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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1:22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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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정말 모든 일을 어머니가 다 처리해서 대협은 선생님께 서류나 몇 번 내거나 전달받는 것 말고는 딱히 한 것도 없었다. 대협이 그 과정에서 한 제대로 된 수고라고는 남자를 한번 상대한 것밖에 없었는데, 그건 좀 짜증나긴 했다. 남자는 자신의 능남고 진학에 반대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떻게든 대협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걸 대협은 느낄 수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대협이 자신의 회사 기숙사에 머무는 조건을 건 남자는 대협이 고맙습니다, 어머니. 라고 하자 자신에게 고맙다고 하라며, 자신에게도 아버지라고 하라며 성질을 냈다. 이제 대협에게 그딴 건 딱히 중요하지도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 라고 말하자 더 성질을 내더니 그런 ‘아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똑바로 쳐다보는 대협에게 인상을 쓰고선 자리를 박차며 나가버렸다. 당연히 자리에 남은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아 서로를 바라본 대협과 어머니는 어깨나 한번 으쓱하곤 말았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된 새 학기, ‘아버지’의 회사 기숙사는 대협에게는 나쁘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았다. 허나 대협은 그 정도에 충분히 만족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였던 농구부 활동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한 학기가 다 가고 여름방학이 넘어가서도 그랬다.
“…이제 오냐.”
밤낚시 갔다가 늦잠 자고 한가롭게 걸어오는 대협을 보며, 감독님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저리 참으시려나? 그 무렵의 대협은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곤 예의상 죄송하다고 말하며 어른들을 상대할 때 쓰는 아련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잔머리만 늘던 나날이었다. 학기 초에는 그 미소에 얼굴이 풀리던 감독님이 점점 그 미소에 이마 주름이 깊어지는 걸 대협은 실시간으로 보는 중이었다. 요즘은 천천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선 느릿느릿 스트레칭을 하는 대협을 내려다보며 주먹까지 꽉 쥐시곤 했다. 손등에 선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던 그 주먹과 못마땅해하는 시선을 살그머니 피하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태산이가 있었고 그 옆에선 영수가 사나운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방긋 웃어주며 이것도 저것도 피하다 보면 남은 자리는 덕규형 옆 밖에 없어 거기에 숨듯이 몸을 수그리곤 스트레칭을 마치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된 참이었다. 그러고 나면 생긴 것과 달리 여리기 짝이 없고 딱히 무던하지도 못한 덕규형이 훈련 끝날 때쯤 대협을 부르곤 했다. 난처한 얼굴로 감독님께서 속상해하시니 다음부터는 제때 다니라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곤 했다. 대협은 그 얼굴에다 대고 네, 하고 잘만 대답하고선 꼬박꼬박 늦게 다녔다. 언제나 끝까지 모질지 못한 덕규형을 보며 좀 미안한데. 제때 나와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하교길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기만 하면 머리 속에 있던 게 그냥 다 날아가버리고 낚시대나 찾고 있었다. 그리곤 밤바다에 녹아들 듯 파묻혀 한없이 시간을 죽여댔다. 다들 자신에게 조금씩 화가 나있다는 걸, 감독님은 저러다 곧 터지겠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그랬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땐 그게 대협 나름의 최선이기도 했다. 누울 자리를 찾아 낸 동면 동물이 된 기분이랄까. 능남에 입학한 순간부터 그랬다. 팔다리의 힘이 저절로 풀리고 몸이 자꾸만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늦잠을 안 잔 날조차 눈은 떠져도 몸은 일으켜지지가 않아 멍하니 누워만 있다가 학교에 도착할 시각마저 지나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체육관에 가긴 가고, 훈련에는 진심으로 임하는 게 말그대로 대협의 마지노선이었다. 그 이상은 그냥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대협은 농구를 정말 잘 해야 했다. 무려 ‘감독님이 직접’ ‘다른 도시’에서 ‘스카우트’해온 ‘신입생’인 주제에 그 꼴이었기 때문에 진짜진짜 잘 해야 했다. 엉망인 시간 관념이 드러나기 전부터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엄청난 기대에 의심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바란 적은 없지만 딱히 낯선 것도 아니라 그다지 긴장되거나 하는 건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신의 농구를 보여주는 것 역시 그랬다.
[…확실히 다르네.]
덕규형을 중심으로 한 팀과 자신을 중심으로 한 팀이 붙었던 교내 첫 연습경기가 끝난 후, 영수가 자신의 등에 대고 넋 나간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들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야 자신을 향한 불만을 어느 정도 선에서 막고 농구부에 계속 있을 수 있다는 걸, 대협은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1학년 시절의 대협은 경기가 있을 때마다 득점에 집중했다.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절정이 북산고와의 경기였다. 거기서 대협은 혼자서 47득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북산이라는 팀에게는 과분한, 그야말로 놀라운 센터였던 채치수가 없었더라면 그 이상의 득점까지도 바라볼 정도의 활약이었다. 그렇게, ‘윤대협은 우리와 다르다.’는 농구부 사람들의 평가는 바뀔 일이 없었다. 덕규 형은 놀라운 신체 조건을 가지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고, 다른 친구들은 사실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황태산! 이 녀석!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거냐!”
애초에 태산이를 신경 쓰게 된 이유는 농구 때문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처음 보기 전날 낚은 메기랑 닮은 얼굴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낚은 정말 큰 물고기라서 정말 기분이 좋았었는데 농구부 첫 모임에 그 메기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으니까 왠지 기분이 더 좋아졌었다.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뻐끔거리던 메기의 입을 떠오르게 하던 두툼한 입술도 말미잘 같은 머리도 뭔가 귀엽고 미국 생각도 나는 게 더 그랬다. 거기에 곧, 감독님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더해졌다.
“황태산! 방금 말했는데 잊은 거야? 뭐하는 짓이야! 내가 뭐라고 했어!”
그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대협마저 움찔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다들 그랬다. 그렇게 차라리 모두에게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차피 남자애들 그냥 우리 감독님 저런 분이시네 하고 말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감독님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랐다. 자신에게는 너무 무르고 태산이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다른 애들한테는 딱 그 중간쯤 했다. 누가 봐도 과하게 차이 나는 모습에 대협도 처음엔 좀 당황했었다.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편애였다. 자신에게도 편애였지만 태산이에게도 사실 편애였다. 감독님은 태산이를 자신만큼 편애하고 있었다. 태도의 온도차가 심하긴 했지만 결국 관심과 애정이었다. 태산이가 뭐 조금만 잘못해도 버럭대며 하나하나 다 지적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똑바로 하도록 다시 시켜대는 것들 전부 유별난 편애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 감독님은 커다란 가능성을 지닌 초보자였던 태산이에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더 훈련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결코 옳은 방식도, 실상 적절한 방식도 아니었다는 게 나중에야 밝혀졌지만 막상 당장은 효과가 있었다. 태산이의 엄청난 성장 속도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당시에 그 한 꺼풀 너머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이는 대협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은 정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 감독님이 태산이에게만 너무 심하다고만 생각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사자인 태산이마저도 그리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많이, 그 누구보다도 자주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대협을 포함한 그 누구도 어떻게 끼어들지 못하고 야단맞는 태산이를 지켜만 보던 나날은 잘만 쌓여갔다. 저래도 될까?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긴 했다. 감독님이 태산이에게 덕규 선배한테 하는 정도만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꽤 했다. 허나 혼자 그런 생각들을 해대봤자 태산이에게 가닿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혹은 그래도 대협은 태산이에게 잘 해주려고 늘 노력했다. 혼나고 처져있는 태산이를 위로해주려고, 응원해주려고 애썼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협은 언제나 그런 걸 아주 자연스럽게 잘 했다. 헌데 놀랍게도 남들에게는 다 먹히는 자신만의 많은 방법들이 태산이한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그 성깔 있는 영수도 대협이 눈웃음을 치면서 실없이 굴면 순간 방심하며 느슨해지곤 했는데 태산이는 안 그랬다. 안 그래도 시선을 강탈하는 입술을 더 쭉 내민 채 눈썹을 모으면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훌쩍 가버리기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게 몇 번 더 반복되자 대협은 알 수 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태산이의 눈동자 안에 비친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태산이에게 자신은 물렁하게 잘 지낼 수 있는 농구부 친구같은 게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이겨낼,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그 진지한 마음이 너무 진심이라서, 그래서 그 라이벌이 내주는 위로는 단 한 조각도 용납할 수 없던 거였다. 물론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사실 대협은 그런 애들을 많이 봤다. 절대적인 농구 실력과는 상관없이 혼자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에게 무참히 깨지고선 수그러드는 애들을 무수히도 보았다. 처음엔 태산이도 그런 줄 알았다. 덕규 선배에게도 자신에게도 도전 아닌 도전을 하고선 매번 철저하게 지는 걸 보고선 그리 여겼다. 허나 아니었다. 태산이는 달랐다. 그 수많은 패배와 상관없이 태산이는 언제나 처음과 같은 눈으로 대협을 바라보았다. 그 고고한 프라이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도전해왔다. 대협이 코트 밖에서 부려대는 잔재주에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고 무대포처럼 돌진해왔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코트 위 어딘가에서 버티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모여 결국 코트 위의 태산이에게 어떤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코트 위에 있으면 일단 태산이가 보였다. 눈에 들어왔다. 가끔씩은 덕규 선배도, 자신마저도 압도하는 그런 존재감을 태산이가 농구 실력이 부족한 채로도 드러내는 것을 대협은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진짜로 경기의 흐름이 영향을 받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 대협은 자신 역시 진심으로 태산이를 라이벌로, 또 기댈 수 있는 동료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랬던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농구를 하면서 태산이보다 잘 하는 애들이 한 트럭이었는데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실력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데도, 태산이는 자신과 같은 높이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함께 뛰면 즐거웠고 실력의 격차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 역시 짜릿했다. 이래서 감독님이 저리 몰아붙이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태산이를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안 하게 됐다. 태산이가 참고 있는 게, 상처받고 있는 게 점차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알면 알수록 섬세한 성격이라는 게 한번 알아채고 나니 자꾸만 보였다. 원체 말수가 적은 데다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표정 변화를 알아채기 어려운 편이라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 뿐이었다. 여전히 태산이를 쥐 잡듯이 잡는 감독님을 보며 저러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날들이 몹시 많아졌다. 어떻게 달래주고 싶어도 자신이 그러면 더 자존심 상해한다는 걸 알고 나니까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태산이 입장에서는 1년이나 참은 것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감독님에게 그 1년은 태산이의 성격을 알아차리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감독님이 신입생 후배들 앞에서 태산이를 혼냈던 첫 날은 대협에게도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굳어가던 태산이의 얼굴을 잊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결국 그 날까지 왔다. 2학년 들어 첫 연습 시합이었다. 태산이는 자주 하던 수비 실수를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실수는 다른 애들도 했다. 그러나 감독님은 태산이만 혼냈다. 그야말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배, 후배, 동기, 상대팀, 응원 온 애들에 선생님들까지 다 있는 앞에서. 삿대질을 하고 평소보다 더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가며 그랬다. 태산이가 폭발할 만했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진짜 태산이가 그런 식으로 일을 칠 줄은 몰랐다. 아쵸,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같이 날아간 손가락이 감독님 눈을 찌를 거라고는 당연히 상상도 못 했다. 남들이 놀라든 말든 몇 번이고 더 감독님을 공격할 걸 예상할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순간 너무 놀라 태산이를 붙잡는 덕규 형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와중에 감독님이 뒤로 넘어가 대협도 뛰쳐나가 감독님을 받쳐주고 경태는 소리 지르고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눈가를 부여잡은 감독님에게 괜찮으시냐고 물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여기만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2층 관중석에 교장과 이사장까지 있는 걸 보는데, 아, 이거 진짜 큰일 났구나 싶었다.

 농구부 분위기가 한 동안 안 좋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해 첫 연습 시합을 그렇게 망치고 감독님은 한동안 안대 쓰고 나오시고 태산이는 결국 농구부에게 쫓겨나고. 결국 그 사단이 났다. 대협마저 한숨밖에 내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놀라운 건 그게 그나마 잘 수습된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원래라면 선수 관리 소홀로 감독님 자리도 흔들릴 뻔했다는 걸, 대협은 나중에, 아주 나쁜 타이밍에 알게 된다.
“…윤대협.”
아마 태산이의 무기한 농구부 활동 정지가 결정 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 대협인지라 한 일주일은 답지 않게 제 시간에 나오다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아차 싶은 마음에 나름 서둘러서 한 20분 정도만 늦었다. 1시간 넘게 늦은 적도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대협 기준으로는 사실 늦은 것도 아니었다.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와있었고 자신이 꼴찌인 상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까지 들어서 태연한 얼굴로 은근슬쩍 덕규형 뒤쪽으로 가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감독님이 대협의 이름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야말로 터질 게 터진 야차 같은 얼굴로, 이를 갈며 말했다.
“너 지금 몇 시야?”
평소의 대협이라면 손목 시계를 보곤 진짜 시각을 답하며 벙긋벙긋 웃어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걸, 바보가 아닌 대협은 곧장 알아챘다. 그래서 잔말말고 고개를 수그리며 눈을 깔곤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한 감독님의 고함소리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 녀석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허구언날 늦게 오고! 선배들도 다 일찍 나오는데!”
1년을 넘게 참은 건 태산이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전부 이제서야, 이럴 줄 알았다, 하는 눈으로 혼나는 대협을 쳐다보았다. 똑같이 혼나도 함께 안타깝고 억울하기도 해서 저도 같이 안쓰러웠던 태산이와 달리 대협을 보는 눈빛들은 다들 조금씩 시큰둥했다. 코트 위의 대협이 한없이 믿음직스럽고 대단하다 못해 섬세하기까지 한 것과는 별개로 대책 없이 느슨한 코트 밖 대협의 모습에 황당했던 적이 다들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인과응보 같은 느낌마저 있어 모두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 감독님이 소리지르는 걸 듣고 있었다. 진짜 웃긴 건 당사자인 대협마저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향한 감독님의 고함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대협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차라리 후련했다. 이제서야 뭔가 좀 똑바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이랬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임마! 너 지금 내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거야!! 이 멍청한 놈아!!"
그래서 혼나다 말고 피식 웃어버리는 바람에 진짜 뚜껑 열린 감독님한테 마지막까지 엄청나게 야단맞다가 혼자 기합까지 받은 그 날이, 어떤 기점이 되었다. 무슨 봉인이라도 해제된 것 마냥 감독님이 대협을 볼 때마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영수를 비롯한 다른 농구부 애들도 대협에게 격없이 틱틱대기 시작한 그런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대협은 그게 싫지 않았다. 사실 좀 많이 괜찮았다. 그리고 언뜻언뜻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옛날 바닷가의 시골 학교 시절이 꿈에 종종 나타났다. 가끔씩은 그때로 돌아간 듯한, 그 시절의 풍경이 지금 눈 앞의 체육관 광경이 겹쳐지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겉잡을 없이, 허물어지듯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후로는 진짜 속 편하게 대놓고 늦게 다녔다. 그런 대협에게 감독님은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영수도 소리 지르고, 신입생인 경태까지 대협의 면전에다 대고 대협이 형은 농구할 땐 정말 멋지지만 시간 관념은 전혀 없으시네요, 하며 사실 적시를 해대던 일상이 이어졌다. 그게 다 좋았다. 뭐가 어떻게 좋은지 정확히 설명은 할 수 없었지만 정말 좋았다. 진짜, 딱 하나만 아쉬웠다.
“…태산이가 있었더라면…”
강백호를 처음으로 만났던 북산과의 첫 연습경기가 끝난 날이었다. 간신히 이기고 난 후 감독님이 저도 모르게 그리 말을 꺼냈다가 뒷말을 삼키는 걸 대협은 약간 떨어진 뒤에서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자신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 듣지 못 했다. 어쩌면 자신은 같은 생각을 했기에 들린 걸지도 모른다. 
“태산이…”
대협은 작게 중얼거렸고 그 특유의 뚱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곤 쓸쓸해 보이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감독님은 후회하고 있었다. 모두가 알았다.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태산이에 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뒤로는 계속 묻고 다니시는 걸 다 알았다. 교장이나 교감과 태산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는 애들도 여럿이었다.
[그런 애 아닙니다. 그날 좀 욱했던 거에요. 제가 야단을 심하게 쳐서…]
그리고 그 여럿에는 대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대협마저 우연히 엿들을 정도로 감독님은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농구부의 성과와 전략만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애쓰는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도 알았다. 자신의 오판과 실수를 자책하고 어린 제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어른의 모습을, 대협은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뭔지 자신 역시 무의식적으로 태산이를 찾고 있었다. 그래도 정학은 피했다고 들었으니 학교는 나오겠지 하면서. 하지만 반도 다르고 층도 다른 데다가 교실 밖으로 딱히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 대협과 태산이 마주치기는 쉽지 않았다. 답지 않게 여기저기 좀 기웃거려 봐도 태산이 말고 다른 애들이나 자꾸 마주쳤다. 그렇게 모르는 애들이 아는 척하는 것에 적당히 웃어주다가 쉬는 시간이 다 끝나는 일만 자꾸 반복되었다. 자신을, 농구부 애들을 태산이가 피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태산이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헛된 노력만 하고 있던 대협의 귀에 어느 날 들려온 소식은 애초에 좁고 엉성한 대협의 정보망의 한참 바깥에 있었다.
“진짜야? 그 절에 태산이가 있다고?”
“네, 저희 고모 친구가 보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또 가서 확인했죠!”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어오는 건지, 또 그런 정보가 굴러들어오는 건지, 대협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경태가 말하는 걸 뒤에서 들었다. 아마도 교내에서 태산이를 찾아보려고 했던 게 대협 하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다들 덕규 형에게 말하는 경태의 주변에 웅성대며 모이고 있었다. 그렇게 알고 보니 태산이는 그 동안 학교에 거의 안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볼 수가 없던 거였다. 그리고는 학교와는 꽤나 거리가 있는 동네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그 동네의 절에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태산이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그 맨날 농구하는 특이하게 생긴 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게 흘러흘러 경태에게까지 들어간 것이다. 한참 경태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대협의 눈에 몹시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 덕규 형의 얼굴이 들어온 건 찰나였다. 그러나 그후부터 대협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독님이 도착하고 모두 흩어져 훈련하려 가면서도 그 얼굴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북산과의 연습 경기 후 한층 가혹해진 훈련이 끝난 후 모두 녹초가 되어 돌아가는 길에도 그랬다. 그래서 대협은 마찬가지로 지친 채로도 뭔가를 감독님과 열심히 이야기하는 덕규형을 몇 번이고 힐끔 대다가 체육관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난 대협은 학교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담임에게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오늘 학교에 못 가겠다고 뻥을 치고 경태의 이야기를 복기했다. 그 절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산을 한참 타야 했다. 게다가 농구 코트는 그 절에서도 한 20분은 더 걸어야 되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도 농구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렸고 헉헉대는 숨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마침내 도착한 곳에, 태산이는 홀로 있었다. 아마 태산이의 새로운 친구들은 학교에 갔겠지 생각하며 대협은 한동안 농구 코트를 혼자서 누비는 태산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성우에게 지고 난 후에 한참 혼자 농구하던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 대협은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태산이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이 그 당시에 해대던 건 솔직히 농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농구공을 가지고 하는 혼자만의 이상한 공놀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태산이는 아니었다. 태산이가 하고 있는 건 완벽히 ‘농구’였다. 혼자 뿐이라도 상대방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정해진 규칙을 지키면서 달려들어 승부하는 농구 경기 그 자체였다.
“…”
대협은 말없이 자꾸만 눈만 깜빡였다. 태산이의 그 치열한 농구가 가슴 아래 무언가를 일렁이게 하는 것을 느끼며 그랬다. 그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공기가 코트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대협은 태산이만의 그 승부가 끝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래야 했다. 그렇게 그 타이밍이 두세번은 지나고 태산이가 농구공을 내려놓고 나서야, 대협은 조심스레 코트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윤대협?”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던 태산이는 금방 대협을 발견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태산이를 보며, 대협은 평소와 달리 조금 멋쩍게 웃으며 어색하게 손을 들고 인사했다.
“안녕, 태산아.”
그리고 가방 안에서 챙겨왔던 물통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인상을 풀지 않았던 태산이는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런 대협을 보기만 했다. 그러다 대협의 팔이 아파질 때 쯤에 손을 뻗어 물병을 가져갔다.
“…”
“…”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왜 왔냐, 학교는 어쩌고 같은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 물으면 할 말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안 물어서 다행이었다. 말없이 물만 마시는 태산의 옆에 대협은 같이 주저앉아 농구공을 들어올리며 골대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파랬고 옆에서 태산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태산이가 여전히 흐르던 이마의 땀을 한번 훔쳐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 대협은 묘하게 민망한 기분에 괜히 살짝 웃고는 농구공을 바닥에 튕겼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산이의 고요하지만 묵직한 시선에 퉁퉁 굴러가는 농구공에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언제나와 같은 눈, 같은 시선. '윤대협은 다르다' 라고 여기고 전적으로 믿기에 결코 선을 넘지 못 하는 다른 애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두려움없는 눈동자. 당연히 자신이 대협의 옆에 우뚝 서다 못해 앞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 시선. 그 동안 그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꼴에 이런 상황인데도, 태산이는 그랬다. 여전히 그렇게 뜨겁고 강렬했다. 그리고 그것이 대협의 머리 속에 있던 빨간색 점 하나를 튀어 오르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지난 주에 북산이랑 연습 경기를 했는데,”
-그랬는데, 되게 특이한 애가 있었어. 머리가 빨간 색인데, 염색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머리를 또 엄청나게 했더라고. 자기 입으로 비밀 무기라고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이름이 강백호래. 이름이랑 얼굴이 되게 닮았다고 해야 되나… 진짜 그 이름같이 생겼어. 너도 보면 알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대협은 자신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선전포고를 하던 강백호를 떠올리고 풋, 하고 웃었다. 그야말로 신선한 순간이었다. 첫 만남에 허세 부리며 폼잡는 애들이야 미국에서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강백호는 그런 애들과 또 달랐다. 그 근거 없는, 알고 보니 진짜 아무 근거가 없어서 경악스러울 정도였던 자신감이 왜 처음부터 밉지 않고 귀여워 보였던 건지.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멈추지 않아 키득거리는 시작하는 자신을 보고 태산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도 못하고 대협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완전 초보자더라고. 규칙이고 드리블이고 다 배워가는 중인데 연습 경기에 왔나봐. 시합하는데 계속 이상한 말 하면서 소리 지르고 하는데 너무 웃겨서, 농구는 어떨지 궁금해지는 거야. 그래서 나왔으면 했더니 후반에 채치수가 좀 다쳐서 나가니까 나오더라고. 그런데 나와서, 나와서 있잖아,
그 부분에서 대협은 혼자 어깨까지 흔들릴 정도로 웃느라 말을 잠시 멈춰야 했다. 거기서 태산이가 미간을 찌푸렸던 건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와서 진짜… 처음에는 완전 엉망진창인 거야. 워킹에다가 덕규 선배를 덮치고, 긴장해가지고. 그런데 긴장 좀 풀리고 나니까 나쁘지 않더라. 스피드도 있고 끈기도 있고… 본 적 없는 걸 계속 해대는데,
눈이 자꾸 가더라고. 하는 말은 왠지 입술 언저리에만 머물렀다. 나오려다 말고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그래서 다들 몇번은 당황해서 또 당하기도 하고… 그렇게 경기했는데 북산에 그 애 말고도 잘 하는 1학년 애가 하나 더 들어왔더라고. 그래서 이제 정말 채치수 하나만 생각하면 안 되겠더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대협은 호흡을 한번 골랐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태산이는 머리를 한번 만졌다가 멀리 간 농구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협은 손을 뻗어 잡은 농구공을 태산이에게 내어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태산아. 감독님이 처음에 우리한테 30점 차이로 이기라고 했거든. 사실 난 아무리 그래도 채치수가 있는데 그 정도까지 이기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어.”
“…”
“그런데 우리… 정말 겨우 이겼다? 진짜 정말 간신히 이겼어.”
너 없어서, 하는 말을 해야 할까? …해도 될까? 대협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목구멍 너머를 넘지 못한 채 침묵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에 귓가에 맴돌았다.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태산이는 어땠는지 몰라도 대협은 그랬다. 그렇게 몇 시간은 더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잘하는 녀석은 누군데?”
그리고 태산이의 입이 먼저 열렸다. 뚱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태산이는 농구공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애는… 서태웅이라는 애인데, 중학생 티가 좀 나긴 해도 정말 잘 하더라.”
그 말을 하며 대협은 서태웅 특유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 하얗고 까만 얼굴과는 여러모로 반대편에 있는, 온갖 표정이 총천연색의 퍼레이드 쇼처럼 펼쳐지던 강백호의 얼굴이 덩달아 떠올랐다.
“…근데, 나는 강백호 쪽이 더 재미있더라고.”
왜 그랬을까. 신기해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코트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런 애를 도대체 어디서 보겠는가. 강백호는 그랬다. 완전히 달랐다. 애초에 요란하게 생긴 데다가 말도 안 되게 시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일단 존재 자체가 새로웠다. 그래도 농구할 때는 농구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대협이 시합을 하다가도 자꾸만 강백호를 쳐다봤던 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대협에게 코트 밖에 있는 녀석을 보며 빨리 나오라고 손가락질까지 하게 만들어 놓고는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코트 위에서는 더 재미있었다. 심지어 강백호가 합세하자 서태웅까지 더 재미있어졌다. 대협은 어느새 또다시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말하고 있었다. 강백호 이야기를 하면 그랬다. 그리고 아직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 하고 있었다. 농구공을 만지작대며 그런 대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던 태산이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때 쯤이었다.
“그러면…”
“응.”
“넌 그 강백호라는 녀석을 더 인정한다는 뜻이냐?
“응?”
약간 비껴난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 주춤한 것도 있었다. 지금 태산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생각부터 했다. 그리곤 대단히 진지한 태산이의 얼굴을 마주하고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인정?”
아주 오랜만에 말까지 더듬거린 대협에게 태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그 순간, 대협은 지금까지 자신이 강백호에 대해 해댄 말들이 태산이가 말하는 진정한 ‘인정’이라기 보다는 정체불명의 호감에서 비롯된 턱없는 주접에 좀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농구에 한없이 진실하고 간절한 태산이에게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도. 조금 힘이 빠지는 웃음이 났다. 이런 태산이한테 내가 지금까지 무슨 헛소리를 했나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협은 망설였다. 아니, 태산아. 니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인정한 건 강백호가 아니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정을 안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인정한 거라면 차라리 서태웅이... 하고 주절주절 말을 해야 하나? 그게 맞나? 고민을 하다가 그냥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하는 걸로 끝났다. 거기에 태산이는 흐음,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협을 향해 농구공을 던지며 말했다.
“1:1.”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거절할 필요도 없어 대협은 입고 왔던 점퍼를 벗어 가방 위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가벼운 드리블과 함께 수비 자세로 들어서는 태산이의 오른쪽으로 파고 들어가며 둘만의 1:1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대협은 모르는 태산이의 새 친구들이 올 때까지, 그 새 친구들이 둘을 구경하다 지쳐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소리를 질러댈 때까지 1:1은 계속되었다. 태산이는 전부 졌다. 그러나 매 라운드를 할 때마다 새롭게 도전하고 다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땀범벅이 된 채, 그날 저녁은 태산이와 태산이의 새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숫기가 없지만 착한 애들이었다. 같이 있어보니 그 애들이 왜 태산이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애들과 있으니 한결 편해보이던 태산이를 보며 알 수 없는 섭섭함을 느끼고는 그런 스스로에게 좀 놀랐다. 자신이 생각보다 태산이를 훨씬 가깝게 여기며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정작 태산이는 안 그런데 혼자서만 그랬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걸 막지 못 했다. 약간은 씁쓸해진 채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길에도 자신만 따로 가고 태산이와 그 애들은 한참을 같이 걸어가는 걸 뒤에서 잠시 봤다. 농구부에 있을 때와 달리 말을 꽤 하는 태산이의 웃는 얼굴을, 아주 멀리서 보았다.

다음날, 대협은 당연하다는 듯 또 늦게 체육관에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감독님한테 걸려서 얼빠진 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소리도 들었다. 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는데 왠지 감독님이 평소보다 언성을 높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오버하는 것 같았다. 왜 이러시나,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 채 옆을 슬쩍 보고선 바로 납득했다. 대협이 이 정도 혼나는 건 이제 일상이라서 다들 신경도 안 쓰는데 빤히 바라보는 한 명이 있었다. 깨끗해진 새 체육복을 걸치고 와서 드리블 훈련을 하던 태산이가 자신과 감독님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대협도 오버하는 감독님에게 장단을 맞춰서 일부러 더 쭈글쭈글하게 어깨를 수그리며 한참 더 야단 맞았다. 이런 걸로 태산이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상처가 조금 덜해졌으면 하고 바라면서.
 나중에 영수가 말해주기를 대협이 오기 전에 감독님이 다들 모아놓고 태산이가 오늘부터 다시 농구를 시작하게 됐으니 모두 태산이에게 신경 써주자고 미리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태산이가 오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태산이에게 사과를 했다고 했다.
[태산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내 실수였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교육자로서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내 잘못이라고, 이제 같이 열심히 농구해보자고.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늦게 와서 그 과정을 다 놓치고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대협은 놀랐다. 다른 친구들이 놀란 것보다 훨씬 많이 놀랐다. 그런 어른이 얼마나 드문지 대협은 삶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이상을 알았더라면 더 놀랐을 것이다. 감독님이 태산이를 농구부에 복귀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굴함을 감수해야 했는지, 그 구차하고 지난했던 과정 하나하나가 어땠는지 알았다면 입을 다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 태산이가 헤어졌던 바로 그날 밤, 감독님이 태산이의 집까지 찾아가선 태산이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태산이를 만나 직접 사과하고, 그 사과에 그간의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 울음이 터진 태산이를 달래고... 그렇게 다시 농구부로 데리고 온 것까지 알았다면, 그랬다면.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어른의, 감독님의 일이 맞았다. 어린 아이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니 대협이 알아야 할 것도 아니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대협은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결국에는 알게 된다. 조금 더 후에, 더할 수 없이 나쁜 타이밍에.






대협태산은 아니야.
둘의 관계성과 우정이 좋을 뿐.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슬램덩크 슬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