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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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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직전,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낮은 시각.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깨어나지 않을 시간이었다.
남망기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일어나지는 않았다. 운심부지처가 아니라서 일어나도 할 일이 없는데다, 위무선이 왼팔에 폭 안겨 있었다. 이불은 언제나처럼 다 뺏어가서 허리 아래로 고치처럼 둘둘 감은 상태였다.
이 편을 향하고 있는 얼굴이 마치 자는 척을 하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위무선은 잠을 자면서도 흔히 웃었다. 어쩔 때에는 곤히 자고 있는 얼굴을 톡톡 건드려 보면 무슨 재미난 꿈을 꾸는지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남망기는 몸을 구부려 입꼬리가 올라간 따스한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그리고는 원래 자세로 돌아와 눈을 감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위무선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주변을 구석구석 다 밝히고 난 다음에야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마침내 희미하게 눈을 뜨자, 간밤에도 남망기와 잔뜩 사랑을 나눈 여파로 달콤한 피로감이 덮쳤다.
“남잠?”
“응.”
언제나 칼같이 돌아오는 답을 듣고 몸을 일으키려고 보니 양 다리에 이불자락이 감겨 왔다. 끙끙대며 이불을 풀어낸 위무선이 미안한 듯 남망기의 몸에다 덮어 주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은 후 객점을 나섰다.
“남잠, 오늘도 날아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전날에도 기산 끄트머리까지 날아오느라 한참 동안 어검을 했지만, 아직도 남망기는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
“이 근처야. 어검은 하지 않을 거다.”
남망기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근처라고 말했지만, 시내를 벗어난 뒤에도 오랫동안 흙길을 따라 걸어갔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위무선은 떠드는 것도 지쳤는지 잠시 조용해졌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남잠, 나 다리 아파.”
노인이나 병자도 아니고, 심지어 보통 사람도 아닌 수선인이 걷는 걸로 다리가 아플 리 없다. 남망기는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하고 조금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위무선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다리 아프다고. 그러니까 업어줘.”
“장난 치지 마.”
“장난 아니야. 업어 달라니까!”
그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면 필경에는 원하는대로 되고 말 것이지만 남망기는 일단 무시하고 걸어갔다. 그러자 위무선이 어어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쫓아왔다.
“남잠, 내가 널 얼마나 많이 업어줬는데! 쩨쩨하게 굴기야!”
“네가 날 업어줬다고?”
“그래! 전에 냉천에 갈 때 업어줬잖아. 너 시체처럼 늘어져서 엄청 무거웠어.”
사실은 그 반대였지만, 위무선이 뻔뻔하게 우겼다.
“그럼 한 번뿐인데.”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업힌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자 위무선이 단박에 기가 막히다는 듯 외쳤다.
“한 번뿐이라니! 너 도륙현무한테 공격당할때 내가 업고 나온 거 기억 안 나?”
남망기가 희미하게 웃으며 발을 멈추었다.
그가 말없이 몸을 굽히자, 맘이 바뀔새라 위무선은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찰싹 달라붙었다.
그렇게 업힌 뒤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잠.”
“왜.”
“남잠, 남잠, 남잠남잠...”
남망기는 이제 위무선이 할 말도 놀릴 주제도 다 떨어져서 어리광을 부리는 걸 알고 조용히 웃었다.
함광군답지 않게 한쪽 입가를 올리는 불량한 미소를 위무선은 애석하게도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쯤 지나 남망기가 위무선을 업고 도착한 곳은 묘지였다.
남망기의 등에서 내려온 위무선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궁금한 듯 쳐다보았다.
“위영. 네 금단을 뽑아낸 흉시.”
“응?”
“이 곳에서 찾았어.”
비로소 이 곳을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된 위무선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온정, 남희신이 합심하여 위무선의 몸으로 금단을 옮긴 뒤, 흉시는 남망기의 손에 의해 그대로 소멸되었다.
흉시의 내력은 몰라도, 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위무선에게 금단을 제공했으니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남망기는 그 죽은 이에게 참배를 하기 위해 위무선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분의 묘비는 어디 있어?”
“몰라.”
“모른다고?”
“나는 이 곳에서 엄청난 흉신이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온 것뿐이야. 그리고 여기서 그와 마주쳤지. 어떤 무덤의 주인인지는 알지 못해. 어쩌면 무덤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가 왜 흉시가 되었는지도... 몰라.”
“...그렇구나.”
위무선은 습관처럼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대며 어지럽게 서 있는 묘비들을 바라보았다. 까닥하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약했던 금단은 이제 걱정이 없을만치 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그럼, 그냥 여기에 서서 예를 올리자.”
“응.”
두 사람은 늘어선 묘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이미 죽어서 시체조차 소멸되어버린 존재에게 실질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며 공양을 올릴 뿐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금단을 제공해 준 것은 흉시지만 진정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흘러갔다.
하염없이 위무선은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지금껏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마음을 끌어내었다.
“남망기.”
화난 척을 하거나 놀릴 때가 아니면 불린 적 없는 이름을, 위무선이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며 입에 담자 남망기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에게 금단을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뭐랄까. 나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한 게 아니야. 단지 말로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그랬어. 남망기, 남잠. 네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긴 시간을... 혼자서...”
위무선은 그 동안 남망기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상상 속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말을 많이 했던지. 그러나 현실이 되고 보니 상상했던 모든 말이 한꺼번에 섞이며, 그 위를 터질 듯한 감정이 다 덮어버렸다.
위무선이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애타도록 고마워하고, 말조차 제대로 맺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남망기의 눈 역시 감정을 주체 못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말주변이 없는 그는 감정이 고조되자 더욱 말문이 막혔다.
남망기가 시선을 피하며 메마르게 중얼거렸다.
“...고마우면 금단이나 빨리 맺고. 사술은 절대로 부리지 마.”
그 말에 위무선이 눈빛을 달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남잠. 나 할 말이 있어.”
남망기가 외면한 채 차마 이쪽을 보지 못하자 위무선이 그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 말이야... 꼭 한 번은 주술을 사용해야 해.”
이 말에 남망기가 홱 고개를 돌렸다.
“원기를 다루는 음술은 절대로 쓰면 안 돼.”
“원기를 다루는 음술이 필요해.”
이제 남망기는 완전히 돌아서서 위무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대번에 정색을 하는 남망기를 보고 위무선은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남잠, 잊었어? 음호부를 파괴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술법을 쓰지 않고는 안 되고.”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면서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는 깊게 고민해 본 결과, 역시 음호부는 파괴하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기산 온씨를 무너뜨릴 때, 위무선은 음호부가 가진 최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사용으로 온 천지가 피로 물들었다. 그 때 불야천에 있던 사람들은 음호부가 지닌 가공한 힘에 하나같이 경악을 했는데, 위무선 또한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한 인간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힘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헛점이 생겨 음호부가 멋대로 날뛴다면 곧바로 그 힘만큼 대단한 재앙이 닥칠지 몰랐다. 다만 그 당시에는 위무선이 목숨같던 금단을 잃은 상태였고, 태산같은 기산 온씨에 대항해 복수를 할 방법도 없는데다 미친 듯한 복수심에 끓어오르며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었다. 전쟁이 끝나 세상이 평화를 되찾았고, 위무선은 천만뜻밖에도 금단을 되살릴 수 있었다.
또한 위무선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걱정하고 사랑하고, 지켜주는 사람이 생겼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음호부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그것은 음호부가 위무선 한 사람에게 귀속되지 않는 물건이라는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음호부를 뺏아간다면 위무선과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음호부를 노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랐다. 어느 날 또다시 흉악한 세력이 일어나 음호부를 쟁탈하려 한다면, 위무선의 거취대로 운심부지처나, 연화오가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위무선이 음호부를 사용했을 때에는 선문백가가 다 모인 상태였다. 수진계의 모든 가문이 음호부의 위력을 목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무선은 내심으로 계속 골머리를 썩혀 왔다. 원래는 금단이 완전히 여물고 나면 음호부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금단이란 게 한 두달만에 맺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오래도록 음호부를 내버려두어도 탈이 없을지 날이 갈수록 불안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소중한 반려자인 남망기에게 있었다. 단순한 부적 한 장도 못 쓰게 할 정도로 엄하게 구는 그가, 음호부를 파괴할 수 있을만치 엄청난 술법을 부리는 걸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염려가 지금 바로 눈 앞에서 현실이 되려는 참이었다.
사일지정 후로 남망기가 이토록 사나운 눈으로 위무선을 쏘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안 돼.”
“남잠. 음호부는 반드시 없애야 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방법? 저건 천하의 극음한 물건이야.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어?”
“찾아 봐야지.”
“남잠, 부탁이야. 이번만큼은 고집부리지 말아줘. 딱 한 번 뿐이야. 음호부만 파괴하고 나면, 내가 주술을 쓸 일이 뭐가 있겠어? 이건 정말로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이해해 줘야...”
“안 돼. 음호부를 파괴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안 돼.”
위무선이 흠칫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남망기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말문이 막혔다.
마치 난장강에서 살아나온 후 정도를 벗어난 짓을 할 때마다 반감을 뿌리던 때와 꼭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 남망기를 대하자 위무선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수선인이 사술에 손을 댈 때는 눈 앞의 편리함 때문에 샛길로 빠지거나, 영력이 부족해서 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둘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세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강한 영력의 소유자였다. 위무선은 단지 재미있고 다양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주술에 심취했을 뿐이고, 가풍이 자유로운 운몽 강씨의 가주 강풍면은 딱히 그런 그를 제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무선은 멀쩡하게 패검을 차고 있던 시절에도 주술을 사용하는 데 아주 익숙했다. 그러니 패검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주술사가 되어버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위무선은 남망기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온조를 처리했던 시점부터 자신은 음령사귀에 관계된 마도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음술을 너무 많이 남용했다. 더구나 남망기는 마도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아정한 고소 남씨의 공자였다. 음기와 무관한 단순한 주문조차 못 쓰게 하는 건 과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말에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남망기가 자신을 신뢰할 때의 얘기였다. 지금 남망기가 바라보는 눈에서는 그런 훈훈한 느낌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득 옛날처럼 욱할 뻔한 위무선이 깜짝 놀라며 속을 다스렸다.
‘아니,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나도 참. 남망기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고작 말 몇 마디 부딪힌 걸 가지고 화를 내려고 하다니.’
남망기는 단지 음호부와 사술 얘기에 심사가 꼬였을 뿐이다. 그러니 마음이 가라앉고 난 뒤에 차근차근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남잠, 우선 돌아가자. 돌아가서 얘기해.”
남망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돌아오는 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위무선은 무척 골치가 아픈 동시에 속이 상했다.
두 사람은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 잘 시간이 될때까지도 서로를 외면했다.
우선 남망기가 위무선을 피하고 있었고, 위무선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눈치를 살펴보자, 다행히 남망기의 화기가 누그러드는 듯도 했다.
먼저 침상에 오른 위무선은 그가 운기조식을 끝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남망기는 온종일 위무선을 피했지만 한 침상에 든 다음에는 그럴래야 그럴 수 없었다.
“남잠.”
위무선이 달래는 듯 달콤한 목소리로 불렀다. 남망기는 앉은 채로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말이 없었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얼굴을 잡아 이 쪽으로 돌리며 다시 불렀다.
“남잠, 나 좀 봐.”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든 남망기의 눈빛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쩐지 분노를 넘어서서 상처마저 받은 듯한 감정이 느껴지자 위무선은 꾹꾹 누르고 있던 답답함과 울분이 걷히며 애틋한 마음이 솟았다.
“화내지 마, 남잠. 네가 그러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위무선이 그렇게 말해도 남망기는 ‘화 안났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정직하게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이 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는 모습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마지못한 듯 올라온 손이 천천히 위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망기는 그대로 위무선을 끌어안고 침상에 몸을 뉘었다.
조금 있으려니 남망기는 잠이 들어버린 듯 고요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느껴졌다.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남망기가 위무선을 힘껏 끌어안고 마음대로 벗은 몸을 다루고, 위무선은 그의 팔 안에서 웃거나 놀리며 넘치는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오늘은 단지 따로 노는 마음을 간신히 한 공간에 모아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게 고작이라니, 너무 우울했다. 남망기의 조용한 숨결과 단향목 향기가 더욱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음호부는 반드시 파괴하고 말겠다고, 위무선은 마음 속으로 더욱 단단한 가시를 세웠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해가 뜨기 직전,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낮은 시각.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깨어나지 않을 시간이었다.
남망기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일어나지는 않았다. 운심부지처가 아니라서 일어나도 할 일이 없는데다, 위무선이 왼팔에 폭 안겨 있었다. 이불은 언제나처럼 다 뺏어가서 허리 아래로 고치처럼 둘둘 감은 상태였다.
이 편을 향하고 있는 얼굴이 마치 자는 척을 하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위무선은 잠을 자면서도 흔히 웃었다. 어쩔 때에는 곤히 자고 있는 얼굴을 톡톡 건드려 보면 무슨 재미난 꿈을 꾸는지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남망기는 몸을 구부려 입꼬리가 올라간 따스한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그리고는 원래 자세로 돌아와 눈을 감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위무선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주변을 구석구석 다 밝히고 난 다음에야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마침내 희미하게 눈을 뜨자, 간밤에도 남망기와 잔뜩 사랑을 나눈 여파로 달콤한 피로감이 덮쳤다.
“남잠?”
“응.”
언제나 칼같이 돌아오는 답을 듣고 몸을 일으키려고 보니 양 다리에 이불자락이 감겨 왔다. 끙끙대며 이불을 풀어낸 위무선이 미안한 듯 남망기의 몸에다 덮어 주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은 후 객점을 나섰다.
“남잠, 오늘도 날아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전날에도 기산 끄트머리까지 날아오느라 한참 동안 어검을 했지만, 아직도 남망기는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
“이 근처야. 어검은 하지 않을 거다.”
남망기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근처라고 말했지만, 시내를 벗어난 뒤에도 오랫동안 흙길을 따라 걸어갔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위무선은 떠드는 것도 지쳤는지 잠시 조용해졌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남잠, 나 다리 아파.”
노인이나 병자도 아니고, 심지어 보통 사람도 아닌 수선인이 걷는 걸로 다리가 아플 리 없다. 남망기는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하고 조금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위무선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다리 아프다고. 그러니까 업어줘.”
“장난 치지 마.”
“장난 아니야. 업어 달라니까!”
그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면 필경에는 원하는대로 되고 말 것이지만 남망기는 일단 무시하고 걸어갔다. 그러자 위무선이 어어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쫓아왔다.
“남잠, 내가 널 얼마나 많이 업어줬는데! 쩨쩨하게 굴기야!”
“네가 날 업어줬다고?”
“그래! 전에 냉천에 갈 때 업어줬잖아. 너 시체처럼 늘어져서 엄청 무거웠어.”
사실은 그 반대였지만, 위무선이 뻔뻔하게 우겼다.
“그럼 한 번뿐인데.”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업힌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자 위무선이 단박에 기가 막히다는 듯 외쳤다.
“한 번뿐이라니! 너 도륙현무한테 공격당할때 내가 업고 나온 거 기억 안 나?”
남망기가 희미하게 웃으며 발을 멈추었다.
그가 말없이 몸을 굽히자, 맘이 바뀔새라 위무선은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찰싹 달라붙었다.
그렇게 업힌 뒤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잠.”
“왜.”
“남잠, 남잠, 남잠남잠...”
남망기는 이제 위무선이 할 말도 놀릴 주제도 다 떨어져서 어리광을 부리는 걸 알고 조용히 웃었다.
함광군답지 않게 한쪽 입가를 올리는 불량한 미소를 위무선은 애석하게도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쯤 지나 남망기가 위무선을 업고 도착한 곳은 묘지였다.
남망기의 등에서 내려온 위무선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궁금한 듯 쳐다보았다.
“위영. 네 금단을 뽑아낸 흉시.”
“응?”
“이 곳에서 찾았어.”
비로소 이 곳을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된 위무선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온정, 남희신이 합심하여 위무선의 몸으로 금단을 옮긴 뒤, 흉시는 남망기의 손에 의해 그대로 소멸되었다.
흉시의 내력은 몰라도, 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위무선에게 금단을 제공했으니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남망기는 그 죽은 이에게 참배를 하기 위해 위무선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분의 묘비는 어디 있어?”
“몰라.”
“모른다고?”
“나는 이 곳에서 엄청난 흉신이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온 것뿐이야. 그리고 여기서 그와 마주쳤지. 어떤 무덤의 주인인지는 알지 못해. 어쩌면 무덤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가 왜 흉시가 되었는지도... 몰라.”
“...그렇구나.”
위무선은 습관처럼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대며 어지럽게 서 있는 묘비들을 바라보았다. 까닥하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약했던 금단은 이제 걱정이 없을만치 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그럼, 그냥 여기에 서서 예를 올리자.”
“응.”
두 사람은 늘어선 묘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이미 죽어서 시체조차 소멸되어버린 존재에게 실질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며 공양을 올릴 뿐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금단을 제공해 준 것은 흉시지만 진정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흘러갔다.
하염없이 위무선은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지금껏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마음을 끌어내었다.
“남망기.”
화난 척을 하거나 놀릴 때가 아니면 불린 적 없는 이름을, 위무선이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며 입에 담자 남망기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에게 금단을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뭐랄까. 나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한 게 아니야. 단지 말로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그랬어. 남망기, 남잠. 네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긴 시간을... 혼자서...”
위무선은 그 동안 남망기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상상 속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말을 많이 했던지. 그러나 현실이 되고 보니 상상했던 모든 말이 한꺼번에 섞이며, 그 위를 터질 듯한 감정이 다 덮어버렸다.
위무선이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애타도록 고마워하고, 말조차 제대로 맺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남망기의 눈 역시 감정을 주체 못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말주변이 없는 그는 감정이 고조되자 더욱 말문이 막혔다.
남망기가 시선을 피하며 메마르게 중얼거렸다.
“...고마우면 금단이나 빨리 맺고. 사술은 절대로 부리지 마.”
그 말에 위무선이 눈빛을 달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남잠. 나 할 말이 있어.”
남망기가 외면한 채 차마 이쪽을 보지 못하자 위무선이 그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 말이야... 꼭 한 번은 주술을 사용해야 해.”
이 말에 남망기가 홱 고개를 돌렸다.
“원기를 다루는 음술은 절대로 쓰면 안 돼.”
“원기를 다루는 음술이 필요해.”
이제 남망기는 완전히 돌아서서 위무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대번에 정색을 하는 남망기를 보고 위무선은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남잠, 잊었어? 음호부를 파괴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술법을 쓰지 않고는 안 되고.”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 머무르면서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는 깊게 고민해 본 결과, 역시 음호부는 파괴하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기산 온씨를 무너뜨릴 때, 위무선은 음호부가 가진 최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사용으로 온 천지가 피로 물들었다. 그 때 불야천에 있던 사람들은 음호부가 지닌 가공한 힘에 하나같이 경악을 했는데, 위무선 또한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한 인간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힘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헛점이 생겨 음호부가 멋대로 날뛴다면 곧바로 그 힘만큼 대단한 재앙이 닥칠지 몰랐다. 다만 그 당시에는 위무선이 목숨같던 금단을 잃은 상태였고, 태산같은 기산 온씨에 대항해 복수를 할 방법도 없는데다 미친 듯한 복수심에 끓어오르며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었다. 전쟁이 끝나 세상이 평화를 되찾았고, 위무선은 천만뜻밖에도 금단을 되살릴 수 있었다.
또한 위무선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걱정하고 사랑하고, 지켜주는 사람이 생겼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음호부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그것은 음호부가 위무선 한 사람에게 귀속되지 않는 물건이라는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음호부를 뺏아간다면 위무선과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음호부를 노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랐다. 어느 날 또다시 흉악한 세력이 일어나 음호부를 쟁탈하려 한다면, 위무선의 거취대로 운심부지처나, 연화오가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위무선이 음호부를 사용했을 때에는 선문백가가 다 모인 상태였다. 수진계의 모든 가문이 음호부의 위력을 목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무선은 내심으로 계속 골머리를 썩혀 왔다. 원래는 금단이 완전히 여물고 나면 음호부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금단이란 게 한 두달만에 맺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오래도록 음호부를 내버려두어도 탈이 없을지 날이 갈수록 불안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소중한 반려자인 남망기에게 있었다. 단순한 부적 한 장도 못 쓰게 할 정도로 엄하게 구는 그가, 음호부를 파괴할 수 있을만치 엄청난 술법을 부리는 걸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염려가 지금 바로 눈 앞에서 현실이 되려는 참이었다.
사일지정 후로 남망기가 이토록 사나운 눈으로 위무선을 쏘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안 돼.”
“남잠. 음호부는 반드시 없애야 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방법? 저건 천하의 극음한 물건이야.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어?”
“찾아 봐야지.”
“남잠, 부탁이야. 이번만큼은 고집부리지 말아줘. 딱 한 번 뿐이야. 음호부만 파괴하고 나면, 내가 주술을 쓸 일이 뭐가 있겠어? 이건 정말로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이해해 줘야...”
“안 돼. 음호부를 파괴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안 돼.”
위무선이 흠칫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남망기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말문이 막혔다.
마치 난장강에서 살아나온 후 정도를 벗어난 짓을 할 때마다 반감을 뿌리던 때와 꼭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 남망기를 대하자 위무선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수선인이 사술에 손을 댈 때는 눈 앞의 편리함 때문에 샛길로 빠지거나, 영력이 부족해서 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둘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세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강한 영력의 소유자였다. 위무선은 단지 재미있고 다양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주술에 심취했을 뿐이고, 가풍이 자유로운 운몽 강씨의 가주 강풍면은 딱히 그런 그를 제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무선은 멀쩡하게 패검을 차고 있던 시절에도 주술을 사용하는 데 아주 익숙했다. 그러니 패검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주술사가 되어버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위무선은 남망기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온조를 처리했던 시점부터 자신은 음령사귀에 관계된 마도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음술을 너무 많이 남용했다. 더구나 남망기는 마도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아정한 고소 남씨의 공자였다. 음기와 무관한 단순한 주문조차 못 쓰게 하는 건 과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의 말에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남망기가 자신을 신뢰할 때의 얘기였다. 지금 남망기가 바라보는 눈에서는 그런 훈훈한 느낌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득 옛날처럼 욱할 뻔한 위무선이 깜짝 놀라며 속을 다스렸다.
‘아니,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나도 참. 남망기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고작 말 몇 마디 부딪힌 걸 가지고 화를 내려고 하다니.’
남망기는 단지 음호부와 사술 얘기에 심사가 꼬였을 뿐이다. 그러니 마음이 가라앉고 난 뒤에 차근차근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남잠, 우선 돌아가자. 돌아가서 얘기해.”
남망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돌아오는 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위무선은 무척 골치가 아픈 동시에 속이 상했다.
두 사람은 운심부지처로 돌아온 후 잘 시간이 될때까지도 서로를 외면했다.
우선 남망기가 위무선을 피하고 있었고, 위무선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눈치를 살펴보자, 다행히 남망기의 화기가 누그러드는 듯도 했다.
먼저 침상에 오른 위무선은 그가 운기조식을 끝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남망기는 온종일 위무선을 피했지만 한 침상에 든 다음에는 그럴래야 그럴 수 없었다.
“남잠.”
위무선이 달래는 듯 달콤한 목소리로 불렀다. 남망기는 앉은 채로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말이 없었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얼굴을 잡아 이 쪽으로 돌리며 다시 불렀다.
“남잠, 나 좀 봐.”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든 남망기의 눈빛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쩐지 분노를 넘어서서 상처마저 받은 듯한 감정이 느껴지자 위무선은 꾹꾹 누르고 있던 답답함과 울분이 걷히며 애틋한 마음이 솟았다.
“화내지 마, 남잠. 네가 그러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위무선이 그렇게 말해도 남망기는 ‘화 안났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정직하게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이 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는 모습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마지못한 듯 올라온 손이 천천히 위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망기는 그대로 위무선을 끌어안고 침상에 몸을 뉘었다.
조금 있으려니 남망기는 잠이 들어버린 듯 고요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느껴졌다.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남망기가 위무선을 힘껏 끌어안고 마음대로 벗은 몸을 다루고, 위무선은 그의 팔 안에서 웃거나 놀리며 넘치는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오늘은 단지 따로 노는 마음을 간신히 한 공간에 모아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게 고작이라니, 너무 우울했다. 남망기의 조용한 숨결과 단향목 향기가 더욱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음호부는 반드시 파괴하고 말겠다고, 위무선은 마음 속으로 더욱 단단한 가시를 세웠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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