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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29. 힘


아침이 밝았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던 새들이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놀라서 훌쩍 달아나버렸다. 알렉세이를 비롯한 네 사람은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개울가로 향했다. 흐르는 물줄기가 애처로울 정도로 가냘팠지만, 네 사람이 씻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다 씻고 난 다음에 전날 닉 브래드쇼가 가져다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수가 투박하고 천도 그리 질이 좋지 않았지만, 소동으로 넝마가 된 옷보다야 훨씬 나았다.

론은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수염을 깎았다. 그의 등 뒤에서 이고르가 턱이 빠지도록 크게 하품을 했다. 론이 눈썹을 힐끔 들어 올리며 물었다.

“존 브래드쇼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뜻을 꺾었을까요?”
“가족의 안위를 생각했겠지. 사내란 그래야 한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굽힐 줄 알아야 해.”
“일이 잘 풀렸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어째 입이 영 씁니다. 개운치 않아요.”

론은 젖은 손의 물기를 탈탈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래드쇼 본인만 하겠느냐? 지금쯤 속에서 천불이 났을 거다.”

이고르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돌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모자를 고쳐 썼다. 

“준비됐으면 얼른 가자.” 

이고르가 재촉했다. 론은 허둥지둥 허리끈을 단단히 고정했다. 앞서 준비를 마친 톰이 알렉세이와 함께 길을 나섰다. 톰은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젯밤 닉이 했던 말을 내내 곱씹고 있었다. 바라던 바는 아니나,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진지하게 혼담을 나누고 싶다는 말. 그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백부님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습니까?”

마을로 향하는 도중에 톰이 이고르에게 물었다.

“그래. 어디 나 뿐인가. 알료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바다.”

이고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앞서가는 알렉세이를 가리켰다. 알렉세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직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톰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지 못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고 무력함을 실감했다. 분하고 부끄러웠다.

“제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존 브래드쇼도 혼자 굶어 죽는 거야 두렵지 않았겠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굶겨 죽일 순 없었겠지. 마을 사람들 등쌀에 적잖이 곤욕을 치렀을 거다.”

이고르는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브래드쇼에게 환대받으리란 기대는 하지 마라. 앞으로도 그 고지식한 인간이 마음을 달리 먹고 널 반겨주리란 기대도 하지 마라. 평생 홀대받을 각오를 하란 말이다. 약탈혼으로 아내를 얻었으면 그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예.”
“그래도 너는 사정이 좀 낫다. 용케 마누라 마음은 얻지 않았느냐. 약탈혼이 아니어도 평생 마누라 마음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너는 참 복 받은 놈이야, 톰.”

이고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톰의 등을 철썩 때렸다. 톰은 말없이 주먹만 꽉 말아쥐었다. 그의 품속에 세미니가 담긴 작은 단지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세미니의 달콤한 맛이 떠올랐다. 톰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윽고 네 사람은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촌장과 두 명의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촌장은 날렵하게 모양을 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갯짓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비록 일전에는 사정이 있어 얼굴을 붉혔다만, 모쪼록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오.”

촌장이 말했다.

“불을 지르진 않으리다.”

알렉세이가 턱을 들며 차갑게 말했다. 지난날의 수모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촌장을 비롯한 마을 남자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슬금슬금 몸을 사렸다. “왜 그리 긴장하시오?” 이고르가 알렉세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씩 웃었다. 마을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때, 론과 엇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청년이 네 마리의 말을 끌고 다가왔다.

“너 이 자식, 그때는 잘도 돌을 던졌겠다?”

청년의 얼굴을 알아본 론이 대번에 그의 멱살을 낚아챘다.

“저라고 던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역정을 내시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청년은 사색이 되어 애걸복걸했다. “말이야 쉽지. 네까짓 놈 혼쭐내주는 데는 무기도 필요 없다. 주먹이면 충분해.” 론은 당장에라도 청년을 흠씬 두들겨 팰 기세였다. “론, 놔줘라. 그런 버러지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이고르가 론을 말렸다. “빌어먹을.” 하고 론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멱살 쥔 손을 풀었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말은 기분이 들떴다.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고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톰은 두 다리로 걸을 때와 말 위에 올랐을 때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 새삼 깨달았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가슴이 답답한데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잘 봐둬라, 톰. 힘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톰의 굳은 얼굴을 보고 이고르가 슬쩍 말을 걸었다.

“네게 남들을 지배할 힘이 있으므로 이들이 순순히 널 받아들인 거다.” 

이고르는 곁눈질로 앞서가는 마을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그들의 태도에 톰은 적잖이 심기가 불편하던 차였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목에 핏대를 세우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온순한 양처럼 설설 기는데, 통쾌하기는커녕 오히려 분노가 치솟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입에 발린 말만 지껄이는 그들의 입을 죄다 찢어놓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묵묵히 수모를 견디던 알렉세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톰, 네 아버지 등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

이고르가 다시 물었다. 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렉세이의 넓고 단단한 어깨와 등을 응시했다.

“뛰어넘고 싶습니다.”

톰이 결연하게 말했다.

“좋다. 지금 이 감정을 절대로 잊지 마라. 그리고 이다음에 네 자식이 태어나거든, 그 아이에게 뛰어넘고 싶은 존재가 되도록 해라. 지금 네 아버질 보며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고르는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톰은 고삐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는 결심했다.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피트가 언제든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너지지 않는 버팀목. 그리고 나아가 자식에게 본받을만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이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거대한 산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


“……예물은 이처럼 준비했고, 아일라우 집안과의 혼담을 파기한 보상도 해주고 싶소. 우리 집안에 귀한 아이를 주셨으니,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리고 싶소.”

알렉세이가 진중하게 말했다. 톰과 피트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으므로, 현실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알렉세이는 존에게 막대한 예물을 약속했다. 수백 마리의 양과 말, 그리고 질 좋은 가죽과 비단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일전에 아일라우 집안에서 존에게 보내온 예물보다 갑절이나 많았다.

“가축은 필요 없소. 다만 어려운 일인 걸 알고 있으나, 약소하게나마 결혼식을 올려줬으면 좋겠소.”

존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압니다.”

존의 날렵한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미 피트 그 애를 취했으니, 결혼식은 가당치 않은 소리란 거 알고 있소.”

존은 고개를 숙였다. 약탈혼으로 취한 아내는 그 대우가 나빴다. 대개 적대적인 집안에 수모를 안겨주고자, 혹은 패배자에게 그 처지를 아로새기고자 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남편이 죽어 재가하거나 본래 약속한 혼담이 파기되어 다른 집안에 시집가는 여자들의 대우가 나았다. 이런 경우는 때에 따라서 초혼보다 더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약탈혼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남자의 재산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값진 보물처럼 애지중지 한들 재산 취급은 재산 취급이다. 약탈혼으로 취한 아내는 가축처럼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식을 여럿 낳아도 당당히 제 목소릴 내지 못하고, 눈칫밥을 먹으며 조용히 사라진 여자들이 숱하도록 많았다. 하물며 힘으로 일어서고 힘으로 드넓은 땅을 지배하는 거칠고 무자비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존은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피트가 아무리 톰 카잔스키를 사랑한다고 한들, 세간의 시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피트가 톰 카잔스키의 가축 취급을 받을 생각을 하니 칼로 심장을 쑤셔대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가 괜히 아일라우 집안과의 혼담에 공을 들인 것이 아니다. 남들은 더러운 돈을 만지는 상인이라며 하찮게 여겨도, 적어도 그들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피트에게는 오히려 나은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득과 실을 따지며 이윤을 내는 것을 우선시하는 집안이니, 싹싹하고 부지런한 피트라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진 기대가 되었지만. 이제 존의 유일한 희망은 톰 카잔스키의 마음도 피트와 같아 피트를 아껴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뿐이었다. 존 브래드쇼는 현실적인 남자였다. 젊은이들의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랑은 언젠가 식어버린다. 불꽃조차 피어오르지 않는 관계도 있다. 아내인 안나와 자신만 하더라도 그랬다. 부부는 단 한 번도 서로에게 뜨거웠던 적이 없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면 편안했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비밀을 기꺼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끈끈한 신뢰로 이어진 부부는 지금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를 의지할 수 있었다. 

존 브래드쇼의 사랑은 잔불과 같았다. 그는 피트도 자신처럼 안전하고 은은한 사랑 속에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자식의 일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피트는 기어이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불꽃 같은 아이니, 어떻게 보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존은 톰 카잔스키가 피트를 열렬히 원할 때, 얼른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그 자식이 피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남편의 마음이 식어도 자식만 있다면 기댈 곳이 있다.

“그래도 그 애한테는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 아니오. 내겐 친자식 같은 아이요. 남들 하는 건 다 하게 해주고 싶소. 그래서 아일라우 집안과의 결혼식도 무리해서 준비했던 것이오. 자식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주시오.”

존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자랑스러운 아이를 두고도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현실이 원통했다. 세상이 냉혹하니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도 결혼식만 올린다면, 구실만 갖춘다면, 형식적으로나마 카잔스키 집안에서 피트를 정식으로 인정하기만 한다면, 떠들길 좋아하는 사람들도 대외적으로는 말을 아낄 것이다.

“브래드쇼 씨, 예물은 사양하지 말고 받으시오.”

알렉세이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간 고생 많으셨소. 당신은 피트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아이로 키웠소. 나는 피트를 며느리로 삼을 수 있어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소. 그러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하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하겠소. 피트가 카잔스키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오. 감히 누구도 우리 집안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오.”

그 말에 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맹세하리다.”

알렉세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이 수모를 당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수모나 마찬가지요. 전부 죽여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카잔스키는 실언하지 않소. 우리는 피로써 우리를 증명하오.”
“난 그리 대단한 거 바라지 않소.”

존은 목이 멨다.

“죽어서 듀크 미첼 그 친구 다시 보게 되거든, 피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먼 훗날 일이 되겠군. 오래 사셔야 합니다. 손주도 보고 증손주도 봐야 하지 않겠소.”

알렉세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떨고 있는 존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을 다독였다. 존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


존과 알렉세이가 혼담을 나눌 동안 톰과 피트는 마당에서 함께 브래들리와 놀아주었다. 조금 전까지 닭을 쫓으며 놀던 브래들리가 졸음이 쏟아지는지 피트의 무릎 위에 올라와 꾸벅꾸벅 졸았다. 몸이 따끈따끈했다. 피트는 브래들리의 등을 다독이며 가볍게 다리를 흔들었다. 그 잔잔한 진동을 느끼며 브래들리는 꿈속 환상적인 땅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이의 손에 들린 장난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톰은 떨어진 장난감을 챙겼다.

“이 아이는…….”

뺨이 유독 붉은 브래들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톰이 입을 열었다.

“응.”
“손발이 크고 뼈마디가 굵은 걸 보면 다 자란 모습이 기대되는군. 체격이 무척 클 것 같다.”

브래들리는 젖을 뗀 지도 얼마 안 된 어린아이지만, 또래보다 체격이 좋았다. 팔다리도 튼튼했다. 이 무렵 어린아이는 남자아인지 여자아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브래들리는 척 봐도 남자애였다.

“구스랑 캐롤 둘 다 키가 크니까.”

피트는 브래들리의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우물거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나는 작잖아.”
“음.”
“우리 애가 나 때문에 작으면 어떡해?”

피트는 톰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톰은 제 귀를 의심했다. 피트는 심각한 얼굴로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너도 아버님보다 작잖아. 게다가 아버님보다 할아버님이 더 컸다면서. 안 그래도 이 집안 남자들 키가 점점 더 줄어드는데 나 때문에 더 작아지면 어떡해?”
“피트, 일단 우리는 아이가 생길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

톰이 점잖게 말했다. 피트는 브래들리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아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아이를 갖고 싶어?”

톰이 씩 웃었다. 피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톰에게 눈길이 가서 곁눈질했다.

“애가 키가 작으면 어떡하냐고 물었어.”
“아이를 빨리 갖고 싶은가 보군.”
“너랑 말 더 안 할래.”

피트는 퉁명스레 말했다. 톰의 선선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한 마음에 피트는 톰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웃지 마, 난 심각해. 진지한 고민인데 맥 빠지는 말만 하고.”
“미안해. 네가 그런 고민 하고 있을 줄 몰랐다.”

톰은 피트와 달리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넷은 가질 생각이니, 한 명은 키가 크지 않을까 했다. 자신과 엇비슷해도 좋고, 조부를 닮아 더 커도 좋았다. 자식의 키가 크든, 작든 피트를 닮았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피트와 그를 닮은 아이들이 불가에 빙 둘러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톰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아이가 작으면 좀 어때. 널 닮았다면 용감하고 씩씩할 텐데.”
“그래도 작으면 무슨 소용이야…….”

피트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애가 쑥쑥 클 수 있도록 매일 밤 팔다리를 잡고 당겨주자. 넌 팔을 잡고, 난 다리를 잡는 거지.”
“내가 왜 팔을 잡아?”
“다리에 채이면 더 아프잖아. 널 닮았으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분명 바동거릴 거다.”

톰은 그렇게 말하며 피트의 뺨에 슬며시 손을 가져갔다. 피트는 피하지 않았다. 톰이 조심스레 뺨을 문지르자, 아예 그의 손바닥을 제 뺨으로 꾹 눌렀다. 우묵한 손바닥에 담긴 뺨은 보드랍고 따스했다. 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피하던 피트다. 이 순간이 꿈만 같다.

그때, 문이 끼익 열리며 알렉세이와 이고르가 안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어쩌다 듣게 된 이고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그런다고 자랄 애면 그냥 내버려 둬도 알아서 클 거다.”
“백부님.”

톰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도 피트처럼 새빨개졌다.

“둘이서 심각하게 쑥덕거리길래 뭔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가 했더니, 뭔 쓸데없는 소릴 하고 앉았어?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녀석들이 말이야.”

이고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큰소리에 깜빡 잠이 들었던 브래들리가 눈을 반짝 떴다. 피트는 눈을 비비는 브래들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브래들리가 잠투정을 하며 피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고 보챘다.

“피트! 네 황홀한 얼굴을 보여다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고르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싫다. 피트는 질색하며 몸을 사렸다. 이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 진정한 가족이 되었으니 날 꼭 안아다오!”
“싫어요.”
“어서!”
“싫어요.”
“팔이 떨어질 것 같구나!”
“싫어요.”
“피트, 내가 그리 싫으냐?”
“네, 싫어요.”
“나는 네가 좋은데.”
“저는 싫어요.”
“자, 자. 너무 그러지 말고 날 좀 보려무나. 계속 보다 보면 그래도 정이 들 거다.”
“그럴 일 없어요.”

짐승 같아. 무서워. 피트는 이고르를 피해 허둥지둥 달아났다.

“이야, 아무리 봐도 아찔한 뒤태로군. 앞태도 고운데 뒤태는 더 죽여주는구나.”

이고르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피트는 마당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브래들리를 발견하고, 아차 싶은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브래들리를 안았다.

“브래들리, 나랑 가자. 나쁜 거 보지 마.”

피트는 브래들리의 두 눈을 가리고 집 안으로 도망쳤다. 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알렉세이는 눈을 부릅뜨며 말없이 이고르를 노려보았다. 부자가 자신을 질책하거나 말거나 이고르는 흥에 겨워 팔짱을 끼고서는 육중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역시 냉소적인 미인만큼 사내 애간장을 녹이는 건 없지. 저 애는 참 싸늘하단 말이야. 좋군, 참으로 좋아.”
“형님.”

참다못한 알렉세이가 이고르를 불렀다.

“왜?”

이고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모습에 알렉세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알렉세이는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고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입도 벙끗하기 싫다는 게냐?”

이고르가 섭섭한 눈치를 보였다. 이제 알렉세이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뒤늦게 마당으로 나온 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소? 피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방으로 도망가던데.”
“사돈! 피트는 정말 참한 아이요.”

이고르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두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 빼어난 얼굴은 사돈이 만든 게 아니지만 아무렴 어떻소.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잘 가꾼 건 사돈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꽃도 물을 줘야 싱싱한 법이지.”
“애가 사색이 된 이유를 알겠군.”

존은 단숨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했다. 이고르 카잔스키가 유별 난 사람이란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소문보다 더한 사람이라 놀랐을 뿐이다.

“형님은…….”

알렉세이가 겸연쩍게 말했다.

“형님은 피트가 무척 마음에 든 것뿐이오.”

알렉세이는 차마 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뿐이오.”

잠깐 사이에 알렉세이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졌다. 존은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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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3.29 00: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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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어른들은 심각하게 결혼 의논하고 계시는데 아직 생기지도 않은 2세 키걱정부터 하고있는 예비 신랑신부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귀여운 커플이다ㅋㅋㅋㅋㅋ작으면 팔다리 잡아당기면 된다는 아이스 대답도 아이스 다워ㅋㅋㅋㅋㅋㅋ그리고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 아이스...아버지로서는 아들에게 뛰어넘고 싶은 존재가 된다는게 아버지로서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존경과 찬사겠지ㅠㅠㅠㅠ그리고 아이스도 아들이 뛰어넘고 싶은 존재가 되는게 인생의 목표가 되겠고ㅠㅠㅠㅠ하 정말 읽으면서 가슴이 웅장해진다ㅠㅠㅠㅠ센세 계좌불러 빨리ㅠㅠ
[Code: f3e2]
2023.03.29 04: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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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5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혼담 마무리되는과정 너무 찡하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중에 둘이 꽁냥대는거 너무 커여워요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d092]
2023.03.29 11: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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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혼담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ㅠㅠ 톰이랑 피트가 미래를 얘기하는거 너무 좋다ㅠㅠㅠ 이제 행복만 해ㅠㅠㅠ
[Code: af53]
2023.03.30 03: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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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생길만한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기 키 걱정하다니ㅋㅋㅋ 아ㅋㅋㅋㅋ
[Code: 552a]
2023.04.02 08: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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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잡고 늘린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둘이 겁나 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be38]
2023.04.18 13: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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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ㅋㅋㅋ정가네ㅋㅋㅋㅋ여기 캐들 다 좋아...
[Code: 4753]
2023.04.27 03: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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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광대가 너무 아픈데요센세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고요ㅠㅠㅜㅜ
[Code: af52]
2023.08.09 14: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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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존아부지 진심 따뜻한데 만담들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fc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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