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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19.


이튿날, 이른 아침에 아이스는 매버릭의 관사를 방문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기까지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전날 헤어질 때 자신에게서 훌쩍 멀어지던 매버릭의 서먹함과 불안함에 그도 덩달아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스는 애먼 옷깃을 괴롭혔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다가 두 개를 풀고, 세 번째 단추를 풀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착잡하게 한숨을 쉬며 연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간밤에 오래도록 흐느낀 탓에 눈이 따끔거렸고, 목은 칼칼했다.

“매버릭…….”

아이스는 잠긴 목소리로 매버릭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쉰 음성이 스스로 듣기에도 거북했다. 약간의 짜증과 때아닌 흥분에 그는 좀처럼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었다. 턱이 저절로 떨렸다. ‘침착하자.’ 아이스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감정도 없는 것처럼, 매버릭이 바라는 대로 좋은 사람이 되리라. 그것이 서글픈 유령이 살아생전 남긴 유언이라면.

“매버릭, 나야.”

아이스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오늘도 날씨는 화창했고, 강렬한 한 줄기 햇살이 아이스의 얼굴 위로 비스듬히 드리워졌다. 가슴께까지 내려온 햇살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화살촉처럼.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아이스는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리던 성마른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아이스의 심장도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물기 어린 매초롬한 얼굴이 아이스를 맞이했다. 그 눈이 부신 순간, 아이스는 자신의 심장이 멎었다고 확신했다.

“일찍 왔네.”

매버릭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아이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바로 자신의 눈앞에 말끔한 얼굴로 미소 짓는 아이스를 보고도 좀처럼 이 순간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매버릭은 어쩌면 자신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이후로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

“길이 막힐까 봐.”

아이스는 지나가는 투로 무심하게 말했다. 미라마에서 LA 다저스 홈구장까지는 차로 약 2시간 30분, 그리고 오늘은 저녁 경기다. 차가 막힌다고 해봤자 몇 시간이겠는가. 매버릭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매버릭은 아이스가 태연하게 둘러댄 말에 진위와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아이스가 자신을 만나러 찾아와 준 것이 기뻤다. 어젯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아이스와 다시 연락이 끊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내심 체념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그런 마음과는 달리 매버릭은 퉁명스레 되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이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돌렸다. 이제 매버릭이 멋쩍어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도시락 싸고 있었어. 야구장에서 파는 핫도그는 별로라며?”
“그럭저럭 먹을만해. 뭘 쌌는데?” 
“샌드위치랑 크래커. 그리고 과일 조금…….”
“샌드위치는 직접 만든 거야?”
“응.”

아이스는 괜스레 가슴이 벅찼다. 빵 부스러기가 붙은 바지, 뭉툭한 손톱 끝에 묻은 땅콩버터와 젖은 얼룩 자국이 남은 얇은 반소매 셔츠. 아이스는 빵 부스러기가 매버릭의 바지 위로 떨어지기까지의 짧은 여정을 상상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매버릭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입술에 힘을 준다. 그 얼굴은 아이스에게 애틋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느 아름다운 소도시의 노스탤지어와 같은.

“들어와.”

매버릭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이스는 현관으로 발을 내디뎠다. 매버릭은 아이스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아이스는 다시 멀어지는 매버릭의 뒷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 매버릭이 머물렀던 자리에 아주 희미하게 사과 향기가 났다.

집안은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사람 특유의 쌀쌀함이 감돌았다. 구색만 갖춘 투박한 가구가 지루하게 서 있었고, 곧 수명을 다할 모양인지 스탠드 램프가 위태롭게 깜빡였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해 흐릿한 조명보다 허공을 부유하는 비늘 같은 먼지가 도리어 찬란했다.

네모난 식탁 위에는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대충 잘라낸 식빵 테두리가 접시에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드문드문 끊어진 사과 껍질이 수북했다. 땅콩버터를 듬뿍 바른 식빵 위에 크기가 제각각 다른 얇은 사과 조각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있었다. 그것보다 앞서 만든 샌드위치는 한쪽에는 땅콩버터를, 다른 한쪽에는 젤리를 바른 것이었다.

지극히 미국적인, 미국인다운, 꾸밈을 모르는 촌스러운 차림. 무색무취의 평범함을 갈망하는 손끝의 주인은 그의 염원과는 정반대로 별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다만 둥그스름한 뺨에 툭 튀어나온 사마귀만은 낯뜨거운 표현이지만, 아메리카의 연인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렸다.

이어서 아이스는 침실 창틀에 수북하게 쌓인 견과류를 발견했다. 캐슈넛과 마카다미아, 호두가 주를 이루었는데 하나같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아이스는 조개무지처럼 쌓인 견과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매버릭이 말했던 ‘잭’이라는 친구의 실존을 의심했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 금방 끝나.”

매버릭이 식탁 앞에 서며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아이스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티테이블에 놓인 A5 판형의 잡지 한 권을 집었다. 

“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어?” 

아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반항적인 매버릭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양 잡지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전에 누가 정기 구독을 부탁해서…….” 

매버릭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퍽 곤란한 눈치였다. 그래서 아이스는 더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편적인 정보를 수집해서 의문을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마침 얇은 잡지의 한 부분이 유독 나달나달하게 벌어진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매버릭이 그 페이지만 여러 번 읽은 모양이었다. 펼쳐보니 독자가 투고한 시시한 농담 코너가 나왔다. 매버릭 나름대로 일상에서 평범한 재미를 찾았던 걸까.

아이스가 난제 앞에서 골머리를 앓는 동안, 매버릭은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도시락을 마저 쌌다. 세 칸짜리 민트색 플라스틱 도시락에 모양새가 엉성한 샌드위치가 자리 잡았다. 그다음은 반달 모양으로 자른 오렌지와 샌드위치가 되지 못한 사과 차례였다.

매버릭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리 굼뜨고 힘이 없었다. 게다가 도시락 뚜껑을 한 번에 닫지 못하고 고전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혼자 짜증을 내는 모습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이스는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매버릭, 잠깐만.”
“어?”

갑작스러운 아이스의 부름에 매버릭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위압감을 느낀 매버릭은 주춤거리며 아이스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스는 달아나려는 매버릭을 돌려세우고 곧바로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안 되겠다. 열이 높네. 경기는 다음에 보자.”

아이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매버릭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아. 가서 보기만 하는 건데 뭐가 힘들겠어? 기껏해야 사람들 등쌀에 시달리는 거잖아. 난 전투기도 조종한다고. 그런 것 정돈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고집부리지 말고 오늘은 쉬어.”

아이스는 착잡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 싶어.”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매버릭.”
“보고 싶어.”

매버릭은 자꾸만 고집을 부렸다.

“보고 싶었단 말이야. 얼마나 기대했는데.”

매버릭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매달렸다. 역시 몸이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종종 매버릭이 사춘기 애새끼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 아이스는 막막해졌다.

“알았어.”

결국, 아이스는 매버릭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매버릭이 고개를 들고 아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 얼굴에 아이스는 작은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패배감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

“그래도 경기장에서 보는 건 무리야. 집에서 중계로 보자.”
“아.”

아이스의 타협안이 못마땅한지 매버릭이 싫은 소리를 냈다.

“같이.”

아이스는 서둘러 덧붙였다. 매버릭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보자는 제안은 마음에 들었다.

“우선 병원부터 다녀오자.”
“병원은 안 가면 안 될까?”

매버릭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그의 침묵이 괴로웠다. 그래서 슬그머니 아이스의 눈치를 보며 변명조로 덧붙여 말했다.

“지긋지긋해.”
“알았어. 집에 약은 있어?”

다행스럽게도 아이스는 자신을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갈 마음은 없는 듯했다. 착각일까. 아이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보다 무른 것 같았다. 아니, 다른 사람과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응, 있어. 아마도 있을 거야.”

매버릭은 지금 자신이 혼란스러운 이유가 열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착각이어도, 착각이 아니어도 아이스의 자상한 태도에 기대해서 돌아올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매버릭에게 희망은 크리스마스와 같았다. 조악하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꿈에 부풀어 놓아둔 양말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욕실에?”
“아니, 부엌 서랍에.”

아이스가 부드러운 말씨로 묻자,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아이스는 우선 매버릭을 식탁 의자에 앉힌 다음, 부엌 서랍을 뒤져 약을 찾았다. 타이레놀이 있었다. 아이스가 타이레놀 두 알을 건네자, 매버릭은 얼른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조금 전에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와 약을 삼키려다가 아이스에게 제지당했다. 염소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물이 매버릭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실 것이었다.

“눈 좀 붙여. 경기 시작할 때 깨워줄게.”

아이스는 매버릭을 침대에 눕혔다.

“고마워.”

매버릭은 이불을 덮으며 힘없이 말했다. 실은 아이스가 말하기 전까지는 조금 몽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자신이 아픈 줄도 몰랐는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온몸이 쑤시기까지 했다.

아이스는 매버릭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어질러진 부엌을 정리하려고 일어섰다. 기척을 느낀 매버릭이 눈을 도로 반짝 뜨며 아이스를 붙잡았다.

“카잔스키, 정말 이따 같이 중계 볼 거지? 나 잠든 사이에 가버리는 건 아니지?”
“약속했잖아.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아이스의 단호한 명령조에 매버릭은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을 괴롭히던 잡념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사고하지 않는 단조로운 삶은 편안하다. 온갖 위협으로부터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고,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순응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 * *


매버릭이 잠든 사이에 아이스는 식당에 들러 치킨 수프를 포장하고, 그다음에 약국에 들러 이부프로펜 성분의 약인 애드빌을 사서 돌아왔다. 매버릭의 열이 쉽게 내릴 것 같지 않아서 타이레놀과 교차 복용시킬 생각에서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스는 열을 내리기 위해 아세트아미노펜과 이부프로펜, 혹은 아세트아미노펜과 덱시부프로펜을 교차해서 먹기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이들은 아침에는 말짱하다가도 갑작스레 아프고는 하는 법이니까. 어린애들은 종잡을 수 없다. 그런 점은 매버릭과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스의 우려대로 타이레놀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매버릭은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있었다. 게다가 악몽을 꾸는 모양인지 얼굴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미첼, 미첼.”

아이스는 조심스레 매버릭을 흔들어 깨웠다.

“어…….”

매버릭은 비몽사몽 중에 아이스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내 얼굴 봐.”

아이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안 갔네.”

매버릭은 순순히 아이스의 말대로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스의 얼굴이 희뿌옇게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경기 시작했어?”
“아니.”
“그럼 왜 깨웠어?”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

볼멘 목소리로 따져 묻는 매버릭에게 아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모르겠어. 그냥 멍해.”

갑작스레 엄습하는 한기에 매버릭은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떨었다.

“어디 불편해?”

아이스는 대번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

매버릭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갈아입을 옷 어딨어?”

아이스가 물었다.

“저기, 옷장에.”

매버릭은 겨우 침실 구석에 있는 옷장을 가리켰다. 아이스는 관처럼 보이는 옷장을 열었다. 기다란 수납공간에 매버릭이 언제나 입고 다니는 가죽 재킷 한 벌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 2단짜리 서랍이 있었다. 아이스는 위쪽 서랍을 열었다. 네모반듯하게 갠 트레이닝 바지 몇 벌과 티셔츠 여러 벌이 있었다. 아래 칸에는 속옷과 양말 따위가 들어 있었다.

“매브, 팔 들어 봐.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

다시 침대로 돌아온 아이스는 가지고 온 옷을 매버릭 옆에 놓으며 말했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팔을 들었다. 아이스가 땀에 젖어 들러붙은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매버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씻고 싶어.”
“아직 열이 안 내렸으니까 조금만 참자.”

아이스는 접힌 티셔츠를 펴며 매버릭을 어르고 달랬다. 옷을 벗기는 도중에 스친 매버릭의 몸은 아침보다 더 뜨거웠다.

“찝찝해. 땀을 흘려서 그런가, 피부가 따가워.”

매버릭은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당장에라도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눈치였다.

“그럼 물수건으로 닦아줄까?”
“응, 그렇게 해줄래?”

아이스는 매버릭이 변덕을 부릴 틈을 주지 않으려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아이스가 수건을 적실 동안 매버릭은 옷을 마저 벗었다. 땀에 젖은 청바지는 최악이었다. 한시라도 이 불쾌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다. 억척스럽게 들러붙은 바지를 간신히 벗고, 속옷을 벗으려는 찰나 아이스가 돌아왔다. 그는 매버릭의 맨다리를 보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이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속옷은 벗지 말까?”

매버릭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이스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서로 홀딱 벗은 몸을 숱하게 봤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찝찝하면 벗어.”

아이스는 드물게 자신 없는 투로 말한 다음, 헛기침했다.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속옷도 벗었다. 아이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렵게 발걸음을 뗐다.

매버릭은 무릎을 세우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았다. 그의 몸은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성미가 고약한 어린아이의 스케치북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살이 빠져 도드라진 등뼈와 관절 부위는 스케치북을 엮은 스프링처럼 보였다.

“차갑진 않아?” 

아이스는 젖은 수건을 매버릭의 어깨 위에 올리며 물었다. 매버릭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스는 천천히 수건으로 매버릭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가슴 쪽으로 미끄러지자 매버릭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늘게 신음했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매브.”
“안 아파. 간지러워서 그래.”

매버릭은 퉁명스레 말했다. 아이스는 계속해서 매버릭의 몸을 닦아냈다. 그의 손길은 극도로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리고 어떤 욕망도 담기지 않았다. 수도 없이 매버릭의 몸을 더듬고 그를 먹어 치우는 끔찍한 상상을 했지만, 막상 이 순간에는 그런 넌더리 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스는 단지 매버릭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었고,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이 작은 기적을 시간 속에 영원히 박제하고 싶었다.

“읏.”

아이스의 손이 갈비뼈를 스치자 매버릭이 움찔거렸다.

“금 간 거 아직 덜 붙었어?”

아이스는 얼른 손을 떼어냈다.

“그게 어디 금방 붙나.”

매버릭은 눈을 흘기며 볼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수건 다시 적셔올게.” 아이스는 매버릭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아이스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온 아이스는 매버릭의 무릎을 가볍게 툭 쳤다. 매버릭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아이스를 올려다보며 다리를 벌렸다.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담긴 손길로 매버릭의 허벅지를 훔쳐냈다. 발갛게 짓무른 사타구니를 닦을 때는 숨을 쉬는 것도 참았다. 체모의 숱이 적어 맨살이 비치는 매버릭의 국부는 멍이 들어 있었다. 아이스는 그 까닭을 묻지 않았고, 매버릭은 그 까닭을 스스로 소각한지 오래였다.

머리색보다 밝은 매버릭의 음모는 올이 가늘었다. 젖은 수건이 스치자 부드럽게 흩어졌다. 매버릭은 자연스레 몸을 뒤집었다. 움푹 팬 두 개의 보조개 사이에 꼬리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스가 꼬리뼈를 슬쩍 건드리자 매버릭은 펄쩍 뛰면서 “거기 건드리지 마. 힘 빠진단 말이야.”하고 쏘아붙였다. “가관이군.” 아이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매버릭의 몸을 말끔하게 닦아내고 난 다음, 아이스는 조금 지친 얼굴로 숨을 돌렸다. 꼭 의식을 거행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이 풀린 여파 때문인지 뒤늦게 매버릭의 매끄러운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좀 살 것 같다.”

기지개를 쭉 켜며 매버릭은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개운해 보이네.”

아이스는 그런 매버릭이 얄미워서 혀를 찼다. 매버릭은 빙그레 웃고는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일어난 김에 수프 좀 먹어.”
“뭐 먹고 싶은 생각 없어. 그냥 더 잘래.”

매버릭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맛이라도 봐.”

아이스의 머릿속에는 애드빌의 복용 지시 사항으로 가득했다. 위장 장애를 일으킬 수 있으니 꼭 식후에 복용하라는 문장이 섬뜩했다.

“……무슨 수픈데?”
“치킨 수프.”
“알았어, 먹을게.”

매버릭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아이스의 부축을 받고 전쟁의 잔해가 말끔하게 사라진 식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자마자 식탁에 엎드렸다. 노란빛이 도는 나무 식탁은 뭉클했다. 그보다 더 뭉클한 것은 아이스가 식은 수프를 데우는 소리였다.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에 매버릭이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그릇에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맑은 수프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매버릭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쐬며 숨을 한껏 크게 들이마셨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음.”

매버릭은 허밍하는 것처럼 성대를 낮게 울리며 수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어때?”

아이스가 물었다.

“따뜻해.”

매버릭의 미소는 더없이 화사했다. 정말 따뜻했다. 치킨 수프도, 아이스의 손도, 그의 다정한 눈길도. 이만하면 아픈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해열제 한 번 더 먹자.”

아이스는 애드빌 포장을 미리 뜯었다.

“또?”

매버릭은 목이 불편해서 딱딱한 것을 삼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열이 내리기는커녕 더 높아졌어.”
“알았어.”

아이스가 워낙 완고한 탓에 매버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 경기는 언제 시작해?”

매버릭은 물을 달라고 허공에 손짓하며 물었다.

“아직 한참 남았어. 반나절은 더 기다려야 해. 약 먹고 다시 자. 경기 시작할 때 깨워줄게.”

아이스는 물컵을 매버릭 쪽으로 밀며 대답했다.

“안 갈 거지? 너도 같이 보는 거 맞지?”

매버릭은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어 거듭 물었다.

“응.”

아이스는 매버릭의 어깨 너머, 견과류 무덤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리창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매버릭의 손보다는 크고 투박한 손자국이었다.

 
* * *


어느덧 LA 다저스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가 시작할 때가 됐다. 하지만 매버릭의 열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는 매버릭을 계속 재우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오늘 경기만을 기대한 그의 마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매버릭에게는 자꾸만 약해진다. 매버릭이 자신에게 기대오면 그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아이스는 TV 중계를 보는 대신에 라디오 중계를 듣기로 했다. 귀만 열어두면 되니, TV를 보는 것보다는 그래도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종일 열이 높아 앓은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던 매버릭은 이번에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아이스의 말을 따랐다.

매버릭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이불에 묻은 핏자국을 문지르며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이스는 그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핏자국을 애써 모른 체했다. 이미 갈색으로 말라붙은 핏자국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잡음 섞인 요란한 광고가 끝나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자신을 ‘버블맨’이라고 소개한 캐스터는 양 팀의 라인업을 빠른 말씨로 소개했다. 1이닝 초, 원정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공격에 나섰다.

―……타석에는 좌익수 로니 스미스입니다. 발렌수엘라, 던졌습니다. 초구는 볼. 다시 투구, 발렌수엘라의 전매특허 스크류볼입니다. 그러나 스미스! 가뿐하게 걷어냅니다. 아, 발렌수엘라! 정말 아쉽네요!

캐스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인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신인상과 사이 영 상을 동시에 수상한 유명한 선수였다. 하지만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 외에는 만사에 무관심한 매버릭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워낙 유명한 선수다 보니 이름은 몇 번 들어본 것이 고작이었다.

―올해 발렌수엘라는 예년보다 부진한데요, 역시 그간의 혹사 때문일까요?
―글쎄,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매년 250이닝 이상 소화해온 이상 몸의 무리가 가지 않는 게 이상하죠. 게다가 발렌수엘라의 주력 투구는 스크류볼이잖습니까?


캐스터의 질문에 해설자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고, 두 사람은 발렌수엘라가 로진 백을 만지며 다음 투구를 준비하는 동안 스크류볼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스, 스크류볼이 뭐야?”

매버릭이 물었다.

“역회전 공.”

아이스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음… 공이 이렇게 타자 몸 바깥쪽으로 들어가다가…….” 

아이스는 허공에 팔로 공의 궤적을 그리며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씨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몸쪽으로 떨어지는 거야.”
“더 모르겠어.”

매버릭은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 다저스 선발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제일 잘 던지는 공.”

아이스는 잠깐 고민한 끝에 스크류볼의 원리가 아니라 가시적이고 자극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그렇구나.”

매버릭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너도 스크류볼 던질 수 있어?”
“아니. 나는 변화구는 슬라이더만 던질 줄 알아.”

아이스는 스크류볼이 아무나 던질 수 있는 변화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애당초 스크류볼의 위력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발렌수엘라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야구 경기를 보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매버릭이 정말 원하는 것은 모두가 당연히 누리지만, 자신은 누리지 못한 평범한 일상을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슬라이더.”

아이스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매버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

아는 체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앳된 느낌이었다. 아이스는 목이 멨다. “으.” 그러나 매버릭이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다리 아파.”

매버릭은 힘겹게 쥐어 짜낸 목소리로 말했다.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져 근육통이 도진 모양이었다. 

아이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신의 다리 위에 매버릭의 다리를 올렸다. 그는 매버릭의 종아리를 감싸 쥐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통증 때문에 잔뜩 좁혀 만나다시피 했던 매버릭의 눈썹 앞머리가 다시 멀어졌다. 

“아…….”

매버릭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이스의 손에 몸을 완전히 맡겼다. 아이스는 손끝에 힘을 주어 매버릭의 다리를 주물렀다. 매버릭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욱신거리는 부위에 적당한 압력이 실리니 통증이 한결 덜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이 맞닿는 순간 끊어지고 흩어지는 호흡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카랑카랑한 캐스터의 야단스러운 중계며, 근엄하게 무게를 잡는 해설자의 얘기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유명한 선수들의 극적인 순간도, 열광하고 실망하는 관중의 환호도 그들에게는 부스러진 먼지와 같았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잠시 후, 매버릭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아이스에게 말했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다리를 내려놓고, 자신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있잖아, 아이스.”
“응.”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매버릭의 목소리에 아이스는 의자에 앉다 말고 자연스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아플 때 누가 옆에 있어 준 건 처음이야.”
“그래?”

아이스는 침대에 팔을 괴고 매버릭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프면 누가 옆에 있는 것보다 혼자서 조용히 쉬는 게 더 좋았는데.”

매버릭은 잠깐 말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돌려 아이스에게 가까이 기울였다.

“너랑 같이 있으니까 되게 좋다…….”
“다행이다.”

아이스의 심장에 물이 차올랐다. 그 수면 위로 이름 없는 별이 기울고, 달은 이지러졌다.

“뭐가?”
“네가 아플 때 옆에 있을 수 있어서.”
“…….”
“널 혼자 두지 않아서.”

매버릭은 아이스의 눈동자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을 보았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듯하면서도 푸르게 탁 트인 맑은 하늘을. 그 하늘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여자를 꾀어낼 때 말고는 쓸모없다고 여겨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로부터 매버릭은 자신이 하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실히 깨달았고, 이제 하늘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기뻐?”

매버릭은 아이스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응, 무척.”

아이스는 매버릭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얼마나?”

다시, 매버릭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미 알잖아.”

아이스는 매버릭의 손을 있는 힘껏 잡았다. 매버릭은 가슴이 벅차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스는 말아쥔 매버릭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먹구름 낀 하늘에 번개가 내리쳤다.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광휘의 작열감에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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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4.05.13 15: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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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ㅡ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3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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