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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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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문신사를 기다리는 내내 피트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했다. 그는 낙인이 찍힌 손목의 소매를 걷었다가 다시 내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동안 애써 모른 체하던 흉터. 짙은 분홍색으로 부풀어 오른 흉터는 그의 또 다른 이름처럼 사는 내내 함께할 것이다. 그날의 악몽 역시 흉터와 마찬가지로 영구히 가슴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의 행복을 갉아먹으면서.

피트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오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들쩍지근한 숨결과 비린내 나는 체취, 뜨거운 체온과 제 몸을 우악스럽게 쥐던 악력도 떠올랐다. 손목의 낙인이 간지러웠다. 피트는 흉터를 긁기 시작했다. 가만히 피트를 지켜보던 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피트의 행동을 제지했다.

“피트, 하지 마라.”
“뭘?”

피트는 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몸을 긁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톰이 피트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

손톱 밑에 핏방울이 맺힌 것을 보고 피트는 당황했다. 벗겨진 살갗이 따가웠다. 톰에게 흉한 꼴을 보여줘서 부끄러웠다.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내가 또 왜 이러지.”
“마실 걸 좀 줄까?”
“응.”

톰은 꿀과 향신료를 넣어 양젖을 끓였다. 향신료의 맵싸한 향기와 달콤한 꿀이 피트의 울적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따뜻한 것을 마시니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도 풀렸다. 하지만 그래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피트는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손목을 잘라내고 싶었다.

“흉터…… 보기 싫지? 아예 지져버릴까? 그럼 괜찮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냥 다친 줄 알 거야. 난 좀 칠칠찮으니까, 까불다가 다쳐서 흉터 몇 개 있는 건 다들 그러려니 생각할지도 몰라.”

피트는 열없이 웃으며 말했다. 톰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네 몸에 상처를 덧내지 마라.”
“왜?”

피트는 다시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톰은 피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매브?”
“내가 네 아내라서?”

피트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며 뇌까렸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니까? 난 가축이니까? 양이나 염소, 말, 그런 가축.”
“피트.”
“그래, 재산에 흠집이 나면 안 되지…… 그럼 가치가 떨어지니까. 근데 난 벌써 흠집이 생겼잖아. 고칠 수도 없잖아. 지울 수도 없고. 다시 내다 팔 수도 없어. 고칠 수도 없는 장신구를 누가 사겠어. 병이 든 가축을 누가 사겠어. 잡아서 고기로 먹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넌 내 아내다, 매버릭. 가축이나 장신구가 아니라 나랑 평생 함께할 반려자야. 다른 사내들은 아내를 재산으로 여길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그러니 자신을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라.”
“하지만 너도 날 납치했잖아. 아일라우한테서 빼앗았잖아. 내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트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반박했다. 그의 말에 톰은 충격을 받았다.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정당화할 수도 없었다. 시작이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또, 약탈혼을 당하고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했던 피트의 모습을 흡족하게 여겼다는 사실도.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역시 자신의 오만이었다.

“피트, 나는…….”

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자신감 가득한 준수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겁에 질린 초라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톰이 마른침을 삼키며 애먼 주먹만 쥐락펴락하자 피트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피트는 모든 게 싫고 부끄러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너 상처 주려고 꺼낸 말 아니야. 내가 실수했어. 지난 일로 너 원망 안 해. 이제는 나한테 잘해주잖아. 넌 좋은 남편이야. 다른 남자들처럼 아내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고, 나한테 정말 잘해줘. 내가 복 받았지.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이런 말이나 하고…… 정말 미안해.”

피트는 두서없이 말했다. 톰은 간신히 한숨을 삼키며 가늘게 떨리고 있는 피트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나야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넌 나에게 행복을 안겨주었고, 사랑도 줬다. 내일 아침을 기대하게 해줬어. 우리 첫 만남이 네게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안다.”
“…….”
“내가 저지른 잘못을 부정하지 않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 평생 네게 보상해주겠다.”
“그런 거 바라는 게 아니야.”

피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자흐 아일라우가 죽은 게 슬프고, 그 사람은 죽었는데 난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미안하고, 그 마을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모르겠어. 마음이 복잡해. 어쩌면 내가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싶고.”

피트의 얼굴이 울음을 참느라 새빨개졌다.

“아무튼 널 원망하진 않아. 구스 다리도 다 나았고, 예물 덕분에 아저씨랑 아주머니도 살림이 폈으니 앞으로 지내는데 불편하지 않으실 거고.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너한테 화가 많이 났고 네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때만 하더라도 너한테 복수할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텼고, 솔직히 좀 재밌었거든. 날 이렇게 진지하게 상대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진심이구나 싶었어.”
“…….”
“아마도 카자흐 아일라우랑 살았다면 여러모로 달랐겠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너처럼 날 진심으로 아껴주진 않았을 거야. 그 어떤 사람도 너처럼은…….”

피트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좀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피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모르겠어. 그냥 괴로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이 나. 괜찮다가도 불쑥 생각이 나. 내 손목을 똑바로 못 보겠어.”

톰이 피트를 끌어안았다.

“숨을 못 쉬겠어.”

피트는 괴로워했다. 무성한 슬픔 속에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울음이 마모되어 한숨이 될 때까지.

 
***


늦은 오후 문신사가 도착했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도 따스한 갈색인 여자였다. 입술 옆에 큼지막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고 입가에도 희미한 주름이 보였지만, 눈망울은 소녀처럼 천진했다. 여자는 언제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철을 보내고 있었다.

문신사는 양손이 무겁도록 짐을 바리바리 들고 왔다. 나귀의 등이 휘어질 정도였다. 톰이 문신사의 짐을 내려 그녀가 머물 천막으로 옮겼다. 몸이 홀가분해진 나귀가 콧김을 뿜었다. 문신사는 사흘 동안 머물기로 했다. 오늘은 먼저 피트의 손목에 문신을 새기기로 했다.

“훤칠한 젊은이가 됐네. 애들은 정말 빨리 자란다니까.”

문신사는 훌쩍 자란 톰을 보고 감탄했다. 처음에 그녀는 톰을 알아보지 못했다. 뼈마디가 무르고 통통한 갓난아이 손목에 문신을 새긴 것이 벌써 20년 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어 오래전에 만났던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만 믿어요.”

톰의 말에 문신사는 가슴을 쭉 폈다. “차를 내올게요. 우선 목부터 축이세요.” 피트가 말했다. “아아, 고마워요.” 세 사람은 문신사의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혼부부의 신방은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게 아니라는 문신사의 주장 때문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서 문신사는 피트의 소매를 걷고, 손목에 문신을 새길 자리를 눈으로 가늠했다. 떡하니 새겨진 시뻘건 낙인을 보고 그녀는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가엾게도. 몹쓸 놈을 만났구나.”

문신사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하고는 혀를 끌끌 찼다. 피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멋쩍게 웃었다.

“나만 믿어요. 예쁘게 덮어줄게.”

문신사는 피트의 손목을 문질렀다.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별의별 사연을 다 만나게 된다.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문신사는 그 사람들의 슬픔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덮어주고, 새로운 희망을 새겨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붉은색 염료를 머금은 바늘이 살갗을 콕콕 찔렀다.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간지러웠다. 피트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자꾸 몸을 비틀어서 톰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등 뒤에서 팔로 껴안아 꼭 붙잡았다. 카잔스키 가문의 문양은 선이 날렵하며 호방했다. 집중한 문신사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람 좋아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꼭 다른 사람처럼 매서웠다.

이제 난 정말 이 집안사람이 되는 거구나. 점차 형태를 갖춰나가는 문신을 보고 있노라니, 피트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는 눈을 감고 뿌리를 내리는 상수리나무를 상상했다. 땅 아래 뻗어나가는 시원스러운 뿌리. 혈통, 가문, 역사. 거대한 해일 같은 단어들.

마냥 기뻐질 줄 알았는데. 피트는 울적해졌다. 가슴이 콱 옥죄였다. 카잔스키 가문의 문양을 완성한 문신사는 이제 낙인 위를 연인과 가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덮기 시작했다. 피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닉의 넓은 등과 존의 애처로운 어깨가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에서 정다운 브래드쇼 가족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대신에 타타흐 부족 사람들의 열띤 얼굴이 선명해졌다. 피트는 그제야 자신이 침울한 까닭을 알았다.

피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톰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서 이 막막한 부담감을 짊어지고 있었던 걸까. 그는 고개를 들어 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괜한 상념으로 톰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방긋 웃었다. 피트는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톰은 피트의 우울과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


밤이 이슥해졌다. 횃대 위에 앉은 새끼 매의 샛노란 눈이 빛났다. 콘스탄틴이 피트에게 결혼 선물로 준 매였다. 아직 어려서 생김새가 어설펐고 깃털도 실오라기 같았다. 하지만 몸집이 무척 커서 다 자라면 멋진 매가 될 것이 분명했다. 콘스탄틴 대신에 톰이 피트에게 매사냥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을 기다리며 피트는 매를 자식처럼 돌봤다. 밤이면 새장을 천막 안으로 가지고 와서 함께 잤다.

매에게 먹이를 주고 피트는 침상 바로 옆에 놓인 촛불 하나만을 남겨두고 방안에 불을 전부 껐다. 톰이 이불을 들쳐 피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피트가 안으로 쏙 들어오자 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피트의 위에 올라탔다. 

피트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이후로 톰은 아이를 만드는 데 꽤 열을 올렸다. 밤마다 피트의 몸에 자신의 열망을 전부 쏟아냈고, 틈만 나면 피트와 얽혀 자신의 사랑을 속삭였다. 그들은 아이를 가진다는 숭고한 의미 외에도 서로를 내밀하게 알아가는 이 행위에 크나큰 즐거움을 느꼈고, 행위에 열중할 때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톰은 오늘도 어김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피트의 옷을 벗겼다. 지난밤의 흔적이 남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피트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평소와 어딘가 달랐다. 쾌감으로 떨리는 것이 아닌 두려움과 불쾌함으로 인한 떨림. 톰은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피트, 왜 그래?”
“저기…… 오늘은 그거 안 하고 그냥 자면 안 돼?”

톰이 자상한 어조로 묻자 피트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네가 싫으면 억지로 할 필요 없다.”

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피트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을 피하면서. 톰은 피트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색이 어두웠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눈동자도 반짝이지 않았다. 

톰은 피트의 옷을 추슬러주고 그의 옆에 누웠다. 다행히 마음이 식어버린 건 아닌지, 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톰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래도 톰은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피트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와 같았다. 그의 슬픔도, 우울도, 불안도, 톰은 전부 헤아릴 수 없었다. 피트가 우울해하는 까닭이라도 속 시원히 알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피트 본인조차 자신이 왜 우울해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매브, 어디 불편해?”
“불편한 데는 없어. 그냥 하고 싶지 않아.”
“문신 새긴 데가 아프지는 않고?”
“응. 좀 화끈거리긴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톰은 피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부부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편이 아내를 원하면 아내는 기꺼이 남편을 받아들이며 그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 적어도 피트가 지금껏 배워온 대로라면 그랬다. 안나는 유달리 고집이 센 피트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를 존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지금 자신은 안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마땅한 의무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남편인 톰을 거부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혀 지진이 일어나고 벼락이라도 내리칠까 덜컥 겁이 났다. 

아니, 천재지변은 차라리 나았다. 톰의 기분이 상하는 게 더 걱정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거부하고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인데. 거절과 배척에 익숙한 피트도 매번 배척을 당할 때마다 처음처럼 힘들었으므로,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근데 혹시 네가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줄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돼? 나는 잘 몰라. 네가 가르쳐준 것만 알아.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 말에 톰은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요동치게 했던 피트의 본래 천진함을 완전히 되찾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니다, 괜찮다.”
“그래도…….”
“네 몸을 알고, 우리 서로 더 가까워지기 전에도 나는 널 사랑했다. 네가 힘든 일을 겪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도 널 향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너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 네 타고난 천성을 바꾸려고 애쓰지 마라. 세상이 너를 위해서 변해야 한다.”
“…….”
“하지만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잖아. 어른들이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어. 손이 귀하다고…….”
“우리가 서로 마음이 통해 얻은 아이여야만 의미가 있고 귀하다. 우리 아이잖아, 매버릭.”

자신을 응시하는 톰의 눈빛이 따스해서 피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난 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깊은 밤엔 괜한 생각이 들지. 곱씹을수록 더 괴로워지기만 한다. 이만 자자. 자고 일어나면 지금 네 걱정도 우스운 일이 될 거다.”
“정말 괜찮아? 이대로 그냥 자도?”
“그럼.”

톰은 자꾸만 애정과 신뢰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피트의 코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피트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지만, 온종일 긴장해서 몹시 지쳤으므로 톰의 말대로 이만 잠을 청하기로 했다. 톰은 피트가 잠들 때까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다. 피트는 나지막한 톰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은 평온한 밤이었다.



60. 열병


양들이 휩쓸고 간 초지에 시커먼 흙이 듬성듬성 솟아났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취한 덕분에 예년이라면 충분했을 초지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봄까지 버틸 수 없었다.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아니면 초지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축을 남기고 전부 팔아야 했다.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톰이 책임지고 완수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가 결혼식을 올리고 어엿한 어른으로 인정받으면서 사람들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더 커졌다. 사람은 누구나 제자리에 머무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법이다. 부족 사람들은 톰이 새로운 활기를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황금 같은 아내가 안겨다 준 행복을 만끽할 틈도 없었다. 그는 안팎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전쟁의 상흔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무는 법이지만, 사람의 손으로 봉합해야만 하는 상처도 있다. 점령한 땅을 친척들과 전쟁에 함께 나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는데, 얼마 전에 게 중 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호색한으로 악명이 자자한 아슈케크란 사내가 제르메갈 부족 여자 네 명을 한꺼번에 첩으로 들였다. 아슈케크는 성미가 포악하고 야만적이어서 새로 들인 아내들을 아껴주지 않았다. 가장 나이가 어린 첩이 대들었다는 이유로 걷어차서 죽여버렸다. 그 일로 투항한 제르메갈 부족 남자들이 앙심을 품고 밤중에 급습하여 그의 목을 베버렸다. 그리고 알렉세이에게 자신들은 이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며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슈케크가 죽고 여자들은 다시 자신의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죽은 첩은 양지바른 땅에 묻어주고 장례도 제대로 치러주었다. 아슈케크가 받은 땅은 도로 빼앗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슈케크의 목을 벤 남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다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고, 톰이 자신을 증명할 발판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힘에 굴복하여 카잔스키 가문에 무릎을 꿇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다름 아닌 피트의 문제였다. 문신을 새긴 이후로 피트는 부쩍 우울해졌다. 정신이 어디 팔렸는지 자주 넋을 놓기도 했다. 자신이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닐까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좀처럼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혼탁했다.

“신혼 벌써 끝났어? 한창 좋을 때인데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한참 말없이 먼 곳만 응시하는 톰을 의아하게 여긴 론이 불쑥 물었다. 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애써 의연하게 대답했다.

“난 잘 지내고 있다. 아내도. 우린 잘 지내고 있어.”
“죽을상 하고서는 잘 지내긴 무슨. 어디 속 시원하게 말해 봐. 부부 사이 문제라면 그래도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 않겠어?”

론이 거드름을 피웠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피트의 상처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모양이다.”

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직면하게 되면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까 고민하지만, 마음은 괴로워. 일이 생각대로 풀린다면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도 않을 텐데.”
“그 일 때문이야? 아직도 괴로워해?”

론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도 지난 일을 언급하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사랑하는 게 이렇게 괴롭고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괴로운 건…….”

톰은 갑작스레 머리가 어지러워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일순 시야가 새카맣게 뒤덮이더니 허공을 밟는 것처럼 몸이 붕 떴다. 놀란 론이 톰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톰은 손을 내저었다. 론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뭐야, 열이 높잖아.”

예상대로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눈이 흐리멍덩한 게 일전에 톰이 크게 아팠을 때 모습과 비슷해서 병이 났나 싶었다. 톰은 비틀거리며 론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호흡이 가빴다. 정신이 혼미한지 재차 눈을 깜빡였다.

“난 괜찮다.”
“우기지 마라, 넌 아프다. 이마가 펄펄 끓잖아. 돌아가서 쉬자.”

론이 톰을 나무랐다. 톰은 어지간해서는 아파도 내색하지 않았다. 나약한 모습을 들키면 무리에서 내쫓길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힘을 잃으면 왕좌에서 물러나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우두머리의 서글픈 숙명이다.

“아직 양들이 풀을 덜 뜯었다.”
“아이스.”

론은 허리에 손을 짚고 턱을 까딱였다. 그는 곧 쓰러질 것처럼 열이 펄펄 끓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톰이 답답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몸으로 머리 터지라 고민해봤자 당장에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
“네가 병이 나서 쓰러지면 피트는 어쩌고. 아직 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사람도 많아. 네가 무너지면 피트를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은 일단 몸을 추스르고 다시 정비할 때다.”
“……알았다.”

론의 설득은 일리가 있었다. 톰은 그의 부축을 받아 말을 묶어놓은 곳으로 향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속이 메스껍기도 했다. 방벽이 무너지고 적이 쏟아지는 것처럼 통증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간신히 구역질을 참으며 톰은 말 위에 올랐다.

 
***


“왜 벌써 돌아와? 양들이 풀을 다 뜯었어?”

예고에 없던 톰과 론의 이른 방문에 피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 밖은 훤한 대낮이었다. 해가 저물 때쯤이야 양들이 배를 든든히 채우리라 생각했는데, 창창한 햇살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얼떨떨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피트는 덜컥 겁이 났다. 우연과 사고. 피트가 몸서리치도록 두려워하는 것이다.

“톰이 몸이 좀 안 좋아서 데리고 왔다.”
“아파?”

론의 말에 피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디 아파? 얼마나? 응?”

피트는 바느질감을 내동댕이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톰은 피트가 병에 걸리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병으로 가족을 전부 잃고 고아가 되지 않았던가. 피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열이 좀 있는 것뿐이다. 괜히 걱정할 것 없……”
“톰!”

톰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자 피트는 깜짝 놀라서 얼른 그를 부축했다. “바샤 영감을 데리고 올게.” 론이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뛰쳐나갔다. 피트는 침상에 이부자리를 펼치고 톰을 눕혔다. 톰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그는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피트는 조심스럽게 톰의 머리 아래에 베개를 끼웠다. 그리고 손을 살짝 갖다 대니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톰은 헉헉거리며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피트, 피트.” 하고 피트를 찾았다. 피트는 톰의 왼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많이 아프지? 론이 바샤 영감 데리러 갔어. 조금만 참아.”
“안 된다.”

톰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안 돼?”
“난…… 말에서 떨어지면 안 돼. 아파선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아프니까 헛소리를 다 하고.”

피트는 고열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톰이 안쓰러웠다. 피트는 조심스럽게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톰의 뜨거운 이마를 자신의 손으로 식혔다. 피트의 손이 차가운 덕분에 톰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피트…….”
“응,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여보.”
“응, 여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피트의 잔잔한 목소리.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나 가냘프고 위태롭다. 그 아슬아슬함이 톰에게 애틋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피트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 그만 쉬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톰은 눈을 감았다.

 
***


톰은 꿈을 꿨다. 오래전 꿈이었다. 그가 일곱 살이던 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경계선. 처음으로 병이 나서 앓아누웠던 날. 그가 기억하는 것에 따르자면. 그 이전은 흐릿해서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천막 안에 촛불 하나만이 가련하게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 톰은 눈을 가물가물 뜨고 옥사나의 등을 응시했다. 옥사나는 미지근하게 식은 수건을 찬물이 든 대야에 담가 식히고 있었다. 곧 옥사나는 다시 차가워진 수건을 톰의 이마에 올렸다. 톰은 가쁘게 숨을 쉬며 물었다.

—할머니, 아버지는요?
—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기다리지 말고 자려무나.
—언제 오세요?
—알료샤는 바쁜 사람이다.
—제가 아픈 거…… 아버지도 아세요?
—알고 있다.

옥사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톰은 더는 보채지 못했다. 옥사나는 톰의 어깨를 다독였다. 평소에는 정답게 들리던 옥사나의 자장가가 오늘은 어쩐지 차갑게 들렸다. 톰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온몸이 쑤셔서 좀처럼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가 자꾸만 몸을 뒤틀며 앓는 소리를 내자 옥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약병을 가지고 왔다. 희멀건 진통제가 담긴 약병이었다. 약을 먹자 머릿속이 몽롱해지면서 감각이 무뎌졌다. 톰은 서서히 의식이 멀어졌다. 옥사나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무렵에 톰은 다시 열이 올라 잠에서 깼다. 목이 몹시 말랐다. 옥사나는 자리에 없었다. 톰은 입을 뻐끔거리며 옥사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소리를 내려고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지려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톰은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톰이 종일 널 기다렸다.
—차도가 있습니까?
—아직.

알렉세이와 옥사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께 인사드려야 하는데…….’ 톰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했다. 이불을 부여잡고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돌림병입니까?
—바샤 말로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구나.
—다시 보게 하십시오. 돌림병이라면 톰은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요. 지난여름에 말을 풀었던 곳 있잖습니까. 거기가 적당할 겁니다.
—꼭 그래야겠어? 거긴 너무 외진 곳이다. 늑대 무리도 가깝고.
—다른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면 안 됩니다. 일단 병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으니, 돌림병이라면 톰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알렉세이의 비정한 말에 톰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이불이 축축하게 젖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알렉세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으므로. 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지. 톰은 웃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뭘.

—……알았다.

옥사나가 말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가서 얼굴이라도 들여다보는 게 어떻겠니. 톰은 자기가 죽을병에 걸린 줄 안다.
—제가 가서 손을 잡아준다고 병이 낫는다면 진작 그랬겠지요.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병자를 돌보는 건 바샤의 몫이지요.

알렉세이가 차갑게 일갈했다.

—알료샤, 톰은 아직 어린애다. 톰을 강하게 키우고자 하는 네 뜻은 이해한다만, 이럴 때는 다정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주려무나.
—어머니, 그래서 타마라가 살았습니까?

알렉세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죽어가는 타마라에게 나를 떠나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제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타마라를 살려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타마라는 죽고, 저와 톰은 이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신은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
—어머니,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입니다. 톰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건 그 애의 명이 거기까지라는 뜻입니다. 타마라가 그랬던 것처럼요.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톰은 더는 어떤 말도 듣지 않기로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다시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얼른 병을 떨쳐내고 일어서야 한다.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 한다. 톰은 그렇게 되뇌었다. 돌림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내쳐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버지의 판단은 현명하고,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병이 드는 것이다. 여름에 벌어졌던 전투로 한창때의 젊은이들 여럿이 죽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귀한 자산이다. 단 한 사람도 잃을 순 없다.

다시 눈을 뜨니 정오 무렵이었다. 톰의 열은 아직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수건을 갈아주는 옥사나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했다. 

조금 전에 다녀간 바샤의 말로는 애들은 이렇게 크게 앓고 나면 부쩍 몸이 자라기도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당분간 지켜보자고 했다. 톰은 타고나길 건강하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금방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옥사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전, 어린 자식을 두 명이나 먼저 떠나보냈다.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들이었다.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손 쓸 틈도 없이 죽어버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식 잃은 부모는 어디에나 있었다.

톰이 죽으면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진다. 알렉세이는 타마라를 잊지 못했다. 재혼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주변에서 괜찮은 여자가 있다며 아무리 권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자식은 톰 하나뿐인데, 그런 톰이 죽는다면……. 후계자 자리를 두고 형제가 대립하며 피로 땅을 적셨던 게 불과 엊그제 일이다. 옥사나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실까요?
—뭐?

갑작스러운 톰의 말에 옥사나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저를 미워하시는 걸까요?
—알료샤는 널 미워하지 않는다.
—그럼 절 사랑하긴 하실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옥사나는 명료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막연한 희망에 목을 매며 살기보다는 일찌감치 현실을 깨닫고 홀로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톰이 장차 부족의 수장이 될 아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버지는 제가 죽고 어머니가 살길 바라셨겠죠?
—못난 소리 하지 마라, 톰.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니, 오늘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옥사나는 톰을 나무랐다. 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옥사나는 한숨을 삼키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톰, 너는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다. 넌 알료샤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장차 알료샤의 뒤를 이을 후계자야. 모두가 너를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언제나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 우두머리가 나약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덩달아 흔들린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쳐도 넌 도망쳐선 안 돼. 널 의지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기억하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톰은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괜한 말로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할머니. 얼른 나을게요.
—착한 녀석, 그래야지. 그래야 내 손자지. 넌 의젓한 아이다, 톰. 나는 네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

옥사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톰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맑았고, 결연한 의지로 빛났다. 연약한 희망을 버리니 창창한 앞날이 보였다. 험준한 절벽에 휩싸인 가시밭길. 후계자로 태어난 자신의 의무. 적지에 꽂힌 깃발, 휘날리는 명예, 가장 높고 고독한 권좌.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 자리에 선 남자에게 사랑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않을 것이다. 톰은 자신에게 맹세했다.

톰은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그동안 알렉세이는 단 한 번도 어린 아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톰이 병마를 떨쳐내고 다시 만개한 햇살 아래 섰을 때, 알렉세이는 이제 양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에게 단검 한 자루를 쥐여줬다. 

겁먹은 새끼 양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톰은 호승심이 발동했다. 아버지의 애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인정받아야 했다. 자신은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이며, 장차 부족을 이끌어갈 우두머리가 될 남자라는 것을. 자질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고, 모두가 자신을 인정해야만 했다.

양의 애처로운 비명.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붉은 피. 톰이 처음으로 경험한 죽음. 흥분과 두려움에 휩싸여 손을 덜덜 떠는 톰에게 알렉세이는 처음으로 잘 해냈다고 칭찬했다. 그 고양감을 톰은 가슴 속에 아로새겼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뒤로 톰은 세 차례 더 앓아누웠다. 두 번은 병이 나서였고, 한번은 말에서 떨어져서였다. 열다섯 살. 목소리가 굵어지고 키가 훌쩍 자랐던 어느 봄날의 일이다. 알렉세이는 그때도 톰에게 자상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일찌감치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접었으므로 톰은 크게 연연하지 않았으나, 말에서 떨어졌던 날 알렉세이가 자신에게 퍼부은 비난은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한심한 놈. 말에서 떨어져?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머리부터 떨어져 의식을 잃었던 아들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알렉세이는 경멸의 눈초리를 아끼지 않았다. 전사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은 오직 죽는 순간뿐이다. 전사라면 적에게 등을 보여선 안 되며, 말에서 떨어져서도 안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달아나는 것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수치스러웠다. 패배자. 그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알렉세이의 말대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다.

—내 체면도 땅에 떨어졌다.

알렉세이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차분히 말했다.

—실망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두 번 다신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두고 볼 일이지. 또다시 말에서 떨어진다면 넌 내 자식이 아니다.
—예.

알렉세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톰은 오늘의 수모를 만회할 기회를 노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언젠가 저 남자의 안장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세상을 호령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바로 자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늙고 힘이 빠져 초라한 몰골로 말에서 내려온 아버지에게 관용을 베풀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닫고, 자신이 틀렸음을 알게 할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톰이 세운 원대한 계획에 사랑은 없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친모처럼 아이를 낳다 허무하게 죽어버리지 않도록 건강한 아내, 자신에게 순종하되 굴종하지는 않는 당차고 씩씩한 아내, 한 치의 모자람도 흠도 없는 고결하고 명예로운 아내. 수장의 반려자로 어울리는 그런 여자를 곁에 두고 존중하며 아껴 줄 생각뿐이었다. 애틋한 사랑에 빠져 감정에 허우적거리기에 그가 헤쳐나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험했고, 올라야 할 산은 가팔랐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바자르의 포도 넝쿨 아래, 톰은 운명적인 녹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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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5.25 16:40
ㅇㅇ
모바일
톰 어린시절 너무 안타깝다.. 안아주고 싶어 안쓰러워ㅠㅠ
[Code: e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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