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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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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양이 예전에 상평을 습격했던 장소는 귀가 적었다.
  그래서 상평을 납치하는 데 실패한 설양은 그에게 상처만 입히고 달아났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수사들이 끈질기게 쫓아와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설양은 미처 상평을 공격하는 이유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약양 상씨는 도대체 자기들이 유명한 건달인 설양과 무슨 원수를 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양을 구출해 갔다는 실력있는 도사의 신원도 의문이었고, 여러 모로 불안했다. 그래서 상평은 저택의 결계를 강화하고 한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몇 주나 지나자 아무리 놀라운 일도 두루뭉실하게 잊혀지기 시작했다. 상평은 설양이 되돌아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시 야렵에 나섰다. 
  금번의 야렵 장소는 귀와 사령이 제법 많은 곳이었다. 오래된 무덤터라 묘비가 없는 땅에도 상당한 시체가 묻혀 있어 음산한 귀기가 감돌았다. 더불어 설양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흉시에다 악령까지 끌어들이자 사냥터는 대번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상평은 나름대로 조심하느라고 상당한 수의 문하생들을 끌고 왔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었다. 설양은 혼란한 틈을 이용해 이번에는 상평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 날아가 미리 점찍어 두었던 장소로 상평을 짊어지고 간 설양은 그를 나무에 묶어 두고 기다렸다. 그러나 복수를 코 앞에 둔 그는 좀이 쑤셔서 오래 기다리지 못했다.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다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상평의 얼굴을 때려서 깨웠다.
  상평은 정신이 들자마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설양의 얼굴을 발견하곤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힘껏 몸부림을 쳤더니 팔다리가 사정없이 조여들어왔다.
  “안녕.”
  설양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
  “설양! 내, 내가 도대체 네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느냐!”
  “그래. 저번에 못다한 얘기를 할까.”
  설양은 천천히, 지난 번에 효성진에게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듣는 상평에게는 끔찍하고 충격적이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설양은 어째 두번째로 하는 얘기가 싱겁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올려서 상평의 눈 앞에 갖다대었다.
  “자, 이게 증거야. 이제 잘 알겠지?”
  상평은 묶인 채로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 또 사악한 설양이 눈 앞에서 을러대는 것을 보자 몸이 사시나무떨듯 떨려왔다.
  “그, 그렇지만 아버지께선... 이미 돌아가셨는데...”
  “그래, '네' 아버지지. 그래서 너에게 복수하려는 거야. 사실은 네놈의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내가 그럴 능력이 없거든.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그런데 네놈의 가문은 본래부터 손이 부족한가보지. 네놈은 형제도 없고, 아이도 없고. 어쩌면 네 씨도 부실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끊어둬야겠어.”
  끊임없이 지껄이며 설양은 상평의 옷깃을 벌리고 요대를 풀더니 검으로 바지끈을 잘라버렸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 벗겨진 몸을 쓸고 지나가자 상평은 정신없이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질렀다.
  설양이 웃으면서 강재의 검자루를 거꾸로 쥐었다.
  “그래. 참는 것보단 소리를 지르는 편이 덜 아플 거야.”
  그러나 그가 막 상평의 양물을 잘라버리려는 순간, 목덜미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설양이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며 돌아보자 뒤에 흰 그림자가 서 있었다.
  설양은 담이 컸지만 그렇게 가까이 사람이 있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했다. 



  효성진은 며칠 전부터 설양의 뒤를 밟고 있었지만 설양은 전연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설양의 독계에 걸렸을 때 효성진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양은 연이어 험한 말을 퍼부으면서도 그대로 가버렸다. 나중에 마비가 풀렸을 때에는 눈도 보이기 시작하여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근처의 성으로 들어가 설양에 대해 수소문해 보자, 과연 손도 못 댈 정도로 불량한 악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효성진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악행, 즉 상평을 해치려고 한 사건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옳다고 할 수야 없었지만 어쨌든 설양은 자신이 당한 상처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설양 본인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상평의 부친이란 자가 저지른 짓은 일목요연했다.
  효성진은 아무래도 설양의 행적을 확인하지 않고는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자신이 설양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설양이 악행을 일삼고 다닌다면 자신의 책임이었다.
  약양 상씨의 지역으로 들어오자 그는 설양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뒤를 밟으면서 살펴보니 설양은 한가롭게 놀러나 다니는 게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설양이 무덤터에서 난리통을 만들어놓고 상평을 납치할 때 효성진은 곧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우선 위험한 악귀들을 처리하며 사람들을 돕다가, 자칫 설양을 놓쳐버릴 것 같다 싶을 때에 날아올랐다. 설양이 도망치는 방향을 미리 봐 두었지만 어디까지 간 건지 알 수 없어서 찾아내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약양 상씨는 설양의 말대로 후대가 끊길 뻔했지만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막아낼 수 있었다.
  “아이고 도장님. 설마 여태까지 내 뒤를 밟은 거야?”
  설양이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는 효성진이 쫓아온 이상 일이 어렵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주눅이 들 위인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다 알고 있으면서 뭘 그래? 지난번에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러 왔지.”
  효성진은 사색이 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사내의 치부를 보곤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설양이 하는 행동과 말을 낱낱이 보고 들은 뒤였다. 하도 기가 막혀서 묻는 것이었다.
  “그대는 도대체...! 정히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대도 손가락이나 손을 자르면 되지 않나!”
  그 말을 듣자 혼비백산한 상평이 줄에 묶인 양 손을 꽉 쥐었다.
  설양이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이 쩨쩨한 도장놈 좀 보게. 날더러 손가락이나 손 하나를 가지고 뭘 어쩌라는 거야? 이놈이 아니라 상가 사람들의 손가락을 다 자른다 해도 내 손가락이 돋아나는 것도 아닌데!”
  “그건... 이 사람을 해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설양이 웃음을 멈추더니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니지! 이 놈의 씨를 말려버리면 최소한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종자들을 말려버려서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잖아!”
  한 번 흥분한 설양이 주체를 못하는 듯 소리를 질렀다.
  “됐어! 이렇게 훼방을 놓다니, 그냥 죽여버리고 말겠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상평에게 강재를 박으려는데, 효성진은 설양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보다 빨랐다. 설양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직일 때 이미 효성진은 검기를 뻗어 강재를 때렸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온 검이 나무에 묶인 줄을 잘라버렸다.
  상평은 겨우 놓여나자 옷을 추스릴 생각도 못하고 미친듯이 기어와서 효성진의 다리에 매달렸다.
  “도장, 도, 도장!”
  그는 너무 놀라 혀가 굳어지는 바람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가? 도장님? 내 복수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설양이 그렇게 외치자 효성진은 난감했다. 상평의 부친은 분명 묵과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렇지만 설양이 하려는 짓도 도가 지나쳤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평이 벌벌 떨며 자신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효성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보시오. 당신의 부친이 그에게 죄를 저질렀소. 그러니 당신이 그에게 사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약양 상씨는 명가는 아니라 해도 일대에서 제법 세력을 가지고 뻗어나가는 가문이었다. 가주인 상평도 평소에는 강단이 있어 쉽게 추태를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양에게서 상상도 못한 끔찍스러운 짓을 당할 뻔한데다 수중에는 패검도 없어 그만 혼이 다 달아나고 말았다. 미치도록 공포스러운 와중에 효성진이 하는 말을 듣자 그는 기가 막혔다.
  저런 미치광이에게 사과를 하라고?
  “당신도 듣지 않았습니까. 그의 행동이 틀렸다 해도 당신의 부친이 잘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효성진이 흘긋 설양의 왼손을 바라보며 진실하게 말했으나 상평은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는 효성진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설양이 들을새라 열심히 속삭였다.
  “도장, 저 놈은 말이 통하지 않는 악당이라니까요. 제발 그를 죽여 주십시오. 그러면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설양은 효성진이 한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는 중이었다. 상평이 그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데,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짐작할 만했다.
  돌연 칼로 벤 듯 웃음기를 지운 설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면 됐다, 이 도사놈아! 그만 지껄이고 붙어보자!”
  설양은 효성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벼르던 일을 두 번이나 실패하고 보니 그만 악에 받쳐서 눈이 뒤집혔다. 그래서 처음부터 몸을 돌보지 않는 살수를 쓰며 무섭게 덤벼들었다.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하자 상평은 이때다 싶어 잘라진 바지춤을 붙들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노가 효성진에게 옮겨 간 설양에게 이미 상평은 안중에도 없었다.
  설양은 스스로의 목숨까지 내놓고 사력을 다해 덤비는 반면, 효성진은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결단을 내릴 수 없어 시종일관 막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여유가 있어 몇십 초나 싸워도 설양은 계속 제자리만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시무시한 영력에 밀려 검을 놓쳐버릴 것만 같자 화가 난 설양이 꽥 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뭔가를 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효성진이 흠칫하고 재빨리 몸을 낮추며 가로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설양이 다리를 끌며 1장 정도 훌쩍 물러났다.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와 그가 뒷걸음질을 치는대로 바닥에 그림자 같은 검은 자국이 생겼다.
  와중에도 설양은 한쪽 입술을 말아올리며 소름끼치게 웃었다.
  “염병을 할 도사놈이... 정말 더럽게 세구나.”
  비틀거리며 강재에 올라탄 설양이 휙 날아올랐다. 
  효성진은 당황해서 도망간 상평 쪽을 바라보고, 또 피를 뚝뚝 흘리며 멀어지는 설양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그는 곧장 설양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효성진은 설양의 뒤를 밟을 때만 해도 그의 사람됨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설양은 비겁한 수로 효성진을 공격하고 도망쳤지만 다치게 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금방 상평에게 하던 짓을 보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악당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를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던 걸까. 갈등하는 효성진의 머릿속에,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설양이 떠올랐다. 그가 상평에게 하려던 일과, 이까지 오면서 들었던 그에 대한 소문도 떠올랐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설양이 해 주었던 이야기까지 기억이 났다. 
  차라리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효성진은 이제 막 하산하여 복잡한 세상사를 알지 못했고 순진무구한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처음부터 그와 같은 악당을 만나 선악이 분명했던 마음 속에 무서운 의문이 생겨났다.
  이때까지는 사람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들을 숱하게 겪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주치는 사건 사고마다 이런 사연을 곳곳에 담고 있다면? 겉으로 일어나는 일만 보고 간단하게 철퇴를 내려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단순히 설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설양은 간신히 패검에 올라탔지만 오래 버틸 수가 없어 도로 지상으로 내려갔다. 
  피를 너무 흘려 식은땀이 흐르고 눈 앞이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달아나야 했다. 그 소도장은 필시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이었다.
  설양은 소매를 찢어 다리를 꽉 묶어서 고정시킨 다음 다시 검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럴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뼈에 닿을 정도로 베인 상처가 너무 깊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말하자마자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눈 앞으로 내려앉아, 그는 똑같은 욕설을 되풀이했다.
  설양은 억지로 어검을 했다 떨어진 후라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대신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끈덕지게 저주를 퍼부었다.
  “...마음대로 해라, 개같은 도사놈아... 내가 죽으면 네놈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흉신악살이 되어서... 목줄을 끊고 싶어질 때까지 괴롭혀 주마...”
  “상처를 보여 주게.”
  효성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다가오자 설양은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효성진이 다시 한 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상처를 보여 주게. 늦으면 다리를 못 쓰게 될 지도 모르네.”
  설양은 효성진이 자꾸만 손을 내밀며 다가오자 순순히 죽어 주려던 것도 잊고 강재를 뽑아 휘둘렀다. 그에 효성진이 불진을 꺼내 날리자 불진이 강재를 휘감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멀리 날아가버렸다.
  “움직이지 말게.”
  어차피 더 이상은 움직일 힘도 없었다. 설양은 마지막으로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가버렸다. 
  효성진은 설양이 혼절하자 얼른 그의 바지를 찢어낸 다음 깊게 벌어진 상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옷조각으로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불진과 강재를 주워 온 뒤 설양을 들쳐메고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



  결국 두 사람은 몇 주 동안 머물렀던 허름한 객점으로 돌아와서 똑같은 방에 들었다. 객점 사람들은 효성진이 또다시 다친 검은 사내를 둘러메고 오자 무척 궁금했지만 감히 캐묻지는 못했다.
  효성진은 제 방처럼 익숙해진 침상에 앉으며 망연자실하게 병풍 쪽을 바라보았다.
  하산할 때에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만약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것은 강적을 만나는 것과 같이 일신에 닥치는 일일 줄 알았다.
  어린 악당에게 속고, 그의 간계에 쓰러지고, 싸우던 중에 깜짝 놀라 저보다 약한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는 그런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진 일을 겪은 아이가 악당이 되어 사람을 해치는 일, 의롭지도 고상하지도 못한 가주였던 상평의 모습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단 한 명의 소년에게 얽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단 한 명의 악당을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설양이 악당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저지른 악행의 대가로 죽어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처참한 일을 당했던 그 어린애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 것인가?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강하게 괴롭히는 최악의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나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하산하지 않는 게 옳았던 걸까? 
  그러나 이제는 스승의 곁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괴감과 깊은 갈등에 빠진 효성진은 아무렇게나 얹어 둔 상화에 시선이 멎었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느끼던 패검을, 다시는 같은 기분으로 들어올리지 못할 것 같았다.



  이튿날 설양이 깨어나자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딱 한 번 베인 뿐이지만 상가의 수사들에게 수도 없이 난도질을 당했을 때보다 훨씬 고약한 상태였다. 무자비한 검이 뼈까지 닿은 허벅지는 맷집이 강한 설양조차도 신음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아팠고 배도 무척 고팠다. 
  “이봐... 애송이 도장. 거기 있어?”
  곧 인기척이 나며 효성진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비슷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고민의 성격은 달랐으나 허탈감을 느끼는 것만은 꼭 같았다.
  “이 답답한 도장아. 어쩌자는 거야? 원점으로 돌아와버렸잖아.”
  설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평을 두 번이나 놓쳤으니 그는 이제 집 밖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것도 극히 위험하게 되었다. 
  난릉 금씨에 들어갔을 때는 등 뒤에 막강한 권력을 두고 재미있는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일은 금광선이 폐인이 되면서 끝나버렸다. 그 다음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상자안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그런데 그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젊은 도사 하나가 다 망쳐 놓았다. -그러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설양의 치명적인 허탈감은 바로 복수에 대한 집념이 다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죽을 뻔한 것, 효성진이 나타나서 바보같이 속으며 자신과 어울렸던 것, 또다시 복수를 하려고 덤볐는데 역시 방해를 당하고 중상까지 입은 것. 그냥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다고나 할까, 흉터로 뒤덮힌 왼손을 봐도 예전과 같은 악기가 치밀어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자고.”
  설양이 다시 말했다. 그는 다소 시비조로 말해 놓고 나서야, 묘하게도 눈 앞에 선 답답한 남자를 미워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고상한 멍청이가 평생의 복수를 방해하고 다리가 잘릴 정도의 상처를 입혔는데도 증오심이나, 되갚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효성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설양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허무감을 느끼고 있는 그는 이제 설양의 일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선천적으로 단정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효성진은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습관에 이끌린 듯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설양. 그대에게는 어딜 가도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런데도 굳이 악한 일만 골라서 자행해야 하겠는가?”
  “나는 일부러 악한 일을 고르는 게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지.”
  “상평에게 또 복수하러 갈 건가?”
  “안 가. 이제 질렸어.”
  설양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효성진은 그가 또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봐, 당장 나를 죽일 게 아니라면 먹을 거라도 주지? 배고파 죽겠으니까.”
  “기다리게.”
  밖으로 나간 효성진은 이내 죽 한 사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설양은 일어나 앉아서 한편으론 아파하면서도 잘 먹었다. 보고 있던 효성진이 진통제라고 내미는 약도 넙죽 받아서 입에 털어넣었다.
  잠시 후 빈 죽사발을 내려놓은 설양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효성진이 가만히 앉은 채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네.”
  설양은 무엇보다도 다리의 통증이 너무 심한 바람에 무척 짜증이 났다. 그래서 효성진의 맥없는 대답을 듣는 순간 부아가 치밀어 상을 엎어버렸다.
  “제기랄!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효성진이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일어나서 깨진 그릇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를 내려다보던 설양은 다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드러누웠다.
  그가 아무리 미쳤대도 받아치는 사람도 없는데 마냥 화를 낼 순 없었다. 가만히 효성진을 바라보던 설양은 비로소 그가 무척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놈은 왜 이러는 거지?’
  설양은 어울리지 않게 서늘해 보이는 효성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프고 의욕도 없어 만사가 귀찮았다.



  기묘하게 조용한 며칠이 흘러갔다. 설양조차 말을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의 사이에는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그 동안 효성진은 애써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다. 예상도 못한 충격을 받았다곤 하나, 그렇다고 마음속 의기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약자를 돕고 싶었고, 가슴 속에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세상을 보던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에서 설양은 고뇌에 빠진 효성진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 일로 고민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신이 영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효성진은 성심껏 설양의 수발을 들면서도 대화를 피하고 싶은 듯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 일만 하고는 쌩하니 제 자리로 가서 온종일 눈을 감고 앉아 있거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벅지의 통증이 상당히 가셔서 짜증도 함께 가라앉아갈 무렵, 설양은 점심을 먹은 뒤 그릇을 치우려는 효성진을 붙들었다.
  “효 도장.”
  “왜 그러나.”
  “우리 말 좀 하자구.”
  효성진은 그릇을 두고 순순히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생각할 시간은 많았으니 답을 할 수 있겠지? 날 어쩔 생각이야?”
  효성진은 또 ‘모르겠다’고 대답하게 될 것 같아서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설양이 답답증이 솟으려는 찰나, 효성진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뭐? 나한테 묻는 거야, 지금?”
  “...”
  “설마 나 때문에 그렇게 죽상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넌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럼 왜 그냥 죽여버리지 않는 건데?”
  “사람을 죽이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야. 그대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나는 확신이 서지 않네.”
  “내가 상평 그 놈을 죽이려고 했는데도?”
  효성진은 대답 대신 설양의 다리 위에 놓인 왼손에 시선을 던졌다. 그 뜻을 안 설양이 실소를 터뜨렸다.
  정의를 표방하는 머저리들을 숱하게 보아 왔지만 이런 놈은 정말 처음이다 싶었다.
  “효성진 도장. 대체 날 죽이든 놔주든, 누가 알아준다고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이제는 아니꼬운 게 아니라 불쌍할 지경이었다. 
  다만 금방의 대화에서 한 가지는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설양은 효성진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아마 사고를 더 치지 않는 한에는 그럴 것 같았다.
  “그대에게는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가?”
  “갱생이라고? 나더러 너처럼 지나가는 개나 소나 다 구해주고 치료해주고... 그렇게 살라는 얘기야?”
  효성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단지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걸세.”  
  “남이 나를 해치려고 들면?”
  “그대는 지나치게 갚아주지 않나.”
  설양이 차갑게 말했다.
  “도장, 당신은 과일을 깨물 때 그것이 어떤 맛일지 미리 알고 먹나? 사람을 건드릴 때도 그 사람에게서 어떤 맛이 날 지 각오는 하고 건드려야지. 안 그래?”
  효성진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그릇을 들고 나갔다. 설양 역시 팍 소리가 나게 자리에 몸을 던지고는 돌아누워버렸다. 
  그렇지만 어쩐지 설양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전연 말이 통하지 않았고 골을 내기도 했지만, 효성진이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설양은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효성진은 설양이 다친 다리를 회복할 때까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을 닫치고 가만히만 있으면 좀이 쑤셔 못 견디는 설양이었지만 꽤 조용하고 얌전하게 굴었고, 아주 지리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나간 효성진이 해가 저물어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설양의 다리가 점점 나아가며 돌봐줄 일이 적어질수록 바깥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효성진이었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창 밖으로 석양 한 자락이 스러지는 것을 보고 있던 설양이 결심한 듯 강재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뼈가 다친 것은 쉽게 낫지 않아 아직도 발을 디디면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욱신거렸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다리를 절며 밖으로 나갔다.
  작은 마을은 길 하나를 두고 양 옆으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쪽 길은 점점 좁아지며 험한 산으로 통하고 다른 쪽 길은 큰길로 통했다. 설양은 잠시 생각하다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마을 어귀에서 걸어오던 효성진이 윤이 나는 검은 옷을 입은 설양을 발견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설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흥, 난 또 네가 날 놓아주는 건 줄 알았지.”
  효성진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어 설양에게 건네 주었다. 설양이 의아해하며 펴 보니 그 안에는 작은 종이로 싼 사탕이 한 줌 가량 들어 있었다. 전날도 설양은 단 게 먹고 싶다고 혼잣말로 투정을 부렸다. 그걸 들었는지, 이 마을에는 사탕을 팔지 않아서 멀리 떨어진 성까지 가서 구해 온 것 같았다.
  설양이 종이 꾸러미를 움켜쥔 채 말했다. 
  “효성진 도장. 마음은 정했어?”
  효성진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생각 좀 해 봤는데.”
  설양은 다리를 절며 몇 발짝 걸어가서 낮은 언덕 아래를 굽어보았다.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그답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휙 하고 돌아보는 얼굴에는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빛과 비틀린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도장, 혈연관계가 없는 문파를 만들거라고 했던 거 말이지. 정말로 할 생각이야?”
  효성진은 아직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복잡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 도장, 넌 너무 순진해서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속을 거야. 이미 세상에 나오자마자 나한테 털렸잖아? 그런데 어떻게 한 문파를 세우는 큰 일을 하겠어?”
  상대를 마음대로 뭉개는 지극히 무례한 얘기였지만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효성진은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그런데 말이야. 난 악당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은 잘 알거든. 그러니 내가 네 일을 도와 줄게.”
  뜻밖의 제안에 효성진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그대가... 나를 돕겠다고?”
  자신이 정의를 위해 하려는 일을, 악당인 설양이?
  설양은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대신 기한이 있어. 딱 5년이야. 5년 동안 내가 너를 도우면, 내가 너에게 진 빚을 다 갚았다 여기고 놓아줘.”
  효성진은 심각하게 놀란 눈으로 설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대로 따져 보기도 전에 설양의 말을 듣고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역시 얼토당토 않은 얘기였다.
  효성진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다시 악행을 저지를 거라면 5년이 지나도 나는 그대를 놓아줄 수 없을 것이네.”
  그런 말을 들어도 설양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강재를 휙 던졌다.
  “그럼 지금 날 죽이던가.”
  저도 모르게 강재를 받은 효성진에게 설양이 말했다.
  “난 너처럼 아니꼬운 사람의 검에 죽긴 싫으니, 죽이려거든 내 검으로 해 줘.” 
  그렇게 말하는 설양은 여전히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효성진은 상화와 강재를 각각의 손에 쥐고 알쏭달쏭한 설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히 설양이 어렸을 때 겪은 안타까운 일 때문에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효성진은 설양과 함께 한 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온갖 모습을 다 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설양의 내면이 악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조롱하던 모습, 상평의 물건을 잘라버리려던 잔인한 모습을 다 보았는데도, 농담을 하며 이 편의 반응을 탐색하던 장난기어린 눈빛이 퇴색되지 않고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남아 있는 불안과 불신을 누르며, 마침내 효성진은 여린 희망을 품었다.
  5년 동안 노력하면 그의 거친 심사도 바뀔지 모른다, 라고.
  “좋아.”
  효성진의 짤막한 대답에 설양은 잠시 웃음을 멈추었다.
  “좋다니, 어느 쪽이?”
  효성진이 천천히 걸어와서 설양에게 강재를 내밀었다.
  “5년일세. 그 동안 절대로 악한 행동은 하면 안 되네.”
  설양은 강재를 받기 전에 우선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강재를 움켜쥐는 동시에 다른 팔로 효성진의 어깨를 감아 당겼다. 
  별안간 그가 몸을 끌어안자 당황하는 효성진에게 설양이 아픈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걷기 힘들어.”
  효성진은 한숨을 쉬며 설양의 허리를 잡고 부축해 주었다.
  “그럼 돌아가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보자구.”
  객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저녁 준비를 하러 왔다갔다 하는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흑과 백의 옷을 입고 한 덩어리가 되어 걸어가는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설양도 자신을 부축해 가는 사람의 얼굴을 재빠르게 훔쳐보았다.
  효성진은 아직도 굳은 얼굴이었고 경계심도 여전했지만. 
  눈빛에는 한결같은 한 줄기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설양성진 파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