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7598940
view 1349
2024.03.13 15:24
 (1)    (2)    (3)    (4)    (5)    (6)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마을 사람들이 퇴치해 주기를 바랬던 주시들은 대단한 귀괴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 보니 묘지의 위치와 지형이 좋지 않았다. 시체들이 주시가 되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니 아무래도 풍수의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두 사람은 함께 주시들을 처리했다. 
  한편에서 패검을 휘두르는 설양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미 어검도 할 수 있을만치 멀쩡해 보였다.
  일이 끝나자 설양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몸을 사용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저 어리숙한 도사 녀석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안녕이군.’
  그는 조심스럽게 상화의 검날을 닦는 효성진을 쳐다보았다. 
  “그 기막힌 검으로 이런 찌꺼기들이나 베다니 아깝군요. 아니다, 도장님도 떠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모양이니 이것저것 잘라봤겠죠?”
  설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뭐가됐든 또 허튼 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그는 일각이 멀다하고 우스갯소리를 했으므로 효성진의 입가에는 벌써부터 웃음이 번졌다.
  “바깥잠을 자다 보면 그 검으로 멧돼지도 잡고, 토끼도 잡고 가죽을 벗겼을 게 아녜요? 어때요, 도장님? 상화로 개구리를 잡아 본 적 있어요? 이렇게 꼬치로 줄줄 꿰어서 불에 구워본 적 있죠?”
  효성진이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고상한 척은 말아요. 고기가 싫다면 채소라도 잘라 봤을 거 아녜요. 도장님은 단검도 지니고 있지 않잖아요? 감자였어요, 당근이었어요?”
  “아니야... 그런 건 상화로 자른 적 없네.”
  “그럼 죄다 맨손으로 찢어발겼단 말이에요?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짐승 같으니.”
  설양이 혀를 차며 아래위로 훑어보자 효성진이 참지 못하고 풋 하는 소리를 터뜨렸다. 큰 소리로 웃는 건 채신머리 없다 여기는지 고개를 돌리며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옆으로 선 효성진의 고운 입꼬리를 바라보는 설양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설양은 살아오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농락한 적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결코 곱게 끝낸 적은 없었다. 순진하게 웃는 효성진의 얼굴이 그로 하여금 잔인하게 구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충동은 효성진이 이제껏 만났던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품성이 고운 만큼 강렬했다.
  “도장님, 기분이 상쾌해서 돌아가기 아까운데. 잠시 여기서 놀아요.”
  비슷한 기분이었던 효성진이 그의 말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서 모닥불을 피웠다.
  효성진은 하늘 가득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기분이 좋은 듯 한숨을 쉬었다. 
  설양은 턱에 손을 괴고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 사이로 일렁이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장님.”
  “왜 그러나.”
  “도장님은 왜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죠?”
  효성진이 미소를 지었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법이네. 굳이 다 알 필요가 뭐 있겠나.”
  “도장님은 저를 살리려고 이만큼 시간을 들이고 애를 썼는데,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일을 겪은지도 모른 채 헤어지면 허무하지 않겠어요?”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한 거지.”
  설양은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간질간질했다. 이 남자는 가식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인간을 부숴버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시종 부드럽거나 기쁨에 차 있던 이 얼굴이 놀라고, 일그러지는 꼴을 보면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그럼, 제가 말하고 싶다면요?”
  “내가... 들어주길 바라는 건가?”
  “그래요.”
  “그럼 듣도록 하지.”
  설양은 양 팔을 무릎에 괴고 불 가까이 몸을 당겼다.
  “별로 재미있는 얘긴 아닐 거에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네.”
  “도장님, 제가 단 걸 좋아하는 걸 아시죠.”
  효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점점 친밀해지며 설양이 단 것을 먹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설양은 다 죽어가는 상처투성이 몸일 때도 품 속에 사탕만은 한 주먹씩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다 먹고 나자 이 곳은 작은 마을이라 제대로 된 과자를 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효성진은 곡물을 졸여 만든 약간의 단맛이 나는 음료를 구해 주었고 설양은 그걸로 참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어릴때부터 가족이니 집이니 뭐,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기억나는 시절부터 거리를 떠돌아다녔죠.
  그 날도 저는 길거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단건 커녕 전날부터 먹은 것도 없었을 거에요. 무척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데 근처의 주점에 앉아 있던 어떤 남자가 저에게 손짓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시작부터 굶주린 어린아이가 연고도 없이 떠돌고 있으니, 과연 설양의 말대로 이제까지 해 주던 이야기와는 다른 우울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효성진의 얼굴에 벌써부터 안타까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심부름거리라도 얻어 걸리면 배를 채울 수 있으니 얼른 쫓아갔어요. 그러자 남자가 탁자 위의 간식을 가리키면서 먹고 싶냐고 물었어요. 저는 당연히 먹고 싶다고 했죠. 그러자 그가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이걸 어딘가에 전해 주면, 간식을 주겠다고 말했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며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계속 웃고 있었으나 미소가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저는 아주 기뻐하며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그가 말한 대문을 두드렸고, 밖으로 나온 사내에게 그 종이를 내밀었어요. 그런데 종이를 읽어본 사내가 별안간 제 얼굴을 후려치고 머리를 움켜쥐며 험악하게 외치더군요. ‘누가 너에게 이런 걸 갖다 주라고 했어?!’”
  설양은 효성진의 확연히 가슴아파하는 표정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이 남자는 웃기도 잘 웃더니, 슬퍼하는 시점도 남들보다 배는 빠른 것 같았다. 
  ‘잘하면 눈물도 흘릴지 모르겠는데.’
  설양은 하마터면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웃음을 띨 뻔한 것을 눌러 참았다.
  “제가 방향을 가리키자 사내는 제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주점으로 향했어요. 그렇지만 그 남자는 이미 도망을 쳐 버린 뒤였고, 탁자 위의 간식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죠. 사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탁자를 마구 걷어차 부수고 욕을 퍼부었어요. 도장님,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이런 건 길거리에선 흔한 일이라고요. 얻어맞고 발에 채이는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닌데요.”
  효성진의 반응을 보고 이러다 반도 얘기하지 못하겠다 싶었던 설양이 상냥하게 위로했다.
  “그렇지만 억울했죠. 제가 울었던 건 그 때문이었어요. 실컷 뛰고,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대가가 없어서야 되겠어요? 그래서 근처에 있던 점소이에게 그 남자가 어디로 갔느냐고, 내 간식은 어떻게 됐느냐고 징징거렸어요. 그런데 가게가 난장판이 되어서 일거리가 늘었는데 나 같이 꼬질한 어린애가 귀찮게 굴기까지 하니 태도가 곱겠나요. 또 몇 번 쥐어박힌 다음 거리로 떠밀렸죠.”
  설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도장님, 언짢으시면 그만둘까요?”
  “아니네, 괜찮아.”
  효성진은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아서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는 기운이 빠져서 그대로 한참을 걸어갔어요. 그런데 처음에 종이를 전해 주라고 했던 남자와 딱 마주친 거에요.”
  설양은 이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타인에게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던 것이고, 스스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영향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살아오는 동안 이 일을 수도 없이 곱씹었으며, 그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어두운 불꽃에 열을 더하곤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다지도 불쾌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물론 해묵은 원한이 뼛속 깊이 박혔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조절하고 장난질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을 이어갈수록 그간 숨겨왔던 광기가 멋대로 새어나오며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저는 억울하면서도 기뻤어요. 그래서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시키는대로 했지만 간식이 없어졌다고, 그 간식을 다시 줄 수 없느냐고 매달렸죠. 어리석고 재수가 없었던 거죠. 그 남자가 마침 편지를 받은 사내와 만나서 얻어맞는 바람에 상처가 나 있던 것도 못 알아보고는. 화도 나고 성가셔진 그는 저를 발로 차버렸어요. 그리곤 마차에 올라 빨리 출발하라고 마부에게 외쳤어요. 말했다시피 저는 얻어맞는 일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죠. 이 고생을 했는데 간식을 얻지 못한 게 너무너무 억울할 뿐이었어요. 그래서 끈질기게 마차를 따라가며 계속 울부짖었어요. 길이 혼잡한 바람에 마차를 따라잡을 수 있었고, 앞을 막고는 손을 흔들어 멈추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자 남자가 마부가 들고 있던 채찍을 빼앗더니, 저를 갈겨서 땅에 나자빠지게 만들었어요.”
  효성진은 이미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설양이 보란듯이 왼손을 들어올리자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동안 설양의 몸을 치료했던 그는 그의 왼손에 새끼손가락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손가락 하나만 없는 게 아니라 손 전체에 흉한 상처가 가득했다. 물론 배려심이 깊은 그는 못 본 척했고 흉터에 대해 물은 적도 없었다. 
  바로 그 울퉁불퉁한 왼손을 보이며 설양이 말했다.
  “그리고, 마차 바퀴가 제 손을 밟고 지나갔어요.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말하는 설양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빛났다. 효성진은 마치 무거운 마차의 바퀴가 아이의 손가락 위를 지나가며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여 가슴이 선득한 동시에 뜨거워졌다. 그와 같은 괴로움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생생하게 으스러졌던 흔적이 남은 손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설양은 손을 내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장님, 저는 맷집이 아주 강해요. 칼로 푹 찔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죠. 그래서인지 그런 짓을 당해도 기절조차 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아팠어요. 정말 끔찍하게 아팠죠. 살아 생전에 누구에게 무슨 짓을 당해도 그 때만큼은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
  효성진은 사람들을 도와주러 다닌 짧은 시간 동안 나름대로 가슴아픈 일들을 보고 들었지만 이렇게 절절한 개인사를, 그것도 장본인에게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조심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때부터 저는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지고자 했고, 어떤 목표를 이룰 때도 언제나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노력했지요.”
  설양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방법’이라고 말해 줘도 아직 이 소도장은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패검 강재를 집어들어 공중에서 한바퀴 돌린 다음 땅을 짚었다.
  “그래서 결국은 저도 이리저리 애를 써서 검 나부랑이나마 휘두를 수 있게 됐단 얘기죠. 한 번은 크게 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그 댁의 우두머리가 갑자기 고꾸라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어요. 그렇지만 뭐, 어쩌겠나요.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수밖에.
  원래는 힘을 더 키운 다음에 처리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됐으니까. 곧바로 내 손을 이 모양으로 만든 놈을 찾아갔죠. 근데 이 빌어먹을 놈이 욕을 그렇게 처먹고서도 명줄을 늘리지 못했나, 진작에 뒈지고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놈에게 빚을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차, 그 놈이 얼마 전에 제 검에 맞았던 약양 상씨의 가주 상평이에요.”
  이까지 말한 설양은 한참 동안 숨겨 두었던 번쩍이는 빛이 두 눈알에 다 돌아와 있었다. 새빨간 입술 한 쪽이 찢어질 듯이 위로 치켜올려진 아래로 송곳니가 삐죽 보이는 것이 익살맞은 마귀 같기도 하고, 귀여운 악동 같기도 했다.
  효성진은 아직도 아픈 이야기의 시큰거림이 가시지 않은 채로 어리둥절해졌다.
  “뭐라고?”
  이제 가식을 다 집어치운 설양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해 줘? 나를 잡으려고 아우성치던 놈들의 가주가 내 손을 이렇게 만든 놈의 아들놈이라고.”
  효성진은 한 인간이 이렇게까지 돌변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순진했다. 그는 아직도 설양이 뭔가 연극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설양이 쏘아보는 눈빛이 너무 흉악하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설양이 소름끼치게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소도장, 나는 기주의 설양이라고 해. 이런 깡촌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지. 그런데 솔직히 말하지만, 내가 악당이라는 건 사실이야. 애송이 도장님. 너의 태양같이 밝은 정의에 의하면 넌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겐가?”
  크게 놀란 효성진이 말을 더듬거리자 설양이 그를 흉내내어 말문이 막힌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넌 나한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잖아? 마음씨 고운 도장님, 난 정말로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봐!”
  아직도 효성진은 설양이 하는 말들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대신 눈으로 진실을 찾으려는 듯 찌를듯이 그를 응시했다. 즐거운 듯 웃는 모습도 이때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웃으며 말하며 부릅뜬 눈이 이 편으로 향할 때마다 효성진은 소름이 돋았다. 이 자가 악당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치광이인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일찌기 보고 싶던 온갖 감정이 효성진의 얼굴에 떠오르자 설양은 재미있어 죽을 것 같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라고 해도 기꺼이 할 것 같았다.
  “이봐, 내 생각에 너는 네 사부님 곁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게 좋겠어. 인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나대다가 크게 아픈 꼴 보기 전에 말이야. 네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 좋은 말로 충고해 주는 거야. 하지만 보다시피 별 대단한 목숨도 아니니까 보상은 바라지 마. 그럼 난 간다.”
  설양이 강재를 짊어지고 몸을 돌리자 효성진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어딜 가는 건가?”
  “어디라니... 고작 한다는 질문이 그거야? 어디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
  “대체 어쩔 셈이지?”
  “뭐? 그야... 좋은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너랑은 상관 없잖아?”
  “악행을 저지르려는 거라면 보낼 수 없네.”
  설양이 어깨에 메었던 패검을 내리며, 여전히 비웃음조로 물었다.
  “애송이 도사님, 나한테 화났어?”
  효성진은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서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심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금방 설양이 아무렇게나 던졌던 ‘스승님 곁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그의 마음 속에 치명적인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포산산인은 스스로 선택한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고 가르쳤지만 강압적인 스승은 아니었다. 수제자인 효성진은 오래 전부터 세상 밖으로 나와 약자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었지만, 포산산인은 부드럽게 만류하기만 했다. 속세에 내려가려면 각오를 해야 한다고, 인간사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러나 무력하게 고통받고 덧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효성진의 가슴을 불태웠다. 세상에 이리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외면하고 몇 백년이나 산 속에 파묻혀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죄책감이 한시도 그를 마음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의감에 가득 차서 하산한 효성진이었지만, 속세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설양이라는 조그만 돌부리를 차고 넘어졌다. 그는 설양의 말 몇 마디에 견고한 줄 알았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최소한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그 말만큼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효성진은 어린 소년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사람을 속여넘기는 모습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 이런 조그마한 일에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효성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화나지 않았네. 그대는 정말로 나쁜 사람인가? 또 사람을 해칠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보낼 수 없네.”
  “보내지 않으면?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설양은 한 발 물러나며 품 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는 이 소도장이 두려울 정도로 강한 것을 처음부터 똑똑히 보았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효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대의 악행을 본 것도 아닌데 어찌 죽여?”
  “그러면?”
  “먼저 그대를 지역 세가로 데려가서 정말로 악행을 저질렀는지 확인해야겠네.”
  그 말을 들은 설양은 대꾸도 없이 패검을 움켜쥐더니 곧장 찔러들어왔다. 그가 단거리에서 갑작스레 검을 날렸는데도 효성진은 한 걸음 물러나며 곧바로 상화를 튕겨 막아내었다.
  검이 몇 번 부딪히자 설양은 효성진의 힘이 너무 강해 패검을 제대로 쥐고 있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항복하게!”
  “웃기지 마!”
  설양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도 웃으며 강재를 크게 내리쳤다. 효성진이 상화에 힘껏 영력을 주입한 상태로 받아내자 결국 강재가 튕겨나갔고 비어버린 설양의 오른손까지 충격이 전해져 와 벌벌 떨렸다. 
  효성진이 앞으로 나서며 설양의 팔을 나꿔채려고 했다. 그러자 두려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나는 시늉을 하던 설양이, 별안간 가까워진 효성진의 얼굴에 대고 푸 하고 입을 뿜었다. 
  갑자기 전면을 덮친 가루가 눈에 들어가자 효성진은 곧장 눈을 뜰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와락 달려든 설양이 연달아 비틀거리는 효성진의 몸에 마비독침을 꽂았다. 
  설양은 쓰러진 채 괴로워하는 효성진을 내버려두고 여유있게 걸어가서 떨어진 강재를 주워 왔다.
  효성진은 눈을 못 뜨는 상태로 몸이 빠르게 마비되어 가며 말도 하지 못했다.
  설양은 그의 머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검날을 위협적으로 땅에 박았다.
  “여봐, 도장. 세상이 참 무섭지? 너는 정말로 강하지만, 내가 지금 네 목을 따면 죽겠어, 안 죽겠어?”
  그가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혈연이 없는 문파를 세우겠다고? 나같은 놈이 네 문파에 몰래 들어가면, 네가 알아볼 수나 있을까?”
  설양은 앉은 채로 손에 쥔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효성진이 아픈 눈을 가리며 넓은 소맷자락이 얼굴을 덮었지만, 한 공간에서 지겹게도 마주했더니 그의 얼굴이 이미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이 된 상태였다. 고결하고 품위있는 얼굴은 설양이 가장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 설양은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가 훌쩍 일어나 땅에 꽂혔던 강재를 거두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좋았어도 네놈을 죽여서 흉시로 만들어 부렸을 거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 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