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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20.


새벽부터 브라운관 TV에서 전날 야구 경기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다저스의 감독이 오늘의 먹잇감이었다. 캐스트는 선발 투수인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혹사하는 게 지나쳐서 점점 더 약점이 노출되고, 피로 누적으로 예전처럼 공을 던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해설자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감독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에 모든 것을 의지하다 보니, 정작 그의 뒤를 이을 새로운 루키의 등장마저 막고 있는 형편없는 용병술이라는 악담이었다. 매버릭의 기억대로라면, LA 다저스가 이겼는데, 이긴 경기를 두고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앵커들이 자신의 무기인 혀와 펜을 앞세우고 카랑카랑한 소리를 쉼 없이 내지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매버릭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는 TV를 등지고 창가로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잭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시간이면 매일매일 새로운 인사말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주었던 잭이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잭은 아이스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스도 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요즘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함께 즐거운 경험도 만들며 부끄럽지 않을 하루를 만들어주는 두 기둥이 서로 데면데면하니 매버릭의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

매버릭은 습관대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사람들이 눈에 핏대를 세우고 우악스럽게 떠드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볼륨을 최대한 낮췄다. 밖을 지나치는 사람들 인기척 속에서 잭의 날갯짓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아직 미열이 지독하게도 들러붙어 있어서 머릿속이 좀 멍했다.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매버릭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엉덩이를 뒤로 살짝 뺐다. 체중이 실린 시트에 어젯밤의 가슴 사무치는 순간을 캡슐로 만들어 군데군데 흩뿌렸던 모양이었다. 매버릭이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캡슐이 깨져 전날 밤의 채취와 온기, 향기 등을 그의 몸을 휘감았다.

“잘 잤어?”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친 아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런 게 여기 있었나?’ 매버릭은 아이스의 손에 들린 반듯한 쟁반과 그보다 더 제법 그럴듯한 그릇을 보고 놀랐다. 전형적인 미국인의 아침 식사가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신선한 과일 주스와 다이어트 시리얼, 삶은 달걀과 바싹 익힌 베이컨. 매버릭은 정말 오래간만에 허기가 졌다.

“응. 넌?”
“나도.”

아이스는 매버릭의 옆에 그릇을 살짝 내려놓으면서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주스 잔을 왼쪽 어깨 쪽으로 가져가며 매버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우스워서.”
“내 어디가 우스운데?”
“그냥, 전부.”
“웃지 마.”

매버릭은 주스 잔을 도로 쟁반 위에 내려놓고 아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퍽 때렸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미안해.”

힘을 실어 때린 것은 아니었지만, 관절을 세워서 때린 거라 꽤 아플 텐데 통증은 참을만한지 아이스는 입까지 틀어막고 혼자서 끅끅 웃어댔다. 마음이 상한 매버릭은 말도 없이 먼저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헝클어져 제멋대로 뻗친 매버릭의 새카만 머리카락도, 부어오른 눈두덩이도, 입안에 커다란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잔뜩 부푼 뺨도, 이따금 작게 딸꾹질하고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모든 것이 아이스가 꿈에서조차 다가갈 수 없었던 노스탤지어였다. 그리고 이 싱그러운 노스탤지어는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있고, 비밀스러운 약속을 속삭일 수도 있었다.

아이스가 멀찍이 떨어져 감상에 푹 빠져 있을 때, 매버릭은 아침 식사를 끝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정말 오랜만에 음식의 맛이 느껴졌다. “설거지 내가 할게. 그냥 둬.” 매버릭이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아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매버릭은 오른쪽 뺨을 씰룩이며 기분이 좋은지, 불쾌한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그래.”하고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제 아이스는 매버릭이 수줍어할 때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매버릭이 설거지하는 아이스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그는 키보다 낮은 싱크대와 높이를 맞추려고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설거지에 집중했다. 매버릭은 매끈하게 뻗은 아이스의 굵고 기다란 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스는 신중한 성격만큼이나 설거지도 꼼꼼하게 하는 남자였다. 싱크대 주변에 물 한 방울 튀지 않도록 그릇을 아래로 기울여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빠르게 설거지를 마쳤다. 아이스가 등을 돌리는 순간, 매버릭도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훔쳐보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다.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스의 기척에 매버릭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정수리에 그의 숨결이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찬물에 식어 서늘한 손이 매버릭의 어깨를 스쳐 쇄골을 눌렀다. 매버릭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참았던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여기, 누르면 아파?”
“그렇게 세게 누르면 당연히 아프지.”

매버릭은 고개를 돌린 채 퉁명스레 말했다. 불쑥 코앞에 들어온 아이스의 얼굴에 매버릭은 깜짝 놀라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자연스레 아이스는 매버릭의 몸 위에 올라탔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아이스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입술이 닿을 만큼. 매버릭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아이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곧 자신에게 벌어질 놀라운 일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처음 만났던 날에는 신랄한 조롱을, 그다음은 경고를, 온몸이 분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끓던 항공모함 위에서는 진실한 맹세를 말했던 입술이 매버릭의 이마에 닿았다.

체감하기로는 5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으로 서로가 이어졌던, 기억 속에 불멸할 여름 아침의 5분. 매버릭은 자신이 예감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란 걸 알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스가 얼마나 고심했고 망설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열은 내렸네.”

아이스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내렸어?”
“응.”

아이스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어찌나 괴로워 보이는지 매버릭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매버릭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아이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햇볕에 비친 솜털이 부드러웠다.

“아직도 솜털이 있네.”
“아…….”
“부드럽다. 정말.”

긴장한 탓에 떨고 있는 매버릭의 목덜미에도 황금빛 솜털이 반짝였다. 아이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날아갈 듯 하늘거리는 솜털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매버릭은 오싹해졌다. 싫지 않은 오싹함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이 힘껏 껴안아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매버릭은 그 목소리에 함락당해 아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스는 매버릭을 피하지 않았고, 그가 바라던 대로 서로 한 몸인 것처럼 부둥켜안았다.

“아이스, 나… 다시 열이 오르는 것…….”

매버릭은 숨을 헐떡이며 끝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와 둔덕을 얼얼할 정도로 뜨겁고 단단한 욕망이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매버릭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에게도 있고, 아이스에게도 있는 것. 하지만 지금까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기만 했던 것.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가능성이 싫지 않았다. 다만.

“궁금해?”
“응.”

아이스의 물음에 매버릭은 눈을 감았다.

“근데 두려워.”

다시 매버릭은 천천히 눈을 떴다.

“널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까 봐.”

매버릭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황금빛 솜털이 물에 잠기었다.

“그래서 너도 망가트리고 말까 봐.”

아이스는 매버릭의 오랜 두려움마저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의 시원스러운 미소로 매버릭을 대하며 물었다.

“여기저기 쑤시는 건 좀 어때?”
“거짓말처럼 말짱해졌어. 개운해.”

매버릭은 끙끙거리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는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렀다. 말짱해졌다는 말은 그럭저럭 참을만하다는 뜻이었다. 알면서도 아이스는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어제 야구 경기 못 본 거 아쉬우면, 캐치볼이라도 할래?”
“그게…….”

아이스의 제안에 매버릭은 망설였다.

“왜 그래?”
“난 캐치볼을 해 본 적이 없어.”
“한 번도?”

아이스는 당황한 나머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캐치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몇 년 뒤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이 집, 저 집 전전해서…… 같이 놀 친구를 사귈 시간이 별로 없었어. 좀 친해졌다 싶으면 다른 동네로 가야만 했으니까.”

매버릭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차분하게 사정을 밝혔다. 그가 집안 문제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자, 수병으로 입대하면서까지 군에 몸을 맡긴 건 자신과 같은 또래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성장 배경을 지녔으나 부대 내에서는 동등한 병사, 또래, 같은 일과를 보내는 사이, 그렇게 집단이 주는 안정감에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일어나. 나갈 준비하자. 내가 슬라이더 던지는 법을 가르쳐 줄게.”

아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매버릭의 등을 가볍게 툭툭 쳤다. 매버릭은 일어나지 않고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스는 돌아서다 말고 멈췄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매버릭의 손을 잡았다.



21.


알링턴 국립묘지.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새파랬다. 곧게 뻗은 눈썹 옆으로 매버릭의 주름진 손이 절도있게 거수경례 중이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손톱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뒤로 어설프게 경례를 따라 하는 어린아이의 갈색 눈동자가 빛났다. 아이의 부모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숭엄한 침묵이 끝나고, 무명용사의 무덤을 지키는 올드가드 교대식이 끝났다.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있던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과거의 이야기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날 LA 다저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1점 차의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었어.”

맑게 갠 하늘처럼 매버릭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후에도 야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어?”
“아이스랑?”
“아무나.”
“아이스하고는, 아니. 하지만 야구장에 몇 번 가긴 했어. 데이트 상대가 야구를 좋아하면. 내가 응원하는 구단은 그때마다 바뀌었지.”
“야구는 별로 네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혼도는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운동에 미쳐 종일 짐에 틀어박혀 있을 거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매버릭이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그도 진작 아는 사실이었다. 매버릭이 매일같이 운동하며 구슬땀을 쏟아내는 이유는 오로지 전투기 조종에 적합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매버릭은 본인 스스로 자신은 전역하면 순식간에 몸이 풍선처럼 부풀 거라 말했다.

“어, 맞아. 난 농구가 더 재밌더라. 야구는, 야구는 말이야. 야구 경기를 보는 것보다는…….”

아이스와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히 그리운 순간에 잠길 때면 매버릭은 특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스랑 캐치볼을 했던 게 더 재밌었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같이 캐치볼을 한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야구 경기를 다시 보러 가지도 못했지. 이듬해 곧바로 파병을 나간 데다, 돌아오고 나서는…… 산다는 게 쉬우면서도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더라.”

매버릭은 쓸쓸하게 말을 이으며 괜스레 이마를 매만졌다. 수십 년 전 그와 처음으로 캐치볼을 했던 상대의 입술이 닿았던 이 자리는 이제 시간이 만들어낸 오랜 노력의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생존의 기록이었다.

“애초에 야구에 별로 흥미도 없는 나랑 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보다는 야구에 목숨까지 건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게 당연하잖아.” 
“누구 말하는 거야?”
“앤디. 앤디가 중학교 때까지 야구에 미쳐 살았거든. 아이스랑 사라는 앤디 친구들 부모랑 자주 야구장에 갔어. 이른바 실세들의 모임이었지.”
“그렇군.”
“저녁 식사도 마찬가지야. 아이스는 가정적인 남자라, 사라의 지인들을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했어. 친척들과도 자주 만났고. 언젠가 아이스가 나한테 자기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바비큐 소스 레시피를 알려 준 적이 있는데, 까먹었어.”

아이스가 가정적인 남자라고 콕 집어 말하는 매버릭은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혼도는 숙연해졌다. 매버릭이 아이스를 추켜세우는 어조에는 자기비하가 뒤따랐다. 국가에 헌신하고 가정에 충실했던 남자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에 몸담은 남자와 가족의 의미를 끝내 깨닫지 못한 남자의 대비는 명암처럼 선명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다음을 기약했지만, 이루어진 건 별로 없었어.”

매버릭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루치아 포프는 1993년에 뇌경색으로 사망했어. 우리는 결국 함께 루치아 포프의 공연을 보지 못했지.”
“…….”
“만약에 내가 결혼을 했고, 자식도 있었다면 카잔스키 집안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을지도 몰라. 근데 내가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하하.”

매버릭은 머쓱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난 추수감사절도, 크리스마스이브도 대부분 혼자 보냈네. 구스가 살아있을 땐 브래드쇼 가족들이랑 보냈는데, 구스가 죽고 나서는 캐롤이랑 브래들리 볼 면목이 없어서 피하게 됐고…….”
“매버릭. 카잔스키 사령관과 너는…….”

혼도는 매버릭의 손에 들린 백일홍 꽃다발에 시선을 던지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백일홍 꽃다발일까. 혼도는 매버릭이 백일홍을 고집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매버릭과 아이스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단순한 해답을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응?”
“카잔스키 사령관이랑 네 관계는.”
“사라……?”

매버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혼도는 정면을 응시했다. 큰 키에 풍성한 금발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의 여자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라, 정말 당신이야?”
“매버릭!”

여자와 매버릭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반갑게 포옹했다. 어기적거리며 뒤따라온 혼도는 아이스의 부인, 사라 카잔스키에게 고갯짓하며 인사했다. 그에게 답례하는 사라의 눈이 갸름하게 휘어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몰래 다녀가려고 할 줄이야.”

사라가 매버릭에게 나무라는 투로 말하며 포옹을 풀었다.

“전화로 얘기했잖아.”

매버릭은 드물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만 그렇게 할 줄 알았지. 섭섭하게 정말 얼굴도 안 보여줄 생각인 줄은 몰랐어.”
“애들은?”
“먼저 호텔로 돌아갔어.”
“그럼 당신은 나 하나 잡겠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이랑 오랜만에 대화도 나눌 겸, 당신도 붙잡을 겸 겸사겸사.”

매버릭이 농담조로 묻자 사라는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매버릭, 요즘 만나는 사람 없지?”

사라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매버릭은 마술이라도 본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혼자일 때 더 근사하더라. 꼭 동물이 짝짓기 철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야. 여기저기 광고하고 다니는 것 같아. 여기 건강하고 근사한 남자 있음, 지금 싱글.”
“추켜세우지 마, 진짠 줄 안다고.”
“진심인데?”
“참, 이쪽은 혼도. 버니 콜먼이야. 혼도, 여기는 아이스의 아내인 사라.”

쏟아지는 칭찬이 불편했던지 매버릭은 혼도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얘기 많이 들었어요. 지난번에 그이 장례식장에서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저도 아쉬웠습니다.”

사라는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만큼이나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혼도를 상대로 의기소침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매브, 선약이 없으면 저녁에 같이 식사할래?”
“이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아쉽게 됐네.”

사라의 제안에 매버릭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콜먼 준위만 괜찮다면 함께 해도 좋아. 준위, 어때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다른 볼일이 있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기회가 오면 함께 하죠, 부인.”

혼도는 매버릭이 사라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군요. 정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겠네요.”

말과는 달리 사라는 그리 아쉬운 얼굴이 아니었다. 매버릭이 자신의 초대를 거절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거 받아. 오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챙겨왔어.”

사라가 매버릭에게 청회색 종이로 포장한 작은 상자를 건넸다.

“뭔데?”
“나도 몰라.”

사라는 아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에 변호사한테 받았어. 그이가 당신 앞으로 남긴 거야. 자기가 죽고 1년 뒤에 당신에게 전달하라고 유언을 남겼대.”
“뭔지 알아?”

매버릭은 상자를 귀에 대고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생각에는 신발 같은데. 당신한테 신발 선물하는 게 톰의 취미잖아.”
“그래? 이 크기면 갓난아기 신발이겠군. 날 골리는 것도 아이스의 취미긴 했지.”
“다른 걸지도 모르고.”

사라는 매버릭의 어깨를 털었다. 그런 다음 매버릭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전화할게, 이번에는 꼭 받아.”
“알았어.”

매버릭도 자연스럽게 사라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배웅했다. 매버릭과 혼도는 사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의 향수 냄새도 바람이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거짓말하는 게 좀 능숙해졌군.”
“놀리지 마.”

혼도의 냉소적인 비아냥거림에 매버릭은 멋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참, 혼도.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됐어.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어.”

혼도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서로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저렇게 친밀감을 과시하는 사라와 매버릭의 기묘한 관계를 직접 보고 나니, 진실을 파헤치는 게 거북해졌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의 무덤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과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별들이 나란히 잠든 구역에 있었다. 초록빛 수의가 펼쳐진 별의 행렬을 앞에 두고 혼도는 멈춰 섰다.

“혼자 다녀와.”
“넌?”
“난 카잔스키 사령관이랑 개인적인 친분 없어. 그렇다고 카잔스키 사령관을 존경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유난히 매몰차게 구네.”

매버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와, 그건 내가 맡아줄게.”

혼도는 무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응, 고마워.”

매버릭은 사라에게서 받은 상자를 혼도에게 맡기고 수의로 뛰어들었다. 수의는 잔물결처럼 일렁이며 매버릭을 아이스가 잠든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생략한 아이스의 묘비에는 앞서 다녀간 그의 가족과 친지들이 남긴 꽃과 선물이 놓여 있었다. 매버릭은 백일홍 꽃다발을 왼쪽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안녕, 나의 윙맨.”

매버릭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는 죽어도 똑같네.”

그는 비석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단단하고.”

속삭이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넌 한결같은 사람이었지.”

매버릭은 묘비를 끌어안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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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