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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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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터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음. 욕실 문을 발톱으로 긁던 여우의 소리는 금세 잠잠해졌지만, 루스터의 마음은 더욱 가라앉아 갔지. 아기곰이 되어 몇 달간 지내봤기 때문에 루스터도 동물이 되었을 때의 답답함은 잘 알아.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고 잠을 자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어. 가끔 행맨이 데리고 외출을 해줬을 때 외에는 계속 방 안에만 있어야 했으니까 심심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아기곰 루는 제멋대로 밖에 나가려고 한 적이 없어. 얌전히 착하게 행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조금이라도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행맨은 루스터 몰래 계속 밖을 드나들었던 거야. 혹시나 밖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한다면? 그 소식이 루스터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야생동물 사고로 조용히 처리가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해.
- 하…
루스터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음. 어느새 커튼 틈새로 새벽의 햇살이 비집어 들어오기 시작해. 제대로 잠을 못 자 눈이 뻑뻑했지만, 루스터는 출근을 위해 몸을 일으켜야 했어. 그리고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해도, 행맨을 욕실에서 꺼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행맨은 자존심이 세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반성을 했으면 해.
- 행이?
욕실의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면, 욕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붉은여우가 보여.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들썩이고 있는 몸도 보이고. 루스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행맨에게 다가갔어. 다음부터는 나가고 싶으면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지만 잘 견뎌보자고 달래줄 생각이었지. 하지만 행맨은 루스터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음. 조심스레 손을 뻗어 행맨의 등을 만지는 순간, 루스터는 여우의 차갑게 식은 체온에 화들짝 놀랐어.
- 제이크, 너 괜찮아?
행맨을 안아 들어 올리면 여우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 어딘가 상태가 심상치 않은 여우의 모습에 루스터는 심장이 철렁했지. 행맨의 몸을 살짝 흔들어보면, 여우는 ‘끼잉’하는 소리를 한 번 낼뿐 눈도 뜨지 못해. 루스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그는 곧장 담요로 여우의 몸을 감쌌음. 밤새 욕실이 너무 추웠던 것일까? 루스터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여우의 몸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기도 하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먹여보려고 시도했어. 하지만 행맨은 켁켁대는 소리를 내더니 몇 모금 마셨던 우유를 다시 토해냈지.
결국 루스터는 행맨을 품에 안은 채 곧장 차에 올라탔음. 나 때문이야. 행맨을 거기에 가둬두면 안 됐어. 내가 제이크를 아프게 했어. 루스터는 울고 싶은 기분을 꾸욱 억누른 채 핸들을 꽉 움켜쥐고 운전을 해 동물병원까지 갔지. 이른 아침부터 온 환자에 놀랐는지 수의사가 허둥대며 축 늘어진 채 헐떡대는 여우를 안아 진료실로 데려갔음. 문틈 사이로 간호사가 분주하게 엑스레이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루스터는 대기실에서 얌전히 기다려야만 했어.
그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던지. 루스터는 몇 번이고 신을 부르고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마음속으로 제발 행맨이 무사하기를 빌었어.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간호사의 진료실로 와달라는 말에 루스터는 곧장 몸을 일으키고 수의사에게로 갔음. 혹시나, 설마, 그럴 리가.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무렵, 수의사가 입을 열었어.
- 스트레스성 급성 위염이네요. 우선 우리 여우 친구한테 탈수증세가 있어 수액치료를 했고 지금은 회복실에 있어요. 하루정도 더 경과를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약을 같이 처방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다행히도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루스터는 차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어. 어쨌든 여우가 아프게 된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셈이잖아. 루스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회복실로 갔음. 케이지 안의 행맨은 기운이 없어 보였고, 엎드린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어. 크고 풍성했던 꼬리도 오늘따라 푸석해 보이고, 쫑긋 올라갔던 세모 귀도 추욱 처져 있어서 안쓰럽기만 해.
- 미안해, 행이...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케이지의 유리에 손끝을 댄 채 루스터는 중얼거렸음.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여우를 바라보다가 뒤돌아 동물병원을 나왔지. 행맨이 언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루스터는 연인으로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며 돌봐줄 필요가 있었어. 행맨이 그러했듯이, 아낌없이 사랑만 주기에도 부족한데 경솔했던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던 것 같아. 루스터는 마트에 들러 여우가 좋아할 만한 과일과 고기를 구매하고 집에 돌아왔어.
냉장고에 식재료를 정리해 넣은 루스터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거실에 있는 창문을 열었어. 테라스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창문을 옆으로 밀어젖히고 숨을 들이켜면, 아침의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차는 게 느껴져. 아기곰 때 화재 사고를 겪은 적이 있는 만큼, 혹시 모를 일이 발생해도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창문을 잠그지 않긴 했지. 비록 행맨이 루스터 몰래 밖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작은 여우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상태로 둔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아.
- …?
루스터는 테라스의 한쪽에 나란히 둔 화분 쪽으로 시선을 돌렸음. 바질을 심어둔 화분, 로즈마리를 심어둔 화분, 레몬을 심어둔 화분 등이 있었지. 그리고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여우가 먹고 뱉은 체리씨를 심어둔 화분 위로 무언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아직 싹이 나기 직전인데 뭘까 싶어 루스터가 테라스로 나와 화분을 살펴봐. 화분의 흙 위로 푸릇한 잎들이 쌓여있길래 하나 집어 올렸더니 네잎 클로버야. 다른 잎들도 확인해 보니까 전부 네잎 클로버였어. 어떤 것은 작은 잇자국이 나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며칠 지난 것인지 퍼석하게 말라 있기도 해. 이건...일부러 모아둔 것 같아.
- ……
루스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여우가 모아둔 네잎 클로버. 이건 단순히 재미로 모을만한 것이 아니야. 풀숲을 뒤져가며 꼼꼼히 찾지 않으면 안 돼. 풀숲은 해군 관사 구역부터 비행 기지까지 쭉 이어져 있고 야생동물도 출몰하는 곳이야. 행맨은 루스터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그저 루스터를 기쁘게 해 주려고? 분명 여우는 가슴을 부풀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뿌듯해하겠지. 그리고 칭찬을 바라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거야.
작은 몸에 갇혀서 무력감을 느끼고 그저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는 날만을 무한정 기다리는 기분을 루스터는 알아.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을 꼭 끌어안아줄 수 없는 슬픔도 기억해. 바보 같은 여우야. 불안해할 것 없이 그저 예쁨만 받아도 충분한데, 행맨은 계속 루스터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나 봐. 루스터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바닥 위의 네잎 클로버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어.
루스터행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