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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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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법 버티는데?”
  “안 그러면 덩치가 아깝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두런거리는 말소리 끝에 내리쬐는 햇살처럼 사정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단단한 근육이 탄력있게 매를 튕겨내었지만 입에 거품을 문 짐승은 더이상 소리도 내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까이 오던 노인이 애티가 남은 청년들이 즐기는 잔인한 유희를 보고 몸서리치며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고 달아났다.
  한참 동안 먼지가 이는 넓은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야, 이놈들 뭐하는 짓이냐!”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놀란 청년들이 돌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미끈한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망할! 깜짝 놀랐네!”
  “이 자식 뭐야! 죽고 싶어? 얼른 꺼져!”
  험한 장난을 치던 남자들이 곧장 화를 내며 을러대었다. 여차하면 들고 있던 몽둥이로 후려칠 기세로, 어지간히 질이 나쁜 것 같았다.
  위무선은 그들의 어깨 너머로 처참한 꼴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들이 벌써부터 이런 짓이나 저지르고 다니다니. 어떻게 혼을 내 줄까?”
  “아니 이 자식이 그래도?”
  선두에 서 있던 놈팡이가 냅다 몽둥이를 휘두르자 위무선이 코웃음을 쳤다. 
  영력이 아니라 두 팔을 잃었대도 이딴 조무래기들에게 당할 그가 아니다. 슬쩍 몸을 숙이며 소매를 휘두르고 다리를 걸자 대뜸 두 명이 나가떨어졌다.
  “이 새끼가!”
  “붙잡아!”
  “죽여버린다!”
  위무선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은 것을 본 청년들이 무기를 줏어들며 사납게 소리질렀다. 그 중에는 나무막대가 아니라 낫이나 도끼를 움켜쥔 손도 있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하. 이 애송이들이 정말. 모조리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청년들은 한꺼번에 움직이며 위무선을 열조각으로 찢어 죽일 듯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몇짝도 가지 못해 걸음이 느려지더니 하나 둘씩 멈추어 섰다. 
  그들은 헛것이 보이나 싶어서 눈을 껌벅였다.
  남자는 분명 눈부신 태양 아래 혼자서 서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남자와는 대조되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사람이라고 한 것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로 봐선 언뜻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하얀 인간이 귀 밑까지 입을 찢으며 미소를 짓자 바라보던 청년들도 차례대로 하얗게 질려갔다.
  -히... 히... 히...-
  어디서 울려나오는지 모를 음산한 웃음소리가, 화창하고 훈훈한 대낮의 공기를 건조시키는 듯했다.
  “으아아악!”
  “귀, 귀신이야!”
  “엄마!”
  악귀같던 얼굴들은 순식간에 겁에 질린 어린애의 그것으로 변해버렸다.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청년들이 나무토막이고 쇳덩이고 마구 집어던지며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덩치 큰 녀석이 ‘엄마’하고 외치는 소리에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하얀 사내는 이내 귀곡성과 함께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면 좋을까?”
  위무선이 불쌍하게 당한 말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었길래 가망이 없을 줄 알았더니, 위무선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곤란하군. 이 근처에는 냇가도 없는데.”
  두리번거리던 위무선이 문득 옆구리에 찼던 술병을 풀어 말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러자 말은 뜻밖에 거부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핥았다.
  잠시 후에는 비틀거리며 일어서기까지 했다.
  “야, 너 참 맘에 드는데!”
  다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걸 보니 뼈는 다치지 않은 모양. 
  예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 얼룩덜룩한 말은 볼품없고 다리가 짧은 짐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제 손으로 구해내어 그런지 정이 갔다.
  말은 고삐를 잡지 않아도 위무선이 한들한들 걸어가자 열심히 따라왔다. 다음 주인으로 삼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위무선은 그대로 말과 함께 걸어서 가까운 객점에 다다른 후 잘 먹이고 치료도 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말은 제법 멀쩡해져서 위무선을 태우고 다니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향기처럼 눈을 스쳤다.  

  -남잠!
 
  위무선이 반가워하며 외쳤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빛에 휘감긴 남망기가 돌아보았다. 

  남망기가 웃는다.
  
  못 말리겠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어르는 눈동자에 수천 가지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윽!”
  위무선은 팔을 허우적대며 몸부림을 쳤다.
  난데없이 갈기를 뜯긴 말이 힝힝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아아...”
  얼굴을 문지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전날 잠을 설쳤더니 말등 위에서 잠들었나 보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충실한 말이 길을 따라 계속 이동하여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자꾸 고개를 흔들어도 꿈 속에서 본 남망기의 얼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망기가 정말로 웃는 것을 본 건 딱 한 번뿐. 꿈 속의 남망기는 무엇이 더해졌는지 미소짓는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황홀해질 정도였지만.
  위무선이 원하는 것은 웃지 않는 남망기, 진짜 남망기였다.


  풍경으로 느껴지는 계절이 강염리의 혼례식 때와 비슷하니 꼭 2년의 시간이 지났다.
  남망기가 사라진 지 2년이 지난 것이다.
  남희신의 한실에 ‘중요한 일이 있어 떠난다’는 아주 간단한 편지를 남겼을 뿐. 그가 왜,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남망기가 돌아오지 않는 채로 1개월 가량이 지났을 때 걱정이 된 남희신이 직접 연화오를 찾았다. 남망기는 평소 인간관계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달리 짚이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처럼 강하고 장성한 남자가 1개월쯤, 하고 위무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후로는 남희신과 함께 그를 찾아 가 보지 않은 데가 없었다. 
  뜬금없이 이런 머나먼 지역까지 행차한 것도 흰 옷을 입은 수사를 보았다는 뜬소문 때문이었다.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실제 대상이 수사는 커녕 승려였다는 사실에 맥이 풀려 돌아가는 중이었다.
  운몽 지역으로 들어온 위무선은 연화오를 향하지 않고 망설였다. 요즘 강징이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건지 우울해 하다 짜증을 냈다 하며 야단이었다. 그래서 객점에 들러 술이나 마실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연화오에 들어서자 마침 강징이 연무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주가 된 후 강징은 문하생들을 양성하는 일에 특히 힘을 쏟았다. 덕분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청담성회를 열어도 제법 규모가 있고 위풍당당하여 체면이 깎이지 않았다. 다만 엄하게 기강을 잡느라 강풍면의 생전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딱딱해진 것이 아쉬웠다.
  위무선과 마주친 강징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웬 말이야? 왜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데? 밖에 놔둬.”
  “싫어. 다른 말이랑 섞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따위 못생긴 말에게 누가 손을 대? 대체 어디서 주운 거야? 설마 돈을 주고 산 건 아니겠지?”
  위무선은 들은 체도 않고 정원의 나무에 고삐를 매어 두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징은 이번에도 허탕이었나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비워둔 방에는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허리춤에서 진정을 뽑아서 내려놓으려던 위무선에게 문득 남망기가 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실망으로 늘어진 육체에 돌연 맹렬한 분노가 솟구치며 손에 든 것을 힘껏 내던졌다. 
  만천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어도 사람 하나를 찾지 못한다.
  이윽고 의자에 앉아 양 손 안에 움켜쥔 머릿속은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남망기는 틀에 박히고 융통성 없는 인간이라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고, 원하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친구라고 했잖아.’
  그 값비싼 친구가 되기 위해 몇 년이 걸렸는데, 난데없이 사라져버려? 
  처음에는 남망기가 무시하는 바람에 오기가 생겨서 마음이 가는 줄 알았다. 실제로 남망기를 건드리고 건드리다 폭발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 소녀들을 짓궂게 놀릴 때처럼 간질간질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단지 그 뿐인 줄 알았고, 이후로는 각자의 집안이 재난을 겪고 전쟁이 터지고, 위무선이 사도를 걸으며 사이는 더욱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찾아오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조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위무선은 남망기가 자신을 친구로 인정한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아니, 그가 보여주는 다정한 우의에 그가 정말로 좋아졌다. 고지식해서 좀체 넘어오질 않더니, 역시 고지식하기 때문에 한 번 넘어오고 난 다음엔 한계도 없는 것인지.
  그런 남망기가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강징이 등초에 불을 당기자 위무선은 또 다른 꿈인가 싶어서 은은한 빛을 쳐다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강징은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위무선이 나라잃은 것처럼 구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강징에게도 남망기의 실종은 뜻밖이었지만 위무선이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염리와 달리 두 사람이 그렇게 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강징은 현실적인 성격인데다 다정하지도 못해 근거도 없이 남망기가 돌아올 거라는 위로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뚝뚝하게 근황을 묻거나 대화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도 그는 거두절미하고 툭 내뱉았다.
  “위무선, 내일 금린대에 갈래?”
  그 말에 위무선이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강징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가끔씩 위무선을 난릉에 데려가서 기분전환을 시켜 주는 것이 해 줄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약 1년 전 강염리는 예쁜 아들을 낳았다. 이따금씩 금린대에 가서 조카를 들여다보는 것은 위무선 뿐 아니라 강징의 낙이기도 했다. 





  다음 날 밤은 만월이었다. 
  연화오에서 손님이 온 것과 맞추어 정원에서는 환한 달빛 아래 가족들만의 소연회가 열렸다.
  오늘은 금부인조차도 드물게 기분이 좋아 금광선과 함께 아기를 어르며 화기애애했고, 금자헌 부부는 언제나처럼 금슬이 좋았다. 
  강징과 위무선은 나란히 앉아서 약속이나 한 듯 누님에게 시선이 박혔다. 금자헌이 강염리의 곁에 딱 붙어서 뭐라고 소근거리고,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웃는 것을 보면서 두 사람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강징이 금자헌 부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간 후에도 위무선은 앉은 자리에서 술만 털어넣었다.
  도란도란한 이야기 소리와 웃음 소리가 꽃피는 가운데, 갑자기 익숙한 고금 소리가 들려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재빨리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니 정자 곁에서 금을 타는 금광요의 모습이 보였다. 음률이 낯익은 것으로 보아 남희신에게 익힌 고소 남씨의 악곡인 것 같았다. 위무선은 금릉의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잊었던 남망기를 떠올리고 욱신거리는 속을 눌렀다.
  금광요가 짧은 실력을 선보일 어린아이도, 기녀도 아닌데 금광선은 그에게 고금을 타라고 명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그런 일도 아무렇지 않은지 눈을 감고 가락에 취했다. 
  요 2년간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 
  금광요는 택무군의 의형제가 아니라 도려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운심부지처 출입이 잦았다. 끝내 훌륭하게 금단을 완성시켰고, 남희신과 사귀며 문· 무· 예술에의 조예가 깊어진 그는 마치 딴 사람이 된 듯 고아해져서 이제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일들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청담회나 사냥대회처럼 큰 손님맞이를 할 일이 생기면 금린대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가해지면 어김없이 고소로 떠나서 한참을 머물렀다. 금광선이 어딜 가서 바람을 피우든 쫓아가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도 없었고, 그가 주변에 마구 분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아도 무덤덤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금광요에게 은근히 아부를 하는 세력까지 생겨나는 형편이었으나 그는 관심이 없었다.



  
  연회가 끝나자 강징과 위무선은 붙잡는 손을 거절하고 기분 좋을 때 돌아가겠다며 금린대를 나섰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강징은 삼독을 타고 빠르게 돌아갔고, 위무선은 달빛 아래 말을 타고 가며 챙겨온 술병을 기울였다. 
  강징은 위무선이 아무리 위태로워 보여도 남망기처럼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왠지는 몰라도 위무선은 어딜 가든 강징에게 행로를 밝혔고, 반드시 약속한 시간 내에 돌아왔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있어.
  만나러 올 테니 연화오에서 기다리라는 남망기의 말은 그대로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사라진 이유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꼭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날 연화호를 따라 거슬러 올라간 위무선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단골 주점을 찾아가 방까지 빌려서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꿈에 나타났던 얼굴이 흐려질 때까지 진탕 마셔대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