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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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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운심부지처. 경내는 소란 금지였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후 훔친 복숭아를 꺼내서 먹던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들키는 바람에 숙제를 늘리고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흥정을 시도하는 위무선을 외면하느라 힘을 쓰던 남망기는 가만히 서서 숲을 내려다보는 금광요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운심부지처에서의 그는 퍽 한가로워 보일 때가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딱 봐도 목적이 없는 듯 떠돌아다니거나 지금처럼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본디 살집이 별로 없는 몸이 새하얀 의복에 싸인 것이 야위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거지? 무슨 일이 있나?”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그는 단순히 기운이 없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위태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걸고 있던 여유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언뜻 위무선은 그가 마치 실연을 당한 가냘픈 여인 같다고 생각했다.
“염방존?”
“위공자, 망기.”
두 사람을 본 금광요가 여느 때처럼 웃어보였다. 하지만 영 억지스러운 느낌이었고, 그것을 단속할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안색도 나쁘고, 보통 때 같으면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올 그가 입을 다물어 대화가 끊어져 버리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염방존,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나쁘신데요.”
“아닙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또 택무군이랑 싸우신 거에요?”
두 사람은 예전에 남희신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더니, 청담회에서 금광요와 돌아오면서 싹 나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사건으로 인해 금광요가 남종주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척 호기심을 불태웠다.
금광요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형님께선 결코 흔들림이 없는 분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본인은 흔들흔들하는 걸음걸이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무선이 말했다.
“전에도 저런 뼈 있는 소릴 하지 않았어? 정말로 택무군이랑 싸운 거야?”
위무선이 남망기를 돌아보자, 그는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또 왜 그래? 뭔가 짚이는 데라도 있어?”
남망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형장께서 전에 나를 도와주신 적이 있어서.”
“아아...”
궁기도의 일이었다. 위무선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걸 금광요가 막아주었으니, 위무선도 기회가 온다면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남희신과 불화가 있는 거라면, 개인적인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택무군께서 누군가와 다투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위무선은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아무튼 저러다간 하얗게 바래서 날아가 버릴지 모르겠는걸. 기름기도 없는 음식만 먹고 있으니 더더욱...”
채의진에 내려가서 고기와 술이라도 사다줘야 하나, 하고 제 기준으로 생각하던 위무선이 앗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의아해하는 남망기에게 위무선이 신이 난 듯 말했다.
“있잖아, 우리가 장서각에서, 아... 아니다.”
“?”
“아니야, 아무것도. 너 수업에 들어가야지? 나도 수련해야겠어. 나중에 보자, 남잠!”
수업이니 수련이니, 말하는 내용이 이만저만 수상한 게 아니었지만 말 끝에 위무선이 남망기의 얼굴에 쪽 하고 입을 맞추자 남망기는 그만 주의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가 뭐라할 틈도 없이 위무선은 쏜살같이 달려가서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달리기 금지.”
위무선은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가벼운 규훈은 식은 죽 먹듯이 어겨댔다. 그렇다고 일일이 벌을 주면 수업이 더 늦어질 테니 진퇴양난이었다. 남망기는 고개를 젓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잽싸게 금광요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품에 안고 온 향로를 침상 아래로 밀어넣었다.
장서각에서 찾아낸 향로의 효력을 정확히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사람이 평소에 꿈꾸던 걸 보여주거나 꿈 속인 것처럼 멋대로 행동할 수 있게 하니 어찌 보면 시름을 달래 주는 물건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금광요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향로의 덕으로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남망기와 위무선은 향로를 통해 음란한 재미를 더 많이 보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욕구가 한창 상승할 시기라 그런 것이겠고.
‘염방존이 그런 꿈을 꾸진 않겠지.’
평소 금광요가 예의를 차리고 사람 하나하나마다 신경을 쓰던 모습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았다. 꿈 속에서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속이 조금 풀릴지 모른다.
“향로야, 향로야. 내일 데리러 올 테니 이번엔 점잖게 굴어야 한다.”
위무선은 향로를 놓아둔 다음 곧바로 내뺐기 때문에 한참 후 금광요와 남희신이 함께 방에 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신 뒤 각각 금과 퉁소를 꺼내었다.
금광요는 마음이 유리잔같아 음률도 멀리하고 싶었지만 남희신이 하자는 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 정성스레 금을 타고 절묘한 퉁소 소리에 감겨들자 심사가 꼬이며 오만가지 감정이 샘솟았다. 마지막에는 탄주하는 손가락이 떨려서 현도 제대로 짚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가락이 잦아들며 금광요가 한숨을 돌리고 보니 남희신은 아직도 여운에 취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형님?”
금광요가 살피며 불러보았으나 남희신은 고요하게 앉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한 번 불러 보려던 금광요는 갑자기 눈 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점점 무거워진 그는 고금을 밀어내며 탁자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금광요는 돌연 누런 흙이 깔린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분명 방에서 남희신과 함께 고금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꿈이라 생각하기엔 현실감이 너무 강했다. 파란 하늘도, 몸을 스치고 가는 바람도, 감각을 느끼는 자신의 의식도 지나치게 뚜렷했다.
“공자께서도 야렵을 가시나요?”
별안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어 돌아본 금광요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하얀 옷을 입고 깔끔하게 말액을 두른 17, 8세 남짓한 수사.
그러나 그는 남희신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남희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아름다운 얼굴, 온화한 눈빛과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는 다르지 않았다.
그가 금광요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며 말했다.
“고소 남씨의 남희신이라고 합니다.”
금광요는 어리둥절해서 역시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난데없이 소년 남희신이 나타나니 강했던 현실감도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문득 제 몸을 내려다보자 납빛의 청하 섭씨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한생이 감겨 있었다.
상황에 끌린 금광요가 어색하게 맞절을 하며 대답했다.
“네. 저는... 청하 섭씨의... 맹요라고 합니다.”
“맹공자.”
남희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어려도 품위가 있고, 사람이 좋아 보여도 얕볼 수는 없는 택무군의 인상 그대로였다.
“지나가다 흉시가 출몰한다는 얘기에 와 본 것이지만. 부정세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면 괜한 참견이었군요.”
“아닙니다.”
금광요는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장단을 맞추었다. 다른 무엇보다, 모습이 이상하다곤 하나 남희신이 말을 거는데 무시하고 도망가 버릴 수는 없었다.
“혼자 오신 걸 보니 분명 솜씨가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비꼬는 것처럼 들렸겠지만 남희신의 입에서 나오니 악의 없는 칭찬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괜찮다면 동행해도 될까요?”
금광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희신은 그의 곁에서 걸으며 이따금씩 쳐다보았다.
맹요라는 이 사람은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하긴 청하 섭씨의 사람이라면 어딘가의 모임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그러나 조금 더 걷다 보니 그는 이 편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남희신이 가볍게 웃었다.
“맹공자, 제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깜짝 놀란 금광요가 고개를 들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가만 있긴 했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남희신이 떠나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형님!”
저도 모르게 외친 소리에 남희신이 돌아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아... 아뇨. ...남공자.”
“네?”
“...불편한 게 아닙니다. 제가 뭘 좀 생각하느라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그렇습니까.”
금광요의 변명을 들은 남희신은 별말 없이 웃으며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다시 보조를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요라는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며, 심지어 땅으로 꺼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
잠시 후 남희신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맹공자, 걱정거리가 있으신가 봅니다. 흉시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머뭇거리며 흘끔거려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든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만 같은 따스한 눈을 보자 금광요는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어린 티가 남은 얼굴도 진짜 그와 다름없이 사람을 어루만지는 자비심으로 넘쳐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지하고 싶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무튼 꿈이니까, 하고 금광요는 그만 긴장이 풀어져버리고 말았다.
“남공자, 혹시... 당신은 은애하는 분이 계신가요?”
이 편에서 먼저 참견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은밀한 질문이 치고 들어오자 남희신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민이군요.”
금광요가 한숨을 쉬었다.
“고백을 하지 못하셨나요?”
“고백했습니다. 서로 고백했어요.”
그러자 남희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금광요는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여기가 어디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에게서 사랑받고 있지만. 계속 마음이 허하고 두려워져요.”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 분을 믿을 수가 없나요?”
금광요가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분이랍니다.”
남희신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다. 그도 어느새 흉시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고 잊었다. 실의에 빠진 듯한 이 청년의 모습이 왠지 심금을 울렸다.
“맹공자,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 분은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당신이 그 분께 다가가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금광요가 순순히 인정했다.
“이유가 뭔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군요.”
“네?”
금광요가 반문하자 남희신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러니까... 저도 어쩌면 언젠가, 당신 같은 사람을 은애하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 주어야 좋을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을 하곤 왠지 말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 똑같이 얼굴이 붉어졌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머쓱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데, 돌연 검은 바람이 일어났다. 더럭 경계하며 방어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의 앞에 모래섞인 바람 속에서 흉칙한 얼굴이 나타났다. 습관처럼 한생의 손잡이를 잡은 금광요가 남희신을 돌아보자 그 역시 눈에 익은 남빛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금단도 단단히 맺은 금광요는 이따위 흉귀 한 마리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남희신의 협공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팔을 휘둘렀다. 연편처럼 날아간 한생의 날이 요괴를 휘감자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모래바람이 흩어지며 이윽고 자취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꿈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괴물이 나오진 않을까 싶었던 금광요는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한생을 도로 허리에 감으며 남희신을 돌아보자, 그가 멍하니 금광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어린 남희신 앞에서 힘자랑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금광요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데 남희신이 말했다.
“아요?”
금광요와 남희신은 동시에 눈을 떴다.
남희신과 시선이 마주친 금광요는 왠지 그가 자신과 같은 꿈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남희신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침상 아래에서 낯익은 향로가 나왔다.
가문의 주인인 그는 물론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향로를 알고 있었다.
그가 어린애의 장난을 본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분명 위공자의 짓이로군.’
이 물건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탐구해본 적은 없었지만, 금방 금광요와 함께 겪었던 환상으로 말미암아 작용을 알만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염방존의 방에다 이런 물건을 숨겨놓을 사람은 위무선 외에 없었다.
향로가 해로운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희신도 알고 있었다. 위무선이 향로를 숨겨둔 것은 아마 선의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었다.
향로를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차린 금광요 역시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곧바로 꿈 속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떠오르자 얼굴이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남희신이 말했다.
“아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가슴이 돌을 얹은 것처럼 무거워진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내가 이다지도 신용이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별로 속상한 기색은 아니었다.
남희신 같은 사람이 금광요 같은 사람의 속을 얼마나 알까마는, 최소한 그는 금광요가 쉽게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점만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금광요의 곁으로 와서 몸을 숙이더니 희고 작은 손을 자신의 손 안으로 감쌌다.
“그럼 믿도록 해주마.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그의 말을 들은 금광요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음 가는대로라면 당장에 남희신에게 두 팔을 벌려 매달리고, 그가 사내다운 격정을 쏟아내어서 자신을 몰아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막연하게 그의 품 안에서 녹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녹아서, 없어져버리면. 더 이상 괴롭지 않을지.
하지만 감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남희신은 변함없이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건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몰랐다.
‘정말 병이라도 걸린 건가?’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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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운심부지처. 경내는 소란 금지였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후 훔친 복숭아를 꺼내서 먹던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들키는 바람에 숙제를 늘리고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흥정을 시도하는 위무선을 외면하느라 힘을 쓰던 남망기는 가만히 서서 숲을 내려다보는 금광요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운심부지처에서의 그는 퍽 한가로워 보일 때가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딱 봐도 목적이 없는 듯 떠돌아다니거나 지금처럼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본디 살집이 별로 없는 몸이 새하얀 의복에 싸인 것이 야위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거지? 무슨 일이 있나?”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그는 단순히 기운이 없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위태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걸고 있던 여유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언뜻 위무선은 그가 마치 실연을 당한 가냘픈 여인 같다고 생각했다.
“염방존?”
“위공자, 망기.”
두 사람을 본 금광요가 여느 때처럼 웃어보였다. 하지만 영 억지스러운 느낌이었고, 그것을 단속할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안색도 나쁘고, 보통 때 같으면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올 그가 입을 다물어 대화가 끊어져 버리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염방존,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나쁘신데요.”
“아닙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또 택무군이랑 싸우신 거에요?”
두 사람은 예전에 남희신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더니, 청담회에서 금광요와 돌아오면서 싹 나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사건으로 인해 금광요가 남종주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척 호기심을 불태웠다.
금광요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형님께선 결코 흔들림이 없는 분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본인은 흔들흔들하는 걸음걸이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무선이 말했다.
“전에도 저런 뼈 있는 소릴 하지 않았어? 정말로 택무군이랑 싸운 거야?”
위무선이 남망기를 돌아보자, 그는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또 왜 그래? 뭔가 짚이는 데라도 있어?”
남망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형장께서 전에 나를 도와주신 적이 있어서.”
“아아...”
궁기도의 일이었다. 위무선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걸 금광요가 막아주었으니, 위무선도 기회가 온다면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남희신과 불화가 있는 거라면, 개인적인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택무군께서 누군가와 다투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위무선은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아무튼 저러다간 하얗게 바래서 날아가 버릴지 모르겠는걸. 기름기도 없는 음식만 먹고 있으니 더더욱...”
채의진에 내려가서 고기와 술이라도 사다줘야 하나, 하고 제 기준으로 생각하던 위무선이 앗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의아해하는 남망기에게 위무선이 신이 난 듯 말했다.
“있잖아, 우리가 장서각에서, 아... 아니다.”
“?”
“아니야, 아무것도. 너 수업에 들어가야지? 나도 수련해야겠어. 나중에 보자, 남잠!”
수업이니 수련이니, 말하는 내용이 이만저만 수상한 게 아니었지만 말 끝에 위무선이 남망기의 얼굴에 쪽 하고 입을 맞추자 남망기는 그만 주의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가 뭐라할 틈도 없이 위무선은 쏜살같이 달려가서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달리기 금지.”
위무선은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가벼운 규훈은 식은 죽 먹듯이 어겨댔다. 그렇다고 일일이 벌을 주면 수업이 더 늦어질 테니 진퇴양난이었다. 남망기는 고개를 젓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잽싸게 금광요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품에 안고 온 향로를 침상 아래로 밀어넣었다.
장서각에서 찾아낸 향로의 효력을 정확히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사람이 평소에 꿈꾸던 걸 보여주거나 꿈 속인 것처럼 멋대로 행동할 수 있게 하니 어찌 보면 시름을 달래 주는 물건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금광요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향로의 덕으로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남망기와 위무선은 향로를 통해 음란한 재미를 더 많이 보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욕구가 한창 상승할 시기라 그런 것이겠고.
‘염방존이 그런 꿈을 꾸진 않겠지.’
평소 금광요가 예의를 차리고 사람 하나하나마다 신경을 쓰던 모습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았다. 꿈 속에서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속이 조금 풀릴지 모른다.
“향로야, 향로야. 내일 데리러 올 테니 이번엔 점잖게 굴어야 한다.”
위무선은 향로를 놓아둔 다음 곧바로 내뺐기 때문에 한참 후 금광요와 남희신이 함께 방에 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신 뒤 각각 금과 퉁소를 꺼내었다.
금광요는 마음이 유리잔같아 음률도 멀리하고 싶었지만 남희신이 하자는 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 정성스레 금을 타고 절묘한 퉁소 소리에 감겨들자 심사가 꼬이며 오만가지 감정이 샘솟았다. 마지막에는 탄주하는 손가락이 떨려서 현도 제대로 짚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가락이 잦아들며 금광요가 한숨을 돌리고 보니 남희신은 아직도 여운에 취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형님?”
금광요가 살피며 불러보았으나 남희신은 고요하게 앉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한 번 불러 보려던 금광요는 갑자기 눈 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점점 무거워진 그는 고금을 밀어내며 탁자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금광요는 돌연 누런 흙이 깔린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분명 방에서 남희신과 함께 고금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꿈이라 생각하기엔 현실감이 너무 강했다. 파란 하늘도, 몸을 스치고 가는 바람도, 감각을 느끼는 자신의 의식도 지나치게 뚜렷했다.
“공자께서도 야렵을 가시나요?”
별안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어 돌아본 금광요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하얀 옷을 입고 깔끔하게 말액을 두른 17, 8세 남짓한 수사.
그러나 그는 남희신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남희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아름다운 얼굴, 온화한 눈빛과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는 다르지 않았다.
그가 금광요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며 말했다.
“고소 남씨의 남희신이라고 합니다.”
금광요는 어리둥절해서 역시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난데없이 소년 남희신이 나타나니 강했던 현실감도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문득 제 몸을 내려다보자 납빛의 청하 섭씨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한생이 감겨 있었다.
상황에 끌린 금광요가 어색하게 맞절을 하며 대답했다.
“네. 저는... 청하 섭씨의... 맹요라고 합니다.”
“맹공자.”
남희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어려도 품위가 있고, 사람이 좋아 보여도 얕볼 수는 없는 택무군의 인상 그대로였다.
“지나가다 흉시가 출몰한다는 얘기에 와 본 것이지만. 부정세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면 괜한 참견이었군요.”
“아닙니다.”
금광요는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장단을 맞추었다. 다른 무엇보다, 모습이 이상하다곤 하나 남희신이 말을 거는데 무시하고 도망가 버릴 수는 없었다.
“혼자 오신 걸 보니 분명 솜씨가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비꼬는 것처럼 들렸겠지만 남희신의 입에서 나오니 악의 없는 칭찬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괜찮다면 동행해도 될까요?”
금광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희신은 그의 곁에서 걸으며 이따금씩 쳐다보았다.
맹요라는 이 사람은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하긴 청하 섭씨의 사람이라면 어딘가의 모임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그러나 조금 더 걷다 보니 그는 이 편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남희신이 가볍게 웃었다.
“맹공자, 제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깜짝 놀란 금광요가 고개를 들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가만 있긴 했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남희신이 떠나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형님!”
저도 모르게 외친 소리에 남희신이 돌아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아... 아뇨. ...남공자.”
“네?”
“...불편한 게 아닙니다. 제가 뭘 좀 생각하느라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그렇습니까.”
금광요의 변명을 들은 남희신은 별말 없이 웃으며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다시 보조를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요라는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며, 심지어 땅으로 꺼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
잠시 후 남희신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맹공자, 걱정거리가 있으신가 봅니다. 흉시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남희신은 금광요가 머뭇거리며 흘끔거려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든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만 같은 따스한 눈을 보자 금광요는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어린 티가 남은 얼굴도 진짜 그와 다름없이 사람을 어루만지는 자비심으로 넘쳐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지하고 싶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무튼 꿈이니까, 하고 금광요는 그만 긴장이 풀어져버리고 말았다.
“남공자, 혹시... 당신은 은애하는 분이 계신가요?”
이 편에서 먼저 참견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은밀한 질문이 치고 들어오자 남희신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민이군요.”
금광요가 한숨을 쉬었다.
“고백을 하지 못하셨나요?”
“고백했습니다. 서로 고백했어요.”
그러자 남희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금광요는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여기가 어디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에게서 사랑받고 있지만. 계속 마음이 허하고 두려워져요.”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 분을 믿을 수가 없나요?”
금광요가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분이랍니다.”
남희신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다. 그도 어느새 흉시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고 잊었다. 실의에 빠진 듯한 이 청년의 모습이 왠지 심금을 울렸다.
“맹공자,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 분은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당신이 그 분께 다가가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금광요가 순순히 인정했다.
“이유가 뭔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군요.”
“네?”
금광요가 반문하자 남희신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러니까... 저도 어쩌면 언젠가, 당신 같은 사람을 은애하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 주어야 좋을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을 하곤 왠지 말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 똑같이 얼굴이 붉어졌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머쓱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데, 돌연 검은 바람이 일어났다. 더럭 경계하며 방어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의 앞에 모래섞인 바람 속에서 흉칙한 얼굴이 나타났다. 습관처럼 한생의 손잡이를 잡은 금광요가 남희신을 돌아보자 그 역시 눈에 익은 남빛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금단도 단단히 맺은 금광요는 이따위 흉귀 한 마리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남희신의 협공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팔을 휘둘렀다. 연편처럼 날아간 한생의 날이 요괴를 휘감자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모래바람이 흩어지며 이윽고 자취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꿈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괴물이 나오진 않을까 싶었던 금광요는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한생을 도로 허리에 감으며 남희신을 돌아보자, 그가 멍하니 금광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어린 남희신 앞에서 힘자랑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금광요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데 남희신이 말했다.
“아요?”
금광요와 남희신은 동시에 눈을 떴다.
남희신과 시선이 마주친 금광요는 왠지 그가 자신과 같은 꿈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남희신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침상 아래에서 낯익은 향로가 나왔다.
가문의 주인인 그는 물론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향로를 알고 있었다.
그가 어린애의 장난을 본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분명 위공자의 짓이로군.’
이 물건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탐구해본 적은 없었지만, 금방 금광요와 함께 겪었던 환상으로 말미암아 작용을 알만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염방존의 방에다 이런 물건을 숨겨놓을 사람은 위무선 외에 없었다.
향로가 해로운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희신도 알고 있었다. 위무선이 향로를 숨겨둔 것은 아마 선의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었다.
향로를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차린 금광요 역시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곧바로 꿈 속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떠오르자 얼굴이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남희신이 말했다.
“아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가슴이 돌을 얹은 것처럼 무거워진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내가 이다지도 신용이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별로 속상한 기색은 아니었다.
남희신 같은 사람이 금광요 같은 사람의 속을 얼마나 알까마는, 최소한 그는 금광요가 쉽게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점만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금광요의 곁으로 와서 몸을 숙이더니 희고 작은 손을 자신의 손 안으로 감쌌다.
“그럼 믿도록 해주마.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그의 말을 들은 금광요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음 가는대로라면 당장에 남희신에게 두 팔을 벌려 매달리고, 그가 사내다운 격정을 쏟아내어서 자신을 몰아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막연하게 그의 품 안에서 녹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녹아서, 없어져버리면. 더 이상 괴롭지 않을지.
하지만 감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남희신은 변함없이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건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몰랐다.
‘정말 병이라도 걸린 건가?’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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