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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2 23:41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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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벽 낚시 결과가 신통치 않아진다는 소리였다. 나오는 낚시꾼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어지는 영하의 날씨에 바닥 곳곳 얼음이 얼어 있는 부두를 지나쳐 대협은 이제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번처럼 과한 것 말고 적당한 생선을 사며 이제 다른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호열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흠, 하고 내쉰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진다. 받은 생선을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이, 버스 안에서 보는 강백호의 집으로 가는 창 밖의 풍경이 이제는 익숙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내릴 때가 가까워지면 웃는 강백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는 것 역시 그랬다. 허나 그날은 조금 더 특별했다.
“여- 윤대협-”
“…백호야?”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해도 안 떠서 어두컴컴한 현관 앞에 누가 있는 걸 보고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강백호가 먼저 손을 들며 대협의 이름을 불렀다. 대협은 놀랐고, 또 기뻤다. 빨라지는 발걸음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강백호가 일어났다. 빨간 머리통이 훌쩍 위로 솟자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아 대협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웬일이야, 백호야. 이렇게 일찍?”
“뭐래, 너도 일찍이잖냐.”
그리 답한 강백호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씩 웃었다. 거기에 덩달아 입꼬리를 올린 대협이 생선이 든 봉지를 들어올리자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가온다. 대협이 그런 강백호에게 봉지 안을 벌려서 보여주자, 오늘은 뭐냐고 물으며 안을 들여다 보는 빨간 정수리에서 이른 새벽의 시린 기운이 섞인 비누 냄새가 났다. 묘하게 달큰한 비누향에 입가가 한없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대협은 청어라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래? 하고 답하며 천진하게 웃는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왔다. 저도 모르게 오늘은 운이 좋네, 하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고 가슴이 뛰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두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데, 진짜 좋은데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이상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자, 여기. 얼른 들어가. 춥잖아.”
그래서 대협은 강백호의 빈손에 봉지를 쥐어 주며 그리 말했다. 약간은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선 그렇게 해버렸다. 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강백호 앞에 있으면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는, 얼른 주고 혼자 돌아가는 길에 식혀야겠다는, 그런 답지 않은 생각이 자꾸만 들어 별 수가 없었다. 오그라드는 손 끝과 신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나 지금 날 통제 못 하고 있구나, 대협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엔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몸을 돌린 순간, 그런 대협을 대신해 덥썩 팔을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큰 손이 팔목을 감싸는 느낌에 놀라 고개를 돌린 대협을 보고 강백호가 개구진 얼굴로 웃는다.
“윤대협, 뭘 모르는 구나. 이 천재는 추위를 안 탄다 이 말씀.”
그리고는 대협이 오기 전에 뛰고 와서 괜찮다고 씩씩하게 덧붙이는데, 사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 치고는 상태가 너무 말끔했다. 새벽 조깅은 무슨, 대협의 머리 속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새까만 새벽 일찍 일어나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선 자신을 기다리는 강백호의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해버린다. 그리고선 정말로 어쩔 줄 모르게 되어버린다. 얼빠진 얼굴로 어? 하는 소리나 해댄다. 웃기게도 강백호는 그런 대협의 모습에 기뻐한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잔뜩 기분이 좋아져선 말한다.
“야, 윤대협, 너 오늘 아침 먹고 가라.”
그러면서 잡은 팔을 자기 쪽으로 훅 당기는 강백호를, 대협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윤대협, 너 원래 아침은 어떻게 먹냐?”
“응?”
“기숙사라며, 그럼 아침 니가 해먹는 거냐?”
“음…그럴 때도 있고?”
애매하게 말을 끊는 대협을 향해 밥그릇을 내려놓은 강백호는 계속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래서 거기까지만 적당히 말하려 했던 대협은 빙긋 웃고는 마저 이어 말했다.
“기숙사 식당 가서 먹을 때도 있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 대협은 반찬통의 뚜껑을 마저 땄다. 그래? 하고 답하며 앉은 강백호는 더 묻지 않고 먹자! 라고 말하며 수저를 들었다. 그래서 대협도 고개를 끄덕이곤 예상치 않았던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원래라면 빈속으로 시작할 아침이었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강백호와 함께라면 당연히 그 이상이었다.
 보통 대협은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학교에서 주는 대로 먹고 저녁은 먹다가 안 먹다가 했다. 대협이 사는 기숙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 3끼 식사를 모두 제공하는 데도 그랬다. 기숙사 식당은 깔끔하고 맛도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기만 하기 됐지만 대협은 그곳에 자주 가지 않았다. 아침은 낚시나 늦잠으로 시간을 못 맞춰서 그랬고 점심은 학교 급식 때문에, 그리고 저녁은 좀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버지 회사의 기숙사에 산다는 건 당연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대협을 제외하고는 다 회사원이라는 소리였다. 그들 사이에서 한참 어린 데다 키도 갑절이나 큰 대협이 튀지 않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대협의 아버지 직위가 직위이다 보니 이런저런 소리도 종종 나왔다. 어떤 건 사실이고 어떤 건 거짓이라 되려 진실은 알 수 없어지는 많은 것들이 대협의 주변을 떠돌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상 겪은 일이고 신경 쓰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도 남았지만, 굳이 그 속으로 일부러 들어갈 필요는 없었기에 대협은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농구부 연습 시간이 늘어나 자연스럽게 저녁까지 학교에서 해결될 때가 많아진 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유감독님의 시도 때도 없는 잔소리와 영수의 끝없는 틱틱거림에도 불구하고 농구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저녁이 당연히 훨씬 나았다. 그리고 강백호랑 같이 하는 식사는 뭐랄까, 여러모로 차원 다른 경험처럼 느껴졌다. 
“야, 여기 니가 가져 온 거 좀 먹어 봐라. 이 천재님이 천재답게 구워서 끝내준다.”
괴상한 젓가락질로 생선살을 뭉태기로 떼어내 대협의 밥그릇에 올려주던 강백호의 입은 아주 바빴다. 언제나처럼 먹는 양도 양이지만 속도도 굉장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챙겨준 것에 살짝 감동한 대협이 고마워 백호야, 하고 말하며 한 숟가락 뜰 때 강백호는 다섯 숟가락은 먹었다. 그 많은 반찬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없어지는 것에 경탄하며 대협도 마저 식사를 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이, 열 배는 맛있게.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래서 식사가 끝난 후, 고마운 마음에 대협은 용감하게도 그리 말했다. 살면서 설거지란 걸 똑바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일단 그렇게 말하고 봤다.
“오, 그래? 오냐. 한번 해봐라.”
거기에 강백호는 호쾌하게 웃으며 그리 답했다. 그 얼굴을 보니 잘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무장갑까지 끼곤 까마득히 낮은 싱크대 앞에 섰다. 그리고 나름 여기저기서 본 대로 그릇과 수저를 씻었다. 가슴 속이 나비떼가 가득 찬 것처럼 간질거려 저도 모르게 자꾸 웃으면서 그러고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연 채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강백호가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더 그랬다. 몰래 돌아보니 웃음밖에 나지 않는 정체 불명의 멜로디에 리듬을 맞춰가며 어깨를 까딱이는 강백호가 보였다. 샛노란 조명 아래 흔들리는 강백호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대협은 입술을 꼭 깨물고 낮은 웃음소리만 흘려보냈다. 그 웃음 소리과 강백호의 멜로디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여 작은 집을 채웠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멍하니, 대협은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게 행복이라는 거구나. 이런 게, 가능하구나. 세상에 이런 게 있구나. 눈을 감았다 떠도 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주는 강백호의 생생한 존재감과 손 끝에 닿는 미끌한 감각이 그저 고마워, 대협은 그 벅찬 감정을 소중히 품은 채 다시 싱크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그 행복의 일부가 되어 할 일을 했다. 아마 거기서 끝났으면 아주 평화롭고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백호가 누구인가. 언제나 대협이 상상하는 그 이상을 해주던 놀라운 존재가 아니던가. 당연히 자기가 지어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강백호의 멜로디는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는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몇번 들으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더라? 동요? 애니메이션 주제가? 하면서 대협이 고개를 갸웃한 찰나, 갑자기 등 뒤로 뜨끈한 기운이 덮쳐왔다. 어라, 하는 순간 등 뒤로 분명한 실체와 무게감을 가진 몸이 통째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더 놀랄 틈새도 없이 대협의 어깨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태연하게 강백호의 턱이 걸쳐졌다.
“이야 윤대협- 너 진짜 설거지 못 한다.”
강백호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웃음소리의 진동이, 입가의 움직임이, 그 장난스런 목소리에 치약 냄새가 섞인 숨까지 대협의 피부에 직접 닿아왔다. 대협은 당황했다. 정말 많이 당황했다. 그 상태로 굳어선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는데 강백호는 그 걸로도 모자라 윤대협의 몸을 아예 뒤에서 끌어안듯이 양손을 세면대 쪽으로 내밀곤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여기여기여기 물 다 튄 것 좀 봐라. 누가 보면 여기서 세수한 줄 알겠네. 너 옷에 물은 안 튀었냐? 다 젖었겠는데?”
그러면서 무척이나 자유로운 손이 아주 멋대로 움직여 대협의 배쪽과 바지춤까지 더듬거리는데, 그 접촉에 너무 놀란 대협이 반사적으로 퍼드덕거린 건 그냥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곤 이어진 어깨의 통증과 으헉, 하는 비명 소리에 대협은 곧바로 자신이 어깨로 강백호의 턱을 올려 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돼- 싶어서 급한 마음에 뒤도는 순간 손에서 뭔가 미끌했다. 빠져나가 아래로 떨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와장창창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아…”
그건 대협이 낸 소리였다. 아픈 턱을 붙잡고 이게 무슨 짓이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백호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접시 중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던 대협의 입에서 나온 경악의 신음에 가까웠다.



 대협은 살면서 그리 크게 감정이 요동쳤던 적이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랬다. 대협의 생에서 그럴 만한 상황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내가 왜 이러지? 나 바보인가? 왜 이리 멍청하게 굴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 속에서 헤매며 흔들려 본 적 자체가 없었다. 강백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강백호를 만나고 나서는, 특히 요즘은 매일 그런 생각을 해대고 있었다. 나 도대체 왜 이래? 왜 이렇게 허둥대는 거야?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지? 이게 다 뭐야, 진짜.
“이거 복수냐?”
강백호는 그리 물었다. 그때 대협은 바닥에 엎드려 깨진 유리조각과 물자국을 걸레로 정신없이 닦고 있었다.
“어? 어? 백호야? 뭐라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듣지도 못했던 대협은 일단 그리 답하며 고개를 들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억지로 미소지은 얼굴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시뻘게진 턱을 문지르던 강백호는 왜 저래? 하는 얼굴로 그런 대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나한테 걷어차인 거 복수냐고.”
그 말을 듣는데 대협은 순간 그게 언제인지도 생각이 안 났다가 강백호에게 걷어차여서 코피 터진 날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다. 강백호가 이걸 그거랑 관련 지어서 복수라고 생각한다니 갑자기 백배는 더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백호야,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아냐, 미안, 미안해, 진짜 미안, 실수였어. 실수야.”
자신이 들어도 절박한 목소리로 대협은 그리 말했다. 그렇게 변명하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양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그랬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다소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결국엔 강백호가 얘가 진짜 왜 이래? 하는 얼굴로 대협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알았어, 임마. 알겠어. 알겠다고. 그러니까 그만 하고 얼른 마저 치우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협이 쥐고 있던 걸레로 손을 뻗는데, 거기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반대편 손으로 강백호를 뒤로 물린 대협은 재빨리 말했다.
“아냐, 내가 치울게. 위험해, 백호야. 저리 가 있어.”
하지만 강백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되려 기가 찬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 윤대협, 너 손에 피나는 건 알고 그러냐?”
“어?”
그 말을 듣고서 강백호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왼손 중지에 작은 생채기가 하나 생겨 있었다. 별 건 아니었다. 딱히 따갑지도 않았다. 피가 나긴 했지만 심한 것도 아니었다. 괜찮다고 하려는데 어휴,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가락을 잡아오는 감촉이 있었다. 한숨을 내쉰 강백호의 인상 쓴 얼굴에 대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대협의 손을 붙잡곤 온 신경을 집중해 다친 곳을 유심히 살펴보는 강백호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볼에 있는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대협은 갑자기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 같은 실수를 또 할 수는 없어서 꼼짝 않고 소리없이 마른 침만 한번 삼켰다.
“유리 박힌 건 아닌 거 같네. 다행이다.”
한참 그러다 강백호가 그리 말하고 나서야 대협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러고 나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강백호 특유의 높은 체온이 느껴지던 큰 손으로 대협의 손가락을 붙잡고선 길게 팔을 뻗었다. 그리곤 휴지를 몇 장 뜯어 꼭꼭 눌러서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윤대협 너 진짜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덜렁대네. 뭐 똑바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구만.”
그러면서 한 뼘도 안 될 거리에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피식 웃는데, 그건 진짜 반칙이었다. 숨조차 멈춘 대협은 강백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이 모든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무 사심도 없는 강백호에게 달려들어 입 맞추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으이구, 이게 다 뭐냐.”
그리고 그런 대협의 마음이야 알 길이 없을 강백호는 대협이 쓰던 걸레에 다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협은 조용히 입 안을 한번 깨물곤, 뻗은 강백호의 손을 잡고 작게 말했다.
“내가 마저 할게. 내 실수잖아.”
그렇게 의아한 얼굴의 강백호를 끝까지 물린 대협은 자신이 저지른 사고의 흔적을 치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려러고 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옆에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강백호를 자꾸만 힐끔거리게 됐다. 가만히 있질 못하는 강백호의 도톰한 입술이 유달리 크고 또렷하게 보였다. 결국은 한번 더 따끔하니 손에 상처를 내고 나서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고 강백호는 이제 좀 한심한 눈으로 대협을 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대협을 전에 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평소와 달리 그런 기색을 제대로 숨기지 못 하던 대협은 강백호와 함께 집을 나서던 순간 덜컥, 충동적으로 말했다.
“백호야, 정말 미안,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오늘 저녁 살게.”
원래 그럴 계획이 있기는 했었다. 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티가 팍팍 나는 강백호에게 그건 꽤나 먹힐 만한 계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급하게, 쫓기는 사람마냥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뭔지 강백호도 눈만 껌뻑이며 대답이 없었다. 말똥말똥 대협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참 귀엽기는 했지만 말없이 그러고만 있으니 대협은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는 것 같았다. 결국엔 오늘은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해버리곤 저기, 하고 다시 운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강백호가 말했다.
“…뭐 사줄 건데?”


 
 강백호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대협은 냉큼 알겠다고 답하곤 마치고 체육관으로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그 말에 강백호가 약간 놀라는 걸 보고 눈가를 찡긋 구겨 웃으며 몇 시쯤 가면 되겠냐고 물었다. 강백호는 좀 떨떠름해 보이는 얼굴로 고민하더니 7시라고 말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강백호와 헤어진 대협은 하루 종일 7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농구 연습을 하면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계속 시계를 바라보며 종일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좀 했다. 정작 강백호가 눈앞에 있으면 자꾸 바보가 되버려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이럴 때 머리 속을 정리해야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이상하고 힘든 일이었다. 지금 자신은 정말 이상했다. 본 적 없는 자신의 모습이, 있는 줄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이 계속계속 드러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더 멋있고 싶은데, 잘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오히려 어설퍼지고 실수만 늘어났다. 이제는 진짜 그만 실수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연습을 일찍 마친 대협은 서둘러 씻고 짐을 챙겨 지하철을 타러 갔다. 어둑어둑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저녁 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대협은 생각보다 일찍 북산고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체육관이 어디인지는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빨간 머리가 북산고 정문 앞에 떡하니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강백호가 미리 나와있었다. 종일 생각했던 강백호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마자 대협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강백호도 손을 드는데 뭔가 이상했다. 강백호가 혼자가 아니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대협도 아는 사람들이.
“어, 진짜네?”
“그러게요, 대만 선배. …진짜 윤대협이네.”
“섭섭쓰 만만쓰, 이제 믿냐? 내가 왜 이런 데 거짓말을 하냐? 다들 이 천재님을 못 믿고 말이야.”
가까이 다가가자 그리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협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자 자기들도 여- 하면서 인사하는데 눈빛이 참 미묘했다. 말그대로 대협을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고대로 드러나는 송태섭과 정대만을 마주하며 대협은 그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채소연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이네요.”
일부러 눈을 마주치며 그리 말하자 채소연이 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하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대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협은 가만히 그런 채소연을 잠시 바라보았다. 얘도 매일 체육관 나온다더니 오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투덜거리던 강백호가 말했다.
“자, 됐지? 그럼 우리 이제 간다. 가자, 윤대협. 소연아 안녕, 내일 봐.”
그러고선 어깨에 손을 걸치는 강백호에게 대협은 좀 놀랐다. 그리고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올려오려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그라진 것에 더 놀랐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순순히 그런 강백호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러고선 뒤로 고개만 돌려 인사 삼아 한번 끄덕이니 다들 황당하다는 얼굴로 훌쩍 가버리는 자신과 강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게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았다.



“진짜 여기가 그렇게 맛있냐?”
“응. 여기 유명해.”
그래서 대협은 오전에 미리 전화를 해서 자리를 예약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해놓은 보험 같은 거였다. 강백호가 생각할 수 있는 고깃집은 뻔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중 하나를 가고 싶어했다. 처음에 대협은 강백호가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 호열이가 알바하는 데라서, 하고 강백호가 말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가면 호열이 있겠다, 하고 베시시 웃는 강백호를 보는데 스스로가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아, 사실은 내가 미리 예약한 식당이 있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강백호는 예약? 하고 놀란 얼굴로 답했다. 대협은 그 앞에서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쩌지, 하고 소리내서 말하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괜찮아, 백호야. 니가 가고 싶은 데로 가자. 거기는 내가 전화해서 취소할게.]
그러면서 공중전화 어딨지, 하는 소리를 하니 강백호의 얼굴에 고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협은 일부러 더 허둥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백호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거기 사실 우리 집 근처라서 버스 타고 가야 되거든. 멀기도 하고 너 연습 끝나고 피곤할텐데. 내가 맛있는 것만 생각하고 네 생각을 못 했어. 정말 미안.]
그래서 대협은 더없이 난처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러면서 아까 봤는데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공중전화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덧붙였다. 갈등하던 얼굴의 강백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거기다 대고 대협이 내가 정말 미안, 하고 한번 더 말해주니 끝이었다.

“야, 여기는 원래 이렇게 우리 둘만 있냐?”
“어, 그렇네? 아, 배고프다. 우리 빨리 고르자. 자, 여기 메뉴판, 백호야 뭐 먹을래?”
안내받은 2인실로 들어가자 강백호가 조금 어색해하며 물었다. 그래서 대협은 일부러 메뉴판을 주며 신경을 돌렸다. 곧바로 오,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가격이 없는 메뉴판의 고기를 즐겁게 바라보는 강백호를 보면서 대협은 소리없는 콧노래와 함께 컵에 물을 따랐다. 이 곳은 대협의 아버지가 지부 점검차 내려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었다. 가끔씩은 대협을 데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 고기는 정말 다르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댔었다. 입맛이 크게 까다롭지 않고 주는 대로 먹는 편인 대협에게도 좀 다르게 느껴지는 맛이긴 했다.
“야, 윤대협, 진짜 맛있다…”
그리고 그 대단하시다는 고기에 대한 강백호의 반응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끝내주는 맛에 대한 감격을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고 무진장 행복한 얼굴로 눈 앞의 고기를 먹어 치우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는 대협의 입이 귀에 걸려선 내려오지를 않았다. 정말로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서 대협은 열심히 고기를 구워 주며 끝도 없이 추가 주문을 했다. 몇 인분을 시켰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시키곤 냉면에 소면에 된장찌개까지 다 먹어치우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리던 강백호가 먹다 남긴 식은 고기나 몇 점 먹었는데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행복해 대협은 이제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만뒀다. 그리곤 강백호가 화장실 간 사이에 계산까지 마치고 나서는 마지막 반찬 접시들까지 모조리 깨끗하게 비워진 걸 보고 엄청 웃었다.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 싶었다.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진 강백호가 대협에게 잘 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식당 주인에게도 애살맞게 호들갑을 떨며 진짜 맛있었다고 말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걸 보니 그런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식당 밖은 추웠지만 그렇게 나오니 별로 추운 것 같지도 않았다.
“와, 진짜 배부르다!”
그렇게 말하는 강백호의 입김이 하얗게 흩어지는 걸 보며 대협은 그러게, 하고 답했다. 그리곤 좀 걸을까? 하고 말하며 강백호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반대편으로 발을 돌렸다. 그러자 강백호가 그래야 겠다, 안 그러면 배 터지겠다- 이러면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따라왔다. 식당은 바닷가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에 있어서 조금만 걸으면 바닷가였다. 하지만 한겨울의 바닷가를 걸을 생각은 없었다.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종알종알 말하는 강백호의 목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대협은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까페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걷다 보니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눈이 오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강백호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응? 하고 옆을 돌아보니 강백호가 까페의 유리문에 붙은 파르페 사진을 너무나 분명한 욕망이 드러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협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대단한 위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러나 대협은 보고 싶었다. 알록달록 예쁜 모양의 파르페를 행복한 얼굴로 먹는 강백호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졌다. 그래서 말했다.
“백호야, 나 이거 먹고 싶은데. 잠깐 들렸다 갈래?”


들어간 까페에는 3종류의 파르페가 있었다. 각자 하나씩 시켰다가 결국 하나 더 시켰다. 이번에도 대협은 몇 입 안 먹었다. 다 강백호 입으로 들어갔다. 강백호는 모든 음식을 언제 먹든 오늘 처음 먹는 것처럼 먹을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의 초능력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대협은 자기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자리가 좋았다. 어느새 눈송이가 된 진눈깨비가 커다란 창 밖에서 하나씩 떨어져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파르페를 먹는 강백호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가 더없이 달콤했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 들 수 있는 걸까. 대협은 자신이 직접 겪고 느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나 이제 진짜 더 못 먹어.”
기어코 강백호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는 빈 파르페 컵뿐만 아니라 깨끗해진 케이크 접시도 테이블 위에 몇 개 놓여진 후였다. 그래그래 웃으며 답해줬던 대협은 사실 강백호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기는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강백호의 위장에도 한계가 있기는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강백호가 제대로 먹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아까 그 쿠키 먹고 싶던 거 아니었어?”
그래도 대협은 확인 차 파르페를 주문할 때 강백호가 보면서 맛있겠다고 말한 쿠키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강백호가 어울리지 않게 손사례를 치며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지금은 더 못 먹어.”
그러면서 뒤로 몸을 기대는 강백호의 얼굴이 얼마나 보기 좋게 빵실빵실하던지. 그 얼굴에, 그리고 다음에, 라는 말에 가슴이 뿌듯해진 대협은 응, 그래. 하고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그러자 만족스럽다 못해 노곤노곤 풀린 얼굴에 졸려 보이던 강백호가 대협에게 말했다.
“근데 너 그렇게 맛있는 데를 어떻게 아냐? 전에 가봤냐?”
“응? 고깃집 말이야?”
“어, 거기. 난 그런 데는 처음 가봤걸랑.”
“하하, 그랬어?”
“응, 그렇게 둘이서만 있는 방에서 고기 먹은 건 처음이다. 넌 자주 가냐?”
“아니, 아니야. 나도 자주 못 가.”
그리 답하며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에 대협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가를 슬쩍 가렸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아버지 생각을 깊게 할 필요가 없었다. 눈 앞에 강백호가 있는데, 강백호랑 둘이서 이렇게 좋은데.
“사실 거의 안 가. 어차피 혼자서 갈 수 있는 데도 아니고. 나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잖아.”
그래서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강백호를 보았다. 헌데 그렇게 마주한 강백호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대협을 보고선 조금 더 이상해졌다.
“? 왜 그래, 백호야?”
“그, 그… 아니, 아니다. 나 화장실 좀.”
그러고선 후다닥 일어나 가는 뒷모습을 대협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허나 그렇게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강백호의 얼굴은 이상했다. 아까처럼 기쁨에 겨워 행복한, 그 귀여운 얼굴로 돌아가지 않았다. 뭔가 고민하듯이,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입술까지 삐뚜룸하게 만들고선 자꾸만 대협을 힐끔거렸다. 사실 그 얼굴도 그 얼굴대로 귀여워 대협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미소만 지었다. 왜 저럴까나, 생각했지만 사실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노리고 말한 것도 맞았다. 그리고 대협이 예상한 대로 강백호가 움직여주고 있는 것도 맞았다. 이렇게 작은 미끼 하나 던졌다고 저렇게까지 열심히 반응하고 또 생각하는 내 눈 앞의 강백호. 대협의 미간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낚시꾼의 본능으로, 그리고 그 이전의 천성으로 대협은 몹시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저렇게 한다는 걸 처음부터 잘 알았고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협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때로는 무감하게, 때로는 재미있게 바라보곤 했었다. 강백호는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너무 재미있어서, 참을 수도 견딜 수도 없을 만큼 재미있어서 아무도 안 물었는데 혼자 강백호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만큼 재미있었다. 허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 재미는 가슴 속을 깊이깊이 파고드는 가볍지 않은 기쁨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정체모를 아픔으로 바뀌었다. 그것들이 뒤섞여 자꾸만 복잡한 마음으로 강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들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대협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게 된다.
“백호야.”
“엉?”
뭘 그렇게 생각해? 정말 내가 아까 한 말 때문에 내가 혼자서 밥 먹는 모습 같은 거 생각하고 있어? 니 머릿속의 나는 어때? 백호야, 있잖아. 난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사실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지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 이렇게 모르겠는 일이 많은 걸까. 네 얼굴은 이렇게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는데. 근데 백호야, 하지만 난 그래도 니가 계속 날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런 널 계속 볼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 먹었어? 이제 갈까? 막차 놓치겠다”
할 수 없는 말들은 가슴 언저리에만 남겨놓고 대협은 그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강백호는 어어…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머리를 한번 긁고선 일어나는 강백호를 보며, 이상하게도 대협은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 늦었네. 버스 빨리 와야 될 텐데.”
어느새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기며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대협은 그리 말했다. 까페에서 나와서는 아까보다 더 열심히 대협을 훔쳐보느라 말이 없던 강백호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지붕이 있는 벤치가 있어 둘은 나란히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릴 수 있었다. 둘 다 별 말이 없었고 춥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대협은 그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들뜸이 가라앉지 않고 은은하게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만 그럴까? 백호는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강백호 쪽을 돌아보고 빙긋 미소 짓게 된다. 몰래 대협을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강백호를 보고 있으니 약간 놀리고 싶은 나쁜 마음도 들어서 더 그러게 됐다. 그런 대협의 장난 때문에 부끄러워서인지 그냥 추워서인지 볼이 빨갛던 강백호는 그런 대협의 시선을 피하다가 갑자기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곤 뭔가를 각오한 것처럼 등을 펴서 똑바로 앉더니 대협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막차 아직 있는 거 맞냐?”
“어?”
“추운 데서 계속 기다리는데 안 오잖아. 막차 안 끊긴 거 맞냐고.”
그 말에 대협은 손목 시계를 보았다. 그렇진 않았다. 시간 간격이 좀 있는 차편이라서 그런 것뿐이었다. 그래서 한 5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버스 올 거라고 말하려던 찰나, 대협의 시야에 왠지 아까보다 더 빨게진 듯한 강백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런 얼굴로 눈을 부릅 뜬 채 대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강백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뭔가를 느낀 대협은 입을 다물었다. 나 이 표정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혹시, 싶어지자마자 입이 열렸다. 분명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겁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열린 입에서 아주 제멋대로 말이 나왔다.
“백호야, 저기, 막차 끊겼을 수도 있겠다. 내가 시간을 잘못 봤나봐. 미안.”
당연히 성급하게 쏟아진 말에 이상하게 강백호도 어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 그래서 차가 이렇게 안 오는 구만.”
그리곤 뒷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돌린 강백호의 귀도 빨갰다. 머리색과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하지만 추워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진짜 추워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저, 하고 강백호가 먼저 운을 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협은 자기가 먼저 말해버렸다. 저도 모르게 그랬다. 지난번에는 못 했으니까 이런 게 아니고 그냥 튀어나왔다.
“자고 갈래?”
그 말에 강백호가 고개를 획 돌려 대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원래 빨갰던 강백호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빨개지는 걸 대협은 볼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의 얼굴 역시 그렇게 빨개져 있다는 건 알지 못 했다. 자신의 표정도 강백호만큼 이상해져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강백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이런 상황에 눈치없이 버스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삐뚤하게 솟아있던 강백호의 통통한 입술이 우물거리며 열렸다.
“…그래도 되냐?”








원래 20230710 대협백호데이 맞춰서 올리고 싶었는데ㅠㅠ
이렇게 늦게 와서는 날짜도 못 맞춰서 슬프다. 

그래도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우리 모두 대협백호해요!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