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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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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요는 목석같이 서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여긴 뭣하러 온 게야? 일 없으니 나가!”
옆에서 금부인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악에 받친 듯 날아온 물건이 금광요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추었다.
그래도 꼼짝 않는 금광요를 보고 답답한 속이 터졌는지 분을 이기지 못한 금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욕설 섞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몰랐다.
침상에 누운 남자는 금광요가 들어온 순간부터 쳐다보며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못 보던 새 반쪽이 된 남자는 기품있고 힘있는 선문인이 아니라 골방에서 시들어가는 병인 같았다.
남자의 눈빛은 여러 가지 불행의 색이 섞여 뚜렷한 한 가지의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금광요 역시 뚜렷한 한 가지의 감정은 가질 수가 없었다.
도려를 맺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광요는 금린대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금자헌이 보낸 것이었다.
서신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장 돌아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절대 데려오지 말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금광요가 데려갈 사람이라고 해봐야 남희신 뿐인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금광요가 왔다는 전갈을 받은 금자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금광요의 턱이 베인 것을 보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금광요는 손수건을 받아들었지만 지그시 손 안에서 구겼다.
“누가 저런 짓을 했지?”
금자헌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금광요는 역시 사랑받는 자식은 다르다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그토록 야심차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말라빠져 누워 있는 모습에 놀랐을 따름이었다.
금자헌은 심각하게 갈등하는 눈빛으로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금자헌도 그가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던 건 부인 강염리의 영향이 컸다. 금자헌은 그녀의 앞에서는 어떠한 나쁜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강염리를 따라서 금광요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다 보니 마음도 누그러들었다. 물론 금광요의 사근사근한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금자헌은 본시 미움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희신과 어울리기 시작한 금광요는 어느 순간 태도가 싹 달라지더니 난릉 금씨의 일에는 거의 관심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금린대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한 행적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남희신과 도려를 맺은 현재에 이르러서야 그에게 욕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금의 금광요는 난릉 금씨에 확연히 위협이 되지 않는데다, 요즘은 사람 자체가 달라져버린 것 같았다.
예전의 금광요는 상냥하고 세심하며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사람이었는데, 현재 금자헌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훨씬 무거운 존재감을 지니고 있어, 어딘지 남이 듣기 싫어할 소리도 불사할 듯 냉기마저 돌았다.
이상하게도 금자헌은 지금의 금광요가 되레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의원과 자신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금광선은 여느 때처럼 단골집인 기루에서 며칠이고 침식을 하며 머물렀다. 그 후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실려왔는데, 의원이 진단해 보니 뜻밖에도 주화입마가 된 것처럼 온 몸의 혈맥과 영맥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시종에게 내막을 들어보니 그의 말로는 금광선이 새로 온 기녀들을 데리고 놀았는데, 구관을 잊지 않는답시고 원래부터 귀여움을 받던 기녀들을 합쳐 20여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다 탈이 났다는 것이었다.
평소 금광선의 행실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금자헌은 몇 번이나 거북해하며 말을 흐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금광요는 기가 막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정무에 관한 보고라도 듣는 듯 냉담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차 한 잔을 따라서 내밀었다. 그리고 저도 한 잔을 마신 후 물었다.
“회복하실 수 있나?”
금자헌이 보일락말락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금광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알 만큼 알았다.
금자헌은 단순히 부친이 폐인이 되었다고 금광요를 부르고 근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몸을 망치는 생활을 했다지만, 제대로 된 수선인이 기력이 쇠한 것도 아닌데 기녀를 데리고 놀았다고 주화입마가 돼?’
아무래도 수상쩍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 일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혹이 들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찾아내어 처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금자헌은 금광선처럼 체면도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상을 파헤치려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범인을 찾아 복수를 도모해야 하는지, 아니면 부친의 체면을 더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덮어버려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거다.
그렇지만 금광요는 한 발 물러났다.
그는 이 일에 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금자헌이 알아서 하고 책임을 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여기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금광선이 폐인이 되었는데, 내가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나?
금광요는 한참동안 묵혀 두고 꺼내지 않았던 가면을 쓰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헌. 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테니 말만 해. 그게 이제... 네가 가문의 주인이니까.”
홀로 남겨진 금자헌은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금광요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도와주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문득 깃털처럼 가벼운 온기가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걱정스러운 듯 들여다보는 강염리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금자헌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할 지 알 수 없던 복잡한 머릿속이 일시에 말끔해지는 것 같았다.
금자헌의 부친과 모친은 그를 사랑해 주었어도 존경할만한데는 없었고, 동년배의 사촌들은 성정이 음험하거나 사나웠다.
금자헌이 강염리에게 관심이 없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던 시절, 그는 그녀가 재미없고 매력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을 쉽게 의심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결국은 선의로서 상대를 바꾸어버리고 마는 사랑스러운 사람.
금자헌은 얼른 괴로움에 찌든 표정을 숨기며 일어섰다.
그는 강염리가 무슨 일로 고민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추잡한 일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보다 강염리가 아는 것이 열 배는 더 두려웠다.
금자헌은 이미 혼인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괜찮아요.”
그는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하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품에 꼭 안았다. 강염리는 체면을 차리는 금자헌이 이런 장소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뺨을 붉히며 말이 없었다.
금자헌은 강염리를 소중하게 안고서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이제부터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강염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눈빛은 각오를 한 듯 단단했다.
다음 날 아침, 뜻밖에 금부인이 나타나 금린대 내부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사람들이 다 보인 자리에서 그녀는 금광선이 수련을 하다 주화입마를 하여 돌이킬 수 없도록 몸을 망쳤으며, 병석에 누운 그가 종주 자리를 금자헌에게 물려주었다고 공표했다.
금광선이 몸져 누운 뒤 금자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동안 이 사건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래서 금린대 안에서도 이변이 일어난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금광요는 표독스러운 얼굴의 금부인을 바라보며 금광선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까 의심했다. 당황하는 금자헌과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금광요가 금린대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발표를 하니 의혹이 더욱 짙었다.
하지만 금광선이 정말로 폐인이 되었다면 금자헌이 가문을 물려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금광요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어떻든 금광선이 그렇게 말했다고 금부인이 언명한 이상, 이제 금자헌은 더러운 내막을 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계승식을 치르기로 결정되었고, 일이 다 끝나면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하루 이틀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남희신이 무척 그리웠다.
이렇게 된 바에는 아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은 금광요는 금부인의 공격적인 언사도 무시하고 계승식을 의논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잠시 후 오가는 이야기가 심화되며 논의의 중심에서 금광요를 뺄 수 없게 되자 금부인은 멸시하는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금자헌을 포함한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을 놓으며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금광요가 말했다.
“부친께서 좋지 않은 상태시니, 오래 끌면서 금린대를 어지럽히지는 말도록 하지.”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라 금자헌을 포함한 수뇌들이 곧바로 동의했지만, 금광요는 단순히 행사일을 줄여 빨리 돌아가려고 한 말이었다. 길일을 택할 때에도 상당히 이른 날짜를 고르자 금자헌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너무 이르지 않아? 그렇게 빨리 준비될까?”
“문제없어.”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듯 당일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다 밤늦게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옷을 벗을 새도 없이 서안에 앉아 편지를 썼다. 곧 대부분의 가문에 초청장을 돌릴 테니 남희신에게도 속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상황을 알리는 글을 쓴 금광요는 조금 망설이다가, 답장을 꼭 주십사고 덧붙였다.
편지를 보낸 다음 늦은 식사를 하며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방을 둘러보았다. 근래에는 남희신과 한 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 무얼 보아도 그가 떠올랐다.
그의 퉁소 소리가 곁들여지지 않으면 쓸쓸하기만 할 것 같은 고금, 홀로 잠들어야 하는 침상, 그리고 낯선 향기까지.
남희신에게서 나는 고목과 서책의 향기는 운심부지처 전체에 어리어 있다. 그러나 금린대에서는 어디를 가도 그런 향기는 나지 않았다.
***
날이 꽤 차가워졌다.
남망기가 자리에 들자마자 이불 더미가 꾸물꾸물 다가와서 왼팔에 감겨들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엉켰던 내음이 확 풍겨 와 간신히 가라앉힌 열을 뒤흔들었다. 그래도 남망기는 촉촉한 뺨을 한번 쓰다듬고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꼭꼭 감싸 주었다.
그러느라 이 편을 줄기차게 쳐다보는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마주치고는 거북한 숨을 삼켰다.
남망기는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얼마 전 비슷한 시각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정실에 있었다.
남망기는 잠이 들기 전에 항상 몸을 차갑게 비우는 운기를 해 왔는데 그것이 요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시가 가까워지면 위무선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남망기를 지분지분 건드린다. 나무라도 소용없고, 내 것 내가 건드리는데 벌을 줄 수는 없다고 약올리는데 할 말도 없었다.
결국 위무선이 대놓고 남망기의 무릎 위에 몸을 던지며 매달려 오면 그대로 안고 침상으로 옮기는 일이 연일 반복되었다. 그러고도 평소의 수련 일정에 맞추느라 빠듯한 느낌이었지만 위무선은 남망기와 같은 시간에 잠들고도 훨씬 늦게 일어나곤 했다.
가끔은 위무선이 아무리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일단 한 번 불이 붙은 남망기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한참 열을 뿜으며 입맞추던 와중에 휙하니 뒤로 물러났다.
맞잡은 위무선의 손가락에서 낯선 이물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푸른 옥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옥반지에 붙어 있는, 선도의 인삼과를 닮은 어린아이가 남망기를 놀라게 했다.
남망기가 열렬히 애무하던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뜨자 의아해하던 위무선이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아. 너한테 말해주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네.”
“반지에 붙은 건가? ...정령?”
위무선이 일어나 앉으며 손 끝으로 정령을 놀렸다. 조그만 정령은 반지가 아닌 위무선의 손가락을 꼭 껴안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남망기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응시하자 사라져버렸다.
“겁주지 마, 남잠! 착한 애란 말이야.”
“어디서 난 거지?”
“물론 시장에서 샀지. 이런 걸 발견하다니 너무너무 운이 좋았어.”
“굉장히 낡은 반지로군.”
그의 말대로 옥반지는 세월의 땟물이 스며들었고 실금이 잔뜩 간 상태였다.
“그래, 그런데 장사꾼 녀석이 아주 수완이 좋더라니까. 어떤 여인이 오래도록 끼고 있던 사연 있는 반지라면서, 몸에 지니고만 있으면 온갖 복을 불러들이고 사랑도 다 이루어진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구. 요마를 알아볼 줄도 모르는 녀석이 사기를 치는 건데, 하는 말이 다 사실인 게 더 열받더라니까. 게다가 천자소 세 병을 다 빼앗겼지 뭐야.”
“천자소를 주고 사다니? 돈이 다 떨어졌어?”
“돈이야 있지. 그렇지만 어린애를 돈을 주고 살 순 없잖아.”
“...술은 괜찮고?”
위무선은 어이없어하는 남망기의 품에 몸을 던져 편하게 자리를 잡고 반지 낀 손을 그의 눈 앞에 치켜올렸다.
“남잠, 너도 느껴지지? 이 반지의 주인은 반지를 정말로 아꼈어. 아주 좋은 마음으로, 엄청나게 오랫동안.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준 반지였을 거야. 보통 사람의 감정으로 이렇게 따뜻한 정이 생겨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분명 아주 간절하게, 몇 십년이나 마음을 주었겠지.”
위무선이 제 얘기를 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다시 나타난 정령이 손가락 기둥 뒤에 숨어서 남망기를 훔쳐보았다. 확실히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곧 물이 떨어질 듯 커다란 눈망울이 쳐다보자 굉장히 거북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잠, 얘를 우리 아이로 삼자.”
“뭐?”
소스라치게 놀라는 남망기를 쳐다보며 위무선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이 애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정이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사랑을 먹여주는 거지. 그러니까 남잠, 이제 나를 안을 때에는 미워하거나 화난 마음을 가지면 안 돼. 으앗!”
남망기가 몸을 휙 빼내자 위무선이 쓰러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분명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밤이 되어 나돌아다닐 수 없으니, 남망기는 침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이동하며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마, 위영.”
“아니, 남잠! 쟤 또 화났네.”
위무선이 중얼거리며 휘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남망기는 멀찍이 등을 보인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위무선이 정령의 턱을 간질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꼬마야, 잘 알아둬. 쟨 수줍음을 엄청 타. 수줍어서 화를 낼 정도라니까. 넌 저런 건 닮지 말도록 해.”
그랬던 것이, 정령은 이제 남망기가 똑바로 쳐다봐도 피하지 않았고 되레 남망기가 지칠 때까지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남망기는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상에 있을 때만이라도 반지를 빼 놓으라고 부탁했지만 위무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사랑의 정이라니까. 우리가 아무리 음탕한 짓을 해도, 네가 나를 목이 쉬도록 괴롭혀도 사랑만 있다면 괜찮아.”
그런 식으로 대낮에 맨정신으로 듣기 힘든 말을 해대서 말문을 막아버릴 뿐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반지가 쉽게 깨어지지 않도록 남망기가 몰래 보호주문을 걸어준 것을 알고 있었다.
‘어휴. 남잠은 정말 귀엽다니까. 사람이 저런 쓰디쓴 풀만 먹고 자라도 이처럼 달콤해질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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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뭣하러 온 게야? 일 없으니 나가!”
옆에서 금부인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악에 받친 듯 날아온 물건이 금광요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추었다.
그래도 꼼짝 않는 금광요를 보고 답답한 속이 터졌는지 분을 이기지 못한 금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욕설 섞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몰랐다.
침상에 누운 남자는 금광요가 들어온 순간부터 쳐다보며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못 보던 새 반쪽이 된 남자는 기품있고 힘있는 선문인이 아니라 골방에서 시들어가는 병인 같았다.
남자의 눈빛은 여러 가지 불행의 색이 섞여 뚜렷한 한 가지의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금광요 역시 뚜렷한 한 가지의 감정은 가질 수가 없었다.
도려를 맺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광요는 금린대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금자헌이 보낸 것이었다.
서신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장 돌아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절대 데려오지 말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금광요가 데려갈 사람이라고 해봐야 남희신 뿐인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금광요가 왔다는 전갈을 받은 금자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금광요의 턱이 베인 것을 보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금광요는 손수건을 받아들었지만 지그시 손 안에서 구겼다.
“누가 저런 짓을 했지?”
금자헌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금광요는 역시 사랑받는 자식은 다르다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그토록 야심차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말라빠져 누워 있는 모습에 놀랐을 따름이었다.
금자헌은 심각하게 갈등하는 눈빛으로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금자헌도 그가 가문으로 들어왔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던 건 부인 강염리의 영향이 컸다. 금자헌은 그녀의 앞에서는 어떠한 나쁜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강염리를 따라서 금광요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다 보니 마음도 누그러들었다. 물론 금광요의 사근사근한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금자헌은 본시 미움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희신과 어울리기 시작한 금광요는 어느 순간 태도가 싹 달라지더니 난릉 금씨의 일에는 거의 관심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금린대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한 행적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남희신과 도려를 맺은 현재에 이르러서야 그에게 욕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금의 금광요는 난릉 금씨에 확연히 위협이 되지 않는데다, 요즘은 사람 자체가 달라져버린 것 같았다.
예전의 금광요는 상냥하고 세심하며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사람이었는데, 현재 금자헌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훨씬 무거운 존재감을 지니고 있어, 어딘지 남이 듣기 싫어할 소리도 불사할 듯 냉기마저 돌았다.
이상하게도 금자헌은 지금의 금광요가 되레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의원과 자신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금광선은 여느 때처럼 단골집인 기루에서 며칠이고 침식을 하며 머물렀다. 그 후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실려왔는데, 의원이 진단해 보니 뜻밖에도 주화입마가 된 것처럼 온 몸의 혈맥과 영맥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시종에게 내막을 들어보니 그의 말로는 금광선이 새로 온 기녀들을 데리고 놀았는데, 구관을 잊지 않는답시고 원래부터 귀여움을 받던 기녀들을 합쳐 20여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다 탈이 났다는 것이었다.
평소 금광선의 행실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금자헌은 몇 번이나 거북해하며 말을 흐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금광요는 기가 막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정무에 관한 보고라도 듣는 듯 냉담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차 한 잔을 따라서 내밀었다. 그리고 저도 한 잔을 마신 후 물었다.
“회복하실 수 있나?”
금자헌이 보일락말락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금광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알 만큼 알았다.
금자헌은 단순히 부친이 폐인이 되었다고 금광요를 부르고 근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몸을 망치는 생활을 했다지만, 제대로 된 수선인이 기력이 쇠한 것도 아닌데 기녀를 데리고 놀았다고 주화입마가 돼?’
아무래도 수상쩍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 일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혹이 들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찾아내어 처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금자헌은 금광선처럼 체면도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상을 파헤치려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범인을 찾아 복수를 도모해야 하는지, 아니면 부친의 체면을 더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덮어버려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거다.
그렇지만 금광요는 한 발 물러났다.
그는 이 일에 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금자헌이 알아서 하고 책임을 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여기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금광선이 폐인이 되었는데, 내가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나?
금광요는 한참동안 묵혀 두고 꺼내지 않았던 가면을 쓰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헌. 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테니 말만 해. 그게 이제... 네가 가문의 주인이니까.”
홀로 남겨진 금자헌은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금광요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도와주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문득 깃털처럼 가벼운 온기가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걱정스러운 듯 들여다보는 강염리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금자헌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할 지 알 수 없던 복잡한 머릿속이 일시에 말끔해지는 것 같았다.
금자헌의 부친과 모친은 그를 사랑해 주었어도 존경할만한데는 없었고, 동년배의 사촌들은 성정이 음험하거나 사나웠다.
금자헌이 강염리에게 관심이 없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던 시절, 그는 그녀가 재미없고 매력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을 쉽게 의심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결국은 선의로서 상대를 바꾸어버리고 마는 사랑스러운 사람.
금자헌은 얼른 괴로움에 찌든 표정을 숨기며 일어섰다.
그는 강염리가 무슨 일로 고민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추잡한 일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보다 강염리가 아는 것이 열 배는 더 두려웠다.
금자헌은 이미 혼인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괜찮아요.”
그는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하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품에 꼭 안았다. 강염리는 체면을 차리는 금자헌이 이런 장소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뺨을 붉히며 말이 없었다.
금자헌은 강염리를 소중하게 안고서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이제부터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강염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눈빛은 각오를 한 듯 단단했다.
다음 날 아침, 뜻밖에 금부인이 나타나 금린대 내부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사람들이 다 보인 자리에서 그녀는 금광선이 수련을 하다 주화입마를 하여 돌이킬 수 없도록 몸을 망쳤으며, 병석에 누운 그가 종주 자리를 금자헌에게 물려주었다고 공표했다.
금광선이 몸져 누운 뒤 금자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동안 이 사건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래서 금린대 안에서도 이변이 일어난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금광요는 표독스러운 얼굴의 금부인을 바라보며 금광선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까 의심했다. 당황하는 금자헌과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금광요가 금린대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발표를 하니 의혹이 더욱 짙었다.
하지만 금광선이 정말로 폐인이 되었다면 금자헌이 가문을 물려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금광요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어떻든 금광선이 그렇게 말했다고 금부인이 언명한 이상, 이제 금자헌은 더러운 내막을 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계승식을 치르기로 결정되었고, 일이 다 끝나면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하루 이틀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남희신이 무척 그리웠다.
이렇게 된 바에는 아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은 금광요는 금부인의 공격적인 언사도 무시하고 계승식을 의논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잠시 후 오가는 이야기가 심화되며 논의의 중심에서 금광요를 뺄 수 없게 되자 금부인은 멸시하는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금자헌을 포함한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을 놓으며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금광요가 말했다.
“부친께서 좋지 않은 상태시니, 오래 끌면서 금린대를 어지럽히지는 말도록 하지.”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라 금자헌을 포함한 수뇌들이 곧바로 동의했지만, 금광요는 단순히 행사일을 줄여 빨리 돌아가려고 한 말이었다. 길일을 택할 때에도 상당히 이른 날짜를 고르자 금자헌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너무 이르지 않아? 그렇게 빨리 준비될까?”
“문제없어.”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듯 당일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다 밤늦게 방으로 돌아온 금광요는 옷을 벗을 새도 없이 서안에 앉아 편지를 썼다. 곧 대부분의 가문에 초청장을 돌릴 테니 남희신에게도 속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상황을 알리는 글을 쓴 금광요는 조금 망설이다가, 답장을 꼭 주십사고 덧붙였다.
편지를 보낸 다음 늦은 식사를 하며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방을 둘러보았다. 근래에는 남희신과 한 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 무얼 보아도 그가 떠올랐다.
그의 퉁소 소리가 곁들여지지 않으면 쓸쓸하기만 할 것 같은 고금, 홀로 잠들어야 하는 침상, 그리고 낯선 향기까지.
남희신에게서 나는 고목과 서책의 향기는 운심부지처 전체에 어리어 있다. 그러나 금린대에서는 어디를 가도 그런 향기는 나지 않았다.
***
날이 꽤 차가워졌다.
남망기가 자리에 들자마자 이불 더미가 꾸물꾸물 다가와서 왼팔에 감겨들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엉켰던 내음이 확 풍겨 와 간신히 가라앉힌 열을 뒤흔들었다. 그래도 남망기는 촉촉한 뺨을 한번 쓰다듬고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꼭꼭 감싸 주었다.
그러느라 이 편을 줄기차게 쳐다보는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마주치고는 거북한 숨을 삼켰다.
남망기는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얼마 전 비슷한 시각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정실에 있었다.
남망기는 잠이 들기 전에 항상 몸을 차갑게 비우는 운기를 해 왔는데 그것이 요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시가 가까워지면 위무선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남망기를 지분지분 건드린다. 나무라도 소용없고, 내 것 내가 건드리는데 벌을 줄 수는 없다고 약올리는데 할 말도 없었다.
결국 위무선이 대놓고 남망기의 무릎 위에 몸을 던지며 매달려 오면 그대로 안고 침상으로 옮기는 일이 연일 반복되었다. 그러고도 평소의 수련 일정에 맞추느라 빠듯한 느낌이었지만 위무선은 남망기와 같은 시간에 잠들고도 훨씬 늦게 일어나곤 했다.
가끔은 위무선이 아무리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일단 한 번 불이 붙은 남망기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한참 열을 뿜으며 입맞추던 와중에 휙하니 뒤로 물러났다.
맞잡은 위무선의 손가락에서 낯선 이물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푸른 옥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옥반지에 붙어 있는, 선도의 인삼과를 닮은 어린아이가 남망기를 놀라게 했다.
남망기가 열렬히 애무하던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뜨자 의아해하던 위무선이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아. 너한테 말해주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네.”
“반지에 붙은 건가? ...정령?”
위무선이 일어나 앉으며 손 끝으로 정령을 놀렸다. 조그만 정령은 반지가 아닌 위무선의 손가락을 꼭 껴안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남망기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응시하자 사라져버렸다.
“겁주지 마, 남잠! 착한 애란 말이야.”
“어디서 난 거지?”
“물론 시장에서 샀지. 이런 걸 발견하다니 너무너무 운이 좋았어.”
“굉장히 낡은 반지로군.”
그의 말대로 옥반지는 세월의 땟물이 스며들었고 실금이 잔뜩 간 상태였다.
“그래, 그런데 장사꾼 녀석이 아주 수완이 좋더라니까. 어떤 여인이 오래도록 끼고 있던 사연 있는 반지라면서, 몸에 지니고만 있으면 온갖 복을 불러들이고 사랑도 다 이루어진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구. 요마를 알아볼 줄도 모르는 녀석이 사기를 치는 건데, 하는 말이 다 사실인 게 더 열받더라니까. 게다가 천자소 세 병을 다 빼앗겼지 뭐야.”
“천자소를 주고 사다니? 돈이 다 떨어졌어?”
“돈이야 있지. 그렇지만 어린애를 돈을 주고 살 순 없잖아.”
“...술은 괜찮고?”
위무선은 어이없어하는 남망기의 품에 몸을 던져 편하게 자리를 잡고 반지 낀 손을 그의 눈 앞에 치켜올렸다.
“남잠, 너도 느껴지지? 이 반지의 주인은 반지를 정말로 아꼈어. 아주 좋은 마음으로, 엄청나게 오랫동안.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준 반지였을 거야. 보통 사람의 감정으로 이렇게 따뜻한 정이 생겨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분명 아주 간절하게, 몇 십년이나 마음을 주었겠지.”
위무선이 제 얘기를 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다시 나타난 정령이 손가락 기둥 뒤에 숨어서 남망기를 훔쳐보았다. 확실히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곧 물이 떨어질 듯 커다란 눈망울이 쳐다보자 굉장히 거북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잠, 얘를 우리 아이로 삼자.”
“뭐?”
소스라치게 놀라는 남망기를 쳐다보며 위무선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이 애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정이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사랑을 먹여주는 거지. 그러니까 남잠, 이제 나를 안을 때에는 미워하거나 화난 마음을 가지면 안 돼. 으앗!”
남망기가 몸을 휙 빼내자 위무선이 쓰러지며 데굴데굴 굴렀다.
분명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밤이 되어 나돌아다닐 수 없으니, 남망기는 침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이동하며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마, 위영.”
“아니, 남잠! 쟤 또 화났네.”
위무선이 중얼거리며 휘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남망기는 멀찍이 등을 보인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위무선이 정령의 턱을 간질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꼬마야, 잘 알아둬. 쟨 수줍음을 엄청 타. 수줍어서 화를 낼 정도라니까. 넌 저런 건 닮지 말도록 해.”
그랬던 것이, 정령은 이제 남망기가 똑바로 쳐다봐도 피하지 않았고 되레 남망기가 지칠 때까지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남망기는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상에 있을 때만이라도 반지를 빼 놓으라고 부탁했지만 위무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사랑의 정이라니까. 우리가 아무리 음탕한 짓을 해도, 네가 나를 목이 쉬도록 괴롭혀도 사랑만 있다면 괜찮아.”
그런 식으로 대낮에 맨정신으로 듣기 힘든 말을 해대서 말문을 막아버릴 뿐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반지가 쉽게 깨어지지 않도록 남망기가 몰래 보호주문을 걸어준 것을 알고 있었다.
‘어휴. 남잠은 정말 귀엽다니까. 사람이 저런 쓰디쓴 풀만 먹고 자라도 이처럼 달콤해질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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