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35523552
view 4419
2023.04.04 23:22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21 / 22 / 23 / 24


늑대와 달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의 얼굴이 여유로웠다. 배가 부르니 양들은 괜한 일로도 싸웠다. 이제 막 몸이 자란 어린 숫양이 치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늙은 숫양에게 시비를 걸다가 싸움이 일어났다. 튼튼한 몸만 믿고 뿔을 들이댄 어린 숫양은 노련한 숫양에게 크게 혼쭐이 났다. 어린놈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괜히 다른 양들에게 시비를 걸며 화풀이를 해대는 바람에 닉은 놈을 말리느라 고전했다.

“힘만 믿고 설쳤다가는 끝이 좋지 않을 거다. 말 좀 들어!”

닉이 비지땀을 쏟아내며 양의 뿔을 잡고 끌어당겼다. 무른 흙에 발굽이 질질 끌려 골이 깊게 팼다. 결국, 닉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무리에서 쫓겨난 양은 고개를 숙이고 혼자서 씩씩거렸다. 닉은 투덜거리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겨우 숨을 돌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로운 날이다. 이 많은 양이 전부 배가 부르고도 남을 만큼 초원은 풍요로웠고, 양친과 아내, 그리고 자식도 건강하고 무탈하다. 그의 가장 아픈 손가락인 피트가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톰 카잔스키라면 피트를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리라 믿었다. 닉은 맨땅에 털썩 주저앉아 풀피리를 불었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그림자가 닉의 흥취를 깼다. 멀리서 다가오는 톰과 론의 얼굴을 알아본 닉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잔스키! 커너. 너희가 여긴 무슨 일이야. 영지로 돌아간 거 아니었나?”

닉의 말에 톰과 론은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매버릭.’ 순간 닉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매버릭은? 매버릭은 어딨어?”
“존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다. 어디 계시지?”

톰이 숙연한 얼굴로 말했다.

“브래들리를 데리고 낚시를 하러 가셨어. 곧 돌아오실 거야. 그런데 이놈은…….”

닉은 론이 끌고 온 세다르를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다르의 처참한 몰골에 닉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세다르는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며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세다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잔스키. 왜 이놈 눈이 뽑혔어? 매버릭은? 매버릭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당장 말해.”

닉은 사색이 되어 톰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존 어르신이 오시기 전에 너한테 먼저 말해주는 게 좋겠군.”

톰은 한숨을 쉬며 말에서 내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닉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피트의 머리카락이 잘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가만히 얘기를 듣던 닉의 얼굴이 처참히 무너졌다. 닉은 비굴하게 애원하는 세다르를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닉은 세다르에게 폭언을 쏟아부었고, 그의 부모와 조상들을 저주했다. 하지만 세다르를 걷어차거나 그에게 주먹질하지는 않았다. 톰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


브래드쇼 일가의 천막은 크기가 작은 편이었고, 세간도 단출했다. 소박한 자수가 놓인 벽걸이와 카펫은 낡아서 헤진 곳이 있었다. 모래색과 분홍색, 연푸른색. 아마도 피트가 자라면서 보아왔을 정겨운 색채. 그 잔열 같은 흐릿한 색채가 곧 피트의 삶처럼 보여서 톰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녁 식사로 존과 브래들리가 잡아 온 생선이 상에 올랐다. 이 근방에 호수는 물이 맑고 생명력이 넘쳐 낚싯대만 드리웠다 하면 씨알이 굵고 팔팔한 생선이 낚였다. 그래서 탄자 마을 사람들은 생선을 즐겨 먹었지만, 대부분 유목민이 그렇듯이 톰과 론은 생선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릇에 담긴 생선 대가리를 보고, 론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저거, 먹어도 되는 거 맞아?” 하며 톰에게 작게 귓속말했다. 양은 단숨에 잡는 남자가 생선 눈알에 쩔쩔매는 꼴이 우스웠다. 피트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에 톰은 묵묵히 그릇을 비웠지만, 론은 끝끝내 생선을 먹지 못하고 빵만 뜯었다. 육포를 챙겨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저녁을 먹고 안나는 캐롤과 브래들리를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 천막 안에 남자들만이 남았다. 톰은 존에게 낮에 닉에게 들려주었던 그간의 일을 세세하게 얘기했다. 존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덧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 세다르가, 세다르 그 놈이 도박을 하려고 피트를 팔았단 말이지.”

존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버지.” 닉이 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존은 손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가슴이 얼얼했다. 억장이 무너져 말이 도통 나오질 않았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피트가 세다르를 두들겨 팬 날, 세다르의 부모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던 일이.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세다르는 예전부터 피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어. 하지만 설마 그놈이 피트를 팔아치울 줄은 몰랐다. 내가 순진했군. 순진했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그때 세다르의 부모 앞에서 피트를 무릎 꿇리는 게 아니었어.”

존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엄습하는 한기에 절로 몸서리쳐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존은 제 가슴을 퍽퍽 때리며 한탄했다. 기어이 뜨거운 눈물이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대충 기른 수염에 눈물이 맺혔다. 손자까지 본 늙수그레한 남자가 마치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피트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세다르 그 자식이 먼저 듀크와 나제쥬다를 욕했는데.”
“아버지,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요. 그리고 피트에게 따로 혼을 내지 않으셨잖아요.”
“내가 너무 몸을 사린 걸까? 그래서 세다르 놈이 피트를 우습게 알고 기어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걸까?”
“아버지, 아닙니다. 세다르는 천성이 야비한 놈이잖아요.”

닉은 자책하는 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의심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가축을 봐주며 먹고 사는 처지이니, 그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했던 것이 오늘날 이렇게 참상을 빚어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굽실거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피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죄다 풀어놓을 걸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후회도 괜한 일처럼 느껴진다. 피트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처지에 말이다.

“이보게, 톰.”
“예, 어르신.”

존은 톰에게 고개를 숙이고 조아렸다.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론이 깜짝 놀라 앞으로 손을 뻗었다. 존은 자신을 일으키려는 닉을 떨쳐내며 땅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거듭 조아렸다.

“우리는 고작해야 양이나 치며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일세. 나에겐 자네나 자네 아버지와 같은 힘이 없어. 이 애끓는 마음만으로는 피트 그 애를 무사히 데려올 수 없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원통해.”

존이 말했다. 톰은 팔짱을 풀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제발 피트를 그 천벌 받을 놈들에게서 구해주게.”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르신, 고개를 드십시오.”

톰은 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존은 한사코 엎드린 채로 말을 이었다.

“약속한 예물은 주지 않아도 괜찮네. 아니, 자네 땅의 가축들도 불러만 준다면 기꺼이 돌보겠네. 돈도 필요 없어. 언제든 불러내서 마음껏 이 늙은이를 부리게. 내가 보답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돈이든, 가축이든, 뭐든 갚을 테니 제발 그 애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예물입니다. 결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어르신께서 약속하신 일이니, 저는 그 약속을 지킬 겁니다.”
“……나라고 왜 모르겠나.”

그제야 존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우리 가족 품으로 돌려 보내줬으면 하네.”
“…….”
“듀크 그 친구 묻어주면서 약속했네. 피트는 내가 평생 돌볼 거야. 내가 죽거든 닉이 있고, 닉이 죽으면 브래들리가 있어.”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톰이 무뚝뚝하게 묻자, 존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어르신, 피트는 제 아내입니다.”

톰이 분명하게 말했다. 존은 말하기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행간이 길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존이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존은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톰, 자네가 그릇이 작은 사내라고 탓하는 거 아닐세. 하지만 사람들 인식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이미 약탈혼으로 피트는 세간에 평판이랄 것도 남지 않았어. 그런데 또 납치를 당했지. 자네가 아직 피트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 애를 거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세.”
“사람들이 피트를 두고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 혀를 전부 잘라버리면 가능한 일이겠지. 그래, 그렇다손 쳐. 자네 마음은? 자네 마음이 지금과 같으리란 보장이 있나?”

존이 물었다. 그는 몹시 괴로워 보였다. 톰은 대답하지 않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존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뜻이었다.

“자네 같은 사람에게 피트는 신기할 테지. 지금이야 그 애가 새롭고, 신선하니 곁에 두고 싶고 계속 들여다보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 애도 사람이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그럼 그땐? 지금처럼 활기차지도 않고 곱던 얼굴도 주름이 지고, 안색은 창백한데 이 참담한 일이 떠오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존이 물었다. 이번에도 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함께 살면서 피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애에게 이런 괴로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이 말일세.”
“그게 염려되십니까.”

이제야 톰이 입을 열었다.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처럼 힘 있는 사내들은 잃을 게 많지. 언제든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이고 말이야. 그러니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철두철미하게 살아.” 
“…….”
“피트는 나에게 보물처럼 소중한 아이지만, 자네가 이루고자 하는 야망에는 허물이 될 걸세. 사람들이 자네를 두고 떠들면서 ‘아내만 아니면 말이야……’, ‘저 사람 아내가 예전에 그런 일을 겪었다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거란 말일세. 그럼 그때도 자네가 지금처럼 피트를 아껴줄 수 있을까?”

이 같은 사실을 말하는 처지가 괴로웠다. 존은 숨을 몰아쉬었다. 톰 카잔스키의 미래는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알렉세이를 뛰어넘을 것이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할 것이고, 존경할 것이다. 

하지만 피트는? 사는 내내 피트에겐 오늘의 이 비극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톰의 영토가 더 넓어질수록, 그의 가축들의 수가 불어날수록,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피트의 비극도 덩달아 퍼져나갈 것이다.

“젊고, 건강하고, 집안도 좋고, 흠도 없는 아내가 아쉬워지지 않겠냐는 말일세. 이보게 젊은이, 사람 마음이란 부질 없어. 번듯하게 성공하고 나면 힘든 시절에 입었던 낡은 옷과 신발부터 눈에 들어오는 법이야.”

존이 일부러 톰을 ‘젊은이’라고 부르며, 격양한 어조로 다그치듯이 말했다. 하지만 톰을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으며,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바자르에서 피트를 처음 본 날, 제 아내로 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톰이 제 뜻을 밝혔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처음부터 제가 원한 건 피트였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보게, 자네. 내 말을 뭐로 들었나?”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어르신.”

존이 반발하자 톰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의 말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결정이라고…… 그래, 결정을 내렸다, 이 말이지.’ 힘의 우위가 분명해졌다. 존은 톰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알렉세이보다 더 어려운 상대다. 알렉세이에게는 연민에 호소할 수 있다. 너그러움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톰은 아니다. 흔들림 없는 엄정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네는 강하고 결단력도 있는 남자야. 포부도 대단하고, 마음먹은 바는 반드시 이루는 그런 사내지. 하지만 독선적이야. 나는 자네 야심에 피트가 주눅이 들어 사는 게 싫네. 그 애가 자네 눈치를 보느라 가슴 졸이며 사는 게 싫어.”

존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말로는 톰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톰이 피트를 원하는 마음뿐이었다. 진심으로 피트를 애틋하게 여긴다면, 그 박복한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지 않을까. 그는 톰 카잔스키의 인간성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조용히 살고 싶네. 남들처럼 대단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그저 우리 식구끼리 오순도순…….”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톰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존의 말을 잘랐다. 금속처럼 차갑게만 보이던 톰의 얼굴에 오묘한 감정이 서렸다. 분노, 답답함, 안타까움, 온갖 감정이 혼재한 빛깔이었다.

“어르신께서는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을 쉽게 떠나지 못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피트를 홀대하던 마을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어떻게 피트를 보호하실 겁니까.” 

톰은 따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현실을 존에게 분명히 전했다. 존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조차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었다.

“그 사람들 눈과 입이 두려우니, 피트를 이곳에 두고 홀로 살게 하실 겁니까?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요.”

이번에는 존이 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현실만을 읊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으나, 신랄한 비난이었다. 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세다르의 부모 앞에서 무릎 꿇었던 어린 피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르신, 피트는 제 아내입니다. 피트를 어떻게 살게 할지는 남편인 제 손에 달린 일입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카잔스키 부자가 뒤늦게 피트와의 결혼을 정식으로 허락해 달라며 찾아왔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피트를 약탈혼으로 취했으므로 세상 모두가 피트의 거취가 누구 손에 달렸는지 알고 있었다. 피트는 톰 카잔스키의 소유였다. 테르반테이 마을이 불타던 그 순간부터. 이제 존이 호소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르신께 맹세하겠습니다. 피트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피트에게 고통을 안겨준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제 아내이니, 죽어도 제품에서 죽어야 합니다.”
“자네의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네. 하지만 만약 마음이 변한다면…… 언제든 좋네. 10년 후도 좋고, 20년 후도 좋아. 자네를 원망하지 않겠네. 자네 마음이 변하거든 피트는 우리 가족에게 되돌려주게나.”

존은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힘없이 말했다.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닉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조용히 톰을 노려보며 분노를 삼켰다.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피트가 무사히 되돌아오는 것. 그러니 닉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더는 어르신 시간을 뺏지 않겠습니다. 결혼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톰은 더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간에서 눈치를 보던 론도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은 바닥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게. 아내에게 자네와 자네 친구의 잠자리를 준비하라고 말하겠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탄자 마을로 가서 버러지를 처리하고, 곧바로 아버지와 백부님께 합류해야 합니다.”

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존에게 인사하고, 천막을 나섰다. 닉이 그를 뒤쫓아 나왔다. 닉이 허겁지겁 챙겨온 검을 보고 톰은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닉, 넌 오지 마라.”
“매브가 납치를 당했는데 나더러 여기서 손 놓고 지켜만 보라고? 걔가 날 찾고 있을 텐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닉은 잔뜩 성난 음성으로 반박하여 허리에 검을 찼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이 슨 검이었다. 그가 부상으로 거동하지 못할 동안, 주인을 잃은 검은 그 빛을 잃었다. 그것은 닉의 검술도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전 수준이 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닉 브래드쇼. 너는 한 집안의 가장이다. 네가 지켜야 할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걸 명심해라. 네 아버지 혼자서 이 많은 가축을 돌볼 수 없다. 너희 집안을 지킬 사내가 있어야 한다.”
“피트는 나의……!”
“넌 피트의 남편이 아니고, 네 자식도 피트의 아들이 아니다.”

톰은 닉의 말을 자르며 그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톰은 엄숙한 눈빛으로 닉에게 경고했다.

“더는 피트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하지 마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카잔스키.”

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존 어르신과 네가 아니었다면 피트가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지 못했겠지. 피트의 타고난 성품을 지켜줘서 고맙다. 그 덕분에 나는 피트를 만날 수 있었어.”

톰은 특유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하지만 닉은 그의 목소리가 썩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평온한 어조 속에 예리한 칼날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닉은 입을 좌우로 벌리며 뻐근한 턱을 돌렸다.

“마을을 떠나던 날, 피트가 네게 자길 버리지 말라고 했지?”
“그래.”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닉은 불안한 마음에 괜한 땅만 걷어찼다.

“그 말을 듣고 알았다. 피트와 넌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네 감정보다 피트의 감정이 더 무겁다.”
“너야말로 동등한 관계를 운운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

닉이 차갑게 반문했다.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남자가 동등함을 운운한다니 우스웠다.

“그야 우리의 관계는 그렇지. 하지만 감정의 무게는 다르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피트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내가 피트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무겁다고. 그러나 너와 피트는 아니다.”

톰이 말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닉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트는 너와 존 어르신에게 목숨을 빚졌고, 그동안 얹혀살며 신세를 졌으니, 두 사람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사는 것처럼 보여. 지금껏 피트에게 세상은 브래드쇼 집안이 여름 한 철을 보내는 이 좁은 땅이 전부였겠지.”
“……매버릭은, 그 애는.”

닉은 더듬더듬 말했다. 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을 떠난다는 건 피트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을 거다.”
“…….”
“밥을 조금만 먹어도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자랑하고, 남들보다 튼튼하다고 자랑하고,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다고 거듭 강조하며 말하는 것 전부…… 나에게는 피트가 너와 존 어르신에게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
“너와 어르신 잘못이 아니다.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닉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배부르게 먹고 싶지 않은 아이는 없지. 누구나 허리가 빠지도록 일하는 것보다야 빈둥빈둥 노는 걸 더 좋아한다. 옷 두 벌이 생긴다면 더 좋은 옷을 고르는 게 당연한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피트는 늘 조금만 먹었고, 남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도 일했고, 항상 낡고 소박한 옷만 골라 입었다. 닉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너나 어르신이나, 피트나 선량한 사람들이어서 그런다. 원래 선한 사람들은 고생하며 산다. 서글픈 일이지.”
“…….”
“나는 너와 어르신의 올곧은 마음을 존경한다. 살아온 방식을 바꿀 필요 없다. 하지만.”

톰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었다.

“브래드쇼 가족과 함께 사는 한, 피트는 영원히 브래드쇼 집안에 얹혀사는 불길한 아이 피트 미첼일 뿐이다.”

그 말에 정작 당사자인 닉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론이 성난 눈으로 톰을 노려보았다. 톰은 닉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 숙인 채 땅만 응시하는 닉을 내버려 두고 말을 묶어둔 곳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닉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톰은 돌아보지 않았다.

 
***


“닉 브래드쇼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었잖아. 아니, 그러지 말아야 했다. 톰,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아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출발하는 길에 론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톰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말을 몰았다.

“피트는 무슨 일이 생겨도 브래드쇼 가족을 놓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닉 브래드쇼가 피트를 놓아주어야 해.”

톰은 무심하게 말했다.

“아이스! 피트가 처음부터 네게 마음을 연 게 아니잖아. 처음에는 너를 죽도록 싫어했어.”

론이 말을 앞세워 톰의 길을 가로막았다. 론은 턱짓으로 피트가 톰의 몸에 새긴 상처를 가리켰다. 톰에게 그 날의 고통과 절박함을 상기하라는 뜻으로. 하지만 톰은 감정이 마비된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서늘한 눈으로 론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슬라이더.”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난 네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움직일 건지 알아. 그리고 네 선택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지난날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아. 론은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톰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이었다. 괴로운 기억을 들춰 서로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므로, 톰이 인내했던 과거의 고통이 얼마나 무거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론은 톰을 막아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트는 아니잖아, 톰. 피트는 아니란 말이다. 피트가 진심으로 널 따르게 된 이유는…….”

론은 잠깐 망설였다. 감정이 북받쳐서일까, 돌연 웃음이 나왔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쓸쓸했다.

“나야 잘 모른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지만 그게 뭐든, 달라진 네 모습에 피트도 마음을 연 거야. 그리고 나는 피트를 만나 변한 네 모습이 좋았다. 왜 좋았냐면, 네가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좋았다. 널 20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봤어.”

론은 진심으로 애원했다.

“제발 그 모습을 잃지 마라.”

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트가 사랑한 남자를 네 손으로 죽이지 마라.”

하늘이 흐렸다. 별도, 달도 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톰은 말머리를 돌려 유유히 가로막힌 길을 빠져나왔다. 론은 거대한 절망감 아래 고삐를 다시 잡아야만 했다. 톰의 등이 태산처럼 보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바위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론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저 매정한 산이 잠겼으면 바랐다.



36. 꿈의 무덤


급히 피트를 그늘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 오손은 의원을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웃돈을 주고 데려오길 잘한 일이었다. 의원은 피투성이가 된 피트의 아랫도리를 보자마자 길길이 날뛰며 얼른 물을 끓여오라고 지시했다. 호르가가 근처에서 물을 길어 물을 끓였다. 의원은 피트의 온몸을 꼼꼼하게 닦고 그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호흡이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약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몸도 식은 상태였다.

의원은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약재를 조합하여 급히 약을 만들고 피트에게 먹였다. 피트는 절반도 삼키지 못했다. 시커먼 물이 그의 턱을 타고 흘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오손이 제 입에 약을 머금고 피트에게 입을 맞춰 약을 넘겼다. 약은 지독히도 썼다.

약을 전부 먹인 다음, 의원은 피트에게 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의 온몸을 주물렀다. 한참을 주무르고 나니 피트의 호흡이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안색도 맑아졌다. 약효가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의원은 한시름 놓고, 제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이제 괜찮나? 어떻게 된 일이야?”

오손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한바탕 땀을 쏟아낸 의원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인데, 이 땡볕 아래 알몸으로 험한 길을 가게 했으니 몸이 버틸 턱이 있나. 게다가 안장도 채우지 않은 수말에 태워? 건강한 장정이라도 몇 시간 못 버티고 사타구니랑 허벅지가 다 헐어버렸을 것일세.”

의원은 피트의 신세를 동정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는 피트가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을 부탁한다면, 무색무취의 독약을 몰래 구해 줄 마음이 있었다. 누군들 그런 수모를 당하고 살고 싶겠는가. 자신이 피트를 이승으로 돌려세운 이 수고도 그에게는 도리어 고통을 주는 일이 아닐까 우려가 됐다.

“잔소리 듣자고 영감 데려온 게 아니야. 무조건 살려라. 죽으면 안 된다.”
“계속 그렇게 난폭하게 대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어.”

의원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오손이 억센 손으로 의원의 어깨를 잡고 그의 몸을 도로 돌렸다.

“하혈한 거 맞지? 피를 많이 흘렸는데, 괜찮나?”
“일단 피는 멎었으니 괜찮을 것일세.”
“……애가 떨어진 건가?”

오손은 누군가 듣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트의 말로는 톰 카잔스키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피트의 반응만 봐도 그는 남자를 모르는 몸인 듯했다. 하지만 만약에 피트가 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면…….

“그건 아닐세. 임신했다면 내가 모를 턱이 없지. 임신은 아니야.”

의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사래를 쳤다. “정말인가?” 오손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정말일세! 날 못 믿겠나? 자네도 봐서 알지 않나? 아이를 가져본 적 없는 몸이야.” 의원이 서둘러 덧붙였다.

“흐음…….”

오손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 피트의 알몸을 떠올렸다.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한 허리, 판판한 아랫배, 희고 매끄러운 몸은 튼 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덜 여물어 색이 연한 음부. 그 모양새도 어설펐다. 오손의 경험으로는 아이를 가진 적 있는 여자는 대개 그곳이 보기 좋게 짙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아이를 가질 수 있나?”

오손은 의원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의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영감, 묻는 말에 대답해. 그 많은 피가 그냥 쏟아졌을 리는 없고, 애가 떨어진 건 아니라니까 분명 어딘가 잘못된 것일 테지. 아이를 가질 수 있냐고 물었어.”
“나, 나는 남자 오메가는 잘 몰라. 아무래도 보통 부인네들과는 달라서 뭐라고 장담할 수 없네. 월경도 안 한다고 들었어.”

오손이 한 대 칠 기세로 사납게 다그치자 의원은 쩔쩔매며 말했다.

“그래도 의원이니 대충 알 거 아니야. 앞으로 자식을 가질 수 있나?”
“자식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 하지만 나도 장담은 못 해. 남자 오메가를 본 적이 있는 다른 의원을 찾는 게 좋을 거야.”
“알았다. 수고했어, 영감.”

오손은 몸을 사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의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의원은 짐을 챙겨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오손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이 든 피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오손은 마른세수를 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꼭 고약한 벼룩에 물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해가 저물고 나서야 피트는 의식을 되찾았다. 피트는 흐리멍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둥이 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헛것을 보는 모양이었다. 오손은 자꾸만 헛소리를 늘어놓는 피트의 뺨을 가볍게 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맑디맑았던 초록색 눈동자가 탁했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에서는 가냘픈 울음만이 새어 나왔다.

“정신이 들었으면 마셔라. 약이다.”

오손은 피트에게 약이 담긴 잔을 건넸다. 톡 쏘는 냄새가 나는 약이었다. 피트는 그 냄새가 거북해서 고개를 휙 돌렸다.

“말만 잘 들으면 때리진 않겠다. 고집부리지 말고 마셔.”

마음이 초조해진 오손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 협박에 못 이겨 피트는 억지로 약을 마셨다. 강렬한 향에 몽롱했던 의식이 맑아졌다. 피트에게는 오히려 잔인한 일이었다. 머릿속이 맑아질수록, 마비된 감각 아래 짓눌려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되살아났다. 피트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또다시 가려웠다. 목덜미를 피가 나도록 벅벅 긁는 피트를 괴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오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라. 피를 많이 쏟았어. 의원 말로는 앞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넌 젊으니까 속단하긴 이르다. 마음 단단히 먹고 몸 추스르는 데 집중해라.”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피트가 손을 멈칫했다.

“그래. 하지만…….” 

오손은 우물쭈물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무슨 까닭에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피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딸을 낳고 싶었는데.”

피트는 울먹였다.

“금발 머리에 눈은 회청색이고, 뺨이 붉은 예쁜 딸을…….”

자신이 태어나서 본 사람 중, 톰이 가장 예쁘게 생겼으니까 톰을 닮은 딸이라면 분명 예뻤을 것이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말씨는 부드럽고, 웃는 얼굴은 봄볕처럼 따스했을 것이다. 모두가 그 애를 본다면 사랑에 빠졌겠지. 모두가 그 애를 사랑했을 거야. 모두가 그 애한테 잘해줬을 거야. 그 애는 나처럼 살지 않았을 거야. 피트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봐, 말했잖아. 넌 아직 젊으니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남자 오메가를 다뤄 본 의원을 알아보마.”

오손은 흐느끼는 피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피트는 매섭게 오손의 손을 쳐내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아일라우를 죽였어?”
“너.”
“내가 네 부모를 죽이고, 네 부모의 무덤을 욕보이고, 널 굶주리게 했어? 내가 너희 땅을 빼앗았어?”

피트가 악다구니를 쓰며 물었다. 오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 지경이 돼서는 아직도 발악할 힘이 남았다고? 그는 경악했다.

“가족을 갖고 싶었어. 자상하고 성실한 남편이랑, 그런 남편 닮은 아이들을 가지고 싶었어. 남들처럼 살고 싶었어. 내 손으로 애들이랑 남편 옷 지어 입히고, 밥해서 먹이고, 그렇게 살고 싶었어. 내가 바란 건 그게 다야. 나만의 가족을 갖고 싶었다고. 그게 그렇게 죽을죄야? 난 바라선 안 될 일이야?”

피트는 제 가슴을 때리며 물었다. 그가 흩뿌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손은 그 눈물이 강을 이루고, 그 강에 잠기어 빠져 죽는 착각이 들었다.

“다들 나한테 왜 그래! 왜! 대체 왜!”

피트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내가 뭘 잘못했어? 응? 내가 뭘 잘못했냐고! 평생 남한테 상처 준 적 없는데, 왜 하나같이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굴어, 왜! 가만히 있었잖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내가!”

피트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울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아프지도 않고, 밥도 많이 안 먹고, 하기 싫은 수도 다 놓고, 화가 나도 꾹 참고…… 그렇게, 그렇게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다 복이 돼서 돌아온댔는데…… 내 인생은 왜 이런 거야,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으윽, 욱, 우욱……. 엄마, 엄마, 아아악, 나 좀 데려가. 엄마, 엄마 나도 데려가. 엄마, 제발. 싫어, 살기 싫어. 나만 두고 가지 마. 살기 싫어.”

그 처절한 절규가 무수한 화살처럼 날아와 오손의 몸에 박혔다. 오손은 굳어버렸다. 애초 칼라쉬와 약속했던 것처럼 피트를 죽여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오손은 태어나서 남을 위로해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피트의 울음이 그에게는 막연한 공포로 다가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손은 의원이 따로 챙겨 준 약을 피트에게 억지로 먹였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니, 혹여나 피트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린다면 먹이라고 준 약이었다. 

약을 먹자 잠시 후 피트의 동공이 풀렸다. 울음도 잦아들었다. 부들부들 떨던 몸은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피트를 끌어안고 오손은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있었다. 가슴이 할퀸 것처럼 아팠다. 눈을 감아도 악다구니를 쓰던 피트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4.05 01:26
ㅇㅇ
모바일
피트 ㅠㅠㅠㅠㅠ울때 나도 같이 울었다 ㅠㅠㅠ
[Code: b02a]
2023.04.05 01:43
ㅇㅇ
모바일
오손개새끼야 ㅠㅠㅠ 찝찝함 그만느끼고 빨리 돌려보내주라고 ㅠㅠㅠㅠㅠㅠ 센세시엔셩티처 하 ㅜㅠ 센세는 최고에. 요즘 이것만 기다리고 있어 피트가 어떻게 됐을지 하루히루 궁금함으로 잠못이룸 ㅜㅜㅜㅜ
[Code: b961]
2023.04.05 05:00
ㅇㅇ
모바일
피트 정말 어리고 착하고 강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인데... 마음이 아파ㅠㅠㅠ 엄마 찾으면서 저렇게 처절하게 절규하는 거 보고 문득 피트가 얼마나 어린지 생각났어 지금까지의 고통은 잊고 톰이랑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걱정된다ㅠㅠ
[Code: 7779]
2023.04.05 06:30
ㅇㅇ
모바일
피트야..피트야...ㅠㅠㅠㅠ이리와ㅠㅠㅠㅠㅠ내가..내가...아이고 우리 피트..ㅠㅠㅠㅠㅠㅠ아 미친 돌겠네 진짜ㅠㅠㅠㅠㅠㅠ상황이 아이이이익ㅠㅠㅠㅠㅠ
[Code: 0924]
2023.04.05 07:06
ㅇㅇ
모바일
피트 아기 많이 낳고 행복해질 때까지 보여줘야해 ㅠㅠㅠㅠ
[Code: 3996]
2023.04.05 07:34
ㅇㅇ
모바일
오손같은 무뢰배에게도 뭔가를 느끼게 할 정도로 피트의 슬픔과 절망이 깊구나ㅠㅠㅠㅠㅠ톰은 맞말만 하는거 같은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것처럼 보여서 론이 걱정하는것도 이해가 간다ㅠㅠㅠ 근데 톰을 변화시킨건 피트인데 피트가 없으니까 저렇게되는게 일견 당연해보이고, 톰도 저런 방식으로 슬픔을 견디고 있는게 아닐까싶고...센세가 그리는 인물들은 다면적이고 생동하고 있어서 더 마음이 쓰이고 애착이가... 센세 평생 글써줘ㅠㅠㅠ
[Code: e636]
2023.04.05 07:55
ㅇㅇ
모바일
피트가 이젠 톰을 다시 만날 의지마저 잃어버린 건 아닌지ㅠㅠ 피하면 어떻게 해??
[Code: b814]
2023.04.05 08:42
ㅇㅇ
모바일
톰은 변한 게 아니라 피트 한정으로 따뜻한 거 아니었나. 피트 앞에선 다른 사람이 되는거지. 근데 피트가 톰을 밀어낼까 걱정이네. 브래드쇼는 피트를 아끼는 거랑 별개로 가진 힘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정말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그걸 인정하지도 못한 거에 대해 톰이 잘 일깨워준거 같아
[Code: a4a3]
2023.04.05 09:45
ㅇㅇ
모바일
아이고 피트야ㅜㅜㅠㅠㅠㅠㅠㅠ 피트 너무 안타까운데 존잼이야.. 미안하다 피트야ㅠㅠㅌㅌㅌㅌㅌ...튜튜튜튜튜튜튜... 이건 모두 톰과 이루어질 사랑을 위한 빌드업이며 피트 해감하고 고난을 극복해야 할 톰을 상상하니 음 아주 맛이 좋군요 센세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ㅋ
[Code: 3077]
2023.04.05 11:00
ㅇㅇ
모바일
피트 진짜 안쓰러워 죽겠다ㅠㅠㅠㅠㅠㅠ오손 이 개새끼 너는 곧 뒤질테니 그리 알아라
[Code: b96a]
2023.04.06 06:42
ㅇㅇ
모바일
하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 궁금해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4ca9]
2023.04.06 09:13
ㅇㅇ
모바일
피트야 무너지지마.....ㅠㅠㅠㅠㅠㅜㅜㅠㅠㅠ
[Code: ae9f]
2023.04.06 14:01
ㅇㅇ
피트가 괴로워하고 절망하는게 너무 슬프다... 톰이 어서 피트 찾아서 부둥부둥해주고 상쳐도 잘 어루만져주면 좋겠어 ㅠㅠㅠㅠㅠㅠㅠ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음 원하는 꿈도 이루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손 및 그 일당들은 능지처참되서 저잣거리에 널어놔야 함
[Code: 8a4a]
2023.04.06 21:29
ㅇㅇ
모바일
와 진짜 대작.. 사랑해 센세
[Code: 80ba]
2023.04.09 00:41
ㅇㅇ
모바일
존나재밌다
[Code: 03aa]
2023.04.18 15:02
ㅇㅇ
모바일
진짜 최고ㄷㄷ센세 계좌내놔
[Code: 3162]
2023.05.25 11:41
ㅇㅇ
모바일
어떡해 오손 피트 좋아하게 됐나봐.. 아이고 임자있는 사람을 처음부터 완전히 꼬인채로 지 맘도 모르고.. 어차피 톰한테 죽겠지ㅠㅠ파국이다 개처럼 망함 안타깝네 그치만 피트가 너무 망가져서 용서가 안된다 처절하게 죽음으로 속죄해라!
[Code: 8a64]
2023.08.09 14:57
ㅇㅇ
모바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Code: fc05]
2023.08.09 14:57
ㅇㅇ
모바일
센세 나 진짜로 울어ㅠㅠㅠㅠㅠ 우리 피트ㅠㅠㅠㅠ 기구해서 어떡하냐고ㅠㅠㅠㅠㅠ 그저 오손도손 행복한 가정을 원했을 뿐인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c05]
2023.10.09 17:13
ㅇㅇ
모바일
피트와 넌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네 감정보다 피트의 감정이 더 무겁다

대애앰.... 맞는 말이네ㅠㅠㅠ 피트야 행복해져라ㅠㅠㅠㅠ
[Code: cf8f]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