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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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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56. 피로연


해가 저물었다. 피로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연회장 한가운데 마련된 자리에서 광대들이 묘기를 선보였다. 광대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아 기운이 넘쳤다. 약속한 보수가 여느 잔치보다 더 후하기도 했으니 의욕도 넘쳤다. 

시작은 줄타기였다. 나무 기둥에 이어진 줄을 타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광대가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뛰었다. 그는 손에 든 부채를 펄럭거리며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아이들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서 악공이 묘기를 선보이기 전 호흡을 맞춘 대로 북을 치면서 흥을 돋웠다. 실컷 공중에서 뛰논 광대가 땅으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이 추운 날씨에도 웃옷을 벗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등장했다. 근육이 바위처럼 단단한 사내였다. 험상궂은 생김새와 달리 그는 수다스럽고 붙임성이 좋은 남자였다.

“카잔스키 어르신, 장수하십시오! 이 불주먹 외르바시가 복을 기원합니다!”

남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익살스러운 생김새의 남자가 그의 두 손에 독한 술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주먹에 붙은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오르자 사람들이 경탄했다.

외르바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입으로 불을 뿜는 묘기를 선보였다. 외르바시는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사람들의 탄성이 끊이지 않자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광대가 등장했다. 양손에 나뭇가지 모양의 독특한 장식을 든 여자였다. 그녀는 장식의 방울에 불을 붙이고 허공에 불꽃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캄캄한 밤에 수 놓인 불꽃이 사람들의 가슴에 기묘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푹 빠진 사람들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구경은 난생처음이군.”

존은 어린애처럼 흥미진진한 눈으로 광대들의 묘기를 구경했다. 그는 평생 가족을 건사하고자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살아온 남자였다. 가축을 치고, 집안 살림을 손보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으며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며 살아왔다. 기껏해야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풀피리를 부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팍팍한 삶을 사느라 맘껏 즐기지 못했다.

“앞으로 좋은 구경 많이 다니면 되지 않겠소. 손자가 자라면 일을 거들 터이니, 사돈도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보니까 이놈은 뼈마디가 굵어서 남들 두 배는 일할 것 같소.”

이고르가 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존의 무릎에 앉아서 복스럽게 양갈비를 뜯는 브래들리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브래들리는 먹성이 좋아서 웬만한 어른만큼 먹고도 배 부른 기색 하나 없이 맛있게 먹었다.

“나만 즐길 수 있겠소. 안사람이 몸이 불편해서 어디 여행가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이 사람 몸만 건강했다면야 나도 진작 순례를 떠났겠지요.”

존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하고 브래들리가 불쑥 불었다. “아니다, 어디 안 간다. 일해야지.” 존은 브래들리의 무릎을 문질렀다.

이고르는 눈을 크게 뜨고 존의 옆에 앉은 안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옆에 놓인 낡은 지팡이를 보고는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사부인 지팡이가 많이 낡았네요. 내 좋은 걸로 하나 장만해드리리다.”
“괜찮아요. 마음만 감사하게 받을게요.”

안나는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또,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이고르 같은 사람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자꾸만 벽을 허물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내보내야 할지 환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자, 사양하지 마시고. 우린 이제 가족이잖습니까.”

이고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당신 지팡이가 낡아서 불편하잖아. 모처럼 사돈이 호의를 베푸는데, 사양하지 말고 받아.” 존은 망설이는 안나에게 부드러운 말씨로 타일렀다. 완고한 남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별 수 있나. “그래, 알았어. 고마워요, 사돈.” 안나는 수줍어하며 웃었다. 이고르는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안나는 마다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원스레 술잔을 비웠다. “사부인, 호탕하시구먼!” 이고르가 제 무릎을 철썩 때렸다.

“새신랑이랑 새신부가 왔어요!”

더벅머리 남자아이가 요란스럽게 신랑과 신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광대들이 짜맞춘 것처럼 동시에 멈췄다. 불꽃을 그리던 젊은 여자만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밤하늘에 새로운 문양을 덧그리며 다가갔다. 그녀가 만들어낸 붉은 길은 열정과 생명력으로 넘실거렸다. 마치 뜨거운 여름밤 같았다.

“이제야 오는구먼. 결혼 축하하네!”
“결혼 축하드려요.”
“어디, 신부 얼굴 좀 볼까.”
“신랑이 어제보다 신수가 더 훤해진 것 같은데?”

손님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말하며 일제히 신랑과 신부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피트는 팔로 톰의 목을 꼭 조였다. 톰은 제 발로 걸어올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는 피트를 겨우 설득해서 등에 업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당분간 피트의 발이 땅에 닿을 일은 없게 할 작정이었다.

“괜찮다, 피트. 축하해주려고 오신 손님들이다.”

톰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긴장한 나머지 피트는 목소리가 떨렸다. 흥에 취해 기분이 너그러워진 손님들은 그마저도 신부가 수줍어한다며 좋게 보아주었다.

“식사는 잘하고 계셨습니까? 술이 모자라진 않습니까?”

톰이 피트를 고쳐 업으며 손님들에게 물었다. “그럼, 그럼. 이렇게 성대하게 베풀어줘서 고맙네.” 남자는 보란 듯이 허리띠를 풀며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는 잔칫상이 정말 입에 맞았는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 할머님이랑 고모가 요리 실력이 아주 뛰어나더군. 내 평생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감사합니다.”
“이래서야 새신부가 만든 요리가 자네 입에 맞을까 걱정이야. 워낙 진미에 입이 길들었으니,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테니 말일세. 나도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가 차려 준 밥상 어떻게 먹을지 벌써 걱정이거든.”

손님은 흘러내린 바지를 추켜올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자 피트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톰은 제가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대요.”

피트의 말에 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야. 널 사랑하니까, 널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맛있다고 말했지만…….’ 행여나 속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톰은 생각하는 것도 관뒀다. 속사정을 모르는 손님은 피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으래?”
“네.”

피트는 톰의 선의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리를 잘하는 부인이 최고지. 배를 든든히 채워야 뭐든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잘 됐군, 잘 됐어.”

진실을 알 리 없는 손님은 그저 사람 좋게 웃었다. 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손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위로 뻗은 콧수염이 멋들어진 남자였다. 알렉세이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꼭 소년처럼 웃었다.

“신부가 그렇게 좋은가? 품에서 한시도 내려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예.”

톰은 산뜻한 대답으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일찌감치 막았다.

“사람이 솔직해서 좋구먼. 좋을 때지. 자네 마음 이해하네.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 참 보기 좋구먼. 앞으로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게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량한 웃음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멀리 알렉세이를 발견하자마자 피트가 톰의 등에서 폴짝 내려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를 향해 달려가다가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피트는 넘어진 채로 손을 흔들었다. 톰과 알렉세이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피트에게 달려왔다. 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붙들고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누가 보아도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걷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휴, 맙소사…… 저래서였군. 아무리 신혼이라고 해도, 자제할 줄 알아야지. 요즘 젊은것들은…….” 조금 전까지는 톰에게 호의적이었던 손님이 피트가 걷는 모양새를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톰은 멋쩍어서 헛기침했다.

“왜 그렇게 걷는 게냐?”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일어나기야 한참 전에 일어났다만.”
“죄송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인사드려야 했는데.”
“아니다.”

알렉세이는 피트를 부축한 채로 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톰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목이 조금 따가웠다. 침을 뱉고 싶었다. 결코 아버지가 못마땅해서는 아니다.

“근데 얼마 전에 새로 안대를 만들어드렸잖아요. 왜 그거 안 쓰셨어요?”

피트가 알렉세이를 빤히 보며 물었다.

“내가 꽃이 그려진 안대를 어떻게 쓰고 다닌단 말이냐.”

알렉세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결혼식에 손님들이 많이 오니 쓰라며 피트가 만들어 준 안대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테두리를 은실로 촘촘하게 두르고, 가운데 꽃이 수 놓인 안대였다. 하필이면 은은한 분홍색과 보라색 색실로 수 놓은 꽃이었다. 청초한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차라리 꽃잎이 큼지막하고 화려하며, 기백이 넘치는 붉은색으로 수를 놓았다면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끈에도 장식이 달려 단순하고 투박한 것을 선호하는 알렉세이가 쓰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어머님 친정에서 쓰던 문양이라고 해서 일부러 그걸 수놓은 건데. 할머님이 가르쳐주셨거든요.”

피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워했다. 보자마자 그 문양이 마음에 쏙 들어 자기 신부복을 지을 때 쓰지 않고 알렉세이의 안대에 쓰려고 모처럼 양보했는데, 싫다고 하니 서운했다.

“알았어요.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그건 꼭 쓰고 다니세요.”

하지만 아쉬움은 잠시. 피트는 새로 주어진 과제에 의욕이 넘쳤다. 그는 앞으로 차차 알렉세이를 더 긴밀하게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살아갈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타마라의 친정에서 쓰던 문양이라고?’ 알렉세이는 피트의 말을 듣자,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문양이 눈에 익었다. 알렉세이는 턱만 매만지며 초조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부랴부랴 품에서 피트가 만들어 준 안대를 꺼냈다. 과연 타마라가 가지고 온 문양이 맞았다. 이제야 기억이 난다.

“아니다. 난 이게 마음에 든다. 잘 만들었구나.”
“그렇죠? 엄청 신경 써서 만들었어요!”

피트는 활짝 웃었다. 알렉세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대를 바꿔썼다. 어린 소녀가 쓸 법한 소담한 문양이 수 놓인 안대를 쓴 그를 보고 손님들이 작게 속닥거렸다. 개중에는 어쩌다 저런 며느리를 들였을까, 하며 알렉세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며느리에게 잡혀 산다면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알렉세이는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놀림감이 되어 사람들의 동정을 사는 아버지를 보고 톰은 전율이 일었다. 평생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완고하고 엄정한 아버지가 쑥스러움 많은 시골 청년처럼 사람들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이 그야말로 볼만했다. 톰은 또다시 피트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 사랑을 참을 수 없어 피트를 번쩍 들어 올렸다.

“피트, 사랑한다.”
“갑자기?”
“너는 정말 좋은 아내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매번 다시 깨닫게 해준다.”
“정말?”
“물론이다.”

톰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좋아하니 자신도 좋았다. 피트는 웃으면서 톰의 모자 장식을 잡아당겼다. 걷는 게 힘들어서 맘껏 뛰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랠 작정이었다.

“어, 톰이 일평생 꿈꾸던 소원 하나 네가 이루어줬거든.”

어둠 속에서 론이 불쑥 튀어나왔다.

“론.”

톰은 론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매버릭, 보고 싶었다! 고작 하루 못 봤는데 10년은 못 본 것 같았어. 간밤에 잘 잤어?”

론은 서슴없이 피트의 볼을 꼬집고 마구 잡아당기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침에 잠들었어.”

피트가 천진하게 말했다. ‘이 자식이 발정이 났나? 자기는 성욕에 눈이 멀어서 앞가림 못하는 놈들이 한심하다고 했으면서?’ 론은 부아가 치밀어 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톰 카잔스키.”
“매브…… 오기 전에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준 거, 기억하지?”

톰은 조심스럽게 피트에게 말했다. 피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쟤가 밤에 잠을 잤냐고 물어봤잖아. 밤에 안 잤는데 어떻게 밤에 잤다고 말해? 우리 아침에 잤잖아.”
“톰 카잔스키.”

론이 다시 톰의 이름을 불렀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론.”
“넌 내가 지켜보고 있다. 잘해라.”

론은 톰의 어깨를 힘껏 잡으며 진중하게 경고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톰이 꿈꾸던 소원이 뭐야?”

피트가 론에게 물었다. 론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몸을 쭉 펴며 말했다.

“자기 아버지 복장 터뜨려 죽일 아내를 얻는 거. 예전부터 자기는 씩씩한 아내를 얻을 거라면서 어르신한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고, 저 뻣뻣한 기를 꺾어 줄 그런 여자를 찾는다고 말하고 다녔거든.”
“너 아버지한테 왜 그래? 존경하긴 한다며.”

피트는 질렸다는 듯이 톰에게 말했다.

“존경이야 한다.”

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아들이 이처럼 완고하게 나올 때는 그와 똑같다. 과연 같은 핏줄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을 느낀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래도…….”
“너 하나 사랑하면 됐지, 아버지까지 사랑해야 하나? 나에게 주어진 사랑할 힘은 너한테만 쓰면 된다.”
“그렇게 말하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피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난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서 꽃문양을 수놓은 거야. 할머님이 보여주신 문양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거든. 이번에는 아버님 골리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네 소원이 그런 거라면…… 생각해 볼게. 그런 거라면 아주 자신 있지. 내가 입만 벙긋해도 화내는 사람들이 많거든.”

피트가 덧붙였다. 톰은 그제야 씩 웃었다. 두 사람은 론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론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길을 텄다. 오늘의 주인공인 젊은 부부를 위해 근사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화려한 카펫 위에 푹신한 방석을 여러 개 깔고, 편히 앉을 수 있도록 팔걸이도 갖춘 자리였다. 탁 트인 곳에 있어 광대의 묘기와 악단의 무대를 감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었다.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팔걸이의 나뭇결을 어루만지며 피트가 멍하니 읊조렸다. 얼떨떨했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자기를 축하해주러 왔다니. 불길한 아이라며 손가락질하지도 않고, 얌전하지 않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웃기만 해도 웃는 얼굴이 곱다며 칭찬해줬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라며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자, 얘들아. 이제 술잔을 나눠야지.”

옥사나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톰과 피트는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앉았다. 모두가 숨까지 참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피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술잔을 들었다. 옥사나가 톰과 피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톰과 피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술잔을 부딪쳤다. 

자신을 응시하는 톰의 잿빛 눈동자. 약간의 수줍음과 기쁨, 그리고 거대한 희망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빛. 슬픔으로 흐느끼는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는 밤의 장막. 그 손길의 온기가 이 순간 피트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래,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아.’ 피트는 톰이 준 행복을 천천히 마셨다. 그 달고 쓴맛을 남김없이 음미하며.

“결혼 축하해요!”
“결혼 축하하네!”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들딸 여럿 낳고, 건강하게 살게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피트는 기분이 좋아져서 술을 한잔 더 마셨다. 평소에는 쓰기만 했던 술이 오늘은 감미롭게 느껴졌다. 론은 자신이 톰의 소원을 이루어줬다고 말했지만, 사실 톰이야말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준 사람이다. 

피트는 오로지 하나만 바랐다. 평생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갈 반려자. 존경하고 따를만한 사내라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랑이야 자신이 쏟아부으면 그만이니까. 남편을 잘 따르고 집안 살림을 부지런히 돌보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내면 맹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은 아니어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피트는 너무 행복해서 죽을까 봐 겁이 났다.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오손이 다시 자신을 잡으러 올까 봐 두려웠다. 혹은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누군가가. 그래서 이 행복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수명이 영원하지 않듯이 시련을 견딜 힘 역시 마르는 법이다. 피트는 자꾸만 걱정돼서 잡생각을 떨쳐내려고 술을 한잔 더 마시려다가 톰에게 제지를 당했다.

다시 광대들의 묘기가 시작되었다. 피트는 재주넘기를 하는 어린 광대를 보고 유독 즐거워했다. 알록달록한 동그라미가 그려진 쌍둥이였는데 몸이 날쌔고 가벼웠다. 마치 새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광대들이 통통 튀며 그리는 곡선이 유려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된다. 참아라.”

피트의 혼잣말을 듣고 톰이 대번에 말렸다. 피트는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 톰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몸 다 나으면 해도 돼?” 피트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톰은 그만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재주넘기로 돈 벌어오면 화낼 거야?”
“네가 즐거워서 하고 싶다면 괜찮다. 하지만 돈 벌 생각으로 하진 마라.”
“알았어.”

피트가 웬일로 순순히 수긍했다. ‘무슨 꿍꿍이지?’ 톰은 불안해졌다. 피트가 또 무슨 사고를 칠까 두려웠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 백 년은 이렇게 살아야겠지. 톰은 마음을 다잡았다.

광대들의 공연이 끝났다. 광대들은 꿀을 찾는 벌떼처럼 원을 그리며 빠져나갔다.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자 잿빛 수염이 근사한 단장이 앞으로 나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늘의 공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내일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자리에 저희 「석류 도적단」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타나프, 알렉세이 카잔스키 어르신의 후한 인심에 진심으로 감동했지 뭡니까.” 

단장, 타나프가 너스레를 떨었다. 알렉세이는 팔짱을 낀 채로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견고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안대가 단연 눈에 띄었다.

“새로운 초원의 주인! 카잔스키 집안이 대대손손 번창하길 바라며, 브래드쇼 집안에도 곧 좋은 소식이 있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얘야, 너도 동생이 생기면 좋겠지?”

타나프는 과자를 우물거리는 브래들리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브래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에 든 과자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힘내십시오!” 단장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닉에게 말했다. 닉도 따라서 주먹을 흔들었다.

“오신 여러분도 가정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술자리의 흥을 돋울 악단이 여러분을 찾아옵니다. 「영예로운 유월의 전사들」을 이끄는 오프네만을 반갑게 맞이해주십시오!”

타나프의 말에 악단의 단장인 오프네만이 등장했다. 오프네만은 나무로 만든 피리인 수르나이 연주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보란 듯이 금속으로 된 취구에 입을 대고 숨을 잔뜩 불어넣었다. 땅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우렁찬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고르가 특히 좋아했다. 그는 흥이 나서 앞으로 달려나가려다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붙잡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만족한 오프네만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타나프와 멋진 친구들이 여러분의 흥을 잔뜩 돋웠으니, 질 수야 없지요. 그런데 그전에 오늘의 주인공인 새신부의 노래를 들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신부의 미모가 아주 뛰어난데, 노래 실력도 빼어나겠지요? 자고로 미인은 꾀꼬리 같은 법이니까요.”

오프네만도 타나프 못지않게 붙임성이 좋고 능청스러운 남자였다. 사람들의 웃음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다웠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족히 10년은 알고 지낸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는 남자였다.

“좋소, 신부의 노래도 들어봐야지!”

사람들이 오프네만의 말에 동조하며 피트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부추겼다. “불러도 돼요?” 사람들의 요구에 떠밀린 피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럼, 그럼. 어서!” 사람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더 크게 외쳤다.

“아, 어쩌면 좋아. 잔치를 망칠 일이 있나.”

안나는 사색이 되어 탄식했다. 존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점잖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나.”
“하지만 여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다음에 피트가 시집가서 구박받을까 봐 어떻게든 잘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만,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어. 쟤 노래 부르는 거 듣고, 사돈이 이 결혼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면 어떡하지?”

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한지 가슴도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매브 예전이랑 달라졌어요.”

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뭐가 문제야? 난 매브 노래 부를 때 좋은데?”
“나도.”

캐롤이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옆에서 브래들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너희 둘만 그런 거야.”

닉도 한숨을 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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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5.04 15:20
ㅇㅇ
모바일
따수워ㅜㅜㅜㅜㅠㅠㅠㅜㅜㅜ너무너무 좋다 센세사랑해ㅜㅜㅜㅜㅜㅜ
[Code: d755]
2023.05.04 16: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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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속 은은한 알렉세이피트 케미가 참 흐뭇해요 센세.. 피트 어기적어기적 걷는거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f609]
2023.05.04 2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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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네랑 카잔스키네 친해지는거 좋다!!!!!!아 알렉세이 탈룰라 개웃기다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태세전환하기 있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톰 피트가 자기 아버지 골탕먹였다고 전율이 일었다는거 존나 불꽃효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론이 피트 하루 못봤는데 10년은 못본것 같았다는거 진짜 훈훈하고 귀여워죽겠네 ㅠㅠ 그리고 피트 노래한다니까 안나 질겁하는거 개웃겨 진짜 안웃긴 구석이 없닼ㅋㅋㅋㅋㅋㅋ 센세는 천재야!!
[Code: adf7]
2023.05.05 00:12
ㅇㅇ
진짜 평화롭고 행복하다ㅠㅜㅠㅜㅠㅜㅠㅜ 고마워 센세
[Code: 7467]
2023.05.05 10: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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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 행복과 사랑이 가득해.. 너무좋다ㅜㅜㅜㅜㅜㅜㅜㅜㅜ
[Code: 15b1]
2023.08.09 16: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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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정말 행복해 센세
[Code: 6b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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