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2818978
view 2528
2023.05.14 15:57

 

협백.jpg


1  https://hygall.com/524606320
2  https://hygall.com/525364785
3  https://hygall.com/526882483
4  https://hygall.com/528471126 
5  https://hygall.com/531243607
6,7 https://hygall.com/538114709 
8  https://hygall.com/541008812




“…뭐야, 이상한 놈.”
 정작 가버린 윤대협 뒷덜미에다 대고는 아무 말도 못한 백호는 세수를 하고 나서 자리에 드러누워 어두운 천장을 보며 말했다. 하여튼 웃긴 놈이라니까 윤대협, 하고 혼자 투덜댔다. 애초에 우리 집은 왜 온 거래? 하는 생각도 그제서야 했다. 당연히 답은 찾지 못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윤대협의 얼굴만은 선명한 상으로 남아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 얼굴은 또 뭔데…”
 원래도 하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선 무슨 귀신도 아니고. 그리곤 후다닥, 집에 그리 빨리 가고 싶었나? 내가 뭘 그리 이상하게 말했다고. 막차 놓치기가 그렇게 싫었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에이, 됐다, 하며 백호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이나 자려고 했다. 이러다 깜빡하면 12시, 조금만 더 하면 새벽 2, 3시는 그냥 넘어갔다. 잠이 오든 안 오든 일단 누워야 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백호는 지쳤다. 종일 운 눈가가 따가웠다. 허나 짜증나게도 이렇게 지친 걸로는 아무리 빨리 누워도 잠들 수 없었다. 재활원에서 집에 돌아온 이후로 이런 식으로 누워서 빨리 잠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누워 봤자 온갖 잡생각에 둘러싸이기만 할 뿐이라는 걸 이제 너무 잘 알았다. 그러나 알아도 오늘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가 축축 늘어졌다. 몸통도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좀 웃겼다. 고릴라가 저녁까지 먹었으면 어쩔 건가. 그래도 밤에는 돌아가야 했을 텐데. 윤대협이 진짜 안 갔으면 어쩌려고. 호열이들이 자고 갈 때 쓰던 이불과 요는 있지만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보일러 때문에 바닥은 차가웠다. 오늘같이 추운 밤이면 지금 자신이 깔고 있는 전기 장판 위에 같이 자야 할 판이었다. 고릴라나 호열이들이면 몰라도, 윤대협이랑? 그건 좀 그랬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윤대협도 그럴 게 뻔했다.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냥, 이래야 했던 거다. 한숨을 작게 내쉰 백호는 이상하게 추워지는 것 같아 이불을 조금 더 올려 코 끝까지 덮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번 겨울이 이랬다. 작년 겨울에는 안 그랬는데 올해는 밤이 되면 자주 춥고 마음이 허전했다. 외로움과 불안이 만들어낸 밤들이 한기처럼 스며들었다. 옆에 누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나 홀로 있는 밤들이 정말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농구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밤이면 정말 많이 그랬다. 억지로 눈을 꼭 감은 채,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음 속에서 빨리 잠들기만을 바라며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했다.

똑똑

그래서 백호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인 줄 몰랐다. 백호의 아파트에서 그 정도 소음은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집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들리는 소리에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 하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뭐지? 하는 단순한 의문에 현관 쪽을 돌아보기만 했다. 그리고 똑똑하는 소리가 한번 더 들렸을 때 도둑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도둑이 노크를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은 못 하고 일어나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열까말까 고민하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진짜 엄청 놀랐다. 땡그랗게 떠지는 눈에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 했다. 뛰어온 건지 조금은 헐떡이는 윤대협의 목소리가 조그만 현관에 울렸다.
“미안, 강백호.”
“…?”
“나 막차를 놓쳤어, 좀 재워줄래?”
이어진 말엔 어딘지 모르게 쑥쓰러움이 묻어났고 아까보다 훨씬 더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이마를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드러난 윤대협의 얼굴은 기이할 만큼 맑고 산뜻해서, 불가사의한 생기가 빛처럼 뿜어 나와 아까 그 핏기 없던 얼굴은 뭐였나 싶을 정도였다. 이 모든 상황과 그런 윤대협의 얼굴의 부조화에 당황한 백호는 잠시 굳어서 입만 뻥긋거리다가 강백호? 하고 눈을 맞춰오는 윤대협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에 밖에 세워 둘 수는 없었다. 이 근처에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백호가 가장 잘 알았다.
“일단… 들어와라.”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한 채 그리 말하며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켰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을 뚫어질 바라보고 있던 윤대협이 부풀어올랐던 가슴을 꺼뜨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서 어떤 안도감이 느껴져 백호는 작게 머리를 긁적였다. 윤대협도 놀랬나 보다 싶었다. 하긴 그렇게 서둘러 가놓고 막상 막차를 놓쳤으니 안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러니 이렇게 허둥지둥 뛰어왔을 거고.
"고마워. 백호야."
집 안에 들어온 윤대협은 현관문을 닫는 백호를 향해 소곤거리듯이 그리 말했다. 그리곤 평소처럼 웃는데 반질반질한 눈동자에서 뭔가 반짝하는 것이 보였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순간 내가 뭘 봤나 싶어진 백호가 응? 소리를 내든 말든 바깥의 냉기가 느껴지는 점퍼를 벗어서 걸어 둔 윤대협은 좀 씻어도 되겠냐고, 자기 전에 머리를 감아도 되겠냐고도 물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백호는 따뜻한 물은 좀 기다리면 나온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윤대협이 씻으러 들어가자 대남이가 입던 잠옷이랑 이불과 요를 꺼내다 보니 이제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윤대협이랑 같이 전기 장판 위에서 자야 되나? 아니면 윤대협을 장판 위에서 재우고 내가 바닥에 요 여러 개 깔고 자야 되나? 고민에 빠진 백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단 장판 옆에 요를 깔고 이불을 펴는 사이 벌컥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빨리도 났다. 뭐 이렇게 빨리 씻었나 생각하며 돌아본 곳에는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한 윤대협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엉?”
순간 그런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윤대협이 고개를 들고 늘 짓던 미소를 지으며 백호를 바라보자 한번 더 튀어나왔다. 그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윤대협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백호가 아는 윤대협이 아니었다. 머리를 내린 윤대협은 어떨까 생각은 했었지만 솔직히 상상은 가지 않았었다. 백호에게 윤대협은 그 특이한 빗자루 머리 스타일과 사실상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눈 앞에 진짜로 머리를 내린 윤대협이 나타나니 그냥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밖에 안 나왔다. 머리를 완전히 내린,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촉촉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전부 다 덮고 눈가까지 내려온 윤대협은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아마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정말 잘 생겼다고, 백호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멋있어서 진짜 넋을 잃고 펴다 만 이불을 손에 쥔 채로 쳐다봤다. 수건으로 머리를 턴 윤대협이 그런 자신을 향해 활짝 웃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정말 너무 고마워, 이렇게까지 신세 져서 미안.”
그리고는 진심으로 미안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하는데 그 끝내주는 얼굴에 심지어 목소리까지 근사하게 들려서 순간 백호는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안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윤대협, 너 머리 내리니까 진짜 잘 생겼다, 하고 아주 큰 소리로 외쳐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괜히 이불을 퍼덕퍼덕거린 백호는 괜찮다고, 잠옷 거기 있다고 아주 모기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민망해하는 얼굴을 들킬까봐 장판 옆에 깔아 놓은 이부자리로 얼른 들어가서는 윤대협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불도 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뒤쪽에서 사락 사락 윤대협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 소리에 이상하게 부끄러워진 백호는 그러고 있는 자기자신이 이해가 안 갔다. 저게 뭐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
“불 끌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물어서 어어, 그래 하니까 곧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이 어두워졌다. 윤대협이 이불 속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곧 침묵이 찾아왔다. 뭔가 좀 긴장이 됐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랬다. 그래서 괜히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고 있으니 살짝 서늘했다. 계속 따뜻하게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윤대협한테 뭘 어떻게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윤대협은 안 그랬다.
“백호야.”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백호는 처음엔 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자는 척을 했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가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호야, 강백호. 자?”
그래도 대답 안 했는데 윤대협은 끈질겼다. 몇 번이나 더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스르륵 이불이 내려가고 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다가오는 것까지 느껴지자 더이상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강백호, 백호야, 자? 자는 거야?”
“어, 어, 그, 왜?”
그래서 나름대로 잠에서 깬 연기를 하면서 돌아보는데 윤대협이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코 앞에 보이는 윤대협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크게 뜬 백호의 눈에 길다란 눈썹 사이 미묘하게 구겨진 미간이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중에 그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대협을 보니 또 왜 저래, 싶어서 슬금 몸을 일으키게 됐다.
“왜… 그러냐?”
“…백호야, 내가 여기서 잘게. 네가 저기 가서 자.”
반쯤 몸을 일으킨 백호를 향해 그리 말하는 윤대협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정면으로 백호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그랬다. 그 깜깜한 와중에도 또렷한 시선에 갑자기 입 다물고 고개만 끄덕여야 할 것 같아서 백호는 저도 모르게 어, 하고 대답할 뻔했다. 입이 진짜 그 모양으로 벌어지기까지 했다가 아차, 하고 답했다.
“아니, 아니다, 니가 거기서 자.”
“…”
“난 여기가 더 좋아.”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이렇게 왔는데 추운데 재울 수는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서늘한데 새벽 되면 더 추울 게 뻔했다. 그냥 내가 하룻밤 고생하는 게 낫지, 하는 생각에 백호는 다시 누우려고 했다. 윤대협이 아까 자신이 누워있던 곳에 손을 밀어 넣지 않았다면.
“백호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결 낮았다. 그리곤 바닥 쪽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길다란 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작게 한숨을 한번 내쉰 윤대협의 입가에 항상 보던 미소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있잖아… 백호야, 내가 미안해서 그래. 이렇게 신세지는 것도 미안한데 네가 원래 자던 데서 내가 자니까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여기 바닥… 좀 차가운데 네가 등이 아무리 다 나았다고 해도 한동안은 신경 써야 될 텐데 걱정도 되고 그래서…”
차근차근, 더없이 진지한 말투에 진지한 눈빛이었다.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촉촉한 눈에 걱정과 염려를 담고선 윤대협은 그리도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백호는 완전히 굳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몸과 함께 정지해버린 머리 속에서 갑자기 하얀 양말이 떠올랐다. 윤대협이 신겨줬던 그 새하얀 양말이, 복숭아뼈에 닿던 윤대협의 손가락이, 그 느낌과 감각이 떠올랐다. 참을 수 없고 어쩔 수 없어서 윤대협의 얼굴을 걷어차버렸던 그때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때처럼 발로 걷어찰 수 없었다. 주먹으로 칠 수도 없었다. 곧 머리 속이 순식간에 그 양말처럼 하얘졌고 뺨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게, 하는 소리를 바보처럼 몇 번 하기는 했다. 하지만 삐뚤하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어물어물 나온 소리는 똑바로 된 말이 되지 못 했다. 그런 백호에게 슬핏 웃은 대협이 응? 하고 손을 뻗어 팔을 끌어당기는데 저항 한 번을 못했다. 뺨에서 시작된 열이 얼굴 전체로 퍼지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백호를 전기 장판 위로 데리고 온 윤대협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백호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그리곤 이불까지 덮어주고선 눈을 접으며 소리없이 웃더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호와 눈을 한번 맞추었다. 그래서 백호는 아까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는 이불을 들어올리고 안으로 쏙 들어가는 윤대협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냥 너무너무 부끄럽고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고 말이 안 나왔다. 뜨거워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몰래 힐끔거리기만 하다가 돌아누운 윤대협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얼굴이 진짜 터지는 줄 알았다.

-잘 자.

그런 백호에게 윤대협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입모양만으로 그리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생선을 굽던 자신을 바라보던 때와 같은 그런 얼굴로 그랬다. 들리지 않는 윤대협만의 낮고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아 백호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더 백호에게 환하게 웃어준 후 돌아누워 천장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는 윤대협의 옆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는 눈에 익은 어둠 속에서 윤대협의 하얀 얼굴이 만들어내는 선이 옅게 빛났다. 그리고 백호는 뭔가에 홀린 듯이 말했다. 충동을 넘어선 어떤 본능이었다.
“윤대협, 여기 와서 나랑 같이 자.”




“백호야, 너 진짜 안 불편해?”
“아오, 괜찮다고! 윤대협 너나 옆으로 가지 말라고!”
그리고 입 좀 다물라고, 말하면 할수록 신경 쓰이고 민망하다고! 하는 말까지는 차마 못 하고 백호는 정자세로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팔이 닿아 있었다. 여차하면 다리도 닿을 기세였다. 남자 둘이 들어가긴 한다만 조금만 뒤척이면 팔다리가 바깥으로 삐져나가거나 옆 사람과 얽히거나 둘 중 하나인 전기장판 위에 윤대협과 나란히 눕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체모를 부끄러움에 열이 오른 몸은 따뜻하다 못해 뜨끈뜨끈할 정도였지만 마음 불편한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괜히 말했나,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자기가 불러 놓곤 막상 둘이 누우니까 불편하니 다시 가라는 소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견뎌야 했다. 오늘 밤은 이렇게 자야 했다.
“얼른 잠이나 자라, 윤대협.”
그래, 빨리 자버려, 자버려야 해결이 되지. 하여튼 밤이 문제였다. 이렇게 어둡고 추운 겨울 밤이, 잠드는 것도 힘겹고 바깥에서 자게 될 사람을 내치기도 힘든 이런 밤 때문에 다 이 모양이었다.
“응, 알았어. 백호야.”
이제서야 얌전히 대답하는 윤대협이 몸을 바깥으로 빼지 않는 걸 옆눈으로 확인한다. 네가 불편하지 않겠냐, 자기는 괜찮다 소리 해대는 걸 억지로 옆에 데리고 오니 슬그머니 장판 바깥으로 몸을 빼며 안 불편하냐고 자꾸 물어대는 걸 한참 상대하고 나서야 나온 순순한 대답이었다. 에휴, 하고 괜히 한숨을 내쉬곤 백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농구를 하지 못했으니 내일은 꼭 해야 했다. 그러니 이제 진짜 자야지, 하고 눈을 꼭꼭 감았다. 옆에 사람 하나 있는 게 뭐라고 그 존재가 참 크게도 느껴졌다. 이불이라도 따로 덮어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데 갑자기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차, 싶어진 백호는 바로 눈을 뜨곤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윤대협.”
“응? 왜?”
“너 집에는 말했냐?
“응?”
“우리 집에서 가고 가는 거, 말했냐?”
“…어어…?”
얼빠진 표정과 대답, 더 안 들어도 뻔한 반응에 자기가 더 놀란 백호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당황한 듯한 윤대협이 주춤거리며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야, 전화 안 하면 어떡해! 집에서 걱정하잖아!”
“아, 저, 백호야?”
“우리 집에 전화 없어. 너 동전 있냐? 공중 전화 어딨나면,”
“백호야, 강백호, 잠깐만.”
“왜? 뭐?”
“저기, 나 기숙사 살잖아.”
“…기숙사?”
“너 저번에 와봤잖아, 나 있는 기숙사.”
“거기가 기숙사라고?”
백호는 기억을 더듬어 봤다. 윤대협이 사는 곳에 갔었다. 침대도 있고 부엌도 컸던 기억이 났다. 텔레비전 놓는 자리도 작지 않았다. 예전에 아빠랑 같이 살 때도 그 정도 집에서 살았었다.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할머니랑 아빠랑 셋이서 살 때도 그 정도 집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았던 그 어떤 집도 텔레비전 놓는 자리는 윤대협 방보다 더 작았다.
“원래 기숙사가 그렇게 크냐?”
신기해서 그리 물었더니 아, 하는 소리를 낸 윤대협이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곤 뺨을 살짝 긁적이더니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네.”
그러면서 하하하, 하는 웃음을 덧붙이는데 왠지 힘이 빠지던 백호였다. 괜히 툭 내뱉듯이 말하게 된다.
“넌 니가 살고 있는 데도 몰라?”
그러게, 하고 작게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하여튼 윤대협 은근히 띨빵한 구석이 있었다.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는. 입술을 한번 삐죽이고는 한번 더 묻게 된다.
“그럼 기숙사인가 하는 거기에는 따로 전화 안 해도 되냐?”
그러니 윤대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고, 하고 답하자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 백호야.”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백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스르륵 뒤로 밀어눕히며 자신도 따라 옆에 눕는 대협을 백호는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그렇게 뒷머리까지 베개에 닿고 나니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근데 윤대협 너 왜 기숙사 사냐?”
“응?”
“집이 학교에서 멀어?”
순수한 호기심에 나온 물음에 대협은 눈가를 휘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순간 백호는 윤대협도 나처럼 식구가 없나,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게 쉽게 꺼낼 말이 아니여서라기 보다는 윤대협이 그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이란 게 있었다. 백호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알았다. 윤대협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뭔가 비슷하긴 해도 분명히 다른 무언가만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뭐든 아주 깊숙한 곳에 꽁꽁 싸여있어서 다가갈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많이 머냐?”
그래서 그렇게만 물었다. 그러자 윤대협이 으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백호 쪽을 바라보며 아까보다 더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반사적으로 백호는 되물었다.
“어딘데?”
“…어디일 것 같아?”
백호 쪽으로 완전히 돌아누운 대협은 어둠 속에 녹아들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이 있어 옆으로 기울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온전한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온화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아주 정확히 보였다. 진짜 잘생겼네, 하고 또 생각해버린 백호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고 일단 자신이 아는 제일 가까이 있는 큰 도시 이름을 하나 말했다. 그러니까 윤대협이 생글생글 웃으며 아닌데, 해서 다른 걸 말했더니 또 아닌데, 하길래 발끈해 또 다른 걸 말했더니 또 아니라고 말하곤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어댔다. 그렇게 몇 번을 더 하고 자신이 아는 도시 이름을 다 말하고 나서야 백호는 윤대협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뭐야! 이씨! 너 집 멀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아하하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백호가 씩씩대는 소리와 섞여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잔다고 누워 놓고선 시덥잖은 이야기나 한참하고 몇 번을 더 토닥대고 나서야 둘 다 고요히 눈을 감은 시간이 왔다. 그러나 백호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잠들지 못하던 밤들과는 좀 달랐다. 이제 완전히 잠든 윤대협이 내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은 아주 많이 달랐다. 신기할 정도로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매일 밤마다 골백번도 넘게 하는 생각도 한번도 안 들었다. 마치 잔잔히 흐르는 따뜻한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들지 않아도, 혹은 잠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 마냥 좋다가 눈시울이 조금씩 젖는 것을 느꼈다. 종일 느꼈던 눈가의 따가움이 다시 시작되는 것에 백호는 슬그머니 인상을 썼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무늬 하나 없는 천장만 빤히 보다가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흘러내리는 걸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온히 잠들어 있는 윤대협이 보였다.

-고맙다.

소리 없이 백호는 말했다. 전해지지 않더라도 그리 말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슬픔은 여전했지만 다시 돌아와 자신의 옆에 누운 윤대협이 주는 온기가 많은 것을 감싸주어 견딜 만하게 만들고 있었다. 베개가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귀가 축축했고 부은 눈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종일 울었는데 또 이렇게 눈물이 나는 구나, 생각한 백호는 이제 멈출 의지도 잃었다. 대신 오늘까지만, 딱 오늘까지만, 하고 생각하며 나오는 눈물을 내버려두었다. 진짜 오늘까지만 울고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하는 지키지도 못할 결심이나 했다. 이리 소리없이 눈물만 흐르다 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결국엔 흐느낌이 되었다. 죽이려 해도 자꾸만 커지는 울음 소리에 고개를 수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나고 나서야 흠뻑 젖어버린 자신의 손에 서늘하고 하얀 손이 닿았는지 백호는 알 수 없었다.
“…?”
“…”
윤대협은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가린 양손을 꼭 쥐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손등을 감싼 윤대협의 손바닥이 조금은 버석거린다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백호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아주 느리게 한숨을 내쉰 윤대협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불쑥 눈물이 넘치듯 흘러내렸다. 눈 앞의 반듯한 눈코입이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일렁이며 흔들렸다. 하지만 윤대협이 자신을 향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괜찮아, 하는 소리가 안 들리는데 들렸다. 거기에 백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흐윽, 하는 소리를 토해냈다. 곧 뒷머리에 손이 닿아왔고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등을 쓰다듬는 서늘한 손의 감각에 눈을 감으니 쓸어내리며 다가왔다. 부족함 없이 긴 양팔이 몸 전체를 끌어안아 어느새 백호는 윤대협의 품 속에서 끅끅거리며 울고 있었다. 사실은 아무리 울어도 더 울고 싶었다. 다른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오로지 울음만으로 가득 찬 울음 속에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울었다. 벗어날 수 없도록 붙들어 매고 안아주는 단단한 팔에 매달려, 그 품 속에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윤대협은 그런 자신을, 한계까지 울음을 쏟아내고 정신을 잃듯 까무룩 잠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꽉 끌어안아 주었다.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