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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알렉세이는 칼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칼끝에 햇살이 스며들었다. 초록빛이었다. 굳은살 박인 손끝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검이 반으로 가른 허공 저 너머,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피트가 보였다. 알렉세이는 재빨리 검을 수납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자리를 옮기자.”

여기까지 오는 길이 여간 고된 게 아니었는지, 피트의 얼굴이 창백했다. 알렉세이는 그를 부축하여 천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달아나려다 붙잡힌 포로가 우는 소리였다.

알렉세이는 피트에게 차를 내줬다. 피트는 버릇처럼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 마시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기 곤란한 말을 머금고 있을 때면 피트는 손이 바빠졌다. 이제는 또 팔을 긁기 시작했다. 알렉세이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뭐지. 너희 부부 일이더냐?”
“네. 어떻게 보면 집안일이기도 하고요.”
“톰과 먼저 상의했느냐?”
“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했고?”
“네, 일단은.”
“그렇다면 굳이 나에게 말할 것 없다. 톰은 네 남편이다. 남편의 결정을 따라라.” 

알렉세이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피트의 안색이 흐려졌다. 꼭 치통을 앓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물거리는 입과 뺨이 미세하게 떨렸다. 알렉세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다시 말했다.

“매버릭. 너도 결혼했으니 이제 어른이다. 부부 사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라. 주변에서 입을 댈수록 길을 헤매기만 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지자, 그제야 피트는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알렉세이의 얼굴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피트는 속이 퍽 답답한지 작게 기침했다. 알렉세이는 그의 심정을 헤아렸다.

“톰이 네게 섭섭하게 했느냐?”
“아니에요, 톰은 잘해줘요. 톰은 잘못한 게 없어요. 순전히 제 문제예요. 제가, 제가…….”
“좋다. 네 말대로 지금 네 고민거리가 네 문제라면.”

알렉세이는 잠깐 뜸을 들였다. 어렵다. 명령과 통보, 그리고 복종만이 절대적이었던 남자에게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알렉세이는 무르고 연약한 것을 대하는 데 서툴렀다.

“톰은 어떻게 하길 바랐지?”
“둘만의 비밀로 묻어두자고 했어요. 톰은 괜찮대요. 저 때문에 자기가 오물을 뒤집어써도 괜찮대요.”
“그렇다면 톰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둬라.”
“하지만 저는 톰이 그런 오명을 쓰는 게 싫어요. 또, 정직하지 않게 사는 게 싫어요.”

피트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다.”

알렉세이는 천천히 말했다.

“전부 내보이는 것이 정직한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순전히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고자 공공연히 모든 치부를 드러내어 도리어 주변을 괴롭게 한다. 주변 사람은 무슨 잘못이지? 그 사람이 고결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그의 허물까지 덮어쓴 꼴이다.”

알렉세이는 쓴웃음을 터뜨렸다. 목이 말랐다. 맹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목을 축이는 와중에도 그는 피트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망설이는 입술,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을.

“나는 정직함이란.”
“…….”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명심할게요.”

피트는 결연하게 말했다.

“너는 강한 아이다.”

알렉세이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피트에게 내밀었다. 그가 조금 전 살펴보던 검이었다.

“받아라. 널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싸워서 이겨라. 네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모두가 알게 해라.”
“이건…….”

피트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았다. 길고 날렵한 곡도의 손잡이에 석류석이 박혀 있었다. 알렉세이가 검을 보라는 뜻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피트는 조심스럽게 검집을 뽑았다. 휘어진 칼날의 단면이 매끄러웠다. 대장장이가 수없이 두드려 만든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대장장이에게 특별히 가볍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칼날이 머금은 푸르스름한 불빛에 피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명검이다. 피트는 한눈에 이 검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네가 쓰기 편하게 만들었다. 나나 톰이 쓰는 검은 너한테 너무 무겁고 길다.”
“무겁지 않아요.”

피트는 볼멘 목소리로 말하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표정이 새침했다.

“길지 않다는 말은 차마 못 하는군.”

알렉세이는 작게 웃었다. 그는 모자를 고쳐 썼다.

“톰에게 바나쿰의 처분을 맡겼다. 내일, 세나메브 하마르를 결단하러 떠날 것이다.”

그 말에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렉세이는 피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차렸다.

“당연히 톰도 출전해야 한다. 그 애는 내 자식이다. 세나메브 하마르의 목을 베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톰이어야 한다.”
“하지만 톰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이런 말씀 드려서…… 이제 톰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겨우 다시 만났는데,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피트는 울상을 지었다. 두서없이 늘어놓은 말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왜 헤어진다고 생각하지?”

알렉세이가 피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 피트는 그의 의도를 몰라 멍하니 되물었다.

“내가 검을 왜 줬다고 생각하느냐?”
“아.”

피트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알렉세이가 준 검을 꼭 끌어안았다. 검의 무게, 검의 차가움, 그 모든 것이 피트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저도 싸울 수 있나요?”

피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몸이 저절로 들썩거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나가 싸우고 싶었다. 함성, 말발굽이 울리는 소리, 진동하는 땅, 열기, 핏빛으로 물든 아지랑이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피트가 평생 동경했으나 차마 다가갈 수 없었던 미지의 지평선이다.

“당연한 소리. 너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다. 카잔스키는 피로써 증명한다. 우리 집안 식구라면 제 키만큼 시체를 쌓아 올려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면요?”
“넌 꽃이 아니라 매다. 네가 있을 곳은 정원이 아니라 하늘이다.”

알렉세이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피트는 환하게 웃었다. 알렉세이에게 전사로 인정받은 것이 기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은 그들보다 더 위대해질 수 있다. 그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

“내 아들을 지켜다오.”
“그럼 저는 누가 지켜줘요?”

피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짓궂게 되받아쳤다.

“너는 내가 지켜주마.”
“네, 믿을게요.”
“그래.”

알렉세이는 팔을 뻗어 피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피트는 검집을 어루만지며 묘한 눈으로 알렉세이를 흘끔거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알렉세이의 왼쪽 눈, 그가 쓴 검은 안대에 꽂혔다. ‘무슨 꿍꿍이지.’ 알렉세이는 괜스레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게냐?”
“있잖아요, 이제 눈 없어요?”

피트가 자신의 왼쪽 눈꺼풀을 가리키며 물었다.

“없다.”
“그럼 손가락으로 찌르면 푹 들어가겠네요?”
“……그렇겠지.”

알렉세이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피트는 서슴없이 알렉세이의 안대를 위로 젖히더니, 눈꺼풀을 푹 찔렀다. “너.” 알렉세이는 드물게 당황해서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하하하. 진짜 안이 텅 비었네요.”

피트는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했다.

“버릇없는 것. 너처럼 버릇없는 것은 생전 처음 본다. 앞으로도 볼 일이 없겠지. 그래야만 할 텐데.”

알렉세이는 혀를 내둘렀다. 피트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망아지가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팰 수라도 있지, 피트는 때릴 수도 없었다. 알렉세이는 애꿎은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망아지를 다루듯이 했다가는 뼈라도 부러질까 봐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아들의 원망을 살뿐더러, 무엇보다도 피트가 종일 조잘대며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피트의 스스럼 없는 장난 덕분에, 알렉세이는 눈을 잃었다는 비극적인 일이 시시한 사고처럼 느껴졌다. 울타리를 쓸다가 가시가 박혔거나, 빙판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이다. 중압감이 덜해졌다. 자신의 사고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의 측은한 눈초리가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멋진 안대를 만들어드릴게요.”

한참을 웃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 피트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알았다.”

알렉세이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트를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조용히 쉬고 싶었다. 성가신 일은 전부 톰에게 맡기고 싶었다. 아니, 애당초 톰의 아내가 아니던가? 왜 자신이 이런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안구가 빠져 푹 꺼진 눈을 맘껏 찔러 본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피트는 대뜸 알렉세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더듬거렸다. 알렉세이는 눈앞이 아찔했다.

“뭐 하는 게냐?”
“가만히 계세요. 머리둘레를 재고 있잖아요. 안대를 만들어드리려면 머리둘레를 알아야죠. 내친김에 모자도 만들어드릴게요.”

피트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했다. 알렉세이는 기어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러자 피트는 알렉세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밉살스럽게 툭 내뱉었다.

“빗질 좀 하세요, 머리카락이 엉켰어요.”
“나한테 잔소리하지 마라.”
“홀아비 티 내지 마세요. 남자가 나이 먹고 궁상맞게 지내면 보기 흉해요.”

피트는 키득거리며 핀잔을 줬다. 알렉세이는 기가 막혔다. 야단을 치려다가 관뒀다. 힘든 일을 겪어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보는 것보다야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까부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처럼 피트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넌 정말이지…… 됐다.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다 쟀으면 빨리 나가라. 시답잖은 장난이나 하고 싶으면 가서 톰이나 찾아라.”
“걔는 두 눈이 멀쩡하게 붙어 있어서 이런 장난 못 쳐요.”

피트는 그렇게 말하며 안대 위를 꾹 눌렀다. 알렉세이는 더는 참을 수 없어 피트를 번쩍 들어 올려 냅다 침상에 던졌다.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 피트는 재밌다며 한 번 더 던져달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더 세게 던져달라고도 말했다. 그 되먹지 않은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피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제대로 하세요. 벌써 지치셨어요?”
“네가 다칠까 봐 그런다.”
“지치셨나 봐요.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네요.”
“하…….”

피트의 같잖은 도발에 알렉세이는 마지못해 그를 다시 들었다. 등골을 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긴장한 탓인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피트는 자꾸만 부추겼다. 

알렉세이는 예전부터 톰이 자신은 아버지에게도 맞설 만큼 당찬 여자를 아내로 삼을 거라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어린아이의 어쭙잖은 반항이려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


풀벌레 조용히 우는 고즈넉한 밤이다. 천막 안에 둥근 불빛이 걸렸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어둠에 잠겨 잿빛이었다. 톰에게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났다. 생각에 잠긴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숨을 쉴 때마다 흘러나오는 근심. 피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발을 주무르던 톰은 자신이 힘을 너무 세게 줬나 싶어서 멈칫했다.

“미안하다. 아프게 했어?”
“아니.”
“그럼?”
“나한테 할 말 없어?”

피트는 톰의 가슴을 발로 살짝 밀었다. 톰은 그저 웃기만 했다. 피트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톰의 무릎 위에 앉았다. 허벅지 밑에 무언가 단단한 게 걸렸다. “또 이러네.” 피트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였다. 톰은 민망해서 작게 헛기침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피트에게 이런 충동을 느낀다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더욱더 뜨거워졌다. 피트가 혀를 찼다. 톰은 연거푸 헛기침했다. 피트는 모른 체하며 톰의 뺨을 찔렀다.

“할 말 있잖아.”
“바나쿰 하마르는 살려주기로 했다. 그는 대대로 살아온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얘기 묻는 거 아닌데.”
“아버지께서 내일 출전하라고 하셨다.”

톰은 두 팔로 피트를 감싸 안았다. 그는 괴로운 얼굴이었다. 피트는 가만히 톰을 바라보기만 했다. 톰은 피트의 어깻죽지에 코를 묻고 체취를 한껏 들이마셨다. 기분은 한결 나아졌으나 당면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너를 두고 가기 싫다. 너를 두고 갈 수 없어.”

톰은 무겁게 말했다.

“뭐라는 거야, 내 핑계 대지 말고 출전해.”

피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톰의 콧잔등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매버릭.”
“안 가고 남으면? 나중에 자식한테 뭐라고 말하려고? 자식한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어?”

그의 말대로다. 전투를 앞두고 달아난 겁쟁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알면서도 톰은 차마 피트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눈을 깜빡이는 찰나 피트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했다. 죽음보다 더.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부부잖아. 어디에서나 함께해야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또 헤어져? 앞으로는 떨어지지 말자. 죽을 때까지 꼭 붙어 다니자.”

피트는 씩 웃으며 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톰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피트는 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검을 주셨어. 나도 너랑 함께 갈 거야.”
“그건 안 된다. 넌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잖아. 난 브래드쇼 어르신과 닉 브래드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널 사지로 내몰 순 없다.”

톰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이 역시 예상했던 일이다. 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문했다.

“사지라고? 그럼 그 위험한 곳에 남편이 가겠다는데 나더러 얌전히 집이나 지키라는 소리야?”
“피트.”

톰이 애끓는 목소리로 피트의 이름을 불렀다. 피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씩씩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지켜줄게.”
“내가 아무리 말려도 들을 생각 없지?”

톰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응.”
“기어이 나가서 싸울 생각이지?”

피트의 대답을 예상하면서도 톰은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싸울 거야.”

피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 피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약탈혼을 감행했다. 피트는 언제나 피트였다. 부러지고 꺾여도 그의 영혼은 본래 그 순수한 형태를 잃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으스러진 벽을 비집고 들어가면, 여전히 투명하게 반짝이는 피트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다.

“알았다. 너에게 내 등을 맡길게. 내 날개가 되어줘.”

톰은 있는 그대로의 피트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피트는 자유로울 것이다. 인간은 달을 손아귀에 쥘 수 없다. 그저 달 뜨는 밤을 기다리고, 달빛 아래 서서 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을 뿐. 그리고 달이 이끄는 대로 길을 찾아 떠난다.

“날 믿어줘서 고마워. 아무도 네 자질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내가 모두에게 보여줄게. 네 선택이 옳았다는 걸 모두가 깨닫게 해줄게.”

피트는 환하게 웃었다. 피트는 불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톰이 불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랐다.

“너 같은 아내를 얻다니, 나는 정말 복 받은 남자다.”

사랑이 급류처럼 쏟아졌다. 톰은 넘쳐흐르는 애정에 휘말려 어지러웠다. 유쾌한 현기증이었다. 물길이 자신을 한 번도 도달해본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삶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톰은 이 경이로운 순간에 감사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널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적이었고, 널 데려온 건 내가 살면서 내린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다.”
“그, 그, 있잖아……. 줄곧 궁금했는데, 대체 내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넌 항상 두루뭉술하게 말해서 들어도 잘 모르겠어. 왜, 눈이 커서 마음에 들었다거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거나 그런 거.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면 안 돼?”

피트는 은근히 보채는 말투로 물었다. 톰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괴롭고 아팠던 기억도 추억으로 희석되는 것 같았다. 또, 모난 자신의 삶이 그럭저럭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소망을 투영하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톰의 사랑 앞에서는 줄곧 꿈꿨던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게 된다.

“나는 그저 네가 좋다.”

톰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안다니까. 그래도 한 가지만 콕 집어서 말한다면 어디가 마음에 들어?”
“지금은…….”

피트가 재차 묻자 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피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피트는 습관처럼 숨을 삼켰다. 톰은 혀로 비틀린 앞니를 두드리고 허락을 구했다. 벌어진 입술에서 단맛이 났다. 뭉클한 한숨이 뒤섞였다. 톰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계단을 오르는 심정으로 입맞춤을 이어갔다. 피트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톰은 그를 붙잡았다. 피트가 가늘게 흐느꼈다.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

톰은 피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가볍게 문질렀다.

“흰 구름에 설탕을 잔뜩 뿌려서 먹는 것 같아.”

피트는 몽롱한 얼굴로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톰처럼 번듯하게 말하는 재주가 없다. 꾸밀 줄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전부 모아 지금 이 울림을 톰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나는 꼭 소나기를 맞는 것 같다.”

마음이 통했다. 톰의 광대뼈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소나기를 좋아하는구나. 피트는 톰의 말을 가슴속에 새겼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만의 보석함에.

“나하고만 이런 거 해본 거지?”
“응.”

피트는 칭얼거리는 것처럼 물었다. 톰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피트는 톰의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이랑은 이런 거 안 했지?”
“응.”
“앞으로도 나하고만 이런 거 할 거지?”
“응.”
“약속해. 다른 사람한텐 안 해준다고.”
“약속할게.”

톰을 독차지했다는 사실이 기뻐 피트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등을 덮는 톰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꼭 늦가을 오후, 낮잠을 자는 것 같았다. 따스한 햇볕에 안겨 게으름을 피우는 어느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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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4.23 02: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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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꽃이 아니라 매다. 네가 있을 곳은 정원이 아니라 하늘이다.” 피트에게 검을 선물하고 피트가 있어야 할 곳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알렉세이의 이 말 너무 좋아서 진짜 눈물났어 센세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센세는 천재야 ㅠㅠㅠㅠㅠㅠㅠ
[Code: a0c1]
2023.04.23 02: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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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뿌린 흰구름과 소나기같은 입맞춤을 나누는 톰과 피트 톰이 불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간이 되어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원해서 불꽃이 되고 싶은 피트 이런 사랑이 또 어디 있을까?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에 가슴이 뛴다 센세 ㅠㅠㅠㅠㅠㅠㅠ
[Code: a0c1]
2023.04.23 03: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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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눈 찌를때 헉했네 ㅋㅋㅋㅋㅋ매브 기운 차리는거같아서 좋다 ㅋㅋㅋ
[Code: 6a75]
2023.04.23 0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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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ㅠㅠㅠ 원래의 매브로 돌아간거 같다 완전히 나은 건 아니겠지만... 전쟁이 걱정 되지만 매처럼 날면서 치유되었으면 좋겠다ㅠㅠㅠㅠ
[Code: ba80]
2023.04.23 13: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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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아슬아슬하게 선 넘을듯말듯하는 피트때문에 아찔하다 진짜ㅋㅋㅋㅋㅋㅋㅋ 톰피드 둘이 행복한거 너무 좋다ㅠㅠㅠㅠㅠ 전쟁 화이팅이야!!
[Code: 047b]
2023.04.23 14: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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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가 이번 전쟁에서 본인의 당찬 모습 전부 되찾았으면 ㅠㅠ
[Code: 37fb]
2023.04.23 22:4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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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둘이서만 뽀뽀해 이 커플 너무 이쁘다
[Code: ca84]
2023.04.23 23: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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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스키 부자한테 최고 고자극 컨텐츠 매버릭이냐곸ㅋㅋㅋㅋㅋ“버릇없는 것. 너처럼 버릇없는 것은 생전 처음 본다. 앞으로도 볼 일이 없겠지. 그래야만 할 텐데.” >>> 어르신 피트 닮은 손주들한테 시달리셔야만...!ㅋㅋㅋㅋㅋㅋ
[Code: 0278]
2023.04.24 05: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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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알렉세이가 피트 침상에 던지는거 보고 내 안의 콘스탄틴이 눈을 떴어요 센세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 아이스랑 피트 입맞추는게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라 행복해...
[Code: d4ea]
2023.04.24 12: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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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너무 좋아ㅜㅜ 몇번이나 읽고 있는지ㅠㅠ
[Code: b720]
2023.04.24 23: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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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진짜 너무 좋다 알렉세이 앞에선 당돌했던 매느리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피트 존좋ㅜㅜㅜㅜ 알렉세이가 톰이랑 같이 싸우라고 검 준 것도 감동이고ㅜㅜㅜㅜ 둘이 키스하는 거 간질간질 설레
[Code: 37bc]
2023.05.25 13: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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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눈 찌를 때 내가 다 놀람ㅋㅋㅋㅋㅋㅋ아이고 꼴통앜ㅋㅋㅋㅋ시아버지 눈을 찌르는 며느리가 어딨눜ㅋㅋㅋㅋㅋㅋㅋ
[Code: 995e]
2023.08.09 15: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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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매버릭 돌아와서 기분 좋아 센세ㅋㅋㅋㅋ 근데 왜 하필 침상에 던지시죳?! 재혼파 설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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