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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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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달



65. 뱀의 혓바닥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바자르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여기저기서 추위를 잊은 사람들이 가격을 흥정하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동냥하는 거지들이 그 주변을 얼쩡거리며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안달이었다.

바자르의 활기에 론은 평소보다 더 들떴다. 우중충한 하늘도 그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모처럼 나왔으니, 식료품 외에도 잡다한 것을 잔뜩 사려고 돈을 두둑이 챙겨왔다. 요즘 들어 어머니가 자주 허리 통증을 호소해서 습포를 살 생각이었다. 또, 어머니의 손목을 무겁게 채워줄 팔찌도 살 예정이었다. 정작 그의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참한 며느리와 건강한 손주였지만. 피트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예브게니아는 론에게 너는 대체 언제 재가할 것이냐며 채근했다. 결혼은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톰과 론은 가장 먼저 골목 어귀에 있는 닭 장수를 찾았다. 비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치고 가면, 닭털이 풀풀 날리고 닭 우는 소리에 귀가 따가운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톰이 바자르에 올 때마다 찾는 닭 장수의 가게였다.

“오랜만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번에 결혼식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만한 잔치는 제 생애 또 없을 겁니다. 그때 먹은 게 아직도 꺼지지 않아서 배가 들어갈 줄 모릅니다.”

단골의 방문에 닭 장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반겼다. 그는 허리띠 위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매만지며 능청스레 말했다. 남자는 덩치가 비대하고 혈색이 붉었다. 날씨가 추운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예, 저야 덕분에 늘 잘 지냅니다.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요즘 닭들이 굵은 알을 낳거든요. 노른자도 진하고 맛이 아주 좋습니다. 오늘도 열두 개면 되겠습니까?”

약삭빠른 닭 장수는 말과 동시에 지푸라기에 달걀을 쌌다. 톰은 고갯짓으로 닭장을 가리켰다.

“예, 그리고 오늘은 닭도 살까 합니다만. 암탉으로요.”
“예? 닭이요?”

닭 장수가 입을 헤 벌렸다. 톰은 얼굴을 붉히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신선한 달걀을 매일 먹게 해주고 싶어서요.”
“이야, 정말 축하드립니다! 예정일은 언젭니까?”
“9월입니다.”
“가을이군요. 좋지요, 가을. 가을, 가을, 가을이라…… 저, 그런데 결혼식을 올린 게 불과 얼마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59일 전이지요.”
“아하!”

닭 장수는 버릇처럼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연.”

닭 장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결혼식을 올린 것이 두 달 전, 예정일은 9월. 애가 생긴 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지나야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들어섰다는 뜻인데.

“과연…….”

닭 장수의 안색이 흐려졌다. 이거야 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피로연 내내 신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신랑의 실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젊고 건강한 신랑이니 신부와 마음만 통한다면 금세 좋은 소식을 가져오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가져올 줄은 몰랐다.

“카잔스키 집안 가주가 될 남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빨리……. 신부가 아직 어리던데, 괜찮은 건가? 아니지, 겉보기와 달리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니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래도 얼굴만 봐서는 아직 어린애던데, 정말 괜찮나? 애를 상대로? 애를 상대로 그럴 마음이 드나? 으음, 신랑도 아직 어리니까…… 하기야, 나한테야 어린애지 신랑한테는 또래지. 그래도 참, 신부가 그렇게 어린데…….”

닭 장수의 거침없는 혼잣말에 톰의 눈치를 보던 론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닭 장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톰을 닭장으로 안내했다. 

톰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닭 장수뿐만이 아니다. 피트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다들 축하한다면서 무어라고 한 마디씩 더 얹었다. 대개 피트가 너무 어리다는 말이었다. 만약에 피트를 데려오자마자 임신시켰다면 사람들에게 물벼락이라도 맞았을 것 같다. 톰 딴에는 억울했다. 피트가 자신보다 어리기야 하지만, 피트의 또래면 진작 결혼해서 애를 한두 명씩 둔 경우도 많은데. 오히려 자신은 남들보다 늦게 결혼한 편인데.

 
***


생전 닭을 처음 본 말이 수레에 닭장을 실으려고 하자, 한사코 싣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탓에 톰은 애를 먹었다. 말은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한 동물이다. 경주에서 지면 분한 마음에 잠도 못 자는가 하면, 힘든 일을 겪으면 분을 참지 못하고 앓다가 죽기도 한다. 간신히 말을 달래고 나니 해가 벌써 머리 높이 떠 있었다.

톰은 모자를 벗고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혔다. 톰 못지않게 고생한 론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말의 등잔을 다독였다. 이 와중에 눈치 없는 닭들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닭장 안에서 요란을 떨었다. 오늘 톰은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네 마리를 샀다. 닭 장수가 닭도 집안을 다스릴 수컷이 필요하다고 침을 튀겨가며 설득한 끝에 넘어간 것이다.

“근데 톰. 괜찮을까? 닭을 기르겠다고 하면 어르신이 또 한 소리 하실 것 같은데.”

론이 말했다.

“집안일이다. 가장인 내가 임신한 아내를 위해서 닭을 치겠다는데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겠어.”

톰은 단호하게 일갈했지만, 그도 내심 걱정스러웠다. 염소와 양, 말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했으니 돌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닭은 그도 처음 길러보는 것이다. 닭 장수가 모이를 배합하는 법부터 닭이 병치레를 하면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세세하게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막막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한테 떠맡기지 마라.”
“당연한 소리.”
“피트한테도 떠넘기지 말고. 걔는 삶은 달걀을 먹고 싶은 거지, 닭을 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걔는 할 일이 많다. 일거리 늘어나는 걸 반길 리 없지.”
“내가 돌볼 거다.”

론의 잔소리에 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 여차하면 어르신이 돌보시겠지. 어르신은 피트에게는 꼭 딴사람처럼 구니까. 걔 입에 들어가는 건데 아까워 하시겠나? 아무튼 두 사람은 벽이 없어도 너무 없다. 피트가 선을 넘어도 어르신이 무르게 대하시니, 나날이 더 까불더라.”

론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얹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버지와 아내의 사이가 좋다면 잘된 일이지. 불화로 집안이 시끄러운 것보다는 낫다.”

톰은 의연하게 말했다.

“그렇기야 하다만…… 정말 괜찮나? 이래서야 누가 친자식인지.”
“내가 아버지에게 살가움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지간과는 다르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크다. 그러니 더 엄하게 대하시는 것뿐이다.”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네가 괜찮다면 나도 더는 말할 것 없다. 다만 사람들이 괜히 쑥덕거릴까 봐 그런다. 어르신이 혼자 지내신 지 꽤 오래됐고, 피트는 거침이 없으니.”
“아내가 아버지 잠옷을 만들어드리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겠어.”
“음.”

론은 손을 내렸다. 여자가 남자의 잠옷을 만들어 준다는 건 그와 한 이불을 덮고 잘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이가 들면 아내가 잠옷을 만들어 준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여자에게 손수 만든 잠옷을 받는다면, 그건 두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여자가 그와 결혼을 원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무리 아버지와 사이가 가까운 딸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를 위해서 잠옷을 만들지 않았다.

피트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존과 닉은 피가 섞인 가족보다 더 소중하고 각별한 존재였지만, 그들을 위해서 잠옷을 만든 적은 없다. 피트가 잠옷을 만든 건 결혼한 후부터로, 그는 오직 톰을 위해서만 천을 뜯었다. 다른 남자를 위해 잠옷을 만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톰도 피트가 유달리 알렉세이를 따라도 눈감아주는 것이다.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니 두 사람은 배가 출출해졌다. 아직 사야 할 물건도 많았고, 갈 길도 멀고 험하니 일단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로 했다. 두 사람은 바자르에 올 때면 늘 찾는 식당으로 향했다. 광장 바로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필라프와 양꼬치로 유명했다. 음식 맛이 좋고, 주인이 싹싹해서 장사가 잘되는 집이었다.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늘 주문하던 대로 필라프 두 그릇과 양꼬치 여섯 줄, 그리고 술을 시켰다. 술과 함께 곁들어 먹는 소금에 절인 야채와 순무를 넣고 끓인 뜨끈한 국 한 그릇이 먼저 나왔다. 국은 주인이 오랜만에 찾아온 톰과 론을 위해서 덤으로 준 것이다. 두 사람이 언제나 이곳을 찾는 이유다.

“타타흐 부족 사람이지?”
“그래, 톰 카잔스키…….”
“같이 온 사람은?”

식당 안의 사람들이 톰과 론을 알아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술잔을 채우던 론이 멈칫하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식탁마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얼마 전에 결혼했다던데.”
“카무르가 그 집안 사람이랑 연이 있어서 초대를 받고 다녀왔지. 볼거리가 대단했다더군. 돈을 꽤 많이 들였을 거야.”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 뭐. 제르메갈 부족도 쓸어버렸겠다, 이 기회에 세력을 과시할 작정이었겠지.”
“약탈혼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잖아. 낯뜨겁게 말이야.”
“점잖게 생긴 친구가 색을 밝히는가 보군. 여자가 뭐라고 전쟁까지 벌여? 다른 여자를 구하면 그만인데.”
“여자도 아니야.”
“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그들은 톰과 타타흐 부족을 두려워하면서도 적대적이었다. 술병을 쥔 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에 톰은 평온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볶은 땅콩의 껍질을 태연하게 깠다.

“셀두인 말로는 처가 벌써 애까지 뱄다더군. 그래서 처한테 준다고 닭까지 샀대.”
“근데 저 친구 자식이 맞기는 해? 오손의 자식인데 남들이 알면 체면이 깎이니까 자기 자식인 척하는 거 아니고?”
“애가 태어나면 알겠지. 봄이나 여름에 태어나면 틀림없이 오손의 자식 아니겠나.”
“부정한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자식은 평생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데. 쯧쯧.”

급기야 사람들이 피트를 두고 흉흉한 말을 지껄였다. 사람들은 머릿수를 믿고 자제할 줄 몰랐다. 분개한 론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자식들이!”
“슬라이더, 나서지 마라.”

톰은 땅콩이 담긴 접시를 론의 앞에 툭 내밀었다. “아이스.” 론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에 앉아.” 톰이 다시금 명령조로 말했다. 단호했으며 엄정했다. 론은 씩씩거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열을 식히려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렇게 지껄이는 걸 그냥 내버려 둘 건가?”
“신도 모든 사람의 혀를 자르지는 못한다.”

론이 울분을 터뜨리자 톰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답답한 나머지 론은 식탁 위에 주먹을 올리고는 톰을 설득했다.

“그냥 두면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모른다. 다른 일도 아니고 네 자식의 명예도 걸린 문제야. 우리 부족 수장이 될 아이가 카잔스키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말이 떠돌아서 좋을 것 없다. 이건 혈통과 명분이 걸린 문제야. 화근은 미리 뿌리 뽑아야 해.”
“뿌리를 뽑는다고 해결될 문제면 잡초로 고생하는 사람도 없겠지.”

톰은 곁눈질로 떠드는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까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주절거리던 남자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고작 노려본다고 입을 다물 놈들이 어디서 감히.’ 사람들이 꽁무니를 빼자 론은 더더욱 화가 났다. 그는 애타는 심정으로 다시 톰을 불렀다.

“톰.”
“론,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기하고 헐뜯고 싶어 한다. 무뢰배가 떠드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것 없다.”

하지만 톰은 이 이상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수그러지자 점원이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맛있게 드세요.” 쥐새끼처럼 뾰족하게 생긴 남자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코앞에 두고도 론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이제 배가 고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와 달리 톰은 아무렇지 않게 수북하게 쌓인 필라프를 자신의 접시에 덜었다.

“톰. 나중에 네 자식이…… 자길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에 상처라도 받으면?”

론이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톰은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모자를 벗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부스스 쏟아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동작이 망설임 없이 시원스러웠다. 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런 일로 상심한다면 내 자식이 아니다. 어머니의 수고도 모르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방자하게 구는 놈이라면 내가 직접 내칠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이럴 때면 네가 어르신 자식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갈수록 어르신처럼 말하는군.”

론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 알면 누구보다 피트가 상심할 거다. 네 자식 문제야 후계가 걸린 문제이니 같은 부족 사람으로서 조언하는 거라면, 피트의 문제는 네 막역한 친구이자 젖형제로서 진심으로 말하는 거다.”

다시 론이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알고 있다.”

그제야 톰이 사람답게 웃었다. 그러나 미소도 잠깐이었다. 그는 어두워진 얼굴을 말을 이었다.

“사람들 혀를 전부 자르진 못하더라도 피트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는 있겠지. 혹은 상심한 피트를 위로해주거나.” 
“…….”
“나도 고민이 많다, 슬라이더. 전자를 택한다면 피트가 나를 두려워할까 우려가 되고, 후자를 택한다면 어찌 되었든 피트가 상처를 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 괴롭다. 어느 쪽이 피트를 위한 선택일지 당장은 나도 확신할 수 없어.”
“톰.”

론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톰은 마음이 무거워져 입가를 쓸었다. 그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피트는 크게 슬퍼하겠지.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부부라고 다르겠나. 그리고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야 살면서 알아가는 재미가 있잖아.”
“그런가.”
“자, 침울해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고맙다.”

론이 따라준 술잔을 입술로 옮기며 톰은 눈을 내리깔았다. 발치에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꼭 똬리를 튼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66. 호적수


“좀 더 빨리! 더! 더!”

바람개비를 손에 쥔 피트는 새가 날갯짓하듯이 두 팔을 펼치고 천막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키르케는 정신이 사나워서 손사래를 쳤다. 벌써 한 시간째이다. 옥사나의 천막에 다 같이 모여 봄에 신을 신발을 만들다 말고, 피트는 급히 할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제자리에서 뜀박질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돌아다니고 있다.

“피트! 이제 그만 앉아요. 지치지도 않아요?”

보다 못한 키르케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피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피트는 폴짝 뛰었다. “피트!” 키르케가 아이를 야단치는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트는 움찔했다.

“톰이 오기 전에 마저 뛰어야 해요. 톰이 오면…… 걷지도 못하게 할 거란 말이에요.”
“하긴. 피트가 직접 걷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키르케도 피트가 답답해하는 것을 이해했다. 얌전한 사람도 종일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데, 그렇지 않아도 남들보다 활발하고 노는 걸 좋아하는 피트는 오죽하겠는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톰은 피트를 지나치게 보호했다. 피트가 두 발로 걷는 것도 두고 보지 못해서 어디를 가나 자신이 업고 다녔다.

“걔는 좀 이상해요.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걷는다고 애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유난스러워요. 더워죽겠는데 옷도 더 껴입으라고 잔소리하고, 찬물도 못 마시게 해요. 자기는 실컷 마시면서. 말도 못 타게 해요. 애를 핑계로 절 말려죽이려는 게 분명해요. 그동안 나한테 당한 걸 이런 식으로 보복하겠다 이거지.”

피트는 투덜거리면서 톰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키르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곁눈질로 말없이 가죽을 두드리고 있는 옥사나를 가리켰다. 뒤늦게 옥사나를 의식한 피트는 뒷짐을 지고 두 다리를 비비 꼬면서 멋쩍게 말했다.

“욕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고맙다고요. 절 많이 아껴준다는 뜻이니까…….”

옥사나는 무심히 가죽만 폈다.

“색실을 마구 써서 죄송해요. 요즘 기분이 들떠서 이것저것 썼어요. 아껴 쓸게요.”

피트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잘못이 수도 없이 떠올랐지만, 그걸 전부 말했다가는 옥사나가 쓰러질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리 와라, 피트.”

옥사나가 피트에게 손짓했다. 피트는 옥사나에게 다가가서 스스럼없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옥사나는 피트의 뺨을 매만지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피트도 씩 웃었다. 주름진 옥사나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머리를 만져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특한 것. 실이야 내키는 대로 써라. 톰이 그 정도도 못 해주겠어?”
“정말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럼. 다른 것도 아니고 아기 배내옷 만든다고 쓴 건데. 누가 뭐라 하거든 나에게 말해라.”
“네, 감사해요.”

피트는 허리를 세웠다. 옥사나는 피트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을 다독였다.

“할머님. 입덧은 언제 해요?”

피트가 물었다. 사실 피트는 아직도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이 체감되지 않았다. 특별한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래 기분이 울적한 것도 불과 몇 달 전에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고, 자신은 원래 변덕스러운 사람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딱히 입맛이 당기지도 않았고, 살이 찌지도 않았고, 배가 당기지도 않았고,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아직 초기라 배도 부르지 않았으니 눈에 보이는 증거도 없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는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조만간.”

옥사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네가 입덧을 할 것 같진 않구나.”
“네?”

피트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알료샤, 그만 먹어라.”

옥사나는 옆에 앉아 묵묵히 과자를 주워 먹고 있는 알렉세이에게 쏘아붙였다. 알렉세이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슬그머니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꿀이 묻어 끈적끈적한 손가락을 빨았다.

피트와 알렉세이가 과자의 이름을 두고 아웅다웅했다.

“셰크셰크.”
“차크차크.”
“셰크셰크.”
“차크차크다.”
“셰크으, 셰크으으.”
“차크차크.”
“아, 정말! 셰크셰크라니까요!”
“네가 우긴다고 차크차크가 셰크셰크가 되지는 않는다.”
“와, 아들이랑 똑같다. 정말 똑같아. 꽉 막힌 게 똑같아.”

셰크셰크, 혹은 차크차크는 밀가루와 달걀을 섞어 만든 반죽을 기름에 튀겨 꿀을 꾸덕꾸덕하게 입힌 과자다. 오래 전부터 먹어온 과자라 기원은 불분명했다. 피트는 이걸 셰크셰크라고 불렀고, 알렉세이는 차크차크라고 불렀다. 옥사나도 차크차크라고 불렀다. 타타흐 부족 사람은 전부 차크차크라고 알고 있었다.

만드는 방법은 비슷했으나 약간 차이가 있었다. 피트가 만든 셰크셰크는 동그란 공 모양이었고, 옥사나가 만든 차크차크는 길쭉한 막대기 모양이었다. 또, 곁들이는 부재료가 조금 달랐다.

먹고 싶은 게 없냐는 옥사나의 질문에 피트가 셰크셰크를 먹고 싶대서, 대체 그게 무슨 과자인지 정체를 두고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 문제의 셰크셰크가 이름만 다를 뿐이지 차크차크와 똑같은 과자라는 걸 알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셰크셰크는 정작 피트보다 알렉세이가 더 많이 먹었다.

“그래도 셰크셰크가 더 맛있죠?”

피트는 자신이 만든 과자에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에 처음으로 만들어 본 과자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펄펄 끓는 기름에 반죽을 풍덩 풍덩 담그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아련했다.

“모르겠다. 내 입에는 똑같은 것 같다.”
“그럴 리가요. 셰크셰크는 양귀비 씨앗이랑 깨가 들어갔단 말이에요. 그렇게 드시고도 몰라요? 다시 드셔보세요.”

피트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알렉세이는 셰크셰크 한 개를 집었다. 옥사나가 대번에 제지했다.

“알료샤, 남자가 종일 먹어대면 미련해 보인다.”
“예.”

알렉세이는 과자를 도로 내려놓았다. 옥사나는 혀를 끌끌 찼다. 요즘 들어 식욕이 왕성해진 알렉세이는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먹었다. 잘 먹어서 혈색이 좋아진 아들의 얼굴을 보고 옥사나는 마음이 퍽 복잡했다.

“넌 할 일이 따로 없느냐?”
“급한 일은 마무리 지었습니다.”
“일이 없어도 따로 용건이 없으면 얼쩡거리지 마라. 방해된다.”
“예.”

알렉세이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피트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톰이 오기 전에 할 거 또 생각났다.”

피트는 알렉세이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그의 팔짱을 꼈다.

“같이 쿨라 보러 가요, 아버님.”
“그래.”

알렉세이는 조금 당황했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 순간, 피트가 알렉세이의 안대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넋이 나간 알렉세이의 얼굴을 보고 피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피트.”
“방심하셨죠?”

피트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알렉세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어린애를 상대로, 그것도 자신의 손자까지 임신했으니 혼을 낼 수 없어서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피트는 알렉세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그를 약 올렸다.

“살이 찌셔서 둔해지신 거 아니에요?”
“그런가. 살이 좀 쪘나. 요즘 너무 먹은 모양이다.”

알렉세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몸이 둔해진 것을 느끼던 차였다. 자신의 애마도 요즘 은근히 힘겨워하는 눈치였다.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 남자는 풍채가 좋은 게 멋있어요. 톰은 너무 말랐어요.”

피트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진심으로 톰이 말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톰이 좀 더 많이 먹길 바랐지만, 알렉세이를 닮아 가리는 게 많고 입이 짧은 톰은 허기만 가시면 더는 먹지 않았다.

“톰이 마른 것 같진 않다만.”

알렉세이는 피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체격이 커졌지만, 톰의 나이에는 자신도 그와 엇비슷했다. 그때도 자신이 남들보다 말랐다거나 왜소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살이 붙지 않았을 뿐이지, 뼈대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굵고 컸으므로.

“하지만 이고르 백부님에 비하면 너무 말랐는걸요.”
“이고르 형님이 남들보다 유달리 체격이 좋으신 거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함께 천막을 나섰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천막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어찌나 적막한지 화로에 불씨가 타닥타닥 튀는 소리가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크게 들릴 정도였다. 키르케는 식은 찻물을 버리고, 새로 우린 차를 담아 옥사나에게 건넸다.

“알렉세이 어르신이 요즘 즐거워 보이세요.”
“호적수를 만난 게지.”

옥사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지막이 웃었다.

“남자는 호적수가 없으면 일찍 늙는다. 매사 경계하며 촉각을 곤두세울 호적수가 있어야 주변도 환기하고, 자신도 돌아보는 법이야.”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이제야 자식 키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신 것 같은데요.”
“네 말도 맞는구나.”

옥사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톰이 딸이었다면 살갑게 대하셨을까요?”

키르케가 넌지시 물었다. 옥사나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진 않았을 거다. 둘은 성격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해. 결코 함께할 수 없지. 부자지간이니 그래도 저 정도로 지내는 거다. 동년배였으면 진작 피를 봤을 거야.”
“만약 또래라면……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세요?”
“톰.”

키르케가 재미 삼아 던진 질문에 옥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키르케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깜짝 놀랐다. 그래도 자식인 알렉세이의 편을 들 줄 알았다.

“알렉세이 어르신이 아니라요?”
“알렉세이는 융통성이 없고 지나치게 올곧다. 외골수도 저런 외골수가 없어. 하지만 톰은 영악하고 치밀하거든. 알렉세이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지만, 톰은 모든 수를 계산하고 나서야 칼을 빼 든다. 그러니 제대로 맞붙으면 알렉세이는 그 애 상대가 못 된다. 알렉세이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아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확실히 톰은 속을 알 수 없죠.”

키르케는 셰크셰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입에는 차크차크보다 셰크셰크가 더 맛있었다. 입안에서 부서질 때 더 고소하고 식감이 바삭바삭했다. 피트도 그럭저럭 만드는 요리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5.23 01: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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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서 차크차크인지 세크세크인지 꿀 쪽쪽 빨아가며 먹고 있는 알렉세이는 갈수록 귀여워지네 너무 좋다 ㅠㅠㅠㅠ 톰이 사 온 닭은 과연 누가 돌보게 될지 궁금 아이가 톰을 빼다 박아서 뒷얘기하는 인간들 코를 납작하게 해줬으면 싶다가 피트닮은 딸이면 알렉세이나 톰이 얼마나 이뻐할까 싶기도 하고 센세가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저 여기서 센세의 어나더를 기다려야겠다
[Code: cf6a]
2023.05.23 01: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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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셰크셰크 먹덧이라니 넘 귀여워
[Code: 8460]
2023.05.23 01: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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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나의 말처럼 알렉세이랑 톰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네.... 주변 사람들이 험담하는 건 맘에 두지 말고 아맵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임신 기간 보내고 건강히 출산했으면 좋겠는데ㅜㅜㅜㅜㅜㅜㅜ 알렉세이가 매느리 대신 먹덧하는 거 존나 좋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68ce]
2023.05.23 15: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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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나 말처럼 톰은 모든 수를 계산하고 나서야 칼을 빼든다는 신중한 성격 드러나는 에피소드 보고 피트가 알렉세이랑 알콩달콩 초딩같이 투닥거리는 거 보니까.. 아.. 저 어린애를 벌써…? 라고 말하는 저 동네 사람들 맘이 이해가 가자나ㅋㅋㅋㅋㅋ 이 대비감 어쩔거야ㅋㅋㅋㅋㅋ 피트가 알렉세이한테서 잃어버린 부모를 투영해 보고 피트 안의 어린피트가 그 시절의 결핍을 충족받는 거 같고 알렉세이는 타마라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기 자식에게도 주지 못했던 애정을 피트 육아에 쏟으면서 멈춰버렸다던 시계가 가기 시작하는 거 같아. 그리고 톰의 내면에 있던 채 자라지 못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도 피트의 투명하고 순진한 사랑에 무럭무럭 자랐고.. 다들 성장하고 치유되어가는 모습 보니까 너무 좋다ㅠㅠ 옥사나가 알렉세이 말로 쥐어박는 거 너무 귀여운데ㅋㅋ 어르신도 이제서야 아들이 좀 인간적인 모습 보여서 좋으실 거 같아. 그러니 피트 보면 늘 기특하다고 그러면서 예뻐서 어쩔 줄 모르시지
[Code: b301]
2023.05.23 19: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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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입덧하지 말랬더니 먹덧하고 있냐곸ㅋㅋㅋㅋㅋㅋㅋ
[Code: 7f01]
2023.05.25 17: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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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먹덧 하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7e4e]
2023.08.09 17: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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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아버님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a1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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