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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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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앉은 위무선이 연신 쨍, 쨍 하고 수편을 튕기고 있었다.
위무선은 며칠 전부터 영맥에 중심이 잡혀 겨우 수편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을 법도 하지만, 이렇게 끝도 없이 소리를 내는 건 역시 남망기의 약을 올리자는 게 분명했다.
결국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는 소리가 들리자 위무선이 씩 웃으며 돌아보았다.
“다 읽었어, 남잠?”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남망기의 뒤로 얼른 다가붙었다.
“어디 가? 또 뭐 하려고 그래?”
“아무 것도.”
무성의한 답변밖에 돌아오는 게 없어도 위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남망기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남망기가 바로 어깨를 흔들며 떨쳐버리자, 두 번째는 손가락을 쫙 펼쳐서 갈고리처럼 단단히 움켜잡았다.
“남잠, 넌 친구가 없어서 이 모양인 거야. 친구끼리는 어깨동무를 하는 거라고. 가규랑은 아무 상관 없어. 알겠어?”
남망기가 얕게 한숨을 쉬더니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이 몸을 딱 붙이고 있어서 불편해도 꿋꿋하게 참는 것 같았다.
“나는 너한테 금단을 배우고, 너는 나한테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거지.”
위무선은 끝없이 종알대며 남망기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따라가고, 왼쪽으로 꺾어도 따라갔다.
‘슬슬 멈출 때가 됐는데.’
아니나다를까 남망기가 우뚝 서더니 말했다.
“위영. 뭐 하자는 거야.”
그제서야 위무선은 히히 웃으면서 어깨에 두른 팔을 풀었다.
“남잠, 같이 채의진에 내려가자.”
“거긴 왜?”
“왜긴,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지. 조금만 더 있으면 나 몸에서 새싹이라도 돋아날 거 같아.”
“안 돋아.”
이젠 남망기의 엉뚱하며 진지한 대답에 웃는 것도 이력이 났다.
“어쨌든, 어때? 남잠. 같이 가자, 응?”
“좋아.”
의외로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위무선은 웬일인가 싶었다.
“정말?!”
“대신 술은 안 돼.”
그럼 그렇지!!!
“왜 안 돼?!”
사실은 음식이 아니라 천자소가 목적이었던 위무선이 소리를 질렀다.
“금단을 맺는데 방해가 돼. 술을 마시면 네가 먹은 100가지 약초 중에 80가지는 효험을 잃어.”
“나한테 약초를 100가지나 먹였어?! 댁들은 대체 밥이란 게 뭘 뜻하는 건지 알기나 해?”
남망기가 자유롭게 걷기 시작하면서 내뱉았다.
“금단을 맺고 나면 뭘 먹든 마시든 마음대로 해.”
“그걸 말이라고 해? 내 금단은 이제 씨앗 같은 상태인데, 그럼 언제까지 참으라고!”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도 발길이 운심부지처를 나가는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위무선이 또 장난을 걸려는 것을 남망기가 팔을 들어 막는데, 마침 저편에서 걸어오는 남희신이 보였다.
“택무군!”
“형장.”
그들이 인사를 했지만 남희신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지나가려 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한 마디 더 붙여보려던 위무선은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청담회가 아니었던가?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위무선이 중얼거렸고 남망기가 길을 거슬러 올라가 남희신을 불러세웠다.
“형장?”
“망기.”
“무슨 일입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형장.”
남희신이 이토록 기운없는 모습은 처음 본 남망기가 당황해서 부르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있고 싶구나.”
남희신이 걸어가 버리고, 남망기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위무선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택무군이... 금방 화를 내신 거야...?”
***
“어서오세요, 큰형님. 회상.”
“음.”
“광요 형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금린대, 청담회.
끝없이 객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금광요가 반갑게 섭씨 형제를 맞아들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금자헌이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섭회상이 금광요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걸 참다못한 섭명결이 따끔하게 꾸짖자 잠시 시끄러워질 것 같다가 금광요의 중재로 가라앉았다.
금광요는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다가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멀리서 언뜻 백의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번 고소 남씨의 객은 남희신이 아니었다.
피진을 손에 쥔 남망기가 검은 옷을 입은 위무선을 대동한 것을 보고, 금광요의 창백한 얼굴에 물이 고이듯 미소가 돌아왔다.
“염방존.”
금광요는 두 사람의 인사에 맞절을 하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남망기와 위무선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최근 운심부지처 사람들은 가주인 남희신이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남망기나 남계인이 찾아가서 말을 붙여 보아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답변 뿐이었다. 벽을 치는 태도가 분명해서 캐어 물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금린대 청담회의 초청장이 도착하자,그는 그것을 남망기에게 주고는 자신을 대신하여 참석하라고 말했다. 그 뒤로 위무선이 따라붙었고, 두 사람은 남희신과 절친한 금광요라면 뭐라도 알겠거니 하는 기대를 품고 온 것이었다.
그들도, 혹은 다른 누구도 금광요와 남희신의 사이에 불화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금광요를 만나 보니 낌새가 이상했다.
위무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염방존, 택무군과 싸우신 거에요?”
그러자 금광요의 얼굴에 곤란할 때면 항상 보이는 거북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제가 감히...”
그가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위무선과 남망기가 서로 마주보았다.
“무슨 뜻이지?”
택무군과 염방존이, 정말로 싸웠단 말인가?
“위무선!”
아리송해 하는 위무선의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강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강징이 얼른 웃음기를 지우며 툭 쏘았다.
“야, 여긴 왜 왔어? 네가 고소 남씨 대표라니, 기가 막힌다.”
“대표 아닙니다. 마음대로 따라온 거지.”
옆에 있던 남망기가 불쑥 냉담한 소리로 대꾸했다. 강징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몰랐다가, 위무선이 허리가 끊어져라 웃는걸 보고서야 그가 화를 내는 게 아님을 알았다.
투연청으로 들어서며 강징의 삼독이 수편을 탁 때렸다.
“어때, 할 만해?”
“다들 쓸데없는 참견이야. 내가 어련히 잘할까 봐.”
“어휴, 이걸 그냥... 함광군, 이 녀석 데리고 있기 힘들죠?”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거든! 난 이런 성질머리도 없고-”
“너!”
위무선이 손가락으로 강징의 미간을 꾹 찌르자 강징이 욱하다가 입을 꽉 다물었다. 만사가 해결되었더니 위무선과의 감정도 전으로 돌아가 자칫하면 짓까불고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될 신분이 아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이고, 금광선이 위무선을 발견하고 촉을 세웠지만 암만 해도 꼬투리를 잡을 데가 없어 그냥 넘어가고, 그렇게 청담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썰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특별히 깊은 적막감이 깃드는 것 같았다.
밤늦게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오사모를 벗어 놓고 고금 앞에 앉았다. 연주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남희신과 헤어진 뒤로는 현 하나도 튕긴 적이 없었다.
금일, 다소 억지스럽게 때이른 청담회를 열면서 남희신을 만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자신을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금광요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얼음처럼 가라앉은 현재의 그는 남희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남희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오래 전, 아주 옛날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목적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아무리 아픈 일이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방향을 잃어버린 뒤 돌이켜 보니 자신이 걸어온 길은 그와 같은 괴로운 일투성이였다.
그리고 최초로 하기 싫어했던 일이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 줬던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습관적으로 바르게 앉던 금광요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자세가 허물어졌다.
어머니가 주는 단정한 의복을 입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키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금광요, 아니 맹요가 어머니의 기대에 순응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멸시하고, 욕을 퍼붓고 위협적으로 굴었다. 그는 단지 어린애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해치지 않을까 너무 두려웠다.
바로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 시절에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위협하는만큼 자신은 더욱 공손하고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했으므로.
어머니마저 죽고 난 뒤에는 세상에 몸도 마음도 붙일 데가 없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어머니가 일러 주었던, 마땅히 그가 서야 할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 뿐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세상에서 제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야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직도 너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귓가에다 속삭여댔다.
그래도 단 하나의 길밖에 모르는 금광요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성실한 것만으로 부족하면 더 교묘한 일을 하고, 더 위험한 일을 했다. 목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지금 겪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냉담하던 금광선의 태도가 바뀌어, 일찌기 원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원하던 곳에 도달해도, 예상했던 행복이나 만족감은 그 곳에 없다는 것을.
핏줄 따위는 처음부터 상관 없었다. 자식으로 인정하든 말든 금광선은 금광요에게 단지 불쾌한 한 사람의 타인에 불과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겨우 이런 걸 얻으려고 그렇게 고군분투했던 것인가? 난릉 금씨의 자제 금광요, 청하의 적봉존과 고소의 택무군의 의형제인 염방존. 내가 드디어 이것을 손에 넣었노라고 기뻐할만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허망한 길을 계속 달려 온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자 어처구니없는 답이 나왔다.
어머니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금광요는 실없이 웃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낭비시켰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이런 걸 원했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 구역질 나는 짓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렸지 않은가?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조그만 촛불을 덮쳤다. 파르르 떠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불빛이 사방을 어지럽혔다.
어둠 속에 검게 묻힌 사람의 그림자를 보아도 금광요는 놀라지 않았다.
남희신은 불길한 망령처럼 방 한가운데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광요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당신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나는 내 어머니에게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다.
그녀에게 선문 따위는 지긋지긋하다고, 그만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 때 내 진심이란 건 다 죽어버렸다.
남희신이 조용히 촛불의 원 안에 들어오자 흐릿한 불빛이 근심어린 얼굴을 비추었다.
금광요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진심을 보고 싶다고?
나는 평생 가면을 써 왔고, 이제 그것은 내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형님.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대뜸 금광요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제가 형님께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 남자가 어머니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꼭 말씀드려야 하는 건가요?”
금광요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남희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남희신을 쳐다보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어머니가 창기였기 때문에 그런 짓을 당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으신가요!”
그 말에 남희신이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금광요의 팔을 잡았다. 침통하던 그의 얼굴은 금세 후회스러운 빛으로 바뀌었다.
“제 진심이요? 그걸 정말 알고 싶으세요? 지금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걸 알고 싶으세요?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집안 사람들이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문의 부귀도, 선문의 영예도 제 가슴을 채울 수 없고, 음식 맛도 쓰고, 음률도 허무하다는 걸... 이런 걸 제가 왜 형님께 말하고 싶어하겠어요?”
남희신의 눈에는 이미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작게 입술을 벌린 채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어대는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애원하듯 쳐다보는 눈에서 눈물이 계속 넘쳐나 옷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형님께선...”
금광요는 떨리는 손으로 남희신의 옷깃을 움켜쥐며 애가 타게 부르짖었다.
“형님,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남희신은 그가 울면서 매달려 오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울부짖는 금광요가 너무 어린애같아 보여 달리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다.
금광요의 몸이 흐느끼며 심하게 떨렸다.
“미안하다, 아요.”
남희신이 열이 올라 뜨거워진 몸을 가슴에 꼭 붙이고 서둘러 말했다.
“내가 나빴다. 난 네가 그런...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라.”
금광요는 아직도 미리 준비해둔 말이 많았지만, 난데없이 남희신의 품에 안기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튼 남희신이 하는 말을 듣고, 그의 손이 다정하게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은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겨우 안식이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금광요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다가 벌떡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떠올랐지만 어떻게 침대로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급하게 휘장을 걷으며 침상 밖으로 발을 내리자 멀찍이 앉아 있던 남희신이 고개를 돌렸다.
“푹 쉬었느냐?”
“형님...”
남희신이 말없이 따뜻하게 미소짓자 금광요는 미안한 듯 머리를 숙였다.
전날 남희신은 금광요가 너무 심하게 괴로워하자 살짝 혈을 만져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남희신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뢰와 호감은 언제나 함께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광요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쩔 수 없이 그의 마음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의지한다고 느꼈던 사람의 마음을 의심했을 때 그것은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금광요를 보고 그는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이 동생은 아직도 어린애였던 거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큰 아픔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남희신은 자신의 생각이 얕았던 걸 후회하는 동시에, 그간 제 쪽이 받았던 고통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 말 하지 마라. 네 마음 아픈 걸 몰랐던 내 탓이다.”
“아닙니다. ...나중에 그에게 가서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네가 그래야 했다고 한다면 난 네 말을 믿는단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말거라.”
“형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금광요가 지나치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도 남희신은 더 이상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다. 다만 안쓰러울 뿐이었다.
“아요, 어머님께는 자주 가 보느냐?”
“...오랫동안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선 못 쓴다. 앞으로는 나도 동행할 터이니...”
금광요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살짝 그를 훔쳐보았다. 하루 해가 지나 여느 때와 같은, 인간에의 불신감이 돌아온 그는 전보다 더 친절해진 남희신의 태도가 다행스럽다기보다는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도 어쩌면 저렇게 사람이 좋은가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세력다툼이 치열한 세가의 가주가 저래도 될 것인지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폭풍은 무사히 다 지나갔는데도 금광요는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지난 앙금이 아직 가슴에 남은 것인가 싶었지만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저 남자 때문이다.
금광요는 거짓 미소 뒤에 자신을 숨긴 채, 온화하게 앉은 남희신의 품위 있는 전신을 응시했다.
어젯밤 내가 저 품에 안겼겠거니, 하고 생각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울 일이 뭐가 있을까?
완벽하게 그를 속여넘겼고, 죄책감까지 심어주었는데.
지금도 그는 간이라도 빼서 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말도 없이 나와버렸으니 그만 돌아가야겠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저는...”
“함께 돌아갈까?”
금광요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며 기쁜 듯이 대답했다.
“예, 형님.”
희신광요 망기무선
(11) (12) (13) (14) (15) (16) (17)
남망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앉은 위무선이 연신 쨍, 쨍 하고 수편을 튕기고 있었다.
위무선은 며칠 전부터 영맥에 중심이 잡혀 겨우 수편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을 법도 하지만, 이렇게 끝도 없이 소리를 내는 건 역시 남망기의 약을 올리자는 게 분명했다.
결국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는 소리가 들리자 위무선이 씩 웃으며 돌아보았다.
“다 읽었어, 남잠?”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남망기의 뒤로 얼른 다가붙었다.
“어디 가? 또 뭐 하려고 그래?”
“아무 것도.”
무성의한 답변밖에 돌아오는 게 없어도 위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남망기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남망기가 바로 어깨를 흔들며 떨쳐버리자, 두 번째는 손가락을 쫙 펼쳐서 갈고리처럼 단단히 움켜잡았다.
“남잠, 넌 친구가 없어서 이 모양인 거야. 친구끼리는 어깨동무를 하는 거라고. 가규랑은 아무 상관 없어. 알겠어?”
남망기가 얕게 한숨을 쉬더니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위무선이 몸을 딱 붙이고 있어서 불편해도 꿋꿋하게 참는 것 같았다.
“나는 너한테 금단을 배우고, 너는 나한테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거지.”
위무선은 끝없이 종알대며 남망기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따라가고, 왼쪽으로 꺾어도 따라갔다.
‘슬슬 멈출 때가 됐는데.’
아니나다를까 남망기가 우뚝 서더니 말했다.
“위영. 뭐 하자는 거야.”
그제서야 위무선은 히히 웃으면서 어깨에 두른 팔을 풀었다.
“남잠, 같이 채의진에 내려가자.”
“거긴 왜?”
“왜긴,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지. 조금만 더 있으면 나 몸에서 새싹이라도 돋아날 거 같아.”
“안 돋아.”
이젠 남망기의 엉뚱하며 진지한 대답에 웃는 것도 이력이 났다.
“어쨌든, 어때? 남잠. 같이 가자, 응?”
“좋아.”
의외로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위무선은 웬일인가 싶었다.
“정말?!”
“대신 술은 안 돼.”
그럼 그렇지!!!
“왜 안 돼?!”
사실은 음식이 아니라 천자소가 목적이었던 위무선이 소리를 질렀다.
“금단을 맺는데 방해가 돼. 술을 마시면 네가 먹은 100가지 약초 중에 80가지는 효험을 잃어.”
“나한테 약초를 100가지나 먹였어?! 댁들은 대체 밥이란 게 뭘 뜻하는 건지 알기나 해?”
남망기가 자유롭게 걷기 시작하면서 내뱉았다.
“금단을 맺고 나면 뭘 먹든 마시든 마음대로 해.”
“그걸 말이라고 해? 내 금단은 이제 씨앗 같은 상태인데, 그럼 언제까지 참으라고!”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도 발길이 운심부지처를 나가는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위무선이 또 장난을 걸려는 것을 남망기가 팔을 들어 막는데, 마침 저편에서 걸어오는 남희신이 보였다.
“택무군!”
“형장.”
그들이 인사를 했지만 남희신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지나가려 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한 마디 더 붙여보려던 위무선은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청담회가 아니었던가?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위무선이 중얼거렸고 남망기가 길을 거슬러 올라가 남희신을 불러세웠다.
“형장?”
“망기.”
“무슨 일입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형장.”
남희신이 이토록 기운없는 모습은 처음 본 남망기가 당황해서 부르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있고 싶구나.”
남희신이 걸어가 버리고, 남망기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위무선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택무군이... 금방 화를 내신 거야...?”
***
“어서오세요, 큰형님. 회상.”
“음.”
“광요 형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금린대, 청담회.
끝없이 객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금광요가 반갑게 섭씨 형제를 맞아들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금자헌이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섭회상이 금광요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걸 참다못한 섭명결이 따끔하게 꾸짖자 잠시 시끄러워질 것 같다가 금광요의 중재로 가라앉았다.
금광요는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다가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멀리서 언뜻 백의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번 고소 남씨의 객은 남희신이 아니었다.
피진을 손에 쥔 남망기가 검은 옷을 입은 위무선을 대동한 것을 보고, 금광요의 창백한 얼굴에 물이 고이듯 미소가 돌아왔다.
“염방존.”
금광요는 두 사람의 인사에 맞절을 하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남망기와 위무선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최근 운심부지처 사람들은 가주인 남희신이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남망기나 남계인이 찾아가서 말을 붙여 보아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답변 뿐이었다. 벽을 치는 태도가 분명해서 캐어 물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금린대 청담회의 초청장이 도착하자,그는 그것을 남망기에게 주고는 자신을 대신하여 참석하라고 말했다. 그 뒤로 위무선이 따라붙었고, 두 사람은 남희신과 절친한 금광요라면 뭐라도 알겠거니 하는 기대를 품고 온 것이었다.
그들도, 혹은 다른 누구도 금광요와 남희신의 사이에 불화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금광요를 만나 보니 낌새가 이상했다.
위무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염방존, 택무군과 싸우신 거에요?”
그러자 금광요의 얼굴에 곤란할 때면 항상 보이는 거북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제가 감히...”
그가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위무선과 남망기가 서로 마주보았다.
“무슨 뜻이지?”
택무군과 염방존이, 정말로 싸웠단 말인가?
“위무선!”
아리송해 하는 위무선의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강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강징이 얼른 웃음기를 지우며 툭 쏘았다.
“야, 여긴 왜 왔어? 네가 고소 남씨 대표라니, 기가 막힌다.”
“대표 아닙니다. 마음대로 따라온 거지.”
옆에 있던 남망기가 불쑥 냉담한 소리로 대꾸했다. 강징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몰랐다가, 위무선이 허리가 끊어져라 웃는걸 보고서야 그가 화를 내는 게 아님을 알았다.
투연청으로 들어서며 강징의 삼독이 수편을 탁 때렸다.
“어때, 할 만해?”
“다들 쓸데없는 참견이야. 내가 어련히 잘할까 봐.”
“어휴, 이걸 그냥... 함광군, 이 녀석 데리고 있기 힘들죠?”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거든! 난 이런 성질머리도 없고-”
“너!”
위무선이 손가락으로 강징의 미간을 꾹 찌르자 강징이 욱하다가 입을 꽉 다물었다. 만사가 해결되었더니 위무선과의 감정도 전으로 돌아가 자칫하면 짓까불고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될 신분이 아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이고, 금광선이 위무선을 발견하고 촉을 세웠지만 암만 해도 꼬투리를 잡을 데가 없어 그냥 넘어가고, 그렇게 청담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썰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특별히 깊은 적막감이 깃드는 것 같았다.
밤늦게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오사모를 벗어 놓고 고금 앞에 앉았다. 연주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남희신과 헤어진 뒤로는 현 하나도 튕긴 적이 없었다.
금일, 다소 억지스럽게 때이른 청담회를 열면서 남희신을 만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자신을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금광요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얼음처럼 가라앉은 현재의 그는 남희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남희신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오래 전, 아주 옛날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목적이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아무리 아픈 일이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방향을 잃어버린 뒤 돌이켜 보니 자신이 걸어온 길은 그와 같은 괴로운 일투성이였다.
그리고 최초로 하기 싫어했던 일이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 줬던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습관적으로 바르게 앉던 금광요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자세가 허물어졌다.
어머니가 주는 단정한 의복을 입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키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금광요, 아니 맹요가 어머니의 기대에 순응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멸시하고, 욕을 퍼붓고 위협적으로 굴었다. 그는 단지 어린애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해치지 않을까 너무 두려웠다.
바로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 시절에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위협하는만큼 자신은 더욱 공손하고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했으므로.
어머니마저 죽고 난 뒤에는 세상에 몸도 마음도 붙일 데가 없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어머니가 일러 주었던, 마땅히 그가 서야 할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 뿐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세상에서 제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야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직도 너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귓가에다 속삭여댔다.
그래도 단 하나의 길밖에 모르는 금광요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성실한 것만으로 부족하면 더 교묘한 일을 하고, 더 위험한 일을 했다. 목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지금 겪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냉담하던 금광선의 태도가 바뀌어, 일찌기 원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원하던 곳에 도달해도, 예상했던 행복이나 만족감은 그 곳에 없다는 것을.
핏줄 따위는 처음부터 상관 없었다. 자식으로 인정하든 말든 금광선은 금광요에게 단지 불쾌한 한 사람의 타인에 불과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겨우 이런 걸 얻으려고 그렇게 고군분투했던 것인가? 난릉 금씨의 자제 금광요, 청하의 적봉존과 고소의 택무군의 의형제인 염방존. 내가 드디어 이것을 손에 넣었노라고 기뻐할만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허망한 길을 계속 달려 온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자 어처구니없는 답이 나왔다.
어머니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금광요는 실없이 웃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낭비시켰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이런 걸 원했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 구역질 나는 짓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렸지 않은가?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조그만 촛불을 덮쳤다. 파르르 떠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불빛이 사방을 어지럽혔다.
어둠 속에 검게 묻힌 사람의 그림자를 보아도 금광요는 놀라지 않았다.
남희신은 불길한 망령처럼 방 한가운데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광요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당신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나는 내 어머니에게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다.
그녀에게 선문 따위는 지긋지긋하다고, 그만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 때 내 진심이란 건 다 죽어버렸다.
남희신이 조용히 촛불의 원 안에 들어오자 흐릿한 불빛이 근심어린 얼굴을 비추었다.
금광요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진심을 보고 싶다고?
나는 평생 가면을 써 왔고, 이제 그것은 내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형님.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대뜸 금광요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제가 형님께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 남자가 어머니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꼭 말씀드려야 하는 건가요?”
금광요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남희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남희신을 쳐다보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어머니가 창기였기 때문에 그런 짓을 당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으신가요!”
그 말에 남희신이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금광요의 팔을 잡았다. 침통하던 그의 얼굴은 금세 후회스러운 빛으로 바뀌었다.
“제 진심이요? 그걸 정말 알고 싶으세요? 지금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걸 알고 싶으세요?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집안 사람들이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문의 부귀도, 선문의 영예도 제 가슴을 채울 수 없고, 음식 맛도 쓰고, 음률도 허무하다는 걸... 이런 걸 제가 왜 형님께 말하고 싶어하겠어요?”
남희신의 눈에는 이미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작게 입술을 벌린 채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어대는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애원하듯 쳐다보는 눈에서 눈물이 계속 넘쳐나 옷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형님께선...”
금광요는 떨리는 손으로 남희신의 옷깃을 움켜쥐며 애가 타게 부르짖었다.
“형님,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남희신은 그가 울면서 매달려 오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울부짖는 금광요가 너무 어린애같아 보여 달리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다.
금광요의 몸이 흐느끼며 심하게 떨렸다.
“미안하다, 아요.”
남희신이 열이 올라 뜨거워진 몸을 가슴에 꼭 붙이고 서둘러 말했다.
“내가 나빴다. 난 네가 그런...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라.”
금광요는 아직도 미리 준비해둔 말이 많았지만, 난데없이 남희신의 품에 안기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튼 남희신이 하는 말을 듣고, 그의 손이 다정하게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은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겨우 안식이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금광요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다가 벌떡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떠올랐지만 어떻게 침대로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급하게 휘장을 걷으며 침상 밖으로 발을 내리자 멀찍이 앉아 있던 남희신이 고개를 돌렸다.
“푹 쉬었느냐?”
“형님...”
남희신이 말없이 따뜻하게 미소짓자 금광요는 미안한 듯 머리를 숙였다.
전날 남희신은 금광요가 너무 심하게 괴로워하자 살짝 혈을 만져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남희신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뢰와 호감은 언제나 함께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광요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쩔 수 없이 그의 마음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의지한다고 느꼈던 사람의 마음을 의심했을 때 그것은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금광요를 보고 그는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이 동생은 아직도 어린애였던 거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큰 아픔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남희신은 자신의 생각이 얕았던 걸 후회하는 동시에, 그간 제 쪽이 받았던 고통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 말 하지 마라. 네 마음 아픈 걸 몰랐던 내 탓이다.”
“아닙니다. ...나중에 그에게 가서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네가 그래야 했다고 한다면 난 네 말을 믿는단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말거라.”
“형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금광요가 지나치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도 남희신은 더 이상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다. 다만 안쓰러울 뿐이었다.
“아요, 어머님께는 자주 가 보느냐?”
“...오랫동안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선 못 쓴다. 앞으로는 나도 동행할 터이니...”
금광요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살짝 그를 훔쳐보았다. 하루 해가 지나 여느 때와 같은, 인간에의 불신감이 돌아온 그는 전보다 더 친절해진 남희신의 태도가 다행스럽다기보다는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도 어쩌면 저렇게 사람이 좋은가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세력다툼이 치열한 세가의 가주가 저래도 될 것인지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폭풍은 무사히 다 지나갔는데도 금광요는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지난 앙금이 아직 가슴에 남은 것인가 싶었지만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저 남자 때문이다.
금광요는 거짓 미소 뒤에 자신을 숨긴 채, 온화하게 앉은 남희신의 품위 있는 전신을 응시했다.
어젯밤 내가 저 품에 안겼겠거니, 하고 생각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울 일이 뭐가 있을까?
완벽하게 그를 속여넘겼고, 죄책감까지 심어주었는데.
지금도 그는 간이라도 빼서 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말도 없이 나와버렸으니 그만 돌아가야겠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저는...”
“함께 돌아갈까?”
금광요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며 기쁜 듯이 대답했다.
“예, 형님.”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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