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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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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백호 재활 완전 성공하니까 걱정말고 읽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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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백호 재활 완전 성공하니까 걱정말고 읽도록
치수에게 강백호의 재활은 중요했다. 정말, 너무 중요했다. 북산 농구부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강백호의 재활은 중요했지만 그 누구도 치수만큼은 아니었다. 치수는 알 수 있었다. 만약 강백호의 재활이 실패한다면 강백호도 강백호지만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농구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강백호가 떠오를 것이며 매 순간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어 끝까지 자신의 가슴 속을 들쑤실 것이다. 치수는 산왕전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걸어와 쓰러지던 강백호의 모습을, 기대던 그 몸의 무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과 무게가 어깨 위에 들러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녀석의 재활에 양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으면 그냥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달려들고 나니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사실 매 순간이 그랬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돈 문제에 관련해서는 안 선생님이 다 해결해줘서 다행이었다. 진짜 천만다행이었다. 허나 돈 말고도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강백호의 집안 사정이 괜찮을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당장 강백호는 얼굴도 모른다는 먼 친척이 어째 법적 보호자로 올라와 있기는 했다. 허나 강백호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강백호가 했던 수많은 철없는 행동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계속해서 닥쳐왔다. 나중엔 그런 환경에서 자랐는데 저 정도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고아였다면 편하겠다 싶을 만큼 복잡한 보호자 문제가 수많은 절차의 발목을 잡았다. 제대로 된 어른 보호자 하나가 옆에 있기만 하면 순식간에 해결될 문제들이 모조리 지체되며 자꾸만 일정이 꼬였다. 치수 하나 만으로는 부족해 안 선생님과 준호까지 발 벗고 뛰어야 했다. 그 상황에서 강백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기에 다들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상황이 자꾸 바뀌고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게 눈 앞에 계속 보이고 하니 결국 그 세상물정 모르는 강백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지경까지 갔다. 병원에서 재활원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가장 고비였다. 치수가 생각하기엔 어떻게든 병원처럼 입원한 형태로 있을 재활원이 필요했다. 이제 곧 가을이고 겨울은 금방 온다. 병원 짐 싸준다고 들렸던 강백호의 집을 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치수였다. 성심성의껏 돌봐 줄 보호자는 커녕 똑바로 된 난방도 의심스러운 그딴 곳으로 강백호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본인이 재활에 대한 의욕이 아무리 넘쳐도 아닌 건 아니었다. 그런 집에 혼자 살면서 멀리 있는 재활원까지 직접 다니며 치료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구든 애를 계속 봐주는 곳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세끼 밥과 따뜻한 잠자리가 제공되고 정해진 시간대로 재활 일정이 꼬박꼬박 돌아가는 곳. 그리고 안 그래도 힘든 애가 외롭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갈 수 있도록 딱히 멀지도 않은 곳. 어떻게든 몇 곳을 추렸다. 어디로 보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백호한테 한번 물어보고 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준호의 말에 카탈로그를 가지고 보여주러 갔다.
[뭐, 재활원은 집에서 다니면 되지. 호열이가 데려다 줄 수도 있고.]
그런데 강백호는 그딴 소리를 해댔다. 들어보니 양호열이랑 지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치수는 양호열을 나쁘게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리다고 생각했다. 나름 책임감도 있고 의리도 있지만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꼴이 딱 그랬다. 헌데 어린 녀석들이 하는 어린 생각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호열이한테 스쿠터 있으니까 같은 소리를 웅얼거리는 걸 듣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강백호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은 양호열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순진하고 철없는 것들은 친구를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우정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치수는 강백호에 대한 양호열의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 할 지라도 그게 답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치수의 생각이 맞았다. 양호열은 하던 데로 자주 와주고 같이 이야기 나눠주는 게 최선이었다. 치료와 재활에는 전문가가 필요했고 그건 애정과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쯤의 치수는 지쳐 있었다. 강백호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입시 준비도 하는데 강백호도 치수 본인도 없는 농구부의 센터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윈터컵 참가 이야기도 나오는 바람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강백호 역시 지쳐 있다는 사실을, 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쓸데없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 했다. 당연했다. 치수도 고작 열아홉이었다. 화가 났다. 참지 못 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엄하고 차가웠다. 거기에 움찔하는 강백호를 봤다. 사실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알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았다. 허나 어린애처럼 허물어지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고도 순간 모른 척했다. 그냥 그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터지는 한숨도 참지 못했다. 탁 소리가 나게 카탈로그를 올려놓고는 병실을 나오면서 말했다.
[내일 올 때까지 가고 싶은 곳 정해 놔.]
그때 한 번이라도 뒤돌아서 강백호 얼굴을 볼 걸, 하는 생각을 후에 아주 오랫동안 했다. 하지만 당시의 치수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치수가 입시 원서 때문에 일이 생겨서 준호가 대신 강백호에게 갔다. 다녀온 준호가 백호가 너무 얌전히 말해서 걱정이 됐다고 말을 꺼냈는데도 치수는 어디로 정해졌는지만 알아보고 안 선생님과 강백호의 재활원 입원에 대한 이야기나 했다. 이게 아닌데, 하고 올라오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따끔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일을 진행시키는데 집중했다. 어째든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일도 강백호를 위한 일이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학 원서와 시험 준비, 윈터컵 연습이 겹쳐 치수는 한동안 강백호의 병원에 들리지 못 했다. 바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준호나 안 선생님, 정대만, 송태섭, 농구부 다른 애들, 소연이는 물론 심지어 청소년 국가대표에 소집된 서태웅까지 다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꾸준히 강백호를 보러 갔다. 양호열 무리는 정말 맨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 역시 바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못 갈 건 아니었다. 자신도 알았다. 아마 강백호도 알았을 것이다.
[오빠, 요즘 많이 바쁘지?]
하루는 소연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바쁜 건 사실이라서 그렇긴 하다고 답하니 그렇구나, 하고 답한 소연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기… 나 오늘 송희랑 백호 보고 왔는데 백호가, 오빠는 이제 안 오냐고 물어서. …갈 때마다 꼭 물어. 그리고… 오늘은 오빠가 자기한테, 화 많이 났냐고 그래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수는 뭐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 놀람과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말을 하는 강백호의 모습이 곧바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잔뜩 풀 죽어 어깨가 처져 있는 꼴이랑 힘빠진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상이 써졌다. 그 노골적인 얼굴에 놀랐는지 소연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오빠 바빠서 그렇다고, 요즘 정신없다고 그렇게 말해줬어.]
소연은 치수가 얼마나 바쁜지 알았다. 강백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알아보고 다녔는지도 제일 잘 알았다. 소연도 언제나 도우며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그래서 치수가 얼마나 많이 지쳤는지도 너무 잘 알았다.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이는 치수의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운동 선수에게 부상이 어떤 것인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는 것은 끔찍했다. 하지만 소연은 이가 지나가는 순간일 것이라, 이를 통해 백호가 더 강해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백호는 자신이 찾아냈다. 여기서 무너질 리가 없었다. 우리 백호가 어떤 선수인데, 어떤 사람인데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소연은 백호에게 갈 때마다 그렇게 꼭 말했다. 허나 소연이 아무리 열심히 응원해도 백호가 조금씩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갈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티를 안 내는 편이었는데 치수의 이야기를 할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 큰 어깨가 조그맣게 느껴질 만큼 축 쳐져서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묻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백호에 대해 이렇게라도 치수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이 견디기 힘들 만큼 그랬다.
[하…]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오빠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손을 한번 꼭 쥐어준다.
[백호 괜찮을 거야. 다 나을 거야. 오빠도 알잖아.]
주문처럼 되뇌이는 소연의 말에 치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참 있다가 간신히 고개만 한번 끄덕인 게 다였다.
[나랑 같이 백호 보러 가자, 치수야.]
준호는 언제나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건지, 묻기는커녕 티도 안 냈는데도 치수가 하고 싶은 말을 늘 먼저 꺼내주곤 했다. 그래서 치수는 눈썹을 떨어뜨리며 고맙다고만 했다. 그런 치수의 어깨를 도닥인 준호가 뭘, 하고 답했다. 치수는 이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강백호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맞이할 지가 걱정됐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렇게 행동하지 말 걸, 겹겹이 쌓인 후회는 두려움이 되었다.
[이제 재활원으로 짐도 옮겨야 되니까. 가서 봐야지. 설명도 좀 더 해주고.]
한달 남짓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이제 재활원에 들어가는 강백호였다. 기간은 일단 석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사실 많이들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준호와 안 선생님이 이미 해줬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건 남들이 다 하고 그냥 퇴원 짐 챙겨주면서 얼굴 비추는 것만 하는 꼴이라 치수는 면목이 없었다.
[미안하다, 준호야.]
[? 뭐가?]
그냥 전부, 하는 말은 힘없이 나왔다. 그러자 준호가 등을 철썩 소리나게 쳤다. 뭐라는 거야, 하면서 크게 웃는다. 거기에 따라 웃고 강백호의 병실에 들어갔다. 강백호는 창 밖을 보고 있다가 문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백호야! 하고 손을 들고 인사하는 준호를 봤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잠시 굳은 시간이 있긴 했다. 하지만 바로 활짝 펴졌다가 곧장 개구지게 변하는 얼굴을 보고, 치수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안경 선배! 고릴라도 왔네? 대학 간다고 바쁘다더니? 하긴 고릴라 받아주는 인간 대학교 찾기가 쉽지 않지?]
그 말에 화가 나야 되는데 하나도 안 나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래, 이 녀석아. 하고 이제는 꽤나 자란 머리를 꾹꾹 눌러주니 약간 멈칫한 강백호가 헤헤, 하고 웃었다. 사실 그때 강백호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내서 그리 말했다는 건,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예전처럼 웃고 강백호의 헛짓거리에 성질도 냈다가 다시 웃고. 그렇게 그 후로도 그리 웃으면서 지낼 수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퇴원한다고 설레는 마음에 짐 싸면서 서로를 놀려대는 시간 같기만 했다면 정말 너무나 행복했을 것이다. 허나 강백호의 등에 달라붙은 상처는 그와 맞바꾼 산왕전의 승리만큼 크고 끈질겼다.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그건 말로는 설명 못 해.]
원터컵 예선을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정대만은 말했다. 힘겹게 지은 미소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래된 상처가 엿보이는 얼굴에 치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릎 보호대를 만지작거리며 이어 나가는 말에는 겪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
[백호한테는 지금이 제일 힘들 거야.]
[그러면,]
치수가 뭐라 말하려 하자 정대만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남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
[결국 자기가 이겨내고 자기가 해야 돼.]
[…하지만]
[백호는 잘 할 거다. 최소한 나처럼은 안 하겠지.]
그리 말하곤 정대만은 묵묵히 드리블 연습을 하는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치수의 시선도 정대만을 따라갔다. 재활은 두 달만에 끝났다.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었다기 보다는 강백호의 엄청난 의지 때문이었다. 재활원에 강백호를 집어넣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시키는 대로 빠짐없이 잘 치료받은 건강한 몸은 무려 5cm의 성장과 함께 돌아왔다. 키는 그리 컸는데 살은 이상할 정도로 빠져서 근육만 도드라진 몸에 머리카락도 길어져 인상도 좀 변했다. 아직 재활 치료는 일주일에 2번씩 해야 되지만 가벼운 운동은 가능하다는 말에 강백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마음대로 재활원을 나와 체육관에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모든 농구 기술을 잊은 자신의 모습을 모두 앞에서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건 정말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다들 얼어붙어 입을 떼지도 못 했다.
[이 천재님께 이 정도 핸디캡은 아무 것도 아닌 걸 몰라?]
그래서 강백호가 크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호식이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화장실을 간다며 나갔다. 몇몇이 훌쩍임을 참으며 따라 나갔다. 그러나 다행히, 한나가 있었다. 거침없이 걸어가 강백호의 엉덩이를 후려치자 짝, 소리가 났다. 뒤따르는 한나 특유의 쾌활한 웃음 소리에 강백호가 으악! 하고 지른 비명이 묻혔다.
[좋아. 강백호! 드리블부터 다시 나랑 특훈이다!]
그리고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흘렀다. 재활원 가는 날 빼고는 체육관에 살다시피 하는 강백호에게 안 감독님과 한나가 항상 달라붙어 있었다. 강백호는 약간 무서울 정도로 불평불만이 없었다. 엄청난 양의 기초 훈련과 단순하게 반복되는 부상 보강 운동을 입도 뻥긋 안 하고 소화했다. 그리고, 다른 부원들의 연습 경기를 열망이 흘러넘칠 듯 찰랑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덜컹 가라앉을 만큼 간절한 눈으로 농구를, 농구하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들어서 다들 정말 열심히 했다. 강백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건 강백호가 가진 또 다른 힘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갔다. 재활원에서도 병원에서도 완벽하게 나았다는 결론이 났다. 이제 격렬한 운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안 선생님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강백호도 울었다. 치수도 울었다. 양호열도 울었다. 서태웅은 안 울었다. 그 외엔 다 울었다. 그날이 윈터컵 지역 예선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저녁, 북산 내부 연습 경기가 끝나고 치수는 스크린 아웃과 리바운드를 강백호에게 다시 가르쳐줬다. 예전 생각이 나서 조금 울컥한 채로, 자신만큼 울컥한 게 빤히 보이는 강백호와 다시 한번 그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릴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강백호는 얼굴이 하얘져서 말했다. 아마 치수의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당황한 강백호는 어? 어어? 하는 소리를 반복하다가 점프를 몇 번 했다. 예전에 비해 속도도 높이도 형편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점프를 죽을 힘을 다해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치수는 지켜보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삐직삐직 농구화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수십번은 나고 나서야 치수는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기를 바랬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랬다.
[괜찮다. 돌아올 거야.]
강백호에게 그렇게 말해줘야 했다. 사실 강백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야 했다. 절대로 그래야 했다.
[그, 그렇지, 고릴라?]
[당연하지.]
아주 단호하게, 치수는 대답했다. 허나 그 시간이 얼만큼일지, 정말로 그 시간이 있다면 돌아오기는 하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강백호는 그러한 모습 역시, 모두 앞에서 내보여야 했다.
[백호군, 윈터컵은 힘들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강백호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이 다 안절부절 움찔할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치수는 순간 강백호의 얼굴에서 지나가는 어떤 고요와 깊은 고통을 보았다. 그러나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뜬 강백호는 알겠다고요, 영감님, 하고 답하고는 드리블을 하며 코트로 들어갔다. 그러곤 연습 뿐이었다. 더 이상 예전의 강백호가 아닌 몸으로, 오로지 연습과 재활원에서 배워온 보강 운동에만 정말 미친 놈처럼 파고들었다. 그리고 윈터컵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북산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산왕전 때문이었다.
[빨강 머리는?]
[그 10번은 왜 없어?]
[오랜만이다, 채치수. 강백호는 어때?]
[저런, 강백호는 아직 나올 상태가 아닌가 보지?]
그래서 다들 그리 물었다. 강백호를 찾았다. 벤치에 앉아 한 맺힌 눈으로 코트를 바라보는 강백호를 불러내고 싶어했다. 관중들은 물론 상대편 팀들도 그랬다. 허나 그 누구보다 북산이, 자신들이 가장 그랬다. 진정 간절했다. 강백호가 빠진 자리를 그 누구도 매울 수 없었다. 한 경기 한 경기 할 때마다 모두 다 강백호가 있었더라면, 하고 수천번도 넘게 생각했다. 강백호가 필요했다. 너무나 필요했다. 강백호가 뛰지 못하는 모든 경기가 벅찼고 힘겨웠다. 그런 상황을 알고 준비를 했는데도 그랬다. 첫 패배는 상양전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해 윈터컵의 상양은 말 그대로 사상 최강이었다. 김수겸 때문이었다. 졸업을 앞둔 김수겸은 그야말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코트 위를 질주하고 지휘하면서 말도 안 되는 패스를 이어 붙이고 무시무시하게 득점을 올려댔다. 절정의 기량, 그 자체였다. 그 엄청난 기세로 숙원이었던 해남전의 승리까지 기어이 따낸 상양은 윈터컵 전국대회 출전을 가장 먼저 결정지었다. 김수겸이 도내 MVP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윤대협이 움직였다. 치수는 돌아온 변덕규를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다. 변덕규는 그런 치수를 보고 너도 돌아와놓고 뭘 그러냐고 했다. 그리고 그 변덕규와 함께 윤대협은 깊이가 다른 농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달랐다. 이전과 달랐다. 날개 달린 호랑이 같은 김수겸이 두려웠다면 윤대협은 무서웠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의 뱀처럼 정교하고 교활한 경기 운영과 귀신 같은 득점 능력으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한 윤대협은 모두를 오싹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치수는 능남과의 다음 경기가 걱정이 됐다. 갓 주장을 단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대만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고 태웅 역시 눈빛이 형형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러면 안 됐다.
[영감님, 나 능남전 나갈래요.]
능남과의 경기를 보고 온 다음날, 강백호는 그리 말했다. 다들 심각하게 3일 후의 경기를 걱정하다가 강백호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다.
[이 천재 없이 그 윤대협 못 이긴다고.]
그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만약 부상 전의 강백호라면, 그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가능한 변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아니었다.
[안 돼.]
치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경기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는 강백호에 대한 짜증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상태로, 성치 않은 몸으로 코트에 다시 서게 될 강백호가 받을 시선에 대한 걱정과 그로 인해 무너진 강백호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튀어 나와버린 말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몇 발 더 나아가버린, 어쩌면 망상에 가까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커져버린 불안에 휘둘린 결과였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 ‘고릴라, 우리 이길 수 있지?’ 하고 묻던, 그 말을 굳이 자신에게 하던 산왕전의 강백호가 떠올랐다. 그 순간의 울렁거림과 벅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은 또다시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쓰러지던 강백호였다. 갑자기 눈 앞에 그 모습이 펼쳐졌다. 어깨 위로 떨어지던 그 무게에 자신의 몸도 기울어진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서있지도 못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이 곧 허옇게 변하더니 치수에게 말한다. …고릴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치수군, 잠깐-]
[니가 나온다고 되는 게 아냐. 지금 니 몸 상태를 모르는 거냐? 니 플레이 수준을 모르는 거냐고?]
[아니, 주장, 잠깐만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당황한 송태섭이 이제 자기가 주장이라는 것도 까먹고 그리 말하면서 말리려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 이후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강백호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근데 그 와중에 강백호의 말이 영 엉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생떼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 논리가 있었고 그럴 듯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안 된다고, 안 되는 거라고 계속 말해야 했다. 그런 치수에게 열받아 길길이 날뛰는 강백호를 말리기 위해 다른 부원들이 들러붙고 한나와 소연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나서도 둘 다 진정하지 못 했다.
[넌 그날 벤치에 있을 생각도 하지 마!]
그 와중에도 혹시 코트로 튀어 나올까봐, 가끔 치수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하는 안 선생님이 그걸 또 허락할까봐 치수는 그 말도 몇 번이나 했다.
[이 고릴라가 뭐라는 거야? 이제 주장도 아니면서! 뭐라고 그리 떠들어!]
지지 않고 받아 치던 강백호는 어느 순간부터 울먹이며 외치고 있었다. 서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거의 2m가 다 되어가는 덩치가 그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 데도 하나도 커보이지 않았다. 치수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어린애한테 끝도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그날이 망가졌다. 자신과 강백호의 관계도 망가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치수는 안 선생님께 따로 가서 강백호는 그날 벤치에라도 있으면 안 된다고 완강하게 말했고, 안 선생님도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는 안경 너머로 치수를 한참 동안 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치수군, 걱정이 되면 그냥 걱정이 된다고 말하세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겁니다.]
다음날부터 강백호는 치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둘은 마치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누가 어떻게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남과의 경기에도 오지 않았다. 관중석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북산은 졌다. 윤대협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대협 하나만 막는다고 될 경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윤대협 하나만 생각하면 그럭저럭 막아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한층 노련해진 송태섭과 한 차원 더 성장한 서태웅은 자신의 몫을 분명히 해냈다. 허나 그 대단하신 윤대협에 이끌려 모든 부원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기량을 펼친 능남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승리가 이렇게 먼 것이었나? 북산의 윈터컵은, 채치수의 마지막 고교 농구는 그렇게 끝났다. 치수는 허무해졌다. 돌아온 보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내내 달렸는데 그 끝에 아무 것도 없는 기분. 그리고, 강백호.
[이거, 집에 남는 거 있더라. 백호 집 보일러 좀 이상하다며. 이거라도 깔고 자면 좀 낫겠지.]
전기 장판을 둘둘 말아 이고지고 온 정대만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그걸 받아 든 송태섭이 근데 백호가 이거 사용하는 방법은 알겠냐고 말했다. 준호가 그러면 가르쳐 주면 돼지, 하고 답했다.
[난 비디오 챙겨왔어. 백호 병원이랑 재활원 있을 때 많이 보더라고. 엄청 좋아하더라.]
[그래서 저도 농구 잡지 집에 있는 것 챙겨왔어요. 준호 선배, 근데 백호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 없지 않아요?]
송태섭은 언제나 필요한 걸 집어내는 재주가 있다. 실컷 챙겨온 준호가 거기에 아 맞다, 하고 있는데 서태웅이 자전거에 큰 거 하나를 싣고 체육관 입구 쪽으로 왔다.
[버리는 거에요.]
그러기엔 상당히 멀쩡해보이는 텔레비전 일체형 비디오 플레이어였다. 다들 아무 말 않다가 어깨를 으쓱하는 서태웅을 향해 그냥 웃고는 함께 강백호 집으로 갔다. 겨울의 시작, 게다가 방학. 강백호가 체육관에 아무리 자주 와도 생활의 근거지는 집이었다. 강백호의 집 상태는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치수가 그것 때문에 말도 못 하게 전전긍긍한다는 것도 다들 알았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백호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 마디 하면 누가 그런 싸가지 없는 놈 걱정한다고 그러냐고 버럭대서 다들 말하는 건 이제 포기했다. 어쨌든 도착하니 강백호가 없었다. 빈 집을 보고 우리 온다는 말 안 했냐고 묻자 태섭은 분명히 말했다고 했고 준호도 그 옆에 있었다고 했다. 치수는 강백호가 날 피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치수의 표정을 살피던 준호가 그러면 놔두고 가면 되지. 어떻게 쓰면 될 지는 쪽지 써놓고 가면 되잖아. 하고 말하니까 송태섭과 정대만이 맞다고 하며 현관에 발을 들였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방이 보였다. 불을 켜니 나름 정리된 방이 드러났다.
[백호야, 우리 좀 들어간다-]
주인 없는 집에 송태섭이 그리 말하며 들어가자 다들 뒤따라 들어갔다. 가져온 것들을 있을 만한 자리에 놓고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치수는 다른 애들이 근처에 없는 주방에 서있었다. 옆에는 정말 작은 냉장고와 아직까지 기능을 한다는 게 신기한 낡아빠진 밥통이 있었다. 열어봐도 될까, 하고 생각한 순간 이미 열어보고 있었다. 밥통은 지저분했다. 그래도 밥이 있기는 있었다. 그 밑에 쌀통 같은 것도 있기는 했는데 남은 쌀이 얼마 없었다. 냉장고도 한번 열어보니 장아찌 반찬통 하나, 햄 통조림 하나. 계란 한판. 딱 그렇게 들어있었다. 그리고 냉동실에 봉지라면이 몇 개 있었다. 도대체 이걸 왜 여기에 넣어 놓은 거지? 잠시 고민하던 치수는 빨간 원숭이를 이해하길 포기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다 끝나고 나올 때까지 강백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준호가 놓여진 물건들에 대한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적어 놓은 긴 쪽지를 두고 나왔다. 치수는 말없이 일행을 따라가며 밥통과 냉장고를 생각했다. 생각 안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백호 반찬 좀 해주자, 오빠.]
그러다 결국 소연이에게까지 말해버리고 나니 일이 그리 진행되었다. 엄청나게 장을 봐와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 거냐고 투덜거리며 열과 성을 다해 요리하는 치수 옆에서 소연은 몰래 웃었다. 요근래 본 것 중에서 가장 기운이 넘쳐보이는 치수의 모습에 좀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치수는 소연과 함께 강백호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치수는 쌀도 한 가마니 샀다. 사실 일부러 소연이를 데리고 갔다. 자기 혼자만 가면 강백호가 쓸데없이 안 받는다고 난리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홀로 강백호를 마주하는 것도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준호랑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침 소연이가 같이 가자고 말해주기도 해서 그러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연이가 주면 받겠지 싶어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소, 소연아, 웬일로.]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 들어갔다. 소연의 뒤에 서 있는 자신의 눈길을 피하면서도 소연이가 내미는 반찬통들을 강백호는 거절하지 못 했다. 치수가 집 안에 쌀 가마니를 들여다 놓는 것도 뭐라하지 못 했다.
[백호야, 맛있게 먹고 다음에 맛 어땠는지 꼭 말해줘. 우리가 맛있었던 걸로 다시 해줄게.]
[…소연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마워, 라고 말하는 강백호를 내려다보며 치수도 할 말을 좀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졌다. 시선을 계속 피하던 강백호도 나중에는 치수를 힐끔대며 올려보다 입술을 좀 씰룩거리긴 했는데 무슨 말은 안 했다. 그렇게 결국 서로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소연이만 중간에서 열심히 말하다가 끝났다. 며칠 후, 강백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연이가 받아서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다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서로 괜찮다는 소리를 한참 하다가 표정이 어두워진 소연을 보고 치수는 다시 불안해졌다. 한숨을 내쉰 소연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치수 옆으로 왔다. 왜 그러냐고 묻자 백호가 정말 고맙다고, 전부 다 진짜 맛있다고 하더니 이제 안 해줘도 된다고, 자기 요리 천재라서 알아서 해먹는다고, 진짜 괜찮다고 계속 그 말만 했다고 했다. 그리고 고릴라한테도 고맙다고 꼭 전해달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말을 끝낸 소연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부담스럽게 한 건가…]
그 옆에서 치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으니 가슴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에 들었다. 자신이 했던 말들이 강백호의 가슴 속을 헤집고 있다는 생각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안 그래도 힘든 애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너무나 후회가 됐다. 지난 번에도 그랬는데 또 그랬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바보같은 놈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된다 싶어서 온갖 생각을 했지만 모조리 생각에 그쳤다. 그렇게 끙끙대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소연이에게 다시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약간 불안해 보이던 소연이가 뭐라 물으러 하는데 대답 않고 다시 반찬들을 만들었다. 치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 둘 수 없었다.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멍청한 놈이 미련한 짓 한다고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 애는 강백호였다, 어느 날 개뼈따귀처럼 굴러 들어와 자신의 농구를 구원한, 모나고 모자라서 안쓰러운 돌맹이였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
“안 해줘도 된다고, 필요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소연이한테 말했잖아!! 치수가 뭐라 말을 못하고 서있으니 강백호가 다시 울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쓰며 날뛰는 어린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치수는 몰랐다. 그래서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강백호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그랬다. 치수가 뭘 어떻게 한다고 애는 쓰는데 결국엔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꾸 왜 이렇게 되는 건지 치수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은 강백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열악하디 열악한 강백호의 아파트가 그런 소음에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흠칫 치수가 돌아봤다. 어깨까지 덜덜 떨면서 울부짓던 강백호도 돌아봤다. 빼꼼 열린 문으로 입에 담배를 문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삐죽 넣고선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좀 조용히 합시다, 일요일 아침부터 경찰 부르기 전에, 아 진짜, 자기들만 사는 줄 아나.”
그러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가는데 원래 고장 난 문은 똑바로 닫히지도 않고 덜렁거리다가 다시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히끅대며 숨을 몰아쉬는 강백호를 뒤로 한 치수는 일단 현관문을 다시 조심스레 닫았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지, 저렇게 남들이 마음만 먹으면 불쑥불쑥 들어오고. 아무리 강백호가 덩치 큰 남자애라고 해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뒤돌아본다. 강백호는 여전히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걸 계속 마주하고 있으니 자신도 눈물이 나려고 해서 치수는 이를 악물고 강백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 강백호가 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멈추니 강백호가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리고선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치수는 강백호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때까지, 히끅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면 안 됐다. 준비한 말을 해야 했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강백호.”
“…”
“내가 미안하다.”
그 말에 강백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치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와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그, 그, 내가, 내가…”
“…”
“내가, 내가, 걱정돼서 그랬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뭐라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후회되고 또 너무 많이 미안해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미안함을 입밖으로 내도 되는 건 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좀 더 좋게 말할 수 있었는데 늘 화만 내서 미안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했지만 결국 상처주고 부담 준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리고… 널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 다친 상태로도 계속 뛰는 걸 막지 못해 미안하다, 앞으로 니 몸이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어 미안하다… 농구를 그렇게 좋아하게 해놓고 농구를 잃어버릴 수도 있게 해버려서 정말, 정말 너무 미안하다…
“그게, 그게 강백호, 미안하다…”
어떤 것은 부끄러워서, 어떤 것은 두려워서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미안함들이 가득해 치수는 어쩔 수 없이 울었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막을 도리가 없어서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러 닦으면서 그 말만 계속했다. 놀란 얼굴로 치수를 보던 강백호는 그 맥락없는 미안하다 소리를 10번쯤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뭔 소리야, 고릴라.”
“미안, 미안하다, 강백호.”
“그만 해.”
“…미,”
“그만 하라고!”
그러면서 성큼성큼 다가와 치수의 멱살을 잡았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놓는다. 아까와 달리 당황한 얼굴에 갈 곳 잃은 손을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다 스르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더니 다시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깨문 입술 사이로 짓이기듯 나오는 말은 발음이 불분명했다.
“…이 고릴라가 진짜…”
그리곤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피할 생각이 없던 치수는 뺨을 스쳐가는 주먹을 그냥 맞았다. 견딜 만 했다. 진짜 힘을 준 게 아니었고 똑바로 맞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강백호라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은 그냥,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라도 속에 쌓인 걸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 고통을 앞섰다. 끄떡 않는 치수에게 몇 번 더 그러던 강백호가 씩씩 숨을 몰아쉰다. 이미 눈물 자국이 가득한 뺨에 새로운 눈물 길을 만들며 노려본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한다.
“결국 나 없어서 졌잖아.”
“…”
“나 없어서, 그 능남 경기, 마지막 경기였는데 지고 그렇게 끝났잖아.”
“…강백호,”
“그 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는데… 고릴라 나랑 같이 뛸 수 있는 마지막 경기였는데…”
울음이 섞인 말 끝이 길게 늘어지며 강백호의 얼굴이 무너진다. 넘쳐 흐르는 눈물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을 마주한 치수는 완전히 아연해져 그대로 굳었다. 이 바보가, 이 세상 멍청한 놈이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소리를 해댔었다는 사실에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대고 자신이 해댄 개소리가 떠오르자 눈앞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곧 자신 역시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신 강백호가 자신 쪽으로 쓰러지듯 기댄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또다시 산왕전의 감각이 떠오른다. 허나 이번에는 비틀거리면 안 됐다. 그 무게를, 이 고통을 받아주어야 했다. 감당해야 했다. 이 주제도 모르고 상황 파악도 못 하면서 치수를 생각했던 어린애를 위로해줘야 했다. 치수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진심으로 달래주고 싶었다. 탈수가 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우는 강백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쓸어내리며 토닥이는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강백호의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되려 점점 커졌다. 강백호는 그야말로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동안의 모든 설움을 토해내는 것처럼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내장을 끊어내듯 오열했다. 그리고 그 울음 중간 중간, 발작하듯이 말을 뱉어냈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어떻게든 덜 울려던 치수도 그 말들을 듣고서는 더 이상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고릴라, 나 이제 예전처럼 점프 못 하면 어떡해,
빨리 못 뛰면 어떡해,
계속 이러면 나 어떡해,
나 어떻게 해야 돼,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
대협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강백호의 아파트로 가는 채치수를 보고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설 기회, 그런 채치수가 들고 있는 게 뭘까 궁금하다는 이유로 몰래 뒤를 쫓지 않을 기회, 강백호의 현관문을 두드릴 때부터 일어난 소란에 혹하지 않을 기회, 보안 기능은 고사하고 방음 기능도 전혀 없는 강백호의 현관 앞에 서서 안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듣지 않을 기회도. 그리고 대협은 그 모든 기회를 놓쳤다. 처음엔 강백호 주려고 시장까지 가서 사온 어처구니 없이 큰 생선이 아깝다는 이유로, 그 다음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지막은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강백호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도저히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숨이 찼다. 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괴롭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은 중간부터 자리를 뜨고 싶었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할 수 없었고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시작되자 끊기지 않았던 강백호의 울음소리가 대협을 그렇게 만들었다. 뭔가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외쳤고 순응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땅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솟아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지나치게 잘 들렸다. 마치 자신도 강백호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본 적도 없는 울고 소리치는 강백호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머리 속에 그려져서 너무 이상했다. 대협은 전에 없이 어둡게 일그러진 얼굴로 강백호의 현관문을 뚫을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뭐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수차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강백호의 울음 소리가 드디어 멎은 순간이 오기는 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협은 조금이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제대로 숨 쉴 수 있었다. 못 박힌 듯 묶여 있던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 또 다시 어떤 망설임이 있었으나, 대협은 과감하게 돌아섰다.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했다. 벗어나야 했다. 이건 아니었다. 그렇게 강백호의 아파트를 나와서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여기서 멀어지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번호도 확인 안 하고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빈 자리를 찾아 앉고 창 밖을 보지 않기 위해 버스 기사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문득 손이 무겁다고 느꼈다. 자신이 생선이 담긴 비닐봉지를 아직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대협은 그 안을 한번 들여다 보았다. 이걸 사려고 안 가던 곳을 돌아다니던 아침의 자신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된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서 창 밖을 보니 익숙한 번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몇 번 봤던 대학생 누나가 사는 동네였다. 대협은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선 정류장의 쓰레기통에 생선이 담긴 비닐봉지를 버렸다. 그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바라본 시간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곧 발길을 돌리고 기억을 더듬어 그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꽤 헤매야 했다. 어떻게 찾고 나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초인종을 눌렀다. 맞기를 바랬다. 맞아야 했다.
“…어? 대협아?”
“안녕하세요, 누나.”
그리 말하며 들어가도 되요? 하고 나직히 물으니 상대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발을 벗으며 들어가니 왠일이야, 하는데 빙그레 웃으며 그냥 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 그랬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어깨를 잡았다. 뭐야, 하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높은 여자 특유의 웃음 소리에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협은 부드럽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좋았다. 자주 이러던 사이였기 때문에 상대방도 적극적으로 응해왔다. 허나 살과 혀가 맞닿는 달콤한 감각 사이에 울부짓는 강백호의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어 순간적으로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상대방이 놀라는 게 느껴져서 대협은 아닌 척 각도를 바꾸며 다시 키스에 집중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또 한번 더, 또 다시 한번 더,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마구잡이로 번뜩번뜩 강백호의 울음 소리가 떠올랐다. 자꾸만 끼어들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이 된 대협은 이상한 타이밍에 움찔거리며 자꾸만 얼굴을 틀었다. 그리고 통제되지 못한 호흡을 상대방의 얼굴에 쏟아냈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초조해지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눈 앞에, 손 안에 잡히는 감각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직접적인 감각에, 성감에 집중하려 했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되지가 않았다.
“…야, 너 뭐해? 뭐야?”
결국엔 그 소리가 나왔다. 대협의 어깨를 밀어내는 힘은 약했으나 당황한 대협은 손쉽게 떠밀렸다. 평소처럼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려 했지만 그나마도 되지 않았다. 대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상대방도 놀랐다. 대협아, 너 왜 그래? 하고 묻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만 있다가 대협은 간신히 말했다.
“죄송해요.”
“뭐?”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대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나갔다. 부끄러웠다. 스스로가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을 한번 감싸 쥐었다가 애먼 복도의 벽을 내리쳤다. 당연히 주먹만 아프고 벽은 멀쩡해서 헛웃음만 나왔다. 비틀거리며 나오니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느새 사그라진 노을이 저 멀리서 끝자락만 힘없이 버티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대협은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속이 일렁였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울음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코앞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있는데 다시 숨이 찼다. 발이 그냥 움직였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발 때문에 결국 그 쓰레기통이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대협은 다시 한번 그 쓰레기통을 봤다. 그 더러운 쓰레기통 안을 내려다 보다가 직접 손을 넣어 뒤졌다. 자신이 버린 비닐봉지는 다른 쓰레기들한테 깔려 있었다. 다시 건져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을 쑤셔넣고 있었다. 결국 꺼내서 봉지 안을 봤다. 담배 꽁초 몇 개가 굴러 들어가 있었다. 하, 소리가 나왔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쓸 수 없게 된 생선을 다시 버렸다. 그러고 정류장에 앉아있는데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이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뭔가, 자신의 이런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매일 아침마다 타는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오는 것을 보았다. 대협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버스에 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려서 강백호의 집까지 걸어가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백호의 현관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 핑계가 없었다. 생선도 없었다. 다른 핑계를 만들려면 뭘 사기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미 다 왔다. 그 꼴로 현관문 앞에 서니 세계 최고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여기 이렇게 와서 자신이 뭘 어쩌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종일 엉망진창이었다. 진짜 얼간이처럼 눈만 껌뻑이다가 겨우 편의점이라도 들러 과자 같은 거라도 사오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다시 온 거야? 고릴-”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기대감에 찬 얼굴이었다. 허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그 기쁨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는 걸 본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대협은 눈을 크게 떴다가 그런 강백호의 반응에 어색하게 입가를 굳혔다. 아, 진짜 되는 게 없었다.
“윤대협?”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불린 이름에 어어, 하고 답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한심하게 들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도 강백호도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무슨 말을 못 했다. 대협은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먼저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원래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어떻게 평소 때처럼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은 간신히 만들 수 있었는데 머리 속은 그냥 하얬다. 대협은 그런 적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물고기 없네.”
결국, 강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어, 그게.”
허둥대며 대답하는 스스로가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말이 생각이 안 났다. 내가 왜 이러지,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꽉 차있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술술 잘도 말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아까 채치수랑 엉엉 울던 그 애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나는 헛 것을 보고 들은 걸까, 그 헛 것에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 건가. 이제는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 이 몸이 특별히 용서해주마.”
그리곤 헤헷 웃는데 그 얼굴이, 늘 훔쳐보던 그 얼굴이었다. 멀리서만 훔쳐보던 그 얼굴이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수습 안 되는 상황에서도 대협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그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황홀함이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리가 강백호에게 들릴 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허나 그런 대협의 마음이야 알 길이 없는 강백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턱짓을 하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냐, 윤대협?”
하지만 본격적으로 달려들고 나니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사실 매 순간이 그랬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돈 문제에 관련해서는 안 선생님이 다 해결해줘서 다행이었다. 진짜 천만다행이었다. 허나 돈 말고도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강백호의 집안 사정이 괜찮을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안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당장 강백호는 얼굴도 모른다는 먼 친척이 어째 법적 보호자로 올라와 있기는 했다. 허나 강백호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강백호가 했던 수많은 철없는 행동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계속해서 닥쳐왔다. 나중엔 그런 환경에서 자랐는데 저 정도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고아였다면 편하겠다 싶을 만큼 복잡한 보호자 문제가 수많은 절차의 발목을 잡았다. 제대로 된 어른 보호자 하나가 옆에 있기만 하면 순식간에 해결될 문제들이 모조리 지체되며 자꾸만 일정이 꼬였다. 치수 하나 만으로는 부족해 안 선생님과 준호까지 발 벗고 뛰어야 했다. 그 상황에서 강백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기에 다들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상황이 자꾸 바뀌고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게 눈 앞에 계속 보이고 하니 결국 그 세상물정 모르는 강백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지경까지 갔다. 병원에서 재활원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가장 고비였다. 치수가 생각하기엔 어떻게든 병원처럼 입원한 형태로 있을 재활원이 필요했다. 이제 곧 가을이고 겨울은 금방 온다. 병원 짐 싸준다고 들렸던 강백호의 집을 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치수였다. 성심성의껏 돌봐 줄 보호자는 커녕 똑바로 된 난방도 의심스러운 그딴 곳으로 강백호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본인이 재활에 대한 의욕이 아무리 넘쳐도 아닌 건 아니었다. 그런 집에 혼자 살면서 멀리 있는 재활원까지 직접 다니며 치료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구든 애를 계속 봐주는 곳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세끼 밥과 따뜻한 잠자리가 제공되고 정해진 시간대로 재활 일정이 꼬박꼬박 돌아가는 곳. 그리고 안 그래도 힘든 애가 외롭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갈 수 있도록 딱히 멀지도 않은 곳. 어떻게든 몇 곳을 추렸다. 어디로 보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백호한테 한번 물어보고 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준호의 말에 카탈로그를 가지고 보여주러 갔다.
[뭐, 재활원은 집에서 다니면 되지. 호열이가 데려다 줄 수도 있고.]
그런데 강백호는 그딴 소리를 해댔다. 들어보니 양호열이랑 지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치수는 양호열을 나쁘게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리다고 생각했다. 나름 책임감도 있고 의리도 있지만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꼴이 딱 그랬다. 헌데 어린 녀석들이 하는 어린 생각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호열이한테 스쿠터 있으니까 같은 소리를 웅얼거리는 걸 듣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강백호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은 양호열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순진하고 철없는 것들은 친구를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우정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치수는 강백호에 대한 양호열의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 할 지라도 그게 답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치수의 생각이 맞았다. 양호열은 하던 데로 자주 와주고 같이 이야기 나눠주는 게 최선이었다. 치료와 재활에는 전문가가 필요했고 그건 애정과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쯤의 치수는 지쳐 있었다. 강백호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입시 준비도 하는데 강백호도 치수 본인도 없는 농구부의 센터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윈터컵 참가 이야기도 나오는 바람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강백호 역시 지쳐 있다는 사실을, 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쓸데없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 했다. 당연했다. 치수도 고작 열아홉이었다. 화가 났다. 참지 못 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엄하고 차가웠다. 거기에 움찔하는 강백호를 봤다. 사실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알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았다. 허나 어린애처럼 허물어지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고도 순간 모른 척했다. 그냥 그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터지는 한숨도 참지 못했다. 탁 소리가 나게 카탈로그를 올려놓고는 병실을 나오면서 말했다.
[내일 올 때까지 가고 싶은 곳 정해 놔.]
그때 한 번이라도 뒤돌아서 강백호 얼굴을 볼 걸, 하는 생각을 후에 아주 오랫동안 했다. 하지만 당시의 치수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치수가 입시 원서 때문에 일이 생겨서 준호가 대신 강백호에게 갔다. 다녀온 준호가 백호가 너무 얌전히 말해서 걱정이 됐다고 말을 꺼냈는데도 치수는 어디로 정해졌는지만 알아보고 안 선생님과 강백호의 재활원 입원에 대한 이야기나 했다. 이게 아닌데, 하고 올라오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따끔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일을 진행시키는데 집중했다. 어째든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일도 강백호를 위한 일이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학 원서와 시험 준비, 윈터컵 연습이 겹쳐 치수는 한동안 강백호의 병원에 들리지 못 했다. 바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준호나 안 선생님, 정대만, 송태섭, 농구부 다른 애들, 소연이는 물론 심지어 청소년 국가대표에 소집된 서태웅까지 다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꾸준히 강백호를 보러 갔다. 양호열 무리는 정말 맨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 역시 바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못 갈 건 아니었다. 자신도 알았다. 아마 강백호도 알았을 것이다.
[오빠, 요즘 많이 바쁘지?]
하루는 소연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바쁜 건 사실이라서 그렇긴 하다고 답하니 그렇구나, 하고 답한 소연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기… 나 오늘 송희랑 백호 보고 왔는데 백호가, 오빠는 이제 안 오냐고 물어서. …갈 때마다 꼭 물어. 그리고… 오늘은 오빠가 자기한테, 화 많이 났냐고 그래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수는 뭐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 놀람과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말을 하는 강백호의 모습이 곧바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잔뜩 풀 죽어 어깨가 처져 있는 꼴이랑 힘빠진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상이 써졌다. 그 노골적인 얼굴에 놀랐는지 소연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오빠 바빠서 그렇다고, 요즘 정신없다고 그렇게 말해줬어.]
소연은 치수가 얼마나 바쁜지 알았다. 강백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알아보고 다녔는지도 제일 잘 알았다. 소연도 언제나 도우며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그래서 치수가 얼마나 많이 지쳤는지도 너무 잘 알았다.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이는 치수의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운동 선수에게 부상이 어떤 것인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는 것은 끔찍했다. 하지만 소연은 이가 지나가는 순간일 것이라, 이를 통해 백호가 더 강해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백호는 자신이 찾아냈다. 여기서 무너질 리가 없었다. 우리 백호가 어떤 선수인데, 어떤 사람인데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소연은 백호에게 갈 때마다 그렇게 꼭 말했다. 허나 소연이 아무리 열심히 응원해도 백호가 조금씩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갈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티를 안 내는 편이었는데 치수의 이야기를 할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 큰 어깨가 조그맣게 느껴질 만큼 축 쳐져서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묻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백호에 대해 이렇게라도 치수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이 견디기 힘들 만큼 그랬다.
[하…]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오빠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손을 한번 꼭 쥐어준다.
[백호 괜찮을 거야. 다 나을 거야. 오빠도 알잖아.]
주문처럼 되뇌이는 소연의 말에 치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참 있다가 간신히 고개만 한번 끄덕인 게 다였다.
[나랑 같이 백호 보러 가자, 치수야.]
준호는 언제나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건지, 묻기는커녕 티도 안 냈는데도 치수가 하고 싶은 말을 늘 먼저 꺼내주곤 했다. 그래서 치수는 눈썹을 떨어뜨리며 고맙다고만 했다. 그런 치수의 어깨를 도닥인 준호가 뭘, 하고 답했다. 치수는 이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강백호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맞이할 지가 걱정됐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렇게 행동하지 말 걸, 겹겹이 쌓인 후회는 두려움이 되었다.
[이제 재활원으로 짐도 옮겨야 되니까. 가서 봐야지. 설명도 좀 더 해주고.]
한달 남짓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이제 재활원에 들어가는 강백호였다. 기간은 일단 석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사실 많이들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준호와 안 선생님이 이미 해줬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건 남들이 다 하고 그냥 퇴원 짐 챙겨주면서 얼굴 비추는 것만 하는 꼴이라 치수는 면목이 없었다.
[미안하다, 준호야.]
[? 뭐가?]
그냥 전부, 하는 말은 힘없이 나왔다. 그러자 준호가 등을 철썩 소리나게 쳤다. 뭐라는 거야, 하면서 크게 웃는다. 거기에 따라 웃고 강백호의 병실에 들어갔다. 강백호는 창 밖을 보고 있다가 문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백호야! 하고 손을 들고 인사하는 준호를 봤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잠시 굳은 시간이 있긴 했다. 하지만 바로 활짝 펴졌다가 곧장 개구지게 변하는 얼굴을 보고, 치수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안경 선배! 고릴라도 왔네? 대학 간다고 바쁘다더니? 하긴 고릴라 받아주는 인간 대학교 찾기가 쉽지 않지?]
그 말에 화가 나야 되는데 하나도 안 나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래, 이 녀석아. 하고 이제는 꽤나 자란 머리를 꾹꾹 눌러주니 약간 멈칫한 강백호가 헤헤, 하고 웃었다. 사실 그때 강백호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내서 그리 말했다는 건,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예전처럼 웃고 강백호의 헛짓거리에 성질도 냈다가 다시 웃고. 그렇게 그 후로도 그리 웃으면서 지낼 수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퇴원한다고 설레는 마음에 짐 싸면서 서로를 놀려대는 시간 같기만 했다면 정말 너무나 행복했을 것이다. 허나 강백호의 등에 달라붙은 상처는 그와 맞바꾼 산왕전의 승리만큼 크고 끈질겼다.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그건 말로는 설명 못 해.]
원터컵 예선을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정대만은 말했다. 힘겹게 지은 미소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래된 상처가 엿보이는 얼굴에 치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릎 보호대를 만지작거리며 이어 나가는 말에는 겪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
[백호한테는 지금이 제일 힘들 거야.]
[그러면,]
치수가 뭐라 말하려 하자 정대만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남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
[결국 자기가 이겨내고 자기가 해야 돼.]
[…하지만]
[백호는 잘 할 거다. 최소한 나처럼은 안 하겠지.]
그리 말하곤 정대만은 묵묵히 드리블 연습을 하는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치수의 시선도 정대만을 따라갔다. 재활은 두 달만에 끝났다.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었다기 보다는 강백호의 엄청난 의지 때문이었다. 재활원에 강백호를 집어넣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시키는 대로 빠짐없이 잘 치료받은 건강한 몸은 무려 5cm의 성장과 함께 돌아왔다. 키는 그리 컸는데 살은 이상할 정도로 빠져서 근육만 도드라진 몸에 머리카락도 길어져 인상도 좀 변했다. 아직 재활 치료는 일주일에 2번씩 해야 되지만 가벼운 운동은 가능하다는 말에 강백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마음대로 재활원을 나와 체육관에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모든 농구 기술을 잊은 자신의 모습을 모두 앞에서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건 정말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다들 얼어붙어 입을 떼지도 못 했다.
[이 천재님께 이 정도 핸디캡은 아무 것도 아닌 걸 몰라?]
그래서 강백호가 크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호식이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화장실을 간다며 나갔다. 몇몇이 훌쩍임을 참으며 따라 나갔다. 그러나 다행히, 한나가 있었다. 거침없이 걸어가 강백호의 엉덩이를 후려치자 짝, 소리가 났다. 뒤따르는 한나 특유의 쾌활한 웃음 소리에 강백호가 으악! 하고 지른 비명이 묻혔다.
[좋아. 강백호! 드리블부터 다시 나랑 특훈이다!]
그리고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흘렀다. 재활원 가는 날 빼고는 체육관에 살다시피 하는 강백호에게 안 감독님과 한나가 항상 달라붙어 있었다. 강백호는 약간 무서울 정도로 불평불만이 없었다. 엄청난 양의 기초 훈련과 단순하게 반복되는 부상 보강 운동을 입도 뻥긋 안 하고 소화했다. 그리고, 다른 부원들의 연습 경기를 열망이 흘러넘칠 듯 찰랑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덜컹 가라앉을 만큼 간절한 눈으로 농구를, 농구하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들어서 다들 정말 열심히 했다. 강백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건 강백호가 가진 또 다른 힘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갔다. 재활원에서도 병원에서도 완벽하게 나았다는 결론이 났다. 이제 격렬한 운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안 선생님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강백호도 울었다. 치수도 울었다. 양호열도 울었다. 서태웅은 안 울었다. 그 외엔 다 울었다. 그날이 윈터컵 지역 예선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저녁, 북산 내부 연습 경기가 끝나고 치수는 스크린 아웃과 리바운드를 강백호에게 다시 가르쳐줬다. 예전 생각이 나서 조금 울컥한 채로, 자신만큼 울컥한 게 빤히 보이는 강백호와 다시 한번 그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릴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강백호는 얼굴이 하얘져서 말했다. 아마 치수의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당황한 강백호는 어? 어어? 하는 소리를 반복하다가 점프를 몇 번 했다. 예전에 비해 속도도 높이도 형편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점프를 죽을 힘을 다해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치수는 지켜보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삐직삐직 농구화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수십번은 나고 나서야 치수는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기를 바랬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랬다.
[괜찮다. 돌아올 거야.]
강백호에게 그렇게 말해줘야 했다. 사실 강백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야 했다. 절대로 그래야 했다.
[그, 그렇지, 고릴라?]
[당연하지.]
아주 단호하게, 치수는 대답했다. 허나 그 시간이 얼만큼일지, 정말로 그 시간이 있다면 돌아오기는 하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강백호는 그러한 모습 역시, 모두 앞에서 내보여야 했다.
[백호군, 윈터컵은 힘들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강백호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이 다 안절부절 움찔할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치수는 순간 강백호의 얼굴에서 지나가는 어떤 고요와 깊은 고통을 보았다. 그러나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뜬 강백호는 알겠다고요, 영감님, 하고 답하고는 드리블을 하며 코트로 들어갔다. 그러곤 연습 뿐이었다. 더 이상 예전의 강백호가 아닌 몸으로, 오로지 연습과 재활원에서 배워온 보강 운동에만 정말 미친 놈처럼 파고들었다. 그리고 윈터컵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북산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산왕전 때문이었다.
[빨강 머리는?]
[그 10번은 왜 없어?]
[오랜만이다, 채치수. 강백호는 어때?]
[저런, 강백호는 아직 나올 상태가 아닌가 보지?]
그래서 다들 그리 물었다. 강백호를 찾았다. 벤치에 앉아 한 맺힌 눈으로 코트를 바라보는 강백호를 불러내고 싶어했다. 관중들은 물론 상대편 팀들도 그랬다. 허나 그 누구보다 북산이, 자신들이 가장 그랬다. 진정 간절했다. 강백호가 빠진 자리를 그 누구도 매울 수 없었다. 한 경기 한 경기 할 때마다 모두 다 강백호가 있었더라면, 하고 수천번도 넘게 생각했다. 강백호가 필요했다. 너무나 필요했다. 강백호가 뛰지 못하는 모든 경기가 벅찼고 힘겨웠다. 그런 상황을 알고 준비를 했는데도 그랬다. 첫 패배는 상양전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해 윈터컵의 상양은 말 그대로 사상 최강이었다. 김수겸 때문이었다. 졸업을 앞둔 김수겸은 그야말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코트 위를 질주하고 지휘하면서 말도 안 되는 패스를 이어 붙이고 무시무시하게 득점을 올려댔다. 절정의 기량, 그 자체였다. 그 엄청난 기세로 숙원이었던 해남전의 승리까지 기어이 따낸 상양은 윈터컵 전국대회 출전을 가장 먼저 결정지었다. 김수겸이 도내 MVP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윤대협이 움직였다. 치수는 돌아온 변덕규를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다. 변덕규는 그런 치수를 보고 너도 돌아와놓고 뭘 그러냐고 했다. 그리고 그 변덕규와 함께 윤대협은 깊이가 다른 농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달랐다. 이전과 달랐다. 날개 달린 호랑이 같은 김수겸이 두려웠다면 윤대협은 무서웠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의 뱀처럼 정교하고 교활한 경기 운영과 귀신 같은 득점 능력으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한 윤대협은 모두를 오싹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치수는 능남과의 다음 경기가 걱정이 됐다. 갓 주장을 단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대만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고 태웅 역시 눈빛이 형형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러면 안 됐다.
[영감님, 나 능남전 나갈래요.]
능남과의 경기를 보고 온 다음날, 강백호는 그리 말했다. 다들 심각하게 3일 후의 경기를 걱정하다가 강백호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다.
[이 천재 없이 그 윤대협 못 이긴다고.]
그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만약 부상 전의 강백호라면, 그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가능한 변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아니었다.
[안 돼.]
치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경기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는 강백호에 대한 짜증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상태로, 성치 않은 몸으로 코트에 다시 서게 될 강백호가 받을 시선에 대한 걱정과 그로 인해 무너진 강백호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튀어 나와버린 말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몇 발 더 나아가버린, 어쩌면 망상에 가까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커져버린 불안에 휘둘린 결과였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 ‘고릴라, 우리 이길 수 있지?’ 하고 묻던, 그 말을 굳이 자신에게 하던 산왕전의 강백호가 떠올랐다. 그 순간의 울렁거림과 벅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은 또다시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쓰러지던 강백호였다. 갑자기 눈 앞에 그 모습이 펼쳐졌다. 어깨 위로 떨어지던 그 무게에 자신의 몸도 기울어진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서있지도 못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이 곧 허옇게 변하더니 치수에게 말한다. …고릴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치수군, 잠깐-]
[니가 나온다고 되는 게 아냐. 지금 니 몸 상태를 모르는 거냐? 니 플레이 수준을 모르는 거냐고?]
[아니, 주장, 잠깐만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당황한 송태섭이 이제 자기가 주장이라는 것도 까먹고 그리 말하면서 말리려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 이후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강백호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근데 그 와중에 강백호의 말이 영 엉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생떼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 논리가 있었고 그럴 듯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안 된다고, 안 되는 거라고 계속 말해야 했다. 그런 치수에게 열받아 길길이 날뛰는 강백호를 말리기 위해 다른 부원들이 들러붙고 한나와 소연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나서도 둘 다 진정하지 못 했다.
[넌 그날 벤치에 있을 생각도 하지 마!]
그 와중에도 혹시 코트로 튀어 나올까봐, 가끔 치수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하는 안 선생님이 그걸 또 허락할까봐 치수는 그 말도 몇 번이나 했다.
[이 고릴라가 뭐라는 거야? 이제 주장도 아니면서! 뭐라고 그리 떠들어!]
지지 않고 받아 치던 강백호는 어느 순간부터 울먹이며 외치고 있었다. 서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거의 2m가 다 되어가는 덩치가 그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 데도 하나도 커보이지 않았다. 치수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어린애한테 끝도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그날이 망가졌다. 자신과 강백호의 관계도 망가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치수는 안 선생님께 따로 가서 강백호는 그날 벤치에라도 있으면 안 된다고 완강하게 말했고, 안 선생님도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는 안경 너머로 치수를 한참 동안 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치수군, 걱정이 되면 그냥 걱정이 된다고 말하세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겁니다.]
다음날부터 강백호는 치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둘은 마치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누가 어떻게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남과의 경기에도 오지 않았다. 관중석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북산은 졌다. 윤대협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대협 하나만 막는다고 될 경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윤대협 하나만 생각하면 그럭저럭 막아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한층 노련해진 송태섭과 한 차원 더 성장한 서태웅은 자신의 몫을 분명히 해냈다. 허나 그 대단하신 윤대협에 이끌려 모든 부원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기량을 펼친 능남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승리가 이렇게 먼 것이었나? 북산의 윈터컵은, 채치수의 마지막 고교 농구는 그렇게 끝났다. 치수는 허무해졌다. 돌아온 보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내내 달렸는데 그 끝에 아무 것도 없는 기분. 그리고, 강백호.
[이거, 집에 남는 거 있더라. 백호 집 보일러 좀 이상하다며. 이거라도 깔고 자면 좀 낫겠지.]
전기 장판을 둘둘 말아 이고지고 온 정대만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그걸 받아 든 송태섭이 근데 백호가 이거 사용하는 방법은 알겠냐고 말했다. 준호가 그러면 가르쳐 주면 돼지, 하고 답했다.
[난 비디오 챙겨왔어. 백호 병원이랑 재활원 있을 때 많이 보더라고. 엄청 좋아하더라.]
[그래서 저도 농구 잡지 집에 있는 것 챙겨왔어요. 준호 선배, 근데 백호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 없지 않아요?]
송태섭은 언제나 필요한 걸 집어내는 재주가 있다. 실컷 챙겨온 준호가 거기에 아 맞다, 하고 있는데 서태웅이 자전거에 큰 거 하나를 싣고 체육관 입구 쪽으로 왔다.
[버리는 거에요.]
그러기엔 상당히 멀쩡해보이는 텔레비전 일체형 비디오 플레이어였다. 다들 아무 말 않다가 어깨를 으쓱하는 서태웅을 향해 그냥 웃고는 함께 강백호 집으로 갔다. 겨울의 시작, 게다가 방학. 강백호가 체육관에 아무리 자주 와도 생활의 근거지는 집이었다. 강백호의 집 상태는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치수가 그것 때문에 말도 못 하게 전전긍긍한다는 것도 다들 알았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백호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 마디 하면 누가 그런 싸가지 없는 놈 걱정한다고 그러냐고 버럭대서 다들 말하는 건 이제 포기했다. 어쨌든 도착하니 강백호가 없었다. 빈 집을 보고 우리 온다는 말 안 했냐고 묻자 태섭은 분명히 말했다고 했고 준호도 그 옆에 있었다고 했다. 치수는 강백호가 날 피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치수의 표정을 살피던 준호가 그러면 놔두고 가면 되지. 어떻게 쓰면 될 지는 쪽지 써놓고 가면 되잖아. 하고 말하니까 송태섭과 정대만이 맞다고 하며 현관에 발을 들였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방이 보였다. 불을 켜니 나름 정리된 방이 드러났다.
[백호야, 우리 좀 들어간다-]
주인 없는 집에 송태섭이 그리 말하며 들어가자 다들 뒤따라 들어갔다. 가져온 것들을 있을 만한 자리에 놓고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치수는 다른 애들이 근처에 없는 주방에 서있었다. 옆에는 정말 작은 냉장고와 아직까지 기능을 한다는 게 신기한 낡아빠진 밥통이 있었다. 열어봐도 될까, 하고 생각한 순간 이미 열어보고 있었다. 밥통은 지저분했다. 그래도 밥이 있기는 있었다. 그 밑에 쌀통 같은 것도 있기는 했는데 남은 쌀이 얼마 없었다. 냉장고도 한번 열어보니 장아찌 반찬통 하나, 햄 통조림 하나. 계란 한판. 딱 그렇게 들어있었다. 그리고 냉동실에 봉지라면이 몇 개 있었다. 도대체 이걸 왜 여기에 넣어 놓은 거지? 잠시 고민하던 치수는 빨간 원숭이를 이해하길 포기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다 끝나고 나올 때까지 강백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준호가 놓여진 물건들에 대한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적어 놓은 긴 쪽지를 두고 나왔다. 치수는 말없이 일행을 따라가며 밥통과 냉장고를 생각했다. 생각 안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백호 반찬 좀 해주자, 오빠.]
그러다 결국 소연이에게까지 말해버리고 나니 일이 그리 진행되었다. 엄청나게 장을 봐와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 거냐고 투덜거리며 열과 성을 다해 요리하는 치수 옆에서 소연은 몰래 웃었다. 요근래 본 것 중에서 가장 기운이 넘쳐보이는 치수의 모습에 좀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치수는 소연과 함께 강백호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치수는 쌀도 한 가마니 샀다. 사실 일부러 소연이를 데리고 갔다. 자기 혼자만 가면 강백호가 쓸데없이 안 받는다고 난리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홀로 강백호를 마주하는 것도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준호랑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침 소연이가 같이 가자고 말해주기도 해서 그러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연이가 주면 받겠지 싶어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소, 소연아, 웬일로.]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 들어갔다. 소연의 뒤에 서 있는 자신의 눈길을 피하면서도 소연이가 내미는 반찬통들을 강백호는 거절하지 못 했다. 치수가 집 안에 쌀 가마니를 들여다 놓는 것도 뭐라하지 못 했다.
[백호야, 맛있게 먹고 다음에 맛 어땠는지 꼭 말해줘. 우리가 맛있었던 걸로 다시 해줄게.]
[…소연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마워, 라고 말하는 강백호를 내려다보며 치수도 할 말을 좀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졌다. 시선을 계속 피하던 강백호도 나중에는 치수를 힐끔대며 올려보다 입술을 좀 씰룩거리긴 했는데 무슨 말은 안 했다. 그렇게 결국 서로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소연이만 중간에서 열심히 말하다가 끝났다. 며칠 후, 강백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연이가 받아서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다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서로 괜찮다는 소리를 한참 하다가 표정이 어두워진 소연을 보고 치수는 다시 불안해졌다. 한숨을 내쉰 소연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치수 옆으로 왔다. 왜 그러냐고 묻자 백호가 정말 고맙다고, 전부 다 진짜 맛있다고 하더니 이제 안 해줘도 된다고, 자기 요리 천재라서 알아서 해먹는다고, 진짜 괜찮다고 계속 그 말만 했다고 했다. 그리고 고릴라한테도 고맙다고 꼭 전해달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말을 끝낸 소연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부담스럽게 한 건가…]
그 옆에서 치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으니 가슴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에 들었다. 자신이 했던 말들이 강백호의 가슴 속을 헤집고 있다는 생각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안 그래도 힘든 애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너무나 후회가 됐다. 지난 번에도 그랬는데 또 그랬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바보같은 놈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된다 싶어서 온갖 생각을 했지만 모조리 생각에 그쳤다. 그렇게 끙끙대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소연이에게 다시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약간 불안해 보이던 소연이가 뭐라 물으러 하는데 대답 않고 다시 반찬들을 만들었다. 치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 둘 수 없었다.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멍청한 놈이 미련한 짓 한다고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 애는 강백호였다, 어느 날 개뼈따귀처럼 굴러 들어와 자신의 농구를 구원한, 모나고 모자라서 안쓰러운 돌맹이였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
“안 해줘도 된다고, 필요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소연이한테 말했잖아!! 치수가 뭐라 말을 못하고 서있으니 강백호가 다시 울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쓰며 날뛰는 어린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치수는 몰랐다. 그래서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강백호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그랬다. 치수가 뭘 어떻게 한다고 애는 쓰는데 결국엔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꾸 왜 이렇게 되는 건지 치수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은 강백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열악하디 열악한 강백호의 아파트가 그런 소음에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흠칫 치수가 돌아봤다. 어깨까지 덜덜 떨면서 울부짓던 강백호도 돌아봤다. 빼꼼 열린 문으로 입에 담배를 문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삐죽 넣고선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좀 조용히 합시다, 일요일 아침부터 경찰 부르기 전에, 아 진짜, 자기들만 사는 줄 아나.”
그러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가는데 원래 고장 난 문은 똑바로 닫히지도 않고 덜렁거리다가 다시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히끅대며 숨을 몰아쉬는 강백호를 뒤로 한 치수는 일단 현관문을 다시 조심스레 닫았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지, 저렇게 남들이 마음만 먹으면 불쑥불쑥 들어오고. 아무리 강백호가 덩치 큰 남자애라고 해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뒤돌아본다. 강백호는 여전히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걸 계속 마주하고 있으니 자신도 눈물이 나려고 해서 치수는 이를 악물고 강백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 강백호가 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멈추니 강백호가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리고선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치수는 강백호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때까지, 히끅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면 안 됐다. 준비한 말을 해야 했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강백호.”
“…”
“내가 미안하다.”
그 말에 강백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치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와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그, 그, 내가, 내가…”
“…”
“내가, 내가, 걱정돼서 그랬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뭐라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후회되고 또 너무 많이 미안해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미안함을 입밖으로 내도 되는 건 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좀 더 좋게 말할 수 있었는데 늘 화만 내서 미안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했지만 결국 상처주고 부담 준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리고… 널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 다친 상태로도 계속 뛰는 걸 막지 못해 미안하다, 앞으로 니 몸이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어 미안하다… 농구를 그렇게 좋아하게 해놓고 농구를 잃어버릴 수도 있게 해버려서 정말, 정말 너무 미안하다…
“그게, 그게 강백호, 미안하다…”
어떤 것은 부끄러워서, 어떤 것은 두려워서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미안함들이 가득해 치수는 어쩔 수 없이 울었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막을 도리가 없어서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러 닦으면서 그 말만 계속했다. 놀란 얼굴로 치수를 보던 강백호는 그 맥락없는 미안하다 소리를 10번쯤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뭔 소리야, 고릴라.”
“미안, 미안하다, 강백호.”
“그만 해.”
“…미,”
“그만 하라고!”
그러면서 성큼성큼 다가와 치수의 멱살을 잡았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놓는다. 아까와 달리 당황한 얼굴에 갈 곳 잃은 손을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다 스르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더니 다시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깨문 입술 사이로 짓이기듯 나오는 말은 발음이 불분명했다.
“…이 고릴라가 진짜…”
그리곤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피할 생각이 없던 치수는 뺨을 스쳐가는 주먹을 그냥 맞았다. 견딜 만 했다. 진짜 힘을 준 게 아니었고 똑바로 맞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강백호라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은 그냥,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라도 속에 쌓인 걸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 고통을 앞섰다. 끄떡 않는 치수에게 몇 번 더 그러던 강백호가 씩씩 숨을 몰아쉰다. 이미 눈물 자국이 가득한 뺨에 새로운 눈물 길을 만들며 노려본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한다.
“결국 나 없어서 졌잖아.”
“…”
“나 없어서, 그 능남 경기, 마지막 경기였는데 지고 그렇게 끝났잖아.”
“…강백호,”
“그 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는데… 고릴라 나랑 같이 뛸 수 있는 마지막 경기였는데…”
울음이 섞인 말 끝이 길게 늘어지며 강백호의 얼굴이 무너진다. 넘쳐 흐르는 눈물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을 마주한 치수는 완전히 아연해져 그대로 굳었다. 이 바보가, 이 세상 멍청한 놈이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소리를 해댔었다는 사실에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대고 자신이 해댄 개소리가 떠오르자 눈앞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곧 자신 역시 하염없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신 강백호가 자신 쪽으로 쓰러지듯 기댄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또다시 산왕전의 감각이 떠오른다. 허나 이번에는 비틀거리면 안 됐다. 그 무게를, 이 고통을 받아주어야 했다. 감당해야 했다. 이 주제도 모르고 상황 파악도 못 하면서 치수를 생각했던 어린애를 위로해줘야 했다. 치수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진심으로 달래주고 싶었다. 탈수가 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우는 강백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쓸어내리며 토닥이는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강백호의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되려 점점 커졌다. 강백호는 그야말로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동안의 모든 설움을 토해내는 것처럼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내장을 끊어내듯 오열했다. 그리고 그 울음 중간 중간, 발작하듯이 말을 뱉어냈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어떻게든 덜 울려던 치수도 그 말들을 듣고서는 더 이상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고릴라, 나 이제 예전처럼 점프 못 하면 어떡해,
빨리 못 뛰면 어떡해,
계속 이러면 나 어떡해,
나 어떻게 해야 돼,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
대협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강백호의 아파트로 가는 채치수를 보고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설 기회, 그런 채치수가 들고 있는 게 뭘까 궁금하다는 이유로 몰래 뒤를 쫓지 않을 기회, 강백호의 현관문을 두드릴 때부터 일어난 소란에 혹하지 않을 기회, 보안 기능은 고사하고 방음 기능도 전혀 없는 강백호의 현관 앞에 서서 안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듣지 않을 기회도. 그리고 대협은 그 모든 기회를 놓쳤다. 처음엔 강백호 주려고 시장까지 가서 사온 어처구니 없이 큰 생선이 아깝다는 이유로, 그 다음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지막은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강백호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도저히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숨이 찼다. 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괴롭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은 중간부터 자리를 뜨고 싶었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할 수 없었고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시작되자 끊기지 않았던 강백호의 울음소리가 대협을 그렇게 만들었다. 뭔가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해, 본능이 외쳤고 순응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땅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솟아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지나치게 잘 들렸다. 마치 자신도 강백호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본 적도 없는 울고 소리치는 강백호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머리 속에 그려져서 너무 이상했다. 대협은 전에 없이 어둡게 일그러진 얼굴로 강백호의 현관문을 뚫을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뭐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수차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강백호의 울음 소리가 드디어 멎은 순간이 오기는 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협은 조금이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제대로 숨 쉴 수 있었다. 못 박힌 듯 묶여 있던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 또 다시 어떤 망설임이 있었으나, 대협은 과감하게 돌아섰다.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했다. 벗어나야 했다. 이건 아니었다. 그렇게 강백호의 아파트를 나와서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여기서 멀어지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번호도 확인 안 하고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빈 자리를 찾아 앉고 창 밖을 보지 않기 위해 버스 기사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문득 손이 무겁다고 느꼈다. 자신이 생선이 담긴 비닐봉지를 아직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대협은 그 안을 한번 들여다 보았다. 이걸 사려고 안 가던 곳을 돌아다니던 아침의 자신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된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서 창 밖을 보니 익숙한 번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몇 번 봤던 대학생 누나가 사는 동네였다. 대협은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선 정류장의 쓰레기통에 생선이 담긴 비닐봉지를 버렸다. 그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바라본 시간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곧 발길을 돌리고 기억을 더듬어 그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꽤 헤매야 했다. 어떻게 찾고 나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초인종을 눌렀다. 맞기를 바랬다. 맞아야 했다.
“…어? 대협아?”
“안녕하세요, 누나.”
그리 말하며 들어가도 되요? 하고 나직히 물으니 상대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발을 벗으며 들어가니 왠일이야, 하는데 빙그레 웃으며 그냥 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 그랬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어깨를 잡았다. 뭐야, 하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높은 여자 특유의 웃음 소리에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협은 부드럽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좋았다. 자주 이러던 사이였기 때문에 상대방도 적극적으로 응해왔다. 허나 살과 혀가 맞닿는 달콤한 감각 사이에 울부짓는 강백호의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어 순간적으로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상대방이 놀라는 게 느껴져서 대협은 아닌 척 각도를 바꾸며 다시 키스에 집중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또 한번 더, 또 다시 한번 더,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마구잡이로 번뜩번뜩 강백호의 울음 소리가 떠올랐다. 자꾸만 끼어들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이 된 대협은 이상한 타이밍에 움찔거리며 자꾸만 얼굴을 틀었다. 그리고 통제되지 못한 호흡을 상대방의 얼굴에 쏟아냈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초조해지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눈 앞에, 손 안에 잡히는 감각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직접적인 감각에, 성감에 집중하려 했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되지가 않았다.
“…야, 너 뭐해? 뭐야?”
결국엔 그 소리가 나왔다. 대협의 어깨를 밀어내는 힘은 약했으나 당황한 대협은 손쉽게 떠밀렸다. 평소처럼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려 했지만 그나마도 되지 않았다. 대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상대방도 놀랐다. 대협아, 너 왜 그래? 하고 묻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만 있다가 대협은 간신히 말했다.
“죄송해요.”
“뭐?”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대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나갔다. 부끄러웠다. 스스로가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을 한번 감싸 쥐었다가 애먼 복도의 벽을 내리쳤다. 당연히 주먹만 아프고 벽은 멀쩡해서 헛웃음만 나왔다. 비틀거리며 나오니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느새 사그라진 노을이 저 멀리서 끝자락만 힘없이 버티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대협은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속이 일렁였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울음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코앞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있는데 다시 숨이 찼다. 발이 그냥 움직였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발 때문에 결국 그 쓰레기통이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대협은 다시 한번 그 쓰레기통을 봤다. 그 더러운 쓰레기통 안을 내려다 보다가 직접 손을 넣어 뒤졌다. 자신이 버린 비닐봉지는 다른 쓰레기들한테 깔려 있었다. 다시 건져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을 쑤셔넣고 있었다. 결국 꺼내서 봉지 안을 봤다. 담배 꽁초 몇 개가 굴러 들어가 있었다. 하, 소리가 나왔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쓸 수 없게 된 생선을 다시 버렸다. 그러고 정류장에 앉아있는데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이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뭔가, 자신의 이런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매일 아침마다 타는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오는 것을 보았다. 대협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버스에 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려서 강백호의 집까지 걸어가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백호의 현관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 핑계가 없었다. 생선도 없었다. 다른 핑계를 만들려면 뭘 사기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미 다 왔다. 그 꼴로 현관문 앞에 서니 세계 최고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여기 이렇게 와서 자신이 뭘 어쩌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종일 엉망진창이었다. 진짜 얼간이처럼 눈만 껌뻑이다가 겨우 편의점이라도 들러 과자 같은 거라도 사오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다시 온 거야? 고릴-”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기대감에 찬 얼굴이었다. 허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그 기쁨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는 걸 본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대협은 눈을 크게 떴다가 그런 강백호의 반응에 어색하게 입가를 굳혔다. 아, 진짜 되는 게 없었다.
“윤대협?”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불린 이름에 어어, 하고 답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한심하게 들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도 강백호도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무슨 말을 못 했다. 대협은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먼저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원래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어떻게 평소 때처럼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은 간신히 만들 수 있었는데 머리 속은 그냥 하얬다. 대협은 그런 적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물고기 없네.”
결국, 강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어, 그게.”
허둥대며 대답하는 스스로가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말이 생각이 안 났다. 내가 왜 이러지,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꽉 차있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술술 잘도 말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아까 채치수랑 엉엉 울던 그 애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나는 헛 것을 보고 들은 걸까, 그 헛 것에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 건가. 이제는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 이 몸이 특별히 용서해주마.”
그리곤 헤헷 웃는데 그 얼굴이, 늘 훔쳐보던 그 얼굴이었다. 멀리서만 훔쳐보던 그 얼굴이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수습 안 되는 상황에서도 대협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그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황홀함이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리가 강백호에게 들릴 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허나 그런 대협의 마음이야 알 길이 없는 강백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턱짓을 하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냐, 윤대협?”
대협백호 해야 되는데 치수랑 백호 관계 이야기도 하고 싶어서 너무 길어졌다...
앞으로도 백호랑 다른 애들 관계가 나올 건데 이 글은 대협백호이기 때문에 누가 나오든 백호랑은 논컾임.
호열이는 살짝 예외, 백호를 사랑하지 않는 호열이를 상상하는 게 불가능해서;
그래도 어쨌든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
앞으로도 백호랑 다른 애들 관계가 나올 건데 이 글은 대협백호이기 때문에 누가 나오든 백호랑은 논컾임.
호열이는 살짝 예외, 백호를 사랑하지 않는 호열이를 상상하는 게 불가능해서;
그래도 어쨌든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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