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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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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기의 정실에서는 진중하고 다소 고집스러운 느낌의 단향목 향기가 풍긴다.
남희신의 한실은 학자와 같은 고서와 고목 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는 사람을 무겁게 누르는 듯한 솔향이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위무선은 실눈을 뜨고 반질반질한 바닥, 겹겹이 놓인 책장과 기둥을 스쳐 멀찍이 앉은 무서운 사람의 뒤통수를 훔쳐보았다.
한 시진이 훌쩍 넘도록 앉은 자리에서 꼼짝을 않는 남계인의 위압감에 편하게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위무선은 좀이 쑤시다 못해 그만 뒷골이 땡겨서 죽을 맛이었다.
음호부를 파괴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남희신이 작성한 술자의 명단에 위무선은 없었다.
아직 금단이 여물지 않아 36인의 영력 주입자에 포함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관리자라도 시켜달라는 걸 거절당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망기는 단지 한 공간에 있게 해 달라는 부탁마저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뭔가 제가 도울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위무선은 철벽같은 남망기를 피해 남희신에게 호소했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위공자는 음호부를 주조하여 공을 세웠으니 할 만큼 한 겁니다. 마음 놓고 맡겨 두십시오.”
그것만 해도 짜증이 나기에는 충분했는데, 남망기가 하필 남계인에게 위무선의 감시를 부탁한 것이다.
남계인은 음호부를 부수는 일에 앞장서서 일조할 참이었지만, 남망기가 위무선을 부탁하자 곧바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위무선은 그만 까무라칠 뻔했다.
명실에서의 작업은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모두의 영기의 크기를 비슷하게 맞춰야 하고, 기술서에 따라 기를 모으고, 각 주요 방위의 관리자들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계속해서 영력을 소모해야 하는 작업이라 연습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남망기가 위무선을 데리고 가려고 돌아온 것은 이렇게 가두어진 지 한나절은 지난 뒤였다.
문이 열리자 위무선은 얼른 일어나 남계인을 향해 성의 없는 인사를 한 다음 뛰쳐나갔다.
남망기는 일부러 무시하고 쌀쌀맞게 지나쳐버리는 위무선을 돌아보며 곧바로 뒤따라나갔다.
위무선은 한참 동안 비어 있었던 객실 앞까지 내려가도 따라오는 남망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열이 받은 얼굴로 봐서는 코 앞에서 문을 닫아버릴 기세였지만, 곧장 남망기의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방 안으로 끌어넣었다.
“남잠, 웃기는 짓 그만하고 나도 명실에 넣어줘!”
“안돼.”
남망기는 난폭하게 붙잡혀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왜 안 돼?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겠다는데!”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거기 있을 필요도 없겠지.”
남망기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위무선이 언성을 높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위무선은 그토록 간청하는데도 이유도 묻지 않고 거절하는 남망기에게, 자신을 믿지 못해 남계인까지 끌어다 감시를 시킨 그에게 무척 화가 났다.
“남잠, 왜 이리 답답하게 굴어? 음호부만 파괴하면 이제 걱정할 일 하나 없는데. 너무 과민한 거 아냐?”
“아직 파괴 못했어.”
단호하게 말하는 남망기는 딱딱한 태도였지만 분명 위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제 의지가 관철되지 않아서 답답하고, 남망기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데에 연신 상처를 입은 위무선에게는 그의 세세한 감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잠. 너는 주술에 대해 너무 강박적이야. 음호부를 만든 게 위험한 짓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인정할 건 해야지. 온가를 괴멸시킨 건 나야.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어?”
위무선이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따지기 시작하자 남망기는 논리에 말려들지 않고 아예 무시해리는 쪽을 택했다.
“더 이상 위험한 짓은 하지 마.”
“먹고 자고 멍하니 앉아 수련밖에 안 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어?”
“그만하고 정실로 돌아가.”
화난 짐승처럼 서성대던 위무선이 남망기의 앞에 서더니,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선언했다.
“안 가. 여기에 있을 거야. 그만 나가 줘, 남망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남망기가 눈을 내리깔며 상처받은 듯한 기색을 내비치자 위무선은 자칫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그러나 곧장 남망기가 눈을 치뜨며 내뱉은 말에 몇 배나 되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럼 통행 옥패를 내놔.”
“너, 너...!”
위무선은 눈을 크게 뜬 채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남망기의 손에 메어치다시피 통행 옥패를 내던지고 침상 위로 뛰어올라 등을 돌리고 누웠다.
화가 나서 씩씩대는 등 뒤로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명실을 나온 남희신은 금광요, 섭명결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금광요는 아직 할 말이 남아서 섭명결을 따라갔고, 남희신 혼자서 아랫길을 걸어 내려갔다.
틈만 나면 온 지역의 가주들이 찾아와 선독 얘기를 꺼내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섭명결은 선독 뿐 아니라 감시탑을 짓자는 의견에도 강하게 찬성을 표하고 있었다.
그대로 물길을 따라 한가롭게 내려가 보려던 남희신은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남망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내리깐 남망기는 오른손에 무언가를 핏기가 가실 정도로 쥐고 있었다.
“망기. 그게 무어냐?”
남망기가 손가락에 힘을 풀며 통행 옥패가 드러나자 남희신은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설마 위공자에게서 빼앗아 온 건 아니겠지?”
남망기는 말이 없었다. 필시 마음이 상했겠지만 그래도 굽힐 생각은 없는 듯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남희신은 좋은 말로 타일러 보려고 했다.
“망기, 그냥 위공자를 들여보내 주는 게 어떠냐.”
그러자 남망기가 시무룩하게 아래로 향하던 눈을 치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형장. 음호부에 주인이 없다 해도 오랫동안 위영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파괴되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압니까?”
남희신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싸운 것 같은 행색이라, 위무선에게도 그처럼 설명을 잘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남희신이 충고를 해주고 싶어도 말주변이 없고 진실하기만 한 남망기의 천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위무선은 그런 답답한 부분까지 잘 감싸주는 줄 알았건만 역시 싸울 때에는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연장자인 남희신의 눈에는 어린아이들의 싸움을 보는 듯한 안일한 느낌도 없잖았지만, 어쨌든 남망기가 고집을 세우는 것도, 위무선이 화를 내는 것도 결국 서로 사랑하는 만큼의 일이다. 그래서 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위무선은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싸늘한 냉기에 온몸이 뻣뻣한 느낌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빨리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언제나 따끈따끈한 남망기를 끌어안고 자다 보니 착각을 했던 것 같았다. 추워서 잠이 깨는 건 무척이나 불쾌한 기분이었다. 위무선은 이것도 남잠의 탓이라고 원망하며 이불 속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조금 있으니 코 앞에서 이불을 꼭 쥔 손가락 위로 슬쩍 나타난 정령이 눈치를 보듯 위무선을 쳐다보았다. 남망기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어쩐지 정령도 기가 죽은 듯한 느낌이었다.
“너도 남잠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정령은 들은체 만체 손가락에 등을 대고 기대더니 하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어린아이만큼의 지능도 없는 정령은 복잡한 사연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사랑의 감정 그 자체에 반응할 뿐이었다.
근심 걱정 없어보이는 정령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위무선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간밤에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화가 뻗쳐서 수련도 하지 않겠다고 맘먹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뻣뻣하게 굴던 남망기의 태도는 잊혀지고, 순간순간 약해지며 실망하거나 상처받은 기색을 내비치던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불현듯 그가 무척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부스스 일어난 위무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수련은 해야겠지... 금단도 못 맺으니까 남잠이 자꾸 날 무시하는 거 아냐.”
명실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은 오후로 정해져 있다. 위무선이 협실로 가니 남망기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은 하얗고 넓은 등을 보자마자 감정이 울컥 넘치며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남망기가 돌아보며 눈이 마주치자 그만 서먹해져서 딴청을 피웠다.
위무선의 수련을 돕는 남망기의 태도만은 평소와 꼭 같았다. 어린 제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꼼꼼하게 자세를 교정해 주며 하나에서 열까지 원칙을 따랐다.
남망기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때, 위무선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척추와 어깨를 세워 주던 남망기가 그 눈길을 깨닫고 우뚝 멈추었다.
순간 눈빛이 깊어지며 그대로 입맞춤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는지 손을 떼고 맞은편에 단정히 앉았다.
그러나 금방 교환한 시선으로 분명 남망기도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위무선이 촉촉한 눈길로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잠, 있지...”
“...”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그러나 남망기는 위무선이 입을 떼자마자 벌써 본래의 눈초리로 돌아가 있었다.
“명실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마.”
모처럼 따뜻하고 말랑해졌던 속을 차가운 말투가 싹 베어버리는 것 같았다.
위무선이 벌떡 일어나더니 노호했다.
“좋아, 함광군! 나도 이젠 부탁 안 해! 다 네 마음대로 해!”
씩씩대며 뛰쳐나간 위무선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혔다. 그래도 사과도 없이 달려가 버리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말린 섭회상이 불렀다.
“위형, 위형!”
섭회상은 숨까지 거칠어져서 험악해진 위무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형,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위무선이 턱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나한테 무슨 볼일인데?”
“위형, 통행 옥패 좀 빌려줘요. 잠깐만 내려갔다 올게요. 답답해서 미치겠다구요.”
그 말에 생각도 하지 않고 품 속을 뒤져보던 위무선이 이내 인상을 팍 썼다.
“미안하지만 나 통행 옥패가 없어.”
“예? 왜요? 위형은 함광군의 특별 손님으로 왕래하던 게 아니었어요? 친하다면서요.”
“...”
“다들 돌아가면서 친하다, 친하다 우겨대더니 역시 거짓말이었구만...”
섭회상이 그렇게 중얼거려도 위무선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열불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섭회상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애먼 화풀이였다.
제각각 목적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위형,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느 고집불통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또다시 함광군이 어쩌구 하며 복장 터지는 소리를 지껄일 것 같았던 섭회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저도 고집불통은 딱 질색이네요.”
“...넌 어느 고집불통을 말하는 건데? 네 형님?”
섭회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서로의 허전한 심정만 통한 듯 한참 걷다가 유실수가 가득한 정원에 다다랐다.
위무선에게 서리를 많이 당했던 수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며 외면했다.
푸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로 싱그러운 정원을 바라보며 위무선은 불쑥불쑥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날이 따스하며 봄꽃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시기에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못마땅하고 답답했다.
“위형. 있잖아요.”
“응?”
“악인에게는 얼마만큼의 벌이 허용되는 걸까요.”
위무선이 목을 뒤로 빼면서 섭회상을 훑어보았다. 선이 가냘픈 소년같은 얼굴로 농담만 즐기던 그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 수상했다.
“왜 갑자기 심각한 얘기를 해?”
“위형. 만약 악한 자의 혼백이랑 시신을 가두어 놓고 좋은 일에 쓸 수 있다면, 그걸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섭회상의 질문을 들은 위무선은, 왕년에 남계인에게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비오듯이 책이 날아왔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참 좋은 질문이네. 남잠이나 남선생님께 한 번 얘기해 봐. 그 사람들이 노려보면 산 채로 목이 분리당하는 느낌을 알게 될 테니까.”
“장난치지 말고요.”
위무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라면 얼마든지 하고말고.”
“음... 그럼... 그게 좋은 일도 아니라면요?”
느릿느릿 끌듯이 하는 말에 위무선은 다시 한 번 섭회상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기분이 나빠도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이거나 할 뿐이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도 우울한 느낌이 어리어 있고 어딘지 지친 듯 보이기까지 했다.
“회상, 너 도대체 왜 그래?”
섭회상은 한숨만 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위무선은 그가 섭종주에게 굴려지다못해 끝내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거북한 침묵만 깔리자 위무선도 자신의 고민거리로 돌아와 기분이 나빠졌다.
남망기가 끝까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니, 이번에는 정말로 말할 생각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꼭 알려줘야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택무군에게 말해 볼까?’
위무선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굉장히 불쾌해져서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말을 가장 잘 들어줘야 하는 건 바로 남망기인데, 그에게 말을 못해 그의 형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흥. 별 일도 아닌데 뭐. 될 대로 되라지!’
마침내 화가 난 위무선은 홧김에 결론을 지어 버리고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말았다.
명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자 식사를 하거나 쉬러 간 후 금광요는 손수 간단한 다과를 마련하여 한실로 가져갔다.
남희신은 금일 진행된 사항을 적은 기록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외의 문제는 없었다. 36명이나 되는 손을 일사불란하게 맞추려다 보니 충분한 연습이 필요할 뿐이었다.
금광요는 골똘하게 생각하다 글을 적어 넣는 남희신 곁에 앉아 쟁반을 내려놓고 새로이 가져온 따끈한 차를 따른 뒤 얌전히 기다렸다.
슥슥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문득 금광요의 시선이 서안 위에서 가볍게 종이를 붙들고 있는 손에 멎었다.
우연인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장 강한 빛이 그 곳에 머물러 부드러운 빛깔의 피부를 빛내었다. 각각의 손가락은 시원하게 뻗은 동시에 마디마다 굵직해서 날씬하면서도 억센 느낌을 주었다. 그토록 힘있게 강조되는 잘생긴 손을 보고 있자니, 금광요는 그의 손가락이 몸 속으로 들어올 때 예민한 부분을 비집고 자극을 주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올려진 손을 그러쥐었다.
넋을 잃고 있던 금광요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손이 갑자기 이 편으로 움직여오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요? 왜 그러느냐?”
금광요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굴고 있던 스스로를 깨닫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운처럼 미련이 남은 시선을, 타고난 무인인 남희신은 당장에 알아차렸다.
“내 손은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금광요는 거북하게 숨을 가라앉혔다. 가끔씩은 그가 그토록 예민한 고수가 아니었으면 싶었다.
할 수 없어진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형님의 손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 손이?”
남희신이 웃으면서 금광요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름다운 건 네 손이지.”
금광요는 남희신이 잡고 살살 쓰다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하게 제 몸매처럼 가냘프기만 한 손이다. 금광요는 날씬하면서도 힘있는 무게가 느껴지는 남희신의 손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남희신이 가볍게 금광요의 턱을 들어올려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래, 그대가 사랑하는 이 손으로 무얼 해 드릴까요? 염방존.”
금광요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요즘 남희신은 침상이든 어디서든 그를 ‘염방존’이라고 부르는 데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이제껏 수도 없이 낯부끄러운 명칭으로 불렸지만 금광요는 왠지 이것이 가장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희신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 위험스럽게 다가오자 금광요는 슬슬 뒤로 물러나며 말을 더듬었다.
“혀, 형님... 내일도, 음호부의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음호부를 파괴하는 준비 작업은 연일 대량의 영력을 소모했다. 영력이 깊은 남희신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지만, 손님들과 다르게 다른 볼일도 많은 금광요에게는 피로가 느껴졌다.
“알았다. 옷을 벗기지는 않으마.”
남희신이 그렇게 약조하고 뜨거운 눈길로 훑어보자, 금광요는 안도하는 동시에 열이 올랐다.
남희신은 팔뚝으로 금광요의 머리를 감싸 가슴에 기대게 했다.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듯 쳐다보는 눈빛에 까닥하면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동공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을, 살짝 열린 입술을 지켜보기만 하는 건 어려웠다. 곧장 그가 빨려들어가듯 고개를 숙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의 단단한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입 속으로 침범하는 혀를 입술로 물고 혀끝으로 핥았다. 이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에 마음을 놓고 긴장없이 받아들이며 따스한 온기에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얌전하게 입술을 열어 귀엽게도 혀까지 놀리자 점점 흥분하여 호흡이 거칠어졌다. 계속 입맞추는 채로 오른편을 더듬거리던 손이 서안 위로 뻗어가 손톱만한 열매를 집어들었다.
입술을 살짝 뗀 남희신이 진득한 입맞춤으로 촉촉히 젖은 입술에다 열매를 놓았다. 금광요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열매를 앞니로 깨물자 과육이 터지며 하얀 이빨과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참지 못한 남희신이 입술을 겹치며 혀로 휘젓자 새콤달콤한 맛이 마치 금광요의 입술로부터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차 입 속을 헤집다가 혀에 걸리는 과육을 감아 당겨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덤벼들어, 더 이상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질탕하게 머금고 빨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남희신에게서 떨어져나온 금광요는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매만지며 무척 쑥스러워했다. 묘한 미소를 담은 남희신이 손수 수건으로 입술에 남은 붉은 기운을 훔쳐 주자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변함없이 밝은 빛이 쏟아지는 서안에는 남희신이 조금 전까지 몰두하고 있던 종잇장이 흩어졌고 금광요가 갖다놓은 찻주전자에서도 김이 피어올랐다. 그 상태에서 금광요가 남기고 간 향기만 희미하게 끼치자 마치 요마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서안에 다가앉는 남희신에게는 행복하면서도 자조적인 느낌이 어렴풋이 스며들어 있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남망기의 정실에서는 진중하고 다소 고집스러운 느낌의 단향목 향기가 풍긴다.
남희신의 한실은 학자와 같은 고서와 고목 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는 사람을 무겁게 누르는 듯한 솔향이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위무선은 실눈을 뜨고 반질반질한 바닥, 겹겹이 놓인 책장과 기둥을 스쳐 멀찍이 앉은 무서운 사람의 뒤통수를 훔쳐보았다.
한 시진이 훌쩍 넘도록 앉은 자리에서 꼼짝을 않는 남계인의 위압감에 편하게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위무선은 좀이 쑤시다 못해 그만 뒷골이 땡겨서 죽을 맛이었다.
음호부를 파괴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남희신이 작성한 술자의 명단에 위무선은 없었다.
아직 금단이 여물지 않아 36인의 영력 주입자에 포함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관리자라도 시켜달라는 걸 거절당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망기는 단지 한 공간에 있게 해 달라는 부탁마저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뭔가 제가 도울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위무선은 철벽같은 남망기를 피해 남희신에게 호소했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위공자는 음호부를 주조하여 공을 세웠으니 할 만큼 한 겁니다. 마음 놓고 맡겨 두십시오.”
그것만 해도 짜증이 나기에는 충분했는데, 남망기가 하필 남계인에게 위무선의 감시를 부탁한 것이다.
남계인은 음호부를 부수는 일에 앞장서서 일조할 참이었지만, 남망기가 위무선을 부탁하자 곧바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위무선은 그만 까무라칠 뻔했다.
명실에서의 작업은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모두의 영기의 크기를 비슷하게 맞춰야 하고, 기술서에 따라 기를 모으고, 각 주요 방위의 관리자들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계속해서 영력을 소모해야 하는 작업이라 연습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남망기가 위무선을 데리고 가려고 돌아온 것은 이렇게 가두어진 지 한나절은 지난 뒤였다.
문이 열리자 위무선은 얼른 일어나 남계인을 향해 성의 없는 인사를 한 다음 뛰쳐나갔다.
남망기는 일부러 무시하고 쌀쌀맞게 지나쳐버리는 위무선을 돌아보며 곧바로 뒤따라나갔다.
위무선은 한참 동안 비어 있었던 객실 앞까지 내려가도 따라오는 남망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열이 받은 얼굴로 봐서는 코 앞에서 문을 닫아버릴 기세였지만, 곧장 남망기의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방 안으로 끌어넣었다.
“남잠, 웃기는 짓 그만하고 나도 명실에 넣어줘!”
“안돼.”
남망기는 난폭하게 붙잡혀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왜 안 돼?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겠다는데!”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거기 있을 필요도 없겠지.”
남망기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위무선이 언성을 높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위무선은 그토록 간청하는데도 이유도 묻지 않고 거절하는 남망기에게, 자신을 믿지 못해 남계인까지 끌어다 감시를 시킨 그에게 무척 화가 났다.
“남잠, 왜 이리 답답하게 굴어? 음호부만 파괴하면 이제 걱정할 일 하나 없는데. 너무 과민한 거 아냐?”
“아직 파괴 못했어.”
단호하게 말하는 남망기는 딱딱한 태도였지만 분명 위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제 의지가 관철되지 않아서 답답하고, 남망기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데에 연신 상처를 입은 위무선에게는 그의 세세한 감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잠. 너는 주술에 대해 너무 강박적이야. 음호부를 만든 게 위험한 짓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인정할 건 해야지. 온가를 괴멸시킨 건 나야.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어?”
위무선이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따지기 시작하자 남망기는 논리에 말려들지 않고 아예 무시해리는 쪽을 택했다.
“더 이상 위험한 짓은 하지 마.”
“먹고 자고 멍하니 앉아 수련밖에 안 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어?”
“그만하고 정실로 돌아가.”
화난 짐승처럼 서성대던 위무선이 남망기의 앞에 서더니,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선언했다.
“안 가. 여기에 있을 거야. 그만 나가 줘, 남망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남망기가 눈을 내리깔며 상처받은 듯한 기색을 내비치자 위무선은 자칫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그러나 곧장 남망기가 눈을 치뜨며 내뱉은 말에 몇 배나 되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럼 통행 옥패를 내놔.”
“너, 너...!”
위무선은 눈을 크게 뜬 채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남망기의 손에 메어치다시피 통행 옥패를 내던지고 침상 위로 뛰어올라 등을 돌리고 누웠다.
화가 나서 씩씩대는 등 뒤로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명실을 나온 남희신은 금광요, 섭명결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금광요는 아직 할 말이 남아서 섭명결을 따라갔고, 남희신 혼자서 아랫길을 걸어 내려갔다.
틈만 나면 온 지역의 가주들이 찾아와 선독 얘기를 꺼내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섭명결은 선독 뿐 아니라 감시탑을 짓자는 의견에도 강하게 찬성을 표하고 있었다.
그대로 물길을 따라 한가롭게 내려가 보려던 남희신은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남망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내리깐 남망기는 오른손에 무언가를 핏기가 가실 정도로 쥐고 있었다.
“망기. 그게 무어냐?”
남망기가 손가락에 힘을 풀며 통행 옥패가 드러나자 남희신은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설마 위공자에게서 빼앗아 온 건 아니겠지?”
남망기는 말이 없었다. 필시 마음이 상했겠지만 그래도 굽힐 생각은 없는 듯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남희신은 좋은 말로 타일러 보려고 했다.
“망기, 그냥 위공자를 들여보내 주는 게 어떠냐.”
그러자 남망기가 시무룩하게 아래로 향하던 눈을 치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형장. 음호부에 주인이 없다 해도 오랫동안 위영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파괴되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압니까?”
남희신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싸운 것 같은 행색이라, 위무선에게도 그처럼 설명을 잘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남희신이 충고를 해주고 싶어도 말주변이 없고 진실하기만 한 남망기의 천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위무선은 그런 답답한 부분까지 잘 감싸주는 줄 알았건만 역시 싸울 때에는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연장자인 남희신의 눈에는 어린아이들의 싸움을 보는 듯한 안일한 느낌도 없잖았지만, 어쨌든 남망기가 고집을 세우는 것도, 위무선이 화를 내는 것도 결국 서로 사랑하는 만큼의 일이다. 그래서 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위무선은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싸늘한 냉기에 온몸이 뻣뻣한 느낌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빨리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언제나 따끈따끈한 남망기를 끌어안고 자다 보니 착각을 했던 것 같았다. 추워서 잠이 깨는 건 무척이나 불쾌한 기분이었다. 위무선은 이것도 남잠의 탓이라고 원망하며 이불 속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조금 있으니 코 앞에서 이불을 꼭 쥔 손가락 위로 슬쩍 나타난 정령이 눈치를 보듯 위무선을 쳐다보았다. 남망기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어쩐지 정령도 기가 죽은 듯한 느낌이었다.
“너도 남잠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정령은 들은체 만체 손가락에 등을 대고 기대더니 하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어린아이만큼의 지능도 없는 정령은 복잡한 사연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사랑의 감정 그 자체에 반응할 뿐이었다.
근심 걱정 없어보이는 정령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위무선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간밤에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화가 뻗쳐서 수련도 하지 않겠다고 맘먹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뻣뻣하게 굴던 남망기의 태도는 잊혀지고, 순간순간 약해지며 실망하거나 상처받은 기색을 내비치던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불현듯 그가 무척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부스스 일어난 위무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수련은 해야겠지... 금단도 못 맺으니까 남잠이 자꾸 날 무시하는 거 아냐.”
명실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은 오후로 정해져 있다. 위무선이 협실로 가니 남망기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은 하얗고 넓은 등을 보자마자 감정이 울컥 넘치며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남망기가 돌아보며 눈이 마주치자 그만 서먹해져서 딴청을 피웠다.
위무선의 수련을 돕는 남망기의 태도만은 평소와 꼭 같았다. 어린 제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꼼꼼하게 자세를 교정해 주며 하나에서 열까지 원칙을 따랐다.
남망기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때, 위무선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척추와 어깨를 세워 주던 남망기가 그 눈길을 깨닫고 우뚝 멈추었다.
순간 눈빛이 깊어지며 그대로 입맞춤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는지 손을 떼고 맞은편에 단정히 앉았다.
그러나 금방 교환한 시선으로 분명 남망기도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위무선이 촉촉한 눈길로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잠, 있지...”
“...”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그러나 남망기는 위무선이 입을 떼자마자 벌써 본래의 눈초리로 돌아가 있었다.
“명실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마.”
모처럼 따뜻하고 말랑해졌던 속을 차가운 말투가 싹 베어버리는 것 같았다.
위무선이 벌떡 일어나더니 노호했다.
“좋아, 함광군! 나도 이젠 부탁 안 해! 다 네 마음대로 해!”
씩씩대며 뛰쳐나간 위무선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혔다. 그래도 사과도 없이 달려가 버리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말린 섭회상이 불렀다.
“위형, 위형!”
섭회상은 숨까지 거칠어져서 험악해진 위무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형,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위무선이 턱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나한테 무슨 볼일인데?”
“위형, 통행 옥패 좀 빌려줘요. 잠깐만 내려갔다 올게요. 답답해서 미치겠다구요.”
그 말에 생각도 하지 않고 품 속을 뒤져보던 위무선이 이내 인상을 팍 썼다.
“미안하지만 나 통행 옥패가 없어.”
“예? 왜요? 위형은 함광군의 특별 손님으로 왕래하던 게 아니었어요? 친하다면서요.”
“...”
“다들 돌아가면서 친하다, 친하다 우겨대더니 역시 거짓말이었구만...”
섭회상이 그렇게 중얼거려도 위무선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열불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섭회상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애먼 화풀이였다.
제각각 목적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위형,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느 고집불통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또다시 함광군이 어쩌구 하며 복장 터지는 소리를 지껄일 것 같았던 섭회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저도 고집불통은 딱 질색이네요.”
“...넌 어느 고집불통을 말하는 건데? 네 형님?”
섭회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서로의 허전한 심정만 통한 듯 한참 걷다가 유실수가 가득한 정원에 다다랐다.
위무선에게 서리를 많이 당했던 수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며 외면했다.
푸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로 싱그러운 정원을 바라보며 위무선은 불쑥불쑥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날이 따스하며 봄꽃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시기에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못마땅하고 답답했다.
“위형. 있잖아요.”
“응?”
“악인에게는 얼마만큼의 벌이 허용되는 걸까요.”
위무선이 목을 뒤로 빼면서 섭회상을 훑어보았다. 선이 가냘픈 소년같은 얼굴로 농담만 즐기던 그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 수상했다.
“왜 갑자기 심각한 얘기를 해?”
“위형. 만약 악한 자의 혼백이랑 시신을 가두어 놓고 좋은 일에 쓸 수 있다면, 그걸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섭회상의 질문을 들은 위무선은, 왕년에 남계인에게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비오듯이 책이 날아왔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참 좋은 질문이네. 남잠이나 남선생님께 한 번 얘기해 봐. 그 사람들이 노려보면 산 채로 목이 분리당하는 느낌을 알게 될 테니까.”
“장난치지 말고요.”
위무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라면 얼마든지 하고말고.”
“음... 그럼... 그게 좋은 일도 아니라면요?”
느릿느릿 끌듯이 하는 말에 위무선은 다시 한 번 섭회상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기분이 나빠도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이거나 할 뿐이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도 우울한 느낌이 어리어 있고 어딘지 지친 듯 보이기까지 했다.
“회상, 너 도대체 왜 그래?”
섭회상은 한숨만 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위무선은 그가 섭종주에게 굴려지다못해 끝내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거북한 침묵만 깔리자 위무선도 자신의 고민거리로 돌아와 기분이 나빠졌다.
남망기가 끝까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니, 이번에는 정말로 말할 생각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꼭 알려줘야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택무군에게 말해 볼까?’
위무선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굉장히 불쾌해져서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말을 가장 잘 들어줘야 하는 건 바로 남망기인데, 그에게 말을 못해 그의 형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흥. 별 일도 아닌데 뭐. 될 대로 되라지!’
마침내 화가 난 위무선은 홧김에 결론을 지어 버리고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말았다.
명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자 식사를 하거나 쉬러 간 후 금광요는 손수 간단한 다과를 마련하여 한실로 가져갔다.
남희신은 금일 진행된 사항을 적은 기록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외의 문제는 없었다. 36명이나 되는 손을 일사불란하게 맞추려다 보니 충분한 연습이 필요할 뿐이었다.
금광요는 골똘하게 생각하다 글을 적어 넣는 남희신 곁에 앉아 쟁반을 내려놓고 새로이 가져온 따끈한 차를 따른 뒤 얌전히 기다렸다.
슥슥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문득 금광요의 시선이 서안 위에서 가볍게 종이를 붙들고 있는 손에 멎었다.
우연인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장 강한 빛이 그 곳에 머물러 부드러운 빛깔의 피부를 빛내었다. 각각의 손가락은 시원하게 뻗은 동시에 마디마다 굵직해서 날씬하면서도 억센 느낌을 주었다. 그토록 힘있게 강조되는 잘생긴 손을 보고 있자니, 금광요는 그의 손가락이 몸 속으로 들어올 때 예민한 부분을 비집고 자극을 주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올려진 손을 그러쥐었다.
넋을 잃고 있던 금광요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손이 갑자기 이 편으로 움직여오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요? 왜 그러느냐?”
금광요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굴고 있던 스스로를 깨닫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운처럼 미련이 남은 시선을, 타고난 무인인 남희신은 당장에 알아차렸다.
“내 손은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금광요는 거북하게 숨을 가라앉혔다. 가끔씩은 그가 그토록 예민한 고수가 아니었으면 싶었다.
할 수 없어진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형님의 손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 손이?”
남희신이 웃으면서 금광요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름다운 건 네 손이지.”
금광요는 남희신이 잡고 살살 쓰다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하게 제 몸매처럼 가냘프기만 한 손이다. 금광요는 날씬하면서도 힘있는 무게가 느껴지는 남희신의 손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남희신이 가볍게 금광요의 턱을 들어올려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래, 그대가 사랑하는 이 손으로 무얼 해 드릴까요? 염방존.”
금광요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요즘 남희신은 침상이든 어디서든 그를 ‘염방존’이라고 부르는 데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이제껏 수도 없이 낯부끄러운 명칭으로 불렸지만 금광요는 왠지 이것이 가장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희신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 위험스럽게 다가오자 금광요는 슬슬 뒤로 물러나며 말을 더듬었다.
“혀, 형님... 내일도, 음호부의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음호부를 파괴하는 준비 작업은 연일 대량의 영력을 소모했다. 영력이 깊은 남희신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지만, 손님들과 다르게 다른 볼일도 많은 금광요에게는 피로가 느껴졌다.
“알았다. 옷을 벗기지는 않으마.”
남희신이 그렇게 약조하고 뜨거운 눈길로 훑어보자, 금광요는 안도하는 동시에 열이 올랐다.
남희신은 팔뚝으로 금광요의 머리를 감싸 가슴에 기대게 했다.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듯 쳐다보는 눈빛에 까닥하면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동공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을, 살짝 열린 입술을 지켜보기만 하는 건 어려웠다. 곧장 그가 빨려들어가듯 고개를 숙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의 단단한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입 속으로 침범하는 혀를 입술로 물고 혀끝으로 핥았다. 이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에 마음을 놓고 긴장없이 받아들이며 따스한 온기에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얌전하게 입술을 열어 귀엽게도 혀까지 놀리자 점점 흥분하여 호흡이 거칠어졌다. 계속 입맞추는 채로 오른편을 더듬거리던 손이 서안 위로 뻗어가 손톱만한 열매를 집어들었다.
입술을 살짝 뗀 남희신이 진득한 입맞춤으로 촉촉히 젖은 입술에다 열매를 놓았다. 금광요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열매를 앞니로 깨물자 과육이 터지며 하얀 이빨과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참지 못한 남희신이 입술을 겹치며 혀로 휘젓자 새콤달콤한 맛이 마치 금광요의 입술로부터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차 입 속을 헤집다가 혀에 걸리는 과육을 감아 당겨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덤벼들어, 더 이상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질탕하게 머금고 빨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남희신에게서 떨어져나온 금광요는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매만지며 무척 쑥스러워했다. 묘한 미소를 담은 남희신이 손수 수건으로 입술에 남은 붉은 기운을 훔쳐 주자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변함없이 밝은 빛이 쏟아지는 서안에는 남희신이 조금 전까지 몰두하고 있던 종잇장이 흩어졌고 금광요가 갖다놓은 찻주전자에서도 김이 피어올랐다. 그 상태에서 금광요가 남기고 간 향기만 희미하게 끼치자 마치 요마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서안에 다가앉는 남희신에게는 행복하면서도 자조적인 느낌이 어렴풋이 스며들어 있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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