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슨


3.


태평양.
USS 시어도어 루스벨트.

모항으로 돌아가는 날을 일주일 앞두고 승조원들의 마음은 잔뜩 들떴다. 선상에서 보낸 시간이 두 달. 처음에는 없는 게 없는 거대한 항공모함의 위용과 시설에 감탄하며 자신이 USS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승조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더는 신선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고, 재밌는 것도 없었다. 그 뒤로는 하루하루 돌아가는 날짜만 세며 매일같이 보는 지겨운 얼굴들과 부대껴야 했다. 

일과는 매일 같다. 기상, 식사, 훈련, 식사, 훈련, 식사, 자유 시간. 땅 위에서라면 어디든지 발 닿는 곳에 가서 처음 보는 신선한 얼굴을 만나고 철책 밖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그래도 하루 중 제일 반가운 시간이 배를 채우는 시간이다. 매일 바뀌는 식단을 확인하는 게 항공모함에서 인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변화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승조원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내려왔다.

“또 미트볼? 이딴 건 개도 안 먹을 거야.”

슬라이더는 저녁으로 나온 미트볼을 보고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다른 걸 먹으면 되잖아.”

아이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미트볼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래.”

슬라이더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식판에 미트볼을 가득 담았다. 아이스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점잖게 입을 열었다.

“결국 먹을 거면서 불만은.”
“사실 너도 별로지?”
“어디 맛있어서 먹나.”

아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미트볼을 딱 세 개만 식판에 담았다. 그리고 시들시들한 샐러드와 파스타, 차갑게 식힌 소고기를 담았다. 항공모함의 식사는 처음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잘 나오다가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진다. 모양만 살짝 바꿨을 뿐이지 거기서 거기인 메뉴에 질렸거나, 혹은 조리병이 한계에 부닥쳐 제 시간 내에 겨우 만들어낸 탓일 것이다. 슬라이더가 매번 불만을 투덜거리는 미트볼도 그나마 장교 식당이라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수병들의 배식은 더 형편없었다.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그들이 굳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동료들이 그들을 위해 비워 둔 식당에서 가장 쾌적한 자리로 향했다. 아이스가 늘 앉는 자리는 TV가 잘 보이고,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가기에도 수월한 자리였다. 항공모함에 처음 탑승하던 날부터 그 자리는 3주 전에 아이스가 위장병으로 저녁 식사를 거른 날을 제외하곤 줄곧 아이스의 차지였다.

어떻게 요리를 하면 샐러드에서 생선 비린내가 날 수 있을까. 아이스는 포크로 샐러드를 무성의하게 들쑤시며 혀를 찼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아무거나 잘 먹어. 환청인가 싶어서 아이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 아니라 그리움이 불러낸 환상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누군가와 항공모함의 형편 없는 식사에 관해서 얘기했던 적이 있다. 수병 출신이었던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고, 정말 아무거나 잘 먹었다. 그 대화를 나누며 먹었던 맛 없는 샌드위치도 아무렇지 않게 다 먹어 치웠다. 아이스는 한 입 먹고 도저히 못 먹겠다며 물린 샌드위치였다.

“아이스?”

슬라이더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이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맛없어서 그래?”
“어, 네 말대로 정말 맛이 없네.”

아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이 잡념에 빠진 까닭을 이틀 전부터 깜빡거리기 시작한 천장 전등에 돌렸다. 전등이 수명을 다하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관리자가 전등을 교체하면 자신의 잡념도 끝날 것이다. 아이스는 그러기를 바랐다.

“미트볼 여전히 맛없어?”

누군가 식판을 휙 미끄러트리며 끼어들었다. 제이슨 솔트, 콜사인 페퍼.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지만, 항공모함에서 지내면서 부쩍 가까워진 친구로, 팔다리가 유난히 길어서 아이스는 그의 콜사인이 스파이더가 아닌 것이 늘 의문이었다.

“조리병이 그대론데 맛이 바뀌겠어?”

슬라이더가 미트볼을 질겅질겅 씹으며 포크로 남은 미트볼을 뒤적거렸다. “우웩.”하고 슬라이더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좆같네.”

페퍼는 대번에 험악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을 내뱉었다. 그는 입이 걸걸해서 욕 없이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제니퍼가 만들어 준 미트볼 샌드위치 그립다.”

페퍼의 식판에도 미트볼이 가득했다. 그는 아내가 만들어 준 미트볼의 맛을 잊지 못해 미트볼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서 미트볼을 주워 담고는 늘 후회했다. 페퍼는 억지로 미트볼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말을 이었다.

“씨발, 이번에 내리면 애들 데리고 디즈니랜드 가야 해.”
“기어이?”

슬라이더가 물었다.

“어, 안 그랬다간 이혼당할 것 같아.”

페퍼는 기다란 팔다리만큼이나 길쭉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표를 어떻게 구한단 말이야, 하. 구해도 걱정이다. 인간들 존나 미어터지겠지. 하, 씨발. 존나 씨발, 존나게 씨발.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네, 씨발.”
“에이미가 여섯 살이지? 탈만 한 놀이기구 추천해줘?”

아이스는 흥분한 페퍼를 달래려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 고마워. 근데 아이스, 너희 집 애는 아직 디즈니랜드 데려가 달라고 조를 나이 아니지 않나?”
“예습. 작년에 슬라이더랑 다녀왔지.”
“나는 경험자다 이 말씀이야.”

슬라이더는 어깨를 쭉 펴며 가슴을 두드렸다.

“존경한다, 슬라이더. 디즈니랜드를 뚫다니.”

페퍼의 우러러보는 시선에 슬라이더는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하고 말하며 코를 훔쳤다.

“무슨 얘기 중이야?”

또 다른 무리가 합류했다. 모스볼과 데시컨트였다.

“슬라이더가 작년에 디즈니랜드 다녀왔대.”
“거길? 슬라이더가 무슨 수로?”

모스볼이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이 자식아, 그게 무슨 뜻이야?”

슬라이더가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네가 무슨 수로 디즈니랜드 표를 구해서 다녀왔냐고 물었어.”
“그렇게 묻는 저의가 뭔데?”
“난 말 그대로 어떻게 표를 구했는지 궁금한 것뿐이야.”
“왜, 내가 그럴 능력도 없는 놈으로 보이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내 말뜻을 너무 곡해해서 듣는 거 아니야?”
“뉘앙스라는 게 있잖아, 뉘앙스. 아까부터 비아냥거리면서 툭툭 내뱉는 게 영 기분이 더럽네.”
“슬라이더, 생리하냐? 왜 이렇게 예민해?”

모스볼이 내뱉은 말에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신이시여.” 그의 RIO인 데시컨트가 탄식하며 성호를 그었다. 잠시 후 벌어질 참극이 벌써 눈앞에 선했다.

“모스볼 저 새끼 돌았나 봐.”

페퍼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맞은 편에 앉은 하드보일드에게 속삭였다. 하드보일드는 턱짓으로 옆을 가리키며 불똥이 튀기 전에 빠져나가자고 제안했다. 페퍼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래도 미트볼 애호가 사이에 의리가 있지,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지면 슬라이더 편에 서서 합류할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봐라, 모스볼.”

슬라이더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생리하냐고. 안 그럼 이렇게 예민하게 굴 리가 없잖아.”

모스볼은 턱을 치켜들었다.

“하아, 이 새끼가 진짜…….”

슬라이더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곧 슬라이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스볼의 멱살을 낚아챘다. 의자가 뒤로 나뒹굴고 식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뭔데? 무슨 일이야?”
“저기 싸움 났대.”
“싸움이 났다고?”
“어디?”
“누구?”
“슬라이더랑 모스볼!”
“이야, 그 새끼들이 마침내! 내가 오늘만 기다렸다.”

큰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슬라이더와 모스볼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기를 고대하며 두 사람에게 주목했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조리병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목을 쭉 내밀고 구경했다. 소동이 벌어지면 으레 등장하는 바람잡이가 누가 이길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했다. 

“슬라이더에게 걸 사람은 이쪽!”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희고 가느다란 팔 하나가 쑥 올라왔다. 반대편에서 “모스볼은 이쪽이야.”하고 가무잡잡하게 그은 굵직한 팔이 올라왔다. 병사들은 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꺼냈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해소하지 못한 온갖 욕망이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다가 마침내 분출할 때를 찾은 것처럼, 모두 누군가 피를 보길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아이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싸움 난 거 아니다.”

아이스는 슬라이더와 모스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

아이스는 부드러운 말씨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질문이 아닌 지시였다. 아이스는 더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분출하기 직전의 활화산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고, 소란을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눈짓을 던지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슬라이더는 슬그머니 모스볼의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모스볼은 컥컥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슬라이더는 여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작게 구시렁거렸다. 모스볼도 씩씩거리며 슬라이더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속으로 분노를 삭일 뿐, 조금 전처럼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아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볍게 혀를 찼다. 모스볼이 그의 눈치를 보며 먼저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뒤이어 슬라이더도 의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에이, 뭐야. 시시하게. 이번에는 진짜 한 판 붙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김이 샜다는 투로 말했다. 그의 말이 싸움이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음을 선고했다. 

“저 새끼들은 항상 저러더라.”
“몰라, 내리기 전에 좋은 구경 하기는 텄다.”
“싸움 난 거 아니란다. 새끼야, 돈 다시 돌려줘.”
“슬라이더, 모스볼. 싸움 나면 알지?”

바람잡이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머금고 내깃돈을 사람들에게 돌려줬다.


열기가 식고, 승조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자리에 앉아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기류가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와 서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튀는 소리, 과장된 웃음, 과장된 몸짓, 바닥으로 떨어지는 플라스틱 포크, 꾹꾹 눌러 담은 분노. 다들 누군가 터뜨려주기만을 기대하며 오늘도 무료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아이스, 이번에 휴가받으면 뭐 할 거야?”

페퍼가 물었다.

“글쎄. 애가 어려서 어디 먼 데 여행 다녀오기는 좀 그렇고, 어디 가까운 데 하루 이틀 다녀올까 싶어.”
“넌 항상 계획이 다 있는 줄 알았는데.”
“나라고 10년 뒤 일까지 생각하며 살겠어?”

아이스는 쾌활하게 웃으며 식판 옆에 놓인 사과를 덥석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겉보기에 잘 익은 사과는 푸석푸석하고 지독히도 셨다. 그 핑계로 울어도 좋을 만큼.

 
* * *


물 흐르듯 편지지 위를 미끄러지던 펜촉의 흐름이 뚝 끊어졌다. 아이스는 빈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선을 그었다. 그가 기대했던 매끄러운 선 대신에 뚝뚝 끊어진 불안한 선이 그어졌다. 아이스는 만년필을 허공에 가볍게 털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잉크가 다 떨어진 듯했다.

아이스는 서랍에서 잉크병을 꺼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며 선물 받은 만년필은 피스톤 필러 방식으로 충전하는 만년필이었다. 아이스는 능숙하게 잉크병에 만년필을 담근 다음, 천천히 노즐을 돌렸다.

“아이스, 페퍼가 포켓볼 내기하자는데.”

슬라이더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난 됐어. 다녀와.”

아이스는 만년필을 살짝 들어 올렸다. 검푸른 잉크를 한껏 머금은 펜촉이 공기 중에 노출됐다. 아이스는 인내심을 갖고 묵묵히 기다렸다. 곧 잉크병으로 잉크가 뚝뚝 떨어졌다. 슬라이더가 아이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뭐해?”
“편지 쓰고 있어.”

아이스는 안경을 닦을 때 쓰는 부드러운 천으로 펜촉에 묻은 잉크를 닦아냈다.

“집에 보내는 편지?”
“응.”
“어차피 곧 집에 돌아가잖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래? 좋아, 나도 오랜만에 편지나 써야겠다.”

슬라이더는 코를 풀고 내팽개친 휴지와 종잇장이 널브러진 자신의 너저분한 책상에 앉았다. 그는 그 지저분한 책상에서 용케도 볼펜을 찾아냈다.

“포켓볼은?”

아이스는 슬라이더가 볼펜 버튼을 빠르게 딸칵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그를 쫓아내고 싶었다.

“됐어. 너 없이 어떻게 이겨?”

슬라이더는 너스레를 떨며 이번에도 용케 구겨진 편지지를 찾아냈다. 아이스는 한숨을 참으며 미간을 꾹 눌렀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보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슬라이더는 “크으…….”하고 요란하게 추임새를 넣으며 장황한 첫 문장을 써 내려갔다.

“아, 맞아. 아이스, 기념엽서 새로 들어왔대. 이번 훈련 마지막 기념엽서야. 내일 편지 부치는 김에 사.”

한창 편지를 쓰던 중에 슬라이더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눈을 빛냈다.

“갑자기 엽서는 왜?”

아이스는 만년필을 옆으로 비스듬히 젖히며 슬라이더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엽서 모으잖아.”

슬라이더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이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준 자신에게 고마워하라는 말투.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아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모으는 거 아냐?”

기대와 달리 미적지근한 아이스의 반응에 슬라이더는 당황했다. 슬라이더는 세 칸의 서랍 중 유일하게 자물쇠가 채워진, 수십 장의 엽서가 가지런히 보관된 서랍에 시선을 던졌다. 아이스는 그 서랍 속에 든 엽서를 어디를 가나 제 몸처럼 가지고 다녔다. 

슬라이더는 서랍과 아이스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아주 잠깐 아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모호한 표정이었다. 아주 깊고 어두운 어둠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아이스…….”

슬라이더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맞아. 알려줘서 고마워. 내일 사야겠다.”

아이스는 산뜻하게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편지를 쓰는 데 몰두한 체하며 슬라이더의 관심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슬라이더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번에도 아이스가 엽서를 모으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에 불편하던 것도 잠시, 슬라이더는 곧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고 편지를 마저 썼다.

만년필을 쥔 아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카로운 펜촉이 가냘픈 편지지를 마구 할퀴며 유린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무쳤다. 잠긴 서랍 속에 간직한 비밀. 부치지 못한 엽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졌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말하던 수병 출신의 파일럿.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화나게 하는 그 얼굴. 키는 자신보다 반 뼘 작고, 탄탄하게 근육 붙은 몸에 뼈마디가 잗다랬다. 남들과는 달리 자신을 겁내지 않는 도전적인 초록색 눈동자. 스무 살을 훌쩍 넘겼음에도 변성기가 끝나지 않은 애새끼처럼 높다란 목소리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그 이름. 매버릭.



4.


탑건의 지휘관 마이클 “니들” 배너 중령은 문을 등진 채, 성난 얼굴로 담배를 뻐끔거리며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벌써 연달아 담배를 세 대째 피우는 중이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비좁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바른 자세로 선 매버릭은 니들 중령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매버릭.”

마침내 니들이 몸을 돌렸다.

“예.”

매버릭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난 자네에게 훈련생들을 교육하라고 명령했지, 훈련생들의 사기를 떨어트려서 의욕을 꺾으라고 비행 교관으로 부른 게 아니다. 첫날부터 모의전을 허락한 적도 없어!”
“예.”

니들 중령의 매서운 호통에 매버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조금 전처럼 짧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는 입대한 이후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많이 상관에게 불려간 경험상, 상관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는 군소리 말고 대답만 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아…….”

니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매버릭, 자네는 남에게 지고는 못 사나? 단 한 번도 굽히질 못하겠나? 굽히면 큰일이라도 나나?”

니들은 두 손을 들고 마구 흔들며 울다시피 물었다.

“아닙니다.”
“전부 뛰어난 파일럿들이야. 자존심도 대단히 강하고 말일세. 이 친구들에게 들어간 돈이 얼만지 아나? 파일럿 한 명을 잃을 때마다 군에 손실이 얼마나 막대한지 아느냐 이 말일세.”
“모릅니다.”

매버릭의 대답에 니들은 맥이 탁 풀려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턱, 턱, 턱,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제야 매버릭은 아차 싶었다.

“제가 아는 사실은…….”

매버릭은 니들을 힐끔 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훈련생들은 아직 자신들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생들이 잠재된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책상에 앉아 매뉴얼을 뒤적일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훈련해서 직접 몸으로 겪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버릭. 자네는 자네의 그 알량한 지론 때문에 정규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겠다, 이건가? 오랫동안 뛰어난 파일럿을 배출한 이 정규 과정보다 자네의 주장이 더 옳다고 생각해서?”

니들은 검지 손톱으로 정규 과정을 출력한 문서를 두드렸다.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허락하신다면…….”
“됐어. 이만 나가보게.”

니들은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매버릭의 말을 잘랐다.

“예.”

매버릭은 경례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대답은.”

니들은 매버릭의 새카만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대답은 항상 잘하지.”
“예!”

매버릭이 다시 몸을 돌려 우렁차게 대답했다. 니들은 허탈해서 이제 더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빨리 매버릭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답하라는 거 아니었네.”

니들이 힘없이 말했다.

“예.”
“얼른 나가보기나 해.”

매버릭은 그대로 조용히 사무실을 떠났다.

“저 망할 놈.”

니들은 괴로워하며 몇 가닥 남지 않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 * *


복도로 나온 매버릭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기침이 뒤따랐다. 매버릭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사무실에 자욱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서 혼났다. 대체 저 쓰고 비리고 역한 것이 뭐가 그리 좋다고 다들 틈만나면 입에 물고 뻑뻑 빨아대는지 모르겠다.

“니들 화 많이 났어?”

복도 구석에서 매버릭을 기다리고 있던 버니맨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매버릭은 열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꽉 막힌 인간.”

버니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고생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니들이 괜히 니들이겠어? 저렇게 예민하고 깐깐하게 구니까 머리카락도 지긋지긋해서 다 달아난 거야.” 그리고 매버릭의 등을 서슴없이 때리며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강의실로 향하던 길에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훈련생 세 명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로 웃고 떠들던 훈련생들이 매버릭의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좋은 아침.”

매버릭이 손을 가볍게 흔들며 훈련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는 자신이 좀 심했나 싶어서 이번 기회에 이름과 얼굴도 익힐 겸, 삭막한 분위기를 환기할 생각이었다. 훈련생들은 무어라 웅얼거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머그잔을 자리에 갖다 놓았다.

“왜, 편하게들 있지. 아직 시간 좀 남았잖아.”

매버릭은 벽에 걸린 시계를 빠르게 확인한 다음 서툴게 말을 이었다.

“다 마셨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훈련생 중 한 명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사람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저 속 좁은 새끼들. 한 번 깨졌다고 계집애처럼 토라져서는. 옆집 애니가 쟤들보다 속이 더 넓겠다.”

버니맨이 말했다.

“그렇지 애니? 너 괜찮아, 애니?”

버니맨이 흥얼거렸다. 매버릭은 버니맨이 대체 뭘 하는가 싶어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니, 괜찮아?”하고 버니맨이 다시 흥얼거렸다. 기대에 찬 눈으로. 하지만 매버릭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 노래 몰라?”

버니맨이 멋쩍게 웃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마이클 잭슨을 모르지?” 버니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버니맨이 흥얼거린 노래는 마이클 잭슨이 1987년 발매한 앨범 「Bad」에 수록된 곡, ‘Smooth Criminal’이었다. 「Bad」는 발매하자마자 각종 신기록을 세운 명반이었고,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저 우주까지 닿을 정도로 치솟았지만 매버릭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어디를 가나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흘러나오니 귀에 익기는 했다만, 그는 언제나처럼 옛날 노래를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튼 신경 쓰지 마, 매버릭. 저런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버니맨은 왼쪽 귀를 후벼파며 말했다.

“한둘이 아니니까.”

매버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한둘이 아니니까 그러지…….”

구스가 곁에 있을 때는 눈총 사는 일이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 그랬으니까. 어디를 가나 남들과 부딪치며 감정 상하는 일이 허다했으니까. 그래도 구스가 있으면 누가 뭐라고 시비를 걸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구스는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였고, 자신의 치기 어린 젊음을 막아주는 댐이었다. 구스가 곁에 있는 한 누가 뭐라 해도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다. 구스만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만 괜찮다면 전부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구스는 없다. 매버릭은 발가벗겨진 채 군중 앞에 내던져진 심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디를 가나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자신이 괴로워하고, 상처받고, 절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게 맞설 무기가 없다. 하늘 위에 있는 순간은 그래도 자유로웠지만, 그 순간은 잠깐이다. 땅으로 돌아오면 다시 그 매서운 눈길과 독을 삼킨 무자비한 말들을 맨몸으로 견뎌야만 한다.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4.01.14 20: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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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 센세가 어나더를 주셧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선설리후정독 절받으세요 센세
[Code: 96f0]
2024.01.14 20: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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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생놈들 교관한테 발려서 저러고 뻗대는 꼬라지를 보니 매브한테 지랄한 번 할 것 같은데....개쳐바른 후에 멘탈 아작나서 단체 사표쓰고 매브도 탑건 교관직 때려치는 게 낫겠다.
[Code: db92]
2024.01.14 20: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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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버릭이 매버릭 햇는데 왜 뭐라구해ㅠㅠㅠㅠ아이스는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매브는 위축됐어ㅠㅠㅠㅠ
[Code: 0d4d]
2024.01.14 20: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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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애가 있네......? 결혼했어...? 근데 매버릭이랑 이어가는거야? 야임마 너....... 하...... 사약그릇 따끈하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300]
2024.01.14 20: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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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센세가 어나더를 주셨어! 제목 보고 너무 좋아서 사족보행하며 들어왔어 이제 감상하러 간다!
[Code: eee3]
2024.01.14 21: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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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결혼해서 아이도 있구나 매버릭이랑 탑건에서 만났을때 이미 유부남이었던 걸까? 매버릭에게 쓴 엽서들을 하나도 보내지 못하고 모아둔게 그 때문일까? 매버릭이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질 때 아이스를 떠올리면서도 결국 전화하지 못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묘사된건 하나도 없는데 행간에 흐르는 절절함 때문에 가슴이 찢어진다 ㅠㅠㅠㅠㅠㅠ
[Code: 6ee3]
2024.01.14 21: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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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버릭에게 쳐발린 훈련생들 하는짓이 그 스트라이커인지 뭔지가 주도해서 작당하고 하는 것 같은데 진짜 하남자 그 자체 위에서도 압박주고 훈련생 새끼들도 양아치라서 매버릭 너무 힘들겠다 ㅠㅠㅠ구스가 있었을 땐 구스만 괜찮으면 아무 상관 없었던 타인들의 적의가 이제 방패막 없이 매버릭을 그대로 찔러오니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게 보여서 찌통이야 어째야 하냐
[Code: 6ee3]
2024.01.14 21: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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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 잘 익은 사과는 푸석푸석하고 지독히도 셨다. 그 핑계로 울어도 좋을 만큼...아이스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 없이 감정조절 잘하고 일상을 사는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매버릭보다 더 위태로운 느낌이야 아이스나 매버릭이나 서로만 곁에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얘들 왜 벌써부터 맘아프게 힘든 사랑을 하는게 보이냐 센세 나 울어 ㅠㅠㅠㅠ
[Code: 6ee3]
2024.01.14 21: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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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센세 입갤ㅌㅌㅌㅌㅌ아니 아이스 애가 있어? 부치지 못한 엽서와 걸지못하는 전화라니ㅠㅠㅠㅠ얘네 무슨 사랑을 하고 있는거야 내 가슴 다 뜯어짐ㅠㅠ센세 사랑해 나와 함께 지하실로 가자ㅌㅌㅌㅌ
[Code: 3872]
2024.01.14 21:5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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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한테 잘해줘 ㅜㅜ
[Code: 6fc1]
2024.01.15 00: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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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도 매버릭도 진짜 위태위태해 보여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너무 안타깝고 안스럽고 마음아프고 ㅠㅠㅠㅠㅠㅠㅠ
[Code: 5c46]
2024.01.15 01: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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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브 너무 외로워보여 ㅠㅠ
[Code: bed1]
2024.01.15 10: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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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이미 결혼한 몸이야? 애가 있어??? 부치지 못한 엽서 분명 매브한테 쓴 거겠지ㅠㅠㅠㅠㅠㅠ 아이스도 매브도 둘 다 너무 안타까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d96]
2024.01.21 01: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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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가 이미 결혼했고 애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깊은 충격을 받다ㅠㅠㅠㅠ그래서 매브는 전화를 걸지 못했고 아이스는 수십장의 엽서를 간직하고만 있었구나ㅠㅠ하지만 맛없는 샐러드 앞에서도 매브를 떠올리고 애꿎은 천장전등 탓을 하는 아이스도 참 찌통이네ㅠㅠㅠㅠ전등을 간다고 사라질 게 아니란건 본인이 가장 잘 알텐데...ㅠㅠㅠㅠ하...그런데 너무나 평범하게 애아빠들의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스 애아빠에 유부남 맞구나를 재차 확인당하는 게 너무나...너무납니다ㅠㅠㅠㅠ근데 이 모스볼인지 뭔지는 슬라이더한테 왜 대놓고 시비져? 일방적 시비에 싸움날뻔 한 것을 큰 힘 들이지도 않고 저지하는 아이스 존멋이면서 무섭...
[Code: 0881]
2024.01.21 01: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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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엽서...부치지 못한 엽서에 어떤 내용이 써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스의 매브에 대한 감정이 정리된 채 혹은 정리되지 못한 날 것 그대로 담겨있겠지?ㅠㅠㅠㅠ그래서 슬라이더가 그 엽서들의 존재를 입에 올린 것만으로 리오이자 절친인 슬라이더가 잠시 당황할 정도로 깊고 어두운 어둠을 드러내버린거고ㅠㅠㅠㅠ그런데 그 엽서들을 비밀스럽게 보관하며 어딜가나 들고다닌다는게 결코 떨쳐버리지 못하고 마음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늘 간직하고 다니는 매브에 대한 감정같아서 또 찌통...ㅠㅠ게다가 저 매브에 대한 묘사...정말 지독한 사랑이구나ㅠㅠㅠㅠ
[Code: 0881]
2024.01.21 01: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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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훈련생들 싹다 다크스타 앞에 세우고 싶다ㅠㅠㅠㅠ우리 매브한테 왜그러냐 이 하남자란 말도 아까운 놈들아ㅠㅠㅠㅠ정말 구스가 있었으면 괜찮았을텐데 한둘이 아닌 적의들에 맨몸으로 던져진 매브가 너무 마음아파ㅠㅠ
[Code: 0881]
2024.03.24 1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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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ㅌㅌㅌ개맛도리
[Code: c5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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