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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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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55. 새로운 아침


눈이 그쳤다. 아침 햇살을 받은 천막이 은은한 주홍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두꺼운 천을 투과하고 들어온 빛의 열매가 영글었다. 새벽녘에서야 잠이 든 톰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피트를 보고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느꼈다. 젊은 아내는 좋은 꿈을 꾸는지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톰은 피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몸단장을 마쳤다.

천막 밖으로 나오니 입김이 뽀얗게 서렸다. 그래도 전날보다 한결 포근했다. 스치는 바람이 어딘가 간드러진 데가 있었다. 톰은 팔을 쓰며 길을 나섰다. 밤새도록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던 자리가 어지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난 젊은이들이 어질러진 자리를 치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다, 론.”

톰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를 옮기는 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간밤에 어땠어?” 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톰은 그저 웃기만 했다. 톰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손님이 더 늘었다. 밤새 달려온 손님들은 결혼식 당일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많은 선물을 건넸다. 물론 새신랑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술잔이 빼곡히 들어섰던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이 대신 자리했다. 아침 일찍 도착한 손님들이 아침상을 받았다. 전날 도착했던 손님들도 하나둘씩 일어나 아침을 먹으려고 나왔다. 냄비마다 삶은 고기가 부글부글 끓었다. 꼬챙이에 꿴 양고기도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뜨거운 기름이 뚝뚝 떨어졌고, 회색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톰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는 니콜라이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흔들며 제발 그만 울라며 애원했다. 톰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콜렌카, 애가 잠투정이 심한가 보군.”
“내 처지가 우습게 보이지?”

니콜라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이의 턱에 흐른 침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곧 이렇게 될 거다. 애가 태어나면 네 인생도 끝이야. 톰, 애들은 말이다……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고, 돌아서면 싸고, 악귀 들린 것처럼 울어대고, 한숨 돌리겠다 싶으면 덜컥 병이 나서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 그러다가 방긋 웃어주면 그래도 낳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회한이 서린 충고였다. 니콜라이는 놀기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좀처럼 집에 붙어 있는 법이 없고, 밤마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자식이 태어난 이후로는 애를 보느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니콜라이의 아들은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라 조금만 불편해도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귀가 얼얼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

톰은 말을 아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서럽게 우는 젖먹일 품에 안을 일은 없을 것이다. 피트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말했으므로.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시일이 지나며 사람들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두고 떠들어대는 말에 피트가 힘들어할 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업고 달래주면 되나?”
“됐다. 얘는 나랑 카추샤가 아니면 절대 울음을 안 그치거든. 넌 가서 손님이나 대접해라.”

니콜라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톰은 다시 손님을 대접했다. 고요한 아침의 평온이 지나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음식이 아주 훌륭하다는 손님의 칭찬에 그는 뿌듯했다. 내심 피트가 직접 잔칫상을 차리겠다며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손님의 웃는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잠시 후, 알렉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과음의 여파로 그는 지독한 두통을 앓고 있었다. 박하잎이 든 주머니에 코를 묻고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모양새가 꼭 이빨 빠진 맹수 같았다. 알렉세이는 이마를 꽉 조인 안대의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톰이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버지,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알렉세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아들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실없이 웃는 게냐?”
“예?”

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제가 웃었습니까?”

알렉세이는 안대 끈을 다시 조였다. 실없이 웃고 다니는 아들의 모습이 한심했지만, 이제 막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세상이 전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새들의 지저귐도 자신을 위한 찬가처럼 들릴 것이다. 그저 보기 껄끄러울 뿐이다. 그는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가 말을 돌렸다.

“피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러올까요?”
“됐다. 더 자게 내버려 둬라.”
“예.”

알렉세이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손님이 그에게 아는 체했다. 아들의 인물이 훤하다는 입에 발린 칭찬에 알렉세이는 밋밋한 미소만을 보였다. 곧 그의 앞에 푸짐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알렉세이는 돌멩이를 씹는 것처럼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기 조각을 씹었다.

점심 무렵에 피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악단과 광대들이 도착했다. 반가운 손님을 데리고 온 것은 어김없이 야나였다. 야나는 피트만큼이나 그들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는 악단의 단장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단장은 너그럽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의 질문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가 야나와 대화를 나눌 동안, 다른 단원들은 그들을 위해 준비한 천막으로 짐을 풀러 향했다.

“톰, 악단이 도착했어. 가서 피트 좀 깨워.”

스베틀라나가 톰을 찾았다. 그녀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아무렇게나 닦았다. 아침부터 손님들에게 내올 상을 차리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했는데,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스베틀라나는 산양처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함께 일하던 율리야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누구도 스베틀라나만큼 일할 수 없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톰은 점심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것도 가지고 가.” 스베틀라나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담긴 주전자를 톰에게 건넸다. 톰은 옥사나에게 부탁해서 꿀을 따로 챙겼다. 피트는 우유에 꿀을 타서 먹는 걸 좋아했다.

 
***


피트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옷차림이 천진했고, 새근새근 숨소리가 애틋했다. 톰은 잠이든 피트가 사랑스러워서 그를 깨우지 못하고 한참 지켜봤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물고 빨았다. 빠는 힘이 좋았다. 혀는 미끄럽고 따뜻했다.

조금 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스베틀라나가 준 우유가 식기 전에 피트를 깨워야만 했다. 톰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피트의 어깨를 말아쥐고 그의 몸을 흔들었다.

“매브, 여보.”

예전부터 아내를 맞이하면 꼭 그이를 ‘여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쑥스럽다.

“여보.”

그래도 단어의 울림이 정겨웠다. 톰은 선선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피트를 가만히 앉혀두고 종일 그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평생 남들보다 갑절은 부지런하게 살아왔으니, 하루 정도는 나태하게 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막 결혼식을 올렸는데, 남들도 그 정도는 너그럽게 눈감아주지 않을까.

톰은 꼼지락거리는 피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을 간질였더니 피트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톰은 조금 더 간질였다. 잠결에 피트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우…….”
“여보.”
“여보?”

피트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너 말이다.”
“나?”
“응. 넌 내 아내잖아.”

톰은 흘러내린 피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맞아, 나 결혼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피트는 코를 훔쳤다. 그는 톰의 손바닥을 잡고 자신의 눈두덩이 위에 올렸다. 다시 세상이 캄캄해졌다. 기분 좋을 정도로.

“더 잘래.”
“이만 일어나라. 악단이 도착했대.”
“악단.”

악단이라는 말에 피트는 눈을 반짝 떴다. 졸음이 싹 달아났다.

“악단이 왔다고?”

피트는 톰을 밀치고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톰은 깜짝 놀라 얼른 피트를 부축했다.

“피트!”
“못 걷겠어.”

피트는 앓는 소리를 내며 톰의 팔을 꽉 붙잡았다. 울상 지은 얼굴이 보기만 해도 처연했다. 피트는 어딘가 안쓰러운 구석이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전처럼?”

톰은 덜컥 겁이 났다. 부단한 노력 끝에 피트는 겨우 걷게 되었지만, 아직 예전처럼 걷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았고,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오래 걸어도 다리에 쥐가 나서 한참 쉬어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톰은 걱정이 앞섰다. 피트가 걷지 못하는 것보다, 걷지 못해서 상심할까 봐 염려스러웠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어디가 불편해? 응?”
“밑이 욱신거려.”
“아.”

톰은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움직이면 더 아파.”

피트는 주춤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신이 드니 전날 밤의 여운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톰이 손목을 하도 세게 쥐어서 손목도 시큰거렸다. 자세히 보니까 손자국이 새빨갛게 남아있었다. 목도 칼칼하니 아팠다. 너무 많이 운 모양이었다.

“혹시 쓰라려?”

톰은 미안한 마음, 민망한 마음이 뒤섞여 뒤숭숭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실은 그도 다리 사이가 불이 붙은 것처럼 얼얼했다. 그마저도 약간의 쾌감처럼 느껴졌지만. 물론 민망해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약간. 근데 그건 참을 만하고, 안쪽이 아파. 욱신욱신 아파. 뻐근해. 불편해.”
“잠깐만 기다려라, 바샤 영감을 데리고 올게.”

톰은 피트가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봐 이불로 꽁꽁 싸맨 다음에 서둘러 천막을 나섰다. 홀로 남은 피트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새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트는 이불 밖으로 나와 속옷을 벗었다. 피가 묻어 있었다.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피트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아랫배를 더듬었다. 여기까지 다 들어왔으니까, 혹시 배 속이 짓뭉개진 건 아닐까 하고 겁이 났다. 괜히 더 아프게 해달라고 했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피트는 낑낑거리며 엉겨 붙은 피를 닦았다. 새로운 속옷을 꺼내어 거기에 천을 도톰하게 접어 깐 다음에 옷을 갈아입었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도 깨끗하게 씻고, 눌린 머리카락도 손질했다. 얼추 단장을 마치고 나니 배가 조금 고팠다. 오랜만에 느낀 허기였다. 몸은 여전히 욱신욱신 쑤셨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벌렁 자리에 드러누운 피트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톰을 기다렸다. 이대로 죽으면 남편에게 맞아 죽은 건가, 아니면 배가 터져서 죽은 걸까. 남들이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쑥덕거릴까. 톰은 신혼에 아내를 때려죽인 나쁜놈이 되어서 앞으로 여생을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 할까.

“죽기 싫어.”

피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죽기 싫어!”

피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제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됐는데, 더 즐기지도 못하고 죽을 수야 없다. 잘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바닥에 무릎을 대고 기어다니며 먹을 것들을 찾았다.

 
***


새로 우려낸 국의 간을 맞추고 있던 스베틀라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디론가 뛰어가는 톰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불러세웠다.

“피트는? 아직도 안 일어났어?”
“일어났습니다.”

톰은 어디론가 정신이 팔린 얼굴이었다. 스베틀라나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녀는 국물을 덜었던 숟가락을 휘휘 털어내며 다시 물었다.

“근데 왜 혼자 와?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바샤 영감을 찾으러요. 혹시 보셨습니까?”
“왜? 피트 어디 아프니?”
“못 걷겠대요.”
“또 다리가 불편하대?”
“아니요, 다리가 아니라…….”
“그럼?”
“저어, 그게…….”

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스베틀라나가 대번에 톰의 어깨와 등을 철썩 때렸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톰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어휴, 이 화상! 피로연 동안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고, 잔치도 즐겨야 하는데 애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피트 걔 악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말 안 듣고 뻗대는 거, 악단이 오면 실컷 놀게 해주겠다고 겨우 어르고 달래서 준비시켜놨더니!”
“죄송합니다, 고모님.”
“그 고집 센 애를 말리느라 진땀 뺐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어제도 나가서 놀면 안 되냐고 계속 졸라대서 고생했는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애를 상대로 그러면 어떡해! 조심 좀 하지! 날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 앞으로 못해도 30년은 부대끼고 살 건데! 그걸 못 참아?”

스베틀라나는 톰을 사정없이 때리며 화를 냈다. 톰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걷어차면 걷어차는 대로, 속절없이 맞으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음식을 장만하던 여자들이 스베틀라나의 눈치를 보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다들 일손을 놓는 바람에 더는 음식이 나가지 않고 흐름이 뚝 끊기자, 옥사나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찾아왔다.

“웬 소란이냐?”
“어머니 손자가 손자며느리를 잡았어요.”

스베틀라나는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네 조카잖느냐, 스베타.”
“이런 화상은 제 조카 아니에요.”

옥사나가 자신을 나무라자 스베틀라나는 거칠게 콧김을 뿜어내며 느슨하게 풀어진 두건을 다시 싸맸다.

“어떻게 된 일이냐, 톰.”

옥사나가 점잖게 물었다.

“피트가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바샤 영감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곳이, 저어, 그러니까, 그, 그곳이…… 안쪽이 아프다고 해서요. 혹시 제가 서툴러서, 그…… 아니에요.”

처음에는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톰이 궁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 나서는 낯뜨거운지 고개를 숙였다. 입맛만 다시는 모습이 볼품없었다. “어이구.” 스베틀라나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첫 경험을 하고 나면 그러는 여자들이 더러 있다. 오랜만에 남편과 달 기우는 밤을 보낸 여자들도 그러기도 해. 안 쓰던 근육을 써서 몸이 놀란 것뿐이다. 걱정할 것 없다.”
“…….”
“그런 일로 바샤를 찾으면 서로 민망하니 괜한 걸음 하지 마라. 몸을 따뜻하게 하고, 푹 쉬면 낫는다.”
“……예.”
“찜질 주머니를 만들어 줄 테니 가지고 가렴.”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데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그때 바샤를 부르고.”
“예, 할머니.”
“마음이 동해도 당분간은 좀 참고. 너희는 젊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어.”
“예.”

옥사나가 점잖게 충고했다. 톰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옥사나는 톰을 자신의 천막으로 데리고 가서 찜질 주머니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쑥과 소금을 넣어 만든 것인데, 부인들에게 좋다고 말했다. 옥사나는 톰에게 앞으로 종종 쓸 일이 있을 테니, 다음부터는 직접 만들라고 했다. 또, 너무 많이 쓰면 오히려 좋지 않고 아이를 가졌을 때는 쓰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


“답답해. 심심해. 나갈래.”

피트는 배에 올린 찜질 주머니를 북처럼 두드리며 말했다. “답답하다고.” 톰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트가 기운을 차린 건 좋은데, 감당하기 버겁다.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톰은 더는 못 참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피트를 말렸다.

“할머니께서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다. 참아라.”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 아니다. 콱 죽어버릴래.”
“그런 못된 소리 자꾸 하면 혼이 날 줄 알아.”

톰이 무표정한 얼굴로 엄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피트가 그런 톰을 빤히 쳐다보며 따졌다.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미안하다.”

톰은 더는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피트는 찜질 주머니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제자리에 드러누워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톰의 모자 장식을 잡아당겼다. 톰은 지은 죄가 있으니 무어라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인내심을 발휘할까 궁금한 마음에 피트는 톰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았다. 그래도 톰은 가만히 있었다. 한 가닥 더 뽑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꾹 참기만 했다.

“저기,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나한테 화라도 낼래? 너무 심심해서 그래.”

피트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렇게 심심해?”

톰이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물었다.

“응. 어제 종일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갔어.”
“그럼 바람이라도 잠깐 쐬자.”

이렇게까지 투정을 부리는데 더는 말릴 재간이 없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달래줘야만 했다. 톰은 피트의 겉옷을 챙겼다. 모자도 씌워주었다. 옥사나가 만들어 준 모자인데, 평소 쓰던 모자와 달라 어색한지 피트는 자꾸 눈을 찡긋거렸다.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톰에게 자꾸만 물었다. “응, 예뻐.” 톰은 피트가 안심할 때까지 그가 바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어서 톰은 피트가 장갑을 끼는 것을 도와주었다.

“톰.”
“응.”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널 좋아하니까.”
“그래? 나랑 즐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

피트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톰도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솔직하게 말해서.”

피트는 어깨를 쭉 펴더니 사뭇 진지하게 운을 뗐다.

“원래 널 이만큼 좋아했다면, 어젯밤 이후로는 이만큼 더 좋아하게 됐어.”

피트는 공을 쥔 것처럼 손을 둥글게 모으더니, 이어서 팔을 쭉 펴고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피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세상에 그렇게 기분 좋은 게 있다니. 여태껏 모르고 살아온 게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알았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같이 밤을 보냈으면 날 더 일찍 좋아하게 됐을까?’ 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넌 진짜 좋은 남편이야. 돈도 많고, 힘도 세고, 튼튼하고, 기분 좋은 것도 잘해!”
“알았다. 그런데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톰은 더없이 뿌듯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행복을 시기해서 앗아갈까 봐 피트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

피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톰의 어깨를 툭 쳤다.

“안다. 넌 영민하지. 그런데…….”
“그런데 뭐?”
“아니다. 아무것도.”

가끔 하루살이처럼 불길에 뛰어들려고 하니까. 톰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피트는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가 다치지 않게 불씨를 꺼트리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어쩌면 황홀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뜨겁지 않은 불꽃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톰은 피트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에 피트는 눈을 빛냈다. 땅을 감싸 안은 눈이 자신의 아집, 시기심, 미숙함, 충동심마저 모두 포근하게 감싸 줄 것처럼 보였다. 등을 스치는 바람도 더없이 상쾌했다. 피트는 신이 나서 한껏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네 등이 좋아. 단단하고, 넓고, 따뜻해.”

피트는 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웃었다. 사람은 영원히 살지 않으므로, 사는 내내 좋아하는 것만 잔뜩 보고 잔뜩 말하고 싶었다. 가슴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싫어하는 사람들을 흉보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짧았다. 사랑하기에도 바쁜 나날이다.

“남한테 뭐 부탁하는 거 눈치 보이고 미안해서 잘 못 하겠는데, 너한테는 막 내키는 대로 다 말할 수 있어서 좋아. 그리고 넌 진짜 다 들어줄 것 같아서 좋아. 내가 모래로 탑을 쌓아달라고 해도 들어 줄 거지?”

피트는 톰을 꽉 껴안으며 물었다.

“그럼.”

톰은 부드러운 말씨로 대답했다. 피트는 활짝 웃었다. 기세등등해져서는 내키는 대로 말했다.

“고마워. 근데 그런 이상한 부탁은 안 할 거야.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나랑 오래 살아줘. 우리 앞으로 같이 재밌는 거 많이 하자. 넌 장난 같은 것도 많이 안 해봤지? 내가 아버님 많이 괴롭혀줄게. 아버님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혼 못 내셔.”
“괜찮다. 아버지랑 그런 시답잖은 일로 같이 시간 보내지 마라.”
“뭐, 어때서? 아마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도 참으실걸? 그러니까 나한테 말만 해. 난 남의 속 뒤집어 놓는 짓 잘 하니까. 원래 너처럼 다 잘하고 점잖은 사람이 실수 한 번 하면 다들 죽어라 뭐라 하는데, 나처럼 늘 사고를 치는 사람은 큰 사고를 쳐도 다 그러려니 해.”

가만히 피트의 말을 듣고 있던 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톰의 뺨을 만지작거리던 피트는 그의 뺨이 축축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또 실수했나? 욕도 안 했는데 왜 울지?’ 피트는 조바심이 나서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하여튼 바늘 끝처럼 예민한 남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운다. 이래서야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왜 울어?”
“기뻐서.”

톰은 코를 훌쩍거리며 피트를 고쳐 업었다. 피트의 무게. 인생의 무게. 꿈의 무게. 사랑의 무게. 몸을 짓누른 무게감이 이처럼 고맙게 느껴졌던 적이 지금껏 없었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짐을 짊어지고 산다. 그러나 그 짐이 사실은 값진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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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5.02 23: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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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닥거리면서 항상 저렇게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1550]
2023.05.03 00: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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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오늘도 나를 울렸어 ༼;´༎ຶ ۝ ༎ຶ༽༼;´༎ຶ ۝ ༎ຶ༽༼;´༎ຶ ۝ ༎ຶ༽센세를 만나고 나도 울보가 됐어 근데 백날천날맨날 울고싶은 이 마음은 센세를 향한 내 사랑이겟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ㅠㅠㅠㅜ
[Code: a28d]
2023.05.03 00: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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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ㅠㅠ
[Code: 79a6]
2023.05.25 15: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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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해 내가 장가보낸 기분ㅋㅋ
[Code: 6fd9]
2023.08.09 16: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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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토미 언제나 행복에 겨워 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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