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4570628
view 3365
2023.05.24 22:46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21 / 22 / 23 / 24 / 25 /26 / 27 / 28 / 29 / 30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41 / 42 / 43 / 44 / 45 / 46 / 47

늑대와 달


67. 징조


해 질 녘에 톰과 론이 바자르에서 돌아왔다. 수레 가득 실린 짐을 보고 피트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세상에.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산 건 별로 없다. 닭장 때문에 부피가 커 보이는 거다.”

톰은 뿌듯하게 말했다. 그는 닭을 보고 기뻐할 피트를 상상하니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닭을 샀다고?”
“응. 주인장 말로는 이제 막 알을 낳기 시작했고, 튼튼해서 매일 큼직한 알을 낳는대.”

톰은 닭장을 덮은 천을 걷어냈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오느라 기력이 쇠해 꾸벅꾸벅 졸던 닭들이 눈을 번쩍 떴다. 덩달아 피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피트는 닭장의 창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닭이 샛노란 부리로 피트의 손가락을 콕콕 쪼았다.

“정말 그러네. 깃털도 곱고 눈도 초롱초롱해. 튼튼한 놈들로 잘 샀네, 닭은 키워 본 적 없을 텐데.”
“다행이군. 닭 장수가 사기꾼은 아니라서.”

톰은 닭장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피트도 소매를 걷어붙이며 돕겠다고 나섰으나 톰이 말렸다. 어쩔 수 없이 피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뒷짐을 진 채로 톰이 짐을 내리는 걸 구경만 해야 했다.

낯선 환경에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 날개를 마구 푸드덕거리는 닭 중에 한 마리가 유독 피트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닭보다 늘씬하고 털빛이 잿빛인 놈이었다. 피트는 그 닭이 어떤 닭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얘는 청계네. 다른 닭보다 비쌀 텐데.”
“보기 좋아서 샀다.”
“맞아, 예뻐.”

피트는 웃으면서 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천금 같은 미소. 톰은 고된 길을 달려오느라 쌓인 피로가 눈 녹듯이 사르르 풀렸다. ‘내가 정말 집으로 돌아왔구나.’ 안도감이 톰의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산다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닐까. 비바람을 막아 줄 천막, 따뜻한 스튜 한 그릇,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며 바느질하는 아내. 그 소박한 행복을 얻기 위해 오늘날까지 고생한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톰은 피트의 반듯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짐을 마저 풀었다. 포목, 색실, 구슬, 화살촉, 조미료, 그 외 잡동사니.

“닭을 산 게냐?”

알렉세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예.”

톰은 보고도 모르겠냐는 듯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알렉세이는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톰을 쏘아보더니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닭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


천막 안에 촛불이 유난히 밝았다. 톰이 오늘 바자르에서 산 밀랍 초였다. 밀랍에 꽃에서 짜낸 기름을 섞어 만든 초라 장미꽃 향기가 그윽하게 퍼졌다. 평소에 쓰던 초보다 값이 비쌌지만, 톰은 임신한 아내에게 이 정도 호사를 누리게 해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과연 피트는 향기가 좋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촛불을 앞에 두고 피트는 낮에 만들던 배내옷을 마저 만들었다. 톰은 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간식을 먹었다. 파란색 육각 무늬가 그려진 접시에는 셰크셰크가, 연갈색 물결무늬가 그려진 접시에는 차크차크가 담겨 있었다. 피트는 일부러 자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뭐가 더 맛있어?”

피트는 무심한 척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톰은 옥사나가 만든 차크차크를 가리켰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차크차크가 맛이 좀 더 단순하고 심심해서 그의 입에 맞았다. 톰은 복잡하고 다채로운 맛보다 향이 강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더 선호했다. 게다가 옥사나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자라왔으니, 차크차크가 더 익숙했다.

“이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응, 그렇구나.”

피트는 실망스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는 속마음이 얼굴에 곧잘 드러난다. 톰은 자신이 실언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셰크셰크를 집으며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다. 다시 먹어보니 이게 더 맛있는 것 같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럼,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난 이게 더 맛있어서 맛있다고 말한 것뿐이다.”

톰은 보란 듯이 셰크셰크를 입에 잔뜩 욱여넣었다. 볼록해진 톰의 뺨을 보고 피트가 웃었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피트는 방정맞게 뛰어다닌 것을 말하지 않았고, 톰은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못한 비밀이 쌓여간다. 언젠가 그때는 그런 일도 있었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그런 비밀. 혹은 평생 자신의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가슴 아파할 비밀. 서로 함께하면서도 채우지 못한 공백에는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대신했다.

마지막 바늘땀을 놓던 피트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손을 멈췄다. ‘왜 이러지. 앞이 안 보여.’ 피어오르는 연기와 잔잔하게 깔린 향기를 통해 여전히 촛불이 환하게 밝혀졌음을 알 수 있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눈을 가린 듯했다.

피트는 침착하게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앞니로 실을 툭 끊었다. 다행히 시야를 가린 어둠이 걷혔다. 피트는 떨리는 손으로 반짇고리를 정리했다. 사물은 식별할 수 있었으나, 희뿌옇게 번져 보였다.

“매버릭, 왜 그래?”

톰은 예민하고 예리한 남자다. 그는 피트의 마음이 뒤숭숭한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피트는 반짇고리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서랍장으로 향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눈이 좀 침침해서.”
“오늘 무리했어?”
“별로. 놀기만 했어.”
“노는 것도 쉬엄쉬엄해야지. 너는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해서 문제다.”
“오래간만에 노니까 재밌었어. 쿨라는 벌써 털갈이를 하나 봐. 털이 엄청 많이 빠지더라.”

피트는 방긋 웃으며 서랍장 문을 꼭 닫았다. 톰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네가 오늘 하루 즐겁게 보냈다니 기쁘다. 늦었다. 오늘 할 일도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자자.”
“응.”

피트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톰의 손을 잡았다. 톰은 조심스럽게 피트를 끌어당겨 침상에 눕히고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 톰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피트는 손으로 톰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


이튿날 톰과 피트는 마구간 옆에 닭장을 쳤다. 개들이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 그곳뿐이라 달리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톰은 피트가 일러준 대로 닭장을 금세 뚝딱 만들었다. 봄이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니, 어차피 뜯어내고 새로 지어야 해서 거창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근방에는 닭을 잡아먹을 만한 천적도 없으므로 견고하게 지을 필요도 없었다.

네모난 상자 안에 갇혀 하룻밤을 보낸 닭들은 새로 만든 집이 마음에 드는지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닭이 뛰어넘지 못하게 야트막한 울타리도 쳤다. 피트는 울타리 틈새까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 닭장 문을 열었다. 겁이 없는 청계가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왔다. 닭들은 따사로운 햇볕 아래, 야트막한 땅 위를 누비며 쉼 없이 고갯짓했다.

두 사람은 함께 쪼그려 앉아 모이를 쪼는 닭을 구경했다. 말을 구경하는 것과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벌레를 먹는다고?”

톰이 물었다.

“주면 좋아해. 특히 벌레 꼬인 곡식을 주면 좋아해. 밀이나 보리 같은 거.”

피트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대답했다. 벌레라는 말에 톰이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피트는 곡물가루가 묻어 뽀얀 손을 톰의 코앞에 휘휘 내저으며 물었다.

“벌레 싫어해?”
“벌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벌레 무서워해?”
“무서워하진 않는다.”

톰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피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다음에 톰을 골려 줄 재미난 장난이 떠올랐다.

“무서워하면 안 돼. 이다음에 낚시할 때 미끼도 꿰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주로 지렁이를 미끼로 쓰지?”
“응. 아니면 근처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벌레. 물고기들도 익숙한 걸 좋아하거든.”

피트는 무릎을 쥐고 일어났다. 톰은 조만간 닥칠 암울한 미래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뾰족한 낚싯바늘, 꿈틀거리는 지렁이,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 초봄에 피트가 꼭 낚시를 가르쳐주겠다고 성화라,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그런데 지렁이는 징그럽긴 하잖아.”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에 묻은 흙을 털었다. 뱀은 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지렁이는 께름칙했다. 표정을 알 수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 퉁퉁한 몸에 선명한 마디가 껄끄러운 걸까.

“난 귀엽던데. 통통해서.”
“그래?”
“내가 지렁이를 무서워했다면, 너도 무서워했을 거야.”
“하하.”

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피트의 등 뒤로 슬쩍 다가가서 그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밝히기는.”
“내가 뭘.”

피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툴툴거렸다.

“그래서 좋다.”

톰은 피트를 두 팔로 껴안으며 그의 어깨에 턱을 괬다. 피트는 제 엉덩이에 닿은 단단하게 성이 난 톰의 욕망을 의식했다. 피트는 코를 훔쳤다. 톰은 멋쩍은지 피트의 귓가에 뺨을 대고 마른침만 삼켰다.

“……키르케가 애를 가져도 기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대.”

피트가 빨개진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된다.”

톰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피트는 작게 웅얼거렸다. 지난번에 톰과 잠자리를 거부했던 게 줄곧 마음에 걸렸다. 톰은 평생 가지고 싶은 건 전부 손에 넣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전부 이룬 사람이라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랑을 두고 내쫓겼으니 적잖이 상심했으리라. 피트는 그저 미안했다. 아쉽기도 했다. 자신의 몸이 톰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는데.

“널 곁에 두고도 일 년을 참았다. 네가 여기 와서 처음 달 기우는 밤을 맞이했을 때도 참았어. 난 인내심이 강한 남자다. 기다리는 거라면 자신 있다.”

그런 피트의 고민을 헤아리고 톰은 자상하게 말했다. 피트는 톰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톰은 손가락으로 피트의 배를 간질였다.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피트는 가만히 풍경을 감상했다. 평화롭게 흙을 쪼는 닭,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벌써 봄기운이 실렸다. 너른 들판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감미로운 노랫소리. 꽃처럼 만개하는 빛의 파편. 평온은 어릴 때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나이가 들어 제 발로 걷기 힘들어지는 날이 와도 늦겨울의 햇살은 이처럼 따사로우리라. 가슴이 벅차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돌연 눈앞이 캄캄해졌다.

순식간에 평화가 어둠에 뒤덮이고 을씨년스러운 비명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불에 달군 쇳덩이. 지글지글 피어오르는 연기.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났다. 당황한 피트는 톰의 손을 꼭 붙잡았다.

“톰, 타르르크가 요즘 맘껏 달리지 못해서 심심한가 봐. 데리고 나가서 바람 좀 쐐줘.”
“알았다.”

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피트는 톰의 숨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말갛게 웃었다. 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행히 톰은 별다른 의심 없이 타르르크를 데리러 마구간으로 향했다.

잠시 후, 톰이 타르르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피트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타르르크가 흙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닭이 요란스럽게 달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타르르크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피트는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녀올게.”

톰은 안장 위에 훌쩍 올라탔다.

“응, 조심해서 다녀와.”

피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며 톰과 타르르크를 배웅했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닭들은 닭장으로 들어간 모양인지 잠잠했다. 피트는 눈을 비볐다. 여전히 눈앞이 어두웠다. 두통도 엄습했다.

“왜 이러지…….”

피트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손이 덜덜 떠올렸다. 정말 눈이 멀면 앞으로 어떡하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텐데. 걱정이 앞섰다. 몸이 튼튼하고 남들보다 몇 배로 더 열심히 일하는 게 자신의 자랑인데, 그마저 못하게 된다면. 그럼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신을 톰이 데리고 살 이유가 없었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피트는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자신이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건 배 속의 아이였다. 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병이 들어도 사람들이 자신을 내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는 배불리 먹고 따뜻한 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시야가 걷힐 때까지 피트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다시 눈앞에 빛이 반짝였을 때는 손발이 꽁꽁 얼어붙은 후였다. 피트는 곧바로 마구간으로 들어가 먼지가 뽀얗게 앉은 물통을 깨끗한 물로 갈아주고, 빡빡한 솔로 말을 빗겼다. 피곤했다. 팔다리가 돌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마저 했다.

 
***


오늘은 장제하는 날이다. 말을 돌보는 데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누가 뭐래도 역시 편자를 관리하는 일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이른 새벽부터 톰은 몸을 정갈하게 씻고, 다른 청년들과 함께 오늘 편자를 교체할 말들을 살폈다.

장제는 론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말을 길들이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론이었지만, 편자를 교체하는 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톰도 장제에는 론에게 한 수 접을 정도였다. 어린아이들이 론에게 장제를 배우러 따라왔다. 몇 년 후에는 이 아이들이 말의 편자를 갈아 줄 것이다.

톰은 가장 먼저 호타르를 끌어냈다. 성미가 사나운 놈으로 알렉세이 외에는 누구도 제 등에 앉는 걸 허락하지 않는 까다로운 놈이다. 편자를 교체하는 건 고된 일이라, 아무래도 기운이 있을 때 가장 사납고 예민한 놈을 먼저 끝내는 것이 낫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청년들은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장제를 시작했다. 톰이 호타르의 다리를 잡고, 그 사이에 론이 커다란 집게로 재빨리 낡은 못과 편자를 제거했다. 발굽의 벽을 잘라내고 손질하는 것도 론의 몫이었다.

“피트는 좀 어때?”

론이 떨어진 발굽을 발로 치우며 물었다.

“쉬고 있다.”

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침은 좀 먹든?”
“조금. 많이 먹진 못하더라.”
“이상하다. 입덧도 하지 않는다며?”
“응.”
“그럼 슬슬 식욕이 돌아야 하는데.”
“그래서 걱정이 많다.”
“분명 걔를 처음 봤을 때는 뺨이 통통하고 살집이 제법 있었는데, 내가 꿈을 꿨나 싶다. 그렇게 여윌 줄 누가 알았겠어. 몸집이 워낙 작은데, 살까지 빠지니 애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
“같은 마음이다. 이래서야 장인어른이나 닉 브래드쇼 그 친구를 볼 면목이 없다.”

톰은 불에 달군 편자를 호타르의 발굽에 맞췄다. 미리 준비해 둔 편자라 따로 손을 보지 않았지만, 대강 맞았다. 

“불에 달군 편자를 말발굽에 대볼 때는 조심해야 한다.”

론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평소 능청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진지했다. 열의에 가득 찬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다. 아이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구경에 몰두했다. 

말의 발굽 위로 편자가 남긴 검은 흔적이 짙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호타르가 입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론은 서둘러 줄로 삐져나온 발굽을 다듬었다. 그런 다음 다시 편자를 고정하고 못을 박았다.

약 사십여 분 끝에 호타르의 장제가 끝났다. 론이 워낙 장제를 잘하는 데다 톰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서는 제아무리 숙련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게다가 호타르는 낯을 가리는 놈이라 더더욱. 그래서 호타르의 편자를 갈 수 있는 사람은 알렉세이 외에는 톰과 론뿐이었다.

편자를 갈아야 할 말이 한두 마리가 아니어서, 톰과 론은 점심도 거르고 허리를 펼 틈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론이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며 두손 두발 들었을 때는 벌써 늦은 오후였다. 톰은 그 잠깐의 짬도 편히 쉬지 못하고 피트를 보러 갔다.

어둑어둑한 천막 안은 화로가 꺼져 서늘했다. 피트는 잠들어 있었다. 뒤척임도 없이 조용히. 톰은 피트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소리를 죽이고 숯을 갈았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인기척에 그만 피트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왔어?”

피트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지 마라.”

톰은 피트에게 다가가 그의 손과 발부터 확인했다. 퉁퉁 부어 새빨갰다. 엊그제부터 붓기 시작했는데, 바샤가 준 약을 먹여도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톰은 피트의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손가락 마디도 문질러 주고 손끝도 주물렀다. 피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시원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별일 없어? 편자 가는 날이랬지?”

피트가 물었다.

“그래, 일은 딱히 없다. 점심은 먹었나?”

톰은 피트의 발로 손을 뻗으며 되물었다.

“응, 아까. 너는?”
“나도 먹었다.”

거짓말이다. 피트는 종일 자느라 점심을 걸렀고, 톰도 바빠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걱정하는 게 싫어서 먹었다고 말했다. 피트는 톰이 일에 몰두할 때면 종종 끼니를 거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시 물었다.

“뭐 먹었는데?”
“빵이랑 치즈.”

톰은 대충 둘러댔다. 뻔히 보이는 그의 거짓말에 피트는 마음이 아팠지만, 모른 체했다.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톰의 심정이 더 괴로울 것이다. 대신에 피트는 톰의 거짓말에 동조했다.

“오늘 힘든 일 하는데 잘 챙겨 먹어야지, 왜 그것만 먹었어?”
“많이 먹으면 몸이 부대껴서 일하는 데 방해된다. 끝나거든 배불리 먹으마.”

톰은 피트의 발을 정성껏 주무르며 말했다.

“타르르크 편자도 오늘 갈지?”
“좀 전에 끝냈다. 호타르와 달리 의젓하더라.”
“그럼, 누구 말인데.”

피트는 뿌듯하게 웃었다. 톰은 피트의 발을 마저 주물렀다. 피트가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해가 저물도록 주무를 작정이었다. 톰은 베개를 높이 쌓아 피트의 다리를 올려준 다음에 이불까지 세심하게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게. 푹 쉬어라.”
“다녀와.”
“이따 보자.”
“응.”

톰이 떠나고 나서야 피트는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머리가 몹시 아팠고, 시야가 흐릿했다. 언제까지 톰에게 몸 상태를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톰은 예리한 사람이니 어쩌면 벌써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또 무어라 둘러대야 할까. 차마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피트는 뭐라도 먹을까 하다가 먹을 기운이 없어서 그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피트의 붓기는 며칠이 지나도 좀처럼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밤에는 열도 올라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아침이 오면 지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고, 그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통증 때문에 도로 깼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종일 몸이 찌뿌듯하고 체온이 변덕스럽게 오르락내리락해서 기분도 영 별로였다. 찬바람을 맞지 말란 바샤의 말 때문에 꼼짝없이 천막에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라, 기분 전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옷을 갈아입거나 향을 피우는 일뿐이었다. 눈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해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옥사나가 종종 피우는 향은 맡고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진다. 연기에 에워싸인 피트는 입고 있던 잠옷을 벗었다. 밑이 축축하게 젖어 찝찝한 터라,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벗은 속옷을 정리하려고 집어 들었다가 핏자국이 묻은 것을 발견하고, 피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배가 아프지는 않았는데, 왜.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유산한 걸까. 그렇다면 더는 톰에게 숨길 수 없다. 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피트는 일단 피 묻은 속옷을 반듯하게 접어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겼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서 도무지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귀에서 벌레가 소란스레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또다시 시야가 어둠에 잡아먹혔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두려움에 울먹이던 찰나, 밖에서 옥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트, 들어가마.”
“네, 할머님.”

피트는 얼른 눈물을 닦고 비틀거리며 문가로 향했다.

“오셨어요? 오늘은 날씨가 포근해서 기분이 좋아요.”
“그래. 자, 이것 좀 받아다오.”

옥사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종이 뭉치를 우측으로 던졌다. 여러 장을 겹겹이 쌓아 뭉친 종잇조각은 바닥에 떨어지자 인기척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피트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틀며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옥사나의 숨소리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역시나. 옥사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근래 피트가 걸핏하면 발을 헛디디거나 여기저기 부딪히고,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해서 혹시나 했다. 감각이 예민한 아이라 청각이나 후각에 의지해서 그간 어떻게든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숨겨온 모양이다. 그것도 오늘로 들통나고 말았지만.

“난 여기에 있다, 피트.”
“…….”
“눈이 안 보이는 게지?”
“…….”
“언제부터 그런 게냐?”
“늘 안 보이는 건 아니에요. 가끔 그래요.”

피트는 숙연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실로 꿰맨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옥사나는 피트를 부축해서 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불안해서 좀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피트를 잘 타이른 다음, 화로에 숯을 더 집어넣었다.

“자, 마셔라.”

옥사나는 몇 가지 약재를 넣어 끓인 차를 피트에게 건넸다. 피트는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김을 쐬었다. 뜨끈한 김이 얼굴에 닿으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옥사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피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시력이 오락가락하는 것 말고 다른 증상이 더 있느냐?”
“늘 피곤해요.”
“그건 나도 안다. 손발이 붓는 것도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서 안다.”
“…….”
“피트.”

옥사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피트의 이름을 불렀다. 피트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까 옷을 갈아입는데 피가 비쳤어요.”

피트는 아랫입술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깨물었다. 옥사나는 피트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피가 비치기도 해. 피가 비쳤다고 전부 유산은 아니다. 반대로 피가 비치지 않아도 갑자기 애가 떨어지기도 해.”
“이대로 아이를 잃어버리면 어떡하죠?”

피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처롭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빗나간 채였다. 그는 옥사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옥사나는 피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아이야 또 가지면 된다. 배 속에 품은 아이를 전부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여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고생 끝에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무사히 장성하리란 보장도 없다. 나도 내 자식을 여럿 먼저 보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어디에나 있다.”
“저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아요. 욕심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고 싶지 않아요. 이제 외톨이로 사는 건 싫어요. 또다시 혼자 남게 되면 저도 뒤따라갈래요. 이제 더는 못 버텨요.”
“네가 왜 외톨이야? 네 남편이 있고, 나도 있고, 알료샤도 있는데.”
“무서워요.”

피트는 옥사나의 무릎에 얼굴을 베고 누웠다. 옥사나는 피트의 머리를 매만져 주며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톰이 저한테 실망할까 봐 너무 무서워요. 계속 아프고, 마음고생시키고, 귀찮게 해서 저한테 질릴까 봐 무서워요. 이럴 줄 알았다면 톰을 좋아하지 말 걸 그랬어요. 그럼 톰이 저한테 마음이 식어도 아무렇지 않을 텐데.” 
“얘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미워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에요. 제가 싫어하는 사람은 절 미워해도 괜찮은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이 절 좋아할 수 없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절 좋아해 주면 좋겠어요.”

피트는 옥사나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앳되게 보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겪어보지 못했을 슬픔을. 삶이란 공교롭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낸 사람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다가 편히 늙어 죽는가 하면,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은 적 없는 선량한 사람이 평생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기도 한다. 삶은 비극이다.

“톰한테 말씀 안 하시면 안 될까요?”

피트는 그녀에게 애처롭게 매달리며 빌었다. 옥사나는 잠자코 한숨만 삼켰다. 피트는 떨리는 손으로 옥사나의 손을 찾아 앞을 더듬었다. 보다 못한 옥사나가 먼저 피트의 손을 잡아주었다.

“할머님 말씀대로 그냥 피만 비친 걸 수도 있잖아요. 눈도 아예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괜찮았다가 나빠졌다 하는 거니까……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지도 몰라요. 다리도 그래요.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혼자서 못 걸었어요. 근데 이제 멀쩡하게 걷잖아요.”
“피트.”
“부탁드릴게요, 할머님. 계속 아픈 모습만 보여줘서 톰이 저한테 지칠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톰이 저한테 질려서 떠나버리면…… 저는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게 돼요.”
“내가 톰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영 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옥사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도 자식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지라 피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생살이 찢기고 내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그 위로 새 살이 돋아났지만, 그래도 자식이 숨을 거두던 순간 그 창백한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며칠만이라도. 며칠만이라도. 그 사이에 몸이 나아질 수도 있잖아요.”
“알았다. 하지만 의원한테는 네 상태를 잘 설명해야 한다.”

옥사나는 마지못해 피트의 청을 수락했다.

“네, 그럴게요.”

피트는 겨우 웃었다. 하지만 그 속은 말이 아니었다.

“피가 묻은 속옷은 어떻게 했느냐?”
“옷장에 숨겨놨어요.”
“그건 내가 가지고 가서 처리하마.”
“감사해요.”
“이만 쉬어라. 너무 울지 말고. 내가 어렸을 때, 자식이 죽고 매일같이 울어서 결국 눈이 먼 여자가 있었다. 네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간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네.”

옥사나는 가지고 온 바구니에 피트의 속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휘날리는 깃발 아래, 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사나는 바구니 위에 덮은 천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꼭꼭 덮었다. 톰은 옥사나를 보자마자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조용히 그가 가리킨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톰은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옥사나에게 물었다.

“피트는 좀 어떻습니까? 할머니께는 뭐라도 얘기를 하던가요?”
“일전에 이고르가 소개해 준 의원을 데리고 와야겠다. 후투가나 바샤가 보는 걸로는 한계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아니다. 넌 그렇지 않아도 바쁘지 않으냐. 사람 찾는 것 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만약에 피트가 유산한다면…… 톰이 곁에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꺼낸 말인데, 톰의 눈빛이 선득하게 변했다.

“할머니.”

옥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손자는 더는 품 안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피트의 상태가 어떤지 제게 숨기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톰은 공손하되 제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그의 목소리는 강단 있었고, 눈빛은 이지적이었다. 이래서야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 언젠가는 그도 알게 될 사실, 옥사나는 괜히 불신과 오해의 싹을 틔우기보다는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유산기가 있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피트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무엇을 말이더냐? 아이를 지킬 수 있느냐 묻는 것이냐, 아니면 아이를 잃어도 피트가 견딜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 것이냐.”

옥사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피트가 견딜 수 있느냐 여쭙는 겁니다.”

톰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견디지 못할 것 같다. 그 애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너무 크다. 주변 사람을 잃는 걸 못 견뎌 한다.”

옥사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피트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임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할머님께서는 저보다 경험이 많으시니, 더 잘 아실 걸로 믿습니다. 피트가 때때로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임신 때문에 눈이 멀기도 합니까?”

이미 알고 있었구나. 옥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늘 붙어 지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옥사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톰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잠자코 옥사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제로 본 적은 없다만 임신 중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고생한 여자는 몇 명 안다. 내 사촌 중의 한 명이 그랬지. 하지만 내가 본 경우는 전부 안정기를 지나고 나서 생긴 증상이고, 아이를 낳으니 자연히 나았다. 피트처럼 임신 초기부터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다.”

옥사나는 몸이 떨려 팔짱을 꼈다. 한기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손자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날이 선 눈빛이 자신의 가슴을 베어내는 듯했다. 톰은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부릅 떴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아이를 낳으면 자연히 낫는다고요?”
“그래.”
“유산해도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톰, 설마…….”

옥사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입니다. 태어난다고 한들 장차 어떻게 자랄지도 모르는 아입니다. 하지만 피트는 살아있고,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피트가 무사하다면 상관없습니다.”

톰은 명료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 그는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주시한 불행이란 적이 방심한 순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그건 안 된다. 달리 생각해라. 나한테 꺼낸 말, 피트 앞에선 입도 벙긋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생 그 애에게 원망받으며 살 게냐? 마음이 죽었는데 몸을 살려둔다고 그게 살아있는 게냐?”

옥사나는 완강하게 손을 내저으며 반박했다. 그녀답지 않게 격양한 어조였다.

“백부님이 소개해준 의원은 할머니 말씀대로 론에게 부탁해서 모셔오겠습니다.”
“톰!”

톰은 자신을 붙잡는 옥사나의 애타는 음성을 외면하고 자리를 떴다. 옥사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옥사나는 비틀거리며 바로 섰다. 톰의 천성이 알렉세이보다 비정하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알렉세이에게는 모자지간의 정으로 호소한다면 통했을 법한 일도 톰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알렉세이보다 톰이 인정 넘치고 온화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까닭은 그가 사람과 대화하는 데 능숙하고 상대방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었다. 이미 모든 패를 알고 있으니, 말을 전진시키기만 하면 승리는 정해진 싸움이었다.

다만 제아무리 톰이라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옥사나는 막막할 따름이었다.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 있겠냐마는, 그녀도 톰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태어났으면 모를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목숨까지 걸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당사자인 피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음산하게 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허공에 겨울의 눈물이 스며들어 침울했다.


=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3.05.25 22:07
ㅇㅇ
모바일
아니야....그거 아니야....다시 생각해 톰 카잔스키........생각의자에 앉아서 다시 생각하라고....
[Code: cac9]
2023.05.26 00:05
ㅇㅇ
모바일
와...와...닭샀냐고 물어보고 보면서 뭘 물어봄 이런식의 부자대화에서 약탈혼 가담자들 엄벌에 처하고 톰 발로 걷어차서 갈비뼈 부러뜨린 알렉세이 아부지 어디가셨냐고 실실 웃으면서 내려왔는데ㅠㅠㅠㅠ옥사나가 알렉세이와 톰이 비슷한 나이라 맞붙으면 톰이 이길거라는 말이 이런식으로 돌아오다니...내센세 진짜 천재 만재...ㅠㅠㅠㅠ아니 그런데 이런식으로 이기는건 너무 무섭잖아요ㅠㅠㅠㅠ
[Code: 4d54]
2023.05.26 00:13
ㅇㅇ
모바일
천성이 비정하다니...ㅠㅠㅠㅠ그러고보면 애초에 사랑을 받을 생각도 줄 생각도 없는 남자였지ㅠㅠㅠㅠ천성은 비정하면서도 그것을 감출줄알고 타인의 속내를 꿰뚫는 사람이라니...무서워요 너무 무섭고ㅠㅠㅠㅠ진짜 피트의 건강을 위협한다면 자기 자식조차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쓰고도 남을 것 같아서 이 날씨에도 소름돋았어 갑자기 추워졌다ㅠㅠㅠㅠ옥사나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면서 흔들리는 모습도 처음본다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강철보다 단단할 옥사나조차 두려움에 떨게하다니..ㅠㅠㅠㅠ
[Code: 4d54]
2023.05.26 00:37
ㅇㅇ
모바일
안돼 ㅠㅠㅠㅠㅠ 아무리 피트가 소중하고 귀하다해도 몸을 살리려고 영혼을 죽이게 될 일을 하려고 하다니 톰 다시 생각해 이번에는 정말로 피트를 영원히 잃게 될 수도 있어 ㅠㅠㅠㅠㅠㅠ
[Code: 40d9]
2023.05.26 00:41
ㅇㅇ
모바일
그런데 톰 입장에선 또 이해가 가는 선택이라서 미치겠어 ㅠㅠㅠㅠㅠㅠ톰에게 피트의 존재는 세상 그 자체인데 그런 피트를 영영 잃을수도 있다는 두려움 피트가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톰이니 당장 태어나지 않은 아이보다 피트를 살리는게 최우선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고 ㅠㅠㅠㅠㅠㅠ 그저 센세만 믿습니다 피트 빨리 낫게 해주세요 ㅠㅠㅠ
[Code: 40d9]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