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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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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53. 눈꽃의 결혼식


아침이 밝았다.

스베틀라나는 곤히 잠든 피트를 흔들어 깨웠다. 피트는 하품하며 쭉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졸음이 쏟아졌다. 스베틀라나는 꾸벅꾸벅 조는 피트를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율리야와 키르케가 나무로 만든 욕조에 더운물을 붓고 있었다. 피트는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답답한 나머지 스베틀라나가 옷을 확 잡아당겼다. 겨울 아침은 몹시 추웠다. 피트는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스베틀라나가 피트의 등을 떠밀었다. 피트는 욕조에 발끝을 살짝 담갔다. 뜨거웠다. 피트가 또 머뭇거리자 스베틀라나는 피트를 번쩍 들어 올려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물이 찰랑거렸다.

“뜨거워요.”

피트가 움찔거리자 스베틀라나는 그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이 정돈 참아야지. 그래야 예뻐지는 거야.” 하고 스베틀라나가 핀잔을 줬다. 피트는 입을 꾹 다물고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상처가 많이 아물어 이제는 물이 닿아도 따갑지 않았다. 키르케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피트의 머리카락을 슥슥 헤집었다. 머리카락이 짧아 예전처럼 손가락에 감기지 않았다. 물 묻은 목덜미가 하얬다.

세 사람이 달라붙어 피트를 씻겼다. 그동안 씻는 걸 도와주는 사람은 톰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의 손길이 낯설었다. 하지만 세 사람 다 아이를 여럿 키운 여자였다. 자식을 씻기는 것처럼 능숙하게 피트를 씻겼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피트도 곧 그 손길에 익숙해졌다. 피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뽀얗게 일어났다.

“자, 다 됐다.”

율리야가 커다란 수건으로 피트의 몸을 둘둘 싸맸다. 세 사람은 피트를 에워싸고 종종걸음으로 천막으로 향했다. 그 사이 화로에 불이 꺼져 천막 안은 싸늘했다. 키르케가 얼른 숯을 가져와 화로에 넣었다. 스베틀라나는 피트의 젖은 몸을 닦아주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하고 말하며 스베틀라나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피트의 몸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스베틀라나의 손이 다리 사이에 닿자 피트가 얼굴을 붉혔다.

“얌전히 있어. 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스베틀라나는 피트의 허벅지 뒤를 철썩 때렸다. 깜짝 놀란 피트가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그녀는 피트의 몸을 다 닦여주고 나서 향유를 발랐다. 어깨에 반질반질 윤이 돌았다. 머리카락은 끝에만 살짝 발랐다. 스베틀라나가 순례길에 사 온 향유였는데, 그 향이 이국적이었다. 이국의 여름 정원. 피트는 눈을 감고 꽃과 나비를 떠올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어서 스베틀라나는 피트가 옷을 입는 것도 거들었다. 새로 만든 속옷 감촉이 보드라웠다. 꼭 풀밭 위에 누운 기분이 들었다. 피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얘 좀 봐, 또 졸잖아. 결혼식인데 긴장도 안 돼?” 스베틀라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아무런 느낌이 없지. 피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속옷 바지에 다리를 쑥 집어넣었다. 사실, 꿈을 꾸는 것 같다.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죽은 어머니의 몸을 껴안고 있거나, 오손이 차린 허름한 신방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벌써 톰의 얼굴이 오래전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일라우와의 결혼식을 준비할 때는 어땠더라. 피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두려웠던 것 같다. 자칫 실수라도 저질러 존과 안나가 욕을 먹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 물론 설레기도 했다.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나. 온전한 가족. 아이의 요람을 흔들며 카자흐 아일라우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며 남몰래 웃었다. 이제는 떠나보낸 꿈.

겨울이라 신부복 안에 옷을 두 벌이나 껴입었는데도 품이 넉넉하게 남았다. 겉옷을 들치고 내복의 허리끈을 조이며 율리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쩜 좋아. 얘 살이 더 빠졌네. 옷이 더 커졌잖아.”
“새신부는 뺨이 통통해야 예쁜데.”

스베틀라나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도 짐짓 심각해 보였다.

“솜이라도 물고 있을까요?”

피트가 눈을 말똥말똥 뜨며 진지하게 물었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장난칠 때 아니야. 심각하다고.” 스베틀라나가 그렇게 말하며 피트에게 꿀밤을 때렸다.

다시 세 사람이 바짝 붙어 피트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피트는 옷소매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간밤에 신부복을 바구니 안에 넣고 그 안에 향을 피운 덕분에 향이 푹 배여 은은하게 향내가 났다. 키르케의 생각이었다. 피트는 뒤꿈치를 세우고 발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쳤다. 새로 만든 신발은 밑창이 단단했다. 가죽이 질겨 튼튼했다. 원한다면 먼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봐. 어떤지 보자.”

스베틀라나가 뒤로 멀찍이 물러나며 말했다. 피트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겹겹이 입은 옷이 물결처럼 퍼졌다. 어깨 장식에 달린 술이 하느작거렸다. 귀걸이가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피트는 꼭 나부끼는 꽃 같았다. 스베틀라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다 갖춰 입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단장할 시간이다.

 
***


동이 터 오르자마자 강가로 나온 톰은 도끼로 얼어붙은 수면 위를 깼다. 연달아 도끼질하니 몸에 열이 올라 추운 줄도 몰랐다. 쪼개진 얼음 조각이 두둥실 떠다녔다. 톰은 옷을 벗고 강물 안으로 들어갔다. 곧 후끈거리는 몸이 차게 식었다. 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씻었다. 특히 손톱 밑을 깨끗하게 씻었다. 찬물에 손가락이 발갛게 부르텄다. 톰은 입김을 불어 손을 녹였다.

씻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이었다. 구름이 잔뜩 낀 걸 보니 아무래도 눈이나 비가 올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톰은 입맛을 다셨다. 뻐근한 눈을 문지르고 물 밖으로 나왔다. 반듯하게 갠 옷 위로 이슬이 내려 축축했다. 어차피 예복으로 갈아입을 예정이기 때문에 톰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톰은 론과 마주쳤다. 그도 막 잠에서 깨어나 몸을 씻으러 가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론의 얼굴이 유난히 번드르르했다. 좋은 날을 앞두고 있으니 멋지게 보여야 한다며 일주일 내내 잘 먹고 잘 잔 덕분이었다. 

론은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는 손님 중에 괜찮은 집안이 있으면 재가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죽은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죽은 사람들의 땅이고, 론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맞이할 내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톰, 좋은 아침이다.”
“그래.”

론과 톰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론은 톰의 코앞에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너 밤새 한숨도 못 잤어? 눈 밑이 퀭한데.”

론이 물었다.

“응…….”

톰은 멋쩍게 대꾸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론의 말대로 톰은 간밤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이불 앞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허전한 빈자리를 더듬으며 밤을 보냈다. 이미 한 해를 꼬박 피트와 같은 잠자리에 들었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신랑과 신부가 어떻게 동침을 할 수 있냐며 스베틀라나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고작 하룻밤 떨어졌을 뿐인데, 백 년 동안 못 본 것 같다. 피트가 그리웠다.

“그렇게 떨려?”

론은 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톰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실없는 그의 얼굴에 론도 덩달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자식. 그렇게 좋아?”
“어, 좋다.”

톰은 선선히 대답하며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부풀어 오른 그의 가슴 가득 열망과 설렘이 들어찼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오늘 아주 정신없이 바쁠 거니까.” 

론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다.” 
“이따 보자.” 

론과 톰은 주먹을 맞대고 인사한 다음 각자 길을 떠났다. 오는 길에 가슴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톰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만 했다. 도끼날을 비스듬히 땅에 대고 숨을 고르는데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닿은 눈송이가 소금처럼 스며들었다. 톰은 도끼를 고쳐잡고 눈을 피해 재빨리 뛰었다.

천막으로 돌아온 톰은 옥사나가 만들어 준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천에 붉은색과 금색 실로 수를 놓은 옷이었다. 예복인 만큼 평소에 입는 옷보다 자수가 화려했다. 경사스러운 날에는 남자도 한껏 멋을 부리는 게 좋다. 생애 단 한 번 입는 옷인데, 손이 적잖이 많이 간 옷이다. 톰은 가볍게 팔을 돌렸다. 옷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이어서 그는 모자를 썼다. 작년에 알렉세이가 사냥한 매의 깃털을 단 모자였다.

“톰, 준비 다 했느냐?”

거울을 꺼내고 얼굴을 살피는데 밖에서 옥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잘 잤다. 네 백모랑 사촌들이 왔다. 나와서 인사해라.”
“누구요?”

톰은 조끼를 단단히 여미며 물었다. 사촌이 한두 명이 아니니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흐토야랑 애들.”

옥사나가 말했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옥사나의 옷차림도 평소보다 화려했다. 좋은 날을 맞이하여 아끼는 팔찌도 꼈다. 남편인 티무르가 생전에 차던 팔찌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오히려 멋스러웠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이고르 백부님네 식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죠?”
“그래. 니콜라이만 간밤에 처자식들 데리고 먼저 도착했다.”
“애가 아직 어린데 괜찮대요? 애가 올해 두 살이던가.”
“그럼, 아주 씩씩하다. 걱정할 거 없어. 오히려 니콜라이를 닮아서 별난 게 흠이지. 새벽부터 일어나서 제 부모를 못살게 굴고 있다.”

옥사나는 쌀쌀하게 웃었다. 이른 아침부터 애들 떠드는 소리에 시달려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녀는 톰의 옷깃이 뒤집힌 것을 발견하고 똑바로 폈다.

“옷깃을 바로 세우고 다녀야지.”
“예, 알겠습니다.”

톰은 쑥스러워했다.

“이런 사소한 건 아내한테 맡기지 마라. 아내 앞에선 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그래야 남편의 위신이 선다. 남자가 몸가짐이 단정하지 못하면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 언제나 자세를 바로 하고,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옥사나가 점잖게 충고했다. 자식들도 일찍이 결혼시키고, 결혼한 손자와 손녀도 여럿인데 늘 처음처럼 새롭게 각별하다. 특히 톰은 가장 아끼는 손자라 그 감회가 남달랐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친모의 손이 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서 언제나 마음이 쓰였다. 

하물며 알렉세이도 정이 많고 살가운 아버지가 아니었으므로 톰의 유년기는 마치 초겨울과 같았다. 부침이 많고 홀로 마음고생도 적잖이 했을 텐데, 이렇게 장성한 것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러니 더 잔소리를 하게 된다.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잡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네 아버지처럼 과묵할 필요는 없고.”
“예.”
“착한 녀석.”

옥사나는 두 팔을 벌렸다. 톰은 조모와 포옹을 나눴다. 눈발이 거세졌다. 어깨 위로 한숨 같은 눈이 쌓였다. 옥사나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


외딴곳에 세운 신방은 고즈넉했다. 떠들썩한 소란과 동떨어져 눈 내리는 소리가 사락사락 깔렸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는 신방에 얌전히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베틀라나는 피트가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했다. 피트는 오전에만 지루하다며 도망치려다가 두 번이나 붙잡혔다. 스베틀라나는 굳센 문지기였다.

“심심해요.”

피트는 방석에 달린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답답한 베일이라도 벗고 싶은데, 신부가 결혼식 날에 손님들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해서 베일도 벗지 못한다. 시야가 캄캄하니 저절로 졸음이 쏟아지는데 잠이 들어도 안 된다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 걸 그랬다.

“조금만 참아.”

율리야가 어르고 달래는 투로 말했다.

“얼마나요?”

피트가 심술궂게 쏘아붙였다.

“이따 사제님이 오실 때까지.”

율리야가 말했다.

“사제님은 언제 오시는데요?”
“기다리면 오신다.”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아. 피트는 술을 죽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자니 뼈가 녹이 스는 기분이라 몸을 들썩거렸더니, 스베틀라나가 “쓰읍.” 하고 입소리를 냈다. 피트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다시 방석의 술을 만지작거렸다.

“피트 가족분들 오셨어요.”

그때, 밖에서 야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면 안 돼!”

스베틀라나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피트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나가려고 바동거리는 피트의 어깨를 힘껏 눌렀다. 스베틀라나는 힘이 장사였다. 피트가 아는 여자 중에 힘이 제일 셌다.

천막 문이 열리고 브래드쇼 가족이 안으로 들어왔다. “피트.” 존이 쉰 음성으로 피트의 이름을 불렀다. 피트는 스베틀라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한 해 고생이 심했는지, 존의 얼굴은 까맣게 탔다. 입술도 바싹 말라 있었다. 안나도 관절염이 심해져서 지팡이를 짚고도 절뚝거렸다.

“아저씨, 아주머니.”

피트는 베일을 걷어 올렸다.

“캐롤, 구스.”

피트는 먹먹한 음성으로 캐롤과 닉을 불렀다. 부부는 못 보는 사이 수척해진 피트의 얼굴을 보고 대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이 붙어서 보기 좋다고 말했는데. “너 괜찮아?” 캐롤은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며 물었다. “난 괜찮아.” 피트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닉은 짧아진 피트의 머리카락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안쓰러운 마음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브래들리, 이리 와.”

이어서 피트는 브래들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여름을 보내는 동안 키가 쑥 자랐다. 먼 길을 오느라 적잖이 고생했을 텐데, 투정도 부리지 않고 의젓하게 인사했다. 피트는 브래들리의 손을 꼭 잡고 브래드쇼 가족에게 톰의 고모들을 소개했다.

“아저씨, 아주머니. 여긴 톰의 고모님들이세요. 스베틀라나 고모님, 율리야 고모님. 고모님, 브래드쇼 아저씨와 아주머니예요. 절 친자식처럼 키워주셨어요.”

네 사람은 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닉과 캐롤도 인사를 나눴다. 율리야는 브래들리가 귀엽다며 아이에게 꿀로 만든 간식을 줬다. 원래 피트에게 주려고 따로 챙긴 간식이었는데, 피트가 입맛이 없다며 먹지 않아서 싸늘하게 식어가던 중이었다. 처음 꿀을 맛본 브래들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혀끝에 감도는 얼얼한 단맛에 브래들리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스베틀라나가 브래드쇼 가족을 위해서 차를 끓였다. 가족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오는 길이 고되진 않으셨어요?” 하고 율리야가 접시에 과자를 담으며 존에게 물었다. “사돈이 보내주신 말이 지칠 줄 모르는 놈이라 편히 왔습니다.” 존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브래드쇼 가족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 꽁꽁 언 손을 녹였다. 브래들리는 율리야에게 과자를 더 달라고 말했다. 과자는 열댓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 겨울의 풍요. 오늘 같은 날은 인심을 넉넉히 써야 하는 법이다.

“이거 받아라, 피트.”

존이 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피트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는 길 내내 품고 왔는지 꾸러미가 따끈따끈했다.

“삶은 달걀이다. 우리 집 닭은 영 시원찮아서 알이 잘아 못쓰겠더라. 오는 길에 바자르에 들러서 샀다.”
“아…….”

피트는 숙연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삶은 달걀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못 사준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 형편이 넉넉하면 원 없이 사줬을 텐데……. 미안하구나, 피트. 네가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게 내가 배불리 먹여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네 아버지한테도 늘 미안했다.”

존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겸연쩍게 말했다. 피트는 늘 또래보다 작았다. 어려서 고생을 해서인지, 오메가라 몸집이 작은 것인지 키가 또래보다 반 뼘은 작았다. 늘 붙어 다니는 닉이 장신이라 나란히 서 있으면 더 작아 보였다. 

존은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형편이 닿는 대로 아낌없이 주었지만, 그래도 늘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남들처럼 융통성 있고 요령을 부릴 줄 알았다면 어린애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아침에 묽은 국만 먹고 푼돈이나마 벌려고 일거리를 찾아 마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피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똑같이 먹었는데 구스는 저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크잖아요. 저 배고픈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못 먹어서 배고픈 적은 없어요. 제가 작은 건 절대 아저씨 탓이 아니에요. 아주머니 탓도 아니고요.”
“……어서 먹어라. 아직 따뜻할 거다.”

피트가 울먹이며 말하자 존은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을 돌렸다. 피트는 훌쩍이며 달걀 껍질을 벗겼다. 손이 자꾸만 떨렸다. “참, 소금. 내 정신 좀 봐, 소금.”하고 말하며 존이 품에서 또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피트는 반질반질한 달걀 끝부분을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

존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피트는 방긋 웃었다. 그것도 잠시, 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피트는 달걀을 입에 잔뜩 욱여넣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엉엉 목놓아 울었다. “울지 말고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존도 덩달아 훌쩍거렸다. 피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달걀을 입에 넣었다. 그의 옆에 앉은 닉이 코를 훌쩍이며 피트가 바로바로 먹을 수 있도록 남은 달걀의 껍질을 전부 깠다. 피트는 그만 목이 메 가슴을 퍽퍽 쳤다. 브래들리가 찻잔을 피트에게 내밀었다. 피트가 계속 울자 브래들리는 자기 옷소매로 피트의 뺨을 문질렀다. 

“고마워.” 

피트는 브래들리의 어깨에 이마를 콩 찧었다. 브래들리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피트는 차를 마신 다음 달걀을 마저 먹었다. 오랜만에 먹은 삶은 달걀은 눈물의 짠맛이었다.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


정오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멋을 잔뜩 부린 사람들의 휘황찬란한 옷차림과 말들이 뛰노는 진동, 그리고 결혼식 동안 손님들이 머물 천막에 매단 깃발이 펄럭거리며 영지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와주셔서 고맙소.”

알렉세이는 처음으로 도착한 손님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였다. 알렉세이가 바자르에 갈 때마다 들르는 대장간의 장인이었다. 일전에 피트의 검을 만들어 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뭘요. 어르신께 늘 신세 지고 있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이건 결혼 선물입니다. 부디 듬직한 손자를 얻으십시오.”

대장장이가 뒤를 가리켰다. 기골이 장대한 백마 한 필이 떡하니 서 있었다. 꿀이 흐르는 것처럼 피부에서 윤이 났다. 갈라진 근육은 잔뜩 성이 나서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기 드문 명마였다. “고맙소.” 알렉세이는 대장장이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가 놓았다.

“어르신! 축하합니다.”
“이야, 이거 대단한데요. 공을 많이 들이셨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근래 이만한 잔치는 없었지.”
“선물은 어디에다 두면 될까요?”

손님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너도나도 가지고 온 선물을 풀어놓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들의 말대로 보기 드문 규모의 잔치였다. 수십, 수백 명의 손님이 허리띠를 풀고 실컷 먹고 마셔도 남을 만큼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이만한 규모의 잔치를 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 이만큼 많은 손님을 초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맥이 넓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초대한 손님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영지가 바자르 한복판처럼 북적거렸다.

“새신랑은 어디 있나?”

늙수그레한 남자가 오자마자 톰을 찾았다. 알렉세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곱씹었다. 그의 얼굴이 눈에 익은 듯, 익지 않은 듯 아리송했다. 이윽고 알렉세이는 남자를 떠올렸다. 일전에 바자르에서 우연히 마주친 노인이었다. 지팡이가 부러져 골목 어귀에서 쩔쩔매는 남자에게 알렉세이가 지팡이 대신 쓰라며 자신의 검을 줬던 적이 있다.

“톰!”

알렉세이가 톰을 불렀다. 앞서 찾아온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있던 톰이 즉시 달려왔다. “이놈이 제 아들입니다.” 알렉세이는 노인에게 톰을 소개했다. “인물이 아주 훤하구먼. 그런데 아버지는 닮지 않았어. 어머니를 닮았나?” 노인이 씩 웃었다. 앞니가 빠져 입매가 우글쭈글했다. 알렉세이는 톰에게 노인을 자리로 안내하라고 일렀다.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들, 친척들, 우연히 스친 사람들, 건너 건너 아는 서먹한 사람들, 이번 기회에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의 물결이 이어져 마치 거대한 바다와 같았다. 이런 경사에는 손님이 많을수록 좋다. 축하의 말을 전하며 덕담을 주고받는 사람이 많을수록 오늘의 주인공인 젊은 부부의 앞날에 복이 더해진다.

손님들이 몰려들며 음식을 장만하는 여자들은 더욱 바빠졌다. 어린아이들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들었지만, 사람들이 접시를 비우는 속도가 더 빨라 턱없이 부족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옥사나는 침착하게 사람들을 지휘했다. 그녀는 노련한 여자였다. 바쁠수록 더욱 기지를 발휘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엔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도 곧 익숙해져 착실하게 자신의 몫을 해냈다.

“할머님, 광대랑 악단은 언제 오기로 했어요? 오늘 안 와요?”

양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며 야나가 옥사나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광대와 악단이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이 많은 손님이 와도 그들은 오지 않으니 퍽 궁금하던 차였다.

“내일 도착할 거다. 먼 곳에서 오는 손님들도 있고, 무엇보다…….”

옥사나는 양고기 위에 소금을 솔솔 뿌리며 말을 이었다.

“신부가 춤을 추고 싶어 해서.”
“아아.”

야나는 알겠다는 듯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사제의 주관하에 예식을 올리기 전까지 신부는 남자 손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벗기기 전까지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가족뿐이었다. 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고 그다음 날부터 신부는 얼굴을 드러내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축하하러 찾아온 손님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피트가 악단이 연주하는 곡에 맞춰 꼭 춤을 추고 싶다고 졸라대서, 옥사나는 일부러 악단과 광대를 내일 오도록 했다. 피트 성격에 남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혼자 신방에 얌전히 틀어박힐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신랑과 초야도 치르지 않은 신부가 망아지처럼 잔치판을 쏘다니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일 모두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

물론 손님들이야 첫날부터 목구멍이 뜨겁도록 술을 마시며 즐기고 싶어 하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다. 이 근방에서 결혼식 피로연은 짧으면 삼일, 길면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알렉세이는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이니만큼, 또 존 브래드쇼의 부탁을 염두에 둔 만큼 결혼식을 성대하게 열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피로연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손님들이 즐길 수 있는 날은 많았다.

한편, 톰은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일찌감치 힘이 빠졌다. 자신의 경사를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이니 건성으로 대할 수도 없어서 일일이 안부를 묻고, 덕담을 주고받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톰은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손자가 보름 전에 유치가 빠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자꾸만 어딘가를 힐끔거렸다. 옆에서 톰을 거들던 론이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이봐, 톰. 정신을 어디 두고 있어. 신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톰은 열없이 웃었다. 머리가 조금 멍했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목도 마르다 못해 목구멍이 갈라진 것처럼 따가웠다. “으응?” 하고 론이 다시 물었다. 톰은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사제가 올 때까지 참아라.”
“그래야지.”

론이 짐짓 점잖을 떨며 말하자 톰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나저나 사제가 너무 늦는데. 오는 길에 혹시 무슨 사고라도 당했으면 어떡하지. 눈이 내려서 길이 미끄럽잖아.”

톰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슬슬 사제가 도착할 때가 됐는데, 소식이 없다. 시야가 흐려져 뭉그러진 사람들 얼굴만 그의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이제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버겁다. 한숨 돌리고 싶었다. 그보다 피트가 보고 싶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뭐라도 좀 먹었을까. 피트가 여전히 잘 먹지 못해서 걱정이 많았다.

“어휴.”

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어휴.”

론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톰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못난 놈.”
“내가 왜?”
“못났다, 못났어.”

론은 거듭 한숨을 쉬었다. 발끈한 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또 손님이 도착해서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


노을이 뉘엿뉘엿 질 무렵, 마침내 사제가 도착했다. 그가 타고 온 당나귀가 더는 못 가겠다며 쭉 뻗었다. 함께 온 청년이 늘어진 당나귀를 질질 끌고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렉세이가 정중하게 사제를 맞이했다. 사제는 명망 있는 사람으로 기개가 남다르고 청빈했다. 그가 기도를 올리면 오늘내일하는 병자도 언제 앓았냐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고 했다. 기도가 신통한데다 경전을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주니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부자들이 많은 재물을 약속하며 초대해도, 사제는 제 뜻에 반하는 일이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사제가 결혼식에 주례를 맡게 된 건 전적으로 이고르 덕분이었다. 이고르는 그와 오랜 술친구였다.

“좋은 날이오. 세상이 이처럼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였으니, 부부의 앞날도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할 것이외다.”

사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신랑이 애가 타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탓에 사제는 목을 축일 틈도 없이 곧바로 신방으로 향했다. 등이 구부정한 사제가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에 톰은 그를 재촉한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술이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톰이 조심스레 물었다.

“됐네. 식이 끝나거든 마시지.”

사제는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말로는 술을 권하면서 몸은 신방이 차려진 곳을 향해 기울어진 톰의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술을 마시겠답시고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신랑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제는 조금도 못마땅하지 않았다. 이고르에게 신랑과 신부의 사연을 이미 들어 그들이 시련 끝에 어렵게 맺어진 사이라는 것을 알았고, 누구보다 오늘을 기다려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로연은 만인과 함께.
결혼식은 서로와 은밀하게.
예식은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촛불을 밝힌 신방에 신랑과 신부, 그들의 부모, 그리고 두 명의 증인이 모였다. 신성한 혼인의 증인은 보통 부모의 지인이나, 오늘은 특별히 신랑과 신부의 지인이 증인으로 섰다. 바로 론과 닉이다.

사제가 가운데 섰다. 좌측에는 톰과 알렉세이, 론이 섰다. 우측에는 피트와 안나, 존, 그리고 닉이 섰다. 사제는 낡은 경전을 펼치고 기도문을 외웠다. 결혼식을 위한 구절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종소리처럼 청아했다. 사제가 기도문을 외는 동안 톰은 피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베일 아래 감춰진 그의 얼굴이 궁금했다. 피트도 자신처럼 설렐까. 톰은 사제의 음성이 마치 뜬구름처럼 느껴졌다. 아스라이 스쳐 지났다.

낭독이 끝났다. 톰과 피트는 사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제는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해줬다. 제자가 두 사람에게 마른 꽃잎과 향이 나는 잎사귀를 뿌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악귀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어서 사제는 맑은 정수를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뿌렸다. 과거의 혼탁함을 정화하는 의미이다. 또, 부부의 앞날이 이처럼 깨끗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사제는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알렉세이와 존이 두 사람을 다시 자리로 데리고 갔다.

“……증인은 오늘의 약속을 기억하시오.”

사제가 그렇게 말하며 밀알이 든 주머니를 열었다. 론과 닉이 앞으로 나와 사제에게 밀알을 받았다. 그들은 약속을 몸에 새긴다는 뜻으로 밀알을 씹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세이와 존이 서로 약속한 물건을 교환했다. 단도였다. 지난 인연을 끊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다시, 톰과 피트가 사제의 앞에 섰다. 사제는 두 사람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조언을 했다.

“부부의 인연이란 쓰이지 않은 책과 같네. 자네들이 뜻하는 대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 슬픔도 기쁨도 다 자네들이 하기 나름이야. 모처럼 태어난 인생, 행복한 이야기만 써 내려가기에도 부족해. 그러니 부디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종이를 아껴 쓰게나.”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사제는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얼싸안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한 쌍의 부부로 거듭났다.

“이만 나가자, 톰.”

알렉세이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톰을 재촉했다. 톰은 발길을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예? 하지만…….”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저어, 피트한테 할 말이…….”

알렉세이가 역정을 내자 톰은 웅얼거렸다.

“곧 저녁이다. 손님을 대접해야지.”

알렉세이가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톰은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채신없이 굴지 말고, 네가 할 일을 해라.”
“어르신 말씀 들어라, 톰. 손님을 기다리게 할 참이야? 널 위해서 온 손님들인데.”

론이 옆에서 거들었다. 톰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결혼식인데, 황금처럼 찬란한 신부를 두고 떠나야만 한다니.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 종일 얼굴을 못 봤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피트, 이따 보자.”

신방을 나서며 톰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응, 다녀와.”

피트는 손을 흔들며 톰을 전송했다. 천막 문이 내려오고, 곧 저벅저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안나는 피트를 침상으로 데리고 가서 앉혔다. “신랑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피트에게 신신당부했다.

 
***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그런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전부 앉을 수 없어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군데군데 흩어져 군락을 이루었다. 길목마다 횃불을 밝혀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주홍빛으로 물든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이 집 며느리가 그렇게 미인이라면서요?”

염소처럼 수염이 듬성듬성 난 남자가 딸꾹질하며 물었다.

“그럼, 그럼. 내 우리 질부만 한 인물을 못 봤소.”

이고르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고르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안 봐도 훤히 알겠습니다. 내일이 정말 기다려지는군요.”
“걔는 인물도 인물인데, 그 새침한 표정이 아주 일품이지. 꼭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니까.”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고르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이고르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남자가 다시 술을 따랐다. 취기가 오른 이고르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시뻘겠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 자리에 주인공인 것처럼 사람들이 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마셨다. 

“여보, 적당히 마셔. 코 골고 자면 쫓아낼 줄 알아.” 

보다 못한 이고르의 아내 알렉산드리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퉁명스레 말했다. “사샤……!” 이고르는 움찔하더니 술잔을 등 뒤로 돌려 술을 몰래 부었다. 이고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가 잠자리에서 자신을 쫓아내는 일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사람들의 부탁으로 알렉세이는 오래간만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쇠붙이처럼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동생의 노래를 감상하며 아내와 술잔을 주고받던 콘스탄틴은 멍하니 불빛만 응시하는 톰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는데, 어딘가 정신이 팔려 술이 넘치는 줄도 몰랐다. “이크.” 술이 넘치는 바람에 봉변을 당한 손님이 젖은 손을 부산스럽게 털었다.

“알료샤! 톰을 그만 보내줘라. 꼴사나워서 더는 못 봐주겠다.”

콘스탄틴이 톰을 가리키며 턱을 까딱거렸다.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겠어요. 오죽하면 저럴까.” 아흐토야가 콘스탄틴의 어깨를 슬며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콘스탄틴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입을 맞췄다. “흥이 다 식었다. 술이나 더 따라줘.” 콘스탄틴이 투덜거리자 아흐토야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술병을 들었다.

알렉세이는 악기의 줄을 튕기던 손을 멈췄다. 톰은 콘스탄틴과 알렉세이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저 한심한 놈.’ 알렉세이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알렉세이는 악기를 내려놓고 톰을 불렀다.

“톰.”
“예, 아버지.”

느닷없는 아버지의 부름에 톰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알렉세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손님은 내가 마저 대접할 테니 너는 그만 가 봐라.”
“예, 감사합니다.”

알렉세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톰은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피트가 기다리고 있는 신방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려다가, 아차 싶어서 도로 걸음을 멈췄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들 드십시오.”

톰은 어정쩡한 자세로 손님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하마터면 무례하게 굴 뻔했다.

“좋은 밤 보내시게!”

손님들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기꺼이 톰을 보내주었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54. 초야


천막 앞에 다다른 톰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숨이 찬 줄도 몰랐다. 도착하고 나니 폐가 찌그러질 정도로 아프단 걸 알았다. 천막 문틈 사이로 음전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톰은 눈을 감고 피트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트의 웃음소리. 아마도 스베틀라나가 우스운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피트의 웃음소리가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여 스산한 바람의 울림이 영롱한 새들의 지저귐처럼 들렸다. 이내 톰은 문에다 대고 작게 헛기침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스베틀라나가 밖으로 나왔다.

“고모님.”
“톰, 벌써 왔어? 아직 자정도 안 됐는데.”

스베틀라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대개 초야는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야 시작되므로, 톰이 자정이 지나서야 올 줄 알았다. 오늘 같은 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잔만 비우겠는가. 술독을 전부 비우고도 부족해서 불에 달군 돌도 삼킬 사람들이었다. 톰은 그 모든 사람을 뿌리치고 온 것이다.

“예.”

톰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말했다.

“그렇게 마음이 급해?”

스베틀라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런 앤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실 그간 왕래가 그리 잦지 않다 보니, 조카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외모는 올케를 닮았는데, 하는 짓은 동생과 판박이라니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아이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다. 사랑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꽤 우스웠다.

“예.”

톰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세상에. 빈말로도 아니라는 말은 안 하네.”

스베틀라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톰의 눈빛이 형형했다. 이제 막 주조된 듯한 청년의 말쑥한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어엿한 사내였다. 쟁취하고, 소유하고, 자신을 아로새기고 싶어 하는.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앞으로 사랑을 나눌 날은 많으니까.” 스베틀라나는 팔에 걸친 겉옷을 챙겨입고 자리를 떴다.

톰은 신방으로 들어섰다. 피트는 침상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침상 옆에 놓인 촛불이 그를 환하게 비췄다. 톰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피트의 옆에 걸터앉았다. 피트는 스르르 허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톰은 숨을 참고 손을 덜덜 떨며 피트의 베일을 걷었다. 피트는 말갛게 웃는 얼굴로 톰에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안녕, 톰.”
“안녕, 피트.”

톰은 이 순간 자신이 애틋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밤색 말의 갈기, 잘 벼린 칼날, 날카로운 화살촉, 매의 샛노란 눈, 한가로운 여름 오후의 그늘, 달콤한 낮잠, 풀벌레 우는 소리…… 그리고 모든 시름을 씻겨 내려주는 시원한 소나기.

‘나의 아내.’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침내 품 안에 들어온 소중한 신부. 톰은 돌연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했다. 피트는 깜짝 놀라 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네가 너무 예뻐서.”

톰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숨이 잘 안 쉬어진다.”

톰은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적잖이 괴로운 얼굴이었다.

“아하하.”

피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톰의 모자를 벗겼다. 모자에 머리카락이 눌려, 꼭 개가 축축하게 핥은 병아리처럼 보였다. 샛노란 솜털이 삐죽삐죽 솟은 멍청한 병아리. ‘역시 금발은 좋아.’ 피트는 더없이 기뻤다. 톰은 쑥스러워하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움찔거리는 입술. 꿀렁거리는 울대뼈. 

‘나 정말 결혼했구나.’ 비로소 피트는 오늘이 결혼식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았다. 꿈이 아니다. 눈앞에 이 단정하고 싱그러운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었다. 사랑이 샘솟았다. 피트는 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입술을 부딪쳤다. 톰이 몸을 내뺄 틈도 주지 않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연달아 다섯 차례.

“그만해. 하지 마라.”
“싫어. 더 할래.”

피트는 얼굴을 붉히며 쭈뼛거리는 톰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만. 더는 못 참겠다.”
“왜 참아? 이제 안 참아도 되잖아.”
“아.”

톰이 우뚝 멈추더니 입을 벌렸다.

“멍청이.”

피트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남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톰이 쓴웃음을 지었다.

“버릇없이 굴었으니까 혼내줘.”

피트가 스스럼없이 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각오 단단히 해라. 울어도 멈추지 않을 거다.”

톰은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며 피트의 옷깃으로 손을 가져갔다. 크고 단단한 손. 굳은살투성이. 자잘한 상처투성이. 무수히 많은 피를 묻힌 손. 자신만만하던 피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먼저 약을 올린 건 자신인데, 막상 때가 되자 슬그머니 겁이 났다. 

톰은 피트가 어깨에 두른 장식을 끌렀다. 사르륵 옷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어쩐지 낯뜨거웠다. 이어서 톰은 피트의 조끼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툭, 끊어지더니 좌우로 벌어졌다. 피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직 맨살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떨렸다. 나부끼는 촛불의 춤사위. 벽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불…… 끄면 안 돼? 부끄러워.”

이미 서로 맨몸을 보았는데, 새삼스럽다. 피트는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면을 혀끝으로 쓸었다. 목이 조금 말랐다.

“널 온전히 보고 싶다.”

톰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알았어.”

피트는 간신히 대답했다. 톰은 손등으로 피트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그는 여전히 손을 떨고 있었다. 피트는 톰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전부 괜찮아졌다. 톰이라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해도 괜찮았다. 톰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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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4.29 11: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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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너무 너무 떨리고 설레고 간질간질하고 마음이 벅차올라 드디어 이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구나 모든 우여곡절을 겪고도 여전히 서로의 존재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떨고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이 풋풋하고 아름다워 숨도 못쉬고 몰입해서 읽었어 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9963]
2023.04.29 11: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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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래드쇼가 사 온 달걀을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가장 맛있게 먹는 피트 존은 정말 피트를 자기 자식으로 아끼고 애틋하게 여기는 게 보여서 같이 울었다 톰과 피트의 초야가 이제 시작됐네 오늘따라 어나더가 더 애타게 기다려지는게 나 뿐만은 아닐거야 센세가 어나더를 줄때까지 여기서 숨 참고 기다릴래
[Code: 9963]
2023.04.29 15:09
ㅇㅇ
(방금 죽은 자의 온기)
[Code: da0f]
2023.04.30 03: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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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아아아아 이 떨림과 분위기...이 습도와 온도...진짜 최고다...
[Code: b085]
2023.05.06 05: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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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고 인사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센세.... 얘네가 이제 온전히 서로의 것 이라는게 존나 좋아서... 눈물이... 씨바 얘들아 평행 행복해야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01df]
2023.05.25 15: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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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
“안녕, 톰.”
“안녕, 피트.”
이 인사가 뭐라고 내 심장이 이리 뛰어ㅠㅠ센세는 정말 프로심작폭행러야ㅠㅠㅠㅠㅠ내 심장 책임져
[Code: 6fd9]
2023.08.09 16: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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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언 아이들ㅠㅠㅠㅠ 매브 아직 안좋은 기억이 남아있지만 톰과의 기억으로 덧그리면서 행복햐지자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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