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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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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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이 많이 수정되어 재업함.
읽기 어려운 글이었는데도 좋게 봐주고 댓글 달아준 붕들 고마워
많이 길다...
6
대협은 사실 겁이 났었다. 꽤 많이 났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펄떡이는 자신의 심장이 강백호에게 들리면,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망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강백호의 얼굴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어딘가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저녁, 아직,”
말이 제대로 된 문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당황스러워 어, 하는 바보 같은 소리가 났다. 강백호는 그런 대협을 보고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피식 소리가 나게 웃었다. 그리고 문 안쪽으로 몸을 돌리며 시원스레 말했다.
“그럼 먹고 가라.”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현관 안쪽은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그렇게 강백호가 비켜나 생긴 반쪽짜리 공간을 본다. 갑자기 그 장소가 이상하게 커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쪽이 얼마나 작은지 이미 아는데도 그랬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던 것 같다. 거기에 강백호가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여전히 생생한 자신의 심장 소리에 멈칫거렸다. 그리곤 눈 밑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끼며 강백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강백호의 방은 지난 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나 공간 자체에 베여있는 듯한 향냄새가 자신을 현실로 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백호의 집에 들어왔다. 강백호의 집에 왔다가 도망쳐 놓고선 다시 이렇게 돌아와서 강백호의 방 안까지 들어왔다. 나 정말… 이상한 짓을 하고 있구나. 대협은 깨달았고 헛웃음조차 짓지 못 했다. 그리고 왠지 자신의 손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움츠리듯 주먹을 쥐었다.
“저기, 나 화장실 좀”
“어, 저기 문 열고 들어가면 돼.”
손을 씻어야 될 것 같아서 한 말에 강백호가 현관 옆의 문을 가리켰다. 조금 작은 문이라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들어가야 했다. 물을 틀자 정말 얼음장같이 찬 물만 오랫동안 나왔다. 수도꼭지를 따뜻한 쪽으로 돌려도 계속 그래서 한참을 기다리니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손이 시리다는 생각을 하며 겨우 씻고 나니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강백호 앞이니까 너무 이상한 표정으로 있을 수 없었다. 세면대 위에 있던, 정말 딱 대협의 얼굴 크기만한 거울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연습을 했는데 잘 안 됐다. 결국은 뭣도 수습 못한 채로 나오니 후라이팬을 든 강백호가 말했다.
“저기 앉아 있어라, 윤대협. 이번에는 진짜 천재표 생선구이를 보여줄테니.”
그러면서 가리킨 쪽은 지난번 코타츠였다. 옆에는 농구 잡지가 늘어져 있고 앞에는 텔레비전 일체형인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그 곳. 그 위에 올려진 채소연의 사진 역시 여전했다.
“…”
대협은 조용히 채소연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이 실물보다 좀 나은데, 하는 생각을 하곤 강백호가 시킨 대로 벽에 기댄 채 코타츠 앞에 앉는다. 빨간 뒤통수를 바라본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이 가져다 주었을 생선을 요리하는 강백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번처럼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던 강백호가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말한다.
“어제 아침엔 호열이가 국밥 먹자고 해서 안 먹고 하나 남아있었거든.”
조금 둔해진 머리로 호열이는 또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한다. 북산 농구부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한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은 강백호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요리에 집중하자 흐트러져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상태가 이상한 자신과 달리 지금 눈 앞의 강백호는 늘 아는 강백호다. 같이 있으면 그저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나서 대협이 좋아하고 잘 아는 그런 강백호. 그 강백호의 요상한 흥얼거림과 때때로 이어지는 혼잣말이 작은 방 안을 채운다. 다른 때였다면, 아마 어제까지의 대협이었다면 그 속에서 소소하게 기뻐하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작고 소중한 시간 속에 흠뻑 잠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협은 그렇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묘하게 차가운 머리가 이제 물리적으로 아파왔다. 이상하게 춥다는 생각을 했다. 난방이 잘 안 되는 집이라서 그런가. 따뜻한 물 하나 제대로 안 나오는 것도 그렇고 진짜 추워서 이런가 싶어진 대협은 코타츠 아래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코타츠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담요라서 좀 낫긴 했다. 이게 강백호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강백호는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근데, 그건 이미 아는 사실인데, 그럴 수도 있는 건데, 그래야 되는 건데. 빨간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미간을 좁힌다. 대협이야 그렇든 말든 뭔가 평소보다 과할 정도로 기운이 넘쳐 보이던 강백호는 한참 생선을 굽다가 휙 돌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기대해라, 윤대협. 이번엔 다를 걸?”
그리곤 자신있게 생선을 뒤집는다. 대협은 거기에도 어색한 웃음밖에 짓지 못했다. 헌데 그 순간 뱃속에서 눈치없이 엄청나게 큰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강백호가 엥? 소리를 내며 쳐다볼 정도로 컸다. 대협은 얼굴이 새빨게지는 걸 느꼈다. 세상에, 오늘 진짜 날 잡았구나. 몇 년치 창피할 일이 하루만에 다 일어나고 있었다.
“저, 저기, 내가 오늘, 좀 바빠서,”
그러고 보니 점심도 안 먹었고 아침도 안 먹었다.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고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하지만 배는 안 고팠다. 입맛도 없었다. 그렇지만 몸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협은 정직한 자신의 몸이 오랜만에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허둥대는 대협을 보고 푸핫, 하고 웃은 강백호는 곧바로 말했다.
“오냐, 그럼 많이 먹어라. 오늘은 진짜 맛있을 거거든.”
그렇게 말한 강백호는 잠시 후 완벽한 형태의 생선구이가 담긴 접시를 코타츠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파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서 대협은 고개를 들어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자 뿌듯한 얼굴을 한 강백호가 우쭐해져서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대협이 그걸 받아 들자 건내주고는 밥을 퍼기 시작한다. 대협은 그걸 보면서 상 위에 올린 반찬통의 뚜껑을 땄다. 반찬들은 지난번보다 더 호화스럽고 종류가 다양했다. 그리고 반찬통의 모양은 아까 채치수가 들고 왔던 것과 같았다. 분명 아까 강백호는 채치수를 향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 꺼내서 맛있게 먹으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는 마지 못해 꺼내서 대협에게 주었다. 안 먹으려고, 어떻게든 안 꺼내려고 하다가 그런 것 같았었다.
“…”
뭔가 짐작할 수는 있어도 확신할 수는 없어서 대협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코타츠 위를 가득 채운 풍성한 저녁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여전히 입맛은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먹어두지 않으면 뱃속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날 것 같아 그냥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강백호의 생선구이에 손을 뻗었다.
“-와?”
“어때? 맛있지?”
하지만 한 점 입에 넣은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그러니 곧바로 강백호가 쪼르르 물어대서 대협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아침 생선을 실어나른 보람이 있었다. 히힛, 하는 웃음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귀여운 표정을 짓는 강백호의 옆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걸 느낀다. 예전처럼 마냥 좋은 게 아니라 가슴 한 구석이 욱씬거렸다. 가까이에서 본 강백호의 눈은 부어 있었다. 빤히 티가 났다. 오전에 자신이 보고 들었던 건 환상도 환청도 아니었다. 다 빤히 봐놓고도 진짜가 아니길 바란 스스로가 더 황당했다. 대협은 고개를 숙이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입에 밥과 반찬을 집어넣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그 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자신과 달리 정말로 열심히 맛있게 음식을 해치우는 씩씩한 강백호를 보면서 먹는데도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지난번에 먹었던 맛없던 생선 구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로 즐거워서, 오로지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꽉 차게 행복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때는 왜 그랬고 지금은 또 왜 이런 걸까. 강백호가 한가득 담아 준 밥공기를 어떻게든 비워내며 대협은 생각했다. 어떻게든 생각을 멈추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 되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근데 이 시간엔 웬 일이냐.”
강백호가 그리 물은 건 저녁 식사가 다 끝나고 그릇까지 다 치우고 나서였다. 여전히 정신이 나간 채 쓸데없이 배까지 불러 멍해진 대협은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며 어? 소리나 해댔다. 거기에 같이 놀란 강백호가 눈을 끔뻑이고는 다시 물었다.
“낚시 잘 안 됐냐?”
“어…어. 오늘, 그랬지.”
“하긴, 맨날 잘 되겠냐.”
자신의 넋나간 대답에 그리 답하곤 바닥 이부자리 위에 그대로 드러눕는 강백호를 본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뒹굴 돌아눕는 강백호에게 할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하다 겨우 하나 찾아서 말한다.
“…등은 좀 안 아파?”
“아- 이 천재님의 등은 이제 말짱하시단다~ 걱정 말고 긴장이나 해, 윤대협.”
그렇게 말하며 대협을 올려다보는 강백호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생기가 돈다. 간만에 힘을 준 미간에 특유의 눈동자가 합쳐지니 오랜만에 코트에서 볼 때와 같은 표정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호기로운 얼굴. 비현실적으로 빨간 머리카락 아래 강렬한 얼굴이 순해지면 어떻게 보이는지 이제는 알지만 저 야생 동물처럼 곧은 안광도 그야말로 강백호다. 어깨에 이상하게 힘이 들어간다. 코트 위의 강백호, 그 생생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떠올린다. 거기에 이끌려 전력을 다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도. 자신만 그런 것도 아니다. 대협은 안다. 자신 말고 다른 많은 선수들도 강백호에게는 이상하게 휩쓸려 평소와는 다른 플레이를 보이곤 했다. 이런 건 그냥 타고나는 거겠지. 그러면 그들도 그럴까. 그들도 자신처럼 코트 위의 강백호가 더 이상 예전만큼의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런 복잡한 기분이 들까. 나처럼 이렇게 머리가 다 아플까?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대협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그 속에서 힘겹게 인상을 쓴다. 더 파고들 자신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요리 실력이 늘었네.”
“뭐, 천재니까. 그런 건 식은 죽 먹기지.”
“그러게… 대단하네, 근데 오늘 진짜 맛있었어.”
꾸며낸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상태가 엉망인 것과는 별개로 진짜 그랬다. 겨우 얼굴을 수습하곤 아래에 있는 강백호를 보니 그 말에 입꼬리가 샐쭉 올라가 있다.
“그렇지?”
잘도 답해놓곤 대협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실실 웃어대는 얼굴이 붉으스름하다. 쑥쓰러워하는 것이다. 솔직하지만 부끄러움도 많은 아이같은 모습에 힘이 풀린 대협은 그저 따라 웃었다. 홍조를 띤 볼이 옆으로 누운 덕에 볼록 올라온 걸 내려다본다. 반사적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거기로 손가락을 내린다. 하지만 머리 위에 진 그림자에 강백호가 엉? 하고 반응하는 바람에 놀란 손의 방향이 틀어졌다. 손가락의 모양도 그랬다. 뭔가 어설픈 상태로 어쩔 줄 몰라하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린다는 게 강백호의 머리카락 위에 얹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손에 와닿는 감촉에 대협은 순간 멍해졌다. 둘 다 잠시 말이 없다가 강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하냐, 윤대협?”
네 머리카락이, 아주 보드랍다는 생각. 어린 새의 깃털을 만지는 것처럼 손바닥이 간지럽다는 그런 생각.
“그냥, 고마워서. 맛있는 거 해줘서 고마워서.”
그리 말하며 손에 감기는 붉은 머리칼을 천천히, 조심스레 쓰다듬어 본다. 눈을 동그랗게 뜬 강백호는 그런 대협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저지하지 않는다. 그 얼굴이 아주 아주 어려보인다는, 정말로 앳된 아이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강백호의 얼굴 생김새 자체가 뭔가 달라보인다는 생각도 한다.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강백호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걸 보고 흠칫 손을 떼게 된다. 눈을 불안하게 깜빡이며 뭔가 애매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런 대협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강백호를 마주하게 된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조용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하, 하하…”
간신히 짜낸,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내렸던 손을 자신의 뒷머리로 가져간 대협은 고개를 강백호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감도 안 잡혔다. 목 뒤로는 여전히 강백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식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수 없어서 겨우 마음을 먹고 입가에 경련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강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처럼 똑바로 자리를 잡고 앉은 강백호와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나도 만져볼래.”
불쑥 말한 강백호는 곧바로 대협의 얼굴 쪽으로 손을 훅 내밀었다. 순간 때리는 건가? 생각했다가 쭉 펴진 손이 자신의 얼굴 위를 지나 머리칼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꾹꾹,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짝 굳어버린 대협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는 강백호의 입술이 동그란 모양이 되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그건 대협이 정말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대협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왁스로 머리를 직접 다듬기 시작하면서는 더 그랬다. 경기하다 좋아서 흥분한 동료들의 손길도 어떻게든 피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된 게 그 순간엔 오래되어 익숙한 거부감조차 안 들었다. 그냥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따끔따끔하네.”
그런 소리를 해대며 원하는 만큼 실컷 만진 강백호가 다시 벌러덩 눕는 걸 보고 나서야 심장이 좀 가라앉았다. 혹시 머리 모양이 망가졌을까봐 슬쩍 만져보긴 했지만 사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맨날 신기했거든. 빗자루같이 세워 가지고는 경기 끝날 때까지 빳빳하니.”
빗자루라, 중학교 때 그런 식으로 자신의 머리에 대해 말하는 녀석들이 조금 있긴 했었다. 하지만 대협은 자신의 머리가 마음에 들었고 그런 놈이야 뭐라 하든 말든 신경 쓰인 적도 없었다. 그랬구나, 하고 답해주니 강백호가 말을 이어나간다.
“도대체 어떻게 하길래 그렇게 계속 서있냐? 호열이가 진짜 빡세게 해준 리젠트도 경기 뛰다 보면 다 풀리던데.”
또 호열이, 진짜 누구지? 이번엔 물어봐야 되나 입술이 움직이려 하는데 강백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넌 항상 그 머리더라. 연습할 때도 그러고 하냐? 그럼 안 거슬리냐? 난 머리 밀고 나니까 농구할 때 확실히 더 편한데.”
혼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곤 대답을 바라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탁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도 맑은 반짝임이 비치는 눈동자, 그리고 이제는 그 촉감을 아는 붉은 머리카락, 다시 손이 나가려는 걸 막으려고 주먹을 감아쥐며 대답한다.
“난 이제 익숙해져서, 이젠 연습할 때도 머리 안 하고 하면 좀 어색하더라고.”
“그럼 연습할 때도 그렇게 머리 하고 하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니 강백호가 하긴, 태섭쓰도 그러긴 하지, 하고 말을 잇는다. 그러니 이전보다 길어진 지금의 머리를 하고 코트에 서있는 강백호의 모습이 상상 되었다. 뛸 때마다 저 짧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들썩이겠지, 땀에 젖어 달라붙으면 짧았을 때랑 비슷할까. 작년 인터하이 예선처럼, 그런 느낌이려나? 이상하게 너무 잘 상상이 된다. 대협은 그게 정말 이상했다. 심지어 뛰지도 않은 윈터컵에서의 강백호 모습도 사진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지금 강백호 몸 상태가 어떤지를 아는데도, 자신의 머리는 농구하는 강백호를 잘도 연상해낸다. 감아 쥔 주먹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대협은 묻는다.
“연습은 좀 어때? 자주 해?”
자신과의 윈터컵 경기에서는 안 보였지만 다른 경기에는 벤치에도 앉아 있었던 강백호였다. 분명 농구공을 다시 잡고 훈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강백호는 기다렸다는 듯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 찬 목소리로 답한다.
“연습이야 매일 하고 있지.”
“매일?”
“그럼! 이 천재께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신다!”
하지만 오늘은 안 했겠지, 하고 대협은 혼자 생각한다. 그리고 강백호의 사정도 정확히 모르면서 오전 내내 채치수에게 소리 지르며 울다가 오후엔 혼자 누워서 훌쩍이는 강백호의 모습을 상상한다. 뭣도 모르면서, 진짜 그런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혼자 계속 마음대로 생각한다. 그렇게 누워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훌쩍이며 채치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채치수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다시 온 거야? 고릴-]
그렇게 채치수가 다시 왔으면 또 뭘 하려고, 또 같이 울고, 속상해하려고?
“원래 치수 선배랑 저녁 먹으려고 한 거였어?”
“어?”
“아까, 고릴라 다시 온 거냐고 했잖아.”
물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 물어버렸다. 그리고 명백히 당황한 티를 내는 강백호를 바라본다. 어딘가 어색한, 강백호답지 않은 표정을 짓는 강백호를 본다.
“…아, 들었냐?”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게 보이던 강백호는 코 밑을 한번 훔치곤 말했다. 그리고 흠, 하는 소리를 내는 게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정말 잠시였다. 의외로 태연한 목소리로, 어렵지 않게 말하는 강백호의 얼굴은 상당히 담담했다.
“뭐… 그건 아니고. 고릴라도 집에 가야지. 소연이랑 엄마 아빠랑 다 기다리고 있는데. 저녁 자기 집에서 먹어야지.”
말을 끝내곤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일어나는 강백호를 대협은 조금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강백호 나름대로 감추려고 애쓰는 쓸쓸함도 느꼈다. 허나 애초에 마음을 숨기는 데는 재능이 없는 녀석이다. 괜히 물었나 하는 생각을 곧바로 하게 된다. 자신의 입가도 굳는 것을 느낀다. 이건… 싫다. 대협은 화제를 바꿨다. 결국, 다시, 농구 이야기로 돌아온다.
“연습은 어떻게 하는데?”
“왜? 천재가 어떻게 연습하는지 궁금하냐?”
“응.”
대협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강백호를 빤히 본다. 대협이 이렇게 하면 강백호는 일단 멈칫하면서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가 얼굴이 붉어진다. 바로 지금처럼. 그 다음엔 볼을 좀 긁으면서 시선을 피했다가 미간에 힘을 준 채로 대협을 마주하며 말한다. 역시 지금처럼.
“북, 북산의 비밀 무기께서 하는 연습을 딴 학교 녀석한테 순순히 알려줄 것 같냐! 윤대협 너 뻔뻔하구나!”
“그치만, 진짜 궁금한데…”
진심을 담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눈꼬리를 내려 웃으며 말한다.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려운, 하지만 진심이 있다면 어떻게든 먹히는, 강백호에게는 통하는 방법을 쓴다. 대협은 정말 알고 싶었다. 점프가 안 된다고, 빨리 뛸 수가 없다고 말하는 강백호의 연습은 어떨까 생각하니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훈련을 하고 있을지, 자신의 상상과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상하게 그건 또 잘 상상이 안 되기도 했다. 다른 것들은 본 적도 없고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어도 잘만 떠오르는데, 막상 눈 앞에 있는 현실은 예측이 안 됐다. 그리고 순간 아주 막연히, 만약 강백호와 같은 학교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강백호가 매일 한다는 그 연습을 그냥 매일 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곳까지 뻗치는 생각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강백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영감님이 짜준 대로 해.”
강백호는 어느 순간 입을 열였다. 답지 않게 조그맣게 나온 목소리에 대협은 강백호 쪽으로 몸을 숙이며 집중했다. 그리고 등근육 보강 운동과 다양한 기술 기초 훈련에 이론까지 체계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도록 짜여진 계획을 들었다. 북산의 할아버지 감독은 작년까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사람이었는데 참 신기했다. 강백호가 나타난 후로는 그 할아버지조차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쭉 듣고 있으니 그 할아버지가 강백호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산왕전에서 아픈 애를 뛰게 해서 미안한 건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유 감독님도 가끔씩 자신에게 미안한 티를 낼 때가 있었기 때문에 대협은 그게 뭔지 알았다. 그리고 대협의 기준에서 그건 강백호에게 충분히 미안해 할 만한 일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강백호에게 당연히 이만큼은 해줘야 했다. 사실은 더 해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오로지 강백호만을 위해 짜여진 충실한 계획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왔다. 영감님, 채치수, 권준호, 송태섭, 정대만, 서태웅, 이한나, 또 양호열, 그리고, 채소연.
“그래서 요새 드리블이랑 슛 훈련은 소연이가 봐주고 있어서,”
그 이름이 나오자 힐끔 액자 쪽을 한번 보게 된다. 실제로 봤던 얼굴도 한번 더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표정이 좀 달라진 강백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어려 보이는 수줍은 얼굴에 발그레한 볼을 본다. 강백호가 좋아하는 채치수의 여동생, 강백호의 그런 취향, 사실은 아주 흔한 남자애들의 취향. 대협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지난번에 채소연을 가지고 강백호를 놀리는 건 재미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채소연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강백호의 입에서 나오는 채소연은 왠지, 좀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소연이가 맨날 나와서 특별 연습도 도와주고 하니까 진짜 빨리 느는 것 같애.”
소연이, 소연이, 그 이름이 강백호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몽글몽글 간지러운 애정이 대협의 피부에까지 닿는 것 같았다. 뭔가 거슬렸고 아주 살짝,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자 친구야?”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은 뇌를 거치지 않은 채였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말투도 뾰족했다.
“어, 어?”
“여자 친구라서 도와준 거야?”
당황한 강백호를 보고도 대협은 멈추지 않았다. 뒷말 역시 생각하고 나온 말은 아니었다. 되려 그럴 리가 없다고 단정하고 나온 말에 가까웠다. 지난번 반응도 그렇고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식간에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그, 그건 아니지, 그… 소연이가 우리 매니저니-”
“아니잖아.”
“어?”
“아니잖아, 너희 매니저 그 곱슬머리잖아.”
강백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먹은 대협은 따지듯 말했다. 그리곤 자신의 공격적인 태도에 당황한 강백호가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진짜 나 오늘 왜 이래,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아니 한나 선배도 계속 있고, 소연이가 새로 매니저로 들어와서, 그래서 도와준 거야. 한나 선배도 바쁘고…”
“…”
“이, 이 천재께서는 북산에서 최고 중요한 몸 아니냐! 그래서 착한 소연이가 매니저로서 도와준 거지!”
허나 대협은 자신이 답지 않았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도 왠지 변명처럼 말하는 강백호에게 그렇구나, 같은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하게 답해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한 강백호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랬어?”
그래서 갈 길 없는 모난 마음을 꾹 내리누르고 그리 답했다. 말 끝이 약간 새침하게 올라간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강백호는 그 말에도 묘하게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한참 굴리더니 입술을 오리처럼 잔뜩 내밀고선 불퉁해져서 말했다.
“소연이가… 되게 잘 가르쳐 준단 말이야. 나, 나 풋내기슛도 소연이한테 배웠고! 농구 시작한 것도 소연이 덕분이라고!”
다시 나온 채소연의 이름에 미간이 노골적으로 구겨지려다가 마지막 말에 아? 하게 된 대협이었다. 농구를 시작한 게 채소연 때문이라고?
“소연이 없었으면… 나 농구부 들어가지도 못 했다고…”
그러고는 웅얼웅얼, 강백호는 채소연을 처음으로 만나 농구 좋아하냐는 말을 들은 이야기를 했다. 대협이 뭐라 답하지 않고 가만히 들으니 그 뒷이야기도 이어서 풀어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대협은 집중했다. 흥미를 끄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순간순간의 감정이 정직하게 담긴 강백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채소연으로 시작하였으나 사실상 채치수로 끝났다고 할 수 있는 강백호의 우당탕탕 농구 입문기 이야기는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들으면서 대협은 여러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는데 첫인상으로 알 수 있었듯 강백호는 중학교 때 자타공인 양아치였던 듯 했다. 강백호는 그 부분을 확 축소해서 얼버무리듯 말했지만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말투나 사용하는 단어들에서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채소연은 그런 양아치에게서 지금의 강백호를 발견하여 여기까지 오도록 길을 터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강백호에게 채소연은 좋아하는 여자애 정도가 아니라 삶의 은인이라던가 하는 과하게 높은 단계에 올라가 있는 듯 했다. 뭔가 좀더 짜증이 났지만 채소연을 약간 다르게 평가하게 되기도 했다. 그냥 강백호가 꺅꺅대는 취향의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농구를 좀 아는 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애초에 강백호 같이 첫인상이 센 남자애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접근해서 몸을 주물러댔다는 것도 그렇고 채치수 동생이라는 점도 그렇고 그 애도 평범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몸이 고릴라랑 전교생들 다 보는 앞에서 붙었는데-”
강백호가 하는 이야기에는 경태를 통해 들은 적이 있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어 처음 알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협은 아는 이야기가 나와도 티내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하나하나 반응하며 강백호가 하는 말 전부를 빠짐없이 들었다. 실제로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듣는 건 또 달라서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근데 그렇게 듣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일 때조차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순간이 자꾸 생겼다. ‘그 강백호’의 일대기이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강백호 본인은 진심으로 심각하고 진지해도 대협이 보기에는 더없이 하찮고 웃겨서 귀여운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협은 어느 순간부터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눈이 대놓고 웃는 바람에 나중에 가서는 입가를 가린 것도 별 소용이 없어졌다.
사실 대협은 자신이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웃는 건지 강백호의 이야기를 강백호의 입을 통해 듣는 게 좋아서 웃는 건지 구분도 못 하고 있었다. 어쨌든 즐거웠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순수하게 재미있었던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대협이 입가가 아플 정도로 웃어대며 계속 하라고 턱짓을 하면 강백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쉬지 않고 말했다. 대협이 그래서? 하고 호응하면 강백호는 그래서 말이야, 하고 기운차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모든 얼굴 근육과 손발을 다 써가며, 어떻게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북산 농구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어떤 기술을 하나씩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생각나는 순서대로 자기 마음대로 들쑥날쑥 말해댔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자꾸만 튀어나오는 채소연의 이름이 거슬리긴 했지만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강백호의 모습에 그마저도 참아졌다. 나오는 이야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력되는 정보를 머리 속에서 차례대로 정리하는 순간순간에는 어떤 짜릿함마저 있었다. 이렇게 며칠 밤을 새도 좋을 것 같다는,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오늘 하루의 이상했던 기분 같은 건 씻기듯 사라지고 가슴 속이 한없이 간질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하게 강백호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분명히 들리는데 귀에 안 들어오고 먀냥 신난 어린아이 같은 강백호의 얼굴만이 동그랗게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 불가능한 기쁨이 온몸을 적셨다. 둘만이 함께하는 공간을 완전히 채워버린 기쁨에 바보처럼 파묻혀 뭐가 제대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데 강백호의 존재만이 분명했다. 강백호를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이건 뭘까?
한없이 황홀하고 달콤한 감각이 너무나 거대해 어느 순간 대협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리고 충만하게 부풀어 오르던 행복이 갑자기 풍선이 뻥 터지는 것처럼 꺼지는 걸 느꼈다. 불가해한 슬픔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눈 앞에서 조잘대는 강백호가 다시 또렷해졌다. 그리고 태양처럼 선명한 강백호의 뒤에 배경으로 깔린 작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는 강백호에게 고정한 채, 대협은 눈동자만 돌려 천천히 그 방을 훑어보았다. 모조리 낡았거나 고장 났거나 어두운 것으로 가득 찬 흐릿한 방. 문득, 대협은 두려워졌다. 자신의 눈 앞에 이 반짝거리다 못해 번쩍거리는 강백호가, 이 빛나는 녀석이 저렇게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곳에 갇혀서 이 칙칙한 배경에 파묻혀버리면 어떡하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난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속을 뒤흔드는 서글픈 분노를 느낀다. 왜 강백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어째서, 어째서 이런 애한테 그런 가혹한 일이 벌어진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왜? 내달리는 생각의 끝, 만개한 벚꽃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 위로 본 적 없는 우는 얼굴이 겹쳐지고 채치수를 흉내내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는 생생한 울음 소리가 얽힌다.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아픈 강백호. 지금 당장 코트에 설 수 없는 강백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래서 이 몸이 리바운드를- 어? 벌써 11시다.”
불길한 한 가닥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식는 감각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 순간, 강백호도 말을 멈췄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벽시계를 본 강백호가 대협을 돌아본다. 하지만 대협은 순간 강백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응? 하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말한다.
“윤대협, 그, 너 집에 가야 되는 거 아니냐? 막차 시간 다 됐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곤 시계를 보긴 했다. 그 시간이 맞긴 했다. 지난번에도 이 시간까지 있다가 막차 시간이라서 나가긴 했었다.
“…아, 그렇네.”
그래서 그런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가득한 기쁨이 슬픔과 두려움으로 색을 바꿔간다 해도, 대협은 그래도 이 시간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있고 싶었다. 강백호에 함께 머무르고 싶었다.
“…”
그래서 뭐라 말하지 않고 강백호를 쳐다봤다. 강백호도 대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슷한 일렁임이 일어나는 것을, 대협은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내일 월요일이고 하니까,”
허나 머뭇거리던 강백호는 그리 말했다. 대협은 그 말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방학이었다. 월요일이면 농구부 연습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학인데. 그러니까, 괜찮은데. 혼란스러워진 대협은 그저 강백호를 다시 한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눈동자는 여전했다. 명백했다. 자신도 강백호도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대협은 확신했다.
“그러게.”
그래서 대협은 그리 답하고 조금 더 기다렸다. 강백호가 어떤 말을 해주기를, 자신이 듣고 싶은 어떤 말을 먼저 해주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밤갈색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무언가가 자신의 쪽으로 쏟아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대협을 한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둘이서 한참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
…아닌가?
결국은 그런 생각이 든 순간까지 그랬다. 손바닥이 아팠다. 긴장한 대협이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손톱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닌가, 다 나의 착각인가. 다 나 혼자 한 생각인가?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마음 속이 몰아치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순식간에 고개를 든다. 힘없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렇네.”
그리 말해도 답이 없어, 대협은 뭔가 허탈해졌다. 여전한 손바닥의 통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그러니 여태까지 말이 없던 강백호가 황급히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어어, 가, 가냐?”
버벅거리는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눈동자 속의 흔들림은 좀 더 심해졌다. 그 모습에 대협은 한번 더 망설였다. 가지 말까, 하고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 해도 되는 걸까?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입이 안 떨어졌다. 사실은 겁도 났다. 이상하게도, 정말 겁이 났다.
“…늦었네, 니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나봐,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래서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에도 같은 아쉬움이 가득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 말에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뭐라 답이 없었다. 거기에 완전히 힘이 빠진 대협은 입술을 한번 깨물고 옷을 챙겨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자신의 뒤로 강백호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말은 없었다. 마침내 대협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돌아본 순간 마주 친 눈동자도 명확했는데, 정말 말만 하지 않을 뿐이지 이제 가는 거냐고, 가지 말라고, 대협이 보기엔 정말 대놓고 외치고 있었는데, 그 말이 톡 튀어나온 강백호의 입술 사이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저 소리없이 달싹거리만 했다. 그리고 일렁임을 멈추지 못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 찰나가 있었다. 대협은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심장이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안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대협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강백호의 눈동자에서 갑자기 뭔가가 꺼져버렸다. 아, 하고 대협이 멈칫했고 강백호가 한번 픽 소리가 나게 웃었다. 그리고 강백호가 일그러진 미간에 입꼬리는 간신히 올린, 본 적 없는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서 가라, 윤대협.”
그 서글프면서도 후련한 얼굴을 보고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대협은 평생 알 수 없었다.
겨울 밤은 차고 쓸쓸했다. 그날은 유달리 더 그랬다. 버스 정류장까지 대협은 발에 걸리는 돌맹이들을 툭툭 차며 걸었다. 그러다 하늘을 보니 반짝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도 그랬지. 여전히 흐린 밤하늘,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그건 뭐였을까… 대협은 인상을 쓰며 이마를 매만졌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곤 결국에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도착해버렸다. 기다리며 앉아 있을 의자도 없는 작은 정류장. 대협은 안내판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하늘을 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고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다들 반짝이는 별을 좋아한다. 그 별을 찾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별이 되고 싶어하기도 한다. 사실 누구든 그런 꿈을 품고 살아가지. 강백호는 아마 가장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하는 녀석일 것이다. 하지만 되고 싶다고 다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강백호처럼 열심히 연습하며 하루를 보내고 누군가는 저처럼 연습이고 뭐고 빼먹고 낚시나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처럼 바보짓만 잔뜩 하고 마지막까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착찹해하기도 하는 거고. 불현듯, 대협은 자신이 강백호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놀랐다기 보다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게 된다. 강백호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덮어버린 그 마지막 표정이 모든 것을 압도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협은 얼굴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렸다. 강백호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러면 안 됐다. 그건 이상하다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힘겹게 감추는, 능숙하지도 못한 그 얼굴은 강백호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헌데 자신이 그렇게 했다.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가슴 속이 지끈거렸다. 강백호는 그러고선 제대로 된 인사도 안 하고 나와버린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봤을까. 지금은 어쩌고 있을까. 혼자 그 꾀죄죄한 방에 누워 있으려나.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거기 학생.”
생각에 빠져 버스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버스 기사가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올려다본다. 기사는 버스 문을 연 채로 말했다.
“안 타? 이거 막차야. 탈 거면 얼른 타.”
그 말에 대협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내밀었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어두웠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는 좁은 길은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협의 눈에는 뭔가가 보였다. 너무나 생생하게 보였다. 다 허상이었다. 대협은 알았다. 자신이 홀로 상상해낸 헛것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너무나 강력했다. 저항할 수 없었다. 대협은 이미 붙잡혀 있었다. 그동안 강백호의 집 앞에서 했던 망설임들이 떠올랐다. 의미없는 저항으로 끝나 결국 강백호의 집으로 자신을 다시 이끌어 버렸던 망설임들과 멍청한 짓들이 차례차례 대협의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대협은 자신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실소가 나왔다. 미간이 일그러졌고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협은 고개를 돌려 버스 기사를 바라보았다.
“네, 안 타요. 안녕히 가세요.”
대답은 생각보다 산뜻하게 나왔다.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대협은 눈썹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이게… 내 마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니 눈 밑이 젖는 것 같아 손으로 닦아낸 곳에 물기는 또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주먹을 말아쥐니 붉은 머리칼의 감촉이 다시 생각나 대협은 속절없이 한번 더 웃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정해졌다. 사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결국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괜찮았다. 자신만 알 수 있으면 된다. 아니, 사실은, 오로지 자신만 알고 볼 수 있다면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알았다 할 지라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어느새 환해진 얼굴에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왠지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뛰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 속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차올랐다. 나중에는 뛰다시피 해서 숨이 다 가빴다. 대협은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지 몰랐다. 도착해 시선이 향할 곳은 하나뿐이었다. 숨을 몰아쉰 대협은 강백호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흐트려진 머리를 한번 만지고 허리에 힘을 똑바로 줘서 섰다.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현관문을 여는 강백호를 바라본다. 자신을 확인하고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말한다.
“미안, 강백호. 나 막차를 놓쳤어, 좀 재워줄래?”
7
윤대협.
백호는 사실 그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박경태에게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그랬다. 물론 자신의 이름만큼 멋진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뭔가 주인공 같은 이름이랄까? 좀 어렵고 한자 많이 나오는 그런 책에 나오는 멋진 남자 주인공 이름 같았다. 칼싸움 잘 하고 폼나는데 팔랑팔랑한 옷 입고 다니는 그런 주인공. 물론 진짜 마음먹고 싸우면 당연히 내가 이기겠지, 윤대협 그냥 딱 봐도 주먹 못 쓸 거 뻔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정말이지, 처음 들었을 때부터 뭔가 있어 보였다. 에이스답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백호는 윤대협을 보자마자 딱 느낄 수 있었다. 아, 저 놈이 윤대협이구나, 이름같이 생겼구나! 얼른 가서 내가 누구인지 알려줘야 에이스끼리 급이 맞겠구나! 그날은 처음으로 번호도 받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기 때문에 발걸음도 무척이나 가벼웠다. 거침없이 다가간 백호는 아주 우렁차게 말했다. 그 누구보다 먼저, 고릴라보다도, 서태웅보다도 먼저!
[난 비밀 무기, 강백호다!! 윤대협! 너는 내가 맡는다!!]
다시 생각해도 천재 강백호에게 어울리는 멋진 등장이었다. 그리고 윤대협의 제대로 된 대답으로 완성된 멋진 첫 만남이기도 했다. 그랬다. 윤대협은 처음부터 달랐다. 천재님의 가치를 모르던 다른 바보들과 달랐다. 처음부터 딱 윤대협답게, 칼싸움 잘하고 폼나고 팔랑거리는 옷 입고 다니는 주인공처럼 백호를 향해 싱긋 웃고는, 또 아주 주인공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한다.]
그러면서 악수하자고 손도 내밀었다. 그래서 자신도 좋다며 답하고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하던 순간을 백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백호에게는 농구를 사랑하게 된 많은 순간들이 있고 사실 여전히 코트 위의 매 순간이 그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특별했다. 다른 놈들은 윤대협처럼 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다들 뭘 몰랐다. 이 천재께서 도전할 만큼 인정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하나도 몰랐다. 도내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전국대회에 가서도 그랬다. 다들 이 천재께서 등장하면 환호는 못할지언정 고릴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거나 예의도 없이 이 천재님을 무시했다. 한심한 놈들이 그러다 이 천재님 활약에 큰 코 다치는 꼴을 보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였다. 그리하여 백호는 농구를 하면 할수록 윤대협이 뭘 아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처음부터 알고 제대로, 폼나게 인정한 건 오로지 윤대협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이지, 쓰러뜨릴 가치가 있는 놈이었다.
그리고 뭔가 좀 특이한 놈이기도 했다. 윤대협과의 승부에서 백호는 느낄 수 있었다. 윤대협의 농구는 뭔가 좀 희한했다.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건 기술이나 장악력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선, 혹은 비껴나버린 어떤 영역의 이야기였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의 코트 위 윤대협은 어딘가 고요하고 군데군데 비어있는 듯한 농구를 했다. 허나 그건 파고들 빈 틈이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도통 알 수가 없고 방심할 수도 없어서 상대하기가 더럽게 까다롭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간간히 그 곱상한 얼굴에서 특유의 웃음이 지워지면 갑자기 막을 수가 없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윤대협은 정말로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백호에게 코트 밖의 윤대협은 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고릴라도 맨날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왜 저러나 싶었지만 늘상 빙긋이 웃고 있는 윤대협은 진짜진짜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말도 안 되게 다정해서 같이 있다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계속 당황하게 됐다. 사실 백호는 그 다정함의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알긴 했다. 허구언날 툭 하면 시비 걸리고 별거 안 해도 욕 먹기 일쑤였지만 그런 백호에게도 친절했던 작고 착한 여자애들이 교실에 꼭 몇 명씩은 있었다. 그 애들이 늘 그렇게 다정했다. 그리고 소연이는 자신이 만났던 그런 여자애들 중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다정한 여자애였다. 윤대협은 그런 소연이와 무척 닮았다고, 사실 백호는 자주 생각했다. 생긴 것부터 그랬다. 빗자루 밑에 달린 잘생겼다고 해야 할지 예쁘다고 해야 할지 아리송한 얼굴이 눈썹을 내리면서 웃으면 소연이랑 정말 너무 비슷했다. 밑도 끝도 없이 상냥한 말투도 그랬다. 근데 작고 하얀 여자애가 아니라 자기만큼 큰 또래의 남자가 그러니까 진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상황이 자꾸 펼쳐졌다. 백호에게 그런 ‘남자’는 그야말로 윤대협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다정하기로는 세계 제일인 호열이도 처음부터는 안 그랬는데, 윤대협은 그랬다. 화도 안 내고 소리도 안 지르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은 채 나긋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조곤조곤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다.
[그래, 그래도 나중에 필요하면 말해, 조던 경기는 농구 생각 안하고 그냥 재미로 봐도 좋으니까.]
윤대협의 집에 가게 됐던 날, 조던의 비디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가 여우 놈 비디오 플레이어 생각하니까 속상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었다. 사실 말하곤 곧바로 좀 후회했는데, 윤대협은 그리 말했다. 말투도 내용도 너무 다정해서, 백호는 그냥 놀랬다. 놀라서 뭔 대답도 못 하고 윤대협 얼굴만 쳐다봤는데 그 얼굴도 다정했다. 그 다정한 얼굴로 생긋 웃는데 그렇게 웃는 것마저 턱없이 다정했다. 그래서 백호는 저도 모르게 이상하게 반응하게 됐다.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가 몸도 뻣뻣해졌다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윤대협이 양말을 주면서 신으라고 했다. 발 안 시리냐, 춥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러는데 얼굴만 뜨거워지고 뭐라 답해야 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멀뚱히 서있으니 윤대협이 갑자기 앉아보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접촉에 난데없이 다리 힘이 풀렸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자기 앞에 쪼그려 앉는 윤대협을 보고선, 설마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쪼그려 앉아 자신의 운동화를 벗기곤 양말을 신겨주는 윤대협의 정수리를 진짜로 마주했을 때는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발에 닿는 윤대협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이 모든 상황이 가짜 같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발목으로 양말을 끌어올리는 윤대협의 손 끝이 복숭아뼈에 닿는 순간, 그 느낌을 견디지 못했다. 너무 놀란 발이 저절로 위로 치솟아 올랐다.
[재활 중일 때는 이런 걸 잘 챙,]
안돼! 하는 생각이 든 건 이미 제멋대로 올라간 발이 윤대협의 턱을 걷어 찬 후였다. 뻐걱, 하는 소리가 났고 하던 말을 끝내지도 못한 윤대협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굳어있는 사이 겨우 일어난 윤대협은 당연히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거기다 대고 어버버대다가 주르륵 흐르는 윤대협의 코피까지 보고 나자 비명만 튀어나왔다. 허겁지겁 옷으로 코피를 틀어막고 난리도 아니었다. 헌데 그 난리가 나고 나서도, 윤대협은 화를 내지 않았다.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늘 보던 웃는 낯으로 돌아와 괜찮다고 말하며 어깨를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그 순간의 느낌을 백호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이 대놓고 잘못했는데. 그것도 잘해주는 사람한테 그랬는데. 그런데도 질책 하나 없이 넘어가며 괜찮다 해주는 맑고 선한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을 뭐라 표현한단 말인가. 그건 그냥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이런 게 어른인가? 형인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게 빛이 비치는 새까만 눈동자에는 원망의 기색조차 없었다. 다시 한번 나온 괜찮다는 말은 그저 포근했다. 그 사실에 백호는 정말 아주 많이 놀랬고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미안했다. 너무너무 미안했다. 정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보답하고 싶었다.
[내가, 내가 물고기 구워줄까? 나 좀 한다?]
간신히 그리 말했을 때 윤대협은 잠시 답이 없었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백호는 조금 긴장했지만 곧 풋 웃으며 그럴까, 하고 답하는 얼굴에 안심이 되어서 얼른 윤대협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까지 와서도 윤대협은 계속 그랬다. 앉아있으라고,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굳이 일어나 옆에 서서 요리와 정리를 도와주었다. 조심조심 움직이며 요리하는 백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져 백호도 요리하다 말고 그런 윤대협을 바라본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대협은, 자기가 어떤 얼굴로 날 보는지 알까?
그때부터 백호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윤대협은 그런 느낌으로 자신을 바라 보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어도 마주하고 있으면 마냥 괜찮은 것 같은 그런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곤 했다. 천재라는 걸 알아봐서 그러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러는 건지 알 도리는 없었다. 중요한 건 그 얼굴을 보면 보드러운 바람이 부는 선선한 저녁을 천천히 걷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면서 긴장이 풀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까지 편하게 느껴지는 것 자체가 묘하게 어색해서 뭐가 뭔지 좀 알쏭달쏭하기도 했다. 왠지 약간은 부끄러운 기분도 들려고 해서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게도 됐다. 자신에게 걷어차여 코피까지 났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 사실 좋아 보이는 윤대협을 보고 있으니 더 그랬다. 접힌 눈가에 훌쩍 올라간 윤대협의 입꼬리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해보이니 이상한 용기마저 났다. 아무리 봐도 실패한 것 같은 요리를 큰 마음 먹고 내놓을 수 있었던 건 그 이유가 컸다. 그래도 잘 먹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가 직접 맛을 보고선 충격을 받았다. 이걸 먹고 있었다고? 당황해서 더 안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괜찮다는 소리만 해대서 백호는 더 당황했다. 그리고 고민을 했다. 냉장고 속에 있는 반찬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 안 대려고 했는데, 그래야 되는데.
[억지로 먹는 거 아니야. 먹을 만해.]
[응, 그리고 나 배고파.]
윤대협은 태연히 말했다. 백호는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곤 빙그레 웃으며 생선으로 다시 젓가락을 가져가는 윤대협을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냉장고를 열었다. 막상 보니까 바로 꺼내기가 좀 그랬지만 일단 꺼냈다. 그리고 상으로 들고 갔다. 그런 거 먹지 말고 이런 괜찮은 거, 먹을 만한 것들 먹으라고 말하며 반찬통의 뚜껑을 땄다. 그러자 윤대협이 드물게 높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거라니, 그렇게 말하지 마. 열심히 했잖아. 괜찮아. 먹을 만해.]
그 말에는 진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얼굴이 시뻘게진 게 느껴져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웅얼대면서 반찬통 뚜껑이나 마저 땄다. 그러니까 윤대협이 그러면 같이 먹겠다고 해놓고선 고릴라 반찬은 자신에게 주고 자꾸 망한 것만 먹어댔다. 백호는 그냥 민망해서 이것저것 집어먹었는데 그러다 보니 고릴라 반찬을 엄청 먹게 됐다. 맛있기는 또 엄청 맛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자신을 보는 윤대협 기분이 좋아보이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좀 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날 저녁은 무진장 괜찮은 식사가 되어버렸다. 맛있는 걸 배터지게 먹고 나서는 신나게 농구 얘기까지 했다. 윤대협이 정리해놓은 농구 잡지들 가지고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접어 놓거나 줄을 그어 놓은 부분을 보며 이건 뭐냐고 묻는 윤대협에게 그것도 모르냐고 했더니 응, 하고 고개를 끄덕여서 어쩔 수 없이 천재 특강을 해주어야 했다. 윤대협은 생각보다 농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윤대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가 막차 시간이 되어서야 윤대협이 갔다. 그렇게 뿌듯한 저녁을 보내고 자려고 누우니 오랜만에 기분이 무척 좋았었다. 제대로 된 음식으로 배가 부를 때까지 밥을 먹고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농구 이야기를 한 게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윤대협과 했던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히히히 웃다보니 그날은 등도 안 욱씬거리는 것 같았다.
역시 이건 기분 탓인 거다, 하고 생각한다. 의사 선생님은 환상통이라는 말을 썼다. 뭔 소린지 모르겠길래 물으니 뇌가 착각을 한다니 신경계니 하는 어려운 소리를 해서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몸이 가짜로 아플 때도 있고 그건 기분 탓이라고 혼자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진짜 좀 아팠었다. 하지만 재활원에 있을 때 차차 나아졌고 재활원을 나와서는 사실 거의 안 아팠다. 그래서 체육관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였다. 농구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것과는 별개로 등의 통증은 정말 어느 순간 까먹을 정도로 미미했었다. 진짜로 그랬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몸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듣는 데는 한달이 더 걸리긴 했지만. 여우 자식 빼고는 다 울었던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원터컵을 일주일 남긴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뛸 수 있다. 다시 코트에 선다.
백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고 머리 속은 순식간에 윈터컵을 뛰는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찼었다. 눈물이 나는 와중에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얼굴이 엄청 이상해진 채로 드리블이랑 패스 연습을 끝내고 나니 고릴라가 남으라고 했다. 백호는 심하게 들떠 있었다.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과 떠오르는 기억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룻밤 연습해서 익힐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천재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
그 말을 했던 때를 고릴라도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바운드왕이 다시 필요하신가! 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어이구, 하고 피식 웃는 고릴라를 향해 백호는 음하하하, 하고 코트가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그 순간이 편하게 웃을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인지도 모르고, 정말 실컷 웃었다.
그리곤 고릴라와 위치 선정을 위한 몸싸움을 하는데 휘청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밀고 들어오려는 고릴라에게 신발 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쭉 떠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점프가 안 됐다. 몸이 안 떴다. 고릴라한테 맥없이 떠밀릴 만큼 힘도 무게도 떨어졌는데, 그렇게 가벼워진 몸이 버겁고 무거웠다. 골대가, 한없이 멀었다.
[…고릴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결국 그리 말하고 고릴라를 보는데, 고릴라가 시체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백호는 자신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 이건 아냐.
점프를 해야 했다. 백호는 그 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이전의 감각을 떠올리며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박차 올랐다. 미친 놈처럼,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고릴라의 얼굴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 뿐이야.]
고릴라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호는 그 말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다, 돌아올 거야.]
[그, 그렇지 고릴라?]
[당연하지.]
달달 떨리는 입술을 깨문 백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고릴라는 한글자 한글자 씹어먹듯이 말했다. 덕분에 백호는 간신히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울망거리는 눈을 하고선 어색하게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래도 그때는 가능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해야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영감님은 원터컵에 못 나간다고 못을 박았다. 자신이 체육관에 올 때마다 옆에서 살펴보고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계속해서 말해주면서도 거기에 대해선 분명했다. 농구 감각의 회복은 자신의 생각보다 심하게 느렸다. 병원에서, 재활원에서 누워 상상했던 속도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 했다. 심지어 몸을 계속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분명히 회복되었다고 했으면서, 다 나은 거라고 했는데, 그래놓고 의사도 영감님도 못 하게 했다. 지금은 몸을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움직인 만큼 쉬어야 한다고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것도 막았다. 칼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그만 하게 하고 집에 가서 꼭 누워서 잘 자라고 했다. 그래야 더 빨리 나아진다고, 무조건 그게 답이라고 했다. 마지 못해 체육관을 떠나던 백호는 처음엔 그렇게 했다. 그러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리에 눕고 눈을 감긴 했는데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억지로 자는 건지 깨있는 건지도 모를 시간을 며칠 보내고 나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에 오는 길에 있는 농구장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대단한 걸 할 수도 없었다. 2만번의 연습은 어디로 간 건지 점프슛은 커녕 레이업도 안 들어갔다. 점프가 안 되니 그렇게 줄줄이 문제가 됐다. 될 때까지 해보려고 공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워질 때까지 했지만 안 됐다. 다 안 됐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추웠다. 땀이 식으며 몸이 으슬으슬해져 몸을 움츠리며 집에 와서는 한번 씻고 자려고 했는데 물이 너무 차가워서 놀랬다. 원래 백호는 한겨울에도 찬물로 잘만 씻었다. 애초에 추위를 거의 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찬물이 몸에 닿는 순간 뼈까지 냉기가 파고드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 물로 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기다려 미지근한 물이 나오고서야 재빨리 씻고 나와 이불 속에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푹 잤다. 그리 자고 일어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영감님이 백호를 따로 불렀다.
[지금 연습하는 양을 늘리지 말아요, 백호군.]
무슨 소리지?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혼자 따로 연습하는 걸 영감님이 알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 하고 있는데 영감님이 가만히, 말없이 백호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를 꿰뚫어보는 눈이었다. 백호는 놀라서 눈만 꿈뻑였다.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아는 거야?
[그렇게 무리하다가, 다시 나빠집니다.]
그러면서 백호의 등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한번 눌렀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백호군만큼 마음이 급해지긴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들이 있어요.]
백호는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입을 열면 그 시간은 도대체 얼마나 지나야 되는 건데요, 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합시다.]
그러면서 영감님은 코트 위 서태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호도 그를 따라서 서태웅을 보았다. 자신은 멈춰있다 못해 뒷걸음치고 있는데 위로 위로 날아오르고 있는 서태웅을 들끓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있나요?]
[네?]
[태웅 군의 플레이를 잘 보고, 훔칠 수 있는 건 전부 훔쳐야 한다고 했죠.]
[…]
[그리고 태웅 군보다 3배 더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고요.]
이를 갈며 나온 말은 응어리가 되어 목구멍을 넘어간다.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도 알아요, 안다구요. 그래서 그 깡패팀하고 경기했을 때부터 여우 새끼 플레이는 놓친 적이 없다구요!
[지금은 훔칠 시간입니다.]
그리 말하며 영감님은 백호에게 공책과 샤프를 주었다.
[어떻게든 좋아요. 글로 쓰든, 그림으로 그리든, 백호군만의 방식으로 보고 훔친 걸 정리해봐요]
그날 밤, 백호는 코타츠 위에 펼쳐진 빈 공책을 바라보며 러브레터를 쓰던 나날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함께 손을 잡고 등교하는 나날을 꿈꾸며 예쁜 편지지를 찾아 열심히 마음을 전하는 글을 쓰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모조리 퇴짜맞은 기억도 함께 떠올렸다. 50번, 50번이나 그랬다. 그런데 그 기억이 희미했다. 분명히 그때도 절박했고, 매 순간 진심이었는데 농구를 하게 된 후로는 그건 깨끗이 잊고 있었다. 농구를 만나고 난 후엔 농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 세상이 꽉 차서 다른 건 필요가 없을 만큼, 그게 그냥 전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뭘 써야 하나, 영감님은 그림도 괜찮다고 했는데. 오늘 본 연습 경기에 대해 써야 되는 건가. 기억은 선명했다. 그렇지만 뭘 어떻게 써야할 지는 알 수 없었다. 여우 새끼가 골 많이 넣었다. 레이업에 점프슛에 3점슛도 있었다. 만만쓰 3점슛은 골대가 원래 자기 자리인 것먀냥 슉슉 들어갔다. 이런 거? 생각하니까 열 받기도 했지만 참았다. 여기서 성질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샤프를 들고 빈 공책에 줄을 하나 그었다. 몇 개 더 직직 긋다가 농구공을 하나 그리고 그 옆에 동그라미랑 선 몇 개로 사람 모양을 그렸다. 머리카락은 지금 자기 모양으로 했다. 덩크슛하는 걸 그리려다가 점프슛하는 걸로 바꿨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보니 웃음이 났다. 2만번의 점프슛 연습은 항상 그랬다. 슛연습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그땐 정말 좋았다. 팔이 올라가지도 않을 만큼 지쳤을 때조차도 떠올리면 항상 웃음이 났고 옆에 서있는 친구들과 영감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행복한 기억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 옆에 풋내기슛을 하는 걸 하나 더 그렸다. 그 때의 소연이를 생각하며 얼굴도 좀 붉혔다가 눈을 감고 자신이 했던 풋내기슛들을 떠올렸다. 계속 계속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에 따라오지 못하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손에 닿는 오돌토돌한 농구공의 감촉과 무게, 손가락을 지나 손목, 팔을 거쳐 어깨와 무릎, 발가락까지 이어지는 감각을 떠올렸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머리 속을 헤엄치다 밤을 지새웠다. 공책에는 그림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채로 맞이한 아침은 원터컵 지역 예선 첫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백호는 영감님 옆에 앉아서 자신이 빠진 북산의 경기를 보았다. 자신이 빠져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경기에 울적해져 영감님한테 몸이 기울었다. 푹신한 영감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경기를 보다가 빨강 머리니 뭐니, 하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몇 개를 들었다. 안 나오냐, 하는 소리도 있었다. 거기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곤 흥! 해주고나서 다시 경기나 봤다. 그러니 영감님이 이런저런 말을 했다. 뭘 묻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하나씩 답하고 하다 보니 조금 덜 속상했다.
[이것도 다 공부에요. 같이 잘 봅시다. 저기, 대만군이 방금 뭘 했는지 알겠어요?]
[이 천재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아요? 페이크잖아요.]
[네, 몇 개의 페이크가 있었죠?]
[…3개?]
[어떤 페이크였죠?]
그게요, 하고 답하며 백호는 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코트 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고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정작 뛸 때는 안 보였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감님이 말하는 것에 한나 선배도 조금씩 말을 보태고 하니 다음에 어떤 플레이가 이어질 지도 조금씩 짐작이 됐다. 산왕전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었지만 코트 위에서 보는 것과 코트 밖에서 이렇게 보는 건 또 달랐다. 이전과는 뭔가 다르게 보이고 느껴졌다. 그리고 북산은 그날 이겼다. 하지만 수월한 경기는 아니었다.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후반 들어서 위험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걸 고비고비마다 간신히 넘겼다. 경기를 마치고 헐떡대는 정대만에게 이 몸이 없으니 힘들지? 하니까 힘없이 웃으면서 그렇네, 하고 답하는 걸 보는데 인상이 써졌다. 제대로 팔을 들지도 못하는 정대만 입에 빨대를 꽂고 포카리 통을 들어주며 다른 녀석들을 보았다. 다들 힘겨워 보였다. 땀을 닦고 있는 고릴라도 그랬다. 자신의 눈에도 보인 자신의 빈자리가 뛰는 사람들에게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첫 경기에 벌써 이러면 어떡하냐. 빨리, 빨리 내가 나가야 되는데. 조급함에 한숨이 나와 뭐라 한 마디 하려는데 뒤에서 누가 자신을 불렀다. 돌아보니 한나 선배가 있었다. 오늘 잠시 남아서 자신을 보고 가라는 말에 보충할 훈련이 있나보다 했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웬 종이를 내밀었다.
[뭐에요?]
[오늘 경기 기록지야.]
[?]
[보는 법은 알아?]
[아뇨.]
[설명해줄게. 앉아 봐.]
그렇게 한나 선배는 기록지를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해주다가 백호가 이해 못하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시 쉽게 설명해주었다.
[감독님이 뭐 써보라고 했다며?]
[…네.]
[기록지 있으면 쓰기 훨씬 쉬울 거야. 그리고, 그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기도 좋겠지.]
그리 말하고 한나 선배는 시원스레 웃으며 백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나처럼 힘차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백호가 눈을 껌뻑이니 이힛, 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인다.
[강백호! 잘 할 수 있지?]
그 말에 백호는 바로 네, 하고 대답하지 못 했다. 한나 선배의 그 말에 기운이 나면서도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기 때문이었다. 한나 선배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실 우리 농구부에서 제일 센 건 선배가 아닐까? 안 그러면 어떻게 선배가 이렇게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없던 힘도 솟아나는 것 같을까.
[어? 대답 안 해, 강백호? 어? 어어?]
멍하니 있으니 그리 말하며 뒷머리를 구기는 한나 선배의 손길이 느껴졌다. 씩씩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네, 하는 대답은 조금은 메인 목에서 나왔다.
그렇게 원터컵의 지역 예선이 계속되었다. 백호의 일상은 낮과 밤으로 나눠졌다. 낮에는 체육관에서 영감님과 한나 선배, 소연이의 지도에 따라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다. 밤에는 집에 와서 기록지를 바탕으로 공책에 그날 있었던 플레이를 그림과 글로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본다. 똑같은 상황을 수십번씩, 가끔씩은 수백번씩 상상하고 그 상상에 따라오지 못하는 몸을 움직이며 그 감각을 떠올려보려 애쓴다. 밤새도록, 새벽이 지나 아침이 올 때까지. 경기가 비는 날이면 그림을 좀 그리다가 예전에 했던 슛과 돌파, 리바운드들을 떠올리며 쓰러져 잠들거나, 혹은 다른 때처럼 그대로 밤을 샜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잘 눕지도 않았다. 회복이 더딘 몸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불안과 조급함에 백호는 잠을 잊었다. 그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과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원래도 잠을 푹 자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려러니 하고만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끝없이 뭔가를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이것이 천재의 방식이고 천재로서 해야 할 것이라 여기며 계속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날이 왔다. 상양전이었다.
[젠장!]
팔에 힘도 없는 주제에 정대만은 잡히는 물통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힘이 빠져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나간 물통을 백호도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주장이라고 송태섭이 그런 정대만의 어깨를 토닥이니 분통을 터트리며 울기 시작했다. 제일 잘했는데, 무슨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던지는 것 마냥 다 꽂아 넣어 놓고선 제일 분해하며 울었다.
[…나 때문이에요.]
그러니 송태섭이 말했다. 차라리 울면서 말하면 좋았겠다 싶을 얼굴로 그리 말했다. 김수겸과의 대결에서 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김수겸이 너무 대단했다. 정말 잔인할 정도로 엄청난 플레이였다. 그 즈음의 백호는 예전에 상대했던 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깨닫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수겸도 그 중에 하나였다. 코트 밖의 백호가 느끼기에도 김수겸은 산왕전 저리 가라 할 만큼 대단했다. 도내 MVP가 아니라 전국 MVP라고 해도 반박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무지막지한 실력에 맹렬한 투지가 더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피해자가 되어 겪은 북산의 분위기는 말도 못 하게 가라앉았다. 게다가 다음 경기는 능남전이었다. 그래도 변덕규가 없으니 골 밑은 괜찮겠지, 생각하며 능남의 다른 경기를 보러 갔는데 왠걸, 두목 원숭이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김수겸 뺨 치는 윤대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백호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며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들 서태웅을 천재라고 불렀다. 서태웅의 플레이가 굉장하다는 것도 다들 알았다. 백호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서태웅이 하는 걸 맨날 쳐다보고 쓰고 그리고 있는 거 아닌가. 허나 윤대협은 그런 서태웅 이전에 천재라 불렸던 녀석이었다. 능남을 단번에 위험한 팀으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존재 하나 만으로 팀 전체를 바꾸고 플레이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천재 에이스였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그렇게 불리고도 남는 건지 농구 보는 눈이 정교해진 백호는 그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능남에게 지면 이번 윈터컵은 끝이었다. 여기엔 정대만의 대학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공부해야 되는데 돌아온 고릴라가 있었다. 자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다시 코트로 돌아온 고릴라가 있었다. 대학은 도대체 어쩌려는 건지 고릴라 생긴 거랑 다르게 공부 잘 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정말 그 능남전이 고릴라와 정대만의 고등학교 마지막 경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백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면 전국 대회도 못 나가고 얻는 것도 없이 고생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거였다. 이를 딱딱 깨물며 밤새 생각을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영감님이라면 어떻게 전략을 짤지, 내가 고릴라라면, 섭섭쓰라면, 만만쓰라면, 서태웅이라면, 그리고 내가, 예전처럼 점프하고 뛸 수 있는 몸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능남을 이길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나가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분함과 비통함에 이를 악물고 머리를 쥐어짜내 형편없는 점프와 스피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40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결론을 내고 나니 아침이었다. 사실 백호는 뿌듯했다. 이거면 경기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골 밑에 버티고 선 자신과 고릴라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체육관에 가서 당당하게 말했다.
[영감님, 나 능남전 나갈래요. 이 천재 없이 그 윤대협 못 이긴다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될지 말하려고 하는데 고릴라가 벌떡 일어나 얼음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안 된다고 했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선 백호를 노려보았다. 그럴 거라고 사실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고릴라의 반응은 백호가 할 수 있었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고릴라의 얼굴에 서린 냉기와 단호함에 다른 사람들까지 얼어붙을 정도였다. 백호 역시 너무 놀랐고, 곧 어떤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생각이 마음대로 앞서나가며 치달았다. 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고릴라? 나랑 농구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이거 우리 같이 하는 마지막 경기일 수도 있는데. 나랑 농구하는 게 싫어? 나랑 농구하면 질 것 같아? 왜? 내가, 내가 이제 이 꼴이니까?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비참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세상에 그런데 그 말이 고릴라의 입에서 나왔다. 백호의 마음을 읽어낸 것 마냥, 칼처럼 쏟아져 나왔다.
[니가 나온다고 되는 게 아냐. 지금 니 몸 상태를 모르는 거냐? 니 플레이 수준을 모르는 거냐고?]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은 백호는 순간 눈 앞이 다 시꺼매졌다. 저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말하려고 했다. 밤새 생각해낸, 자신이 나가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전해보려 했다. 하지만 고릴라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고 고릴라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다들, 다들 정말 너무 했다. 분함과 서러움에 백호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그날 백호는 기초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강제로 집에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날 밤, 백호는 처음으로 환상통을 않았다. 병원에서나 느꼈던 끔찍한 고통이 주는 아픔과 두려움, 말도 못할 서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세우고 시뻘게진 눈으로 체육관을 향했다. 그래도 걷다 보니 등은 안 아파서 다행이라 여기며 갔다. 그리고 들어가자 마자 고릴라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너무 미워서,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고릴라를 모른 척했다. 치사하게 속 좁은 고릴라는 내가 그런다고 자기도 그렇게 굴었다. 너무너무 속상해서 화장실에서 조금 울었다. 게다가 그날 연습을 끝나고 나서는 내일 능남전 때는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영감님이 직접 와서 말했다. 넌 그날 벤치에 있을 생각도 하지 말라던 고릴라 말이 생각나 울컥해서 뭐라 따지려 하기도 전에 영감님이 말했다.
[밀렸던 잠 좀 자세요. 백호군. 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 백호는 뭐라고 답하지 못 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영감님의 눈동자는 깊어 보였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당황해서 입만 벌리고 있는데 영감님이 백호의 손을 꼭 잡으며 덧붙였다.
[알겠죠? 따뜻하게 하고, 맛있는 것 먹고, 푹 자세요.]
그리고 놓아진 손에는 지폐가 몇 장 놓여 있었다. 백호는 무어라 대답해야 될 지도 모른채 빛이 반사되는 안경알 너머 영감님의 눈만 바라보았다.
[호열아, 오늘은 내가 쏜다.]
울적할 때는 친구들이 제일이라 그날은 오랜만에 호열이랑 구식이랑 대남이랑 용팔이까지 다 모아서 집에서 맛있는 거 실컷 시켜 먹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고릴라 욕도 실컷 하고 나니 속이 좀 풀렸다. 그리고 호열이가 오늘 자고 가도 되냐고 하는데 어… 하고 대답을 망설였다. 밤에 또 등이 아플까봐 그랬다. 백호는 호열이가 얼마나 애써줬는지 알았다. 학교가 아니라 병원과 재활원에 다니다보니 호열이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을 위해 노력해줬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백호는 반성도 좀 했다. 그렇게 애써주던 고릴라도 매일은 못 왔는데 호열이는 정말 매일 와서 못난 모습 보여주는 자신에게 끝없이 말해주었다. 다 잘 될 거라고, 천재에게 이 정도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러면서 백호가 좋아하는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병원과 재활원에서 나오는 음식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이거니까 백호는 기쁘게 먹었다. 원래 호열이는 그러니까, 하고 당연하게 받아먹고 있는 백호에게 같은 병실의 어른들은 말했다. 정말 좋은 친구를 뒀다고, 그리고 그거 당연한 거 아니라고. 나중에 꼭, 신세 갚으라고. 호열이는 그런 말에 손사래를 쳤고 백호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들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백호는 살면서 처음으로 해본 생각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돈이고 다른 하나가 호열이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둘을 엮어서 생각하게도 되었다.
고릴라가 병원에 와서는 백호는 안 보고 자꾸 어디 나가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 영감님도 오고 안경 선배도 자주 오고 했는데 셋 다 그랬다. 와서는 백호랑은 말도 별로 안 하고 계속 밖에 나가서 딴 사람들 하고만 이야기했다. 그게 돈 문제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고릴라한테 거기에 대해서 물었는데 넌 신경 안 써도 된다. 나중에 안 선생님 오시면 감사하다고 하고 말이나 잘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영감님은 부자인가 보다, 하는 결론이 났고 그래서 그 후로 백호는 고릴라 말대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말 잘 들었다. 영감님 뱃살 만지는 것도 그만 뒀다. 턱살 치는 건 본능적으로 손이 나가서 몇 번 하긴 했지만. 근데 이상하게도 영감님이 좀 아쉬워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긴 했다.
그리고 호열이, 내 친구 양호열. 호열이는 원래 알바를 많이 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 용돈을 기대할 수 없는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스쿠터도 사고 백호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곤 했다. 한때 백호도 호열이랑 같이 알바 좀 하려고 돌아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덩치와 머리색 때문에 거의 다 거절당하고 간신히 들어간 곳에서는 일 못한다고 며칠 만에 잘리기만 했다. 그렇지만 알바해보고 잘려보니까 일이란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었다. 호열이는 그 힘든 걸 꾸준히 하며 힘들고 바쁠 텐데도 매일 와준 거였다. 그리고는 아픈 자신을 보며 함께 힘들어했다. 너무 고마워서 안쓰러워지던 그 얼굴, 말 그대로 자신의 고통을 함께 하는 것 같은 호열이의 얼굴을 보며 받은 위로가 얼마던가. 그래서 백호는 자기 몸이 나아지니 같이 좋아지던 호열이 얼굴이 좋았었다. 너무 좋았었다. 그러니까, 호열이에게는 또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픈 모습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 어른들 말 대로 신세나 갚고 싶었다. 오늘처럼 맛있는 거 사주면서.
[괜찮아, 백호야. 나도 오늘 집에 가서 자려고 했는데 늦어서 한번 물어본 거야.]
눈치는 또 어찌나 빠른지 제가 답하기 곤란해하니 호열이는 또 바로 그리 말했다. 거기다 대고 백호는 다음에는 꼭 자고 가라,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날 밤 역시 아팠다. 하지만 백호는 끙끙 않으면서도 그래도 호열이 앞에서 안 아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방학에 지루하고 답답한 하루하루 백호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농구 연습과 공책 정리로, 봄에는 나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버텨 나갔다. 종종 쌓여가는 공책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잠 못 자는 거야 맨날 있는 일이라 이제 그냥 일상이었지만 등이 욱씬대는 건 안 되겠길래 영감님한테 말해서 같이 병원 가니 별 문제 없다는 말과 함께 그 놈의 환상통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밥 잘 먹고 잘 자야 된다는 뻔한 소리도 하길래 알겠다고 했는데 영감님도 자꾸 그 말을 했다. 몇 번이나 했다. 지난번의 그 눈으로 백호를 빤히 바라보면서 계속 말했다. 안다구요, 알았어요. 답하는데 사실 조금 뜨끔하긴 했다.
그러던 하루, 연습을 마친 송태섭이 주장이 부원들 집에 한번씩 가봐야 된다며 같이 집에 가자고 했다. 가정방문이라 뭐라나, 그러면서 저녁으로 맛난 거 사주길래 잔뜩 먹고 신나서 같이 집으로 가서는 송태섭이 가져온 농구 잡지를 보고 이야기하며 놀았다. 그러다 시간이 늦어져 어두워진 창 밖을 본 백호가 밤이다, 라고 말했을 때였다. 음, 하는 소리를 한번 낸 송태섭이 말했다.
[백호야, 잠이 잘 안 와?]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니 송태섭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근데 비웃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봐주는, 다 안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다들 정말, 어떻게 아는 거지?
[괜찮아, 나도 자주 그래.]
송태섭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했지만 눈썹은 조금 아래로 쳐저있었다. 평소 때 알던 송태섭과는 조금 달라보였달까. 왠지 조심스럽게, 백호는 묻게 되었다.
[…왜?]
[뭐, 생각할 게 많아지면 그렇잖아?]
그 말에 커진 백호의 눈에 송태섭의 눈이 같이 담겼다. 나도 알아, 하고 말하는 눈과 마주친 순간 백호는 느낄 수 있었다. 아, 섭섭쓰 아는 구나, 알고 있구나.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걸 섭섭쓰도 겪어봤구나. 그래서, 아는 거구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나쁜 생각만 떠오르고. 그래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하고, 그래서 지쳐 잠들기를 바라고.]
하지만 그걸 직접 귀로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송태섭이 마치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너무 놀라 굳어버린 백호에게 아냐? 하고 턱을 까딱하는데 바보처럼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치만… 그래도 자려고 해야지. 잘 자려고 애써봐야 되는 거지.]
그것도 맞는 말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니 송태섭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올려 복복 쓰다듬더니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백호야, 그러려면 너희 집에는 뭐가 좀 더 필요하겠다.]
[…?]
그리고 송태섭은 다시 농구 잡지 이야기를 했다. 오늘 들고 온 것 말고도 많다고, 이제 자기는 안 보니까 너 볼래? 하고 물었다. 좋다고 하니 화장실 좀 쓴다고 들어가서는 원래 찬물만 나오냐고 묻길래 기다리면 된다고 하니까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자기 마음대로 자고 가겠다고 했다. 백호가 오잉? 하는 얼굴로 보든 말든 무시하고 씻고 나와선 이불을 깔더니 그대로 누워서 너도 빨리 자라고 했다. 그 박력에 떠밀려서 백호도 씻고 누웠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평소보다는 훨씬 이른 시간에 누우니 불까지 꺼버렸다. 잘 자라, 하는 말에 어어, 하고 눈을 감은 백호는 확실히 다른 날보다 잘 잤다. 등도 덜 아팠다. 백호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송태섭이 한밤중에 일어나서 집안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바닥과 보일러도 살펴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송태섭이 사온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고 있으니 목요일에 뭐하냐고 묻길래, 농구 연습하겠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난데없이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4월 1일인데?]
[그래? 그러면 우리가 작년 생일을 못 챙겨줬네. 올해는 미리 챙겨줄게.]
그게 무슨 뜻인지 백호는 이해를 못한 채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왠지 모르게 실실 웃어대던 송태섭이 집에 갈 때까지도 그랬다. 그게 뭔 말인지 알게 된 건 갑자기 오랜만에 놀러가자던 호열이랑 목요일 농구 연습 끝나고 오락실 가서 슛 넣는 농구 게임만 한참하다 집에 와서였다. 어? 하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들어갔을 때랑 다르게 정리된 집에 못 보던 것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코타츠 위에 편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백호야, 나 준호야. 로 시작한 편지는 딱 안경선배만큼 단정한 글씨로 농구부 애들이 주고 간 것들과 쓰는 방법들이 무척이나 쉽게 쓰여져 있었다. 그대로 자리에 서서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백호의 입가에 어쩔 수 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눈가도 조금은 촉촉해졌다. 다들 주고 간 것을 손으로 조용히 쓸어본 후 백호는 크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좋았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슬펐다. 눈물이 한번 나오기 시작하자 멈추지가 않았다. 소리없이 한참을 울다 밤이 되어 정대만이 준 전기 장판 위에 이불을 덮고 누우니 느껴지는 온기에, 백호는 조금 더 울고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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