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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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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뭘 그리 준비하시느라 바쁜가 했더니 루디를 준비하느라 그랬나봐. 팔찌며 옷이며 몇 개씩 사라졌다가 슬그머니 돌아오는게, 다 루디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는거야. 향을 미리 맡아두고 익숙해지게 하면 더 친해지기 쉽다나. 그러고보니 확실히 루디는 저를 처음 보는데도 마치 오래본 사이마냥 익숙하게 제 무릎 위로 올라 앉기도 하고 품에 안기기도 했지. 예뻐해달라며 머리를 들이밀기도 하고 나중엔 결국 제 품에서 살짝 잠이 들기도 했지. 제 처소 근처에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미리 지으면 또 알아차릴까봐 그러지 못 했다는거야. 이제 루디를 보여줬으니 집을 지어줄 차례라나. 다시 돌려보낼 때에는 아쉬워서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더니 저도 가기 싫었는지 손가락 끝을 아프지 않게 앙앙 울면서 계속 애애앵 울어댔고.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아쉽고 그러던지. 데리고 자면 안 되겠냐 물었더니 그건 질투가 나서 안 되겠대. 

거짓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씩 웃으며 돌아봤는데 황제의 표정이 생각보다 진지했지. 농담이시겠지요? 물었는데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더니 냅다 품에서 루디를 데려가더니 사람을 시켜서 아예 데려가게 시키는거야지. 황망한 표정의 황후가 루디와 황제를 번갈아 돌아봤어. 멀어지기 싫다는듯 루디가 앞발로 관리인의 어깨를 박박 긁었지. 자라기는 했지만 발톱은 여전히 쌀알 같은 어린 애가 바둥거리는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저렇게나 어린데. 투덜거리니 황제가 옆에서 입을 삐죽여. 어리기는, 한참 자랐는데. 



황제야 루디가 훨씬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진짜 손바닥만한 시절부터 봐왔기 때문에 한참 자랐다는걸 알고 있지만 황후 눈에야 아직도 한참 어리거든. 루디가 잠을 잘만한 곳을 마련하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안 된다 황제가 못을 박았어. 안 그래도 처소 한켠에 루디가 머물 곳을 마련해주면 하루종일 품에 끼고 있을게 뻔한데 벌써부터 그런걸 보고 싶지 않았거든. 루디를 황후에게 선물한 것은 정작 자기 자신이면서 양가감정이 들었지. 
보통 질투는 후궁이 하는게 아니던가? 황제가 질투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데 대상이 다름아닌 루디, 그것도 황제 본인이 질투를 하다니 믿기지가 않아 황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지. 사람도 아니고 여우, 그것도 자신이 훈련하는걸 도왔다는 루디에게 말이야. 믿기지 않아 가만히 바라봤더니 창피하니까 그렇게 보지말래. 붉어진 얼굴이 신선해. 
 
황후에게 황제는 늘 어려운 사람이었어.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피고 말을 조심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지. 언제쯤 저를 돌아봐줄까 늘 마음을 졸이게 만들던 사람이었는데 어느덧 이제 자기가 선물한 여우에게 질투를 하다니 이게 꿈인가 싶고.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빤히 바라보자 멋쩍었는지 그리 보지 말라며 민망해 해. 틈틈히 루디 훈련을 도왔다는 사람이 정작 루디에게 질투를 하다니. 훈련을 도왔으니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루디와 함께 보냈을테고, 그러면 애정을 더 깊이 가지고 있으면 있었지 덜 가지고 있진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질투대마왕이 나타나버린거야.



황후가 계속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얼굴이 붉어진 황제가 손을 내밀어 황후를 끌어당겼어. 영문도 모르고 순한 표정으로 끌려온 황후를 끌어안고는 입을 맞춰. 토라졌는지 입술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걸 잘게 입술을 쪼아대고 등을 살살 어루만지다 한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을 꾹 누르자 작게 히익-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지.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황제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혀를 옭아매. 뭔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웅얼거림이 목을 타고 넘어가. 루디를 돌려보낸게 그게 그렇게 서운했나. 조금 더 놀고 싶었나? 이렇게 대놓고 뾰로통한 황후는 또 오랜만이라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결국엔 항복 하기로 했는지 얌전히 목에 팔을 걸어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속눈썹은 덤이고. 늘 입맞춤을 할때면 수줍게 감기곤 하던 버릇은 여전할거라 생각해서, 도중에 살며시 눈을 뜨니 웬일로 눈을 뜨고 있는거야. 하지만 눈이 마주친걸 알아차리고는 금세 꽉 감기지. 오늘은 토라져서 눈을 감지 않은걸까? 새초롬하게 깜빡이던 눈이 꽉 감기니 서운해져. 부끄러워 늘 보여주지 않던 녹음이 저를 향하고 있었을거라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해. 괜히 아쉬워서 조르듯 더 강하게 혀를 옭아매고 좁은 입 안을 휘저어. 목에 둘러진 팔에 힘이 실리는걸 알면서도.  





한참만에야 황후를 풀어준 황제는 조금 전보다 한층 뾰로통 해진 황후를 덥썩 끌어안았어.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루디를 끌어안고 잘텐데 벌써부터 그럴 필요가 있나. 설령 저를 소심한 소인배라 말해도 어쩔 수가 없어. 제가 선물해놓고도 질투한다 소리를 들어도 그 애정어린 시선은 저만 받았으면 좋겠는걸 어떡해.  
고맙다며, 잘 키울거라 말에 함께 키우자고 했더니 또 뭐가 그리 좋은지 뺨이 볼록 솟아. 어떤 말이 그렇게 좋았을까. 함께라는 말이? 알버트랑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면, 꿈에서 아기 여우가 우리 둘을 구해줬으니 이번엔 우리가 아기 여우를 잘 키워보자는 말이? 뭐가 됐든 좋아. 기대로 설레 발그레해진 뺨은 언제봐도 사랑스럽고 뿌듯해. 제 손을 잡고 얼른 루디의 집을 지어달라며 눈을 반짝이는게 귀엽고. 연신 루디가 귀엽다며 중얼거리던 모습이 무색할만큼 본인도 귀여운걸 모르는가봐. 이제 마음껏 얼굴을 마주보고 끌어안을 수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온 몸이 으스러져라 꽉 껴안아도 이제 아무 문제가 될 게 없거든. 숨 막힌다며 황후가 제 등을 탁탁 치고 바둥거릴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지. 









소원 편지에 쓰인대로 두 사람은 시원한 정자에 앉아 차갑게 얼린 수박을 먹기도 했고 뒷산으로 놀러가기도 했어. 계곡물에 놀러가 발을 담그기도 했지. 다리가 불편한 황후는 황제와 함께 말을 타고 이동했어. 저는 괜찮으니 다녀오라고, 개념치 마시고 다녀오라는걸 부득불 같이 가야겠다고 끌고 간 덕분이야. 가마를 타고 계곡 근처까지 이동한 황후를 황제가 제 앞에 태우고 말을 직접 몰았지. 여태 황후와 많은걸 해봤지만 말을 함께 타본건 처음이야. 부득불 괜찮다는걸 또 내가 해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부득불 우겨서 황후를 태웠지. 불편한 다리로 말에 오르기엔 당연히 불편하기 때문에 디딤돌을 받친 후에 황제가 직접 안아서 안장에 올렸어.

바야흐로 온 세상에 녹음이 드리워진 계절이야. 뒷산 계곡에 가보고 싶다던 황후의 옛말을 떠올려 연등에 적었던 황제는 괜찮다는 황후를 꾸역꾸역 말에 태웠지. 같이 가는게 목적인데 저 혼자 가서 뭐하라고. 말의 고삐를 잡은 황제가 말을 천천히 몰았지. 입궁 이후로는 말을 한 번도 타보지 못 한 황후를 배려해 말을 천천히 몰았어. 오랜만에 황궁 밖으로 나온 김에 조금이라도 더 바깥 풍경을 보라는 뜻이기도 했고, 다리가 불편하니 말을 천천히 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부담이 될까봐. 




황후 또한 오랜만의 외출에 들떴어. 입궁 이후로는 외출을 한 번도 제대로 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단말이야. 그도 그럴게, 황제는 행사다 뭐다 해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거나 잠행을 하는 일이 있다지만 황후는 그럴 일도 없거든. 그야말로 거대한 새장에 갇힌 신세라 생각하고 입궁을 했는데, 황제가 직접 모는 말 위에 앉아서 계곡을 가다니 믿기지가 않아. 그조차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곳이라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이었지. 숲이 가까이 있는지 숲내음이 몰려와. 황제의 향과 닮은듯 하면서도 다른, 여러가지 나무들의 냄새가 섞인 향이야. 저도 모르게 킁킁거리고 있었더니 뒤에서 무슨 냄새라도 나냐는 말이 들려와. 말의 체온에다가 더운 여름날인데다가 앞 뒤로 딱 붙어서 가니 신경이 쓰였나봐. 그런게 아닌데. 숲에 들어오니 폐하의 향과 비슷한 향이 나서 그랬을 뿐인데. 아니라 말하고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부러 등 뒤에 있는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살짝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불긋해진 얼굴이 보여. 민망했던걸까? 괜찮다는 의미로 웃었더니 더 발개져. 정말 괜찮은데. 괜찮다고 한 번 더 말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턱 끝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바로 고개를 다시 돌려. 원래는 뺨에 하려고 했는데 급하게 하다보니 턱 어디메쯔음에 부딪혔는지 좀 딱딱했지만 뭐, 당황한듯한 헛기침소리를 노랫소리 삼아 말을 몰았지. 













차가운 계곡물에 물을 담그고 있으니 더위며 모든 시름이 날아가는 것 같아. 깊은 숲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황제의 향과도 닮아있어. 하지만 여러가지 나무가 심어져있는만큼 향도 다양했지. 편백나무향인 황제의 향과는 조금 달라. 향을 맡으면 늘 마음이 편안해지고 때론 잠도 쏟아지게 만들던 향이야. 

숲에 들어오니 마치 황제의 향이 온 몸을 감싸는것 같아. 시원하면서도 머리가 맑아지는 향이라 마음까지 편해지는 느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원래도 황후는 외출을 하기가 어려운데다가 다리가 이렇게 된 이후로는 아예 불가능할거라 생각하고 단념하던 차였지. 다리가 이모양이라 외출을 하는데 부담이 있을거라 생각했고, 저를 끔찍이 여기는 황제가 저를 데려갈것 같지도 않았어. 뭐 꼭 가야만 한다 이런건 아니고 그냥 여름이 오면 계곡에 발이나 담그고 과일이나 먹으며 정자에서 좀 쉬어보고 싶었던거지, 그래서 못 간다고 해서 엄청나게 서운하거나 그럴 일도 아니야. 다리가 이렇게 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단념하게 되어버린 소원 중 하나였지. 그래서 더더욱 의외였어. 자신과 꼭 함께 갈거라고, 자신 혼자 가는건 의미가 없다고 박박 우기더니 저를 여기로 데려오려고 했나봐. 제가 예전에 썼던 편지의 내용 때문에. 옛날에 썼던건데 그걸 잊지 않고 지키려고 해준 사람이야.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미안하고. 제 청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도 고맙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그냥 풍덩 몸에 담그고 싶기도 해. 더위를 크게 타지 않는 저도 이런데 더위를 많이 타는 황제는 어떨까 싶어 바라보니, 황제가 다른건 안 하고 제 다리를 빤히 바라보는거에 정신이 팔린거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발이 저리지는 않냐는거야. 내내 뭘 보고 있었나 계곡에 가재라도 있었나 싶었더니.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냅다 제 발을 허벅지 위로 올려놓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지. 옷이 젖는것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라 기겁을 하며 빼려고 했더니 혹시나 다리가 저릴까봐 걱정이 된다는거야. 종아리부터 타고올라간 손이 무릎을 매만져. 날이 궂거나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유독 쑤시고 저린 부분이라. 피서를 하러 온 건데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는지6 꼼꼼히 살피기 시작해. 젖은 다리가 옷을 적시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는 오히려 더 당기며 아파서 빼는 거냐는 소리나 해대고. 걸어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가 말을 몬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나 몰라. 

천천히 타고 올라온 손이 다리를 어루만져.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져. 탁 트인 공간에서 괜히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 얼굴이 절로 붉어지고. 그걸 또 착각한 황제가 몸이 안 좋으면 돌아가자 채비를 한다 부산을 떨어대서 그걸 말리느라 또 뻘뻘 애를 썼던건 비밀이야.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엉뚱한 소릴 해대서 황제의 주위를 환기 시켰는데 수박까지 준비를 해올줄은 몰랐지. 위치가 한참 북쪽인 수도에서는 수박을 구하기가 어렵다 들었는데 그 밖에 참외며 복숭아며 이것저것 과일들이 줄줄이 나와. 사실 예전에 편지를 쓸 때는 정말 이걸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과 함께 있을 구실이 필요해서 그런걸 썼던거야. 그냥 그래보고 싶었던거지 정말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쓴게 아니었어. 그저 그냥 여름 행궁 나들이를 하실 때 이 사람이 그런걸 썼더랬지, 하고 훗날 떠올려주기를. 딱 그정도의 마음으로 썼던건데. 

제 손에 큼직한 수박을 쥐어주며 먹어보라며 다정하게 눈을 맞춰주는 사람이 정말 내 정인일까 싶어. 어쩌면 영원히 제 차례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눈 앞에 있어. 그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편지들 중에 하나로 치부될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보낸 편지들을 모아뒀다던 황제가 그 사소한걸 기억해놨다가 연등에 매달줄 어떻게 알았겠어. 또, 그걸 지키려고 이 야단을 떨거라고는 어떻게 알았겠어. 




수박을 든채 또 울망한 얼굴로 호두턱을 만들고 있는 황후를 본 황제가 탄식해. 이제 얼굴만 봐도 알겠거든. 수박이 마음에 안 든건 아닐테고, 그렇다고 괜찮다고 했던 다리가 아픈건 아닐테고. 이 눈물 많은 황후가 또 아무것도 아닌 제 행동에 또 감동을 받아 눈물을 만들고 있는거겠거니. 제 앞에서도 이렇게 눈물이 많은데 저가 안 보이는데서는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싶고.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것들에 감동을 받아서 우는데, 이렇게 되기 전에 좀 많이 해줄걸 그랬나 싶어. 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나 몰라.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쏟아낼 기세기에 황제는 서둘러 수박을 황후의 입에다 물렸어. 울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이에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해주리라 다짐하면서. 이런것에 감동을 받아 울지 않도록.
















이후로도 황제의 '소원 이루기'는 계속 이어졌어. 이젠 황후 본인조차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옛날에 썼던 소원이라 황후가 기억을 못 할 때도 있었지. 그리고 토라진 황제가 어떻게 본인이 쓰고도 기억을 못 하냐고 입을 삐죽일 차례였지. 하지만 황후는 정말 기억에 없는 일이었어. 그런 식으로 쓴 편지가 뭐 한두개였어야지. 햇수로 보면 그렇게 오래 된 건 아니지만 참 많이도 쓴 덕분에 잊어버린 것도 많았는데 저조차 잊어버리고 있던걸 어떻게 다 세세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나 몰라. 뒷산의 계곡에 가는 것도 해봤고 뒤뜰에 심은 자두도 같이 따먹어 봤고 후원에서 작게 불꽃놀이도 해봤지. 가을이 되자 제법 자란 루디와 함께 나들이를 가거나 호수가에 가 뱃놀이를 하기도 했지. 제법 자란 루디는 물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호수가 신기한지 배의 벽에 바짝 붙어서서는 꼬리를 흔들며 바라보기도 했어. 혹시나 빠지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황후가 이름을 부르면 뭘 하다가도 호다닥 달려와서는 황후의 다리 옆에 찰싹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었지. 정작 훈련은 나도 시켰는데 왜 저렇게 황후를 잘 따를까 싶으면서도 그래도 황후를 잘 따르니 안심이 돼. 





다시 추워지는 계절에 별로 둘 다 좋은 기억은 없기도 하고, 날이 추워지면 다리 상태가 안 좋아지기 때문에 황후도 황제도 걱정이 많아지는 때야. 아무래도 황제쪽이 좀 더 그랬겠지. 겨울엔 황제의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았으니까. 황후도 그걸 알아서 일부러 더 밝은 척을 했고. 루디와 함께 있으면 질투를 하는것 같으면서도 내심 안도하는게 얼굴에 그대로 보였으니까.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면서 루디를 껴안고 있으니 탕파가 따로 필요가 없는거야. 보드랍고 촘촘한 털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지. 사실 제 체온이 더 낮을것 같은데도 루디는 한번 안기면 제 품을 벗어나려고 하질 않고 무릎 위에 꼬리를 말고 누워서는 곧잘 잠들고는 했지. 설마 그런 의도로 그러려는건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찜질이 되버렸고. 제법 풍성해진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여대면 저절로 졸음이 몰려오곤 해.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이 옷 위를 간질이는 감각이 기분 좋기도 하고. 

황후의 전용 탕파가 되어버린 루디와 그런 루디를 부쩍 제 친구로 여기는 알버트. 황제도 꿈꾸고 황후도 꿈꾸던 삶이야. 비록 조금 돌아가고 예상치 못 한 일도 생기긴 했지만, 어쨋거나 황후의 생일날에 빌었던 소원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셈이지. 비록 완벽하진 못 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사고가 있었다하더라도.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이냐 싶으면서도 아쉬운건 여전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보다 더 힘들었을게 분명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티를 내지 않기로 해. 다리를 신경쓰는 저를 황후가 더 신경쓰는 모양이라서. 혹시나 또 이 사람이 다리 때문에 쪼그라들까봐, 또 이 사람이 껍데기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아프하지는 않으려나. 행여나 또 제가 준 상처에 웅크리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제 황제는 알아. 더 이상 황후는 상처를 숨기지 않고 웅크리지도 않는다는걸. 만약 상처를 받더라도 이젠 서로에게 숨기지 않는다는걸 알아. 서로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서로 많은 것들을 약속했어. 아플 때 절대 숨기지 않기, 서운한게 있으면 마음에 담지 말고 바로 말하기, 늦은 시각까지 기다리다가 잠들지 않기...대부분 황제가 황후에게 요구한 것들이야. 사실상 황후는 요구한게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저만 요구하는게 많아 보여 민망해진 황제가 황후에게 바라는 것이 없냐고 물을거야. 

하지만 황후는 정말로 바라는게 없어. 그토록 바랐던 브래들리의 애정과 사랑, 그리고 아이까지 무사히 낳았고, 최근에는 또 루디가 생겼거든. 꿈 속에서 저를 깨우며 앙앙 울던 여우보다는 더 자란 모양새지만, 저만 보면 꼬리를 살랑대는 바람에 황제의 질투를 온 몸에 받기도 했고. 자신이 알버트를 앉으면 손목 나간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와서는 본인이 안아버리고, 무릎 위에서 루디가 꼬리를 말고 탕파 노릇을 하고 있으면 무겁다고 달랑 들어버리고. 아니 따뜻하고 좋은데 왜요, 같은 말은 소용없어졌지. 아직 완전히 크지도 않은 여우인데 여우가 무거워봐야 뭐 얼마나 나오겠어. 그런데도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지. 조금 있으면 알버트가 루디의 성장속도를 앞지를텐데, 그 때도 무릎 위에 앉히는걸 못 하게 하려나 싶어 베싯 웃고는 살며시 황제를 끌어안아. 내친김에 금목서 향을 조금 흘리자 황제의 표정이 곤란해져. 옛날에는 이 사람이 그렇게 좋으면서도 무섭고 조심스러웠는데 이렇게 알기 쉬운 사람이 될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제 말이라면 뭐든지 다 해줄 것처럼 구는데 농담으로라도 뭔가를 말 했다는 황궁의 대들보까지 빼올 기세라. 


원하는게 있다면 별건 없고 한 가지 정도면 될 것 같아. 올해의 겨울에는 아무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그 누구의 눈에도  눈물이 나지 않기를.
내년에 또 봄이 오고, 여름이 찾아오고, 가을이 찾아오고 또 두 사람에게 아픈 계절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쭈욱 이만하면 될 것 같아. 저와 브래들리, 알버트 그리고 루디까지. 이 넷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눈을 감고 있으니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어. 머리칼도 땀에 젖어서 어느쪽인지도 모르겠고 피부색도 창백하니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지. 피에 푹 젖은 새하얀 침의는 여전히 악몽의 단골소재야. 차갑게 식은 창백한 손의 온도는 꿈인데도 어쩜 그렇게 얼음장처럼 차가운지 몰라. 너무 차가웠던 나머지 일어나서 한참을 손으로 문지르곤 했지. 얼음장 같던 온도를 벗어내려 강박적으로 손을 문지르고 비비다보면 벌개질 때도 있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아. 어서 빨리 냉기를 덜어내는게 더 중요했거든. 

황제에게 꿈은 오래된 악우 같은 존재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톰이나 제이크의 꿈은 이제 더 새롭지도 않다는 뜻이지. 예전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거나, 꿈에서 깨어나 집착적으로 황후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도 부쩍 줄어 들었어. 뒤에서 황후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루디가 황후의 품을 빠져나와서 제 뺨을 할짝이기도 했고. 때론 무언가 계속 제 몸을 치는듯한 느낌에 눈을 떠보면 루디가 제 배 위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지. 마치 잠을 깨우려는듯이 말이야. 저는 루디 얼굴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허공에 호박색 눈동자만 동동 떠있는걸 보고 간신히 위치를 파악하고 눈을 뜬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여우 특성상, 제 얼굴을 기가 막히게 찾고는 뺨을 할짝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지금도 저를 꿈 속에서 건져 올려주곤 했지. 그러고보니 루디가 수호신인가 싶기도 하고. 




이제 꿈 속에 여우가 나타나는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아. 알버트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루디라고 불러야 할까. 번갈아가며 불러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앙, 앙 짖기만 해. 바보야 너 부르는거잖아. 살짝 코 끝을 튕기는데도 순한건지 좋다고 주둥이를 들이대. 날 위로해주는거야? 가만히 머리를 들이밀며 품에 안기는데 이제 제법 묵직해. 현실의 루디는 아직도 솜뭉치인데 반해 꿈 속의 여우는 솜털을 벗어버리고 어느덧 진짜 여우같은 풍성한 털로 탈바꿈을 했지. 귀도 세모나게 쫑긋 서있고. 주둥이부분도 제법 길어져서 여우 태가 제법 나. 루디의 미래의 모습은 이런걸까? 혀로 손등을 날름거리더니 이내 꼬리를 말고 제 무릎위로 몸을 말아. 저번에는 어디론가 끌고가기 바쁘더니.

가만히 등허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은듯 가르릉 소리를 내더니 입을 벌리고 작게 하품까지 해. 완전히 상전이 따로 없다 싶으면서도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잠드는게 귀엽고. 무릎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든 여우의 등을 한참이나 쓸던 황제가 어느덧 고개를 들어 톰의 무덤이 있는 곳을 내려다보았어. 한때는 지박령마냥 무덤을 떠나지 못 하고 맴돌았던 것도, 초상화에 집착하여 그 누구도 사당에 발을 들이지 못 하게 했던 것도 모두 아집이자 집착이었던걸 알아. 당시에는 그걸 인정하기 싫었지. 인정하면 톰이 떠난걸 정말로 인정해야 될 것 같아서 더 그랬을지도 몰라.

 새롭지 않다고 아무렇지 않은건 아니야. 여전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절망적이지만 이젠 더 이상 피로 붉게 젖은 톰의 무덤을 슬프게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어. 이젠 과거를 쫒기보다는 현실에 살아보고 싶어졌거든. 저에게는 황후와 알버트 그리고 루디가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톰의 무덤이 더 이상 붉게 보이지 않게 된 것도 꽤 된 일이야. 뒷산에 올라 무덤을 굽어 내려다보면 피로 덮인 침의처럼 늘 붉게 보였어.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무덤으로 보였지.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잘 정돈된 푸릇푸릇한 무덤 말이야. 





한참을 동산에 앉아 저 멀리 푸른 무덤을 바라보던 황제가 일어서. 어느새 잠이 깬 여우가 푸다닥 거리며 뒷발로 귀를 긁다가 저를 따라나서. 그러면 몇 발자국 내딛다가 만 황제가 다시 무릎을 꿇어앉고 여우 곁에 앉아 여우의 턱을 살살 긁으면 눈이 휘어져라 웃을거야. 동시에 황제시선은 황궁이 있는 곳을 향하지. 꿈 속이라 그런지 흐드러지게 핀 금목서의 향이 코 끝에 맴돌아. 황후의 곁에 가면 폴폴 날리던 그 향 말이야. 눈을 감은채 깊게 향을 들이마신 황제가 어느덧 고개를 돌려. 황궁, 정확히는 황후가 있는 곳이지. 황제는 그곳을 가리키며 말해.




가자, 루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end





루스터행맨
 
2024.03.30 03: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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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센세 완결이라니
[Code: 9c8e]
2024.03.30 03: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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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좋은데 좋지 않아
[Code: 9c8e]
2024.03.30 03: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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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와줘서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귀한 금무순 쉬벌 눈물나네
[Code: 9c8e]
2024.03.30 0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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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루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마지막 문장까지 개좋네

가자, 센세 . 내 지하실로!
[Code: 9c8e]
2024.03.30 04: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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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완결내줘서 진짜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 꽉막힌 해피엔딩이라 존나 행복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 진짜 센세 무순 기다리면서 몇달 행복하게 지냈어.... 황제랑 황후가 이젠 정말 속을 트고 편하게 사랑하는 가족이 된 것 같아서 존나 벅차올라 센세ㅠㅠㅠㅠㅠㅠ 어흐흐흐흐흑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 외전 18374869492나더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아...
[Code: 48c8]
2024.03.30 04: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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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까지 네명 모두 오래오래 행복해야해...ㅜㅡㅜㅠ 선세 좋은 글 너무 고마오........꼭 외전 들고와주기야,...
[Code: a352]
2024.03.30 06: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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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세 완결내줘서 고마워 ㅜㅜ 함께 달릴 수 있어서 행복했어 ㅠㅠ
[Code: cef2]
2024.03.30 07: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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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센세아ㅠㅠㅠㅠㅠ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일단 선설리ㅠㅠㅠㅠㅠㅠㅠ
[Code: e721]
2024.03.30 21: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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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할지... 일단 완전 꽉닫힌 해피엔딩이라서 너무너무 좋고 너무너무 행복하고 고마워ㅠㅠㅠ 황제랑 황후의 모든 발걸음을 함께 하다보니 같이 울고 웃고ㅠㅠㅠㅠㅠ 이 황궁의 여우가족들이 평생 행복하리란걸 생각하면 안심도 되고 여운이 많이 남는다.. 진짜 센세가 오는날만 기다리고 기다렸었는데 오늘은 끝나더인걸 보고 몇번을 들어갔다나왔다했는지 몰라ㅠㅠㅠㅠ 해피엔딩이라 행복한데 이제 센세 못보는건가싶어서 너무 아찔하고ㅠㅠㅠ아쉽다ㅠㅠㅠㅠㅠㅠ 아직 보내줄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ㅠㅠㅠ센세 이렇게 애들 행복하게 잘 사는거 끝까지 다 보여줘서ㅈ너무너무 고마워 영원히 잊지못할거임ㅠㅠ 붕키의 마음속과 북마크에 이 둘 얘기 넣어두고 두고두고 볼거니까 햎끝나는 날까지 지우지 말아주라ㅠㅠㅠ 말나온김에 정주행 또 해야겠음.. 센세 성실센세 너무너무 고마워 사랑해 우리 또 봐요 내 지하실에서ㅠㅠㅠㅠㅠㅠ
[Code: b5de]
2024.03.30 07: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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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꽉닫힌 해피엔딩이라 너무 행복해 글써줘서 너무 고마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동안 센세 덕분에 너무 행복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bd4]
2024.03.30 10: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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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이라니 나는 아직 떠나 보낼 준비가 안됐어 외전으로 돌아와줘ㅠㅠㅠㅠ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황제랑 황후랑 알버트랑 여우까지 행복하게 살 것 같아서 좋다 황제가 질투하는 것도 귀엽고 소원 하나씩 해보는 것도 뭉클해 그거 쓸 때 황후는 실제로 할 수 있다고 생각 안했는데 정말 많이 바뀐게 실감난다ㅠㅠㅠㅠㅠ
[Code: b16c]
2024.03.30 10: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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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고 완결이라니!!! 하고 아쉬움에 외치면서 들어왔는데 너무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이라 가슴 속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다ㅠㅠㅠㅠㅠ황후의 소원 하나씩 이루어주는 황제도 좋고 알버트랑 여우를 포함해 가족들이 앞으로 쭉 행복할 거 생각하니까 좋아...완결까지 너무 고마웠어 센세!!!
[Code: 974b]
2024.03.30 11: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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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끝을 맺어줘서 너모 감사해요....ㄴ정말좋아....
[Code: 689b]
2024.03.30 13: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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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이 있는거지...????? 그동안 잘봤어 ㅠㅠㅠ
[Code: a1a4]
2024.03.30 15: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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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완결이라니
[Code: 715e]
2024.03.30 15: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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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까지 내줘서 너무 고맙고 복습 매일 해야되니까 혹시라도 그럴 일 없겠지만 삭제하지 말아줘ㅠㅠ
[Code: 715e]
2024.03.30 15: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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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많았던 루스터랑 행맨이 서로 보듬어주기까지 그 과정 보느라 너무 행복했어ㅠㅠ 시간이 되면 언제든 외전으로 돌아와줘 ㅠㅠ
[Code: 715e]
2024.03.30 21: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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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넷이 서로 보듬고 잘 살기만 하면 되니까ㅠㅠㅠㅠㅠㅠ 행복해라 으엉ㅠㅠㅠ
[Code: f02e]
2024.03.31 06: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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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어...
[Code: f6da]
2024.03.31 19: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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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완결내줘서 고마워 매일 오늘은 어나더있을까?하면서 색창 도는 설렘이 없다고 생각하니 아쉽지만 완결까지 포기하지 않고 써줘서 너무 고마워 루행 연애하는 거 읽느라 너무 즐거웠어
[Code: a4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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