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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7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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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5.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에서도 새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는 눈에 띄었다. 칙칙한 식당 한구석에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말끔한 옷차림은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은 매버릭을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힐끔거렸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것처럼 매정하게 지나치면서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찾고 싶은 것처럼.
혼도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했다. 사람들이 매버릭을 구경거리, 혹은 눈요깃거리로 삼는 게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버릭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샐러드를 먹었다. 그는 눈총 사는 일에는 익숙했고, 불온한 관심도 익숙했다.
“좀 더 먹지 그래.”
매버릭이 포크를 내려놓자 혼도가 넌지시 말했다. 매버릭은 손을 내저었다.
“비행하기 전에 배불리 먹으면 속이 거북해.”
“네가 조종하는 것도 아닌데 뭘.”
“습관이 돼서 어쩔 수 없네.”
매버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근심 어린 눈으로 먹다 만 샐러드와 포크로 찔러보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은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샌드위치는 배가 고프다고 성화인 혼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킨 메뉴였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남들이 밥을 먹을 때 합석해서 먹는 시늉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체하는 건 매버릭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고안해낸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 어설픈 생존 방식은 데면데면한 사이에는 꽤 잘 통했다. 좀 더 가까워지고, 하나씩 서로의 비밀을 알아가다 보면 곧 들통나버렸지만. 혹은 한 번에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었다. 혼도가 그랬다.
매버릭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가 다이너에서 혼자 식사하는 혼도를 발견했다. 그때는 신형 기체 프로젝트를 앞두고 주요 팀원들끼리 한 차례 미팅을 가져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앞으로 지겹도록 볼 사이니, 이참에 친해질까 싶어 무작정 다이너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때도 매버릭은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샌드위치 귀퉁이만 갉작거리는 매버릭에게 혼도는 서슴없이 “대령님께선 먹지도 않을 음식은 왜 시키신 겁니까?”하고 가감 없이 말했다. 그때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 매버릭 못지않게 극적인 유년 시절을 보낸 혼도는 음식을 남기는 일이라면 질식했다.
서로 막역해지고 나서, 혼도는 매버릭에게 괜히 먹지도 않을 음식을 시켜서 쓰레기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며 나무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버릭의 오랜 습관을 고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이제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자기 자신을 ‘풀드포크맨’이라고 부르면서 매버릭의 기벽을 즐기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도 참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처해서 고생길을 밟았네.”
혼도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의욕이 넘쳤거든.”
매버릭은 피식 웃었다.
“미그기를 격추했다는 자신감에 넘쳐서 말이야.”
“그 얘긴 30년 넘게 질리도록 우려먹었잖아.”
“말도 마. 그때 비하면 지금은 나아진 거야.”
매버릭은 쑥스러워하며 코를 훔쳤다. 그리고 곧바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매버릭의 시선은 혼도가 아닌 먼 곳을 향했다. 목적지를 잃은 공허한 시선이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
“미그기를 격추한 젊은 대위.”
“…….”
“그것 말고는…….”
매버릭은 자조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그는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추억이라 말하는 오래전의 기억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혼도는 매버릭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매버릭이 움찔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매버릭, 너는.”
“응?”
“좋은 사람이야.”
혼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매버릭을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일직선 도로를 거침없이 주행하는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매버릭의 귓바퀴가 빨개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괜스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혼도는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 속 썩이는 데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혼도.”
“네가 미그기를 격추하기는커녕 미그기에 격추당해서 바다 한복판에 처박혔어도 난 지금처럼 너랑 이 맛 없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비행기를 기다렸을 거라고. 썩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추모한다고.”
혼도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지독히도 쓴 것을 먹은 것처럼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그래. 아이스는 누구나 좋아해. 내가 1986년에 아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들 아이스만 나타났다 하면 우르르 몰려갔어. 어떻게든 그 자식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잰 체하지만 의외로 격 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친구였거든. 누구하고나.”
매버릭은 쩔쩔매며 은근히 아이스의 편을 들었다.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혼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스가 사령관이어서 그래? 하기야, 네가 아이스랑 처음 만났을 무렵에는…… 그래, 부담스러울 법도 하겠다.”
매버릭은 혼도가 또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했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럼?”
“타고난 리더라고 해야 할까.”
혼도는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잠깐 뜸을 들였다. 매버릭은 초조한 눈으로 혼도의 얼굴색을 살피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 사람한테 나 같은 인간은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보살펴줘야 할 어린양 같은 존재인 거지. 자기랑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봐, 매버릭. 카잔스키 사령관은 여기 사는 사람.”
혼도는 손을 자신의 정수리 위로 높게 들었다.
“나는 여기 사는 사람.”
그리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난 그중에서도 특별한 양인가?”
“맞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러질 못하겠네.”
매버릭은 왼쪽 귀를 잡아당기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잔스키 사령관이 널 좀 싸고돌았어야지.”
혼도는 말도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너도 이득 좀 봤잖아?”
매버릭이 억울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건 맞아. 그러니까 모른 체하면서 입 다물고 있던 거고.”
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스도 날 감싸줄 수 없는 처지였고…… 게다가 서로 연락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어.”
매버릭은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 말에 혼도는 냅킨을 접다말고 멈칫했다.
“탑건에서 알게 된 이후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던 게 아니었어?”
“아니야. 미그기 격추하고 잠깐, 아주 잠깐. 한 반년 남짓이었나. 그동안만 잠깐 연락하고, 시간이 되면 얼굴 한 번씩 보고……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스가 결혼했어. 예전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나던 여자가 있었거든.”
매버릭은 말을 멈추고 엄지로 물컵을 문질렀다. 혼도가 어서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라야.”
매버릭은 꼭 치통을 앓는 것처럼 웃었다. 불편한 얘기를 할 때면 으레 짓는 표정이었다.
“결혼하면 환경이 달라진다잖아. 아이스는 신경 쓸 일이 여러모로 많았지. 게다가 결혼하고 얼마 뒤에 사라가 아이를 가졌거든. 허니문 베이비! 첫째가 허니문 베이비야. 굉장하지 않아?”
매버릭은 불편한 기분을 감추려고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혼도가 허니문 베이비란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놀라기를 기대했는데,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카잔스키 부부의 가정사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 자연스레 멀어졌어. 집안 건사하느라 바쁜 사람 상대로 투정 부리면서 시간 뺏기 그래서 전처럼 연락을 못 하겠더라고.”
멋쩍어진 매버릭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혼자서 그 난관을 헤쳐나가야만 했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상관, 마찬가지로 나를 환영하지 않는 반항적인 젊은이들, 친한 사람 하나 없는 미라마 해군기지. 하필 여름이라 날씨는 또 끝내주게 좋았어.”
매버릭은 고개 숙이며 쓸쓸하게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기 좋게 실패했어.”
매버릭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마침 워싱턴행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매버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혼도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은 허공을 한 번 올려다본 다음,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무채색으로 휘감은 직장인, 지긋지긋한 고향을 탈출할 꿈에 부풀어 형형색색으로 자신을 위장한 어린애, 젊은 시절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노부부, 악을 쓰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 그 많은 사람을 헤쳐나가며.
혼도의 눈에 매버릭은 유령처럼 보였다.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줄도 모르고, 자신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랑했던 것들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
6.
“……이 밖에도 도그파이트 중에는 다른 적기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런데도 근접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누구 말해 볼 사람 없나?”
매버릭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의실에 착석한 훈련생 가운데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없나?”하고 매버릭이 재차 물었으나 훈련생들은 서로 힐끔거릴 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아무나 좋으니 말해 보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누구보다 자신을 내세우며 뽐내길 좋아하는 부류가 파일럿들이다. 다들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고,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훈련생들이 학창 시절 내내 락커에 처박힐까 봐 겁이 나서 덩치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죽이고 다니는 놈들처럼 굴고 있으니, 매버릭은 속이 뒤집혔다.
“스트라이커.”
매버릭은 하는 수 없이 스트라이커를 지목했다.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겠나?”
“모르겠습니다.”
스트라이커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매버릭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첫날 모의전 이후로 줄곧 이런 식이었다. 니들 중령이 규칙과 절차를 준수하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매버릭은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기계적으로 수업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수업을 듣는 훈련생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태만했다. 죽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론 수업을 듣고, 모의전에서는 대충 시늉만 내다가 돌아왔다.
처음에는 틀에 박힌 시시한 수업에 훈련생들이 지루함을 느껴 의욕을 잃은 게 아닌가 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매버릭은 태업이 곧 훈련생들이 자신을 향한 반감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기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곧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고립시키고 피를 말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버릭이 가장 힘겨워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고, 매버릭의 약점을 손쉽게 이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트라이커 네가 모른다고 말하는 건가?”
매버릭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예, 저는 일전에 교관님께서 하신 매뉴얼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심장이 뛰는 대로 움직이라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스트라이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매버릭이 이성을 잃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매버릭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순간, 그가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라이커.”
매버릭은 스트라이커의 도발에 응수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스트라이커 자네의 시답잖은 각오가 아니라 도그파이트의 전술적 가치와 그 필요성에 관해 물었다.”
매버릭은 스트라이커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스트라이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툭 튀어나온 울대뼈가 꿀렁거리며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훈련생들은 모두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실링 팬이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제게 원하시는 대답이 뭡니까, 교관님.”
스트라이커의 목소리에 마침내 감정이 실렸다.
“나는―”
“설마 교관님께서는 도그파이트가 파일럿의 낭만이라는 대답을 바라시는 겁니까?”
스트라이커는 매버릭의 말을 자르며 비아냥거림으로 쐐기를 박았다. 스트라이커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그러자 훈련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낮고 묵직한 웃음, 천장을 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 폭탄이 터진 것처럼 강의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매버릭은 버릇대로 어색하게 웃었다. 남들이 웃으면 함께 따라서 웃으라는 죽은 친구의 충고대로 웃었다. 그는 즐겁지 않아도 남들을 따라 웃었고, 죽을 것처럼 슬퍼도 웃었다. 그렇게 웃고 나면, 웃기 전보다 더 쓸쓸해졌다. 그럼 구스가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다독여주고, 그의 아내 캐롤이나 아들 브래들리 얘기를 하며 자신의 울적한 기분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환기해주고는 했다.
커피를 건네는 손이 없다. 해군사관학교 졸업을 기념하는 투박한 반지와 결혼반지를 낀 길쭉한 손. 지금 무엇보다도 그리운 손. 매버릭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주먹 쥔 손바닥에 뭉툭한 손톱자국이 깊게 팼다. 도망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매버릭은 차라리 정말 폭탄이 터져서 강의실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을 모두 끄고 블라인드까지 내려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엉성한 모양새의 바닐라 케이크 위에 꽂은 촛불만 홀연히 빛났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촛불은 허리가 꺾여 위태롭게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 매버릭.”
매버릭은 힘없이 자기 자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손뼉을 쳤다. 오늘은 그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관사, 매버릭은 혼자였다.
“생일 축하해.”
매버릭은 촛불을 껐다. 연기에 눈이 따갑다는 핑계로 매버릭은 작게 훌쩍거렸다. 절대 혼자 맞이하는 생일이 서글퍼서가 아니다. 연기라면 뭐든 질색이다.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 모닥불, 고풍스러운 벽난로, 무엇보다도 담배 연기. 담배 연기……. 매버릭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떨쳐내며 어둠 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에 스탠드 램프의 거칠거칠한 몸통이 걸렸다. 매버릭은 곧바로 불을 켰다.
스탠드 램프가 야속하게도 환하게 방안을 밝혔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밉살스럽게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매버릭은 블라인드를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지친 발걸음으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매버릭은 둥그스름한 케이크를 여섯 조각으로 잘랐다. 한 조각은 자신의 몫이다. 세 조각은 사랑하는 브래드쇼 가족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은 두 조각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것이다. 부모님을 위한 케이크를 접시에 덜던 중에 매버릭은 이제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부모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케이크 다섯 조각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매버릭은 새하얀 접시에 놓인 자신의 케이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케이크를 먹는 데 용기를 내야 한다니, 우스운 일이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매버릭은 포크로 케이크 모서리를 살짝 긁어냈다. 그런 다음 조심스레 떨어진 아이싱 크림을 입에 넣었다. 코가 찡할 정도로 달았다. 이어서 매버릭은 포슬포슬한 시트 부분을 포크로 떴다.
“맛없네.”
매버릭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케이크 믹스 포장지에 적힌 대로 만든 건데,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그 맛이 아니었다. 시트는 퍽퍽해서 목이 막혔고, 크림은 너무 달고 바닐라 향이 강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분명 어렸을 때는 맛있었는데……. 매버릭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여전히 맛이 없었다. 오늘 스트라이커와 대면한 일로 기분이 울적해서 입이 쓴 건지, 원래 맛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결국, 매버릭은 케이크를 먹는 걸 포기하고 뒷정리를 했다. 처음 케이크를 만들어본다고 일을 벌인 부엌은 난장판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치우고 나니 어느새 오후 8시였다.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부유하는 시간이었다. 기분도 울적한데 차라리 일찍 잘까 하다가, 그래도 생일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워서 매버릭은 점퍼를 걸쳤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들어간 펍에서 매버릭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바에서 훈련생 두 명이 맥주병을 손에 쥐고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그래도 눈에 익은 얼굴이라서 반가운 마음에 매버릭은 낮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이에나! 스크루! 너희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여기 자주 오나 봐?”
매버릭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하이에나와 스크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고장이 난 기계처럼 뻣뻣한 동작으로 매버릭에게 몸을 돌렸다. 덩치가 큰 하이에나의 등 뒤에서 어떤 여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는 사람?”
“어, 교관님.”
“이 사람이?”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매버릭을 바라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매버릭은 숨을 쉬는 걸 잊어버렸다. ‘닮았어.’ 매버릭은 누군가가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에 회색 눈동자, 살짝 뒤집힌 도톰한 입술. 누군가에게 여동생이 없단 걸 몰랐다면, 혹시 ‘누군가’의 동생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매버릭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하이에나와 스크루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눈이 파란 여자는 매버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버릭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매버릭은 이 여자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지갑부터 꺼냈다.
“내가 한턱낼게. 마침 오늘이 내 생…….”
“아닙니다. 저흰 이만 가보려던 차였습니다.”
하이에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그래? 술 산다는 걸 마다하고.”
스크루의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하이에나와 스크루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여기서 더 마셔야지. 내가 여기 매상 책임진다고 했거든. 그치, 하퍼?”
금발 머리 여자가 바텐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바텐더는 씩 웃었다. 두 사람은 친해 보였다. 매버릭은 수더분한 인상의 바텐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화가 났다.
“이봐, 차라리 다른 데서 마시자고.”
하이에나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쩔쩔매며 여자에게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야 하는데?”
여자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쏘아붙였다. 하이에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러자 여자는 답답한지 하이에나의 어깨를 슬쩍 밀며 다시 물었다.
“교관이랑 술 마시는 게 불편해서 그래?”
하이에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스크루와 둘이서 시선을 주고받으며 떨떠름하게 입맛만 다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 자기는 가.”
여자는 하이에나에게서 떨어지며 시원스레 말했다.
“뭐?”
하이에나는 눈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난 교관님이랑 한잔할래.”
여자는 자연스레 매버릭의 팔짱을 꼈다. “이봐, 정말 이럴 거야?” 하이에나가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겁쟁이는 잘 가.” 여자는 하이에나에게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매버릭을 끌어당겼다.
여자는 매버릭을 창가에 놓인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매버릭을 자리에 앉힌 다음,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매버릭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잠시 후, 스크루의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혀를 차며 다가와 매버릭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교관 맞아요? 이렇게 젊은데.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몇 살이에요?”
“오늘 스물여덟 살이 됐습니다.”
여자의 질문에 매버릭은 그답지 않게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여자와 있으니 긴장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생일이구나?”
“예.”
“자기야, 생일 축하해요.”
여자는 대뜸 매버릭의 목을 끌어안더니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매버릭의 얼굴에 새빨간 입술 자국이 여기저기 남았다.
“신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서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생일 선물.”
신디는 산뜻하게 웃으며 매버릭의 뺨을 문질렀다. 신디의 입술 자국이 홍조처럼 매버릭의 뺨과 콧잔등에 걸렸다. 그걸 보고 신디는 또다시 크게 웃었다. 매버릭도 비로소 마음을 놓고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여자들은 좋다.
여자들이 자신을 이용하는 건 괜찮다.
여자들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여자들은 상처를 주지 않으니까.
아니, 여자들은 상처를 줘도 괜찮다.
여자들은.
매버릭은 목이 메서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하고 신디가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녹슨
5.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에서도 새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는 눈에 띄었다. 칙칙한 식당 한구석에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말끔한 옷차림은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은 매버릭을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힐끔거렸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것처럼 매정하게 지나치면서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찾고 싶은 것처럼.
혼도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했다. 사람들이 매버릭을 구경거리, 혹은 눈요깃거리로 삼는 게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버릭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샐러드를 먹었다. 그는 눈총 사는 일에는 익숙했고, 불온한 관심도 익숙했다.
“좀 더 먹지 그래.”
매버릭이 포크를 내려놓자 혼도가 넌지시 말했다. 매버릭은 손을 내저었다.
“비행하기 전에 배불리 먹으면 속이 거북해.”
“네가 조종하는 것도 아닌데 뭘.”
“습관이 돼서 어쩔 수 없네.”
매버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근심 어린 눈으로 먹다 만 샐러드와 포크로 찔러보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은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샌드위치는 배가 고프다고 성화인 혼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킨 메뉴였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남들이 밥을 먹을 때 합석해서 먹는 시늉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체하는 건 매버릭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고안해낸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 어설픈 생존 방식은 데면데면한 사이에는 꽤 잘 통했다. 좀 더 가까워지고, 하나씩 서로의 비밀을 알아가다 보면 곧 들통나버렸지만. 혹은 한 번에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었다. 혼도가 그랬다.
매버릭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가 다이너에서 혼자 식사하는 혼도를 발견했다. 그때는 신형 기체 프로젝트를 앞두고 주요 팀원들끼리 한 차례 미팅을 가져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앞으로 지겹도록 볼 사이니, 이참에 친해질까 싶어 무작정 다이너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때도 매버릭은 풀드포크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샌드위치 귀퉁이만 갉작거리는 매버릭에게 혼도는 서슴없이 “대령님께선 먹지도 않을 음식은 왜 시키신 겁니까?”하고 가감 없이 말했다. 그때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 매버릭 못지않게 극적인 유년 시절을 보낸 혼도는 음식을 남기는 일이라면 질식했다.
서로 막역해지고 나서, 혼도는 매버릭에게 괜히 먹지도 않을 음식을 시켜서 쓰레기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며 나무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버릭의 오랜 습관을 고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이제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자기 자신을 ‘풀드포크맨’이라고 부르면서 매버릭의 기벽을 즐기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도 참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처해서 고생길을 밟았네.”
혼도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의욕이 넘쳤거든.”
매버릭은 피식 웃었다.
“미그기를 격추했다는 자신감에 넘쳐서 말이야.”
“그 얘긴 30년 넘게 질리도록 우려먹었잖아.”
“말도 마. 그때 비하면 지금은 나아진 거야.”
매버릭은 쑥스러워하며 코를 훔쳤다. 그리고 곧바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매버릭의 시선은 혼도가 아닌 먼 곳을 향했다. 목적지를 잃은 공허한 시선이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
“미그기를 격추한 젊은 대위.”
“…….”
“그것 말고는…….”
매버릭은 자조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그는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추억이라 말하는 오래전의 기억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혼도는 매버릭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매버릭이 움찔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매버릭, 너는.”
“응?”
“좋은 사람이야.”
혼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매버릭을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일직선 도로를 거침없이 주행하는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매버릭의 귓바퀴가 빨개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괜스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혼도는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 속 썩이는 데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혼도.”
“네가 미그기를 격추하기는커녕 미그기에 격추당해서 바다 한복판에 처박혔어도 난 지금처럼 너랑 이 맛 없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비행기를 기다렸을 거라고. 썩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추모한다고.”
혼도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지독히도 쓴 것을 먹은 것처럼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그래. 아이스는 누구나 좋아해. 내가 1986년에 아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들 아이스만 나타났다 하면 우르르 몰려갔어. 어떻게든 그 자식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잰 체하지만 의외로 격 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친구였거든. 누구하고나.”
매버릭은 쩔쩔매며 은근히 아이스의 편을 들었다.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혼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스가 사령관이어서 그래? 하기야, 네가 아이스랑 처음 만났을 무렵에는…… 그래, 부담스러울 법도 하겠다.”
매버릭은 혼도가 또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했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럼?”
“타고난 리더라고 해야 할까.”
혼도는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잠깐 뜸을 들였다. 매버릭은 초조한 눈으로 혼도의 얼굴색을 살피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 사람한테 나 같은 인간은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보살펴줘야 할 어린양 같은 존재인 거지. 자기랑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봐, 매버릭. 카잔스키 사령관은 여기 사는 사람.”
혼도는 손을 자신의 정수리 위로 높게 들었다.
“나는 여기 사는 사람.”
그리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난 그중에서도 특별한 양인가?”
“맞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러질 못하겠네.”
매버릭은 왼쪽 귀를 잡아당기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잔스키 사령관이 널 좀 싸고돌았어야지.”
혼도는 말도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너도 이득 좀 봤잖아?”
매버릭이 억울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건 맞아. 그러니까 모른 체하면서 입 다물고 있던 거고.”
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스도 날 감싸줄 수 없는 처지였고…… 게다가 서로 연락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어.”
매버릭은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 말에 혼도는 냅킨을 접다말고 멈칫했다.
“탑건에서 알게 된 이후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던 게 아니었어?”
“아니야. 미그기 격추하고 잠깐, 아주 잠깐. 한 반년 남짓이었나. 그동안만 잠깐 연락하고, 시간이 되면 얼굴 한 번씩 보고……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스가 결혼했어. 예전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나던 여자가 있었거든.”
매버릭은 말을 멈추고 엄지로 물컵을 문질렀다. 혼도가 어서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라야.”
매버릭은 꼭 치통을 앓는 것처럼 웃었다. 불편한 얘기를 할 때면 으레 짓는 표정이었다.
“결혼하면 환경이 달라진다잖아. 아이스는 신경 쓸 일이 여러모로 많았지. 게다가 결혼하고 얼마 뒤에 사라가 아이를 가졌거든. 허니문 베이비! 첫째가 허니문 베이비야. 굉장하지 않아?”
매버릭은 불편한 기분을 감추려고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혼도가 허니문 베이비란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놀라기를 기대했는데,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카잔스키 부부의 가정사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 자연스레 멀어졌어. 집안 건사하느라 바쁜 사람 상대로 투정 부리면서 시간 뺏기 그래서 전처럼 연락을 못 하겠더라고.”
멋쩍어진 매버릭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혼자서 그 난관을 헤쳐나가야만 했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상관, 마찬가지로 나를 환영하지 않는 반항적인 젊은이들, 친한 사람 하나 없는 미라마 해군기지. 하필 여름이라 날씨는 또 끝내주게 좋았어.”
매버릭은 고개 숙이며 쓸쓸하게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기 좋게 실패했어.”
매버릭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마침 워싱턴행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매버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혼도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은 허공을 한 번 올려다본 다음,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무채색으로 휘감은 직장인, 지긋지긋한 고향을 탈출할 꿈에 부풀어 형형색색으로 자신을 위장한 어린애, 젊은 시절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노부부, 악을 쓰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 그 많은 사람을 헤쳐나가며.
혼도의 눈에 매버릭은 유령처럼 보였다.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줄도 모르고, 자신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랑했던 것들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
6.
“……이 밖에도 도그파이트 중에는 다른 적기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런데도 근접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누구 말해 볼 사람 없나?”
매버릭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의실에 착석한 훈련생 가운데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없나?”하고 매버릭이 재차 물었으나 훈련생들은 서로 힐끔거릴 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아무나 좋으니 말해 보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누구보다 자신을 내세우며 뽐내길 좋아하는 부류가 파일럿들이다. 다들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고,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훈련생들이 학창 시절 내내 락커에 처박힐까 봐 겁이 나서 덩치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죽이고 다니는 놈들처럼 굴고 있으니, 매버릭은 속이 뒤집혔다.
“스트라이커.”
매버릭은 하는 수 없이 스트라이커를 지목했다.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겠나?”
“모르겠습니다.”
스트라이커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매버릭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첫날 모의전 이후로 줄곧 이런 식이었다. 니들 중령이 규칙과 절차를 준수하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매버릭은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기계적으로 수업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수업을 듣는 훈련생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태만했다. 죽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론 수업을 듣고, 모의전에서는 대충 시늉만 내다가 돌아왔다.
처음에는 틀에 박힌 시시한 수업에 훈련생들이 지루함을 느껴 의욕을 잃은 게 아닌가 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매버릭은 태업이 곧 훈련생들이 자신을 향한 반감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기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곧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고립시키고 피를 말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버릭이 가장 힘겨워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고, 매버릭의 약점을 손쉽게 이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트라이커 네가 모른다고 말하는 건가?”
매버릭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예, 저는 일전에 교관님께서 하신 매뉴얼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심장이 뛰는 대로 움직이라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스트라이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매버릭이 이성을 잃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매버릭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순간, 그가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라이커.”
매버릭은 스트라이커의 도발에 응수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스트라이커 자네의 시답잖은 각오가 아니라 도그파이트의 전술적 가치와 그 필요성에 관해 물었다.”
매버릭은 스트라이커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스트라이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툭 튀어나온 울대뼈가 꿀렁거리며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훈련생들은 모두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실링 팬이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제게 원하시는 대답이 뭡니까, 교관님.”
스트라이커의 목소리에 마침내 감정이 실렸다.
“나는―”
“설마 교관님께서는 도그파이트가 파일럿의 낭만이라는 대답을 바라시는 겁니까?”
스트라이커는 매버릭의 말을 자르며 비아냥거림으로 쐐기를 박았다. 스트라이커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그러자 훈련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낮고 묵직한 웃음, 천장을 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 폭탄이 터진 것처럼 강의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매버릭은 버릇대로 어색하게 웃었다. 남들이 웃으면 함께 따라서 웃으라는 죽은 친구의 충고대로 웃었다. 그는 즐겁지 않아도 남들을 따라 웃었고, 죽을 것처럼 슬퍼도 웃었다. 그렇게 웃고 나면, 웃기 전보다 더 쓸쓸해졌다. 그럼 구스가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다독여주고, 그의 아내 캐롤이나 아들 브래들리 얘기를 하며 자신의 울적한 기분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환기해주고는 했다.
커피를 건네는 손이 없다. 해군사관학교 졸업을 기념하는 투박한 반지와 결혼반지를 낀 길쭉한 손. 지금 무엇보다도 그리운 손. 매버릭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주먹 쥔 손바닥에 뭉툭한 손톱자국이 깊게 팼다. 도망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매버릭은 차라리 정말 폭탄이 터져서 강의실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불을 모두 끄고 블라인드까지 내려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엉성한 모양새의 바닐라 케이크 위에 꽂은 촛불만 홀연히 빛났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촛불은 허리가 꺾여 위태롭게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 매버릭.”
매버릭은 힘없이 자기 자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손뼉을 쳤다. 오늘은 그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관사, 매버릭은 혼자였다.
“생일 축하해.”
매버릭은 촛불을 껐다. 연기에 눈이 따갑다는 핑계로 매버릭은 작게 훌쩍거렸다. 절대 혼자 맞이하는 생일이 서글퍼서가 아니다. 연기라면 뭐든 질색이다.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 모닥불, 고풍스러운 벽난로, 무엇보다도 담배 연기. 담배 연기……. 매버릭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떨쳐내며 어둠 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에 스탠드 램프의 거칠거칠한 몸통이 걸렸다. 매버릭은 곧바로 불을 켰다.
스탠드 램프가 야속하게도 환하게 방안을 밝혔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밉살스럽게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매버릭은 블라인드를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지친 발걸음으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매버릭은 둥그스름한 케이크를 여섯 조각으로 잘랐다. 한 조각은 자신의 몫이다. 세 조각은 사랑하는 브래드쇼 가족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은 두 조각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것이다. 부모님을 위한 케이크를 접시에 덜던 중에 매버릭은 이제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부모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케이크 다섯 조각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매버릭은 새하얀 접시에 놓인 자신의 케이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케이크를 먹는 데 용기를 내야 한다니, 우스운 일이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매버릭은 포크로 케이크 모서리를 살짝 긁어냈다. 그런 다음 조심스레 떨어진 아이싱 크림을 입에 넣었다. 코가 찡할 정도로 달았다. 이어서 매버릭은 포슬포슬한 시트 부분을 포크로 떴다.
“맛없네.”
매버릭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케이크 믹스 포장지에 적힌 대로 만든 건데,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그 맛이 아니었다. 시트는 퍽퍽해서 목이 막혔고, 크림은 너무 달고 바닐라 향이 강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분명 어렸을 때는 맛있었는데……. 매버릭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여전히 맛이 없었다. 오늘 스트라이커와 대면한 일로 기분이 울적해서 입이 쓴 건지, 원래 맛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결국, 매버릭은 케이크를 먹는 걸 포기하고 뒷정리를 했다. 처음 케이크를 만들어본다고 일을 벌인 부엌은 난장판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치우고 나니 어느새 오후 8시였다.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부유하는 시간이었다. 기분도 울적한데 차라리 일찍 잘까 하다가, 그래도 생일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워서 매버릭은 점퍼를 걸쳤다.
* * *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들어간 펍에서 매버릭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바에서 훈련생 두 명이 맥주병을 손에 쥐고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그래도 눈에 익은 얼굴이라서 반가운 마음에 매버릭은 낮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이에나! 스크루! 너희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여기 자주 오나 봐?”
매버릭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하이에나와 스크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고장이 난 기계처럼 뻣뻣한 동작으로 매버릭에게 몸을 돌렸다. 덩치가 큰 하이에나의 등 뒤에서 어떤 여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는 사람?”
“어, 교관님.”
“이 사람이?”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매버릭을 바라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매버릭은 숨을 쉬는 걸 잊어버렸다. ‘닮았어.’ 매버릭은 누군가가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에 회색 눈동자, 살짝 뒤집힌 도톰한 입술. 누군가에게 여동생이 없단 걸 몰랐다면, 혹시 ‘누군가’의 동생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매버릭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하이에나와 스크루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눈이 파란 여자는 매버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버릭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매버릭은 이 여자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지갑부터 꺼냈다.
“내가 한턱낼게. 마침 오늘이 내 생…….”
“아닙니다. 저흰 이만 가보려던 차였습니다.”
하이에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그래? 술 산다는 걸 마다하고.”
스크루의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하이에나와 스크루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여기서 더 마셔야지. 내가 여기 매상 책임진다고 했거든. 그치, 하퍼?”
금발 머리 여자가 바텐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바텐더는 씩 웃었다. 두 사람은 친해 보였다. 매버릭은 수더분한 인상의 바텐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화가 났다.
“이봐, 차라리 다른 데서 마시자고.”
하이에나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쩔쩔매며 여자에게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야 하는데?”
여자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쏘아붙였다. 하이에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러자 여자는 답답한지 하이에나의 어깨를 슬쩍 밀며 다시 물었다.
“교관이랑 술 마시는 게 불편해서 그래?”
하이에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스크루와 둘이서 시선을 주고받으며 떨떠름하게 입맛만 다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 자기는 가.”
여자는 하이에나에게서 떨어지며 시원스레 말했다.
“뭐?”
하이에나는 눈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난 교관님이랑 한잔할래.”
여자는 자연스레 매버릭의 팔짱을 꼈다. “이봐, 정말 이럴 거야?” 하이에나가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겁쟁이는 잘 가.” 여자는 하이에나에게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매버릭을 끌어당겼다.
여자는 매버릭을 창가에 놓인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매버릭을 자리에 앉힌 다음,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매버릭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잠시 후, 스크루의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혀를 차며 다가와 매버릭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교관 맞아요? 이렇게 젊은데.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몇 살이에요?”
“오늘 스물여덟 살이 됐습니다.”
여자의 질문에 매버릭은 그답지 않게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여자와 있으니 긴장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생일이구나?”
“예.”
“자기야, 생일 축하해요.”
여자는 대뜸 매버릭의 목을 끌어안더니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매버릭의 얼굴에 새빨간 입술 자국이 여기저기 남았다.
“신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서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생일 선물.”
신디는 산뜻하게 웃으며 매버릭의 뺨을 문질렀다. 신디의 입술 자국이 홍조처럼 매버릭의 뺨과 콧잔등에 걸렸다. 그걸 보고 신디는 또다시 크게 웃었다. 매버릭도 비로소 마음을 놓고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여자들은 좋다.
여자들이 자신을 이용하는 건 괜찮다.
여자들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여자들은 상처를 주지 않으니까.
아니, 여자들은 상처를 줘도 괜찮다.
여자들은.
매버릭은 목이 메서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하고 신디가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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