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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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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심부지처에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집 안에 손님이 들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며 아이들의 행동이 방종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운심부지처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오가며 분위기가 어수선해도 기강이 엄격했다.
그래도 가끔 마음이 들뜬 몇몇 소년 자제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사고를 쳐 보려다가 남망기에게 뒷덜미가 잡혀서 얌전히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보내지곤 했다.
남망기는 꼼꼼하게 순찰을 돌면서 느슨한 문하생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단속한 후에야 희미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도 별도 없고, 은은하게 감싸 주는 한 겹의 테두리조차 없이 하늘에 박힌 달은 보잘것없고 외로워 보였다.
위무선은 지난번에 뛰쳐나간 후 한 번도 남망기를 찾지 않았다.
남망기는 위무선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위험한 발언을 할 때마다 마음이 굳어져버리며 차가운 말이 튀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차가운 말들은 말수가 적은 남망기가 꼭 해야 한다고 판단한 말이었다.
가만히 선 채 남망기가 흘리는 호흡은 겨울 바람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전부 운심부지처가 불탄 후 새로 만들어진 풍경이다. 위무선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기어올랐던 담장, 멋대로 뛰어다니며 검을 다투던 지붕은 흔적도 없었다.
한밤중의 쌀쌀한 바람이 들이닥쳐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을 훑고 지나가자 하얀 말액과 옷자락이 사령의 흔적처럼 불길하게 요동쳤다.
위무선을 보지 못하는 채로 연일 아픈 생각에만 골몰한 남망기의 가슴 속은 사뭇 상처투성이였다. 그만큼 아프면 잠시라도 외면하며 숨어버릴 법도 하건만, 올곧게 나아가는 것 밖에 모르는 성격은 더욱 더 파고들며 상처를 헤집었다.
지금도 남망기는 담장 너머로 달을 바라보며 쓰라린 추억에 잠겨 있었다.
수학 시절 위무선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며 그를 대할 때마다 화를 냈던 것이, 과연 가훈을 어기고 약을 올리는 데 대한 반감 뿐이었을까.
감히 운심부지처에서 담장을 넘다 걸렸으면서도 술병을 내밀며 넉살 좋게 웃던 모습, 불의에 쉽게 분노하고 당연하게 약자를 감싸던 모습. 그런 그를 갖고 싶다고 원하면서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했던 것도 같다.
그는 그토록 밝고, 또한 너무도 가벼워서 어느 순간에든 날아가버리고 말 것만 같은 존재였으니.
남망기는 일부러 화난 티를 내는 위무선에게 계속 무시를 당했지만 명실에 갈 때만 되면 꼬박꼬박 그를 잡아다 남계인에게 맡겼다. 의외로 위무선은 얌전히 따라왔지만 눈이 세모꼴이 된 채 팔짱을 끼고 외면했다. 처음에는 은근히 남망기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지쳐버렸다.
명실의 작업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훌쩍 넘은 어느 날, 남망기가 대전 앞에 멈추며 불렀다.
“위영.”
위무선이 험악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남망기가 말했다.
“오늘 음호부 하나를 파괴할 거야.”
이에 위무선은 잠시 딱딱한 태도가 허물어졌다.
순간 조심하라는 말이 혀 끝까지 나왔지만, 그간 쌓였던 분이 쉽게 삭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꽉 물고 남망기를 지나쳐 남계인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금일 명실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력을 주입해서 음호부를 파괴할 때, 음기를 정화시키는 시점이 몸체가 부서지는 것보다 너무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몸체가 부서지면 음기원령들이 그대로 쏟아져나올 테니 극히 위험했다.
이제까지 연습했던 대로 각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주의 깊게 내력을 돌린 다음 몸에 지닌 법기들을 확인했다. 물건이든 주문이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했다.
남희신이 건곤대에 손을 넣자 반 쪽의 음호부가 굴러나와 명실의 중앙에 떠올랐다.
“시작합니다.”
오늘도 남계인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간 위무선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오늘은 수련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앉은 지 반 시진쯤 지나자 몸이 으슬으슬해지며 가슴 속에서 불길한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뭔가가 기어가는 느낌은 아주 약했으나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었다.
위무선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남망기를 기억하며, 아주 조금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은 주입자인 36인과 관리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총지휘를 하며 어떤 불미스러운 흐름도 놓치지 않도록 전력을 다했다.
영력을 쏟아붓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경이 팽팽해진 채 진땀을 흘렸으나 한 명 한 명에게서 흘러나온 영력은 순조롭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영력이 음호부와 부딪히자 관리자들과 남희신은 한꺼번에 여러 개의 결계를 펼쳐서 사람들과 주변을 둘러쌌다.
그 때 별안간 음호부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나오며 사람들의 시야를 막아버렸다. 그러자 남희신은 모두의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경고하며 수십 장의 명화부에 불을 붙여서 사방으로 날렸다. 이에 반항이라도 하듯 다음에는 원령들이 부르짖는 무서운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검진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한생으로 음호부 주위를 막고 있던 금광요가 외쳤다.
“음호부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남희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미리 예측했던 일이었다. 40명이 넘는 사람들은 적재 적소에 선 채 자의로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충실하게 남희신의 지시에 응했다.
마침내 음호부의 원기가 순수한 영력에 대항하는 순간 사람들은 갑작스레 무거운 체증이라도 내려간 것처럼 느꼈다. 그 다음에는 눈 앞이 밝아지며 원기가 흩어지는 무시무시한 느낌이 오감 전부를 통해 강습했다. 공간을 꽉 채운 듯한 원령의 모습과, 귀가 멀 듯한 소음, 거기에 헛것인지 모를 쓰고 비린 냄새까지 확 풍겨서 사람들이 주춤하자 남희신이 천둥같은 소리로 외쳤다.
“결계를!”
사람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검을 휘두르거나 수인을 맺고, 부적을 날리며 순식간에 수백개의 결계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뭔가가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난 후에는 공기가 먼지로 꽉 찬 것처럼 부옇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리도 냄새도, 오싹하게 피부를 건드리는 뭔가가 있는 듯하던 착각들도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점점 눈 앞이 맑게 걷히면서 사람들은 음호부를 성공적으로 파괴한 것을 알았다. 그래도 좀 전의 충격과 긴박감이 너무나 컸기에 성취감보다는 두려움이 저마다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흐릿한 먼지와 같은 것들은 이따금 사람의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변하며 훅 사라지곤 했다.
남망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 채로 사라져가는 그림자들을 노려보았으나 이미 음호부의 본체조차 가루가 되어 땅에 흩어진 뒤였다.
그 때 흩어지는 원기와 아련한 혼백의 흔적 사이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이 스치는 것 같았다. 순간 남망기를 따끔하게 돌아보게 만든 그 느낌에는 음호부에서 나올 법한 어두운 성질이 전혀 없었다.
남망기는 고개를 홱 돌려 허공으로 눈을 치떴지만 잠시 스쳐 지나간 그 느낌은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는데도 남망기의 가슴은 점점 심하게 뛰었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언뜻 지나간 그 느낌은...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져나오며 막 자축이라도 하려는 분위기인데, 별안간 사색이 된 남망기가 뛰쳐나가자 그에게 부딪힌 사람들이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그를 보고 놀란 남희신이 한 발 늦게 쫓아나갔다.
남망기는 명실에서 남계인의 처소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동안 머릿속에 펼쳐쳤던 상상에 못지 않은 장면과 맞부딪혔다.
당황한 남계인의 팔에 몸을 젖힌 위무선이 안겨 있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마구 솟구쳤다.
“위영!”
남망기가 달려가 위무선을 붙들자 뒤늦게 도착한 남희신도 얼른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남계인은 그들 형제에게 위무선을 넘겨준 후 신속하게 의술사를 부르러 달려나갔다.
위무선은 말을 하려 해도 기침이 끊기지 않는데다 피를 자꾸 끓어올라 숨이 막혔다. 남망기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가슴의 통증이 심해지다 마침내 피를 토하기 시작했을 때 위무선은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통증이나 자기 몸이야 어찌 되든 간에 남망기가 충격을 받을 것이 겁이 났다.
아니나다를까 남망기가 달려와 심장이라도 뜯기는 듯한 얼굴로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출혈을 막기 위해 몇 군데 혈도를 누르자 동시에 위무선의 의식도 함께 끊겨버리고 말았다.
***
음호부를 파괴한 후 명실을 나온 사람들은 특별히 마련한 보양식을 먹고 한담을 나누며 피로를 풀었다. 더불어 몸에 이상은 없는지 나이든 수사들과 의술사들의 꼼꼼한 진단을 받았다. 나머지 음호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2-3일 후에 파괴하기로 했다.
음호부를 파괴할 때 왜 위무선 본인이 참가하지 않는 건지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옮겨지는 모습을 보고 멋대로 추측하고 납득하는 것 같았다.
위무선이 정실로 옮겨진 뒤 금단에 능통한 남희신, 의술사, 저주에 능한 수사 등 각각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무언가의 충격으로 내상을 입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고, 몸 속에 남아서 움직이는 저주나 주문의 흔적도 없었다.
남망기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얼굴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결론지었는데도 마치 위무선의 사망 선고라도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망기.”
남희신이 밖에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을 때도 남망기는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그답지 않게 무력하고 슬퍼 보여서 남희신에게는 위무선이 피를 토하는 장면을 본 것보다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먼저 말을 꺼냈다.
“위공자가 저리 된 것은 음호부를 파괴한 것과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주문이라도 걸어뒀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는 그가 알려 줘야 알 수 있겠지. 어쨌든 반쪽이라도 음호부가 파괴되었으니 다른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나머지도 며칠 후에는 확실히 파괴할 것이고.”
남망기가 이토록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라 남희신은 말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망기,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느냐?”
“형장.”
남망기는 위무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채 낮게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위영을 운심부지처로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
“데려와서 숨기고 싶었어요.”
“숨긴다고...”
“그때는, 그렇게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습니다.”
“...”
아무래도 남망기의 고민은 훨씬 깊은, 근본적인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남희신은 어쩔 수가 없어 뻔한 위로의 말만 되풀이했다.
“망기, 위공자는 괜찮아질 거다.”
남망기는 보일락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무선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호흡기가 심하게 상해서 의식이 있으면 오히려 나빠질 것 같아 의술사들이 일부러 의식을 잃은 상태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음호부를 파괴하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이 눈을 떴을 때에는 남희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위공자.”
“택... 택무군.”
위무선이 입을 열자 엄청나게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상했으니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저... 많이 다쳤나요?”
“여기저기 찢긴 정도지요. 며칠이면 나을 겁니다.”
“음... 다행...”
그 정도면 남망기가 크게 마음 상하지는 않겠지. 위무선이 생각했다.
“위공자,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어...”
“목에 무리가 가니 대답만 하세요. 남은 음호부를 파괴하면 또 같은 일이 생깁니까?”
위무선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오늘 나머지 음호부를 파괴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문을...”
“네?”
“음호부를 잃어버릴까 봐... 주문을 걸어뒀어요. 그것 때문에.”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무선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만 말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런 종류의 주문일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남잠은요...?”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올 겁니다.”
“남잠...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위공자. 망기가 속이 많이 상했으니 더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네...”
남희신은 근심스럽게 생각했다. 위무선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남망기가 너무 우울해서 이 상태에서 만나게 하기는 불안했다. 그는 생각 끝에 위무선을 하루 더 재우기로 했다.
그래서 남망기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위무선은 도로 잠이 들어 있었고, 혈색은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나았다. 남희신이 조금 더 재우기로 했다고 말해도 남망기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오후에 완전히 영력을 충전해서 명실에 모인 사람들은 더욱 숙련된 태도로 남은 음호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난 후의 저녁은 마치 연회처럼 되었다. 오랫동안 함께 애를 쓰며 어려운 일을 해냈더니 서로가 마치 전우처럼 느껴져서 무척 화목한 분위기였다. 불야천의 전쟁 이후로 모두가 합심해서 일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고조되었고 활력이 넘쳤다.
마침내 음호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희신도 어깨가 가벼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
사람들이 술잔 대신 찻잔을 들어 서로에게 치하를 할 때 금광요도 남희신에게 나붓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네가 더 수고했지.”
남희신이 미소를 지으며 그 어깨를 정답게 두드렸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미소 끝에 근심하는 모습을 흘긋 쳐다보았다. 아마 남망기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리라고 짐작하면서.
“망기는 지금도 정실에 있습니까?”
“음. 나는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글쎄요. 무슨 사연인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둘은 성격이 극과 극이니까요.”
“좋지 않다는 뜻이냐?”
금광요가 확신은 없다는 듯 애매하게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죽도록 싸우거나, 엄청나게 죽이 잘 맞거나 둘 중 하나더군요.”
“...설마 위공자와 망기가 죽도록 싸우진 않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희신은 금광요가 낮게 소리를 내어 웃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나마 근심을 잊었다. 그리고 났더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다.
음호부를 부순 다음 날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이 속속 빠져나갔다.
원래는 며칠이고 연회를 열어 손님들을 대접할 예정이었지만, 다들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문의 수장이라 집을 너무 오래 비운 것이 불안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쓴 음식과 차에 질린 것을 금광요는 뻔히 알고 있었다.
운심부지처가 원래대로 돌아와 호젓한 느낌이 들자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금린대로 떠나는 금자헌과 난릉의 일행을 배웅한 뒤 남희신은 정실로 향했고, 금광요는 남희신을 대신해서 명실을 정돈하러 올라갔다.
남희신이 정실에 들어가 보니 위무선이 깨어나 있었다.
스스로 음식을 청해서 식성 좋게 먹고 있는 걸 보니 상당히 회복된 것 같았고 목의 상태도 좋아 보였다.
위무선은 음식을 넘길 때마다 목이 따끔따끔하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지끈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아마 인사불성이 된 동안 고소 남씨의 집중적인 치료를 퍼부은 것 같았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난 후 차를 훌훌 마시고 있으려니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남망기가 들어왔다.
“남잠, 네 방인데 예의 차리긴.”
위무선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한동안 앓고 났더니 화가 났던 일도 다 날아가버린 바람에 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정답게 대했지만 걸어들어오는 남망기의 태도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아무튼 놀라게 한 죄가 있다 싶어 위무선은 무조건 묵인하고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차가운 남망기보다는 남희신을 상대로 하는 듯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호부는 주인이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위무선은 음호부를 도난당하거나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서 일종의 연결점을 심어두었던 것이다.
“아마 반 쪽의 음호부가 오랫동안 택무군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 원인일 거야. 이런 주문은 주체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강해지거든. 하지만 이 정도로 충격이 올 줄은 몰랐는데, 된통 당해버렸어.”
“넌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니까 명실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위무선이 볼멘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이유를 말하진 않았잖아.”
남망기가 어둡게 노려보며 말했다.
위무선은 한숨을 쉬었다. 화해하고 싶어서 사근사근하게 굴어도 보았지만 별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 화가 나지 않았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다치는 일엔 무신경한 편이었기 때문에 피를 토하며 몸부림치던 일도 다 잊어버렸고, 죄책감보다는 이 일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게... 네가 너무 고집을 부리니까 나도 화가 나서.”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음호부와 계약을 맺은 거잖아.”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니까. 아무도 음호부와 계약을 맺을 수 없어. 아주 작은 주문, 작은 연결고리였을 뿐이라고. 자, 남잠. 이제 음호부는 파괴됐고 앞으로는 아무 일 없을 거야.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남망기가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미는 듯 숨을 들이키며 이를 꽉 물었다.
도륙현무를 간신히 해치웠을 때에는 끝난 게 아니었나?
온가를 쓸어버렸을 때는 다 끝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궁기도까지 쫓아가게 만든 그 일은?
그리고 음호부를 파괴하는 일까지.
“남잠...”
위무선은 남망기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남희신의 충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도 남망기를 더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사이 좋게 지내고 싶었다. 상냥한 그가 그리웠고, 그를 만지고 다시금 그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남망기가 눈에 띄게 화를 내고 노려보아도 맞받아치는 대신 살살 구슬렸다.
“남잠, 우리 사소한 일로 싸우지 말자. 나 이제 그만 너와 화해하고 싶어. 응?”
“이게 사소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위무선을 훑는 눈 속에 그가 피를 쏟으며 경련을 일으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남희신이 주의를 주듯 위무선에게 눈짓을 했지만 그는 남망기에게 온통 신경이 가서 보지 못했다.
‘내가 혼백이라도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짐작한 위무선이 피식 웃었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다친 것도 고작 며칠만에 완치될 수준이었다. 그러니 위무선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치 없게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남잠. 알잖아, 나 잘 나아. 이딴 상처 별 거 아니라고. 예전에 말이지, 어떤 사제가 나란 인간은 아마 심장이 날아가도 사흘은 살아 있을 거라고...”
“위공...”
남희신은 위무선이 분명 나름대로 남망기의 화를 풀어주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는 남망기와는 다른 의미로 말을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남희신이 그만 하라고 입을 여는데 이미 때는 늦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위무선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놀란 남희신이 약사발에서 찌꺼기를 골라내던 집게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놀란 위무선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입술을 떠는 남망기에게 멈추어 있었다.
위무선은 숱하게 남망기를 놀리거나 흥분시켜서 그의 눈가를 붉게 물들여 보았지만, 이처럼 새카만 분노로 점철된 그를 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성도 품위도 다 잃은 듯, 남망기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무리 너를 지켜도... 네 스스로 너를 다치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위무선은 무섭도록 노려보는 시선에 사로잡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남망기는 부들부들 떨며 위무선을, 그리고 자신이 그의 뺨에 남긴 붉은 자국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별안간 몸을 홱 돌려서 뛰쳐나가버렸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위무선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택무군... 택무군! 남잠을 붙잡아 주세요! 설마 남잠이 또...”
남희신은 위무선이 부탁하지 않아도 벌써 쫓아 나가려다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위공자. 이번에는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위무선은 남희신이 나가버린 후 남망기가 악을 쓰며 바닥에 떨군 눈물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뭘 잘못한 거야?’
한참 동안은 멍하니 있는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알아차린 것처럼 얻어맞은 얼굴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부어오른 뺨이 참을 수 없게 화끈거렸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단순하게 화가 난 이유라면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때릴 정도로... ‘그렇게까지 화난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운심부지처에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집 안에 손님이 들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며 아이들의 행동이 방종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운심부지처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오가며 분위기가 어수선해도 기강이 엄격했다.
그래도 가끔 마음이 들뜬 몇몇 소년 자제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사고를 쳐 보려다가 남망기에게 뒷덜미가 잡혀서 얌전히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보내지곤 했다.
남망기는 꼼꼼하게 순찰을 돌면서 느슨한 문하생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단속한 후에야 희미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도 별도 없고, 은은하게 감싸 주는 한 겹의 테두리조차 없이 하늘에 박힌 달은 보잘것없고 외로워 보였다.
위무선은 지난번에 뛰쳐나간 후 한 번도 남망기를 찾지 않았다.
남망기는 위무선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위험한 발언을 할 때마다 마음이 굳어져버리며 차가운 말이 튀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차가운 말들은 말수가 적은 남망기가 꼭 해야 한다고 판단한 말이었다.
가만히 선 채 남망기가 흘리는 호흡은 겨울 바람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전부 운심부지처가 불탄 후 새로 만들어진 풍경이다. 위무선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기어올랐던 담장, 멋대로 뛰어다니며 검을 다투던 지붕은 흔적도 없었다.
한밤중의 쌀쌀한 바람이 들이닥쳐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을 훑고 지나가자 하얀 말액과 옷자락이 사령의 흔적처럼 불길하게 요동쳤다.
위무선을 보지 못하는 채로 연일 아픈 생각에만 골몰한 남망기의 가슴 속은 사뭇 상처투성이였다. 그만큼 아프면 잠시라도 외면하며 숨어버릴 법도 하건만, 올곧게 나아가는 것 밖에 모르는 성격은 더욱 더 파고들며 상처를 헤집었다.
지금도 남망기는 담장 너머로 달을 바라보며 쓰라린 추억에 잠겨 있었다.
수학 시절 위무선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며 그를 대할 때마다 화를 냈던 것이, 과연 가훈을 어기고 약을 올리는 데 대한 반감 뿐이었을까.
감히 운심부지처에서 담장을 넘다 걸렸으면서도 술병을 내밀며 넉살 좋게 웃던 모습, 불의에 쉽게 분노하고 당연하게 약자를 감싸던 모습. 그런 그를 갖고 싶다고 원하면서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했던 것도 같다.
그는 그토록 밝고, 또한 너무도 가벼워서 어느 순간에든 날아가버리고 말 것만 같은 존재였으니.
남망기는 일부러 화난 티를 내는 위무선에게 계속 무시를 당했지만 명실에 갈 때만 되면 꼬박꼬박 그를 잡아다 남계인에게 맡겼다. 의외로 위무선은 얌전히 따라왔지만 눈이 세모꼴이 된 채 팔짱을 끼고 외면했다. 처음에는 은근히 남망기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지쳐버렸다.
명실의 작업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훌쩍 넘은 어느 날, 남망기가 대전 앞에 멈추며 불렀다.
“위영.”
위무선이 험악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남망기가 말했다.
“오늘 음호부 하나를 파괴할 거야.”
이에 위무선은 잠시 딱딱한 태도가 허물어졌다.
순간 조심하라는 말이 혀 끝까지 나왔지만, 그간 쌓였던 분이 쉽게 삭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꽉 물고 남망기를 지나쳐 남계인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금일 명실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력을 주입해서 음호부를 파괴할 때, 음기를 정화시키는 시점이 몸체가 부서지는 것보다 너무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몸체가 부서지면 음기원령들이 그대로 쏟아져나올 테니 극히 위험했다.
이제까지 연습했던 대로 각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주의 깊게 내력을 돌린 다음 몸에 지닌 법기들을 확인했다. 물건이든 주문이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했다.
남희신이 건곤대에 손을 넣자 반 쪽의 음호부가 굴러나와 명실의 중앙에 떠올랐다.
“시작합니다.”
오늘도 남계인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간 위무선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오늘은 수련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앉은 지 반 시진쯤 지나자 몸이 으슬으슬해지며 가슴 속에서 불길한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뭔가가 기어가는 느낌은 아주 약했으나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었다.
위무선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남망기를 기억하며, 아주 조금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은 주입자인 36인과 관리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총지휘를 하며 어떤 불미스러운 흐름도 놓치지 않도록 전력을 다했다.
영력을 쏟아붓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경이 팽팽해진 채 진땀을 흘렸으나 한 명 한 명에게서 흘러나온 영력은 순조롭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영력이 음호부와 부딪히자 관리자들과 남희신은 한꺼번에 여러 개의 결계를 펼쳐서 사람들과 주변을 둘러쌌다.
그 때 별안간 음호부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나오며 사람들의 시야를 막아버렸다. 그러자 남희신은 모두의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경고하며 수십 장의 명화부에 불을 붙여서 사방으로 날렸다. 이에 반항이라도 하듯 다음에는 원령들이 부르짖는 무서운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검진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한생으로 음호부 주위를 막고 있던 금광요가 외쳤다.
“음호부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남희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미리 예측했던 일이었다. 40명이 넘는 사람들은 적재 적소에 선 채 자의로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충실하게 남희신의 지시에 응했다.
마침내 음호부의 원기가 순수한 영력에 대항하는 순간 사람들은 갑작스레 무거운 체증이라도 내려간 것처럼 느꼈다. 그 다음에는 눈 앞이 밝아지며 원기가 흩어지는 무시무시한 느낌이 오감 전부를 통해 강습했다. 공간을 꽉 채운 듯한 원령의 모습과, 귀가 멀 듯한 소음, 거기에 헛것인지 모를 쓰고 비린 냄새까지 확 풍겨서 사람들이 주춤하자 남희신이 천둥같은 소리로 외쳤다.
“결계를!”
사람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검을 휘두르거나 수인을 맺고, 부적을 날리며 순식간에 수백개의 결계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뭔가가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난 후에는 공기가 먼지로 꽉 찬 것처럼 부옇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리도 냄새도, 오싹하게 피부를 건드리는 뭔가가 있는 듯하던 착각들도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점점 눈 앞이 맑게 걷히면서 사람들은 음호부를 성공적으로 파괴한 것을 알았다. 그래도 좀 전의 충격과 긴박감이 너무나 컸기에 성취감보다는 두려움이 저마다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흐릿한 먼지와 같은 것들은 이따금 사람의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변하며 훅 사라지곤 했다.
남망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 채로 사라져가는 그림자들을 노려보았으나 이미 음호부의 본체조차 가루가 되어 땅에 흩어진 뒤였다.
그 때 흩어지는 원기와 아련한 혼백의 흔적 사이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이 스치는 것 같았다. 순간 남망기를 따끔하게 돌아보게 만든 그 느낌에는 음호부에서 나올 법한 어두운 성질이 전혀 없었다.
남망기는 고개를 홱 돌려 허공으로 눈을 치떴지만 잠시 스쳐 지나간 그 느낌은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는데도 남망기의 가슴은 점점 심하게 뛰었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언뜻 지나간 그 느낌은...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져나오며 막 자축이라도 하려는 분위기인데, 별안간 사색이 된 남망기가 뛰쳐나가자 그에게 부딪힌 사람들이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그를 보고 놀란 남희신이 한 발 늦게 쫓아나갔다.
남망기는 명실에서 남계인의 처소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동안 머릿속에 펼쳐쳤던 상상에 못지 않은 장면과 맞부딪혔다.
당황한 남계인의 팔에 몸을 젖힌 위무선이 안겨 있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마구 솟구쳤다.
“위영!”
남망기가 달려가 위무선을 붙들자 뒤늦게 도착한 남희신도 얼른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남계인은 그들 형제에게 위무선을 넘겨준 후 신속하게 의술사를 부르러 달려나갔다.
위무선은 말을 하려 해도 기침이 끊기지 않는데다 피를 자꾸 끓어올라 숨이 막혔다. 남망기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가슴의 통증이 심해지다 마침내 피를 토하기 시작했을 때 위무선은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통증이나 자기 몸이야 어찌 되든 간에 남망기가 충격을 받을 것이 겁이 났다.
아니나다를까 남망기가 달려와 심장이라도 뜯기는 듯한 얼굴로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출혈을 막기 위해 몇 군데 혈도를 누르자 동시에 위무선의 의식도 함께 끊겨버리고 말았다.
***
음호부를 파괴한 후 명실을 나온 사람들은 특별히 마련한 보양식을 먹고 한담을 나누며 피로를 풀었다. 더불어 몸에 이상은 없는지 나이든 수사들과 의술사들의 꼼꼼한 진단을 받았다. 나머지 음호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2-3일 후에 파괴하기로 했다.
음호부를 파괴할 때 왜 위무선 본인이 참가하지 않는 건지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옮겨지는 모습을 보고 멋대로 추측하고 납득하는 것 같았다.
위무선이 정실로 옮겨진 뒤 금단에 능통한 남희신, 의술사, 저주에 능한 수사 등 각각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무언가의 충격으로 내상을 입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고, 몸 속에 남아서 움직이는 저주나 주문의 흔적도 없었다.
남망기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얼굴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결론지었는데도 마치 위무선의 사망 선고라도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망기.”
남희신이 밖에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을 때도 남망기는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그답지 않게 무력하고 슬퍼 보여서 남희신에게는 위무선이 피를 토하는 장면을 본 것보다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먼저 말을 꺼냈다.
“위공자가 저리 된 것은 음호부를 파괴한 것과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주문이라도 걸어뒀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는 그가 알려 줘야 알 수 있겠지. 어쨌든 반쪽이라도 음호부가 파괴되었으니 다른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나머지도 며칠 후에는 확실히 파괴할 것이고.”
남망기가 이토록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라 남희신은 말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망기,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느냐?”
“형장.”
남망기는 위무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채 낮게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위영을 운심부지처로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
“데려와서 숨기고 싶었어요.”
“숨긴다고...”
“그때는, 그렇게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습니다.”
“...”
아무래도 남망기의 고민은 훨씬 깊은, 근본적인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남희신은 어쩔 수가 없어 뻔한 위로의 말만 되풀이했다.
“망기, 위공자는 괜찮아질 거다.”
남망기는 보일락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무선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호흡기가 심하게 상해서 의식이 있으면 오히려 나빠질 것 같아 의술사들이 일부러 의식을 잃은 상태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음호부를 파괴하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이 눈을 떴을 때에는 남희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위공자.”
“택... 택무군.”
위무선이 입을 열자 엄청나게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상했으니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저... 많이 다쳤나요?”
“여기저기 찢긴 정도지요. 며칠이면 나을 겁니다.”
“음... 다행...”
그 정도면 남망기가 크게 마음 상하지는 않겠지. 위무선이 생각했다.
“위공자,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어...”
“목에 무리가 가니 대답만 하세요. 남은 음호부를 파괴하면 또 같은 일이 생깁니까?”
위무선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오늘 나머지 음호부를 파괴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문을...”
“네?”
“음호부를 잃어버릴까 봐... 주문을 걸어뒀어요. 그것 때문에.”
남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무선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만 말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런 종류의 주문일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남잠은요...?”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올 겁니다.”
“남잠...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위공자. 망기가 속이 많이 상했으니 더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네...”
남희신은 근심스럽게 생각했다. 위무선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남망기가 너무 우울해서 이 상태에서 만나게 하기는 불안했다. 그는 생각 끝에 위무선을 하루 더 재우기로 했다.
그래서 남망기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위무선은 도로 잠이 들어 있었고, 혈색은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나았다. 남희신이 조금 더 재우기로 했다고 말해도 남망기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오후에 완전히 영력을 충전해서 명실에 모인 사람들은 더욱 숙련된 태도로 남은 음호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난 후의 저녁은 마치 연회처럼 되었다. 오랫동안 함께 애를 쓰며 어려운 일을 해냈더니 서로가 마치 전우처럼 느껴져서 무척 화목한 분위기였다. 불야천의 전쟁 이후로 모두가 합심해서 일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고조되었고 활력이 넘쳤다.
마침내 음호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희신도 어깨가 가벼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
사람들이 술잔 대신 찻잔을 들어 서로에게 치하를 할 때 금광요도 남희신에게 나붓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네가 더 수고했지.”
남희신이 미소를 지으며 그 어깨를 정답게 두드렸다.
금광요는 남희신이 미소 끝에 근심하는 모습을 흘긋 쳐다보았다. 아마 남망기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리라고 짐작하면서.
“망기는 지금도 정실에 있습니까?”
“음. 나는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글쎄요. 무슨 사연인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둘은 성격이 극과 극이니까요.”
“좋지 않다는 뜻이냐?”
금광요가 확신은 없다는 듯 애매하게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죽도록 싸우거나, 엄청나게 죽이 잘 맞거나 둘 중 하나더군요.”
“...설마 위공자와 망기가 죽도록 싸우진 않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희신은 금광요가 낮게 소리를 내어 웃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나마 근심을 잊었다. 그리고 났더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다.
음호부를 부순 다음 날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이 속속 빠져나갔다.
원래는 며칠이고 연회를 열어 손님들을 대접할 예정이었지만, 다들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문의 수장이라 집을 너무 오래 비운 것이 불안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쓴 음식과 차에 질린 것을 금광요는 뻔히 알고 있었다.
운심부지처가 원래대로 돌아와 호젓한 느낌이 들자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금린대로 떠나는 금자헌과 난릉의 일행을 배웅한 뒤 남희신은 정실로 향했고, 금광요는 남희신을 대신해서 명실을 정돈하러 올라갔다.
남희신이 정실에 들어가 보니 위무선이 깨어나 있었다.
스스로 음식을 청해서 식성 좋게 먹고 있는 걸 보니 상당히 회복된 것 같았고 목의 상태도 좋아 보였다.
위무선은 음식을 넘길 때마다 목이 따끔따끔하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지끈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아마 인사불성이 된 동안 고소 남씨의 집중적인 치료를 퍼부은 것 같았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난 후 차를 훌훌 마시고 있으려니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남망기가 들어왔다.
“남잠, 네 방인데 예의 차리긴.”
위무선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한동안 앓고 났더니 화가 났던 일도 다 날아가버린 바람에 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정답게 대했지만 걸어들어오는 남망기의 태도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아무튼 놀라게 한 죄가 있다 싶어 위무선은 무조건 묵인하고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차가운 남망기보다는 남희신을 상대로 하는 듯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호부는 주인이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위무선은 음호부를 도난당하거나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서 일종의 연결점을 심어두었던 것이다.
“아마 반 쪽의 음호부가 오랫동안 택무군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 원인일 거야. 이런 주문은 주체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강해지거든. 하지만 이 정도로 충격이 올 줄은 몰랐는데, 된통 당해버렸어.”
“넌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니까 명실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위무선이 볼멘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이유를 말하진 않았잖아.”
남망기가 어둡게 노려보며 말했다.
위무선은 한숨을 쉬었다. 화해하고 싶어서 사근사근하게 굴어도 보았지만 별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 화가 나지 않았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다치는 일엔 무신경한 편이었기 때문에 피를 토하며 몸부림치던 일도 다 잊어버렸고, 죄책감보다는 이 일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게... 네가 너무 고집을 부리니까 나도 화가 나서.”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음호부와 계약을 맺은 거잖아.”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니까. 아무도 음호부와 계약을 맺을 수 없어. 아주 작은 주문, 작은 연결고리였을 뿐이라고. 자, 남잠. 이제 음호부는 파괴됐고 앞으로는 아무 일 없을 거야.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남망기가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미는 듯 숨을 들이키며 이를 꽉 물었다.
도륙현무를 간신히 해치웠을 때에는 끝난 게 아니었나?
온가를 쓸어버렸을 때는 다 끝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궁기도까지 쫓아가게 만든 그 일은?
그리고 음호부를 파괴하는 일까지.
“남잠...”
위무선은 남망기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남희신의 충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도 남망기를 더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사이 좋게 지내고 싶었다. 상냥한 그가 그리웠고, 그를 만지고 다시금 그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남망기가 눈에 띄게 화를 내고 노려보아도 맞받아치는 대신 살살 구슬렸다.
“남잠, 우리 사소한 일로 싸우지 말자. 나 이제 그만 너와 화해하고 싶어. 응?”
“이게 사소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위무선을 훑는 눈 속에 그가 피를 쏟으며 경련을 일으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남희신이 주의를 주듯 위무선에게 눈짓을 했지만 그는 남망기에게 온통 신경이 가서 보지 못했다.
‘내가 혼백이라도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짐작한 위무선이 피식 웃었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다친 것도 고작 며칠만에 완치될 수준이었다. 그러니 위무선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치 없게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남잠. 알잖아, 나 잘 나아. 이딴 상처 별 거 아니라고. 예전에 말이지, 어떤 사제가 나란 인간은 아마 심장이 날아가도 사흘은 살아 있을 거라고...”
“위공...”
남희신은 위무선이 분명 나름대로 남망기의 화를 풀어주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는 남망기와는 다른 의미로 말을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남희신이 그만 하라고 입을 여는데 이미 때는 늦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위무선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놀란 남희신이 약사발에서 찌꺼기를 골라내던 집게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놀란 위무선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입술을 떠는 남망기에게 멈추어 있었다.
위무선은 숱하게 남망기를 놀리거나 흥분시켜서 그의 눈가를 붉게 물들여 보았지만, 이처럼 새카만 분노로 점철된 그를 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성도 품위도 다 잃은 듯, 남망기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무리 너를 지켜도... 네 스스로 너를 다치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위무선은 무섭도록 노려보는 시선에 사로잡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남망기는 부들부들 떨며 위무선을, 그리고 자신이 그의 뺨에 남긴 붉은 자국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별안간 몸을 홱 돌려서 뛰쳐나가버렸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위무선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택무군... 택무군! 남잠을 붙잡아 주세요! 설마 남잠이 또...”
남희신은 위무선이 부탁하지 않아도 벌써 쫓아 나가려다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위공자. 이번에는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위무선은 남희신이 나가버린 후 남망기가 악을 쓰며 바닥에 떨군 눈물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뭘 잘못한 거야?’
한참 동안은 멍하니 있는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알아차린 것처럼 얻어맞은 얼굴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부어오른 뺨이 참을 수 없게 화끈거렸다.
위무선은 남망기가 단순하게 화가 난 이유라면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때릴 정도로... ‘그렇게까지 화난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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