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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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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염리는 금광요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화기애애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부한 강징을 제외하고 각자의 상 앞에 앉았다.
금광요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갈라 앉은 두 사람을 흘끗 돌아보았다.
온정은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마음도 편해져서 얼마간 평소의 고고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널찍한 청당은 온정과 강염리가 정답게 소근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주 적막했다. 굳이 남망기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어색한 공기를 느꼈다.
“위공자, 두 사람, 싸웠어요?”
금광요가 고의로 찔러 봐도 남망기는 조용했고 위무선은 부러 못 들은체였다.
“아선, 심술부리면 안 돼.”
강염리는 남망기와 위무선이 아주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그래도 위무선은 못 들은척이었다.
금광요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공자. 망기, 옆에서 보고 있으면 당신들은 참 이상해요. 위공자는 대체 망기와 친한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들에게 더 궁금한 문제였다.
위무선이 흘끔 남망기를 넘겨보니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음식만 씹고 있었다.
남망기가 매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뻔뻔하게 내뱉았다.
“친해요!”
“음...”
금광요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망기가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지 들으셨겠군요?”
이 말에 귀가 먹은 것처럼 식사만 하던 남망기의 손이 멈추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위무선에게, 금광요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반찬 그릇을 바라보는 채 자못 걱정된다는 말투였다.
“요즘 망기가 굉장히 이상합니다. 서책을 베끼다가 글자를 틀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가규를 어겨도 모르고 지나치고. 몇 시진씩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기도 해요.”
그동안 남망기의 심기가 불편했던 건 사실이나, 금광요는 과장에, 곡해에, 거짓말까지 마구 섞어 넣었다.
남망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금광요를 쳐다보았지만, 금광요는 남망기도 위무선도 외면한 채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편 위무선의 찌푸려졌던 얼굴이 점점 펴지더니 함박웃음을 띠었다.
“남잠- 세상에!”
남망기를 보니 창백하게 굳은 채로 수저를 내려놓는 것이 여차하면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남잠! 너 사랑에 빠졌구나!”
이 말에 남망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훌쩍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위무선의 눈에 그 행동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다려! 남잠!”
위무선은 남망기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마음 상했던 일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며 불렀다.
“남잠! 남잠! 남망기!! 남가 둘째 공자!!! 함광군!!!! 거기 서!!!!!”
금광요는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발소리와 외치는 소리를 음악처럼 감상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란이 끊기자 공기중에 먹먹한 느낌이 내려앉는 가운데 온정과 강염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금광요를 쳐다보았다. 여인답게 예리한 그녀들은 금광요가 감정을 잘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금광요는 굳이 수상해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쏭달쏭하게 중얼거렸다.
“손에 닿지 않는 꽃은 어이하여 향기를 풍기는지...”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는 걸 안다. 비단 이 일뿐 아니라, 남희신의 손에 의해 금린대를 떠난 후부터 이상한 행동을 많이도 했다. 자신과 무관할 뿐 아니라 아무 이득도 없는 위험한 짓까지.
그렇지만 즐거웠다는 사실 한 가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사람들을 멋대로 쥐락펴락, 조종한 건 별다를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겼으니 남희신이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금광요는 온정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남희신에게 변명할 말을 생각했다.
위무선과 남망기는 바로 오늘 아침에 싸웠던 물가를 따라서 나란히 걸어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무선이 남망기가 어떻게 나오던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알았어, 함광군. 너 나에게 의논하고 싶어서 술병 같은 걸 끌어안고 찾아왔구나?”
뭐라고 구슬려도, 놀려도 결코 입을 열지 않는 남망기를 그는 문득 흘겨보았다.
나한텐 만나기만 하면 갖은 쓴소리만 하고, 아무리 초대해도 안 오더니,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
이걸 도와 줘, 말아?
그렇지만 가시돋힌 불만도 함광군이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렇게 들여다보아도 변함없이 찬바람만 도는 남망기인데.
춘궁도 한 장을 보고도 난리를 쳤던 경험 없고 고고한 이 남자가, 무슨 수로 연애를 할까? 입맞춤하는 법이나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서늘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걷는 남망기가 입맞춤 하는 모습은 영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물며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같은 건 더더욱.
‘당연하지! 밀어를 속삭이는 그런 기특한 일을 남잠이 할 수 있을 리가. 차라리 몸으로 보여 준다면 몰라.’
몸으로...
위무선은 이까지 생각하고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냉정한 성격이나, 수도승같은 취미밖에 없는 점이나, 말주변이 없는 점이나, 하나같이 달콤한 연애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위무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남망기가 지독하게도 아름다운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길을 걸어가는 중에도 여자고 남자고, 남망기를 아예 보지 못하면 모를까 한 번만 보고 마는 이는 없었다. 타인의 눈까지 빌릴 필요도 없이 위무선 제 눈으로만 봐도 하늘에서 뽑아낸 듯 대단한 미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뭐가 고민이람?
남망기가 아무리 말주변이 없다 해도 벙어리는 아닌데, 단 한 마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단 말인가.
“남잠.”
“...”
“그냥 그 여인을 꽉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
“넌 말은 못해도 사람 붙잡는 것만은 특기잖아.”
“...”
“혹시 못 먹을 사람이라도 돼? 설마 유부녀는 아니지? 남잠?”
“...”
“남잠!”
옆에서 소리를 꽥 질러도 대답이 없자 위무선은 남망기의 앞으로 뛰어들어 길을 막았다. 남망기는 멈춰서더니 곧장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무선도 휙 몸을 날려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남망기가 한숨을 쉬고, 위무선이 장난스럽게 웃는 찰나, 대뜸 뻗어온 손가락이 무작스럽게 살을 꼬집었다.
“으악!”
남망기는 자세 한 톨 흩트리지 않은 채 도로 걸어가 버렸고, 위무선은 멍이 들 정도로 꼬집힌 팔을 들여다 보며 연방 앓는 소리를 냈다.
“야, 남잠! 선문의 공자가 민간인에게 상처를 입혀도 되는 거야? 남선생님에게 일러줄 거야!”
그 말 끝에 뭔가가 휙 날아오는 바람에 ‘앗’ 하면서 겨우 받아내고 보니, 외상에 잘 듣는 고소 남씨의 약병이었다.
다시 웃음을 띤 위무선이 남망기를 따라잡았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이 사내 나름의 장난인가보다.
그의 옆에서 위무선은 제가 남의 연애를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백전연마의 노장이라느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남망기의 입을 열게 하려고 갖은 수를 썼다.
도를 닦는 스님처럼 가만히 있던 남망기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자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딱 멈춰 서서 위무선을 노려보았다.
위무선은 또 꼬집힐까 봐 거리를 유지하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인데?”
“그 얘긴 하지 마.”
“정말 안 할 거야?”
“안해.”
“좋아. 그럼 대신에 너도, 마도니 사술이니 그런 얘긴 안 하는 거다.”
이 말과 함께 가볍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위무선을 바라보는 연한 두 눈이 은근한 노기를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위무선 역시 웃음기를 사그라뜨리고는, 손을 내밀어서 남망기의 소매자락을 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잠, 우리 지금 좋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싸우지 말고 이렇게 지내자. 나 정말 우울하단 말이야.”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선 남망기는 그처럼 부드러운 부탁을 들어도 용납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대답했다.
“알았어.”
위무선은 너무 좋았던 나머지, 그대로 남망기를 잡아당겨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 바람에 휘청했다가 자세를 바로잡는 걸 보고 나서야 그가 남에게 닿기 싫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남망기는 밀쳐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집요한 위무선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남망기를 붙들고는 끝까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인 거야, 남잠. 알겠지?”
남망기가 한숨을 쉬더니 자포자기한 듯 대답했다.
“...그래.”
***
운심부지처, 물안개가 뿌옇게 낀 폭포수 아래.
하얗고 큼직큼직한 바위 근처에서 흰 옷을 입은 수련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모범적이지 않은 모의를 하고 있었다.
물놀이를 할까, 숲 속으로 들어갈까 상의하던 소년들은 문득 들려오는 은은한 퉁소 소리에 한꺼번에 얼어붙고 말았다.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솜씨는 택무군 남희신의 것이 분명했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건만 지레 밭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남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소리가 가까운 것이 두려웠던 소년들은 결국 물가를 벗어나기로 하고 조용히 숲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후에도 퉁소 소리는 좀처럼 끊기지 않고 소년들의 뒤를 따르는 듯했다.
남희신은 큰 물이 떨어지기 직전의 바위 위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신선이 속세를 내려다보는 듯 속이 탁 트이는 전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시원한 기분이 아니었다.
며칠 전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금광요가 이번에는 금자헌의 혼례 때문에 난릉으로 떠났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자 남망기가 어쩌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화오에 갔었다는 말뿐이었다.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마도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는 동안 답답했으리라는 생각에 더 묻지 않았다.
남망기의 근황에 대해서는 웃음과, ‘아직 절교하진 않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망기는 아직 운몽에 있었지만 그도 난릉 금씨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올 터였다.
남희신은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었다. 몇 달간 금광요를 곁에 두고 있었더니 벌써 익숙해져버린 건지. 호리호리한 수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금광요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아서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백의를 걸치고 있던 금광요는 어딘가 애달픈 느낌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리에 두른 기묘한 연검이나, 미간에 찍힌 붉은 단사가 색다르지만 얇은 천이 날씬한 몸을 겹겹이 감싼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어떤 남씨의 수사들보다도 품위가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총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남희신은 마음 속으로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런데 그 총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현재 본가에서 백여 가지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중이었다.
금린대에 도착한 금광요는 혼례 준비로 바쁜 집안을 몇 번 왔다갔다하며 어수선한 일들을 하나하나 손 아래로 가져왔다. 금린대는 현재 대혼란에 빠진 상태였기에 그를 저지할 정도로 수완이 좋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식 혼례일에 앞서 강염리를 맞아들여야 했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연화오에는 현재 나이든 여자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강염리의 단장은 시어머니인 금부인이 도맡아서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금부인은 금광요를 냉대하던 일마저 잠시 미루고는 하루에도 열 차례씩 그를 불러다가 의논하고 지시를 내렸다.
현재 가장 부유한 세가인 난릉 금씨의 후계자, 금자헌의 연혼은 엄청나게 큰 행사임에 틀림없었다. 세도가 아래로 뼈있는 가문 사람들을 빠짐없이 초대하는 일만도 큰일이었다.
문득.
금광요는 바쁘게 움직이고 수백번씩 사람을 부리고 부딪히면서도 예전처럼 스스로를 단속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만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자신의 행동들이 예전처럼 억지스럽지 않으며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금자훈과 마주쳤을 때도 허물없이 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궁기도의 공사는 잘 되어가고 있어?”
운심부지처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금광선의 명령으로 중요한 일은 다 떠맡고 있던 금광요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럭 뒤가 켕긴 금자훈은 그가 뭐라도 알고 하는 소린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지는 금광요는 평소와 다름없이 적의 없고 유순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금광요가 아무 잘못한 게 없어도 쏘아 줬을 금자훈이지만, 지금은 금광선이 눈에 띄게 싸고 도는 형국이니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이롭지 않았다.
끝내 불퉁한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사라지는 금자훈의 뒷모습을 보며 금광요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접이 달갑지 않은 심란한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하루하루가 흘러가자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예식 준비도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금광요는 딱 하나, 예기치 않게 떠나 있느라 연꽃이 단단히 뿌리를 박은 연못을 통째로 옮겨 대정원에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려던 계획을 실행시킬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혼례식 전날.
금린대는 하루 이르게 도착한 손님들로 인해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해질 무렵에는 신부의 가족인 강징과 위무선이 천천히 연도를 걸어올라왔다. 같은 시각에 남망기는 운심부지처로 향하고 있었고 다음 날 택무군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강징과 위무선은 금종주 부부, 그리고 금자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별관에 들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강염리는 금광요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화기애애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부한 강징을 제외하고 각자의 상 앞에 앉았다.
금광요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갈라 앉은 두 사람을 흘끗 돌아보았다.
온정은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마음도 편해져서 얼마간 평소의 고고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널찍한 청당은 온정과 강염리가 정답게 소근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주 적막했다. 굳이 남망기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어색한 공기를 느꼈다.
“위공자, 두 사람, 싸웠어요?”
금광요가 고의로 찔러 봐도 남망기는 조용했고 위무선은 부러 못 들은체였다.
“아선, 심술부리면 안 돼.”
강염리는 남망기와 위무선이 아주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그래도 위무선은 못 들은척이었다.
금광요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공자. 망기, 옆에서 보고 있으면 당신들은 참 이상해요. 위공자는 대체 망기와 친한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들에게 더 궁금한 문제였다.
위무선이 흘끔 남망기를 넘겨보니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음식만 씹고 있었다.
남망기가 매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뻔뻔하게 내뱉았다.
“친해요!”
“음...”
금광요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망기가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지 들으셨겠군요?”
이 말에 귀가 먹은 것처럼 식사만 하던 남망기의 손이 멈추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위무선에게, 금광요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반찬 그릇을 바라보는 채 자못 걱정된다는 말투였다.
“요즘 망기가 굉장히 이상합니다. 서책을 베끼다가 글자를 틀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가규를 어겨도 모르고 지나치고. 몇 시진씩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기도 해요.”
그동안 남망기의 심기가 불편했던 건 사실이나, 금광요는 과장에, 곡해에, 거짓말까지 마구 섞어 넣었다.
남망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금광요를 쳐다보았지만, 금광요는 남망기도 위무선도 외면한 채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편 위무선의 찌푸려졌던 얼굴이 점점 펴지더니 함박웃음을 띠었다.
“남잠- 세상에!”
남망기를 보니 창백하게 굳은 채로 수저를 내려놓는 것이 여차하면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남잠! 너 사랑에 빠졌구나!”
이 말에 남망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훌쩍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위무선의 눈에 그 행동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다려! 남잠!”
위무선은 남망기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마음 상했던 일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며 불렀다.
“남잠! 남잠! 남망기!! 남가 둘째 공자!!! 함광군!!!! 거기 서!!!!!”
금광요는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발소리와 외치는 소리를 음악처럼 감상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란이 끊기자 공기중에 먹먹한 느낌이 내려앉는 가운데 온정과 강염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금광요를 쳐다보았다. 여인답게 예리한 그녀들은 금광요가 감정을 잘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금광요는 굳이 수상해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쏭달쏭하게 중얼거렸다.
“손에 닿지 않는 꽃은 어이하여 향기를 풍기는지...”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는 걸 안다. 비단 이 일뿐 아니라, 남희신의 손에 의해 금린대를 떠난 후부터 이상한 행동을 많이도 했다. 자신과 무관할 뿐 아니라 아무 이득도 없는 위험한 짓까지.
그렇지만 즐거웠다는 사실 한 가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사람들을 멋대로 쥐락펴락, 조종한 건 별다를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겼으니 남희신이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금광요는 온정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남희신에게 변명할 말을 생각했다.
위무선과 남망기는 바로 오늘 아침에 싸웠던 물가를 따라서 나란히 걸어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무선이 남망기가 어떻게 나오던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알았어, 함광군. 너 나에게 의논하고 싶어서 술병 같은 걸 끌어안고 찾아왔구나?”
뭐라고 구슬려도, 놀려도 결코 입을 열지 않는 남망기를 그는 문득 흘겨보았다.
나한텐 만나기만 하면 갖은 쓴소리만 하고, 아무리 초대해도 안 오더니,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
이걸 도와 줘, 말아?
그렇지만 가시돋힌 불만도 함광군이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렇게 들여다보아도 변함없이 찬바람만 도는 남망기인데.
춘궁도 한 장을 보고도 난리를 쳤던 경험 없고 고고한 이 남자가, 무슨 수로 연애를 할까? 입맞춤하는 법이나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서늘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걷는 남망기가 입맞춤 하는 모습은 영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물며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같은 건 더더욱.
‘당연하지! 밀어를 속삭이는 그런 기특한 일을 남잠이 할 수 있을 리가. 차라리 몸으로 보여 준다면 몰라.’
몸으로...
위무선은 이까지 생각하고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냉정한 성격이나, 수도승같은 취미밖에 없는 점이나, 말주변이 없는 점이나, 하나같이 달콤한 연애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위무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남망기가 지독하게도 아름다운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길을 걸어가는 중에도 여자고 남자고, 남망기를 아예 보지 못하면 모를까 한 번만 보고 마는 이는 없었다. 타인의 눈까지 빌릴 필요도 없이 위무선 제 눈으로만 봐도 하늘에서 뽑아낸 듯 대단한 미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뭐가 고민이람?
남망기가 아무리 말주변이 없다 해도 벙어리는 아닌데, 단 한 마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단 말인가.
“남잠.”
“...”
“그냥 그 여인을 꽉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
“넌 말은 못해도 사람 붙잡는 것만은 특기잖아.”
“...”
“혹시 못 먹을 사람이라도 돼? 설마 유부녀는 아니지? 남잠?”
“...”
“남잠!”
옆에서 소리를 꽥 질러도 대답이 없자 위무선은 남망기의 앞으로 뛰어들어 길을 막았다. 남망기는 멈춰서더니 곧장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무선도 휙 몸을 날려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남망기가 한숨을 쉬고, 위무선이 장난스럽게 웃는 찰나, 대뜸 뻗어온 손가락이 무작스럽게 살을 꼬집었다.
“으악!”
남망기는 자세 한 톨 흩트리지 않은 채 도로 걸어가 버렸고, 위무선은 멍이 들 정도로 꼬집힌 팔을 들여다 보며 연방 앓는 소리를 냈다.
“야, 남잠! 선문의 공자가 민간인에게 상처를 입혀도 되는 거야? 남선생님에게 일러줄 거야!”
그 말 끝에 뭔가가 휙 날아오는 바람에 ‘앗’ 하면서 겨우 받아내고 보니, 외상에 잘 듣는 고소 남씨의 약병이었다.
다시 웃음을 띤 위무선이 남망기를 따라잡았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이 사내 나름의 장난인가보다.
그의 옆에서 위무선은 제가 남의 연애를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백전연마의 노장이라느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남망기의 입을 열게 하려고 갖은 수를 썼다.
도를 닦는 스님처럼 가만히 있던 남망기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자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딱 멈춰 서서 위무선을 노려보았다.
위무선은 또 꼬집힐까 봐 거리를 유지하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인데?”
“그 얘긴 하지 마.”
“정말 안 할 거야?”
“안해.”
“좋아. 그럼 대신에 너도, 마도니 사술이니 그런 얘긴 안 하는 거다.”
이 말과 함께 가볍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위무선을 바라보는 연한 두 눈이 은근한 노기를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위무선 역시 웃음기를 사그라뜨리고는, 손을 내밀어서 남망기의 소매자락을 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잠, 우리 지금 좋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싸우지 말고 이렇게 지내자. 나 정말 우울하단 말이야.”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선 남망기는 그처럼 부드러운 부탁을 들어도 용납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대답했다.
“알았어.”
위무선은 너무 좋았던 나머지, 그대로 남망기를 잡아당겨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 바람에 휘청했다가 자세를 바로잡는 걸 보고 나서야 그가 남에게 닿기 싫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남망기는 밀쳐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집요한 위무선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남망기를 붙들고는 끝까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인 거야, 남잠. 알겠지?”
남망기가 한숨을 쉬더니 자포자기한 듯 대답했다.
“...그래.”
***
운심부지처, 물안개가 뿌옇게 낀 폭포수 아래.
하얗고 큼직큼직한 바위 근처에서 흰 옷을 입은 수련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모범적이지 않은 모의를 하고 있었다.
물놀이를 할까, 숲 속으로 들어갈까 상의하던 소년들은 문득 들려오는 은은한 퉁소 소리에 한꺼번에 얼어붙고 말았다.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솜씨는 택무군 남희신의 것이 분명했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건만 지레 밭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남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소리가 가까운 것이 두려웠던 소년들은 결국 물가를 벗어나기로 하고 조용히 숲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후에도 퉁소 소리는 좀처럼 끊기지 않고 소년들의 뒤를 따르는 듯했다.
남희신은 큰 물이 떨어지기 직전의 바위 위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신선이 속세를 내려다보는 듯 속이 탁 트이는 전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시원한 기분이 아니었다.
며칠 전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금광요가 이번에는 금자헌의 혼례 때문에 난릉으로 떠났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자 남망기가 어쩌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화오에 갔었다는 말뿐이었다.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마도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는 동안 답답했으리라는 생각에 더 묻지 않았다.
남망기의 근황에 대해서는 웃음과, ‘아직 절교하진 않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망기는 아직 운몽에 있었지만 그도 난릉 금씨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올 터였다.
남희신은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었다. 몇 달간 금광요를 곁에 두고 있었더니 벌써 익숙해져버린 건지. 호리호리한 수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금광요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아서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백의를 걸치고 있던 금광요는 어딘가 애달픈 느낌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리에 두른 기묘한 연검이나, 미간에 찍힌 붉은 단사가 색다르지만 얇은 천이 날씬한 몸을 겹겹이 감싼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어떤 남씨의 수사들보다도 품위가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총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남희신은 마음 속으로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런데 그 총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현재 본가에서 백여 가지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중이었다.
금린대에 도착한 금광요는 혼례 준비로 바쁜 집안을 몇 번 왔다갔다하며 어수선한 일들을 하나하나 손 아래로 가져왔다. 금린대는 현재 대혼란에 빠진 상태였기에 그를 저지할 정도로 수완이 좋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식 혼례일에 앞서 강염리를 맞아들여야 했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연화오에는 현재 나이든 여자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강염리의 단장은 시어머니인 금부인이 도맡아서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금부인은 금광요를 냉대하던 일마저 잠시 미루고는 하루에도 열 차례씩 그를 불러다가 의논하고 지시를 내렸다.
현재 가장 부유한 세가인 난릉 금씨의 후계자, 금자헌의 연혼은 엄청나게 큰 행사임에 틀림없었다. 세도가 아래로 뼈있는 가문 사람들을 빠짐없이 초대하는 일만도 큰일이었다.
문득.
금광요는 바쁘게 움직이고 수백번씩 사람을 부리고 부딪히면서도 예전처럼 스스로를 단속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만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자신의 행동들이 예전처럼 억지스럽지 않으며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금자훈과 마주쳤을 때도 허물없이 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궁기도의 공사는 잘 되어가고 있어?”
운심부지처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금광선의 명령으로 중요한 일은 다 떠맡고 있던 금광요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럭 뒤가 켕긴 금자훈은 그가 뭐라도 알고 하는 소린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지는 금광요는 평소와 다름없이 적의 없고 유순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금광요가 아무 잘못한 게 없어도 쏘아 줬을 금자훈이지만, 지금은 금광선이 눈에 띄게 싸고 도는 형국이니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이롭지 않았다.
끝내 불퉁한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사라지는 금자훈의 뒷모습을 보며 금광요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접이 달갑지 않은 심란한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하루하루가 흘러가자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예식 준비도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금광요는 딱 하나, 예기치 않게 떠나 있느라 연꽃이 단단히 뿌리를 박은 연못을 통째로 옮겨 대정원에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려던 계획을 실행시킬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혼례식 전날.
금린대는 하루 이르게 도착한 손님들로 인해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해질 무렵에는 신부의 가족인 강징과 위무선이 천천히 연도를 걸어올라왔다. 같은 시각에 남망기는 운심부지처로 향하고 있었고 다음 날 택무군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강징과 위무선은 금종주 부부, 그리고 금자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별관에 들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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