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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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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감시탑을 건설하는 일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고소, 난릉, 운몽, 청하의 4개 지역 내에서는 그나마 순조로운 편이지만 기산이 문제였다. 과거 4대 가문이 명목적으로 기산 지역을 조각을 내어 관리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애착이 적고 상대적으로 관리의 손길을 뻗기 힘드니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기산 지역의 세가들은 겉으로는 굽신거렸지만 수입과 지원 장부를 속이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금광요가 직접 사찰을 나가는 일도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금광요는 고소 남씨의 수사들과 난릉 금씨 수사들을 직접 부렸는데 그 또한 마땅치 않았다. 남씨 수사들은 믿음직하지만 교활한 가주들에게 속기 쉬웠고, 금씨 수사들은 교활해서 속지는 않지만 쓸데없이 오만하거나 으름장을 놓아서 물의를 빚곤 했다. 그러니 가능하면 운심부지처나 금린대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해결하고 싶어도 마음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수없는 문제에 부딪힐 것을 예상했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내부에서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제 금가 뿐 아니라 4대 지역의 세가들을 비롯해 선독인 남희신의 존재까지 등에 업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가니, 얕은 수작질 정도는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만한 장애도 즐기지 못한다면 이런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희신이 선독이 된 지 약 1년이 흐른 후 600여개의 감시탑이 완공되었고 근지의 수선 가문의 수사들이 배치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시름 놓을 틈은 생기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감시탑을 세우지 못한 지역이 많이 있었고, 또한 평정된 지역에 새로운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본래의 땅을 잃고 떠돌던 난민들은 이제 적응하기 시작한 지역에서 다시 옮기기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기름진 땅을 노리고 난민이 아닌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동안 금광요는 고소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지만 1년이 흐르고 보아도 당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처럼 큰 일을 온전히 제 손으로 지배하는 것이 무척 보람되고 재미있긴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운심부지처를 비우면 남희신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이 선독이 되고, 그래서 금광요에게 감시탑 일이 떨어진 것이 그 자신이 의도한 일이란 건 진작에 눈치챘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아니, 그래서 미안했다.
금광요는 어디선가 한 가지라도 기분 좋은 일을 겪으면 그것이 모조리 남희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금광요가 외부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때마다 남희신은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심부지처의 산문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막 외부 손님들이 떠나가는 중이었다. 금번에는 사정이 여의치 못해 선독이 주최한 청담성회도 놓치고 말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
길을 오르며 금광요가 미안한 듯 말했다. 그는 예전에 비하면 한겹 벗은 듯 당당한 위엄을 풍기게 되었지만 남희신의 앞에서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커서도 부모에게는 어리광을 부리듯, 금광요는 사람이 달라진 후에도 남희신에게는 과하게 조심하고 눈치를 살피던 옛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남희신은 말없이 애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함께 한 세월이 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또 쪼개지고 쪼개어져 지금은 매일 만날 수도 없으니 그리운 마음이 깊어졌다.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금광요는 원림터에 들러 서신을 거두었다. 이미 정해진 시간에 관리자가 훑어갔는데도 그 사이 열 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수백마리의 전서조가 필요한데 맹금류를 그처럼 많이 관리하긴 어렵기 때문에 원림터의 전서조는 대부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그렇게 많은 새들이 꾹꾹거리고 퍼덕거리고 하니 무척 소란스러웠다. 남희신은 초반에 전서구를 너무 많이 들인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금광요가 하는 일은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가도 나중에 가서 납득이 될 때가 많았다.
저녁상을 물린 뒤 차를 한 잔 마신 금광요는 잠시 노곤함에 젖었다가 새로 온 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몸이 피로하니 운심부지처의 밥이 기력을 보충시켜준다는 사실이 한층 부각되게 느껴졌다.
남희신은 금광요의 찻잔에 차를 한 번 더 따라준 후 뒤로 물러나 앉았다. 벌써 일에 정신이 팔린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붉은 단사 아래 살짝 눈을 내리깔고 문서에 골몰한 얼굴에는 딱딱한 일에 대한 관심뿐이었으나 남희신의 눈에는 이래도 저래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붉은 입술이 근심스럽게 다물어지며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본 남희신이 물었다.
“뭔가 잘못되었느냐?”
그 말에 선뜻 정신을 차린 금광요는 여태 남희신이 쳐다보고 있던 걸 깨닫고 무안해졌다. 그가 곧장 사죄하듯 차를 받쳐 올린 뒤에 말했다.
“형님, 효성진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음. 포산산인의 제자로, 하산하자마자 난릉의 위렵 대회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아니냐.”
“예. 그 사람이 문파를 세운 사실도 아십니까?”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장이 장문인이지만 문하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고 들었다.”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문파의 이름은 경산인데... 이번에 용연 지역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군요.”
“기산의 용연 말이냐? 거긴...”
“예. 늪지에 오래 묵은 수괴가 있고 요수가 많아서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수괴를 몰아내어서 늪지를 말려버렸다고 하는군요. 그러고 났더니 기후가 완전히 달라진 모양입니다. 지금 용연 지역에는 상당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중이랍니다.”
보통 야렵이라고 하면 사람이 이미 살고 있는 지역에 침범한 귀괴를 퇴치하는 것이지, 지형이 험하거나 오랜 터줏대감이 있는 지역을 정화하는 일은 드물다. 경산파는 앞으로 한 곳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용연 지역을 정화한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사람이 살았던 적도 없는 묵은 지역의 수괴를 퇴치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실력이 범상치 않은가보구나. 역시 포산산인의 제자답군.”
남희신은 자연히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들어, 효성진이 하산했던 포산산인의 다른 두 제자처럼 끝이 나쁘지 않기를 비는 마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그런 온화한 생각을 할 겨를도, 감정도 없었다.
“형님. 말릉 소씨가 경산파 아래로 들어간 일도 들으셨습니까.”
그 말에는 남희신도 조금 안색을 달리했다. 그래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문인의 인품이 훌륭한가보지. 소종주 그가 애써 세운 가문까지 버렸다면...”
금광요는 남희신을 따라서 쓴웃음을 지었다. 남희신처럼 자애로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여러 차례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고소 남씨를 나간 소섭을 ‘소종주’라고 불러 주는 그의 인품이 감탄스러워서였다.
“제가 한 번 가봐야 하겠습니다.”
“용연에 말이냐?”
“효성진 도장이 무척 인기가 좋은 모양이더군요. 근지의 사람들은 설선이라고 부르면서 굉장히 따른다고 합니다. ...기산에서 말이지요.”
금광요의 우려를 짐작한 남희신이 말했다.
“기산은 아무래도 4대 가문에서 쪼개어 관리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훌륭한 장문인이 이끄는, 기틀이 제대로 선 문파라면 책임을 지게 해도 좋겠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려던 금광요는 바로 낯빛을 고치고 긍정하는 듯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금광요는 과거에 효성진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스쳐지나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신뢰감이 솟을 정도로 기품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뿐이었다면 금광요도 걱정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뜻밖에도 설양이 그와 함께 있다는 소문이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그 사실까지는 모를 거라 생각해,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적당히 대화를 끊으려고 했다. 남희신이 저와 마찬가지로 운심부지처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섭렵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기주의 설양이 경산파에 있다고?”
불현듯 남희신이 덧붙이자 금광요는 살짝 기습을 당한 느낌이었다.
“...예.”
“아요. 네가 걱정하는 게 설양의 일이지?”
금광요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양이 악명을 떨쳤다만, 요즘은 아무 소문도 듣지 못했다. 그가 효성진 도장의 수하로 들어갔다면 개과천선을 한 것이 아닐까?”
철저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금광요지만 남희신의 이 말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설양이 개과천선을 해???
그러나 금광요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한때 설양에게 느꼈던 묘한 동질감을 상기하면, 남희신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제가 한 번 방문해 보아야겠습니다. 만약 경산파의 세력이 더 커질 것 같으면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금광요는 남희신이 설양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외려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남희신이 금광요만큼 설양을 잘 알았다면, 금광요를 용연으로 보내는 마음이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금광요는 낯선 곳, 특히 기산으로 갈 때에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이번 용연행에도 그는 강하고 경험 있는 고소 남씨의 수사들을 여럿 대동했다.
용연 기슭에 기반을 둔 마을에 도착한 뒤, 그는 공중에서 멈추어 잠시 내려다보았다.
근방의 대도시나 다른 마을로부터 뻗어오는 길 위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용연 마을은 아직 크고 번듯한 건물도 몇 채 없었으나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길도 제대로 닦지 못해서 먼지가 풀풀 일고 질서라곤 없어 보였지만 이만한 인구가 몰린다면 번듯한 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이윽고 수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금광요는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가장 큰 객잔에 들었다.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기품있어 보이는 수사들의 무리가 들어서자 얼른 다가온 여주인이 아양을 떨었다.
금광요는 낯선 지역에 들면 반드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청하고 주변을 살피곤 했다. 이번에도 주인에게 일러 넓은 병풍 뒤의 안락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다곤 해도 용연에 도착하자마자 설양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목소리는 병풍 너머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금광요가 설양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도 말투나 목소리가 독특하여 변성기를 지난 후에도 알아볼 정도였다.
마침 차와 음식이 나오자 금광요는 둘러앉은 수사들에게 상냥하게 권하며 귀를 기울였다.
설양은 계속해서 뭐라고 지껄여고 있었는데 말끝마다 비꼬아대는 투가 전과 하나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무뢰배같은 말투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온화하게 답을 했다.
“그러니까 일단 만나보겠다는 게 아닌가.”
금광요는 대뜸 그가 효성진 도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찻잔을 입술에 대며 더욱 예민하게 귀를 세웠다.
곧 설양이 효성진의 말을 찍어 누르듯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만나서 뭘 하려고? 그런 놈들은 도장님, 너 같은 선인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도 못 알아들어. 놈들이 알아듣는 말은 딱 하나지. ‘나보다 약하면 꺼져라’라는 거야. 그러니 이 일은 그냥 나한테 맡겨 둬. 알았지?”
이어서 효성진이 뭐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양이 하는 말은 내내 또렷하게 들려왔다.
“진짜 골아픈 게 뭔지 알아? 그 놈들이 너를 보고 홀딱 반해서, 경산파에 들어오게 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거야. 그러니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땐 얌전히 들어가 있고 모습을 보이지 말아. 문파에 그딴 놈들이 더 늘었다간 내가 골이 아프니까.”
이어서 효성진이 못말리겠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금광요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 곳에 오기 전, 금광요는 설양이 분명 효성진을 이용해서 무슨 공작을 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할 텐데 설양은 전혀 자신을 숨기는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거리낌없이 욕까지 퍼부어가며 함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려 효성진 도장이 생각과 다른 인물이란 말인가?
금광요는 설양과 효성진이 객잔을 나간 후 느긋하게 식사까지 한 다음에 일어났다.
일행은 어수선한 산길을 한참동안 걸어올라갔다. 주변은 나무가 울창했고 다소 습기가 있어 바닥이 무르게 느껴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두 개의 나무 기둥이 나타나자 문지기 두 사람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지기들은 금광요와 수사들의 행색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예의를 갖춰서 대했다. 금광요 역시 예의바르게 공수하며 신분을 밝혔다.
“우리는 고소의 선독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귀파의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만한 귀빈을 맞이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금광요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이르면서도, 그래도 될 것인가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온유한 태도로 따지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급하게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금광요는 미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염방존!”
“소종주.”
반가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소섭에게 금광요도 마주 인사했다.
“이제는 종주가 아닙니다.”
소섭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들었습니다. 경산파의 대사형이시라고.”
두 사람은 앞장서서 걸어올라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젠가 중앙에서 사람이 올 줄은 알았습니다만, 염방존께서 오실 줄은 몰랐군요. 미리 알았다면 실례가 되지 않도록 준비했을 텐데...”
금광요가 길을 오르며 둘러보니 바위나 초목이 제법 정돈이 되어 있고 멀리 몇 채의 단아한 건물 지붕이 나무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참 아늑해 보입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터라 미흡합니다.”
소섭은 4대 가문의 대표로 염방존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안절부절 못했다.
“염방존, 소식에 밝으신 분이니 설양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예. 소대협께서 미리 귀띔해주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소섭이 한숨을 쉬었다. 과연 그는 효성진의 인품에 끌려서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경산파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설양은 불안하게 걸려 있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소섭은 어째서 효성진이 설양을 동생이나 둘도 없는 지기라도 되는 듯이 데리고 있으면서 난폭한 언동도 묵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소섭뿐만 아니라 경산파 내부와 일대의 모든 사람들의 의문거리였다.
경산파에서 설양은 아무 지위도 없는 장문인의 조언자 같은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효성진이 만든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았지만 문하생들은 작은 규칙만 어겨도 가만 두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데 장문인인 효성진에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했지만, 효성진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설양이 함부로 구는 것은 태도의 문제일 뿐, 정말로 인의를 벗어나는 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경산파에 합류한 소섭 같은 이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 일을 두고 주변에서는 설양이 효성진에게 약점을 잡혔느니, 사실은 두 사람이 도려를 맺었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두 사람이 워낙 친밀해 보여 약점을 잡혔다는 설은 갈수록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설양의 존재 때문에 경산파에 대한 평판도 엇갈렸다. 효성진은 야렵을 의뢰한 상대가 곤궁하다 싶으면 보수도 받지 않았다. 설양은 그 반대였다. 결국 한결같은 의문은 왜 저런 두 사람이 같이 있느냐는 얘기로 귀결되곤 했다.
소섭은 이 모든 일을 금광요에게 설명하려니 골치가 아팠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경산파의 사람이기 때문에 금광요가 경계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는 무척 어색하게 얼버무리게 되었다.
“설양이 성질은 거칩니다만, 이 곳으로 온 후에 무도한 일을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금광요는 소섭이 자기 파의 사람을 감싸려는 걸 눈치채고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몇 명의 수사들과 효성진, 설양이 금광요 일행을 맞이하러 나왔다.
불진을 팔에 얹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효성진은 몇 년 전 보았을 때와 별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었던 설양은 키가 훌쩍 컸고, 어렸을 때에는 너무 짙다 싶었던 눈썹이 이제는 골격이 뚜렷한 청년이 다 된 얼굴에 어울려 준수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 놓인 뻔뻔하고 교활한 눈이라던가, 한껏 비웃음을 띠며 치켜올라간 입술은 변함없이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염방존.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금광요는 효성진의 인사에 답례하며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말과 행동에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어 상냥한 말은 전부 진심이고, 극히 친절했다. 금광요는 그가 무척이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효성진이 남희신과 꼭 닮았으며 다만 어딘지 순진한 데가 있어 남희신만한 무게는 느껴지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광요에게 있어 효성진에 대한 평가는 남희신을 닮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연 주의는 설양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설양은 여전히 실실거리는 채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시늉만 했다.
“염방존.”
설양은 다년간 몸이 성장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검은 옷차림이었고, 손에도 익숙한 강재가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설양을 포함한 세 사람은 시원한 청당에 앉았다.
효성진과 금광요가 예의바르게 마주앉은 곁에 설양이 무례하게도 털썩 주저앉아서 팔꿈치를 괴자 효성진이 나무라듯 불렀다.
“설양.”
“진 형, 나한테 잔소리할 것 없어. 염방존은 내 오랜 친구니까.”
설양이 입꼬리를 올리자 금광요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효성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차를 권했다.
금광요는 뻔하고 지루한 얘기로 겉돌면서 시간을 낭비한 뒤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산 일대에도 곤궁한 지역이 있으니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시탑을 세우는게 좋을 것이며, 모두와 같은 양식을 지켜 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결같이 예의를 잃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전했다.
“이 지방의 일은 우리 경산파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어. 곤궁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서 도와 주지. 그런데 왜 그쪽 방식을 따라야 하지?”
아니나다를까 설양이 고깝다는 듯 지껄이는데, 금광요는 효성진이 어찌 나올지 궁금했다.
“내 보기엔 좋은 계획 같은데, 뭐가 나쁘다는 겐가?”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게 나쁘다는 거야. 염방존, 여긴 엄밀히 말해서 기산도 아니야. 여긴 사람이 살지도 못하던 곳이었어. 그걸 갈아엎어서 명당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대뜸 달려들어서는...”
“설양!”
효성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라고는, 금광요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아이는 말이 험한 편이니 염방존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니니까요.”
금광요는 겉으로 웃으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속을 잘 간파한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코 앞에서 관찰해 보아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영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설양이 독설을 하든 말든 금광요는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기산의 세력권 이야기를 흘려도 효성진은 숨은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고, 아예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정말로 순진하고 청렴한 사람이군.’
설양이 저렇게 옆에서 쌍심지를 켜고 독설이라도 퍼붓지 않으면 이 장문인은 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설양이... 장문인에게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건가?’
이까지 와서 직접 설양을 만나 봐도, 그가 개과천선을 한다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사실 설양의 속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금광요는 이런 일을 하며 온 수선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본인의 인격이 달라진 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은 일을 하는 건 오로지 좋은 사람인 남희신과 함께 있으며 그를 따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까. 금광요의 입장에서는 설양의 속이 검든 하얗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마 설양은 진심으로 효성진을 돕고 있거나, 아니면 경산파를 키운 후 먹어버릴 흉계를 키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효성진이 아무리 순진하다 해도 설양의 과거나 사람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한참 말이 오가도 설양의 훼방으로 감시탑 문제는 귀결이 나지 않았다. 금광요는 온화하게 화제를 덮고 앞으로의 일은 다시 천천히 의논해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금린대에서 열릴 청담성회에 효성진을 초청했다.
이윽고 다시 수사들과 합류한 금광요는 며칠 천천히 쉬다 가라는 효성진의 권유를 마다하고 산문에서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그들이 한 식경쯤 걸어내려오자 불쑥 튀어나온 설양이 앞을 가로막았다.
설양이 그렇게 나오리라고 예상했던 금광요는 마을에 가서 기다리라고 수사들을 먼저 보냈다.
그런 다음에는 예의 따위는 싹 걷어치워버렸다.
“설양, 대체 무슨 꿍꿍이지?”
“너야말로. 감시탑을 설치해서 난릉 금씨로 하여금 수진계를 다 집어삼키게 하려는 거야? 아니면, 고소 남씨? 너 거기서 뭐하는 건데?”
“네가 믿든 말든 나는 만인이 평안하게 지내도록 노력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수상한 짓은 하지 마라.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야말로 잘 해. 금린대에서 우리 도장님을 제대로 대접하라고. 아니꼬운 녀석이 소섭에게 했던 것처럼 함부로 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정말 알고 싶어?”
설양이 강재를 떠멘 채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위협적으로 웃었다.
그러나 금광요는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너의 도장님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야.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드리지. 그렇지만 넌 금린대든 운심부지처든 얼씬도 않는 게 좋을 거다.”
“흥. 하지만 언젠가는 나까지도 받아들여야 할 걸.”
뼈가 있는 듯한 말에 금광요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설양도 지지 않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노려보았다.
까닥했다간 그 옛날의 친밀한 느낌이 되살아나기라도 할 것 같아, 먼저 시선을 피한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산을 내려갔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수백 개의 감시탑을 건설하는 일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고소, 난릉, 운몽, 청하의 4개 지역 내에서는 그나마 순조로운 편이지만 기산이 문제였다. 과거 4대 가문이 명목적으로 기산 지역을 조각을 내어 관리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애착이 적고 상대적으로 관리의 손길을 뻗기 힘드니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기산 지역의 세가들은 겉으로는 굽신거렸지만 수입과 지원 장부를 속이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금광요가 직접 사찰을 나가는 일도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금광요는 고소 남씨의 수사들과 난릉 금씨 수사들을 직접 부렸는데 그 또한 마땅치 않았다. 남씨 수사들은 믿음직하지만 교활한 가주들에게 속기 쉬웠고, 금씨 수사들은 교활해서 속지는 않지만 쓸데없이 오만하거나 으름장을 놓아서 물의를 빚곤 했다. 그러니 가능하면 운심부지처나 금린대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해결하고 싶어도 마음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수없는 문제에 부딪힐 것을 예상했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내부에서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이제 금가 뿐 아니라 4대 지역의 세가들을 비롯해 선독인 남희신의 존재까지 등에 업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가니, 얕은 수작질 정도는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만한 장애도 즐기지 못한다면 이런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희신이 선독이 된 지 약 1년이 흐른 후 600여개의 감시탑이 완공되었고 근지의 수선 가문의 수사들이 배치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시름 놓을 틈은 생기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감시탑을 세우지 못한 지역이 많이 있었고, 또한 평정된 지역에 새로운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본래의 땅을 잃고 떠돌던 난민들은 이제 적응하기 시작한 지역에서 다시 옮기기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기름진 땅을 노리고 난민이 아닌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동안 금광요는 고소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지만 1년이 흐르고 보아도 당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처럼 큰 일을 온전히 제 손으로 지배하는 것이 무척 보람되고 재미있긴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운심부지처를 비우면 남희신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이 선독이 되고, 그래서 금광요에게 감시탑 일이 떨어진 것이 그 자신이 의도한 일이란 건 진작에 눈치챘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아니, 그래서 미안했다.
금광요는 어디선가 한 가지라도 기분 좋은 일을 겪으면 그것이 모조리 남희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금광요가 외부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때마다 남희신은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심부지처의 산문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막 외부 손님들이 떠나가는 중이었다. 금번에는 사정이 여의치 못해 선독이 주최한 청담성회도 놓치고 말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
길을 오르며 금광요가 미안한 듯 말했다. 그는 예전에 비하면 한겹 벗은 듯 당당한 위엄을 풍기게 되었지만 남희신의 앞에서만은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커서도 부모에게는 어리광을 부리듯, 금광요는 사람이 달라진 후에도 남희신에게는 과하게 조심하고 눈치를 살피던 옛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남희신은 말없이 애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금광요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함께 한 세월이 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또 쪼개지고 쪼개어져 지금은 매일 만날 수도 없으니 그리운 마음이 깊어졌다.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금광요는 원림터에 들러 서신을 거두었다. 이미 정해진 시간에 관리자가 훑어갔는데도 그 사이 열 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수백마리의 전서조가 필요한데 맹금류를 그처럼 많이 관리하긴 어렵기 때문에 원림터의 전서조는 대부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그렇게 많은 새들이 꾹꾹거리고 퍼덕거리고 하니 무척 소란스러웠다. 남희신은 초반에 전서구를 너무 많이 들인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금광요가 하는 일은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가도 나중에 가서 납득이 될 때가 많았다.
저녁상을 물린 뒤 차를 한 잔 마신 금광요는 잠시 노곤함에 젖었다가 새로 온 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몸이 피로하니 운심부지처의 밥이 기력을 보충시켜준다는 사실이 한층 부각되게 느껴졌다.
남희신은 금광요의 찻잔에 차를 한 번 더 따라준 후 뒤로 물러나 앉았다. 벌써 일에 정신이 팔린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붉은 단사 아래 살짝 눈을 내리깔고 문서에 골몰한 얼굴에는 딱딱한 일에 대한 관심뿐이었으나 남희신의 눈에는 이래도 저래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붉은 입술이 근심스럽게 다물어지며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본 남희신이 물었다.
“뭔가 잘못되었느냐?”
그 말에 선뜻 정신을 차린 금광요는 여태 남희신이 쳐다보고 있던 걸 깨닫고 무안해졌다. 그가 곧장 사죄하듯 차를 받쳐 올린 뒤에 말했다.
“형님, 효성진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음. 포산산인의 제자로, 하산하자마자 난릉의 위렵 대회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아니냐.”
“예. 그 사람이 문파를 세운 사실도 아십니까?”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장이 장문인이지만 문하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별로 까다롭지 않다고 들었다.”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문파의 이름은 경산인데... 이번에 용연 지역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군요.”
“기산의 용연 말이냐? 거긴...”
“예. 늪지에 오래 묵은 수괴가 있고 요수가 많아서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수괴를 몰아내어서 늪지를 말려버렸다고 하는군요. 그러고 났더니 기후가 완전히 달라진 모양입니다. 지금 용연 지역에는 상당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중이랍니다.”
보통 야렵이라고 하면 사람이 이미 살고 있는 지역에 침범한 귀괴를 퇴치하는 것이지, 지형이 험하거나 오랜 터줏대감이 있는 지역을 정화하는 일은 드물다. 경산파는 앞으로 한 곳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용연 지역을 정화한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사람이 살았던 적도 없는 묵은 지역의 수괴를 퇴치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실력이 범상치 않은가보구나. 역시 포산산인의 제자답군.”
남희신은 자연히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들어, 효성진이 하산했던 포산산인의 다른 두 제자처럼 끝이 나쁘지 않기를 비는 마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그런 온화한 생각을 할 겨를도, 감정도 없었다.
“형님. 말릉 소씨가 경산파 아래로 들어간 일도 들으셨습니까.”
그 말에는 남희신도 조금 안색을 달리했다. 그래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문인의 인품이 훌륭한가보지. 소종주 그가 애써 세운 가문까지 버렸다면...”
금광요는 남희신을 따라서 쓴웃음을 지었다. 남희신처럼 자애로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여러 차례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고소 남씨를 나간 소섭을 ‘소종주’라고 불러 주는 그의 인품이 감탄스러워서였다.
“제가 한 번 가봐야 하겠습니다.”
“용연에 말이냐?”
“효성진 도장이 무척 인기가 좋은 모양이더군요. 근지의 사람들은 설선이라고 부르면서 굉장히 따른다고 합니다. ...기산에서 말이지요.”
금광요의 우려를 짐작한 남희신이 말했다.
“기산은 아무래도 4대 가문에서 쪼개어 관리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훌륭한 장문인이 이끄는, 기틀이 제대로 선 문파라면 책임을 지게 해도 좋겠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려던 금광요는 바로 낯빛을 고치고 긍정하는 듯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금광요는 과거에 효성진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스쳐지나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신뢰감이 솟을 정도로 기품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뿐이었다면 금광요도 걱정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뜻밖에도 설양이 그와 함께 있다는 소문이었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그 사실까지는 모를 거라 생각해,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적당히 대화를 끊으려고 했다. 남희신이 저와 마찬가지로 운심부지처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섭렵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기주의 설양이 경산파에 있다고?”
불현듯 남희신이 덧붙이자 금광요는 살짝 기습을 당한 느낌이었다.
“...예.”
“아요. 네가 걱정하는 게 설양의 일이지?”
금광요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양이 악명을 떨쳤다만, 요즘은 아무 소문도 듣지 못했다. 그가 효성진 도장의 수하로 들어갔다면 개과천선을 한 것이 아닐까?”
철저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금광요지만 남희신의 이 말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설양이 개과천선을 해???
그러나 금광요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한때 설양에게 느꼈던 묘한 동질감을 상기하면, 남희신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제가 한 번 방문해 보아야겠습니다. 만약 경산파의 세력이 더 커질 것 같으면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금광요는 남희신이 설양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외려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남희신이 금광요만큼 설양을 잘 알았다면, 금광요를 용연으로 보내는 마음이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금광요는 낯선 곳, 특히 기산으로 갈 때에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이번 용연행에도 그는 강하고 경험 있는 고소 남씨의 수사들을 여럿 대동했다.
용연 기슭에 기반을 둔 마을에 도착한 뒤, 그는 공중에서 멈추어 잠시 내려다보았다.
근방의 대도시나 다른 마을로부터 뻗어오는 길 위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용연 마을은 아직 크고 번듯한 건물도 몇 채 없었으나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길도 제대로 닦지 못해서 먼지가 풀풀 일고 질서라곤 없어 보였지만 이만한 인구가 몰린다면 번듯한 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이윽고 수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금광요는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가장 큰 객잔에 들었다.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기품있어 보이는 수사들의 무리가 들어서자 얼른 다가온 여주인이 아양을 떨었다.
금광요는 낯선 지역에 들면 반드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청하고 주변을 살피곤 했다. 이번에도 주인에게 일러 넓은 병풍 뒤의 안락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다곤 해도 용연에 도착하자마자 설양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목소리는 병풍 너머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금광요가 설양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도 말투나 목소리가 독특하여 변성기를 지난 후에도 알아볼 정도였다.
마침 차와 음식이 나오자 금광요는 둘러앉은 수사들에게 상냥하게 권하며 귀를 기울였다.
설양은 계속해서 뭐라고 지껄여고 있었는데 말끝마다 비꼬아대는 투가 전과 하나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무뢰배같은 말투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온화하게 답을 했다.
“그러니까 일단 만나보겠다는 게 아닌가.”
금광요는 대뜸 그가 효성진 도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찻잔을 입술에 대며 더욱 예민하게 귀를 세웠다.
곧 설양이 효성진의 말을 찍어 누르듯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만나서 뭘 하려고? 그런 놈들은 도장님, 너 같은 선인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도 못 알아들어. 놈들이 알아듣는 말은 딱 하나지. ‘나보다 약하면 꺼져라’라는 거야. 그러니 이 일은 그냥 나한테 맡겨 둬. 알았지?”
이어서 효성진이 뭐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양이 하는 말은 내내 또렷하게 들려왔다.
“진짜 골아픈 게 뭔지 알아? 그 놈들이 너를 보고 홀딱 반해서, 경산파에 들어오게 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거야. 그러니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땐 얌전히 들어가 있고 모습을 보이지 말아. 문파에 그딴 놈들이 더 늘었다간 내가 골이 아프니까.”
이어서 효성진이 못말리겠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금광요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 곳에 오기 전, 금광요는 설양이 분명 효성진을 이용해서 무슨 공작을 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할 텐데 설양은 전혀 자신을 숨기는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거리낌없이 욕까지 퍼부어가며 함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려 효성진 도장이 생각과 다른 인물이란 말인가?
금광요는 설양과 효성진이 객잔을 나간 후 느긋하게 식사까지 한 다음에 일어났다.
일행은 어수선한 산길을 한참동안 걸어올라갔다. 주변은 나무가 울창했고 다소 습기가 있어 바닥이 무르게 느껴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두 개의 나무 기둥이 나타나자 문지기 두 사람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지기들은 금광요와 수사들의 행색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예의를 갖춰서 대했다. 금광요 역시 예의바르게 공수하며 신분을 밝혔다.
“우리는 고소의 선독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귀파의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만한 귀빈을 맞이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금광요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이르면서도, 그래도 될 것인가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금광요는 온유한 태도로 따지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급하게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금광요는 미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염방존!”
“소종주.”
반가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소섭에게 금광요도 마주 인사했다.
“이제는 종주가 아닙니다.”
소섭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들었습니다. 경산파의 대사형이시라고.”
두 사람은 앞장서서 걸어올라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젠가 중앙에서 사람이 올 줄은 알았습니다만, 염방존께서 오실 줄은 몰랐군요. 미리 알았다면 실례가 되지 않도록 준비했을 텐데...”
금광요가 길을 오르며 둘러보니 바위나 초목이 제법 정돈이 되어 있고 멀리 몇 채의 단아한 건물 지붕이 나무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참 아늑해 보입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터라 미흡합니다.”
소섭은 4대 가문의 대표로 염방존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안절부절 못했다.
“염방존, 소식에 밝으신 분이니 설양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예. 소대협께서 미리 귀띔해주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소섭이 한숨을 쉬었다. 과연 그는 효성진의 인품에 끌려서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경산파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설양은 불안하게 걸려 있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소섭은 어째서 효성진이 설양을 동생이나 둘도 없는 지기라도 되는 듯이 데리고 있으면서 난폭한 언동도 묵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소섭뿐만 아니라 경산파 내부와 일대의 모든 사람들의 의문거리였다.
경산파에서 설양은 아무 지위도 없는 장문인의 조언자 같은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효성진이 만든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았지만 문하생들은 작은 규칙만 어겨도 가만 두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데 장문인인 효성진에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했지만, 효성진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설양이 함부로 구는 것은 태도의 문제일 뿐, 정말로 인의를 벗어나는 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경산파에 합류한 소섭 같은 이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 일을 두고 주변에서는 설양이 효성진에게 약점을 잡혔느니, 사실은 두 사람이 도려를 맺었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두 사람이 워낙 친밀해 보여 약점을 잡혔다는 설은 갈수록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설양의 존재 때문에 경산파에 대한 평판도 엇갈렸다. 효성진은 야렵을 의뢰한 상대가 곤궁하다 싶으면 보수도 받지 않았다. 설양은 그 반대였다. 결국 한결같은 의문은 왜 저런 두 사람이 같이 있느냐는 얘기로 귀결되곤 했다.
소섭은 이 모든 일을 금광요에게 설명하려니 골치가 아팠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경산파의 사람이기 때문에 금광요가 경계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는 무척 어색하게 얼버무리게 되었다.
“설양이 성질은 거칩니다만, 이 곳으로 온 후에 무도한 일을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금광요는 소섭이 자기 파의 사람을 감싸려는 걸 눈치채고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몇 명의 수사들과 효성진, 설양이 금광요 일행을 맞이하러 나왔다.
불진을 팔에 얹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효성진은 몇 년 전 보았을 때와 별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었던 설양은 키가 훌쩍 컸고, 어렸을 때에는 너무 짙다 싶었던 눈썹이 이제는 골격이 뚜렷한 청년이 다 된 얼굴에 어울려 준수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 놓인 뻔뻔하고 교활한 눈이라던가, 한껏 비웃음을 띠며 치켜올라간 입술은 변함없이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염방존.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금광요는 효성진의 인사에 답례하며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말과 행동에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어 상냥한 말은 전부 진심이고, 극히 친절했다. 금광요는 그가 무척이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효성진이 남희신과 꼭 닮았으며 다만 어딘지 순진한 데가 있어 남희신만한 무게는 느껴지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광요에게 있어 효성진에 대한 평가는 남희신을 닮았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연 주의는 설양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설양은 여전히 실실거리는 채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시늉만 했다.
“염방존.”
설양은 다년간 몸이 성장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검은 옷차림이었고, 손에도 익숙한 강재가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설양을 포함한 세 사람은 시원한 청당에 앉았다.
효성진과 금광요가 예의바르게 마주앉은 곁에 설양이 무례하게도 털썩 주저앉아서 팔꿈치를 괴자 효성진이 나무라듯 불렀다.
“설양.”
“진 형, 나한테 잔소리할 것 없어. 염방존은 내 오랜 친구니까.”
설양이 입꼬리를 올리자 금광요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효성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차를 권했다.
금광요는 뻔하고 지루한 얘기로 겉돌면서 시간을 낭비한 뒤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산 일대에도 곤궁한 지역이 있으니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시탑을 세우는게 좋을 것이며, 모두와 같은 양식을 지켜 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결같이 예의를 잃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전했다.
“이 지방의 일은 우리 경산파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어. 곤궁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서 도와 주지. 그런데 왜 그쪽 방식을 따라야 하지?”
아니나다를까 설양이 고깝다는 듯 지껄이는데, 금광요는 효성진이 어찌 나올지 궁금했다.
“내 보기엔 좋은 계획 같은데, 뭐가 나쁘다는 겐가?”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게 나쁘다는 거야. 염방존, 여긴 엄밀히 말해서 기산도 아니야. 여긴 사람이 살지도 못하던 곳이었어. 그걸 갈아엎어서 명당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대뜸 달려들어서는...”
“설양!”
효성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라고는, 금광요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아이는 말이 험한 편이니 염방존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니니까요.”
금광요는 겉으로 웃으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속을 잘 간파한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코 앞에서 관찰해 보아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영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설양이 독설을 하든 말든 금광요는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기산의 세력권 이야기를 흘려도 효성진은 숨은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고, 아예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정말로 순진하고 청렴한 사람이군.’
설양이 저렇게 옆에서 쌍심지를 켜고 독설이라도 퍼붓지 않으면 이 장문인은 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설양이... 장문인에게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건가?’
이까지 와서 직접 설양을 만나 봐도, 그가 개과천선을 한다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사실 설양의 속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금광요는 이런 일을 하며 온 수선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본인의 인격이 달라진 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은 일을 하는 건 오로지 좋은 사람인 남희신과 함께 있으며 그를 따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까. 금광요의 입장에서는 설양의 속이 검든 하얗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마 설양은 진심으로 효성진을 돕고 있거나, 아니면 경산파를 키운 후 먹어버릴 흉계를 키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효성진이 아무리 순진하다 해도 설양의 과거나 사람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한참 말이 오가도 설양의 훼방으로 감시탑 문제는 귀결이 나지 않았다. 금광요는 온화하게 화제를 덮고 앞으로의 일은 다시 천천히 의논해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금린대에서 열릴 청담성회에 효성진을 초청했다.
이윽고 다시 수사들과 합류한 금광요는 며칠 천천히 쉬다 가라는 효성진의 권유를 마다하고 산문에서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그들이 한 식경쯤 걸어내려오자 불쑥 튀어나온 설양이 앞을 가로막았다.
설양이 그렇게 나오리라고 예상했던 금광요는 마을에 가서 기다리라고 수사들을 먼저 보냈다.
그런 다음에는 예의 따위는 싹 걷어치워버렸다.
“설양, 대체 무슨 꿍꿍이지?”
“너야말로. 감시탑을 설치해서 난릉 금씨로 하여금 수진계를 다 집어삼키게 하려는 거야? 아니면, 고소 남씨? 너 거기서 뭐하는 건데?”
“네가 믿든 말든 나는 만인이 평안하게 지내도록 노력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수상한 짓은 하지 마라.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야말로 잘 해. 금린대에서 우리 도장님을 제대로 대접하라고. 아니꼬운 녀석이 소섭에게 했던 것처럼 함부로 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정말 알고 싶어?”
설양이 강재를 떠멘 채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위협적으로 웃었다.
그러나 금광요는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너의 도장님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야.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드리지. 그렇지만 넌 금린대든 운심부지처든 얼씬도 않는 게 좋을 거다.”
“흥. 하지만 언젠가는 나까지도 받아들여야 할 걸.”
뼈가 있는 듯한 말에 금광요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설양도 지지 않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노려보았다.
까닥했다간 그 옛날의 친밀한 느낌이 되살아나기라도 할 것 같아, 먼저 시선을 피한 금광요가 고개를 저으며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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