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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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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몽 운평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낮은 산.
며칠 전부터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널찍한 산길은 드문드문한 나무의 가지들이 앙상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볼 것도 없고 딱히 어딘가로 이어지지도 않아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그런 길을 화려한 금빛 옷을 입은 사내가 홀로 오르고 있었다.
덜 자란 듯 가냘픈 몸매에 얼굴이 곱상하지만, 허리에는 뱀의 비늘처럼 겹겹이 세공된 금속 띠를 둘렀고 손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패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깨끗한 눈 위로 외로운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갔다.
금광요는 어검을 하지 않고 선부라도 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엄숙하고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감도는 묘한 눈빛이었다.
이 길을 지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어 좀처럼 찾아올 마음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는 자그마한 공터에 도착했다. 볕은 들지만 특별히 풍수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땅이었고, 그런 조건에 걸맞는 초라한 묘비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습관적으로 목적지에 다가가던 금광요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표식이 될만한 건 볼품없이 마른 몇 그루의 나무 뿐이었고,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래도 착각할 리 없었다.
수년 동안 눈에 익은 기울어진 묘비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그 묘비에 적힌 글자까지 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어야 할 묘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확인하자 고요하던 눈에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났다.
금광요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미친듯이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눈을 파헤쳐도 드러나는 건 시커먼 흙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뜬 채 마른침을 삼키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가 한생을 풀어내자, 곧장 주위가 흙먼지로 뒤덮혔다.
날카롭게 영력이 실린 한생이 꽁꽁 언 겨울의 대지를 무섭게 난도질했다. 그러나 천지사방에 엉망진창으로 튀어오르는 건 모래와 자갈 뿐이었다. 이내 와락 엎드리며 맨손으로 흙을 마구 파내어 던지기 시작했지만, 한참 후 생겨난 구덩이가 허리까지 와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길다랗게 대기를 가르는 광포한 비명에 안식하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남희신은 수업이 끝나 신이 나서 몰려나가는 수련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소의 끝은 미지근하게 가라앉았다.
운심부지처는 날이 가도 해가 가도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계절이 바뀌자 짐승들의 활동도, 사람의 의욕도 한풀 꺾이는 추위가 다가왔다. 그래도 요 며칠 동안은 눈이 내리는 바람에 다소 즐거운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남희신은 눈놀이를 즐길 나이가 아닌데다 금광요가 곁에 없어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금광요는 금자헌의 계승식 이후로 금린대에 가는 일이 적었다. 금광선이 폐인이 된 후에는 그만 만사가 시들해졌는지 운심부지처에서 꼼짝도 않는 나날이었고, 가끔씩이나마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존재가 있다면 금릉이었다. 붙임성 있고 귀여운 금릉은 운몽의 식구들을 포함한 모두에게서 끔찍한 사랑을 받았고, 금광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며칠 전 남망기와 위무선마저 운몽으로 떠나 버린 뒤라 더욱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위무선은 요즘 생각없는 행동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그가 있으면 주변이 더 명랑해지며 활기가 돌았다.
남희신은 해이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장서각으로 향했다. 전날 하던 일이 남아 있었다. 까다로운 옛 서적에 주석을 달아 새로운 수련용 교본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본래가 최고의 자리란 건, 게으름을 피우자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열심히 하자면 잠도 부족할 만큼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남희신은 결코 자신을 혹사시키지는 않았으나 워낙 정력적이고 세심한 사람이라 이미 상당한 일들을 이루어놓고도 개선할 부분이 없는지 항시 안팎의 일을 살폈다.
꾸준하게 장서각을 보강하고, 문하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며, 그 스스로도 부단한 수련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깊은 사랑을 품고 한 사람을 그리워하니, 인생이 한층 깊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금일의 유별난 씁쓸함에는 어떤 예지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남희신이 장서각에 들기 전, 한 수사가 규훈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고소 남씨의 사람이 그렇게 서두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수사가 남희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운몽 강씨의 문장이 찍힌 서신을 바쳤다.
운몽 강씨도 지금은 세력을 완전히 되찾아서 이따금씩 큰 규모의 대회를 열곤 했다. 다만 강만음의 성격에 따라 조용한 청담회보다는 사냥대회를 열 때가 많았다.
그래서 무언가의 초청장이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서신을 열던 남희신에게 수사가 말했다.
“전서조에 주술이 걸려 있었습니다.”
선문가에서는 맹금류의 전서조를 쓰기 때문에 속도가 상당했다. 그런데 거기에 주술까지 걸었다는 건 매우 급한 의미였다. 주술에 걸린 새는 전력을 다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남희신이 재빨리 서신을 헤쳐 보니 과연 악보였다.
금광요가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혀 연화오에 감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연화오의 앞마당에는 팔짱을 낀 강징과 뒷짐을 진 남망기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를 초조해하는 위무선이 수십번씩 왔다갔다했다. 전서조가 닿자마자 남희신이 바로 출발을 했다면 지금쯤 도착할 시간이었다.
과연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떠났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뿌연 하늘 저 편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보였했다.
“강종주.”
이런 때에도 우선 차분하게 예부터 차리는 남희신은 삭월만 움켜쥐고 날아왔는지 옷차림이 얇았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날씨라 몸이 얼음처럼 굳었을 텐데도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광요는?”
“감옥에 있습니다.”
설명하기에 앞서 강징이 들고 있던 남빛 패검을 남희신에게 건넸다.
“한생은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이 실수를... 그리고 염방존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지라...”
강징은 위무선과 남망기가 이미 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운평성에 사는 어떤 남자가 염방존의 어머님의 관을 훔쳤습니다...”
강징은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서두에 꺼내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남희신이 입을 벌렸다.
금광요는 묘비를 비롯하여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관까지 사라져버린 것을 보고 모종의 방법으로 관의 행방을 탐지했다.
관은 어느 양가집으로 옮겨져 있었고, 금광요는 당연히 그 집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관을 훔친 사람은 전씨 성을 가진 가주의 형이었는데, 그런 관이 집 안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금광요는 관이 무사한 것을 보고 다행히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관을 훔친 자를 포함해서 뜯어말리려는 민간인 여럿을 구타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몇몇 하인들이 사람 살리라며 바깥으로 뛰쳐나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때마침 야렵을 나왔던 강징의 부사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패검을 찬 선문인이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말에 부사와 수사들이 즉각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사납게 날뛰고 있는 염방존이 그 곳에 있었다.
흉시 한 떼거리를 잡기 위해 강한 수사들이 출정을 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금광요를 제압하지 못할 뻔했다. 이윽고 자초지종을 파악한 부사는 금광요뿐 아니라 관을 훔친 남자에, 관까지 더하여 연화오로 압송했다.
여기까지 설명한 강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곧 금광요와 대면할 남희신이 받을 충격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금광요는 부사들과 대치할 때 남희신의 남빛 패검을 사용했다. 부사는 그 검을 빼앗은 후, 금광요의 겉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허리에 감은 쇠채찍 같은 물건이 진짜 패검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부사가 금광요를 잡아오는 바람에 놀란 강징도 마찬가지였다.
금광요는 감옥 안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생을 빼들어 감옥을 부수고 뛰쳐나왔다.
강징이 나타났을 때에도 금광요는 검을 놓지 않은 채 관을 내놓으라고 일갈했다.
강징은 자존심이 강했고, 상당히 엄하게 가문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금광요가 모친의 관을 도난당한 자초지종을 듣긴 했지만 그가 이렇듯 연화오에서 행패를 부리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금광요가 운몽의 민가에서 죄를 저지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염방존, 이 곳은 운몽이니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함부로 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공정하게 판단할 테니 옥으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감옥에 가두겠다고? 당신이 뭔데 내 어머니의 관을 돌려주지 않는 거요!”
금광요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치며 벼락같이 덤벼들었다. 강징이 다수의 수사들과 함께 자전까지 휘둘러 가며 겨우 가두었음에도 한생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는 부사에게서 운평성에서 있었던 사건 얘기를 들었지만 한결같이 유순하던 금광요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행태가 너무도 놀라웠다. 소란통에 뒤늦게 달려온 위무선과 남망기도 마찬가지였다.
금광요는 감옥까지 밀려난 다음에도 지치지 않고 한생을 휘둘렀기 때문에 세 명의 수사가 계속해서 결계를 치며 막아야 했다.
강징은 영문을 몰랐지만 이대로라면 재판을 열 수도 없었다. 그 전에 금광요가 지쳐서 몸이 상하거나, 혹은 미쳐서 자해를 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마저 들었다. 그래서 남희신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강징을 비롯한 세 사람은 자초지종을 들은 남희신이 많이 놀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손에 쥔 남빛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희신은 서늘한 얼굴이었다.
“강종주. 광요에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강징이 발을 돌려 앞장섰고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몰랐지만 금광요는 이미 무차별적으로 철창을 갈기던 짓을 멈춘 지 오래였다.
결계를 치고 보존하려고 애쓰던 수사들은 노련하고 실력도 있었으나 금광요가 코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덤비는 데 진땀이 다 났다. 그래서 그가 얌전해진 뒤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꼿꼿하게 수결을 맺은 채 지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생을 휘두르던 도중에, 온 몸의 기력 뿐 아니라 피까지 토해내어 뿌려버릴 듯하던 금광요의 몸 속 어느 부분이 삐그덕하며 정말로 무리가 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여지껏 몸을 휘몰아치던 고통 뿐인 감각과는 정반대로 달콤하고도 따뜻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금광요가 놀라서 멈추어버린 육체를 곳곳이 퍼져나가며 감미로운 여운을 남겼다. 동시에 죽도록 심해지던 피로가 한 풀 꺾이는 것 같았다.
미친듯이 공격하던 금광요가 이번에는 넋이 나간 것처럼 꼼짝하지 않자 수사들은 더욱 심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망연하게 서 있던 금광요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숫제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버렸다.
금광요는 새삼스러운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새 몸에 보호 주문이 걸려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금광요는 멍하니 앉은 채 바닥에 떨어진 한생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남희신이 얼마나 강력한 주문을 걸어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설마하니 남희신 본인의 몸에 해가 갈만한 수준의 주문을 걸지는 않았겠지, 하는 짐작은 금광요의 독단일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금광요의 이해를 넘어서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금광요는 더 이상 제 몸을 깎아먹으며 난리를 피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남희신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번뜩 들어올려진 금광요의 시선은 그 너머의 강징에게 가서 박혔다.
금광요가 벌떡 일어나 쇠창살을 부여잡으며 다짜고짜 외쳤다.
“형님! 관을 열면 안 돼요! 관을 열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남희신은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 듯, 처참해진 금광요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좁은 감옥에서 생각 없이 휘둘러댄 한생은 오히려 주인의 몸에 더 많은 상처를 내었다. 그리고 결계가 쳐진 쇠창살을 붙잡은 손에서도 작은 칼날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남희신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금광요의 손을 창살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남희신의 손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보고 강징이 얼른 손을 내저으니, 수사들이 손을 멈추었고 결계가 사라졌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피투성이가 된 손은 곧바로 남희신의 손에 매달렸다.
“형님! 관을 열지 못하게 해 주세요!”
남희신은 무슨 일이 생기든 동요하지 말자고 굳게 마음 먹었으나 이런 꼴이 된 금광요와 대면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강징이 말했다.
“관은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지요, 염방존.”
그 말을 듣자 금광요의 눈에 선 날이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남희신을 잡았던 손이 힘없이 풀어져내리자, 철창 안으로 내밀어진 남희신의 손에는 핏자국만이 남았다.
“아요.”
남희신이 불렀지만 금광요는 얻어맞은 맹수처럼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소매를 쥐어뜯으며, 두서없이 움직이는 눈알이 계속해서 바닥을 훑었다.
“아요, 내가 그 남자를 만나 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금광요는 남희신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갑자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남희신이 품 속에서 약병을 꺼내어 건네려고 했으나 그는 벌써 벽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남희신은 한숨을 쉬며 강징을 쳐다보았다.
강징은 남희신을 데리고 나가기 직전에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광분하던 금광요가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보니 도려란 게 보통 관계는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남망기와 위무선에게 눈이 갔다.
이 둘도 무슨 깊은 관계를 맺은 게 아닌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함께 놀러온 건 친해서 그렇다 쳐도, 굳이 위무선의 방에 같이 머무르는 건 대체 왜냔 말이다.
강징은 머리를 흔들어서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깊이 알고 싶지 않았고, 우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전여후라는 남자는 이름과는 다르게 마르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창살에 달라붙으며 ‘맹시는요?’하고 물었다. 갇힌 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절로 관을 열지 말라고 외치던 금광요를 떠올렸다. 이 두 사람은 왜 시체가 든 관에 그리 죽도록 매달리는 건지 몰랐다.
감옥을 지키던 하인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금광요처럼 날뛰진 않았지만 끝없이 맹시에 대해 물으며 맹시의 관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인은 보통 사람이라서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애원하는 남자의 태도가 유순하고 간절했기에 모른다고 거듭 대꾸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징은 전씨 남자를 바라보며 부사의 말을 떠올렸다.
전여후는 가문에서 내놓은 사람인 듯, 붙잡아 올 때에도 살갑게 붙잡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모르는 새 관짝이 집 안에 들어온 일로 미쳤다며 야단이었다. 다만 한 계집아이가 함께 가겠다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는데, 그 아이는 지금껏 감옥 옆에 꼭 붙어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오자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남희신은 갇힌 남자를 보고는 첫눈에 그가 사악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여후는 금광요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듯 얼굴의 한 쪽이 크게 부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희신이 다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금광요의 모친의 관을 훔쳤습니까?”
“금광요... 그가 정말로 난릉 금씨에 들어간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지요?”
“저는... 맹요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기루에 있을 때, 그 곳을 오가던 사람입니다.”
전여후는 그 사실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맹시의 관에 대해 안부를 묻던 간절한 말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선문은 아니지만 제법 잘 사는 가문의 자식이었다.
여느 청년들처럼 기루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그는 쉽게 환락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기루에 드나들던 그는 하필 퇴물이라고 불리는 나이든 맹시를 의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녀를 무척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집안 사람들은 장가도 안 간 젊은 녀석이 미쳤다고 기겁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숱하게 맹시에게 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맹시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가 기녀였으므로 기녀의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금광선이 불러들여줄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남의 첩이 되어버리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여후는 애타게 졸랐지만 맹시는 꿋꿋한 태도로 끝까지 그를 손님으로만 대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히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맹시는 정말로 이 남자를 손님으로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속으로라도 그를 좋아했을까? 그렇지만 제3자도 훨씬 넘어서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의문이니 진실이 어디에 가 있을지는 영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맹시의 사후, 전여후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금광요보다 훨씬 잦게 그녀의 묘를 찾았다. 그가 죽은 기녀에게 미쳐 유령처럼 떠돌면서 장가도 가지 않으려 하므로 가문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동생을 가주로 세웠다.
그러기를 몇 년 후, 전여후는 금광요가 무덤에 찾아오는 발길이 매우 뜸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소문에는 그가 드디어 부친의 가문에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몰래 맹시의 무덤을 파내었다.
그 때 그는 다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단지 그녀의 백골이라도 보고 싶었던 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마지막에 입고 묻혔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었다고. 그러나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관의 뚜껑을 열 수 없었다. 그래서 묘비를 숨기고 관을 파낸 다음 집으로 가져와 버렸다.
건조하게만 느껴지는 말투로 전여후가 이야기를 끝낸 후에는 한참 동안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사랑을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집념에 대해 미쳤다고 해야 할 지 몰랐다.
그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가장 참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강징이었다. 모두의 침묵까지 더해 속이 터져버릴것만 같자 그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뱉았다.
“관에 주술이 걸려 있었습니다. 결계까지 있어 아직 열어보지 않았고요.”
강징이 불쑥 입을 열자 사람들은 저마다 거미줄에 잡힌 벌레처럼 거북하던 기분이 해소되는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남희신이 전여후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한 짓은 타인의 시신을 훔친 겁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모르나요.”
그러자 갑자기 곁에 있던 계집아이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안 되긴 왜 안 돼요!”
깜짝 놀란 사람들이 계집아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12~3세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겁도 없이 자신의 앞에 선 강자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외숙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를 보호했다구요!”
잠시 당황하던 남희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그래도 가족이 있는 사람의 관을 훔치는 것은...”
계집아이가 앞으로 훌쩍 뛰어나오며 양주먹을 그러쥐었다.
“뭐 어때요! 아들이란 작자는 출세하자마자 오지도 않게 되었잖아요! 우리 외숙께서 이렇게 애지중지해 줬는데 감사할 줄은 모를 망정!”
남희신은 말문이 막혔고, 강징은 어린 계집아이가 이렇게 당찬 데 기가 막혔다. 반대로 위무선은 이 어린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에게는 전여후의 사랑 이야기도 매우 감동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곧장 표출하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지는 그가 곁에 있던 남망기를 쳐다보자, 남망기는 위무선이 뭔가 골치 아픈 소리를 할 것을 예감하고 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무선은 입술을 실쭉하며 입을 다물었다.
남희신은 더 이상 계집아이를 상대하지 않고 강징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꺼내 주십시오. 광요도 데리고 다함께 관을 확인하러 가야겠습니다.”
금광요에게 돌아간 남희신은 감옥문을 열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광요는 한참 전에 웅크린 자세 그대로였다.
그 곁에 꿇어앉은 남희신이 살며시 그의 몸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거기까지는 백보 양보해서 연장자인 남희신이 금광요를 어린애처럼 달래는 거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금광요가 남희신의 옷깃을 잡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서로에게 몸도 마음도 기댄 것 같은 모습이 무언가 남이 보아서는 안 될 어떤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당황한 강징이 손짓을 하여 수사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며 자세히 보려는 위무선에 남망기까지 모조리 밖으로 몰아내었다.
잠시 후 남희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요, 내가 그 남자를 만나보았단다.”
이 말에 금광요가 홱 고개를 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형님, 어머님의 관을 찾아 주세요!”
남희신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하는 금광요를 진정시키려는 듯 얼굴을 어루만지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네 어머님의 관이 아니냐. 하지만 그 남자는 악인은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아는 사람이냐?”
“...제가 어렸을 때 기루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가 어머님께 해코지를 했어?”
금광요는 남희신의 질문에 불쾌한 듯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힘없이 내뱉은 대답은 ‘모른다’였다.
어렸던 맹요는 기녀인 어머니를 찾아오는 모든 남자들을 단순하게 증오할 뿐이었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난릉의 찻집 주인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맹시를 멸시하며 단순한 도구 취급만 했다. 다만 전여후는 예외였지만, 금광요가 그런 방안 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다. 지금도 금광요에게 전여후는 맹시의 관을 훔쳐간 터무니없이 괘씸한 인간에 불과했다.
묵묵히 있던 남희신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요, 네가 어머님의 시신에 주술을 걸었느냐?”
“예...”
남희신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관을 확인하러 가자. 그 남자도 함께 갈 것이니 더 이상 공격하지는 말거라.”
“예, 형님...”
남희신이 한생을 주워서 금광요에게 내밀었다. 금광요는 말없이 검을 허리에 두르고 남희신을 따라 나섰다.
관을 안치해둔 방은 공기가 새어나갈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사방이 돌로 되어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이렇다 할 물건도 가구도 없고, 사방에 켜 둔 무수한 촛불만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금광요는 오던 길에 이 일의 원흉이 된 남자가 합류해도 이미 관심이 없었고, 그저 관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끌어안고 무수하게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본래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예의바르던 그가 옷차림도 태도도 엉망이 되어 관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금광요의 곁으로 다가간 남희신이 관뚜껑을 만져 보았다. 관에는 주박술이 걸려 있어 당연히 보통 사람인 전여후는 열 수가 없었다. 남희신이 손에 힘을 주어 천천히 쓰다듬자 뚜껑에 걸렸던 주술이 해제되며 관이 한차례 미미하게 떨렸다.
남희신은 관을 열기에 앞서 관계 없는 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강징 등은 문간에 서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시신을 아무나 들여다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겨서였다.
마침내 그가 관뚜껑을 들어올리자 이번에는 구석에 박혀 있던 전여후가 바람같이 달려와 관의 머리맡에 매달렸다.
“아설, 아설!”
그만이 알고 있는 맹시의 애칭이었다.
금광요도 관 안의 시신에 온통 정신이 팔려 전여후가 하는 행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맹시의 시신은 온전한 이목구비는 다 잃었으나 도중에 부패가 중지된 듯 상당히 보존된 모습이었다. 시신의 주변은 온통 부적으로 빽빽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도 여러 겹 느껴졌다.
금광요는 주술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맹시가 죽었을 당시의 어린 그가 이런 술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맹시가 죽자마자 가진 돈을 다 털어 잡다한 부적을 사서 시신에 붙였다. 그녀의 혼백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고 한 행동이었다. 머지않아 청하 섭씨에 들어가 부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갖은 인맥과 지식을 끌어모아 제대로 효과를 낼만한 부적을 쓸 수 있었다. 아마도 시신의 부패가 느려진 것은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남희신은 부적이 시신의 혼백을 붙잡아놓기 위한 용도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금광요는 단순히 모친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그토록 날뛴 것이 아니었다. 시신이 아니라 그녀의 혼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섣불리 손을 대어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그리도 악에 받쳤던 것이다.
수진계에서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혼백을 속박하는 것은 명실공히 죄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유일한 존재였던 모친에게 매달리고 싶어하는 어린 맹요의 모습이 떠오르자, 남희신은 도저히 질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일을 묵과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죽은 자는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순리이고, 법도였다.
이윽고 남희신은 건곤대에서 고금을 꺼내어 관의 테두리에 올렸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는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문령을 시도했다.
그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물론 그녀의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금광요와 문간에 서있던 사람들은 남희신이 갑자기 고금을 타기 시작하자 이상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남희신의 손 아래에서 금줄이 저절로 움직이며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남희신은 가슴이 선득했다. 현을 통해 전해진 답은 남희신의 질문과는 전연 다른 엉뚱한 것이었다.
그가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동일했다.
무언가가 부름에 일일이 반응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즉, 혼백이 너무 적어 대답할 기능이 부족한 것이었다.
아니, 남아 있는 기운은 혼백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금광요는 현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고금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에 남희신은 더더욱 가슴 속을 휘몰아치는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요. 이미... 어머님의 혼백은... 거의 다 흩어져버렸단다. 이만 놓아드려야 하겠다.”
그 말에 금광요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안 됩니다. 형님, 금방 현이 울렸잖습니까.”
금광요가 관을 짚으며 속에 든 시신과 고금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님께서 계시는 거죠? 대답하신 거죠? 뭐라고 하신 건데요? 형님!”
남희신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위무선은 남희신이 눈을 내리깔며 낙담하는 모습을 본 뒤 남망기를 쳐다보았다.
그는 남망기에게 들어서 문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망기는 남희신을 제외하면 이 곳에서 문령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위무선이 보아하니,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남망기의 연한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혼이 뭐라고 말했기에 그러는 건지 궁금했다.
남희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억지를 쓰듯 다시 한 번 질문을 했다. 현을 뜯는 소리가 자못 거칠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똑같은 현이 또다시 딩 딩 하고 울리며 문령을 이해하는 두 사람의 가슴에 따뜻하고도 매정한 금을 새겼다.
-아요, 좋은 꿈 꿔.
혼백이 아니었다. 존재하는 것은 정말 먼지만한 한 톨의 사념 뿐이었다.
남희신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맹시의 혼백이 반의 반절이라도 남아서 금광요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었다면! 아니면 차라리 문령에 답을 할 만한 무엇도 없었다면.
맹시가 죽었을 당시에 이미 혼백은 다 흩어져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값싼 부적이 한 줄기의 사념을 간신히 붙잡았을 것이고, 그것이 전부였다.
잔인한 얘기였다. 어린 맹요는 가진 것을 다 바쳐 얻은 부적이 어머니의 혼백을 붙잡아줬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여지껏 제 어머니의 혼백이 관 속에, 시신 안에 고이 깃들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함께 있다고 굳게 믿고서 긴 시간을 버텨온 것이었다.
남희신은 커다란 눈에 기대감을 품고 매달리는 듯 쳐다보는 금광요의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어머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거에요, 형님!”
그렇게 소리치는 금광요야말로 남희신의 악몽 그 자체였다. 이런 장소만 아니었더라면, 마음으로 그와 함께 울부짖으며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그를 쓰다듬고 입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남희신은 역경 앞에 무릎을 꿇거나 자포자기 하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 번 이를 물고 난 그는 더이상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남희신이 고금에 손을 올려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력이 굳게 실린 가락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문령을 하려는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온전한 악곡의 음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고즈넉한 가락이 몇 소절 지나가자 별안간 관에 붙여 둔 부적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적들은 곧장 광풍에 흩날리는 것처럼 세차게 몰아치더니, 이내 연기처럼 바스라져갔다.
놀란 금광요가 둥그래진 눈으로 관을 짚고 변고를 지켜보다가 손을 내밀었지만, 부적은 그의 손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그치지 않는 고금 소리가 이윽고 금광요의 영혼 속까지 침범하는 듯했다.
금광요는 이런 술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음률이 자신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곡의 정체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남희신은 혼백을 위로하고 달래어 원기가 있으면 가라앉히고, 집착이 있으면 끊어버려 다음 세상으로 배웅하는 진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수련이 깊은 만큼 가슴시린 효력은 산 사람의 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안 돼요, 형님!”
금광요가 고금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남희신은 거침없이 한 팔로 금광요의 손을 막더니, 몇 합만에 두서없이 덤비는 몸짓을 차례차례 봉쇄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고금을 들어올려 남망기에게 던져버렸다.
고금을 받아든 남망기가 즉시 그 자리에 앉더니 이어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된다고! 하지 마! 남망기!”
남희신은 길길이 날뛰는 금광요의 몸을 끌어안고 꼼짝도 못하게 막았다. 그가 날뛰면 날뛸수록 더욱 힘을 주어 안았기 때문에 종반에는 무시무시한 압력이 금광요의 전신을 부서뜨릴 듯했다.
그 동안 품 안에서 날뛰는 금광요의 분노와 슬픔과 고통은 똑같이 남희신을 태우고 있었다.
수선계에 몸을 담은 이들은 이제 내막을 짐작할 것 같았고, 금광요의 절규와 무섭게 정신을 흔드는 진혼곡의 위력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을 알 도리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평범한 남자는 아직도 관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채 시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금을 타든, 소리를 지르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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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몽 운평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낮은 산.
며칠 전부터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널찍한 산길은 드문드문한 나무의 가지들이 앙상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볼 것도 없고 딱히 어딘가로 이어지지도 않아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그런 길을 화려한 금빛 옷을 입은 사내가 홀로 오르고 있었다.
덜 자란 듯 가냘픈 몸매에 얼굴이 곱상하지만, 허리에는 뱀의 비늘처럼 겹겹이 세공된 금속 띠를 둘렀고 손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패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깨끗한 눈 위로 외로운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갔다.
금광요는 어검을 하지 않고 선부라도 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엄숙하고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감도는 묘한 눈빛이었다.
이 길을 지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어 좀처럼 찾아올 마음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는 자그마한 공터에 도착했다. 볕은 들지만 특별히 풍수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땅이었고, 그런 조건에 걸맞는 초라한 묘비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습관적으로 목적지에 다가가던 금광요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표식이 될만한 건 볼품없이 마른 몇 그루의 나무 뿐이었고,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래도 착각할 리 없었다.
수년 동안 눈에 익은 기울어진 묘비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그 묘비에 적힌 글자까지 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어야 할 묘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확인하자 고요하던 눈에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났다.
금광요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미친듯이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눈을 파헤쳐도 드러나는 건 시커먼 흙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뜬 채 마른침을 삼키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가 한생을 풀어내자, 곧장 주위가 흙먼지로 뒤덮혔다.
날카롭게 영력이 실린 한생이 꽁꽁 언 겨울의 대지를 무섭게 난도질했다. 그러나 천지사방에 엉망진창으로 튀어오르는 건 모래와 자갈 뿐이었다. 이내 와락 엎드리며 맨손으로 흙을 마구 파내어 던지기 시작했지만, 한참 후 생겨난 구덩이가 허리까지 와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길다랗게 대기를 가르는 광포한 비명에 안식하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남희신은 수업이 끝나 신이 나서 몰려나가는 수련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소의 끝은 미지근하게 가라앉았다.
운심부지처는 날이 가도 해가 가도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계절이 바뀌자 짐승들의 활동도, 사람의 의욕도 한풀 꺾이는 추위가 다가왔다. 그래도 요 며칠 동안은 눈이 내리는 바람에 다소 즐거운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남희신은 눈놀이를 즐길 나이가 아닌데다 금광요가 곁에 없어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금광요는 금자헌의 계승식 이후로 금린대에 가는 일이 적었다. 금광선이 폐인이 된 후에는 그만 만사가 시들해졌는지 운심부지처에서 꼼짝도 않는 나날이었고, 가끔씩이나마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존재가 있다면 금릉이었다. 붙임성 있고 귀여운 금릉은 운몽의 식구들을 포함한 모두에게서 끔찍한 사랑을 받았고, 금광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며칠 전 남망기와 위무선마저 운몽으로 떠나 버린 뒤라 더욱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위무선은 요즘 생각없는 행동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그가 있으면 주변이 더 명랑해지며 활기가 돌았다.
남희신은 해이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장서각으로 향했다. 전날 하던 일이 남아 있었다. 까다로운 옛 서적에 주석을 달아 새로운 수련용 교본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본래가 최고의 자리란 건, 게으름을 피우자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열심히 하자면 잠도 부족할 만큼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남희신은 결코 자신을 혹사시키지는 않았으나 워낙 정력적이고 세심한 사람이라 이미 상당한 일들을 이루어놓고도 개선할 부분이 없는지 항시 안팎의 일을 살폈다.
꾸준하게 장서각을 보강하고, 문하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며, 그 스스로도 부단한 수련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깊은 사랑을 품고 한 사람을 그리워하니, 인생이 한층 깊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금일의 유별난 씁쓸함에는 어떤 예지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남희신이 장서각에 들기 전, 한 수사가 규훈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고소 남씨의 사람이 그렇게 서두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수사가 남희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운몽 강씨의 문장이 찍힌 서신을 바쳤다.
운몽 강씨도 지금은 세력을 완전히 되찾아서 이따금씩 큰 규모의 대회를 열곤 했다. 다만 강만음의 성격에 따라 조용한 청담회보다는 사냥대회를 열 때가 많았다.
그래서 무언가의 초청장이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서신을 열던 남희신에게 수사가 말했다.
“전서조에 주술이 걸려 있었습니다.”
선문가에서는 맹금류의 전서조를 쓰기 때문에 속도가 상당했다. 그런데 거기에 주술까지 걸었다는 건 매우 급한 의미였다. 주술에 걸린 새는 전력을 다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남희신이 재빨리 서신을 헤쳐 보니 과연 악보였다.
금광요가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혀 연화오에 감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연화오의 앞마당에는 팔짱을 낀 강징과 뒷짐을 진 남망기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를 초조해하는 위무선이 수십번씩 왔다갔다했다. 전서조가 닿자마자 남희신이 바로 출발을 했다면 지금쯤 도착할 시간이었다.
과연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떠났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뿌연 하늘 저 편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보였했다.
“강종주.”
이런 때에도 우선 차분하게 예부터 차리는 남희신은 삭월만 움켜쥐고 날아왔는지 옷차림이 얇았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날씨라 몸이 얼음처럼 굳었을 텐데도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광요는?”
“감옥에 있습니다.”
설명하기에 앞서 강징이 들고 있던 남빛 패검을 남희신에게 건넸다.
“한생은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이 실수를... 그리고 염방존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지라...”
강징은 위무선과 남망기가 이미 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운평성에 사는 어떤 남자가 염방존의 어머님의 관을 훔쳤습니다...”
강징은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서두에 꺼내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남희신이 입을 벌렸다.
금광요는 묘비를 비롯하여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관까지 사라져버린 것을 보고 모종의 방법으로 관의 행방을 탐지했다.
관은 어느 양가집으로 옮겨져 있었고, 금광요는 당연히 그 집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관을 훔친 사람은 전씨 성을 가진 가주의 형이었는데, 그런 관이 집 안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금광요는 관이 무사한 것을 보고 다행히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관을 훔친 자를 포함해서 뜯어말리려는 민간인 여럿을 구타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몇몇 하인들이 사람 살리라며 바깥으로 뛰쳐나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때마침 야렵을 나왔던 강징의 부사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패검을 찬 선문인이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말에 부사와 수사들이 즉각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사납게 날뛰고 있는 염방존이 그 곳에 있었다.
흉시 한 떼거리를 잡기 위해 강한 수사들이 출정을 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금광요를 제압하지 못할 뻔했다. 이윽고 자초지종을 파악한 부사는 금광요뿐 아니라 관을 훔친 남자에, 관까지 더하여 연화오로 압송했다.
여기까지 설명한 강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곧 금광요와 대면할 남희신이 받을 충격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금광요는 부사들과 대치할 때 남희신의 남빛 패검을 사용했다. 부사는 그 검을 빼앗은 후, 금광요의 겉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허리에 감은 쇠채찍 같은 물건이 진짜 패검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부사가 금광요를 잡아오는 바람에 놀란 강징도 마찬가지였다.
금광요는 감옥 안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생을 빼들어 감옥을 부수고 뛰쳐나왔다.
강징이 나타났을 때에도 금광요는 검을 놓지 않은 채 관을 내놓으라고 일갈했다.
강징은 자존심이 강했고, 상당히 엄하게 가문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금광요가 모친의 관을 도난당한 자초지종을 듣긴 했지만 그가 이렇듯 연화오에서 행패를 부리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금광요가 운몽의 민가에서 죄를 저지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염방존, 이 곳은 운몽이니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함부로 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공정하게 판단할 테니 옥으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감옥에 가두겠다고? 당신이 뭔데 내 어머니의 관을 돌려주지 않는 거요!”
금광요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치며 벼락같이 덤벼들었다. 강징이 다수의 수사들과 함께 자전까지 휘둘러 가며 겨우 가두었음에도 한생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는 부사에게서 운평성에서 있었던 사건 얘기를 들었지만 한결같이 유순하던 금광요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행태가 너무도 놀라웠다. 소란통에 뒤늦게 달려온 위무선과 남망기도 마찬가지였다.
금광요는 감옥까지 밀려난 다음에도 지치지 않고 한생을 휘둘렀기 때문에 세 명의 수사가 계속해서 결계를 치며 막아야 했다.
강징은 영문을 몰랐지만 이대로라면 재판을 열 수도 없었다. 그 전에 금광요가 지쳐서 몸이 상하거나, 혹은 미쳐서 자해를 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마저 들었다. 그래서 남희신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강징을 비롯한 세 사람은 자초지종을 들은 남희신이 많이 놀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손에 쥔 남빛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희신은 서늘한 얼굴이었다.
“강종주. 광요에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강징이 발을 돌려 앞장섰고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몰랐지만 금광요는 이미 무차별적으로 철창을 갈기던 짓을 멈춘 지 오래였다.
결계를 치고 보존하려고 애쓰던 수사들은 노련하고 실력도 있었으나 금광요가 코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덤비는 데 진땀이 다 났다. 그래서 그가 얌전해진 뒤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꼿꼿하게 수결을 맺은 채 지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한생을 휘두르던 도중에, 온 몸의 기력 뿐 아니라 피까지 토해내어 뿌려버릴 듯하던 금광요의 몸 속 어느 부분이 삐그덕하며 정말로 무리가 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여지껏 몸을 휘몰아치던 고통 뿐인 감각과는 정반대로 달콤하고도 따뜻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금광요가 놀라서 멈추어버린 육체를 곳곳이 퍼져나가며 감미로운 여운을 남겼다. 동시에 죽도록 심해지던 피로가 한 풀 꺾이는 것 같았다.
미친듯이 공격하던 금광요가 이번에는 넋이 나간 것처럼 꼼짝하지 않자 수사들은 더욱 심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망연하게 서 있던 금광요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숫제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버렸다.
금광요는 새삼스러운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새 몸에 보호 주문이 걸려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금광요는 멍하니 앉은 채 바닥에 떨어진 한생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남희신이 얼마나 강력한 주문을 걸어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설마하니 남희신 본인의 몸에 해가 갈만한 수준의 주문을 걸지는 않았겠지, 하는 짐작은 금광요의 독단일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금광요의 이해를 넘어서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금광요는 더 이상 제 몸을 깎아먹으며 난리를 피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남희신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번뜩 들어올려진 금광요의 시선은 그 너머의 강징에게 가서 박혔다.
금광요가 벌떡 일어나 쇠창살을 부여잡으며 다짜고짜 외쳤다.
“형님! 관을 열면 안 돼요! 관을 열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남희신은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 듯, 처참해진 금광요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좁은 감옥에서 생각 없이 휘둘러댄 한생은 오히려 주인의 몸에 더 많은 상처를 내었다. 그리고 결계가 쳐진 쇠창살을 붙잡은 손에서도 작은 칼날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남희신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금광요의 손을 창살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남희신의 손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보고 강징이 얼른 손을 내저으니, 수사들이 손을 멈추었고 결계가 사라졌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피투성이가 된 손은 곧바로 남희신의 손에 매달렸다.
“형님! 관을 열지 못하게 해 주세요!”
남희신은 무슨 일이 생기든 동요하지 말자고 굳게 마음 먹었으나 이런 꼴이 된 금광요와 대면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강징이 말했다.
“관은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지요, 염방존.”
그 말을 듣자 금광요의 눈에 선 날이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남희신을 잡았던 손이 힘없이 풀어져내리자, 철창 안으로 내밀어진 남희신의 손에는 핏자국만이 남았다.
“아요.”
남희신이 불렀지만 금광요는 얻어맞은 맹수처럼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소매를 쥐어뜯으며, 두서없이 움직이는 눈알이 계속해서 바닥을 훑었다.
“아요, 내가 그 남자를 만나 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금광요는 남희신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갑자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남희신이 품 속에서 약병을 꺼내어 건네려고 했으나 그는 벌써 벽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남희신은 한숨을 쉬며 강징을 쳐다보았다.
강징은 남희신을 데리고 나가기 직전에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광분하던 금광요가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보니 도려란 게 보통 관계는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남망기와 위무선에게 눈이 갔다.
이 둘도 무슨 깊은 관계를 맺은 게 아닌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함께 놀러온 건 친해서 그렇다 쳐도, 굳이 위무선의 방에 같이 머무르는 건 대체 왜냔 말이다.
강징은 머리를 흔들어서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깊이 알고 싶지 않았고, 우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전여후라는 남자는 이름과는 다르게 마르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창살에 달라붙으며 ‘맹시는요?’하고 물었다. 갇힌 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절로 관을 열지 말라고 외치던 금광요를 떠올렸다. 이 두 사람은 왜 시체가 든 관에 그리 죽도록 매달리는 건지 몰랐다.
감옥을 지키던 하인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금광요처럼 날뛰진 않았지만 끝없이 맹시에 대해 물으며 맹시의 관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인은 보통 사람이라서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애원하는 남자의 태도가 유순하고 간절했기에 모른다고 거듭 대꾸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징은 전씨 남자를 바라보며 부사의 말을 떠올렸다.
전여후는 가문에서 내놓은 사람인 듯, 붙잡아 올 때에도 살갑게 붙잡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모르는 새 관짝이 집 안에 들어온 일로 미쳤다며 야단이었다. 다만 한 계집아이가 함께 가겠다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는데, 그 아이는 지금껏 감옥 옆에 꼭 붙어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오자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남희신은 갇힌 남자를 보고는 첫눈에 그가 사악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여후는 금광요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듯 얼굴의 한 쪽이 크게 부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희신이 다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금광요의 모친의 관을 훔쳤습니까?”
“금광요... 그가 정말로 난릉 금씨에 들어간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지요?”
“저는... 맹요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기루에 있을 때, 그 곳을 오가던 사람입니다.”
전여후는 그 사실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맹시의 관에 대해 안부를 묻던 간절한 말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선문은 아니지만 제법 잘 사는 가문의 자식이었다.
여느 청년들처럼 기루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그는 쉽게 환락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기루에 드나들던 그는 하필 퇴물이라고 불리는 나이든 맹시를 의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녀를 무척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집안 사람들은 장가도 안 간 젊은 녀석이 미쳤다고 기겁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숱하게 맹시에게 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맹시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가 기녀였으므로 기녀의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금광선이 불러들여줄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남의 첩이 되어버리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여후는 애타게 졸랐지만 맹시는 꿋꿋한 태도로 끝까지 그를 손님으로만 대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히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맹시는 정말로 이 남자를 손님으로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속으로라도 그를 좋아했을까? 그렇지만 제3자도 훨씬 넘어서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의문이니 진실이 어디에 가 있을지는 영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맹시의 사후, 전여후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금광요보다 훨씬 잦게 그녀의 묘를 찾았다. 그가 죽은 기녀에게 미쳐 유령처럼 떠돌면서 장가도 가지 않으려 하므로 가문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동생을 가주로 세웠다.
그러기를 몇 년 후, 전여후는 금광요가 무덤에 찾아오는 발길이 매우 뜸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소문에는 그가 드디어 부친의 가문에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몰래 맹시의 무덤을 파내었다.
그 때 그는 다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단지 그녀의 백골이라도 보고 싶었던 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마지막에 입고 묻혔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었다고. 그러나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관의 뚜껑을 열 수 없었다. 그래서 묘비를 숨기고 관을 파낸 다음 집으로 가져와 버렸다.
건조하게만 느껴지는 말투로 전여후가 이야기를 끝낸 후에는 한참 동안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사랑을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집념에 대해 미쳤다고 해야 할 지 몰랐다.
그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가장 참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강징이었다. 모두의 침묵까지 더해 속이 터져버릴것만 같자 그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뱉았다.
“관에 주술이 걸려 있었습니다. 결계까지 있어 아직 열어보지 않았고요.”
강징이 불쑥 입을 열자 사람들은 저마다 거미줄에 잡힌 벌레처럼 거북하던 기분이 해소되는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남희신이 전여후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한 짓은 타인의 시신을 훔친 겁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모르나요.”
그러자 갑자기 곁에 있던 계집아이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안 되긴 왜 안 돼요!”
깜짝 놀란 사람들이 계집아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12~3세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겁도 없이 자신의 앞에 선 강자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외숙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를 보호했다구요!”
잠시 당황하던 남희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그래도 가족이 있는 사람의 관을 훔치는 것은...”
계집아이가 앞으로 훌쩍 뛰어나오며 양주먹을 그러쥐었다.
“뭐 어때요! 아들이란 작자는 출세하자마자 오지도 않게 되었잖아요! 우리 외숙께서 이렇게 애지중지해 줬는데 감사할 줄은 모를 망정!”
남희신은 말문이 막혔고, 강징은 어린 계집아이가 이렇게 당찬 데 기가 막혔다. 반대로 위무선은 이 어린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에게는 전여후의 사랑 이야기도 매우 감동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곧장 표출하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지는 그가 곁에 있던 남망기를 쳐다보자, 남망기는 위무선이 뭔가 골치 아픈 소리를 할 것을 예감하고 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무선은 입술을 실쭉하며 입을 다물었다.
남희신은 더 이상 계집아이를 상대하지 않고 강징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꺼내 주십시오. 광요도 데리고 다함께 관을 확인하러 가야겠습니다.”
금광요에게 돌아간 남희신은 감옥문을 열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광요는 한참 전에 웅크린 자세 그대로였다.
그 곁에 꿇어앉은 남희신이 살며시 그의 몸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거기까지는 백보 양보해서 연장자인 남희신이 금광요를 어린애처럼 달래는 거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금광요가 남희신의 옷깃을 잡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서로에게 몸도 마음도 기댄 것 같은 모습이 무언가 남이 보아서는 안 될 어떤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당황한 강징이 손짓을 하여 수사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며 자세히 보려는 위무선에 남망기까지 모조리 밖으로 몰아내었다.
잠시 후 남희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요, 내가 그 남자를 만나보았단다.”
이 말에 금광요가 홱 고개를 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형님, 어머님의 관을 찾아 주세요!”
남희신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하는 금광요를 진정시키려는 듯 얼굴을 어루만지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네 어머님의 관이 아니냐. 하지만 그 남자는 악인은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아는 사람이냐?”
“...제가 어렸을 때 기루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가 어머님께 해코지를 했어?”
금광요는 남희신의 질문에 불쾌한 듯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힘없이 내뱉은 대답은 ‘모른다’였다.
어렸던 맹요는 기녀인 어머니를 찾아오는 모든 남자들을 단순하게 증오할 뿐이었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난릉의 찻집 주인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맹시를 멸시하며 단순한 도구 취급만 했다. 다만 전여후는 예외였지만, 금광요가 그런 방안 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다. 지금도 금광요에게 전여후는 맹시의 관을 훔쳐간 터무니없이 괘씸한 인간에 불과했다.
묵묵히 있던 남희신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요, 네가 어머님의 시신에 주술을 걸었느냐?”
“예...”
남희신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관을 확인하러 가자. 그 남자도 함께 갈 것이니 더 이상 공격하지는 말거라.”
“예, 형님...”
남희신이 한생을 주워서 금광요에게 내밀었다. 금광요는 말없이 검을 허리에 두르고 남희신을 따라 나섰다.
관을 안치해둔 방은 공기가 새어나갈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사방이 돌로 되어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이렇다 할 물건도 가구도 없고, 사방에 켜 둔 무수한 촛불만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금광요는 오던 길에 이 일의 원흉이 된 남자가 합류해도 이미 관심이 없었고, 그저 관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끌어안고 무수하게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본래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예의바르던 그가 옷차림도 태도도 엉망이 되어 관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금광요의 곁으로 다가간 남희신이 관뚜껑을 만져 보았다. 관에는 주박술이 걸려 있어 당연히 보통 사람인 전여후는 열 수가 없었다. 남희신이 손에 힘을 주어 천천히 쓰다듬자 뚜껑에 걸렸던 주술이 해제되며 관이 한차례 미미하게 떨렸다.
남희신은 관을 열기에 앞서 관계 없는 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강징 등은 문간에 서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시신을 아무나 들여다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겨서였다.
마침내 그가 관뚜껑을 들어올리자 이번에는 구석에 박혀 있던 전여후가 바람같이 달려와 관의 머리맡에 매달렸다.
“아설, 아설!”
그만이 알고 있는 맹시의 애칭이었다.
금광요도 관 안의 시신에 온통 정신이 팔려 전여후가 하는 행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맹시의 시신은 온전한 이목구비는 다 잃었으나 도중에 부패가 중지된 듯 상당히 보존된 모습이었다. 시신의 주변은 온통 부적으로 빽빽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도 여러 겹 느껴졌다.
금광요는 주술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맹시가 죽었을 당시의 어린 그가 이런 술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맹시가 죽자마자 가진 돈을 다 털어 잡다한 부적을 사서 시신에 붙였다. 그녀의 혼백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고 한 행동이었다. 머지않아 청하 섭씨에 들어가 부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갖은 인맥과 지식을 끌어모아 제대로 효과를 낼만한 부적을 쓸 수 있었다. 아마도 시신의 부패가 느려진 것은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남희신은 부적이 시신의 혼백을 붙잡아놓기 위한 용도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금광요는 단순히 모친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그토록 날뛴 것이 아니었다. 시신이 아니라 그녀의 혼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섣불리 손을 대어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그리도 악에 받쳤던 것이다.
수진계에서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혼백을 속박하는 것은 명실공히 죄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유일한 존재였던 모친에게 매달리고 싶어하는 어린 맹요의 모습이 떠오르자, 남희신은 도저히 질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일을 묵과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죽은 자는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순리이고, 법도였다.
이윽고 남희신은 건곤대에서 고금을 꺼내어 관의 테두리에 올렸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는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문령을 시도했다.
그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물론 그녀의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금광요와 문간에 서있던 사람들은 남희신이 갑자기 고금을 타기 시작하자 이상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남희신의 손 아래에서 금줄이 저절로 움직이며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남희신은 가슴이 선득했다. 현을 통해 전해진 답은 남희신의 질문과는 전연 다른 엉뚱한 것이었다.
그가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동일했다.
무언가가 부름에 일일이 반응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즉, 혼백이 너무 적어 대답할 기능이 부족한 것이었다.
아니, 남아 있는 기운은 혼백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금광요는 현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고금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에 남희신은 더더욱 가슴 속을 휘몰아치는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요. 이미... 어머님의 혼백은... 거의 다 흩어져버렸단다. 이만 놓아드려야 하겠다.”
그 말에 금광요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안 됩니다. 형님, 금방 현이 울렸잖습니까.”
금광요가 관을 짚으며 속에 든 시신과 고금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님께서 계시는 거죠? 대답하신 거죠? 뭐라고 하신 건데요? 형님!”
남희신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위무선은 남희신이 눈을 내리깔며 낙담하는 모습을 본 뒤 남망기를 쳐다보았다.
그는 남망기에게 들어서 문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망기는 남희신을 제외하면 이 곳에서 문령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위무선이 보아하니,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남망기의 연한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혼이 뭐라고 말했기에 그러는 건지 궁금했다.
남희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억지를 쓰듯 다시 한 번 질문을 했다. 현을 뜯는 소리가 자못 거칠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똑같은 현이 또다시 딩 딩 하고 울리며 문령을 이해하는 두 사람의 가슴에 따뜻하고도 매정한 금을 새겼다.
-아요, 좋은 꿈 꿔.
혼백이 아니었다. 존재하는 것은 정말 먼지만한 한 톨의 사념 뿐이었다.
남희신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맹시의 혼백이 반의 반절이라도 남아서 금광요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었다면! 아니면 차라리 문령에 답을 할 만한 무엇도 없었다면.
맹시가 죽었을 당시에 이미 혼백은 다 흩어져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값싼 부적이 한 줄기의 사념을 간신히 붙잡았을 것이고, 그것이 전부였다.
잔인한 얘기였다. 어린 맹요는 가진 것을 다 바쳐 얻은 부적이 어머니의 혼백을 붙잡아줬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여지껏 제 어머니의 혼백이 관 속에, 시신 안에 고이 깃들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함께 있다고 굳게 믿고서 긴 시간을 버텨온 것이었다.
남희신은 커다란 눈에 기대감을 품고 매달리는 듯 쳐다보는 금광요의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어머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거에요, 형님!”
그렇게 소리치는 금광요야말로 남희신의 악몽 그 자체였다. 이런 장소만 아니었더라면, 마음으로 그와 함께 울부짖으며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그를 쓰다듬고 입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남희신은 역경 앞에 무릎을 꿇거나 자포자기 하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 번 이를 물고 난 그는 더이상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남희신이 고금에 손을 올려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력이 굳게 실린 가락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문령을 하려는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온전한 악곡의 음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고즈넉한 가락이 몇 소절 지나가자 별안간 관에 붙여 둔 부적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적들은 곧장 광풍에 흩날리는 것처럼 세차게 몰아치더니, 이내 연기처럼 바스라져갔다.
놀란 금광요가 둥그래진 눈으로 관을 짚고 변고를 지켜보다가 손을 내밀었지만, 부적은 그의 손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그치지 않는 고금 소리가 이윽고 금광요의 영혼 속까지 침범하는 듯했다.
금광요는 이런 술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음률이 자신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곡의 정체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남희신은 혼백을 위로하고 달래어 원기가 있으면 가라앉히고, 집착이 있으면 끊어버려 다음 세상으로 배웅하는 진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수련이 깊은 만큼 가슴시린 효력은 산 사람의 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안 돼요, 형님!”
금광요가 고금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남희신은 거침없이 한 팔로 금광요의 손을 막더니, 몇 합만에 두서없이 덤비는 몸짓을 차례차례 봉쇄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고금을 들어올려 남망기에게 던져버렸다.
고금을 받아든 남망기가 즉시 그 자리에 앉더니 이어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된다고! 하지 마! 남망기!”
남희신은 길길이 날뛰는 금광요의 몸을 끌어안고 꼼짝도 못하게 막았다. 그가 날뛰면 날뛸수록 더욱 힘을 주어 안았기 때문에 종반에는 무시무시한 압력이 금광요의 전신을 부서뜨릴 듯했다.
그 동안 품 안에서 날뛰는 금광요의 분노와 슬픔과 고통은 똑같이 남희신을 태우고 있었다.
수선계에 몸을 담은 이들은 이제 내막을 짐작할 것 같았고, 금광요의 절규와 무섭게 정신을 흔드는 진혼곡의 위력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을 알 도리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평범한 남자는 아직도 관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채 시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금을 타든, 소리를 지르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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