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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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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하게 두 사람이 앉은 정자 주위로 여린 꽃잎이 휘몰아치며 수면 위에 내려앉았다.
“형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금광요의 손끝을 스쳤다.
그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금광요가 금린대로 돌아왔을 때에도 모현우는 여전히 가솔들의 냉대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금광선이 그를 불러들인 것이 무언가의 홧김이었는지, 변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현우가 집 안에 들어온 후로는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금자헌은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관심이 없었고, 금자훈은 멸시하고 괴롭혔다. 금부인의 눈에는 아예 띄지도 않는 게 현명하다는 걸 모현우도 잘 알았다.
그러나 금광요가 돌아와 친절하게 대해 주자 그런 푸대접도 한풀 꺾였다. 그에 아직 어린 티도 벗지 못한 모현우는 홀린 듯이 금광요의 뒤를 쫓아다녔다.
금광요가 짐짓 마음을 숨기듯이 웃었다.
“내가 아름다우냐?”
“네. 형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봐요.”
“현우, 그렇게 하면 못쓴다.”
“네?”
“너. 단수인 것이냐?”
모현우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그러나 금광요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고 있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모현우. 너는 아직 난릉 금씨가 되지 못했다. 알고 있지? 네가 행실이 좋지 못하면 부친께서는 쉽게 내칠 분이시다. 그러니 사람들이 네 약점을 알게 해서는 안 돼. 열심히 공부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어서 금단을 맺어라. 부친께 금씨 성만 받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알겠느냐?”
겁을 먹었던 모현우가 차차 마음을 놓았다. 그는 비로소 저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는 이 배다른 형제가 진실한 충고를 해 주는 것을 알았다.
“예, 형님. 명심할게요.”
금광요는 대수로운 얘기도 아니었다는 듯 차를 마셨다. 그 옆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모현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형님. 그 때가 되면, 형님을 좋아해도 되나요?”
금광요는 살풋 웃었지만 속으로는 기가 막혔다. 이 아이는 대체 어린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다. 그들은 서자라고 해도 피가 섞인 친형제였다. 그런 일을 자신이 허락한다고 말할 것 같은가.
하지만 금광요는 이처럼 약하면서도 상식 없는 사람이 속에 칼을 품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위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는 법이었다.
그는 더 이상 폭풍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탈취하려는 야망은 없다. 단지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한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손톱만큼의 작은 원한도 사고 싶지 않았다.
“모현우. 넌 내가 좋다지만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
금광요의 눈이 모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쩐지 관심도 없는 이 조그만 소년에게 폐부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너를 배신한다 해도, 네 목숨을 나에게 바칠 만큼 좋아하느냐?”
“배신이요...?”
“만약 내가 너에게 누명이라도 씌워서 가문에서 쫓겨나도록 만든다면, 그래도 넌 날 용서하고 좋아할 수 있겠느냐?”
“형님?”
금광요는 파랗게 질리는 모현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말한 것뿐이다. 어떠냐, 그렇게 되면 날 용서할 수 있겠어?”
“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대답해 봐라.”
금광요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재촉했다. 모현우는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대답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답을 들은 금광요는 뒤로 물러나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게 네 마음이 얕다는 증거이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다. 나에겐 이미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내게 마음을 품지 마라.”
모현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형님은... 그 사람이 형님을 배신해도 마음을 주신다구요...?”
금광요는 잠시 딴 생각을 빠진 것처럼 멍하게 있다가 모현우가 머뭇거리며 두 번을 부르자 겨우 돌아보았다.
다시금 상냥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현우, 누가 뭐라든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약속해 다오.”
모현우는 얼떨떨했으나 금광요의 기백에 밀려 얌전하게 대답했다.
“예, 형님. 그렇게 할게요.”
모현우는 크게 놀랐던 마음을 다잡느라 안절부절 못했지만 금광요의 의식은 벌써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까지 금광요는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가차없이 제거해 왔다. 하지만 남희신에게는 똑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은 것이다.
그를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심지어 그가 자신을 배신하고 내친다 해도. 이제 그에게는 생채기 하나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걸어가려는 길 끝에 원하는 것이 없다면 나는 확실하게 부서지고 말리라.
그래도 금광요는 웃었다. 한 눈도 팔지 못할 낭떠러지를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발을 헛디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하고 불충족된 길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남희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예의 남계인이 고소 남씨의 일을 맡아서 돌보고 있었다.
남희신은 부정세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남계인은 금광요가 그를 감싸다가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는 할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사일지정이 막을 내린 후 남계인의 바람은 오직 남희신, 남망기 두 사람의 수호 아래에서 고소 남씨가 명맥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원인모를 불안은 위무선이 운심부지처를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그는 도끼눈을 떴다.
어쨌든 남희신이 돌아와서 가문의 일을 다스리니 남계인도 문하 사람들도 마음이 놓였다.
난릉 금씨처럼 세력을 확장할 욕심이 없다 해도 한 가문의 주인은 할 일이 많고 짊어질 것도 많았다. 그래도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했을 일들이, 부정세에서 돌아온 후에는 이상하게 버거운 듯 느껴졌다.
문득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남망기와 위무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위무선이 개구쟁이 어린애처럼 함광군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는 신기한 장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아서 어린 자제들이나 나이 든 수사들의 시선이 죄다 거기 가서 박혔다.
남망기는 입을 꼭 닫고 위무선이 곁에 있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기뻐하고 있는 것이 남희신의 눈에는 선연히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근심도 잊고 미소를 지었다.
수학 시절. 남희신은 그들이 진실로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남망기는 활달한 위무선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 같았다. 단지 그는 남망기에게, 평범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보통의 친우라도 생겼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현재의 위무선과 남망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금광요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명도 분에 넘친다. 만약 금광요에게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그렇다면 그의 어두운 마음도 풀리지 않을지.
가능하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금광요는 아무래도 저를 어려워하는 듯하다. 아마도 손윗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예의가 바른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면서도 남희신은 청담회 날을 기다렸다.
***
금린대에 오른 남희신은 금광요가 여상하게 객들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깨를 조금도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금광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내색도 없이 꼬박꼬박 예를 차리고 있었다.
남희신이 오는 것을 본 금광요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남희신은 절을 하려고 올라오는 팔을 얼른 붙잡아서 내리눌렀다.
“아요. 이렇게 몸을 쓰면 안 된다고 일렀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나중에 형님께서 좀 봐주십시오.”
태도를 보니 다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도가의 직계가 야렵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더구나 남희신이 함께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숨긴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청담회가 끝나고 저녁 시간의 소란도 잦아들자 남희신은 곧바로 그를 찾았다.
금광요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는데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살짝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방 가운데 놓인 목욕통 안에서 금광요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하루종일 무리를 하더니 더운 물로 어깨의 통증을 달래는 모양이었다.
“아요.”
문간에서 불러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간 남희신이 잠든 뺨을 살짝 건드렸다.
금광요는 천천히 눈을 뜨다가 코앞에서 남희신을 마주하곤 크게 당황해 몸을 일으키다가 첨벙거리며 물방울을 튀겼다. 남희신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물 속에서 잠이 들다니, 위험하지 않느냐. ...가만히 있거라, 상처를 좀 보자.”
남희신은 소매를 걷은 다음 물 밖으로 드러난 어깨를 잡았다. 뼈를 감싸쥔 손가락에 살짝 힘을 가하자 금광요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희신은 한숨을 쉬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비단 오늘 하루만 무리를 한 것이 아닌 듯했다.
그가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금광요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라서요.”
“약을 가져왔으니 치료해주마. 그럼 잠시 밖에서 기다리겠다.”
남희신이 밖으로 나간 뒤 금광요는 재빠르게 몸을 닦은 다음 속의를 걸쳤다.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서 장포까지 꼭꼭 휘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남희신은 금광요를 앞에 앉히고 그의 어깨에서 한 겹의 옷마저 벗겨내렸다.
몇 개의 촛불을 더 밝히고 길다란 머리채를 반대쪽 어깨로 넘기자 말간 육체가 두드러졌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몸집이 작고 피부가 부드러워 가련한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은 흉칙한 흉터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수하게 치료를 해 왔기에 작달막하고 마른 소년같은 육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촛불의 장난인지, 마음자리가 사나운 탓인지. 문득 심중에 생경한 느낌이 일어났다.
이런 때에, 하필 다친 의제의 뒷모습을 보고. -색기를 느끼다니.
황당해진 남희신은 머리를 가볍게 털고는 침을 꺼내어 굳어진 피를 뽑았다.
“계속해서 무리하면 후유증이 남게 된다. 그냥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어떠냐.”
금광요는 어쩐지 대답을 미루었다. 남희신이 약초를 상처에 붙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아 주고, 옷을 걸친 다음에야 돌아앉으며 말했다.
“형님. 치료를 받은 후인데 술을 마시겠다면 저를 나무라시겠지요?”
“술을 마시고 싶으냐?”
“예...”
“내일 운심부지처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면 마셔도 좋다.”
금광요가 눈을 내리깔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같이 마셔 주실 건가요?”
“음.”
뜻밖의 대답에 금광요는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곧장 겉옷을 걸치고 하인들에게 목욕통을 치우고 술상을 차려 오라고 지시했다.
밤늦은 시간에 걸맞게 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빈 술병이 하나 둘씩 쌓여갔다.
정말로 술이 고팠던 것인지 금광요는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이 꽤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희신은 양 편에 밝혀 놓은 등잔불에 비치는 그를 곧게 바라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금광요가 뭐라고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그가 머리를 약간 기울이고 눈가를 스러뜨리며 웃자 남희신의 가슴 속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뜨끔한 느낌이 퍼졌다. 한참 전에 억눌렀던, 그의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느낌까지 떠올린 남희신은 더욱 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주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건만, 평소 사소한 몸짓까지 절제하던 사람이 아주 약간이라도 흐트러지니 몹시 두드러져 보였다. 어쩌면 어둡고 낯선 밤공기가 괴이쩍은 감정에 박차를 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금광요와 똑같이 술잔을 비워도 내력으로 술기운을 흩어내고 있어 전혀 취하지 않는데, 이 이상한 열기의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금광요에게 충고하고 싶던 일들도 다 잊어버리고 단 하나 피하고 싶은 생각에 도달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금광요는 여인이 아닌데, 자신의 눈은 마치 그를 여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일로 너무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그렇게 혼란스러운 중에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실제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잡다한 소문거리를 늘어놓았다. 약에 취한 남희신은 혼란스러워하는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눈 앞의 금광요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금광요는 자신의 외모가 예쁜 소년과 같고, 조금이라도 그럴 마음이 있는 사내들의 마음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남희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당황했던 건 자신이었지만, 남희신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술에 미약을 탄 것은 그런 그의 심리 상태를 알아 보려는 시험이었다.
결과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만약 남희신이 약에도 꼼짝을 않을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확실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기루에서 잔뼈가 굵어진 금광요는 첫경험도 없는 남자들의 순진하고 초조한 욕망을 수없이 보아 왔다. 지금 자신을 의식하는 남희신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다.
사실 술병 주둥이에 살짝 묻혔을 뿐인, 남희신이 마신 약의 양은 보잘것없었기에 결정적으로 육체에 불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금광요는 단지 남희신의 마음을 살짝 떠 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확인하고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제 그를 따라 운심부지처로 돌아가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흘러가리라.
“취하셨나요? 형님?”
남희신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어지러운 속내라도 흘렸던가 싶어 흠칫했다.
“...아니다. 그저... 간밤에 잠자리를 설쳤더니 조금 졸립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술까지 드리면서 형님을 잡아놓았네요.”
“아니다. 그럼... 몸을 따뜻하게 하고 푹 쉬거라.”
“예.”
남희신이 이 편으로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은 채 방을 나가는 모습을, 금광요는 끝까지 지켜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남잠, 금언술 거는 건 반칙이야.”
운심부지처의 공동 식당.
위무선은 탕약을 마시듯 국을 단번에 마셔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고 남망기는 밥알 하나하나까지 성실하게 씹었다.
“나한테 금언술을 걸려면 너라도 말을 많이 하든지.”
“식사시 금언이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도 아랑곳 않는 위무선이나, 그래도 계속해서 훈계하는 남망기나 막상막하다.
금광요는 아옹다옹하는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흉시의 금단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으니, 강종주의 금단은 역시 위무선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위무선이 제 금단을 어떻게 되살렸는지 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아귀가 맞는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강종주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준 것 같았다.
‘대단한 살신성인이군.’
금광요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로서는 그런 희생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희신이 차를 가져와서 따라 주자 금광요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허리가 뻣뻣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 보인 남희신이 젓가락을 들었다.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 남희신은 금광요가 어려워할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의 태도는 이제 다정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금광요는 이제 그가 자신에게 푹 빠진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은 계략도 쓸 필요가 없었다. 굳이 결정적인 패를 던지지 않고 흘러가는대로만 내버려두어도 다 잘 될 것 같았다.
금광요는 많은 시간을 한실에서 머물렀고, 남희신도 볼일이 끝나면 곧장 한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이따금씩은 아름다운 음률로 운심부지처를 감쌌다.
그렇게 더운 날들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21) (22) (23) (24) (25) (26)
호젓하게 두 사람이 앉은 정자 주위로 여린 꽃잎이 휘몰아치며 수면 위에 내려앉았다.
“형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금광요의 손끝을 스쳤다.
그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금광요가 금린대로 돌아왔을 때에도 모현우는 여전히 가솔들의 냉대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금광선이 그를 불러들인 것이 무언가의 홧김이었는지, 변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현우가 집 안에 들어온 후로는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금자헌은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관심이 없었고, 금자훈은 멸시하고 괴롭혔다. 금부인의 눈에는 아예 띄지도 않는 게 현명하다는 걸 모현우도 잘 알았다.
그러나 금광요가 돌아와 친절하게 대해 주자 그런 푸대접도 한풀 꺾였다. 그에 아직 어린 티도 벗지 못한 모현우는 홀린 듯이 금광요의 뒤를 쫓아다녔다.
금광요가 짐짓 마음을 숨기듯이 웃었다.
“내가 아름다우냐?”
“네. 형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봐요.”
“현우, 그렇게 하면 못쓴다.”
“네?”
“너. 단수인 것이냐?”
모현우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그러나 금광요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고 있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모현우. 너는 아직 난릉 금씨가 되지 못했다. 알고 있지? 네가 행실이 좋지 못하면 부친께서는 쉽게 내칠 분이시다. 그러니 사람들이 네 약점을 알게 해서는 안 돼. 열심히 공부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어서 금단을 맺어라. 부친께 금씨 성만 받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알겠느냐?”
겁을 먹었던 모현우가 차차 마음을 놓았다. 그는 비로소 저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는 이 배다른 형제가 진실한 충고를 해 주는 것을 알았다.
“예, 형님. 명심할게요.”
금광요는 대수로운 얘기도 아니었다는 듯 차를 마셨다. 그 옆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모현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형님. 그 때가 되면, 형님을 좋아해도 되나요?”
금광요는 살풋 웃었지만 속으로는 기가 막혔다. 이 아이는 대체 어린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다. 그들은 서자라고 해도 피가 섞인 친형제였다. 그런 일을 자신이 허락한다고 말할 것 같은가.
하지만 금광요는 이처럼 약하면서도 상식 없는 사람이 속에 칼을 품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위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는 법이었다.
그는 더 이상 폭풍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탈취하려는 야망은 없다. 단지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한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손톱만큼의 작은 원한도 사고 싶지 않았다.
“모현우. 넌 내가 좋다지만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
금광요의 눈이 모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쩐지 관심도 없는 이 조그만 소년에게 폐부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너를 배신한다 해도, 네 목숨을 나에게 바칠 만큼 좋아하느냐?”
“배신이요...?”
“만약 내가 너에게 누명이라도 씌워서 가문에서 쫓겨나도록 만든다면, 그래도 넌 날 용서하고 좋아할 수 있겠느냐?”
“형님?”
금광요는 파랗게 질리는 모현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말한 것뿐이다. 어떠냐, 그렇게 되면 날 용서할 수 있겠어?”
“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대답해 봐라.”
금광요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재촉했다. 모현우는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대답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답을 들은 금광요는 뒤로 물러나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게 네 마음이 얕다는 증거이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다. 나에겐 이미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내게 마음을 품지 마라.”
모현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형님은... 그 사람이 형님을 배신해도 마음을 주신다구요...?”
금광요는 잠시 딴 생각을 빠진 것처럼 멍하게 있다가 모현우가 머뭇거리며 두 번을 부르자 겨우 돌아보았다.
다시금 상냥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현우, 누가 뭐라든 신경쓰지 말고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약속해 다오.”
모현우는 얼떨떨했으나 금광요의 기백에 밀려 얌전하게 대답했다.
“예, 형님. 그렇게 할게요.”
모현우는 크게 놀랐던 마음을 다잡느라 안절부절 못했지만 금광요의 의식은 벌써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까지 금광요는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가차없이 제거해 왔다. 하지만 남희신에게는 똑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은 것이다.
그를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심지어 그가 자신을 배신하고 내친다 해도. 이제 그에게는 생채기 하나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걸어가려는 길 끝에 원하는 것이 없다면 나는 확실하게 부서지고 말리라.
그래도 금광요는 웃었다. 한 눈도 팔지 못할 낭떠러지를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발을 헛디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하고 불충족된 길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남희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예의 남계인이 고소 남씨의 일을 맡아서 돌보고 있었다.
남희신은 부정세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남계인은 금광요가 그를 감싸다가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는 할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사일지정이 막을 내린 후 남계인의 바람은 오직 남희신, 남망기 두 사람의 수호 아래에서 고소 남씨가 명맥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원인모를 불안은 위무선이 운심부지처를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그는 도끼눈을 떴다.
어쨌든 남희신이 돌아와서 가문의 일을 다스리니 남계인도 문하 사람들도 마음이 놓였다.
난릉 금씨처럼 세력을 확장할 욕심이 없다 해도 한 가문의 주인은 할 일이 많고 짊어질 것도 많았다. 그래도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했을 일들이, 부정세에서 돌아온 후에는 이상하게 버거운 듯 느껴졌다.
문득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남망기와 위무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위무선이 개구쟁이 어린애처럼 함광군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는 신기한 장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아서 어린 자제들이나 나이 든 수사들의 시선이 죄다 거기 가서 박혔다.
남망기는 입을 꼭 닫고 위무선이 곁에 있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기뻐하고 있는 것이 남희신의 눈에는 선연히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근심도 잊고 미소를 지었다.
수학 시절. 남희신은 그들이 진실로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남망기는 활달한 위무선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 같았다. 단지 그는 남망기에게, 평범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보통의 친우라도 생겼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현재의 위무선과 남망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금광요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명도 분에 넘친다. 만약 금광요에게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그렇다면 그의 어두운 마음도 풀리지 않을지.
가능하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금광요는 아무래도 저를 어려워하는 듯하다. 아마도 손윗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예의가 바른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면서도 남희신은 청담회 날을 기다렸다.
***
금린대에 오른 남희신은 금광요가 여상하게 객들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깨를 조금도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금광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내색도 없이 꼬박꼬박 예를 차리고 있었다.
남희신이 오는 것을 본 금광요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남희신은 절을 하려고 올라오는 팔을 얼른 붙잡아서 내리눌렀다.
“아요. 이렇게 몸을 쓰면 안 된다고 일렀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나중에 형님께서 좀 봐주십시오.”
태도를 보니 다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도가의 직계가 야렵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더구나 남희신이 함께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숨긴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청담회가 끝나고 저녁 시간의 소란도 잦아들자 남희신은 곧바로 그를 찾았다.
금광요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는데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살짝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방 가운데 놓인 목욕통 안에서 금광요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하루종일 무리를 하더니 더운 물로 어깨의 통증을 달래는 모양이었다.
“아요.”
문간에서 불러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간 남희신이 잠든 뺨을 살짝 건드렸다.
금광요는 천천히 눈을 뜨다가 코앞에서 남희신을 마주하곤 크게 당황해 몸을 일으키다가 첨벙거리며 물방울을 튀겼다. 남희신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물 속에서 잠이 들다니, 위험하지 않느냐. ...가만히 있거라, 상처를 좀 보자.”
남희신은 소매를 걷은 다음 물 밖으로 드러난 어깨를 잡았다. 뼈를 감싸쥔 손가락에 살짝 힘을 가하자 금광요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희신은 한숨을 쉬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비단 오늘 하루만 무리를 한 것이 아닌 듯했다.
그가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금광요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라서요.”
“약을 가져왔으니 치료해주마. 그럼 잠시 밖에서 기다리겠다.”
남희신이 밖으로 나간 뒤 금광요는 재빠르게 몸을 닦은 다음 속의를 걸쳤다.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서 장포까지 꼭꼭 휘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남희신은 금광요를 앞에 앉히고 그의 어깨에서 한 겹의 옷마저 벗겨내렸다.
몇 개의 촛불을 더 밝히고 길다란 머리채를 반대쪽 어깨로 넘기자 말간 육체가 두드러졌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몸집이 작고 피부가 부드러워 가련한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은 흉칙한 흉터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수하게 치료를 해 왔기에 작달막하고 마른 소년같은 육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촛불의 장난인지, 마음자리가 사나운 탓인지. 문득 심중에 생경한 느낌이 일어났다.
이런 때에, 하필 다친 의제의 뒷모습을 보고. -색기를 느끼다니.
황당해진 남희신은 머리를 가볍게 털고는 침을 꺼내어 굳어진 피를 뽑았다.
“계속해서 무리하면 후유증이 남게 된다. 그냥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어떠냐.”
금광요는 어쩐지 대답을 미루었다. 남희신이 약초를 상처에 붙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아 주고, 옷을 걸친 다음에야 돌아앉으며 말했다.
“형님. 치료를 받은 후인데 술을 마시겠다면 저를 나무라시겠지요?”
“술을 마시고 싶으냐?”
“예...”
“내일 운심부지처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면 마셔도 좋다.”
금광요가 눈을 내리깔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같이 마셔 주실 건가요?”
“음.”
뜻밖의 대답에 금광요는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곧장 겉옷을 걸치고 하인들에게 목욕통을 치우고 술상을 차려 오라고 지시했다.
밤늦은 시간에 걸맞게 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빈 술병이 하나 둘씩 쌓여갔다.
정말로 술이 고팠던 것인지 금광요는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이 꽤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희신은 양 편에 밝혀 놓은 등잔불에 비치는 그를 곧게 바라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금광요가 뭐라고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그가 머리를 약간 기울이고 눈가를 스러뜨리며 웃자 남희신의 가슴 속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뜨끔한 느낌이 퍼졌다. 한참 전에 억눌렀던, 그의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느낌까지 떠올린 남희신은 더욱 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주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건만, 평소 사소한 몸짓까지 절제하던 사람이 아주 약간이라도 흐트러지니 몹시 두드러져 보였다. 어쩌면 어둡고 낯선 밤공기가 괴이쩍은 감정에 박차를 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금광요와 똑같이 술잔을 비워도 내력으로 술기운을 흩어내고 있어 전혀 취하지 않는데, 이 이상한 열기의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금광요에게 충고하고 싶던 일들도 다 잊어버리고 단 하나 피하고 싶은 생각에 도달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금광요는 여인이 아닌데, 자신의 눈은 마치 그를 여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일로 너무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그렇게 혼란스러운 중에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실제였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잡다한 소문거리를 늘어놓았다. 약에 취한 남희신은 혼란스러워하는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눈 앞의 금광요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금광요는 자신의 외모가 예쁜 소년과 같고, 조금이라도 그럴 마음이 있는 사내들의 마음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남희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당황했던 건 자신이었지만, 남희신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술에 미약을 탄 것은 그런 그의 심리 상태를 알아 보려는 시험이었다.
결과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만약 남희신이 약에도 꼼짝을 않을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확실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기루에서 잔뼈가 굵어진 금광요는 첫경험도 없는 남자들의 순진하고 초조한 욕망을 수없이 보아 왔다. 지금 자신을 의식하는 남희신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다.
사실 술병 주둥이에 살짝 묻혔을 뿐인, 남희신이 마신 약의 양은 보잘것없었기에 결정적으로 육체에 불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금광요는 단지 남희신의 마음을 살짝 떠 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확인하고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제 그를 따라 운심부지처로 돌아가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흘러가리라.
“취하셨나요? 형님?”
남희신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어지러운 속내라도 흘렸던가 싶어 흠칫했다.
“...아니다. 그저... 간밤에 잠자리를 설쳤더니 조금 졸립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술까지 드리면서 형님을 잡아놓았네요.”
“아니다. 그럼... 몸을 따뜻하게 하고 푹 쉬거라.”
“예.”
남희신이 이 편으로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은 채 방을 나가는 모습을, 금광요는 끝까지 지켜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남잠, 금언술 거는 건 반칙이야.”
운심부지처의 공동 식당.
위무선은 탕약을 마시듯 국을 단번에 마셔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고 남망기는 밥알 하나하나까지 성실하게 씹었다.
“나한테 금언술을 걸려면 너라도 말을 많이 하든지.”
“식사시 금언이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도 아랑곳 않는 위무선이나, 그래도 계속해서 훈계하는 남망기나 막상막하다.
금광요는 아옹다옹하는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흉시의 금단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으니, 강종주의 금단은 역시 위무선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위무선이 제 금단을 어떻게 되살렸는지 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아귀가 맞는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강종주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준 것 같았다.
‘대단한 살신성인이군.’
금광요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로서는 그런 희생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희신이 차를 가져와서 따라 주자 금광요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허리가 뻣뻣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 보인 남희신이 젓가락을 들었다.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 남희신은 금광요가 어려워할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의 태도는 이제 다정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금광요는 이제 그가 자신에게 푹 빠진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은 계략도 쓸 필요가 없었다. 굳이 결정적인 패를 던지지 않고 흘러가는대로만 내버려두어도 다 잘 될 것 같았다.
금광요는 많은 시간을 한실에서 머물렀고, 남희신도 볼일이 끝나면 곧장 한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이따금씩은 아름다운 음률로 운심부지처를 감쌌다.
그렇게 더운 날들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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