를 만지작거렸다.

“카잔스키.”
“할 말 있나?”

톰은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난 너 못 믿는다.”

닉은 가시를 뽑았다. 톰의 얼굴에서 선선한 미소가 사라졌다. 닉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막상 본인의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닉은 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볼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그리고 피트처럼 오메가라면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꿈꾸며 예단을 준비해. 얼마나 훌륭한 혼수품을 마련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거야 나도 안다.”
“매버릭은 말이다, 카잔스키. 아일라우와의 결혼이 결정되고 난 뒤로는 어렸을 때 만든 서툰 물건을 전부 다시 만들었어. 잠도 자지 않고, 밥도 거르면서. 서툰 솜씨로 괜히 그쪽 집안에 책잡혀서 우리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야.”

닉의 어깨가 조용한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걸 네가 짓밟은 거야.”

닉이 힘주어 말했다.

“나는 예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금은보화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 내가 원했던 건 처음부터 피트였다.”

톰은 닉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닉에게 중요한 건 언제든 무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란 쉽게 변한다. 아침에는 깨끗하다가도 해가 저물면 탁해지기도 한다. 닉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격양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말이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데,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혼식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는 거 아냐? 부부도 의미가 있나? 눈 맞으면 적당히 밤을 보내고, 애가 생기면 키우고 그럼 그만인데.”
“비약하지 마라.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톰은 닉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점잖게 말했다.

“매버릭에게는 그 결혼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어. 사람들에게 아일라우 집안 식구로 인정받을 수 있는 특별한 의식이었으니까.”

닉은 물러서지 않고 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소중하지만, 매버릭에게는 유독 특별해. 그 애는 어렸을 때 부모님뿐만 아니라 일가를 잃었어.” 
“……대충은 알고 있다.”

톰은 말을 아꼈다. 피트는 어린 시절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얘기 해봤자 마음만 아프다면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있으므로 톰은 피트의 과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며 얼룩덜룩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피트가 스스로 털어놓길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 믿고 의지할만한 남자가 된다면, 언젠가는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래? 이것도 알아? 아버지와 함께 미첼 아저씨네 야영지를 찾았을 때, 피트는 죽은 어머니를 꼭 붙들고 있었어. 근방에 늑대가 있는데, 자기는 힘이 약해서 어머닐 업고 도망치지 못한다고 도와달라고 아버지께 애원했어. 그때 피트는 너무 어려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조차 몰랐던 거야.”

닉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곧 쓰러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 해는 역병이 돌아 흉흉했다. 직접 왕래하진 못하더라도 종종 소식을 주고받던 미첼 집안이 겨울마다 머무는 목초지 일대는 특히 그 피해가 막심했다. 친구와의 소식이 오랫동안 끊어져 전전긍긍하던 존 브래드쇼는 아들을 데리고 야영지를 찾았다. 그곳은 죽음의 땅이었다. 사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가축들이 대부분 굶어 죽거나 어디론가 사라졌고, 사람은 전부 죽어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존 브래드쇼는 허물어진 천막 안에서 죽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는 피트를 발견했다. 날이 추워 부패가 늦어졌다고 해도 죽은 지 족히 열흘은 된 시신이었다. 천막 안은 썩은 고기와 상한 양젖, 곰팡이가 슬어 시큼한 냄새가 나는 빵 조각으로 지저분했다. 피트는 얼마나 오래 굶었는지 뼈밖에 남지 않았다. 고개를 가눌 힘도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어머니를 놓지 못했다. 그때 그 충격을 닉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버지께서는 매버릭도 곧 죽을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어. 천만다행으로 병은 옮지 않았지만, 너무 약해진 상태였거든. 그래도 그 애는 버텼고 살아남았다.”

닉은 울타리를 꽉 움켜잡았다. 시체가 너무 많아 전부 태우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전염병으로 전멸한 땅에 선뜻 소매를 걷어붙이고 힘을 보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애가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

닉이 말을 이었다. 피트는 헤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불에 타면 사라진다는 것만 알아서, 존 브래드쇼에게 부모님을 태우지 말라고 매달렸다. 부모님은 잠든 것뿐이고, 어른이 왔으니 곧 깨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피트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것은 존 브래드쇼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었고, 끔찍한 순간이었다. 기력이 빠진 피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래서 피트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매버릭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브래드쇼의 아이로 키우려고 하셨지만 사람들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일가가 모두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며 그 애가 불길하다고 꺼렸고, 여느 남자애들과 다르단 것도 싫어했어. 피트한테 대놓고 흉물이라고 말하면서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어.”
“…….”
“그래서 아버지께서 매버릭을 양자로 입적하려고 하셨지만, 매버릭이 거절했다. 더는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매버릭의 이름이 피트 미첼이어도, 우리 가족에겐 브래드쇼야.”
“…….”
“그 애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동생이야.” 
“피트가 널 형제처럼 여기는 건 잘 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톰은 무겁게 말을 덧붙였다. 닉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트는 꼬박 일주일을 앓았어. 걔가 가까스로 깨어났을 때, 마침 내가 곁에 있었어. 난 피트한테 이제부터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우리 가족이랑 함께 살 거라고 말했지. 몸이 다 나으면 다시 네 부모님을 보러 가자고도 말했다.” 
“…….”
“그러니까 피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나무 단검을 나한테 줬어. 이제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자기가 제일 아끼는 건데, 고마우니까 나한테 준대. 그때 나는 이 애를 평생 지켜줄 거라고 다짐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했어.”

닉은 톰에게 다가섰다.

“카잔스키, 그게 무슨 의민지 알아?” 

닉이 할퀴듯이 물었다. 톰은 숙연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닉이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귀를 열었다.

“매버릭이 다 죽어가면서 손에 꼭 쥐고 있던 건 그거 딱 하나야. 미첼 아저씨가 만들어 준 나무 단검. 걔는 그걸로 늑대가 오면 자기 어머니를 지키려고 했대. 이미 죽은 어머니를. 그 어린애가 물 한 모금 못 마시면서 몇 날 며칠을 그것만 붙들고 버텼던 거야.”

닉은 뺨을 훔쳤다. 아직도 그때만 떠올리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아마도 평생 그럴 것이다. 피트가 준 나무 단검은 브래들리에게 물려줬다. 피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면서 좋아했다. 아일라우와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뻐했다.

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피트의 경이로운 생명력에 감탄했다. 그의 강인함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졌다. 이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피트는 청금석처럼 빛나는 존재였다. 앞으로 살면서 피트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그런데 자신을 응시하는 닉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그는 의아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오해하지 마, 브래드쇼. 기뻐서 그래. 역시 매버릭은 강인한 사람이야. 나는 예전부터 매버릭처럼 강하고 선한 아내를 들일 거라고 꿈꿔왔지. 네 말을 들으니 더더욱 분명해졌다. 매버릭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착각하지 마라. 매버릭이 악착같이 살아온 건 고작 남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이야.”

닉이 일갈했다.

“브래드쇼, 일전에 네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찾아갔었지. 많은 예물을 주겠다고 말했고, 피트뿐만 아니라 네 가족도 한 식구로 여기고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네 아버진 단칼에 거절했어.”

톰은 말을 돌렸다. 그는 닉에게 그의 아버지로부터 피트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받겠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닉 브래드쇼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피트도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왜 거절하셨는지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대체 왜? 당황한 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닉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톰의 어깨를 힘껏 움켜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매브가 네가 좋아졌대도, 난 널 인정할 일 없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평생 기억할 거야. 세상이 네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아니야. 넌 이미 매버릭의 꿈을 한 번 짓밟았어. 두 번이라고 못할 게 있나?”
“브래드쇼.”
“더는 할 말 없다.”

닉은 자신을 돌려세우는 톰을 뿌리치고 자리를 떴다. 톰은 닉이 서 있던 자리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톰은 피트가 브래드쇼 가족에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이 거슬렸다. 손톱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할 수만 있다면 피트의 가슴 속에서 그들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싶었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


칼라쉬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칼라쉬의 막내아들인 타르게프는 키가 작지만, 몸은 다부지고 총명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그는 장차 칼라쉬 집안을 이끌어 갈 후계자였다. 겉으로는 유들유들하지만, 뱀처럼 교활하다는 평이 자자했다.

유목민들은 막내아들에게 재산과 가장의 자리를 물려준다. 앞서 태어난 자식들은 성인이 되면 재산 일부를 물려주고 분가시키지만, 말자는 집안에 남아 부모를 부양하고 그 뒤를 잇는다. 

알렉세이도 티무르와 옥사나의 막내아들이다. 그의 형제자매는 일찍이 부모의 품을 떠나 저마다 가정을 꾸렸다. 톰은 알렉세이와 타마라 사이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므로 자연스레 후계자가 됐다.

타르게프 칼라쉬는 지난번에 의논한 혼담에 대한 확답을 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세이는 혼담을 무르자고 말했다. 

“혼담은 없던 일로 하지. 보상은 반드시 하겠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차일피일 미루며 칼라쉬의 딸이 혼기를 놓치게 할 순 없었다. 칼라쉬 집안은 재산이 많고 이름도 널리 알려졌으니, 그와 사돈을 맺으려는 사람은 많다. 그래서 알렉세이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혼담이었다. 비록 이번 혼담이 어그러졌다고 해서 칼라쉬 집안에 흠이 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카잔스키 집안과도 혼담이 오갔던 칼라쉬의 딸을 어떻게든 며느리 삼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몰려들면 몰려들었지.

“아드님 일로 공교로운 상황에 부닥쳤으니, 아버지께서도 짐작은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뜻을 존중하십니다.”

타르게프는 침착하게 말했다. 톰 카잔스키가 약탈혼으로 데리고 온 신부를 공공연히 데리고 다니고, 타타흐 부족 사람들이 그 신부를 이미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칼라쉬가 아들을 보낸 이유는 그 소문의 진상을 알렉세이 카잔스키로부터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진행된 혼담을 무르게 돼서 자네 아버질 볼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타르게프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웃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어르신은 너그러운 분이시니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으시지요? 그래서 약탈혼으로 데려온 그 오메가의 재가까지 책임지겠다고 이 일대에 어르신 뜻을 알리셨고요. 그 기한이 이번 겨울까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타르게프가 말을 이었다.

“칼라쉬는 어르신 뜻을 따르겠습니다.”

타르게프가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알렉세이는 무표정한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다시 타르게프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는다.”

알렉세이는 매몰차게 말했다. 타르게프는 굴하지 않았다. 미소를 잃지도 않았다. 과연 소문대로 교활한 남자였다.

“어르신. 세니타는 카잔스키 집안의 며느리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라비 된 도리로 동생의 소망을 꼭 이뤄주고 싶습니다. 감히 어르신께 철없는 동생의 연심을 들먹이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가족의 일이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타르게프는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청했다. 연민에 호소하는 얕은수다. 세니타의 마음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힘 있는 집안과 돈독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칼라쉬의 욕심이다. 타르게프가 물러나지 않자, 알렉세이는 낮게 신음하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타르게프는 슬그머니 몸을 사렸다.

“그럼 겨울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알렉세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타르게프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이미 늦은 밤이었다. 피곤했다. 이만 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천막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톰을 발견한 알렉세이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꿈에서 타마라를 만나는 일은 잠깐 미뤄야 했다. 톰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엄숙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톰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렸다. 알렉세이는 천막 문을 걷어 올리며 고갯짓했다. “들어와라.” 알렉세이가 말했다. 톰은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발을 들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알렉세이의 천막에서 그와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렉세이는 톰과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것을 꺼려서, 되도록 단둘이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할 말이 있으면 톰이 머무는 곳을 찾아가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이르는 식이었다. 종종 옥사나가 중재하기도 했다.

“말해라.”

알렉세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차는 내어주지 않았다. 애당초 톰은 아버지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함께 있는 게 신기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뭘 하고 있지?” 알렉세이가 채근했다. 톰은 쭈뼛거리다가 이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1년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게 피트의 재가를 책임지라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다른 남자에게 피트를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렉세이는 물끄러미 톰을 쳐다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톰은 마른침을 삼켰다. 단단히 각오하고 왔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마주하는 게 껄끄럽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제 뜻을 당당하게 밝혔다.

“닉 브래드쇼가 완쾌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를 배웅할 겁니다. 그리고 닉의 아버지인 존 브래드쇼 어른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겁니다. 그분은 피트를 친자식처럼 키워주신 분이니, 그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

알렉세이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좋은 징조가 아니다. 톰은 직감했다. 당장에라도 칼을 겨눌 알렉세이의 기세에 톰은 위축되었다. 아버지의 앞에 설 때마다 톰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했다. 비참했다. 넘을 수 없는 산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톰.”

알렉세이가 매서운 눈초리로 톰을 노려보았다. 톰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맞섰다.

“너는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예?”
“네가 입은 옷, 네가 먹는 것, 네가 마시는 물, 전부 이 아비의 손에서 나왔다. 네 이름도 내가 물려준 것이고, 네가 딛고 있는 지반을 닦아준 것도 나다. 네가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너도 없다.”
“…….”
“하지만 너는 네가 이 알렉세이 카잔스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유리한 거점을 잡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그래서 필사적으로 이 아비가 아니어도 네가 잘난 놈이란 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어 하고.”
“…….”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
“네가 아등바등해봐야 세상 사람들은 네 등 뒤에 있는 나를 두려워한다. 네가 아니라 나를 말이다.”

알렉세이는 아들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심한 모욕을 당한 톰은 이를 바득 갈았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더는 아버지의 인정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분한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그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버지에게 자신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오판했다. 아버지가 피트에게 살갑다고 해서, 자신에게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알렉세이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의 형형한 눈빛은 당장에라도 톰을 관통할 기세였다. 그는 본래 무자비한 사람이다. 천성이 그랬고, 세월이 더더욱 날카롭게 깎아냈다.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고 넘본다면, 아무리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몸소 갈가리 찢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피트에게 무르게 굴면서 피트의 버릇없는 행동을 눈감아 주는 까닭은 우선 피트가 다름 아닌 제 아들 때문에 봉변을 당했으므로 그 사정을 참작하는 것이고, 피트가 마음으로는 자신을 깊이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트는 말은 시건방지게 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 같아도, 가장 좋은 물건은 당연히 어른인 자신에게 먼저 올리고 중요한 일은 반드시 허락을 구한다. 배려가 무엇인지 안다. 은혜가 무엇인지도 안다. 정을 주면 그 갑절을 갚아 줄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피트의 모습은 그 언젠가의 타마라를 떠올리게 해서……. 그러니 알렉세이도 피트에게 눈이 가고, 그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들인 톰은 어떠한가. 말은 공손하나 눈빛은 도전적이며, 행동거지는 예의 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 뜻을 관철하며 굽힐 줄 모른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둘이 될 수 없다. 언젠가 톰은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겠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다. 알렉세이는 천진한 타마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들끓는 분노를 삭였다.

“바른대로 말해라. 일전에 네가 독단적으로 존 브래드쇼를 찾아가 덜컥 혼담을 청했을 때 말이다. 너는 네가 카잔스키 집안의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존 브래드쇼가 네 혼담을 수락하리라 자신했지?”
“…….”
“대답해라.”
“……예.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톰은 뺨이 뻣뻣하게 당겼다. 모멸감에 속이 메스꺼웠다. 무엇보다도 분한 사실은, 아버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명료한 진실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기 자신과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톰은 자신은 그럴 수 있다고 자부해왔고, 그의 믿음은 오늘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고?”
“내쫓겼습니다.”
“당연한 결과다.”

알렉세이는 엄숙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존 브래드쇼가 거절한 건 당연한 거다. 혼담을 논하고 결정하는 건 아버지의 몫이다. 자식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 된다.”

알렉세이가 다시금 강조했다.

“분수도 모르는 애송이가 자신의 힘만 믿고 자기 뜻을 내세우는데 선뜻 응할 리가 없지.” 

알렉세이는 코웃음 쳤다.

“돈에 눈이 먼 놈들이나 스스로 가족을 지킬 힘이 없는 나약한 놈들이나 제 자식을 내다 판다. 만약에 네 요구에 브래드쇼가 수락했다면 그자의 그릇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다는 증거다.”

그 말에 톰은 움찔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존 브래드쇼는 비록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됨됨이는 훌륭한 사람이다. 제대로 된 가장이라면 자기 자식의 혼담을 신중하게 결정한다.” 
“아버지…….”

톰은 목이 멨다.

“아버지라면, 자식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브래드쇼에게 피트는 자식이니, 그 애의 행복을 바란 거다. 집안에서 허락도 하지 않은 결혼인데 피트가 편안하게 지낼 리 없다고 판단했겠지. 네가 피트의 재가를 책임지지 않더라도, 존 브래드쇼라면 피트에게 좋은 짝을 찾아 줄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 만행은 아비인 내가 대신 갚겠다.”

알렉세이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단호하게 일갈했다.

“아버지.”
“아들아, 결혼은 철부지들의 한 철뿐인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이제야 사랑을 알게 된 자식이 측은하다는 눈빛. 사랑에 빠져 공과 사를 가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아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자신 역시 그랬으므로. 하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벼락처럼 으름장을 놓았다.

“너는 이 아비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신하지. 하지만 피트도 너와 같으냐? 네가 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겠답시고 가족을 저버리고 일족을 등져도, 그 애는 아니다. 가족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시댁에서는 인정도 받지 못하는데 그 애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처럼 파렴치한 놈만 바라보면서?”

톰은 고개를 숙였다. 숨이 막혔다. 수십 개의 창이 등을 찌른 기분이었다.

“너는 남편이 될 자격이 없고, 아버지가 될 준비도 되지 않았다.”

닉 브래드쇼의 말은 이런 뜻이었나. 톰은 이제야 닉이 낮에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다 못해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닉도 자신의 아버지인 존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피트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방황하는 주인 잃은 새끼 양이 아니라, 울타리 안에서 그리고 무리의 품에서 함께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톰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용서를 빌었다. 알렉세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톰은 다시 이마를 찧었다.

“브래드쇼 어른에게 정식으로 혼담을 청해 주십시오. 피트를 아내로 삼고 싶습니다. 피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세요, 아버지. 피트를 모르고 살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톰은 절절하게 애원했다. 그답지 않게 감정에 북받쳐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그만큼 절박했다. 이성은 송두리째 날아갔고,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한낱 벌레만도 못한 놈이 되어도 좋았다.

“우는 소리 듣기 싫다. 나가라.”

알렉세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톰은 허둥지둥 알렉세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아버지, 부탁드립니다.”
“나가라고 말했다.”

이제야 불손한 태도를 거두고 굴종하는 아들이 더더욱 괘씸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내쳤을 것이다. 이만큼 인내하는 까닭은 톰이 타마라가 남긴 유일한 피붙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유일한 흔적.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들을 보며, 타마라가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어떻게 나이가 들었을까 상상하는 것이 알렉세이의 고독한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사랑만을 곱씹으며 살 순 없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다.

“아버지, 허락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감히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겸허하게 받겠습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아둔해서 아버지 뜻을 미처 몰랐습니다. 용서하세요.”
“나는 이미 기회를 줬다. 그런데 넌 네가 뭘 잘못했는지 깨우치지 못하고 또다시 자만했다. 너처럼 오만불손한 놈은 제 식솔을 책임지지 못한다.”
“아버지, 제발. 제발. 잘못했습니다.”

톰은 애처롭게 매달렸다. 그가 알렉세이에게 평정심을 잃고 이처럼 무참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톰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알렉세이에게 부정당해도, 그 애타는 마음과 절망을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알렉세이는 기어이 톰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금 매달리려는 톰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명치를 걷어차인 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그러고도 알렉세이는 분이 풀리지 않아 꿈틀거리는 톰의 머리를 짓밟았다.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실핏줄 터진 톰의 눈이 붉었다. 톰의 숨이 곧 끊어질 것처럼 헐떡였다. 알렉세이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발을 뗐다.

“네가 아무리 빌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라.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피트도 내쫓을 것이다.”

알렉세이가 피트를 거론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더는 아버지에게 맞설 수 없다. 톰은 연신 마른기침을 해대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참으려고 애를 써도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속이 부대끼는가 싶더니 급기야 피를 토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톰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빌어먹을.”

알렉세이는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는 품에서 타마라의 유품인 목걸이를 꺼냈다. 언젠가, 피트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 목걸이가 피트와 아이를 지켜주길 바라며 그에게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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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3.08 01: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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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
[Code: 6731]
2023.03.07 09: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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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야 되는데 ㅠㅠㅠㅠㅠㅠ 허락 좀 해 주세요 ㅠㅠㅠㅠㅠ
[Code: ed99]
2023.03.07 09: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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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재밌어..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후회하게 된 톰 너무 맛있어요.. 그리고 항상 느끼는건데 알렉세이 너무 섹시해 센세.. 알렉세이는 완전 원작 아이스맨의 아버지 콤플렉스의 현신 그 자체에 핫대디라 섹스 그 자체임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
[Code: 2b27]
2023.03.07 11: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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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 이게 첫단추 부터 잘못 꿰었다보니.. 뭐든 다시 바로잡으려면 몇 배로 힘드니까...ㅠㅠㅠㅠㅠㅠㅠ
[Code: 6027]
2023.03.07 11: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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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야ㅜㅜㅜㅜ톰의 반쪽은 타마라란말이야ㅜㅜㅜㅜㅜㅜ엉엉ㅜㅜㅜㅜ나붕도 속편하게 아 그냥 둘이 이어주세요! 하다가 사실 톰이 어쨌든 시작은 약탈로 했다는걸 다시 깨달으니 주변 사람들 반응이 너무 잘 이해가요ㅠㅅㅠ
[Code: abb4]
2023.03.07 14: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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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알렉세이.....존나 너무함.....톰이 잘못한 건 맞는데 아버지 존나 너무한다......내가 다 마상이네.....마누라만 사랑하고 아들은 사랑해주지도 않았으면서 ㅠㅠㅠㅠ그나마 아내 닮아서 저 정도라고? 그런데 피를 토할 정도로 발로 차요....? 톰의 성격형성에 누구보다 큰 악영향을 끼치신 거 같은 분이 애를 나무랄 자격이 있나 ㅠㅠㅠㅠㅠ 알렉세이 말도 완전 틀린 말은 아닌데 아버지가 돼서 자식을 너무 다그치기만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그냥 톰이 불쌍해...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한테 인정 못 받고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살아왔는데....아직도 피트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는 거 저거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그런 거 아니냐고 ㅠㅠㅠ흑흑...이번 편 너무 슬퍼요 센세....톰 피트랑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비는 거 너무 애처로워....톰이 분명 잘못했지만 속죄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첫단추를 너무 게갓이 끼워서 ㅠㅠㅠ젠장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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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15: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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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과 알렉세이 말이 틀린건 없는데...ㅠㅠㅠㅠ엉엉엉엉 아부지 어름이 그만 패세요ㅠㅠ우니 애가 잘못을 좀 많이했고 오만 그자체인건 사실이지만 피토할정도로 패면 어떡해요...라지만 기침하면서 피토하는 아이스..휴 존나 맛있어...섹시해...나붕이 이런거 조아하는건 또 어떻게 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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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16: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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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아이스 첫단추를 개같이 잘못끼웠네...ㅠㅠ약탈혼뿐만 아니라 아니 카잔스키 이름만 믿고 절차를 다 무시했으니 어쩔...ㅠㅠㅠㅠ저러니 닉이 개무시할만하고 알렉세이도 너무하다고는 했지만 자식이 하나만 더있었어도 생명 유지하기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알렉세이 기준으로는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게 맞을듯ㅠㅠㅠㅠ이제서야 개같이 후회하지만 넘어야할 산이 너무나 많다ㅠㅠㅠㅠ하 하지만 울고 후회하고 빌고 이마까지 바닥에 찧고 아버지 바짓가랑이 붙잡고 걷어차이고...아...너무너무너무 좋습니다ㅠㅠㅠㅠ저 오만덩어리 미남 왕자님이 저렇게 울면서 구르고 죽도록 후회하고 피토하는거 뭐라고 표현하지도 못할만큼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
[Code: 683d]
2023.03.19 23: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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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왜 거절하셨는지 정말 모르겠어?” 라는 닉 말에 나도 왜지..? 하고 톰이랑 같이 당황루트 타고 있었는데 알렉세이와의 대화에서 아하 하다가 피토하는거 보고 충격.. 아부지 왜 애를 그렇게 때려요ㅠㅠㅠㅠㅠ 하지만 사랑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비는 거 너무 좋다ㅋㅋㅋㅋㅋㅋ 앞으로 피트가 톰 간호하거나 챙겨주는 장면이 나올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벅차오른닼ㅋㅋㅋㅋㅋㅋ케케케 다음화 딱 대
[Code: a0f6]
2023.04.02 06: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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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는 이미 피트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 같은데 아들한테 는 왜 그래욧!!! 먼저 톰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깨달음을 주지도 못 했을거면서!
[Code: fb76]
2023.04.18 12: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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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ㅠㅠㅠ센세 진짜 천재다ㅠㅜㅠㅠㅠ이게 이런의미였군
[Code: 10ce]
2023.05.25 05: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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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였구나..!!! 결혼은 집안과 집안 사이의..!!! 캬 센세는 천재야??? 근데 톰 안쓰럽다ㅠㅠ 알렉세이 힘 좀 써봐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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