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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17.


워싱턴 덜레스 공항.

비행기에서 내린 매버릭과 혼도는 게이트를 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번듯한 공항은 한산했고, 각자 이동 수단을 찾아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우중충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침울했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인지 밀폐된 실내 특유의 텁텁한 공기 중에 습기가 느껴졌다. 그 끈적끈적한 습기가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꺼풀과 입꼬리에 매달려 찌푸린 표정을 짓게 하는 듯했다.

“그날, 왜 카잔스키 사령관에게 전화를 건 거야?”

남들보다 걸음걸이가 빠른 매버릭을 따라잡느라 벅찬 나머지 혼도가 숨을 헉헉거리며 물었다. 그제야 매버릭은 아차 싶어서 보폭을 좁히고 혼도와 걷는 속도를 엇비슷하게 맞췄다. 그리고 미안한지 특유의 새침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게.”
“대강 짐작은 하겠다만.”
“하하.”

매버릭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한없이 높은 천장이 하늘과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항모에서 몇 달 만에 내렸는데, 오랜만에 본 가족도 내팽개치고 널 만나러 가다니…… 카잔스키 사령관도 참. 옛날부터 너한테는 약했군.”
“내가 이기적이었지.”

혼도가 별다른 뜻 없이 꺼낸 말에 매버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하늘을 갈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는 이 땅에 자신의 두 발을 묶고 있었다.

“내가 아이스에게, 사라에게, 앤디에게 못 할 짓을 했어. 밀라에게도.”
“매버릭.”
“나 때문에……. 만약에 그때 내가 아이스를 찾지 않았더라면.”

매버릭은 무엇이든 끝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타고난 기질은 오늘날의 성공을 안겨 준 한 편으로 그를 지독히도 외롭게 만든 주범이었다.

“그나저나 U.S. 뱅크 타워가 완공하는지 얼마 안 됐을 때 얘기라니, 옛날은 옛날이군.”

혼도는 매버릭을 우울한 늪에서 꺼내고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 혼도의 노력 덕분에 매버릭은 다행스럽게도 간신히 늪에서 발을 빼냈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고 서둘러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오래전 일이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해.”
“그래?”
“그때 나는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뛰어내려 도시를 향해 날아가고 싶었지만, 아이스는 내가 추락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

매버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년처럼 웃었다.

“그래서 땅에 남겠다고 결심한 거야?”
“아이스가 준 재킷은 참 따뜻했고, 아이스가 쓰던 향수 냄새가 났지. 아이스는 평생 그 향수만 썼어.”

매버릭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어루만지며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또 말 돌리지, 매버릭.”

혼도는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스랑 같이 천문대에 가서 무척 기뻤어.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고 웃어본 게 참 오랜만이었거든. 난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아무리 날 싫어하고 밀어내도, 난 사람이 좋은 걸 어떡해?”

매버릭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꼭 장난기 가득한 어린애 같았다. 잠깐 한눈을 팔면 곧바로 기가 막힌 사고를 저지를 어린애 말이다.

“매버릭.”

혼도는 나지막이 매버릭을 부르며 말을 아꼈다.

“혼도, 오페라 「루살카」가 어떤 내용인지 알아?”
“아니, 몰라.”

혼도는 멋쩍게 대답하며 콧방울을 만지작거렸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아이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건 실은 ‘싫어한다.’라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었어.”

매버릭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스가 처음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어. 난 그 소식을 남들보다 좀 늦게 알았어. 아이스가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거든.”

그 말에 혼도는 발끈해서 무뚝뚝하게 물었다.

“넌 카잔스키 사령관이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모르지.”

매버릭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그는 혼도의 질문 속에 담긴 숨은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지난 몇 년간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동안, 혼도는 종종 ‘카잔스키 사령관’과 ‘미첼 대령’의 우정을 기형적인 관계라고 과격한 표현을 쓰며 지적했다. 그때마다 매버릭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 망할 「루살카」가 어떤 이야기인데?”

혼도는 고개를 휙 돌리며 험상궂은 투로 입을 열었다.

“물의 요정 루살카가 어느 날 호수에 찾아온 인간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져. 루살카는 매일 왕자를 그리워하면서 자신도 왕자처럼 인간이 되길 소망하지. 그러다가 결국, 마녀의 도움으로 인간이 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돼.”

매버릭은 캐리어를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는 물살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유유히 승강장을 향해 나아갔다.

“인어공주 이야기네?”
“응, 비슷해. 인간이 된 루살카는 왕자와 재회하고, 왕자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왕자는 하객으로 온 아름다운 외국 공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루살카와 멀어져.”
“인어공주 이야기 맞네.”
“혼도. 얘기 그만할까?”

불만에 가득한 혼도가 시종 비아냥거리자 매버릭이 도로 걸음을 멈췄다.

“아니야, 계속해봐.”

혼도는 여전히 매버릭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건성으로 손짓했다. 마치 꺼지라고 말하는 듯한 혼도의 손짓에 매버릭은 “혼도.”하고 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하지만 혼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이 적잖이 끓는 모양이었다. 그도 고집이 세기는 매버릭과 비등비등했다.

“아무튼 왕자가 공주에게 구애하자 루살카는 절망하면서 왕자의 곁을 떠나. 이제 루살카는 인간도 아니고 요정도 아니야. 마녀는 루살카에게 단검을 주면서 왕자를 죽이면 다시 요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루살카는 차마 왕자를 죽일 수 없었어.”

매버릭은 혼도를 달래는 것을 포기하고 「루살카」의 줄거리를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물거품이 됐어?”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됐지.”
“뭔데?”

혼도가 움찔하며 되물었다.

“유령 블루디카. 심연 아래 살면서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끔찍한 유령이 되고 말았어.”
“어떻게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거야?”

흥미를 느낀 혼도가 그제야 매버릭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앞이 늪지대의 섬뜩한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혼도의 입이 벌어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온통 회색투성이인 공항 한복판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어두컴컴한 밤의 호숫가에 와있었다. 수상쩍은 연기가 스멀스멀 다가오며 조금씩 숨통을 옥죄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혼도는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밤마다 수면 위로 올라와 인간을 유혹하고, 자신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 키스해. 그러면 인간은 죽음에 빠지게 되지.”

매버릭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들렸다. 아니다, 매버릭의 목소리가 아니다. 혼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 ‘존재’는 매버릭이 아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빛을 띠는 창백한 피부, 질투로 이글거리는 초록색 눈동자…….

“……혼도? 왜 그래?”

매버릭이 뒷걸음질 치는 혼도를 붙잡았다. 혼도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혼도.”하고 매버릭이 다시금 그를 부르며 팔을 흔들었다. 

매버릭이 몇 차례 자신을 부르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혼도는 안경을 고쳐 썼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눈에 익은 공항이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매버릭이 있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드보르자크가 슬라브 민담이나 전설에서 영감을 얻었나? 그쪽 이야기는 어째 쌀쌀하더라.”

혼도는 아직도 조금 전 호숫가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해서 몸서리치며 말했다.

“응, 맞아.”
“그런데 왕자는? 그 외국 공주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나?”
“아니, 다시 루살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루살카를 찾아.”

매버릭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자식이네.”

혼도는 대번에 욕설을 내뱉었다. 매버릭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루살카와 재회한 왕자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키스해달라고 말해. 루살카는 자신과 키스하면 당신이 죽게 된다고 말하지만, 왕자는 단호하게 키스해달라고 부탁하지. 끝끝내 루살카의 품에서 죽어.”

“왕자가 죽었으니 루살카는 다시 요정으로 돌아갔어?”
“아니, 이미 유령이 된걸. 영원히 죽음의 세계에서 살며 인간을 유혹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걸 반복해야만 하는 운명이지. 영원히. 인간도 요정도 아닌 유령으로.”
“카잔스키 사령관이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뒷맛이 씁쓸해서인가? 아니면 왕자에 자신을 이입해서 그런가?”
“아니야.”

매버릭은 열없이 미소 지었다.

“아이스는 왕자가 운 좋은 놈이라고 말했어.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서 죽었잖아. 그 영혼은 루살카의 간절한 청원으로 신이 거두었고. 그보다 행복한 인간은 없다고 말했어, 드물게 완곡한 말투로. 하지만 루살카는, 루살카는.” 

매버릭의 얼굴이 독약을 삼킨 것처럼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괴로운 얘기를 할 때마다 단어를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었다. 혼잣말처럼 ‘루살카는, 루살카는.’하고 거듭 뇌까리는 그의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이스는 홀로 남아 평생 유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루살카의 신세가 가여워서 그 오페라가 싫다고 말했어.”

이윽고 매버릭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우리가 자동차 안에서 〈달에게 바치는 노래〉를 들었던 날로부터 몇십 년이나 지나서… 내가 다짜고짜 자기를 찾아가서는 왜 나한테 암에 걸렸단 사실을 숨겼냐고 화를 냈던 그 날에서야.”
“…….”
“근데 그 자식은 말이야, 혼도. 암이 재발한 사실도 숨긴 거 있지? 하여튼 개자식 같으니라고.”

매버릭은 시원스레 말하며 출입구를 나섰다. 때마침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비가 내리네.”

매버릭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혼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져 매버릭을 대신해서 울어 줄 때까지, 한참 동안.

 
* * *


우버 기사 호르헤 가르시아는 룸미러를 통해 거센 빗줄기와 함께 찾아온 손님들을 힐끔거렸다. 체구가 건장하고 퉁명스러운 인상의 흑인 남자와 해군 정복을 입은 늘씬하고 튼튼한 체구에 백인 남자였다. 사복을 입고 있으나 흑인 남자도 같은 군인으로 보였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언뜻 들으니 무척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백인 남자 쪽이 계급도 더 높고, 연상인 듯한데 대화는 막역했다. 아니, 막역한 정도를 넘어서서 흑인 남자가 일방적으로 백인 남자를 나무라고, 백인 남자는 그저 웃으면서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이 흔치 않은 조합에 호르헤는 관심이 생겨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흑인 남자의 어깨는 온통 젖어 축축했으나, 백인 남자의 주름 하나 없이 다린 정복은 비 한 방울 젖지 않고 말끔했다. 그의 가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짓궂죠? 주님께서도 야박하십니다.”

호르헤는 너스레를 떨며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예, 하필 비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

흑인 남자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그는 갑작스레 쏟아진 비에 옷이 젖어서 몹시 짜증이 난 듯했다.

“허허, 그래도 이 비가 우리의 죄를 씻겨준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 만합니다.”

호르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말했다. 흑인 남자는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이 호르헤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무래도 호르헤의 예상과 달리 그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무신론자인 듯했다. 하지만 손님인 이상 주님의 은총에 대해 설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맞으시죠?”

호르헤는 화제를 돌려 목적지를 확인했다. 보통 공항에서 우버나 리프트를 부르는 손님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성가셔서 시내까지 가는 길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예, 맞습니다.”

이번에는 백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호르헤는 룸미러를 다시 힐끔거렸다. 나이가 몇 살쯤 됐을까, 언뜻 봐서는 유추하기 힘든 남자였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웃을 때는 철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보여서 종잡을 수 없었다. 다만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외모라, 앞으로 두고두고 떠오를 얼굴인 건 확실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전우분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가족이 있습니다.”

백인 남자는 정중하고 분명한 어조로 호르헤의 질문을 정정했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호르헤는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때, 먹구름이 움직이며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에 비스듬히 경계선이 세워졌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과 빛에 드러난 얼굴이 꼭 서로 다른 사람처럼 몽환적이었다.



18.


매버릭은 눈을 번쩍 떴다.
악몽에 잠을 설쳐서가 아니었다. 자명종 시계의 경박한 울음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어떤 불가사의한 존재에게 계시를 받은 것처럼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반쯤 내린 블라인드 사이로 눈이 부신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매버릭은 반사적으로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 처연하게 고개 숙인 블라인드는 그에게 그늘을, 그리고 무신경하게 고개를 든 블라인드는 그에게 사정없이 빛을 내리꽂아 댔다.

매버릭은 침대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전부 걷었다. 날씨는 언제나처럼 화창했다. 매버릭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때마침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기를 하던 남자가 매버릭과 눈이 마주치자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휙 지나쳤다. 하지만 매버릭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뭐야, 신기하네.”

매버릭은 오른쪽 어깨를 돌려보았다. 쇄골 쪽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요즈음 아침마다 죽을 것처럼 숨이 막히고 괴로웠던 게 거짓말 같았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다시피 욕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 어떤 옷을 입어야 좋을지 하는 것이었다. 상의는 흰색 헨리넥 셔츠로 일찌감치 결정했는데, 바지가 문제였다.

“뭐가 더 낫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매버릭은 창문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지저귐에 눈을 반짝 떴다. 그는 한달음에 창가로 뛰었다.

“잭!”
“어이, 친구. 좋은 아침.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잭이 유들유들한 말씨로 인사말을 건넸다. 잭은 귀염성 있는 외모와 달리 말투가 걸걸했다. 그래서 매버릭은 차라리 잭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시절이 그리웠을 정도였다.

“응, 마침 잘 왔어.”

매버릭은 잭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잭은 잠깐 망설이다가 날개를 펼쳤다. 사뿐하게 전신 거울 위에 앉은 잭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매버릭은 청바지 두 벌을 잭에게 보여주었다.

“무슨 차인데?”

잭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주머니 쪽에 고양이 수염처럼 워싱이 있고, 허벅지 쪽에도 바랜 자국이 커. 근데 이건 좀 더 깔끔하게 워싱이 생겼지? 그리고 이 바지가 색이 조금 더 밝아.”

매버릭은 청바지를 각각 들어 보이며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빌어먹을. 이봐, 매버릭.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하긴, 네가 사람들 입는 옷에 대해 뭘 알겠어?”

잭이 날개를 퍼덕이며 욕지거리를 내뱉자 매버릭은 혀를 찼다. 잭은 말버릇이 고약하다. 매버릭이 아는 새 중에서 가장 고약하다. 저러니 여태 짝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매버릭은 침대 위에 청바지를 나란히 펼쳐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각각 다른 바지를 입은 모습을 그려보면서 어느 쪽이 더 근사해 보일지 말이다.

“무슨 노래야?”
“〈달에게 바치는 노래〉. 잭, 넌 오페라 같은 거 모르지?”

잭이 불쑥 묻자, 매버릭은 으스대면서 잘난 체했다.

“그럴 리가. 이봐, 난 오페라를 아주 빠삭하게 잘 안다고.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몇 안 되는 훌륭한 유산이야.”
“오, 알아?”

매버릭은 제법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역시 잭과는 말이 통한다.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만 빼면, 잭은 정말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매버릭의 기대를 처참히 깨부술 작정인지 잭은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냈다.

“잘 알지. 나도 좋아하는 아리아야. 근데 있잖냐 매버릭, 네가 너무 좆같이 불러서 그 곡인 줄 몰랐어. 넌 될 수 있으면 노래 부르지 마라.”
“이 새끼야, 말 다 했어?”

잭의 독설에 울컥한 매버릭이 주먹을 불끈 쥐자, 잭은 재빨리 창틀로 피신했다.

“그보다 나 좀 출출한데, 매버릭.”
“어, 잠깐만.”

매버릭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잭이 좋아하는 견과류를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작은 그릇에 시원한 물을 가득 담아서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잭이 도시에서는 깨끗한 물을 찾기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매버릭은 주머니에 고양이 수염처럼 가늘고 기다란 자국이 난 청바지를 골랐다. 허리가 좀 커서 벨트를 매야만 했지만, 입고나니 퍽 마음에 들었다.

매버릭은 잭이 아침 식사를 할 동안 창틀에 팔을 괴고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잭은 매버릭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고, 중간중간 그에게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저수지는 좀 쌀쌀하려나? 어제 천문대에서 바람이 쌀쌀한 바람에 좀 고생했거든.”

아이스와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자 매버릭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럼 걸칠 걸 챙겨.”
“아냐, 됐어. 안 챙길래.”
“어제 추웠다면서?”
“그 새끼가 입고 올 거니까.”

매버릭은 씩 웃었다.

“아아, 그 존나게 재수가 없다던 대가리 노오란 씹새끼?”

잭이 날개를 고르며 말했다.

“맞아. 염색한 금발이 아니라 자연 금발이라서 여기도 색이 밝아.”

매버릭이 옆머리를 쓰윽 문지르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그때, 현관문의 도어 노커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동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경쾌한 소리였다. 두드림은 정확히 두 번이었다.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버릭이 “헉.”하고 작게 딸꾹질했다.

“히끅, 버, 벌써 왔나 보다.” 

매버릭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이어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매버릭은 “나, 나갈게!”하고 외치며 가슴을 쓸었다. 다행히 딸꾹질은 금방 멎었다.

“하여튼 시간은 칼같이 지킨다니까. 잭, 잠깐만. 문 좀 열어줄게.”

그는 잭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기 전에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목소리까지 고른 다음 아무렇지 않은 척 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스!”
“매버릭.”

아이스는 뒷짐을 진 채 선선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빳빳하게 다린 흰색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굽이 없고 납작한 로퍼를 신고 있었는데, 매버릭이 막연하게 그리던 성숙한 남자의 표본 같았다. 

매버릭은 자신의 물 빠진 청바지를 꼬집으며 이제라도 옷을 갈아입을까,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옷장을 샅샅이 뒤져봤자 오늘 아이스가 입고 온 옷에 견줄만한 옷은 못 찾을 것이다.

“잘 잤어?”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는 매버릭의 모습에 아이스는 웃으면서 물었다.

“응, 넌?”
“나도. 베이글 좋아해?”

아이스가 뒷짐을 풀고, 손에 든 종이봉투를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좋아해”
“다행이다. 차 안에서 아침으로 먹자.”
“그래, 좋아. 아, 맞아! 지금 잭이 왔거든? 잭한테 네 얘기를 하고 있었어.”
“잭? 누가 집에 있어?”

뜬금없는 매버릭의 말에 아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아침에 자주 놀러 오는 친구야. 곡물보다 견과류를 더 좋아하는 유별난 놈이지. 몸집은 작은데 얼마나 우렁차게 지저귀는지 몰라. 나는 것도 재빠르다고. 잠깐 들어와서 인사하고 갈래?”

매버릭은 절친한 친구를 소개하는 것처럼 기쁜 얼굴로 아이스에게 권했다. 매버릭의 말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던 아이스는 그가 말하는 잭이라는 친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눈치챘다.

“아니, 다음에 인사하는 게 좋겠다.”

아이스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의 입구가 우그러졌다.

“왜, 잭은 널 보고 싶어 하는데.”
“다음에. 늦었어, 길 막히겠다.”

재차 권하는 매버릭에게 아이스는 애써 덤덤한 어조로 사양했다. 들뜰 때로 들뜬 매버릭은 아이스가 이를 악물며 평정심을 되찾고자 숨을 고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잭한테 다녀온다고 말하고 올게.”
“그래.”

홀로 남은 아이스는 손등이 허옇게 질리도록 힘을 잔뜩 줬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웃음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이스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심정이었다. 무엇이 매버릭을 위한 길인지 모르겠다. 이대로 매버릭의 병증을 모른 체하고, 그에게 장단을 맞춰줘야 할지 아니면 진지하게 치료를 권해야 할지 말이다. 

방관하자니 매버릭의 기벽은 끝도 없이 심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치료를 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길로 매버릭을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매버릭은 전역당할 것이다. 그것도 현역 부적합 전역.

 
* * *


“출발하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았잖아. 또 뭐가 불만이야.”

신호가 바뀌어 정차한 아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매버릭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가 나 바래다주고, 데리러 오는 거.”

매버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그게 불만이야?”

아이스는 어처구니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

매버릭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가 운전하니 몸이 편해서 좋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차에 타며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아이스가 어젯밤 자신을 관사까지 바래다주고, 오늘은 데리러 온 게 꼭 자기를 여자 대하듯이 대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잭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잭은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거 데이트 아니야?’

“그러게 진작 차를 사지 그랬어. 차만 있었다면 네가 날 데리러 올 수 있잖아.”
“난 바이크가 편해.”
“그럼 그만 투덜거리고 얌전히 안전벨트나 매.”

아이스는 매버릭이 잡아당긴 바람에 애처롭게 달랑달랑 흔들리는 안전벨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싫어, 답답하단 말이야. 바이크 탈 때 헬멧도 안 쓰는데 차 탈 때 안전벨트를 맬 것 같아?”
“미첼, 한 대 맞고 싶어?”

같잖지도 않은 이유로 투덜거리는 걸 들어주자니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아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기어이 으름장을 놓자, 매버릭은 움찔하더니 그의 눈치를 보며 궁색하게 안전벨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알았어.”

매버릭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맸다.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아이스가 역정을 내서 자기가 뭐라고 저러나 싶어 울컥했는데,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또,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제 맘을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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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2024.04.06 21:49
ㅇㅇ
아이스가 그 날개를 꺾었다는 건 결국 매브에게 너는 새가 아니고 나와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결국 둘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평생 어찌 보면 둘만의 완벽한 사랑을 하긴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반쪽짜리라 결국 완전한 상처 치유는 불가능했겠지 그래서 매브는 아이스가 죽은 지금까지도 환상통을 느끼는거 아닐까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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