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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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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45. 매와 물고기


이른 새벽 톰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곁에 잠든 피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이어서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두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피트는 살아있다. 잠이 든 것뿐이다. 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트를 되찾은 기쁨만큼이나 불안이 톰을 따라다녔다. 피트는 악몽을 꾸는지 끙끙거렸다. 톰은 피트의 손을 잡고 그의 악몽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톰은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그는 광장으로 내려가 물동이를 세워놓은 곳을 찾았다. 성안에 있는 우물과 해자의 물은 썩어서 쓸 수 없었다. 다행히 성 밖 근처에 강줄기가 흐르고 있어 거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좋은 아침이다, 톰.”

간밤에 보초를 섰던 남자가 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간밤에 별일 없었나?”
“어어. 내일 출발하는 거 맞지?”

남자는 턱이 빠지도록 크게 하품하며 물었다.

“그래.”

톰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물동이에서 물을 펐다. 차가웠다. 톰은 개의치 않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손과 발을 씻었다. 이대로는 개운하지 않았다. 간밤에도 씻었지만, 그래도 냄새가 날까 봐 걱정됐다. 톰은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등목을 했다. “도와줄까?” 남자가 아는체했다. “됐다.” 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다시 하품했다. 그래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남자는 잠을 깨려고 불가로 걸어가 차를 끓였다. 소금을 넣고 마유로 끓인 차였다.

“톰, 너도 차 한잔 마실래?”
“좋지.”

이번에 남자는 차를 권했고, 톰은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는 씩 웃으며 투박한 잔에 차를 가득 따라 톰에게 건넸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리는 건 잠깐이었다. 톰은 커다란 물병에 물을 길었다.

“네 아내한테도 갖다줘. 피트, 일어났나?”

남자가 차를 주전자에 따로 담았다. 구리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였다.

“아직.”
“그럼 깨거든 줘.”

남자의 말에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피트는 짜게 먹지?” 
“어.”

남자는 주전자 뚜껑을 열고 소금을 조금 더 넣었다. “흘리지 말고 조심해서 가져가라.” 남자가 덧붙여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은데,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톰은 물이 가득 들어 무거운 물병과 찻주전자를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


톰은 피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피트는 이미 깨어있었다. 그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작게. 톰은 서둘러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피트에게 다가갔다.

“매버릭.”
“어디 갔었어?”

피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혼자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 걸까. 목도 쉬어 있었다. 게다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또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물을 길어왔다.”

톰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피트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다독였다.

“미안해. 혼자 둬서 미안하다.”
“…….”
“나 여기 있어, 피트. 울지 마라. 미안하다.”

톰은 피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의 등을 연신 쓸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잠시 후, 피트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피트가 괜찮은지 확인한 톰은 곧바로 물을 끓였다. 피트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한잔도 다 마시지 못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입술만 축인 정도였다. 피트는 통 먹질 못했다.

대야에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겼다. 톰은 찬물을 부어 물 온도를 맞췄다. “피트, 두건 벗어라.” 하고 톰이 말했다. 피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에 두른 두건을 풀었다. 피트는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을 톰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잘 때도 두건을 쓰고 잤다. 예전에는 톰이 머리카락을 가리라고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던 피트다. 

톰은 대야에 담긴 물로 피트의 얼굴을 씻겼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알을 다루는 것처럼.

“뜨겁지 않아?”

톰이 물었다.

“응.”

피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따갑지도 않고?”
“응.”

피트는 코가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톰은 피트의 콧방울을 엄지로 꾹 눌러 콧구멍을 막았다.

“코 풀어.”
“싫어. 부끄러워.”

피트는 질겁하며 톰의 어깨를 밀었다.

“뭐가 부끄러워?”
“부끄러워.”
“왜?”

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피트를 빤히 보며 되물었다.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왜 자꾸 캐물어? 코는 내가 직접 풀래.”

피트는 볼멘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톰이 씻겨주는 건 좋지만, 코까지 풀어 주는 건 싫다. 그렇지 않아도 맞아서 얼굴은 엉망이 됐고, 살까지 빠져서 볼품없어졌는데 코까지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톰에게는 되도록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알았다.”

톰은 손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일리야가 손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역시 내가…….”
“됐다니까! 내가 어린앤 줄 알아?”
“나보다 어리잖아.”
“좀!”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톰이 귀찮게 굴자, 피트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렸을 때 강아지한테 손가락을 물렸던 일이 떠올랐다. 작고 귀여운데, 성격이 사나운 놈이었다. 예뻐해 주려고 쓰다듬었다가 피를 봤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귀 막아.”

피트는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얼른.”

피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톰은 하는 수 없이 귀를 틀어막았다. 피트는 등까지 돌려 자신이 코를 푸는 모습을 톰이 보지 못하도록 했다. 웅크린 피트의 어깨가 펄쩍 튀었다. 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다시 한번 피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피트는 코를 푼 수건을 돌돌 말아 방석 밑에 곳에 숨겼다. 톰은 모른 체하고 피트의 얼굴을 마저 씻겼다.

 
***


“어? 새다.”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따라 그리던 피트는 새 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새는 창틀에 앉아 톰이 미리 갖다 놓은 빵을 쪼아먹었다. 피트는 새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자, 도와줄게. 억지로 힘주지 말고 나한테 기대.”

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피트를 부축했다. 독약의 후유증 때문인지 피트는 스스로 잘 걷지 못했다. 몇 걸음 걷다가 금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는 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불시에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칼로 다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피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로워했다. 일리야가 준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리야는 톰에게 피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영영 예전처럼 걷지 못할 수도 있고, 평생 통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톰은 피트에게 희망을 빼앗고 싶지 않았으므로 일리야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대신에 피트가 진땀을 쏟아내며 괴로워할 때마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전부 괜찮아질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피트는 톰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는 지금의 고통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리라 믿었다. 지난날의 아픔처럼.

그간 얼굴이 눈에 익어서인지 새는 톰과 피트가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호기심이 왕성했다. 피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냉큼 그의 손가락 위로 올라왔다. 피트는 무척 기뻐했다.

“새를 좋아해?”

톰이 물었다.

“응. 매를 제일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쭉 사냥매를 갖고 싶었는데, 마을에선 매사냥하는 사람이 없어서 배울 수 없었어.”

피트는 새의 정수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톰은 피트가 산양과 매만 수놓는다던 닉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신부복도 새가 그려져 있었다. 대개 꽃이나 넝쿨을 수놓는데 말이다. 잘 어울렸다. 얼른 피트가 신부복을 입은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신부복을 벗기리라. 상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가르쳐줄게.”
“정말?”

피트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톰의 근사한 사냥매가 내심 탐이 났다. 이름은 블라카. 덩치가 크고, 발톱이 아주 멋졌다. 샛노란 눈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위험하다고 만지지 못하게 해서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했는데, 자신에게도 사냥매가 생긴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래. 마침 새들이 알을 낳을 무렵이니, 어렵지 않게 새끼를 구할 수 있을 거다. 매를 길들이는 법부터 사냥하는 법까지 전부 가르쳐줄게.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고마워. 그럼 나는 낚시를 가르쳐줄게.”
“낚시?”

톰이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응. 영지 근처에 호수가 있는데 아무도 낚시를 하지 않더라? 그러니까 쉽게 잡을 수 있을 거야.”
“낚시라…….”

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호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가축을 치는 것 외에도 낚시를 해서 잡은 생선을 팔거나 먹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톰은 태어나서 낚시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낚싯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다. 바자르에서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다.

“굽거나 튀겨 먹으면 맛있어.”

피트는 모처럼 입맛이 당기는지 배를 만지작거렸다.

“양도, 말도, 염소도 고기라면 충분하잖아.”

톰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일전에 존 브래드쇼가 내어준 생선 스튜는 그의 입에 맞지 않았다. 흙냄새가 났고, 비렸고, 살은 너무 부드러워서 입안에서 씹기도 전에 바로 흩어져버렸다. 피트가 좋아한다고 했고, 브래드쇼 가족의 성의를 생각해서 남기지 않고 전부 먹었을 뿐이다. 누가 준다면 먹겠지만, 굳이 찾아서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생선 맛있어. 넌 안 먹어 봤지? 내가 구워줄게.”
“알았다. 기대할게.”

하지만 피트가 좋아한다니 뭐가 중요하겠는가. 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피트도 활짝 웃었다. 그는 기대하라며 톰의 코끝을 톡톡 쳤다.

‘앞으로 익숙해져야겠지.’ 톰은 앞날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따지고 보면, 피트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톰의 입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를 하는 내내 신이 나서 떠드는 피트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또, 자신이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잔뜩 기대한 피트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입 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내렸다. 코를 찌르는 시큼함과 얼얼한 매운맛 정도야 금방 사라진다. 물을 좀 많이 마시기만 한다면.

새가 톰의 머리 위에 앉았다. 피트는 자신이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았을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림으로 그려 이 순간을 남길 수 있을 텐데. 사람들한테 자랑할 수 있을 텐데. 톰이 얼마나 예쁘고 근사한지. 웃을 때 눈꼬리에 주름이 잡히는 게 특히 좋았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도. 아직도 톰을 다시 만난 게 꿈만 같다.



46. 어떤 꿈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굴리는 가냘픈 아내. 그녀의 희미한 인상만큼이나 가느다랗고 밝은 모래 색깔 머리카락. 나즐다는 초조해질 때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버릇이 있었다. 입술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그럴 때마다 론은 아내의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신 물렸다. 나즐다는 앞니가 나비 모양이라 잇자국이 독특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어린 아들. 눈은 나즐다를 닮았고, 입매는 론을 빼닮았다. 나즐다가 밤을 지새우며 수 놓은 화려한 자수가 햇볕을 받아 물비늘처럼 반짝반짝한다. 말문도 트이지 않은 아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용을 쓰며 서툰 발걸음을 내디딘다. 언젠가 론이 그렸던 소박한 꿈. 그는 아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말을 타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활을 쏘는 법…….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대신에.

“할 수 있어, 매버릭. 조금만 더 힘을 내 봐.”

론은 입에다 손을 대고 크게 외쳤다. 론의 또 다른 꿈. 실현 가능한 꿈. 저만치 떨어진 곳에 피트가 서 있다. 그는 꼭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보였다. 피트는 톰의 손을 놓고 앞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걸음마를 시도했을 때도 이렇게 힘들었을까. 피트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곱씹으며 한 걸음씩 천천히 론에게 다가갔다. 그를 지켜보는 톰의 얼굴이 묘했다.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얼마 걷지도 못하고 피트는 그만 쓰러졌다. 또다시 통증이 도졌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론과 톰은 거의 동시에 피트에게 달려갔다. 톰이 한발 빨랐다. 피트는 스스로 일어나겠다며 톰이 내민 손을 뿌리쳤다.

“피트, 괜찮아?”

론이 걱정스레 물었다.

“응.”

피트는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의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아픈 모양인지,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찔끔 매달려 있었다.

“안 다쳤어?”
“안 다쳤어.”
“보자.”

론은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아 피트를 세심하게 살폈다.

“괜찮아. 안 다쳤다니까.”

피트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그러자 느슨하게 묶여 있던 두건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감췄던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피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흘러내린 두건만 부여잡고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카락.”

론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피트는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조금만 다듬으면 괜찮겠는데.”

론은 애처로운 눈길로 피트를 응시했다. 피트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흘린 눈물에 잠기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론은 애써 그 눈물을 모른 체했다. 대신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톰, 얘 머리 좀 다듬어줄게. 괜찮나?”
“피트. 괜찮겠어?”
“응?”

피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론이 네 머리카락 다듬어주고 싶대. 괜찮겠어?”
“네가 괜찮다면 나도 좋아.”

피트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웅얼거렸다. “나만 믿어. 톰 머리카락도 내가 잘라주는 거라고.” 론이 씩 웃으며 피트를 번쩍 들어 올렸다. 피트는 쭈뼛거리면서 톰과 론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톰이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그제야 피트는 론의 목에 팔을 감았다. 론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피트는 눈을 감았다. 몸이 흔들거리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때마침 해가 저물고 시작했다. 주홍빛 노을이 스며든 복도를 지나 방에 다다랐다. 론은 피트를 의자에 앉히고, 천을 그의 어깨에 둘렀다. 론의 손에 들린 가위는 날카롭고 유려했다. 원래 양털을 깎는 것인데, 론은 이걸로 아무거나 다 자르고 다녔다. 톰의 머리카락도 이 가위로 잘랐다.

차가운 날이 닿자 피트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오손이 마구잡이로 머리카락을 자르던 것이 떠올랐다. 아팠다. 지금도 그 고통이 생생하다. 톰은 덜덜 떠는 피트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었다. 

론은 가윗날로 피트를 찌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그러면서 론은 피트의 이상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피트는 계속 목과 어깨를 긁었다. 팔을 긁기도 했다. 상처에 새살이 돋는 게 가려워서 그런가 했는데, 맨살도 계속 긁어댔다.

“다 됐다. 거울 봐.”

론은 피트에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슥 털었다.

“못 보겠어.”

피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톰이 거울을 앞에다 갖다 대자 아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거울을 봐야 괜찮은지 알지.” 론이 어르고 달래는 투로 말했다. 피트는 그래도 거울 보는 걸 마다했다.

“그냥 네가 어떤지 말해줘. 괜찮아?”
“응, 인물이 아주 훤해졌다. 잘생겼어, 잘생겼네.”

론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시원스레 말했다.
 
“정말?”
“그럼. 네 남편보다 훨씬 잘생겼다. 이제 어떡하냐, 아이스. 여자들도 얘 쫓아다니겠다. 네가 고생 좀 하겠는데.”

론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피트는 반신반의하며 이번에는 톰에게 물었다.

“정말 론 말대로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응. 예뻐.”

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피트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떼어냈다. 피트는 겨우 마음을 놓고 환하게 웃었다. 톰은 피트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포개었다. 피트는 더듬더듬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아직도 어색했다. 론은 발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가위를 가위집에 집어넣었다. 피트는 또 팔을 긁고 있었다.

 
***


밝은 달이 휘영청 떴다. 밤이슬 맞은 풀잎이 고개를 기울였다. 풀숲에 몸을 숨긴 풀벌레가 찌르르 울었다. 피리의 선율 같은 울음. 세상이 꼭 어항 속에 잠긴 것처럼 축축했다. 그리고 물기 어린 젊은 두 사람의 눈동자. 조용하고 은밀한 밤이었다.

톰은 피트의 다리를 주물렀다. 체온이 다른 곳보다 낮아 서늘했다. 제법 힘을 실어 주물러도 감각이 무딘지 피트는 아픈 줄 몰랐다. 새하얀 종아리에 손자국이 빨갛게 올라온 것을 보고 톰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옷이 찢어졌네.”

물끄러미 톰을 지켜보던 피트가 입을 열었다. 톰이 손을 멈췄다. 피트는 찢어진 톰의 웃옷을 가리켰다. “그러게.” 톰은 무심하게 말했다. 찢어진 줄도 몰랐다. 칼에 베여 찢어진 건가? 톰은 벌어진 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벗어봐. 꿰매줄게.”

피트가 손짓했다.

“됐다. 무리하지 마라.”
“자수처럼 섬세한 건 힘들어도 꿰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

피트는 팔짱을 끼고 제법 강단 있게 말했다.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밥만 축내고 있는데,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순 없다. 뭐라도 거들 수 있는 건 거들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 그런 피트의 마음을 헤아린 톰은 웃옷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반짇고리를 갖다줬다.

오랜만에 바늘을 잡는 거라 솔직히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첫 한 땀을 찔러넣는 것만 어색했지 곧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피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느질을 했다. 실이 구멍을 통과하고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 재밌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톰은 그런 피트의 얼굴을 홀린 것처럼 멍하니 응시했다. 

‘아내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구나.’ 톰은 아버지가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곁에 두고 들여다볼 수 있는 아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의 시선을 의식한 피트가 멈칫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피트가 새침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톰은 헛기침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피트는 영문을 몰라 인상을 찡그렸다. ‘왜 저렇게 바보 같이 쳐다보지?’ 때때로 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아내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톰은 다시금 그렇게 생각하며 피트에게 손을 뻗었다. 이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피트를 끌어안고, 그를 어루만지고, 그의 살내음을 맡고 싶었다.

“어어, 어…….”

갑자기 톰이 자신을 덮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트의 몸이 자연스레 뒤로 넘어갔다.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슴과 배를 누르는 톰의 체중이 묵직했다. 예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 살이 찐 건지, 체격이 더 좋아진 건지 잘 모르겠다. 맨몸을 봐야 알 것 같았다. 이러다 톰이 이고르처럼 될까 봐, 겁이 좀 났다. 알렉세이 정도만 커지면 좋을 텐데. 그 정도가 딱 보기 좋다. 이고르는 너무 비대하다.

톰은 피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 체취를 한껏 빨아들였다. 풋풋한 풀내음. 톰에게 피트는 언제나 초여름일 것이다. 톰의 가슴이 환희로 가득 찼다. 살결의 부드러운 감촉에 눈물이 절로 났다.

“하고 싶으면…… 날 안아도 돼. 너라면 괜찮아.”

피트는 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널 안고 싶지만.”

톰은 바닥을 짚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아니다.”

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다려. 결혼식이 끝나고, 네 베일을 벗겨줄 때까지. 그때는 네가 싫다고 해도 참지 않을 거니까.”
“응…….”

피트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과연 괜찮을까. 전에 톰의 알몸을 얼핏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런 게 내 몸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피트는 슬그머니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윤곽을 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들어갈 것 같지 않다. 배가 터질지도 몰라. 피트는 겁이 나서 그만 딸꾹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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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4.16 02:41
ㅇㅇ
모바일
센세 작품 읽으면서 너무 행복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센세는 신이야 문장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이 이렇게 절절해지다니ㅜㅜㅜㅜㅜ마지막 문장만 봐도 꼴림 커여움 안타까움 슬픔 기쁨이 다 담겨있어 경이로울따름.....하 진짜 센세 나에게 무슨짓을 하신어에요 이제 센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ㅜㅠㅜㅜㅜㅠㅜ
[Code: 0ff7]
2023.04.16 20:03
ㅇㅇ
피트ㅜㅜㅠ더이상몸을 긁지않아도 되는 날까지.. ㅜㅜㅠ그와중에 론 피트를 알아채는 거 부터 애정이 느껴져서 눈물난다ㅜㅠㅜㅜㅜ
[Code: f25f]
2023.04.18 15: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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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ㅠㅠㅠㅠ너무 좋아 소리지르고 싶다 센세 왤케 섬세해
[Code: 3162]
2023.05.25 13: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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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계속 긁는거 안타까워ㅠㅠ 언제 괜찮아질꺼
[Code: 995e]
2023.08.09 15: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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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다듬어주는 론과 피트 손 잡아주는 톰ㅠㅠㅠㅠㅠㅠ
[Code: 7e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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