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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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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정 오류가 있어서 수정함

제르메갈 부족
수장: 하길드 하마르
차남: 세나메브 하마르

이전 편에서 제르메갈 부족 우두머리 집안을 세나메브라 썼는데, 세나메브는 하마르 집안의 차남의 이름임

4회, 22회, 23회, 24회

일부 대사와 설명 수정함

=

늑대와 달


37. 경고


오전 무렵에 톰과 론은 탄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었다. 톰은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피트를 쳐다보던 아이들의 눈초리와 피트를 대하던 아이들의 행동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부모와 똑같이 잔인했다. 팔다리도 덜자란 아이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고 싶지 않아 톰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거기, 너.”

론이 영특하게 생긴 사내아이를 콕 집어냈다.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건장한 체격에 무뚝뚝한 론의 생김새는 아이가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벌써 론의 사나운 기세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 아이도 있었다.

“촌장 집으로 안내해라.”

론이 말했다. 아이는 입만 벙긋거렸다. “어서!” 하고 론이 외치자 아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촌장의 집을 향해 달렸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촌장의 집은 제법 으리으리하고 번듯했다. 마당을 쓸고 있던 촌장의 어린 손자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방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촌장을 찾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촌장은 톰과 론을 보자마자 아연실색했다.

“촌장, 일전에 환영 인사는 참 감사했습니다.”

톰은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인사했다.

“앞으로도 그만한 환대는 받지 못할 거야. 어디에서도.”

옆에서 론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브래드쇼는 가축을 치러 떠났는데 여긴 무슨 일로 왔소.”

촌장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톰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촌장은 목을 앞으로 쭉 빼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피투성이가 된 세다르를 발견한 촌장이 “허어…….”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자가 내 아내를 팔았다.”

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단호한 태도였다. 그는 일전에 돌팔매질을 당하고 초라한 몰골로 쫓겨났던 청년이 아니었다. 촌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톰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오늘은 경고하러 왔다.”

톰이 다시 말했다. 그의 말이 고개를 들고 위협적으로 울었다. 세다르는 꼴사납게도 엉엉 울어댔다. “입 닥쳐, 새끼야!” 론이 윽박지르자, 세다르는 딸꾹질을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촌장의 가족들이 슬그머니 나와 주변을 살폈다. 촌장은 여자와 아이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마을 사람들을 광장에 모아라. 늙은이들도, 여자들도, 아이들도 빠짐없이 전부.”

톰이 명령조로 말했다.

“물론 이놈의 부모도 말이다.”

톰이 눈짓으로 세다르를 가리켰다.

“일단 진정하시게. 세다르의 부모를 먼저 데려오겠네. 세다르의 부모와 먼저 대화를—”

손을 들고 차분하게 톰을 타이르려고 시도하는 촌장의 눈앞에 시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톰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두말하지 않겠다.”

촌장은 눈앞이 아찔하여 비틀거렸다. 그는 급히 숨을 고르며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목덜미를 소매로 닦았다. 톰은 검을 집어넣고 한발 앞서 광장으로 떠났다. 세다르가 남긴 핏자국이 선명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촌장의 옷을 잡아당겼다. ‘부디 세다르의 목만 떨어진다면 좋으련만.’ 촌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을 모으러 집을 나섰다.

 
***


광장에 모래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우중충했고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록도 아름답지 않은 스산한 풍경이었다. 촌장의 부름을 받고 광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실성한 세다르를 보고 말을 아꼈다. 그들은 톰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할까 봐 몸을 사렸다.

세다르의 부모가 마지막으로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통통한 체구에 뺨이 붉은 여자였고, 아버지는 키가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남자였다. 아들인 세다르는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평판이 썩 좋지 않았지만, 부부는 조용하고 소탈한 성격이라 마을 사람들과 친밀감을 유지하며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피트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부부도 피트를 불길한 아이라며 꺼렸고, 하나뿐인 귀한 아들의 코를 부러트린 일로 두고두고 피트를 타박했다. 그 귀한 아들이 도박에 빠진 이후로 집안의 가세는 빠르게 기울어, 최근에 부부는 삶이 퍽퍽해진 상태였다.

“세다르!”

세다르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두 팔을 벌리고 세다르에게 달려오는 여자를 론이 막아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 아들을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세다르의 어머니가 길길이 날뛰며 따졌다.

“당신 아들이 내 아내를 팔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 아들이 도박을 한다고 납치범들에게 돈을 받고 내 아내를 팔았다. 난 이놈을 헨조로 도박장에서 찾았다. 내 아내를 판 돈으로 밤을 지새우며 도박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 돈을 하룻밤 만에 전부 잃었어.”

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오해가 있는 거예요. 피트는 같은 마을 사람이잖아요. 세다르와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애를 팔겠어요? 세다르, 세다르! 뭐라고 말 좀 해보렴!”

여자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머니를 알아본 세다르는 우습게도 팔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주제에 부끄러워?’ 그 꼴을 보고 론은 부아가 치밀어 냅다 세다르를 걷어찼다. 그는 나귀처럼 울부짖었다.

세다르가 도박 빚에 시달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했다. 그들은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함께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며 옛날얘기를 나눴던 부부를 외면해버렸다. 자신들에게도 불씨가 튈까 봐 선을 긋고 거리를 뒀다.

“난 당신들이 아버지와 내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은 것을 따지러 온 게 아니다.”

톰이 말했다. 그는 세다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톰은 검을 쥐고 팔을 높이 들었다. 순식간에 세다르의 머리가 떨어졌다. 

“안 돼, 세다르!”

세다르의 어머니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남편이 쓰러지는 아내의 몸을 부축했다. 남자의 얼굴도 허옇게 질려 있었다. 눈 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 눈만 껌뻑이던 아이들이 곧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 자리에서 졸도한 사람도 있었다. 광장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톰이 고함을 질렀다. 쩌렁쩌렁한 소리에 조금 전까지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검을 쥔 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내 아내를 핍박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 자의 머리로 끝나지만, 다음에는 누구의 머리가 떨어질지 나도 장담 못 한다.”
“…….”
“당신들을 전부 죽이지 않는 건 브래드쇼 어르신의 체면을 생각해서다. 하지만 오늘부터 내 아내와 당신들은 모르는 사이다. 만약에 피트에게 옛정을 들먹이며 곤란한 부탁을 하거나 되먹지 않은 요구를 하는 날에는…….”

톰은 잠깐 숨을 골랐다.

“전부 죽여 늑대 먹이로 던져주겠다.”

 
***


호수에 별빛이 쏟아졌다. 톰은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죽은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아버지의 추억 속에서 영원한 이상으로 남은 어머니의 존재는 순수하고, 경이롭고, 그저 선량하다. 두 손에 숱한 피를 묻힌 자신과는 달리.

세다르를 너무 편히 보내줬다. 톰은 후회했다. 피트는 살아서 고통받고 있을 텐데, 세다르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톰은 털썩 주저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절망과 고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 아름다운 꿈이 펼쳐졌다.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 비정하고, 잔인하고, 고통스럽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무정한 아버지도 결국 꿈을 꾸는 사내였다.

론의 발소리가 들렸다. 톰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느새 다가온 론이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론은 씹고 있던 암염을 뱉었다. 그의 표정이 심란해 보였다. 한참 머뭇거리던 론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이스.”
“…….”
“괜찮나?”
“괜찮다.”
“그래…….”
“…….”
“피트는 무사할 거야. 걔는 악바리잖아. 쉽게 안 죽는다.”

론은 멋쩍게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매버릭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톰은 수면 위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여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매버릭의 환영. 톰은 두 눈을 감았다.

“매버릭이 허상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톰은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를 좇았다.

“매버릭은 꿈이고, 그 꿈에서 깨어나 매버릭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슬라이더,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매버릭을 만나기 전 내 인생이 쓸쓸하고 외로웠다는 사실을.”
“걔라고 다르겠어?”

론이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톰은 눈을 떴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론을 쳐다보았다.

“걔도 널 만나기 전에는 사는 게 재미없었을 거다.”
“…….”
“제아무리 뛰어난 매라도 물에서는 살지 못하지. 매는 하늘 위에서 살아야 해. 네가 피트에게 하늘이 되어줘라.”

론은 커다란 손으로 톰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톰은 품 안에 넣은 빗을 꺼냈다. 피트에게 사 줬던 빗. 언젠가 피트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량처럼 노는 상상을 했다.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 주고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빗겨주는 상상도 했다. 자신의 상실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큰데, 피트는 오죽할까. 그러니 감히 그 소박한 바람을 말할 수 없었다.



38. 그을음


제 땅을 가져본 적 없는 투멘의 남자들에게 세나메브 하마르가 약속한 땅은 낙원과도 같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가축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개들은 힘차게 짖어댔다. 축복이 그들과 함께할 것처럼 보였다. 미래가 낙관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오손 투멘의 벅찬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막을 치고, 짐을 막 풀었을 무렵 제르메갈 부족이 푸른 땅을 밟았다. 우두머리 격인 세나메브 하마르는 가장 먼저 오손을 찾았다.

“오손 투멘이 누구지?”

올해 19세인 세나메브는 큰 키에 날렵하고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카락은 새카맸고, 눈동자도 새카맸다. 안색은 창백했다. 하마르 집안 사람들은 주로 검은 옷을 즐겨 입었으므로 그는 꼭 까마귀처럼 보였다.

하길드 하마르의 막내인 바르바타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하길드는 차남인 세나메브를 곁에 두고, 장차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 줄 생각이었다. 따라서 세나메브는 독립하지 않고 아버지인 하길드를 도왔다.

“내가 오손 투멘이요. 이 넓고 비옥한 땅을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손은 두 팔을 벌리며 세나메브를 환영했다.

“인사는 됐다.”

세나메브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이 애새끼가…….’ 세나메브의 거만한 태도에 오손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호쾌하게 웃으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자,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눕시다.” 오손이 천막을 가리켰다.

“알렉세이 카잔스키가 우리 하마르의 이름으로 잘린 머리카락을 받았다더군.”

세나메브는 꿈쩍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오손은 손바닥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전쟁이 발발했다. 콘스탄틴 카잔스키는 벌써 움직였어. 내 숙부님과 대치 중이다.”
“……그래서 두렵기라도 한가?”

오손이 씩 웃었다. 그는 더는 세나메브에게 굽실거리지 않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세나메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은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급히 마련한 천막은 조잡했다. 기둥도 제대로 세우지 않아 천장이 기울어졌고, 외풍이 들어왔다. 벽걸이와 카펫도 변변치 않았다. 침상 위에 모로 누운 피트를 보고 세나메브는 인상을 굳혔다. ‘저 사람이 그 오메가인가.’ 세나메브는 말을 아꼈다.

오손은 차가 아닌 술을 대접했다. 세나메브는 독한 술을 곧잘 비웠다. 입이 썼다. 마음도 썩 편치 않았다. 그는 잠이 든 것인지, 의식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피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카잔스키는 언젠가 맞붙어야 할 상대였다. 단지 내가 예상했던 시기보다 앞당겨졌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하마르의 이름을 더는 네 마음대로 팔지 마라. 눈감아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다.”

세나메브는 술잔을 내려놓고 경고했다. 오손은 능청스레 되받아쳤다.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내가 정당한 명분을 줬지 않나.”
“명분?”

세나메브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자가 이 땅에 주인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달리 명분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요구에 응했지?”
“네가 톰 카잔스키가 빼앗은 아일라우의 처를 거둬들이고, 잘 보살펴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농락당한 오메가의 처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카잔스키에게 실망했지. 그런데 내게는 아껴주겠다고 말해놓고서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오손이 묻자, 세나메브는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 내 아내다.”

오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혼을 내야지.”
“네가 따를만한 사내였다면 진작 고분고분 말을 들었겠지. 네가 무능력해서 아내의 신뢰를 얻지 못한 거다.”

세나메브가 차갑게 응수했다. 오손에게 말했던 대로, 자신의 호적수라고 생각했던 톰 카잔스키에게 실망했다. 약탈혼은 야비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카자흐 아일라우의 짝이었고, 그가 죽었으니 아일라우의 친척인 오손 투멘이 피트를 아내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요구에 응했다.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면 투멘과 얽힐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축을 치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 폐허에 뱀처럼 몸을 숨기고 살면서, 노략질을 일삼는 투멘은 세나메브에게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피트를 데리고 살겠다니, 남편 구실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했다.

‘내가 성급했나.’ 막상 두 눈으로 피트를 보니, 세나메브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잘리고, 얼굴은 상처투성이다. 누가 보아도 학대를 당한 몰골이 아닌가. 적어도 톰 카잔스키는 저 지경으로 때리진 않았다. 학대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카자흐와 결혼을 약속하고서 톰 카잔스키에게 몸도 마음도 전부 줘버렸어.”

세나메브가 자신을 깔보자 오손은 발끈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럼 저 오메가가 죽은 아일라우를 대신해서 톰 카잔스키의 숨통이라도 끊어놔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너도 하지 못한 일을?”

세나메브가 턱짓으로 피트를 가리키며 따져 물었다. 오손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씩씩거렸다. 세나메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약탈혼을 당했는데 저이라고 별다른 도리가 있었겠나? 오손, 이제 땅도 생겼고, 집안도 건사하게 됐으니 그에 맞는 아량을 갖춰라.”
“제길…….”

오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피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세나메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워낙 사납고 괄괄한 녀석이라, 좀 진정하라고 약을 먹였다.”
“깨워라.”
“뭐? 방금 약을 먹였어. 때려도 깨지 않을 거다.”
“깨워라.”

세나메브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오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침상으로 향했다.

“이봐, 일어나.”

오손은 피트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피트는 신음만 흘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일어나라.”

오손이 다그치듯이 말했다. 역시나 피트는 깨어나지 못했다. 초조해진 오손은 피트를 때려서 깨우려고 손을 들었다.

“그만. 때리지 마라.”

세나메브가 오손을 말렸다.

“아내로 삼았다면 때리지 말고, 굶기지도 말고 잘 대해줘라.”

세나메브는 감정을 철저히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피트가 오손의 아내인 이상 이처럼 간섭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피트의 처지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는데,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손은 손을 내렸다. 세나메브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오손. 만약에 널 돕겠다는 내 결정을 그릇된 것으로 만든다면, 네놈은 내 손으로 죽일 거다. 명심해라.”
“알았다.”

오손은 껄끄러운 마음에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네가 벌인 일에 책임을 져라.”
“전쟁에 합류하라고 말하는 건가?”

오손이 멈칫했다.

“우리를 초원의 주인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좋다.”

오손은 시원스레 웃었다.

“톰 카잔스키는 내가 죽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세나메브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사람을 껴안고 살 순 없겠지. 죽여버리기만 하면. 죽여서 없애기만 하면. 너라고 별다른 도리가 있겠어?’ 오손은 피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에게는 늘 울상을 짓거나, 괴로운 표정을 짓는데 톰 카잔스키 앞에선 어떤 표정을 지을까. 피트가 웃는 얼굴이 궁금했다. 꽤 간드러지게 웃을 것 같은데…….

 
***


“톰, 톰…….”

피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톰을 찾았다. 그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죽은 어머니, 늑대의 음산한 울음 소리, 춥고 쓸쓸한 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꿈은 불씨처럼 튀었다. 그리운 톰을 다시 만났는데, 그의 몸이 수백 개로 잘게 쪼개어졌다.

“톰, 안 돼!”

피트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내 약에 취해 있었으므로, 그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낯선 벽걸이와 불편한 잠자리에 피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이름, 한 번만 더 말하면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

오손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피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피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손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겠다.

“남편을 옆에 두고 다른 사내를 찾아? 아직 혼이 덜 났군.”

오손은 당장이라도 피트를 때릴 기세였다. 피트는 움찔하며 어깨를 웅크렸다.

“왜 그래. 매 맞는 건 무서운가 봐?”

오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떠는 피트를 비웃었다. 피트는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오손에게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또 자신을 발가벗기고 남들 앞에 세워둘까 봐 무서웠다.

“전쟁이 벌어졌어.”

오손은 얌전해진 피트의 태도에 만족해서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피트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전쟁이라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왜? 의아했다.

“톰 카잔스키를 죽여버릴 거다. 그놈 시체를 끌고 와서 앉혀두고,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널 안을 거야.”
“나는 이제 아이도 못 가지고, 예단도 없고, 재산이랄 것도 없어. 부모님도 안 계셔서 의지할 친정도 없어.”

피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힘없이 말했다. 그는 전쟁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단 사실을 몰랐다.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톰을 사랑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만, 그가 자신을 버린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은 아이도 낳지 못하고 여러 사내를 거쳤다. 머리카락도 잘리고, 손목에는 가축한테나 찍는 낙인까지 찍혔다. 그러니 집안이 좋고, 젊고, 건강한 톰이라면 그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나 하나 데리고 살겠다고 손해 보는 짓을 해?”
“그건.”

오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왜? 오손의 입에서 쇳소리가 났다. 교태도 부릴 줄 모르고, 아양도 떨 줄 모르고, 남자를 모르는 데다 뻣뻣하기만 한 이딴 어린애한테 왜 내가 마음을 쓰는 거지? 오손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반반하긴 하지만, 피트는 오손의 취향이 아니었다. 오손은 버드나무처럼 하늘하늘하고 음전한 여자를 좋아했다.

“네가 톰을 죽이겠다고?”

피트는 피식 웃었다.

“네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피트의 비아냥거림에 발끈한 오손은 그의 멱살을 낚아채고 입을 맞췄다.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손의 입맞춤은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톰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거칠고 게걸스러웠다.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역겨워서 소름이 돋았다. 또다시 온몸이 미치도록 가려워졌다. 피트는 오손의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이 망할 것이!”

오손은 피트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고개가 돌아간 피트는 멍한 눈으로 바닥만 응시했다. 오손은 피가 흐르는 입과 턱을 세게 문질렀다.

“네 남편은 나야. 싫든 좋든 앞으로 넌 날 섬기면서 살아야 해. 죽을 때까지. 알겠어?”
“알겠어. 너랑 살기 싫으면, 죽으면 된다는 소리네.”

피트는 체념한 어투로 말했다. 그가 스스로 혀를 깨물려고 하자 놀란 오손은 허둥지둥 의원이 준 약병을 찾아 피트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싫어, 약 먹이지 마. 저 약 먹으면 아, 악몽을 꾼단 말이야.”

피트는 울면서 발버둥 쳤다. 꿈에서도 톰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싫어, 제발.” 오손은 애원하는 피트에게 기어이 약을 먹였다. 곧 피트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동공도 풀렸다. 의식을 잃으며 피트는 마지막으로 톰을 떠올렸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과 서글서글한 미소를. 그리고 생각했다.

‘몸만 다 나으면,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아이를 가지지는 못하더라도, 일은 할 수 있으니까…… 곁에만 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난 이제 갈 곳이 없으니까 불쌍하게 생각해서 곁에 남게 해주지 않을까.’

톰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와 아이를 가져도 좋으니까 곁에 남고 싶었다. 톰의 아이라면 분명 사랑스러울 것이다. 자신의 배로 낳은 친자식처럼 돌볼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톰과 함께 살고 싶었다. 그의 눈이 부신 금발이 새하얗게 바래는 그날까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점점 몸이 굳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래, 단지 바람일 뿐이다. 누가 자신을 데리고 살려고 하겠는가. 이제 브래드쇼 가족에게도 돌아가지 못한다. 미안해서 돌아갈 수 없다. 브래드쇼 가족은 이미 자신 때문에 숱하도록 고생했다. 상처도 많이 받았다. 괴로운 일이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살아봤자 슬프고 아프기만 하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나보다. 그게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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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4.11 00: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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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ㅠㅠㅠㅠ 내 센세 돌아왔어ㅜㅜㅠㅠㅠㅠ 나붕은 눈물을 훔치며 제목을 클릭했다…
너무 재밌어 진짜 넷플 하나 정주행하는 기분임ㅠㅠㅠㅠ
피트.. 이제 아기도 못갖는다고 자책하면서, 톰 곁에라도 머물수있다면 좋겠다고 하는거 너무 슬퍼..ㅠㅠㅠ
[Code: 1d91]
2023.04.11 00: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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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진짜 ㅠㅠㅠㅠㅠ피트 건들지마라 흑흑
[Code: b3bd]
2023.04.11 00:42
ㅇㅇ
세다르 너무 편하게 죽은거같다 진심 오손은 개씨발 처참하게 죽었음좋겠다 시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b77]
2023.04.11 00: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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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ω・。)つ━☆・*。
⊂   ノ    ・゜+. 센세는 내 아내~~
 しーJ   °。+ *´¨)
         .· ´¸.·*´¨) ¸.·*¨)
          (¸.·´ (¸.·'* ☆
센세와 나그의 혼인신고서.·'* ☆
[Code: 7935]
2023.04.11 01: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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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o̴̶̷᷄ )༼;´༎ຶ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Code: 8a72]
2023.04.11 02: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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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이샛기가……!!!!!!!!!!!!!!!!!!!!!!!
[Code: 07f0]
2023.04.11 11: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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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빨리 만나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088d]
2023.04.11 13: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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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개새끼지만 피트한테 감긴 모습이랑 세나메브가 너무 매력있어.. 우리 피트 해감해야 하는데 구르는거 너무 존꼴이고..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
[Code: 2d0f]
2023.04.11 20: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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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가 너무 걱정돼 ㅠ 너무 심한일을 겪어서 나중에 ptsd 올거같음 ㅜㅜㅜ 아이스야 얼른 구해줘 엉엉 행복한일만 겪어야되는데 피트 ㅠㅠㅠ
[Code: 826d]
2023.04.11 21: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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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개새끼인데 맵한테 감긴거 진짜좀 꼴린다... 피트 웃는 얼굴 궁금해하는거... 오손이 피트가 웃는걸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피트가 이 개새끼 죽일때 진심으로 웃어서 그걸 봤으면 좋겠다.....................
[Code: 752b]
2023.04.12 17: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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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가슴아프면서 동시에 맛있을수가 있는거죠?ㅠㅠㅠㅠ 그래도 오손 저새끼 막타는 피트 주자...
[Code: fcc8]
2023.04.18 15: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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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너무 재밌다ㅠㅠㅠㅠㅠ센세 유목민이야? 뭐 이렇게 잘써ㅠㅠㅜㅠㅠ
[Code: 3162]
2023.05.25 11: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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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가만안둬 저 개자식ㅠㅠ우리 피트 자낮된 거 너무 슬퍼요 센세
[Code: 8a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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