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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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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위무선은 아침을 먹자마자 남희신을 찾았다. 그러나 운심부지처를 다 뒤져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금광요도 마찬가지였다.
“금서실에 계실 거야.”
남망기가 말했다.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 비밀스러운 고서실이 있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지만 위치는 알지 못했다.
“형장께 맡겨두면 돼. 넌 수련이나 해.”
남망기는 뒤숭숭해하는 위무선을 협실로 끌고 갔다.
남망기가 (더욱)말을 아끼고, 위무선이 짜증을 참는 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위무선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음호부의 일만 정리되면 다 해결될 거라 믿고 참았다. 그런데 그 음호부의 처리가 쉽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남망기의 짐작대로, 남희신과 금광요는 금서실에 있었다.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고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대략 어떤 위치에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금광요의 손을 빌려 수백권의 책을 뒤져야 했다.
며칠이 걸려 원하던 책을 찾은 남희신은 여러 번 꼼꼼하게 읽어 본 다음 생각에 잠겼다.
그가 책을 덮은 후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금광요가 살며시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다.
“형님, 답을 찾으셨나요?”
“...그래.”
“말씀하신대로... 영력으로 파괴하는 게 가능한가요?”
“음. 그런데 사람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금광요가 엷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 사람을 모으는 것은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사람을 모으면 되지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남희신은 고개를 저었다.
난릉 금씨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색이 짙어 분란을 일으켜 왔고, 반대로 고소 남씨는 한 명 한 명이 심하게 독립적인 편이었다. 아마 그런 차이가 남희신을 저어하게 만드는 모양이라고 금광요는 추측했다.
“형님, 이제 사대가문에 야심가는 없습니다.”
그것은 금광선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금광요의 한 마디에 속을 읽힌 것을 안 남희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금서실을 나온 남희신과 금광요는 산책을 하는 것처럼 거닐며 위무선을 찾았다.
경내를 한 바퀴 다 돌고 아랫거처로 내려가는 길에 이르렀을 때 어느 소년이 산문 근처의 개울가에서 그를 봤다고 알려 주었다.
가까워지기 전에 보니 남망기는 곧게 서 있고 위무선은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뜻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위무선이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서먹해 보였는데 여태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다가오는 것을 본 위무선이 벌떡 일어났다.
한가하게 놀고 있을 성격이 아닌 남망기가 하릴없이 서성거리는 것을 보아도 남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남망기는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 불안, 초조, 분노. 나쁜 기분은 모조리 그에게 엉겨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음호부를 파괴하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저토록 근심하는 이유가 뭔지 남희신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택무군.”
한편으로는 남희신을 대하는 위무선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윽고 남희신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며칠동안 찾았던 건 오래된 의술서였다.
옛날, 고강한 내력을 지녔던 고소 남씨의 의술사가 특수한 치료법을 고안해내었다. 의술서에 의하면 수십명의 사람이 모여서 각자 환자의 대혈 하나하나를 맡아 온 몸의 기운을 다루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한 사람의 몸 전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든 사람마저도 멀쩡한 상태로 돌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36명의 시술자 한 명 한 명이 금단 영맥, 혈맥에 정통한 고도의 수련자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현실성이 없는 이론서로만 남겨졌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이 술법을 사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 기술을 통해서 수십명의 영력을 하나로 모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희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나서도 위무선의 눈에는 불신감이 가득했다.
“36명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꿈이라도 꾸느냐는 듯 불손한 느낌마저 비쳤다.
남희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40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대방위마다 관리자가 있어야 하니까요.”
“이거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얘긴가요?”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모두의 영력의 크기를 비슷하게 맞춰야 합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남희신은 위무선의 불손할 정도로 불신적인 태도는 신경쓰지 않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4대 가문을 포함해 수진계에서 가장 영력이 강한 사람들을 모을 겁니다. 그렇지만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사안이니 되도록 소수에게만 알리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각 가문의 주인들과 깊은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설득하는 게 좋겠지요. 그러니 운몽에는 위공자, 당신이 가서 강종주를 설득하고 사람을 모아 주십시오. 저는 부정세로 가서 큰형님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광요는 물론 금종주를 만나러 갈 겁니다.”
남희신은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세워놓은 듯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택무군, 그건... 너무 많은 사람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겁니다. 저 혼자 해결할 수도 있는 걸...”
이 말에 위무선의 뒤에 선 남망기의 모습이 한곁 흉흉해지는 것을 금광요조차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남희신은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위공자가 음호부를 부수려는 방법도 위험 부담이 크긴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겠습니까? 수진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니, 온갖 명문의 가주들을 다 모아야 할 텐데요?”
“그건 편협한 생각입니다. 솔직히 저는 위공자가 음호부를 만든 게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덕분에 기산 온씨를 제압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음호부의 후처리에 손을 빌려주는 건 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진 의무입니다.”
남희신의 태도는 굳건하고 주장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영 마땅치가 않았다. 마치 금광요가 난장강 앞에서 자신을 설득할 때와 꼭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큰 일이 닥치면 항상 혼자 모든 짐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는다는 계획이 무척 거북했다. 어쩌면 위무선은 의외로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위무선이 쉽게 설득될 것 같지 않자 남희신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어투와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위공자.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지요. 당신은 대체 망기와 어떤 관계입니까?”
이것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누구도 하지 못하던 질문이었다. 하물며 남희신이 대놓고 묻자 위무선은 마치 기습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저희는...”
위무선이 말을 더듬자 별안간 곁에 있던 남망기가 채가듯이 대답했다.
“삼배를 나누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망기는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말에도 미묘한 분노가 어리어 있었다. 말을 하며 위무선을 쳐다보는 눈빛도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남희신의 표정은 미지근한 것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제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뒷짐을 지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위공자. 당신이 망기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예.”
남희신이 여상한 태도로 매우 무거운 철퇴를 집어든 것을 안 위무선은 벌써부터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까닥하면 굳은 결심이 무너지려는 순간인데도 두려운 대신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망기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다고 하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위공자,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강압적인 얘기로 상대를 내리누르면서도 남희신의 얼굴에는 시종 포근한 봄날같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
이윽고 위무선의 눈 앞에 손을 내민 남희신이 말했다.
“위영. 나머지 반 쪽의 음호부를 이리 다오.”
남희신과 금광요가 자리를 뜬 후에도 남망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위무선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꼼짝도 하지 않아서였다.
이제껏 위무선은 남망기가 화가 난 만큼 심통을 부렸는데 아마 지금은 더 짜증이 났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망기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그의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위무선에게 시선을 돌린 남망기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위무선은 책상다리를 하고 바위에 앉은 채 한쪽 손을 삐딱하게 뺨에 괴고 마치 사탕이라도 뺏긴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개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나와 한 줄기는 뺨을 타고 흐르며 손을 흠뻑 적셨고, 한 줄기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위무선이 울고 있는 것을 본 남망기는 극히 당황하는 바람에 며칠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위영?”
머뭇거리던 남망기가 위무선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도 위무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도 남망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눈물에 대해 난감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 입을 꼭 닫고 머리를 긁기도 하고, 두서없이 눈을 굴리며 쩔쩔매는 동안에도 눈물은 계속 넘쳐흘러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위영, 화났어?”
위무선은 고개를 흔들며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간신히 남망기와 시선을 맞추고는, 오랜만에 따스한 느낌이 그의 눈에 돌아와 있는 것을 보자 또다시 눈물이 왁 쏟아졌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더니 목소리도 마치 눈물에 젖은 것처럼 낮고 쉰 소리로 흘러나왔다.
“남잠, 나 기분이 무척 이상해. 가슴도 아프고.”
언제나 장난기 가득하던 눈이 약화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처음 당한 남망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독하게 빠져들었던 음울한 고민도 이 순간만은 잊혀졌고 가슴이 시큰해지며 연민의 감정이 솟았다.
“...형장께 화난 거지?”
“아니라니까.”
지금껏 살아오며 위무선은 울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래서 울 때 사람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릴 줄을 몰랐다. 눈물은 제멋대로 떨어졌고, 스며드는 감정과 추억도 멋대로였다. 위무선은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이 마음껏 날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동안 남망기는 손수건을 꺼내 위무선의 얼굴을 닦아주고 어색하게 머리나 뺨을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남망기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가슴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뒀던 무언가가 조금씩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위무선이 어렸을 적 작고 귀여운 손을 잡고 이끌어 주던 이들의 손길, 그리고 그들을 놓쳐버린 후 같은 상냥함을 가지고 내밀어지던 강풍면의 손길이 아련하게 겹치는 듯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스스로가 작고 무력하게 느껴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섭거나 슬프지는 않은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위무선은 남망기가 부드럽게 이끄는대로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로 하얀 옷자락을 적셨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다음 날 위무선은 아침을 먹자마자 남희신을 찾았다. 그러나 운심부지처를 다 뒤져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금광요도 마찬가지였다.
“금서실에 계실 거야.”
남망기가 말했다.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 비밀스러운 고서실이 있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지만 위치는 알지 못했다.
“형장께 맡겨두면 돼. 넌 수련이나 해.”
남망기는 뒤숭숭해하는 위무선을 협실로 끌고 갔다.
남망기가 (더욱)말을 아끼고, 위무선이 짜증을 참는 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위무선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음호부의 일만 정리되면 다 해결될 거라 믿고 참았다. 그런데 그 음호부의 처리가 쉽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남망기의 짐작대로, 남희신과 금광요는 금서실에 있었다.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고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대략 어떤 위치에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금광요의 손을 빌려 수백권의 책을 뒤져야 했다.
며칠이 걸려 원하던 책을 찾은 남희신은 여러 번 꼼꼼하게 읽어 본 다음 생각에 잠겼다.
그가 책을 덮은 후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금광요가 살며시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다.
“형님, 답을 찾으셨나요?”
“...그래.”
“말씀하신대로... 영력으로 파괴하는 게 가능한가요?”
“음. 그런데 사람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금광요가 엷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 사람을 모으는 것은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사람을 모으면 되지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남희신은 고개를 저었다.
난릉 금씨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색이 짙어 분란을 일으켜 왔고, 반대로 고소 남씨는 한 명 한 명이 심하게 독립적인 편이었다. 아마 그런 차이가 남희신을 저어하게 만드는 모양이라고 금광요는 추측했다.
“형님, 이제 사대가문에 야심가는 없습니다.”
그것은 금광선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금광요의 한 마디에 속을 읽힌 것을 안 남희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금서실을 나온 남희신과 금광요는 산책을 하는 것처럼 거닐며 위무선을 찾았다.
경내를 한 바퀴 다 돌고 아랫거처로 내려가는 길에 이르렀을 때 어느 소년이 산문 근처의 개울가에서 그를 봤다고 알려 주었다.
가까워지기 전에 보니 남망기는 곧게 서 있고 위무선은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뜻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위무선이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서먹해 보였는데 여태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희신과 금광요가 다가오는 것을 본 위무선이 벌떡 일어났다.
한가하게 놀고 있을 성격이 아닌 남망기가 하릴없이 서성거리는 것을 보아도 남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남망기는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 불안, 초조, 분노. 나쁜 기분은 모조리 그에게 엉겨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음호부를 파괴하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저토록 근심하는 이유가 뭔지 남희신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택무군.”
한편으로는 남희신을 대하는 위무선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윽고 남희신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며칠동안 찾았던 건 오래된 의술서였다.
옛날, 고강한 내력을 지녔던 고소 남씨의 의술사가 특수한 치료법을 고안해내었다. 의술서에 의하면 수십명의 사람이 모여서 각자 환자의 대혈 하나하나를 맡아 온 몸의 기운을 다루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한 사람의 몸 전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든 사람마저도 멀쩡한 상태로 돌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36명의 시술자 한 명 한 명이 금단 영맥, 혈맥에 정통한 고도의 수련자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현실성이 없는 이론서로만 남겨졌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이 술법을 사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 기술을 통해서 수십명의 영력을 하나로 모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희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나서도 위무선의 눈에는 불신감이 가득했다.
“36명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꿈이라도 꾸느냐는 듯 불손한 느낌마저 비쳤다.
남희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40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대방위마다 관리자가 있어야 하니까요.”
“이거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얘긴가요?”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모두의 영력의 크기를 비슷하게 맞춰야 합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남희신은 위무선의 불손할 정도로 불신적인 태도는 신경쓰지 않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4대 가문을 포함해 수진계에서 가장 영력이 강한 사람들을 모을 겁니다. 그렇지만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사안이니 되도록 소수에게만 알리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각 가문의 주인들과 깊은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설득하는 게 좋겠지요. 그러니 운몽에는 위공자, 당신이 가서 강종주를 설득하고 사람을 모아 주십시오. 저는 부정세로 가서 큰형님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광요는 물론 금종주를 만나러 갈 겁니다.”
남희신은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세워놓은 듯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택무군, 그건... 너무 많은 사람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겁니다. 저 혼자 해결할 수도 있는 걸...”
이 말에 위무선의 뒤에 선 남망기의 모습이 한곁 흉흉해지는 것을 금광요조차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남희신은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위공자가 음호부를 부수려는 방법도 위험 부담이 크긴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겠습니까? 수진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니, 온갖 명문의 가주들을 다 모아야 할 텐데요?”
“그건 편협한 생각입니다. 솔직히 저는 위공자가 음호부를 만든 게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덕분에 기산 온씨를 제압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음호부의 후처리에 손을 빌려주는 건 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진 의무입니다.”
남희신의 태도는 굳건하고 주장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영 마땅치가 않았다. 마치 금광요가 난장강 앞에서 자신을 설득할 때와 꼭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큰 일이 닥치면 항상 혼자 모든 짐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는다는 계획이 무척 거북했다. 어쩌면 위무선은 의외로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위무선이 쉽게 설득될 것 같지 않자 남희신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어투와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위공자.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지요. 당신은 대체 망기와 어떤 관계입니까?”
이것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누구도 하지 못하던 질문이었다. 하물며 남희신이 대놓고 묻자 위무선은 마치 기습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저희는...”
위무선이 말을 더듬자 별안간 곁에 있던 남망기가 채가듯이 대답했다.
“삼배를 나누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망기는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말에도 미묘한 분노가 어리어 있었다. 말을 하며 위무선을 쳐다보는 눈빛도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남희신의 표정은 미지근한 것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제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뒷짐을 지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위공자. 당신이 망기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예.”
남희신이 여상한 태도로 매우 무거운 철퇴를 집어든 것을 안 위무선은 벌써부터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까닥하면 굳은 결심이 무너지려는 순간인데도 두려운 대신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망기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다고 하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위공자,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강압적인 얘기로 상대를 내리누르면서도 남희신의 얼굴에는 시종 포근한 봄날같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
이윽고 위무선의 눈 앞에 손을 내민 남희신이 말했다.
“위영. 나머지 반 쪽의 음호부를 이리 다오.”
남희신과 금광요가 자리를 뜬 후에도 남망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위무선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꼼짝도 하지 않아서였다.
이제껏 위무선은 남망기가 화가 난 만큼 심통을 부렸는데 아마 지금은 더 짜증이 났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망기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그의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위무선에게 시선을 돌린 남망기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위무선은 책상다리를 하고 바위에 앉은 채 한쪽 손을 삐딱하게 뺨에 괴고 마치 사탕이라도 뺏긴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개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나와 한 줄기는 뺨을 타고 흐르며 손을 흠뻑 적셨고, 한 줄기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위무선이 울고 있는 것을 본 남망기는 극히 당황하는 바람에 며칠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위영?”
머뭇거리던 남망기가 위무선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도 위무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도 남망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눈물에 대해 난감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 입을 꼭 닫고 머리를 긁기도 하고, 두서없이 눈을 굴리며 쩔쩔매는 동안에도 눈물은 계속 넘쳐흘러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위영, 화났어?”
위무선은 고개를 흔들며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간신히 남망기와 시선을 맞추고는, 오랜만에 따스한 느낌이 그의 눈에 돌아와 있는 것을 보자 또다시 눈물이 왁 쏟아졌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더니 목소리도 마치 눈물에 젖은 것처럼 낮고 쉰 소리로 흘러나왔다.
“남잠, 나 기분이 무척 이상해. 가슴도 아프고.”
언제나 장난기 가득하던 눈이 약화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을 처음 당한 남망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독하게 빠져들었던 음울한 고민도 이 순간만은 잊혀졌고 가슴이 시큰해지며 연민의 감정이 솟았다.
“...형장께 화난 거지?”
“아니라니까.”
지금껏 살아오며 위무선은 울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래서 울 때 사람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릴 줄을 몰랐다. 눈물은 제멋대로 떨어졌고, 스며드는 감정과 추억도 멋대로였다. 위무선은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이 마음껏 날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동안 남망기는 손수건을 꺼내 위무선의 얼굴을 닦아주고 어색하게 머리나 뺨을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남망기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가슴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뒀던 무언가가 조금씩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위무선이 어렸을 적 작고 귀여운 손을 잡고 이끌어 주던 이들의 손길, 그리고 그들을 놓쳐버린 후 같은 상냥함을 가지고 내밀어지던 강풍면의 손길이 아련하게 겹치는 듯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스스로가 작고 무력하게 느껴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섭거나 슬프지는 않은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위무선은 남망기가 부드럽게 이끄는대로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로 하얀 옷자락을 적셨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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