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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23:52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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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릴라가 미웠다. 사실 그런 적은 많았다. 고릴라는 북산 모두에게 너희한테는 화날 때가 더 많았다고 했는데 지만 그런 줄 아나. 백호도 그랬다. 맨날 다 보는 앞에서 이 천재님의 머리통을 부술 기세로 꿀밤 때리는 것도 그랬고 뭐만 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망신 줄 때도 그랬고 병원에서 자신에게 헛소리하지 마라고 할 때도 그랬고 그래놓고 지가 삐져서 한동안 병원 안 왔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윈터컵 예선 능남전의 패배 후엔 그 모든 때를 합친 것보다 미웠다. 진짜 꼴도 보기 싫었다. 고릴라랑 관련된 뭐든 눈에 띄기만 하면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일단 한번 생각이 들면 화가 나다가 눈물이 나다가 혼자 난리도 아니었다. 그나마 윈터컵 이후엔 고릴라가 체육관에 안 나와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 고릴라랑 체육관에 같이 있어야 했다면 진짜 돌아버렸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연히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체육관을 계속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농구를 할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다. 체육관에 가야 최대한 오래 농구를 할 수 있었고 어떻게든 농구공을 계속 손에 붙이고 있을 수 있었다. 안 나가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면 꼭 정대만과 소연이가 있었다. 고릴라와 같은 졸업반인 정대만과 고릴라의 동생인,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좋아하는 소연이가 늘 있었다.
[백호 왔냐-]
보통 백호는 아침 7시쯤에 체육관에 도착했다. 그러면 정대만은 항상 먼저 와있었다. 여, 만만쓰- 하고 인사를 하면 이미 땀에 젖은 채로 손을 들었다. 얼굴은 밝았다. 그렇게 밝은 얼굴이라서 다행이라고, 그해 겨울방학 백호는 매일매일 생각했다. 성공률이 높은 3점 슈터라는 사실이 그렇게 컸다. 인터하이 산왕전의 기막힌 활약으로 전국의 주목을 받은 정대만은 윈터컵 지역 예선 탈락이라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학에 스카웃 되었다. 물론 원터컵 지역 예선 때 엄청난 슛 성공률을 보여준 결과이기도 했다. 그 소식이 결정났을 때 백호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는데 다들 그랬다. 농구 계속 할 수 있다고 만세 삼창을 하는 정대만을 보고 모두들 좋아서 웃다가 킁, 하고 코를 삼키는 소리를 냈었다. 특히 송태섭이 큼큼 하는 소리를 내면서 꽤나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싱글벙글 웃던 정대만이 다가가서 그런 송태섭을 꼭 안았었다. 뭐에요, 징그럽게시리,하는 소리가 웅얼거리며 들렸고 그런 송태섭의 등을 달재랑 한나 선배가 다 안다는 듯 도닥였었다. 주장이 된 송태섭이 윈터컵의 결과 때문에 정대만에게 얼마나 큰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정대만은 폼을 유지하고 몸을 키워야 된다며 매일 아침마다 체육관에 나왔다. 백호야 너무 좋았다. 같이 운동하는 것도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는 것도 대학 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전부 다 너무너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만쓰랑 계속 같이 코트 위에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같이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니고 훈련 과정도 완전히 달랐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겨울방학 내내 둘이 농구하다가 같이 밥 먹고 하면서 보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한번씩 고릴라 이야기가 나왔다. 정대만이 나름대로 고릴라 이야기는 안 하려고 애쓰는 걸 백호도 알긴 했다.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얽힌 시간이 얼만데 고릴라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아예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고릴라 이야기가 안 나와도 정대만이 대학 입학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고릴라는 어쩌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게 싫은데, 미운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백호야, 오늘도 일찍 나왔네.]
또 그러고 있다 보면 소연이도 체육관에 나왔다. 매니저 일은 아직 한나 선배가 하는 게 많아서 소연이가 하는 일은 주로 백호의 연습을 봐주고 챙겨주는 거였다. 소연이가 직접 하겠다고 한 일이라 백호는 무척 감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올 필요는 없었는데 소연이는 매일 왔다. 정말 매일 왔다. 둘이 거의 한 팀이 되어 훈련한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대학과 관련된 일 때문에 정대만이 체육관에 오지 않거나 영감님이나 다른 애들이 아예 없는 날이면 둘이서만 종일 체육관에 있기도 했다. 백호에게 그 시간은 아주 컸다. 혼자서 열심히 하는 것과 응원하는 사람이 지켜 봐주는 앞에서 많은 것을 지지받으며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달랐다. 자신의 온갖 못난 모습을 다 알면서도, 다 봤으면서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믿어주는 사람이 땀을 닦아주며 물통을 건네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힘겨운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데이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 시간에 둘이 같이 나가서 뭘 먹거나 시간이 늦어져 소연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다보면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그러던 하루, 소연이를 데려다 주는 길에 둘은 붕어빵을 사서 나눠 먹었다. 너무 설레서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붕어빵을 고이 들기만 한 채로 걷는데 소연이가 말했다.
[백호야, 내일은 뭐할 거야?]
체육관이 수리할 곳이 있다고 이틀 동안 쓸 수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백호는 집 근처에 있는 농구장을 생각했었다. 밖에서 뛰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낮 시간을 잘 맞추면 그럭저럭 할 수는 있었다. 어차피 오래 할 수는 없으니까, 하고 생각하며 속상한 걸 참았다. 그 동안 정리했던 공책들을 한번 더 볼 생각도 했다. 사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준호 선배가 주고 간 비디오에 대한 생각도 하고 있었다. 병원과 재활원에서 백호는 미국 농구 비디오라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이제 마이클 조던이 누구인지 알게 된 백호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기술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런데 비디오 플레이어가 여우 새끼 꺼였다. 국가대표까지 달고는 굳이 그 옷을 보여주러 온 여우 놈에 대한 질투와 짜증은 백호를 유치하게 토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서태웅에 대한 그런 마음이 농구에 대한 마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백호는 자각하지도 못 했고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도 미국에 간다.
산양의 까까중에게 서태웅은 그리 말했었다. 그래서 백호도 미국 갈 거라는 소리를 일단 해놓긴 했지만 당연히 뭘 알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다 아플 때 비디오를 보면서 미국 농구를 알게 된 것이다. 백호 역시 목표를 미국으로 정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도 가야지, 가서 저렇게 멋진 거 해야지. 마이클 조던하고도 붙어야지. 병실 침대에 누워서 그런 생각을 엄청 했었다. 이럴 줄 모르고,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런 생각들을 무진장 해댔다. 그래서 사실 백호는 준호 선배의 비디오도 서태웅의 비디오 플레이어도 애초에 건드리지 조차 못 했다. 자신이 저렇게 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두려움은 백호가 시선도 거기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집에 좀 있다가 점심 때 드리블 연습 마저하러 나가려고.]
[그래? 그럼 오전에는 집에 있는 거야?]
소연이가 왜 그렇게 묻는지 모르고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혹시 고릴라를 마주칠까봐 소연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연이를 배웅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언제나처럼 공책 정리를 하고 꼭두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 날이 더 추워지니까 정대만의 전기 장판이 확실히 도움이 됐다. 등이 뜨뜻한 채로 자니 아픈 것도 확실히 덜 했다. 그렇게 다음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몇 바퀴 뛰고 와서 계란밥 만들어 먹고 나니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백호야, 하고 들린 목소리가 아무리 들어도 소연이라서 좀 당황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고릴라가 있었다. 진짜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나 싶어서 뭐냐고 말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소연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호야, 집에 있었구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숙이니 아래에 있는 소연이 얼굴이 보였다. 소연이였다. 진짜 소연이.
[소, 소연아, 웬일로.]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일단 고릴라를 안 쳐다보려고 소연이만 보며 말했다. 근데 고릴라가 너무 큰 데다가 정말 눈높이에 딱 맞게 있어서 안 보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소연이를 보다가도 자꾸 힐끔거리게 됐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눈이 마주쳐서 이게 뭔가 싶었다.
[백호야, 우리가 반찬 좀 해왔어.]
좀 먹어볼래? 하고 말하면서 큼직한 통을 몇 개나 들고 있는 소연이를 계속 현관에 세워 둘 수가 없었다. 뒤에 고릴라는 더 많이 들고 있었다. 무슨 자루 같은 것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소연이한테만 들어오라고 작게 말했는데 고릴라도 자기 마음대로 소연이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곤 들고 온 자루를 쌀통 밑에 놓고는 자기 집인 것 마냥 냉장고를 열더니 소연이랑 같이 들고 온 통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작은 냉장고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그러고선 침묵하던 고릴라와 자신 사이에서 소연이가 반찬이 무엇인지, 어떻게 먹으면 되는지 말해줬다. 백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했지만 사실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당연히 고릴라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눈이 안 봐도 느껴졌다. 말도 못 하게 신경 쓰였다.
[백호야, 맛있게 먹고 다음에 맛 어땠는지 꼭 말해줘. 우리가 맛있었던 걸로 다시 해줄게.]
결국 그 말이 나올 때까지 그랬다. 그렇게 중간 말은 다 놓치고 마지막 말 하나만 똑바로 들은 백호가 티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연이를 향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소연아. 고마워.]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백호는 뭐든 잘 먹지만, 그리고 사실 방학 내내 정대만이 매일 점심이고 저녁이고 사주는 데다가 호열이랑도 종종 나가서 맛난 걸 먹지만 집에서 먹는 건 정해져 있었다. 아프기 전에는 지겹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아프고 나니까 살짝 그랬다. 병원이랑 재활원에서 먹었던 다양하고 풍족한 음식들을 생각하게 되는 날들이 조금씩 늘어났고 계란이랑 햄으로 만든 음식들이 예전만큼 맛있지 않았다. 그런 백호에게 냉장고를 가득 채운 다양한 반찬들은 유혹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고릴라와 소연이가 떠난 후, 농구공을 끌어안고 웅크려 앉은 백호는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냉장고를 쳐다만 보다가 배가 고파지자 그 반찬통을 다 꺼내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전부 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였다. 
- 우리가 반찬 좀 해왔어.
소연이는 그리 말했다. 그러면 고릴라랑 같이 했다는 소리일까? 고릴라가 한 건가? 젓가락도 없이 손을 뻗어 몇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화가 날 정도로 맛있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백호는 소연이가 요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다. 하지만 머리 속에 떠오른 건 요리하는 고릴라의 모습 뿐이었다. 평소의 고릴라처럼 소리를 질러대며 야단스럽게 하는 모습도 아니고 진지하게 열심히 요리하는 고릴라의 모습 뿐이었다. 이 모양인 자신과 농구하면 질까봐 송곳 같은 말을 쏟아내놓고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져버린 한심한 고릴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하는 모습밖에 안 떠올랐다. …짜증나게시리.
[…안 먹어.]
백호는 반찬통의 뚜껑을 다시 모조리 닫아버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니 소연이의 얼굴과 고릴라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전부 다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일단 눈에 안 보이면 안 먹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냉동실을 열어 라면을 꺼냈다. 예전에 용팔이가 라면은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짧으니 빨리 먹어야 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유통기한이 뭐냐고 묻자 호열이가 빨리 상하니까 빨리 먹으면 된다는 뜻이라고 하길래 일단 오래 먹어야 되는 라면을 냉동실에 넣어 놓았었다. 그렇게 먹으니 왠지 좀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 점심은 라면이었다. 저녁도 라면이었다. 냉장실을 열면 반찬통이 보여서 열지도 못 했다. 
 그날 밤 또다시 잘 자지 못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어째 그날 밤엔 농구 생각도 잘 못 했다. 재수없는 고릴라 생각만 계속 하다가 간신히 잠들어서는 재활원에 있을 때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백호는 등이 완전히 낫지 못해 엉성한 걸음걸이로 어기적어기적 노을 진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보드라운 파도가 보슬거리는 모래사장을 걷는 맨발을 따스하게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걷다가 멈춰서니 발가락이 하얀 모래 속에 잠겼다. 그걸 좀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드니 눈 앞에 분홍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반짝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머리 속의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호야, 하고 더없이 다정하게 자신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 한편에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누구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백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
깨어난 백호는 새벽의 한기를 느끼며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몸이 시키는 어떤 충동이 있었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백호는 세수를 하고 바로 집을 나섰다. 재활원이 있는 바닷가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가는 길에 발이 시리다는 생각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렇게 2시간 조금 안 되게 걸었던 것 같다. 도착하니 날이 맑아 청명한 푸른 하늘 아래 짙은 파랑의 바다가 백호를 맞이했다. 꿈 속의 풍경과는 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서, 또 예뻐서 백호는 몇 달 전을 생각하면서 긴 해변을 쭉 따라 걸었다. 그리고 방파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파도치는 겨울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얼마나 봤는지도 몰랐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저 끝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아득하다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꿈에서와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강백호?]
나 지금 계속 꿈꾸고 있는 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윤대협?]
삐죽 솟은 머리에 낚시대, 딱 자신만큼 놀란 듯한 얼굴엔 언제나처럼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꿈처럼, 뭔가 조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자신마저 감싸오는 것 같아 백호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많은 일이 있었던 윤대협과의 하루가 지난 후, 현관문에 생선이 걸리기 시작했다. 매일 걸렸다. 매일 아침 까만 비닐봉지 안에 꿈틀거리는 생선을 보고 피식 웃던 백호는 속 모를 윤대협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더 크게 미소 짓곤 했다. 하여간 특이한 놈이었다. 영감 같은 낚시 취미도 그렇고 이 웃긴 생선 배달도 그렇고. 주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고 약간의 도전 의식도 생겨서 그날부터 백호는 아침마다 생선을 구워먹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까 늘어서 나중엔 꽤 먹을 만 했다. 체육관도 다시 나가 정대만이랑 밥 먹다 보니 집에 와서 냉장고 안에 있는 반찬을 먹을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계속 신경은 쓰였다. 윤대협 핑계로 먹을 만큼 먹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 남은 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 언제까지 저렇게 놔둘 수 있을까. 계속 놔두면 상할까? 그러면 버려야 되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면 그냥 머리가 멈췄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진짜로 버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가슴 깊은 곳이 쑤셔왔다. 그치만 정말 더 먹을 수가 없는데, 도저히 못 먹겠는데, 냉장고 문도 못 열겠는데… 아무 결론도 못 내리고 어영부영 지나가던 어느 날, 연습 끝나고 소연이가 물었다.
[백호야, 반찬들은 먹을 만해? 이제 얼마 안 남았지?]
그 말을 듣는데 너무 당황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어,어어, 하는 소리만 냈는데 그걸 대답으로 알아들은 소연이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당황했다. 그리고 순간 백호는 이 뒤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다시 반찬통을 들고 자신의 집 앞에 서있는 소연이와 고릴라의 모습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소연이도 고릴라도 그러고도 남았다. 얼굴이 굳었다. 소연이가 옆에 있는데도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싫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정말로 진지하게 그리 말하고 싶었다. 허나 어떻게 말해야 될 지 알 수가 없었다. 냉장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고, 고릴라가 했다고 생각하니 손을 댈 수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소연이 얼굴을 보고 직접 하는 건, 백호에겐 그냥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온갖 생각을 다 했다. 편지를 써야 하나? 소연이에게? 아니면 고릴라에게? 쓰면 도대체 뭐라고 써야 되나? 집에 와서 이리저리 연필을 굴려봤지만 구겨져 버린 종이만 쌓였고 글로 쓰니 그게 뭐든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계속 생각해서 그런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금 빨리 말 안 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소연이와 고릴라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못해 몸을 충동질해 백호는 결국 9시가 넘어서 동전을 들고 공중 전화로 뛰쳐나가 전화를 했다. 뚜루루 울리는 신호음을 듣는 순간 아차, 고릴라가 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동전도 얼마 없어서 고릴라가 받아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백호는 수화기를 꽉 잡았다. 천만다행으로 소연이가 받았다. -백호야? 웬일이야? 하고 묻는 밝은 목소리에 너무 안심이 돼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서 백호는 일단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먹은 음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말했다. 한참을 그리 말하고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나서야 본론을 말할 수 있었다.
[근데, 근데 소연아, 이제 안 해줘도 괜찮아. 나도 요리 잘 하거든. 요리도 천재라서 내가 잘 해먹어. 괜찮아.]
일부러 다다닥 붙여서 말했다. 중간에 소연이가 말을 하면 끼어들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이어지는 백호의 말을 들은 소연이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하고 말을 해보려는 소연이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백호는 괜찮다는 말을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했다. 소연이도 똑같이 자기들도 괜찮다고 말하는데다 대고 나도 괜찮다고 끝까지 말했다. 그리곤 소연이도 조금 지친 듯 말을 꺼내지 못할 때쯤 되어서야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고릴라한테도 고맙다고 꼭 전해줘. 진짜 맛있게 잘 먹었다고, 그럼 소연아, 잘 자!]
재빨리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둘러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니 숨이 찼다.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다가 상체를 일으키니 한숨마저 나왔다. 그래도 말했다. 어떻게든 말해서 다행이었다. 소연이가 속상해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아지고 고릴라 이야기는 괜히 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이었다. …젠장, 그러니까 고릴라가 왜 와서는, 짜증나는 고릴라, 미운 고릴라. 생각하니까 또 싫어져서 백호는 길거리에서 고함이나 한번 지르고 겨울 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얼른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며칠 후 일요일 아침, 체육관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백호, 나다.]
코로 들어도 고릴라 목소리였다. 놀라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있는데 들어간다-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서 후다닥 달려가야 했다. 붙잡고 버텨야 했다. 그러니 고릴라가 뭐 하나며 빨리 문을 열라는 소리를 해댔다. 황당함이 분노로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땐 그랬다. 고릴라가 어떤 버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누르면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간신히 묻어뒀던 생각과 분함이 밀려와 머리가 터지게 되는 버튼 말이다. 나한테 그래놓고, 그딴 식으로 말해 놓고, 왜 온 거야? 온다는 말도 없이 왜? 그런 생각만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다. 절대로 열어 줄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니 밖에서도 만만치 않은 힘으로 문을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이 고릴라가 지만 소리 지를 줄 아는 줄 아나 싶어서 백호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현관문이 부서질 듯 삐걱거려도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순간 손에 땀이 차 미끌한 찰나가 있었다. 으악, 하고 재빨리 다시 잡았으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교활한 고릴라가 문을 확 열어버렸다. 거기에 떠밀려서 현관에 넘어졌는데 문고리를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바닥에 찧은 엉덩이보다 손바닥이 더 아팠다. 딱 문짝만 하던 고릴라는 그런 백호를 보더니 가증스럽게도 넘어졌니 괜찮니 등은 어떠니 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그 손을 쳐내고 일어나는데 엉덩이 쪽도 안 아픈 건 아니었다. 멍드는 거 아냐,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고릴라가 진짜 미친 건지 한번 보자는 개소리까지 해대길래 어이가 없어서 변태냐고 한 마디 해줬다. 하지만 염치없는 고릴라는 뭐라 대답도 안 하고 자기 마음대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뭘 또 한가득 들고서였다. 모양도 크기도 지난 번과 정말 비슷했다. 그걸 보니까 진짜로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허나 백호가 아무리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고 소리를 질러도 고릴라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방 안 쪽까지 마구잡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이불까지 들춰보고 집 안을 막 살피더니 냉장고까지 열어 재꼈다. 거기에 너무 놀라 달려들어선 거의 육탄전을 했다. 근데 힘이 딸렸다. 고릴라가 무식하게 셌다. 어떻게든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닫기는 커녕 고릴라가 반찬통 꺼내서 확인하는 것도 막지 못 했다. 그리고 새로 가져온 걸 채워넣는 것도 못 막았다. 힘으로 안 되니 고함 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필요없다고, 싫다고, 꺼지라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계속 고릴라를 끌어내려 하니 미친듯이 서러워졌다. 고릴라 앞에서 또 눈물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분통이 터지니 눈물이 아주 주륵주륵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멋대로 굴면서 저리 가서 앉아 있으라는 개소리까지 하곤 탕 소리가 나게 냉장고 문을 닫은 고릴라와 마주 섰을 때는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주체가 안 됐다. 발을 쾅쾅 굴리며 팔을 휘젓게 됐다.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왜 그렇게 제멋대로 내 말 다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냐고, 왜, 왜! 필요없다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했는데!
백호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깨닫지 못 했다. 어디까지 말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중간에 소연이 얘기도 한 것 같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았다. 눈 앞의 고릴라가 자신의 말에 한 마디도 못 하고 주춤대며 보고만 있으니 자기가 뭐라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지껄이게 됐다. 하고 싶은 대로 막 말하게 됐다. 그러다 갑자기 처들어온 옆옆집 아저씨 때문에 멈추게 되자 딸꾹질이 났다. 가슴팍이 아프고 숨이 차서 히끅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으니 고릴라가 쾅 소리만 나고 제대로 안 닫긴 문을 닫으러 갔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자꾸 흐려져 커다란 고릴라의 등이 흐리멍텅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현관문을 조심히 닫는 뒷모습이 순간 아는 뒷모습와 겹쳐 보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오래 전 기억 속의 뒷모습과 지나치게 닮아 보였다. 숨이 턱 막혔다. 여전하던 딸꾹질을 멈추지도 못한 백호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고릴라가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릴라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뒤로 흠칫거리며 물러났다.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고릴라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걸음 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릴라였다. 아빠가 아니었다. 고릴라다, 고릴라야.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 딸꾹질이 계속 나왔다.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릴라가 자신을 불렀다.
[강백호.]
그리고 말했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목소리에도 아빠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백호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켜졌다.
[내가 미안하다.]
그 말에 백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떤 말도 하지 못 했다. 처음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되지 않았다. 튀어나올 듯이 떠진 눈으로 울면서 사과하는 고릴라를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희미하게 겹쳐지는 아빠의 환상을 함께 보았다. 바보처럼 더듬거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는 고릴라에게서 걷히지 않는 아빠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뭐가?
걱정돼서 그랬다고, 자기가 미안하다고, 아무 말도 못하는 백호를 앞에 두고 고릴라는 열 번도 넘게 그리 말했다. 그런 고릴라를 앞에 두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넋이 나간 백호의 머리 속은 삐그덕거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뭐가 미안한데? 
고릴라가, 그리고 아빠가 뭐가 미안한데?
뭐가 미안해서 그렇게 울면서까지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아까까지 다 고릴라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다 고릴라 탓이라고 화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고릴라가, 아빠가 사과할 게 뭔데, 뭘 잘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둑이 터진 것 마냥 쏟아졌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릴라가 아닌 다른 것들에게, 훨씬 크고 오래되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던 것들에게 가슴 속 저 아래에서부터 용암처럼 화가 치솟아 올라왔다. 자신이 학교 들어가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빠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상황이 생각났다. 자신의 머리색을 놀리고 화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많은 슬픔과 억울함과 분함이 생각났다. 그리고 기어코 마지막엔 이렇게 된 자신의 몸뚱아리가 생각났다.
[…뭔 소리야, 고릴라.]
화가 났다. 이 끔찍한 세상에 화가 났다. 이 세상이 미웠다. 모든 것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거야? 근데, 그런데 왜 또 그걸 고릴라가 사과하고 있는 건데? 고릴라가 뭘 잘못 했다고?
[미안, 미안하다, 강백호.]
[그만 해.]
[…미,]
[그만 하라고!]
손이 그냥 나갔다. 왜 고릴라 니가 사과하냐고. 그럴 게 아닌데. 그러면 안 되는데. 거칠게 멱살을 잡았다가 가까워진 고릴라의 얼굴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손을 놓는다. 눈물이 가득한 고릴라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들어가 있는 스스로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고릴라가 미웠다. 고릴라를 미워할 수조차 없게 해버리는 고릴라가 끔찍하게 미웠다. 이 더럽고 비열한 세상이 해야 할 사과를 대신 해주고 있는 바보 같은 고릴라가 너무너무 미웠다.
[…이 고릴라가 진짜…]
주먹이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뻗은 주먹은 힘도 없고 방향도 엉망이었다. 머저리같이 휘두르기만 하는 주먹에 고릴라는 몇 대 맞고서도 가만히만 있었다. 다 맞아주고 있었다. 진짜 병신 같았다. 그러니까 농구도 그 모양이지. 그러니까 지지. 그러니까 졌지…
[결국 나 없어서 졌잖아. 나 없어서, 그 능남 경기, 마지막 경기였는데 지고 그렇게 끝났잖아.]
자신이 하는 말은 턱없는 소리인 걸까. 좀 폼나게 말하려고 했는데 눈물콧물이 섞여 형편없었다. 이 몸이 없어서 진 거라고, 고릴라 주제를 알아야지, 하고 더 말하려 했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강백호, 하고 고릴라가 자신을 부르자 완전히 딴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경기가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제 다시는 못 하는데, 함께 골 밑에 서서 서로를 지켜주지 못 하는데.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뛸 수가 없는데. 우리에게 그 시간이, 더 이상은.
[고릴라 나랑 같이 뛸 수 있는 마지막 경기였는데…]
자신이 코트에 발을 얹기도 전부터 자신의 코트 위엔 언제나 고릴라가 있었다. 사실 백호는 고릴라가 없는 코트 위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고릴라는 그냥 당연했다. 그런 거였다. 뭐가 되든 안 되든 쪼르르 달려가면 됐다. 손을 뻗으면 닿았다. 계속 그래야 했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지 백호는 감도 안 잡혔다. 너무 막막했다. 그런데, 근데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화만 냈으면서, 그렇게 못됐게 말했으면서, 왜 안아주는 건데. 왜 이렇게 꼭 안아주고 등도 토닥여주는 건데. 손도 벌벌 떨면서. 왜 끝까지 감싸주는 건데. 그러니까 눈물이 안 멈추잖아. 자꾸 울게 되잖아. 그 동안 말 안 하려고 했던 것까지 다 말하게 되잖아. 아빠한테나 했던 말인데 이렇게 해버리게 되잖아…
[고릴라, 나 이제 어떡해. 이제 예전처럼 점프 못 하면 어떡해, 빨리 못 뛰면 어떡해, 계속 이러면 나 어떡해, 나 어떻게 해야 돼,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




​​​​​​[자, 여기 코 풀어라.]
고릴라가 내민 휴지에 킁, 하고 코를 푸니 휴지가 엄청 축축해졌다. 고릴라는 그걸 구겨놓더니 다른 휴지를 꺼내서 백호의 코 밑을 한번 더 닦아주었다. 백호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런 고릴라를 보기만 했다. 뭐 할 말도 없고 너무 울어서 기운도 없었다. 근데 고릴라 눈도 만만찮게 부어 있었다. 엄청 웃긴 얼굴이라고 백호는 그 기운없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그래서 고릴라가 마지막 휴지를 휴지통을 넣을 때 픽 하고 작게 웃었다. 고릴라가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이 녀석이, 하면서 돌아보는데 이히히, 하고 조금 더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릴라도 따라 웃더니 배고프네,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백호는 시계를 봤다. 점심 먹을 시간이긴 했다.
[고릴라, 점심 먹고 가.]
어차피 반찬도 밥도 많다고, 턱으로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고릴라가 그러마. 하고 대답하고는 백호의 머리를 북북북 소리가 나게 긁었다. 원래 고릴라는 힘조절을 잘 못해서 그러면 좀 아팠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는 안 그랬다. 평소랑 똑같이 백호의 머리를 긁어 대는데 하나도 안 아팠다. 왜 그럴까 생각하며 백호는 고릴라와 같이 상을 차리고 가져온 반찬통에서 골고루 꺼내 접시에 담았다. 원래는 그리 안 하고 반찬통 째로 꺼내 먹는데 그 날은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나름 상을 제대로 차려서 먹는데 막상 고릴라는 별로 안 먹었다. 조금 먹다가 백호가 먹는 걸 지켜보는 이상한 짓거리만 반복하길래 그만 쳐다보고 먹으라고 하니까 알았다고 말만 하곤 계속 그랬다. 그래서 또 백호만 실컷 먹었다. 다 먹고 접시까지 치우고 나니 고릴라가 냉장고에 있던 다른 반찬통 하나를 가져와서 열었다. 예쁘게 깎인 과일이 담겨져 있었다. 백호가 오, 하니까 먹자, 하고 고릴라가 답했다. 달달한 과일을 오물오물 먹으며 백호는 그 동안 정말정말 궁금했지만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수 없었던 걸 물었다.
[고릴라 대학 어디가?]
[A대.]
[거기가 어딘데?]
그 말에 고릴라는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 도시 이름을 말했다. 그래서 백호는 순간 입 안에 있던 과일을 흘릴 뻔 했다. 뭐? 그렇게 멀리 간다고?
[그렇게 멀지는 않으니 걱정마라.]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나왔던 건지 고릴라는 그리 답했다. 백호는 갑자기 과일이 맛없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입 안에 있는 걸 대강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럼 집에서 다닐 거야?]
그렇게 먼 게 아니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제 대학생이니까 차 타고 다닐 수도 있고. 운전하는 고릴라의 모습을 상상한 백호는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고릴라는 백호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나는 답변을 내놓았다.
[기숙사로 들어간다. 신청해놨어.]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과 입술이 찌그러져선 고릴라를 바라보자 고릴라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얼굴을 펴질 못하는 자신을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쉬는 걸 정면에서 마주보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아까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가가 다시 축축해져 백호는 이제 짜증이 났다.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하고 커다란 손을 쳐내고 싶을 정도였다.
[자주 오마.]
근데 거기다 대고 얍삽한 고릴라는 그리 말했다. 백호가 뭐라 대답도 못하고 씩씩대기 시작하자 진짜 자주 올게, 약속하마. 하고 몇 번을 더 말했다. 전혀 고릴라답지 않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더 짜증났다.
[오든지 말든지 내가 뭔 상관이야.]
말은 그리 나오는데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엎드려 양팔 사이에 얼굴을 숨긴 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릴라가 그런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눈물이라도 멎어야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한참을 그러다가 울음이 멈추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고릴라가 그런 백호를 보고 힘없이 한번 웃더니 휴지로 볼을 닦아주며 말했다.
[소연이가 그러는데 너 요즘 뭐 쓴다며.]
[엉.]
[어디 한번 보자.]
[…뻔뻔하네 고릴라, 천재의 농구 노트가 탐나냐?]
[아이고, 그래, 그래.]
그 말에 백호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그 동안 자신이 정리한 공책들을 가져와 코타츠 위에 올려놓았다. 고릴라는 그 공책 중 하나를 골라 몇 장 넘기더니 피식피식 웃으며 백호를 보았다. 뭔가 감탄한다기보다는 웃기다는 느낌이라서 인상 쓰며 왜? 하니까 아니다, 하고는 계속 보는 고릴라의 옆 얼굴을 백호는 물끄러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릴라가 멈춘 부분이 있었다. 왜 그러나 하고 내려다보니 고릴라 욕이 잔뜩 적혀 있었다. 당황한 백호가 공책을 덮으려 하자 그 손길을 막은 고릴라가 흠, 하고 콧바람을 뿜으며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망해진 백호가 눈길을 피하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그 말에 백호는 입술을 아주 꽉 깨물어야 했다. 고개를 돌리고 눈가를 한번 닦은 다음에 둘이 마저 함께 백호의 공책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고릴라가 중간중간 뭔가를 가리키며 물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백호가 답해주고 어떤 때는 백호가 먼저 여기는, 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고도 공책 한 권도 다 보지 못 했는데 해가 졌다. 겨울이라 낮이 짧았다. 백호는 배가 고파지는 걸 느꼈다.
[저녁은 뭐 먹을까.]
생각의 흐름대로 꺼낸 말이었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들을 생각하며 꺼낸 말이기도 했다. 고릴라랑 자신이 같이 먹을 만큼 밥이 남았나 생각하다가 윤대협이 주고 간 생선을 냉동실에 넣어 놓은 게 떠올랐다. 구워서 고릴라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고릴라한테도 맛있는 거 해주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고릴라가 아, 하더니 시계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백호는 어라? 하며 일단 따라 일어났다. 그리곤 그런 자신을 보고 고릴라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강백호. 오늘 아버지가 출장에서 돌아오셔서,]
고릴라가 머뭇대다 어렵게 꺼낸 말에 백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바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갑자기 가슴 속이 텅 비는 것 같으면서 배가 안 고파졌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고릴라 얼굴만 쳐다볼 수도 없다는 걸, 백호도 알았다. 소연이 얼굴이 떠올랐다. 재시험 합숙 때 뵀던 고릴라네 부모님 얼굴도 떠올랐다. 고릴라네 가족들 얼굴이 다 떠올랐다. 고릴라가 그 가족들과 같이 행복하게 저녁을 먹는 모습도 아주 잘도 떠올랐다. 그랬다. 고릴라에게는 그렇게 저녁을 같이 먹는 가족이 있었다. 자신과 달랐다. 아빠한테만 했던 말을 고릴라한테도 했다고 고릴라가 아빠가 되는 건 아니었다.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다.
[…엉, 그래. 알았어.]
그래서 백호는 고무줄 바지 속에 양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쩐지 고릴라 얼굴을 똑바로 보고 답할 수가 없었다. 고릴라도 무슨 말을 못 하고 서 있다가 백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녁 제대로 챙겨 먹어라.]
백호는 대답없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래야 빨리 좋아지지.]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 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고릴라를 바라보았다. 
[우린 니가 필요해.]
정말? 백호는 되묻고 싶었다. 근데 말이 안 나왔다. 되물은 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술만 삐죽이며 겨우, 겨우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고릴라를 배웅한다는 핑계로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갔다. 가는 길에 고릴라는 다음에는 꼭 저녁 같이 먹자, 하고 말했다. 그런 말 들으니까 뭐래 싶으면서도 사실 좀 좋았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고릴라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버스 정류장에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집이 이상하게 휑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할 게 없었다. 아까 고릴라랑 공책 좀 봤다고 오늘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농구도 안 해서 정리할 것도 없었다. 호열이한테 전화할까, 했다가 호열이가 무슨 내 대기조도 아니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에이, 아니다, 하고 도로 누우니 다시 일어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배가 고픈데 뭐가 먹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구나.

멍하니 누워 오랜만에 그 생각을 했다. 아빠가 하늘나라 가고 장례식할 때 하던 생각이었는데 한동안 좀 까먹고 있었다. 호열이랑 대남이랑 구식이랑 용팔이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농구가, 농구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농구를 시작하면서 종종 체육관이나 합숙하는 데서 잘 때가 있었는데 사실 백호는 그때마다 좋았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병원이랑 재활원에 있었을 때도 아픈 거랑 농구 걱정하는 거 빼고는 좋았었다. 맨날 맛있는 거 사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을 살펴봐주는 병원과 재활원 사람들이 정말정말 좋았었다. 이렇게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건 좀 별로였다. 외로우면 아빠랑 할머니 사진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진 보고 혼자서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아빠, 고릴라 멀리 있는 학교 간데. 이제 진짜 가버리는 건가봐… 나 이제 고릴라 없이 농구해야 돼. …어떻게 농구하지? 안 그래도 지금 잘 안 되는데 진짜 고릴라도 없으면 어떡해야 되지? 하… 이 천재님 진짜 어떡하냐…]
그렇게 아빠 사진을 향해 모로 누워서 얼마나 웅얼거렸을까. 백호는 시간이 얼만큼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을 때 벌떡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혹시 고릴라가 뭘 놔두고 가다 돌아왔나,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했다. 고릴라가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는 걸 인식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달려나간 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벌컥 문을 열고 외친 말도 그랬다.
[다시 온 거야? 고릴-]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채, 당장 눈에 들어 온 건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또렷하게 하얀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쳐진, 뭔가 머리가 좀 흐트러져 있던 윤대협이었다. 갑자기 뛰쳐나온 백호를 보고 엄청나게 놀란 듯 눈을 쟁반만하게 뜬 윤대협이 현관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당연히 백호도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윤대협?]
윤대협이 이 시간에 웬 일이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의외의 인물 등장에 백호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데 윤대협도 그랬다. 평소에는 입에 뭐라도 바른 것처럼 잘만 말하던 녀석이 본 적 없는 얼굴로 어버버거리며 저랑 같이 눈만 껌뻑거렸다. 답지 않게 약간 멍청해보일 정도였다. 왜 저래? 싶어서 살펴보니 또 빈 손이라 뭐야? 이 시간까지 낚시하다 망했나? 하고 백호는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오늘은 물고기 없네.]
그래서 말했더니 또 어어, 그게, 이러는데 그 어두운 와중에도 윤대협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부끄러운가? 뭐 그런 것 가지고? 소심하게시리.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 이 몸께서 특별히 용서해주마.]
요근래의 일로 윤대협에게 인심이 후해진 백호는 씩씩하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헤헷 웃었다. 사실은, 그냥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누가 왔다는 것 자체가 좋았었다.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지면서 갑자기 배도 다시 고파지는 것 같았었다. 윤대협이 주고 간, 냉동실에 있는 생선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백호는 똑바로 말도 못 하면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은 거두지 않는 윤대협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저녁은 먹었냐, 윤대협?]
그 말이 상태가 이상한 윤대협과의 기묘한 밤을 시작하는 말이 될 거란 걸, 백호도 대협도 당연히 몰랐다. 백호는 그냥 윤대협이 저녁을 안 먹었다고 하니 잘 됐다 싶었다. 이 시간까지 저녁을 안 먹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같은 건 전혀 못 하고 그러면 먹고 가라고 냉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윤대협이 어딘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는 걸 대수롭게 않게 본 백호는 바로 생선을 꺼냈다. 오늘은 진짜 맛있게 해줄 수 있었다. 자신 있었다. 게다가 고릴라가 주고 간 반찬들도 있었고. 화장실 간 윤대협을 뒤로 하고 백호는 룰루랄라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잘 되었다. 환상적으로 구워진 생선을 보고 오예, 하고 뒤집으며 오늘 기대하라고 말했을 때는 윤대협 배에서 거대한 꼬르륵 소리가 나서 빵 터졌다. 자기가 오늘 바빠서 이런다는 소리를 얼굴이 시뻘게져서 해대는 윤대협을 보는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오냐, 하고 오늘 맛있을 테니 많이 먹으라고 해주니 쪽팔렸는지 고개를 숙이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윤대협의 모습을 보면서는 처음으로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윤대협이 늘 다정하기는 했지만 맨날 혼자 뭐 다 아는 것처럼 속 모르게 싱글대는 꼴에 자기만 당황하는 것 같아 좀 그랬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신선하기도 하고 마음도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날의 윤대협은 뭔가 좀 달랐다. 자, 봐라! 하고 끝내주게 구워진 생선을 내려놓으니 솔직하게 놀라는 표정이나 맛을 보고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같은 게 다른 때와 확실히 달랐다. 엄청 형처럼, 어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밥 먹고 뒹굴거리면서 이야기하니까 더 그랬다. 언제나처럼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얼굴도, 보다 투명하게 느껴지던 까만 눈동자도 그랬다. 만만쓰나 섭섭쓰처럼 느껴지지는 않아도 그 비슷하게는 보였다. 그러다 오늘 진짜 맛있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숙이며 웃으니 머리 위로 손이 올라왔었다. 그리곤 고릴라가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쓰다듬는데, 그 손길 또한 좀 달랐다. 사실 그건 그 누구와도 달랐다. 해남전 때문에 머리를 밀고 난 후 백호의 머리를 만져대는 사람은 정말 많았었다. 다들 뭔가 재미있어 하면서 복복 문질러댔다. 심지어 귀엽다고 말해주던 소연이마저 그랬다. 하지만 윤대협은 그렇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백호는 물었더랬다.
[…뭐하냐, 윤대협?]
[그냥, 고마워서, 맛있는 거 해줘서 고마워서.]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드는 긴 손가락도,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분명히 윤대협도 농구하는 녀석인데 손끝의 거친 부분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선가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만을 보드랍게 간질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닿인 곳부터 녹아내리는 듯 녹진한 느낌에 조금은 몽롱한 기분마저 들어, 올려다 본 곳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대협의 얼굴이 있었다. 조명을 등지고 있어 살짝 어두워진 얼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반듯했고 빛이 비치지 않는 짙고 검은 눈동자 안에는 자신의 모습만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어쩐지 홀린 듯 바라보게 되는 얼굴에 잠깐 오싹해진 이상한 순간도 있었지만 묘하게도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헌데 계속 그러고 있으니 왠지 목이 말라와 침을 한번 삼키자 그 순간 머리카락 속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아쉬웠다. 왜 그만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노려보니 눈을 몇 번 깜빡인 윤대협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백호가 몸을 일으켰다. 대협의 맞은 편에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돌아선 윤대협을 향해 말했다.
[나도 만져볼래.]
사실 백호는 이미 윤대협의 머리를 만져본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났던 능남 연습경기 때였다. 그땐 그냥 신기해서 저절로 손이 나갔었다. 하지만 시합 중이었고 윤대협이 슬그머니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바람에 제대로 건드렸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이번엔 달랐다. 별로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윤대협은 피하지 않고 백호가 실컷 만지게 내버려두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딱딱하니 정말 신기한 머리였다. 손바닥의 따끔따끔한 느낌에 뭘 어떻게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머리를 안 올린 윤대협은 어떨까, 하는 곳까지 생각이 미쳤다. 한 번 보고 싶었다. 진짜 머리카락도 딱딱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윤대협이 말하는 걸 보니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저 머리를 하는 것 같았다. 섭섭쓰처럼 자기 머리 스타일에 집착하는 타입인가 보다, 생각하며 손바닥의 느낌을 되새겨 보고 있는데 연습은 좀 하냐고 묻던 윤대협이 뜬금없이 고릴라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좀 당황스러웠다. 안 들은 줄 알았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입가가 어색하게 굳었다. 어떻게 말해야 되지, 싶어서 잠시 머리도 굳었지만 곧 백호의 머리 속에 살고 있던 조그마한 천재 강백호가 말했다.
뭘 어떻게 말하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 거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원래 그랬던 건데. 
그랬다. 그게 정답이었다. 그래서 백호는 숨을 한번 탁 털어내고 말했다.
[…고릴라도 집에 가야지. 소연이랑 엄마 아빠랑 다 기다리고 있는데. 저녁 자기 집에서 먹어야지.]
그렇지만 목소리가 떨리거나 하면 좀 그러니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기 위해 약간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역시 천재라서 성공했다. 말하는 동안 가슴이 살짝 욱씬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심한 건 아니었다. 사실이다. 사실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스스로에게 되뇌며 으쌰, 하고 몸을 일으키니 윤대협이 다시 연습은 어떻게 하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농구 이야기가 고릴라 이야기보다는 백배 편해 바로 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이벌인데, 봄부터 다시 붙을 상대인데 다 말해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가 많이 궁금했던지 부끄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쳐다보며 보채는 윤대협에게 흔들리지 않기가 힘들었다. 물러설 기미가 없던 집요한 눈동자에 소연이를 떠올리게 하는 눈웃음마저 따라오자 망설임 끝에 결국 영감님이 짜준 훈련에 대해 말하게 됐다. 그래도 처음엔 좀 조심하면서 숨길 거 숨기면서 말했는데 말하다 보니까 그게 안 됐다. 자신이 하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듣고 있는 윤대협이랑 있으니 그게 되질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았다. 농구를 하는 것만큼은 아닐 지라도 농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 역시 언제나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백호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농구와 연결시켜 몇날 며칠이고 이야기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껏 농구 이야기를 할 기회도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농구부와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았고 호열이들은 잘 들어준다고 해도 직접 농구를 하지 않다보니 어떤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대협과의 시간은 특별했다. 같은 농구 선수랑 농구에 대해 온전히 말하는 시간을 가지는 건 정말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그때그때 정확하게 이해하고 호응해주는, 지나치게 완벽한 이야기 상대를 만나버린 백호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다 말하고 있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다 꺼내놓고 있었다. 자신의 훈련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자신의 농구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어 밑도 끝도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중간에 윤대협이 난데없이 소연이 가지고 이상한 반응을 보여서 약간 어색했을 때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선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든 윤대협에게 백호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다.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백호는 그렇게 많이 말해본 적도 평생 처음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얼마나 말한 건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말한 건지 기억도 잘 안 나서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대협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좋아하며 웃었고, 결국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상관이 없어졌다. 접히는 눈가와 올라가는 입가에 윤대협 특유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섞여 방 안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싶었다. 밤새도록, 해가 뜰 때까지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할 수 있을까 두려워진 리바운드 이야기를 하던 순간 시야에 시계가 걸려들어왔다. 짧은 바늘이 11을 가리키고 있는 게 똑똑히 눈에 보였다.
[어? 벌써 11시다.]
반사적으로 그 말을 해놓고, 백호는 사실 바로 후회했다. 말하지 말 걸. 모르고 지나갔으면 그냥 밤새면 되는 건데,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윤대협 쪽을 바라보았다. 예쁜 속눈썹을 팔락이며 눈을 깜빡인 윤대협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윤대협, 그, 너 집에 가야 되는 거 아니냐? 막차 시간 다 됐는데…]
머뭇대며, 일단 말했다. 시간을 말해놓고 그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근데 막상 그 말에 시계 쪽을 돌아보는 윤대협을 보니 입술부터 깨물게 됐다. 그렇네, 하는 윤대협의 말에 가슴 속이 축 가라앉았다. 하지만 윤대협은 그리 말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백호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작은 빛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백호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연이와 닮은, 그러나 소연이와는 분명히 다른 하얀 얼굴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흑돌 같은 눈동자가 어떤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주문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을 여니 마음과는 다른 말만 튀어나왔다.
[그래, 내일 월요일이고 하니까,]
그 말에 윤대협의 길다란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백호는 놓치지 않았다. 눈동자 역시 흔들렸다. 뭐지? 백호는 생각했다. 윤대협은 내일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러게.]
허나 흘러나온 윤대협의 낮은 목소리에는 아까와 달리 고저가 없었다. 백호는 움츠러들었다. 아마 내일 능남도 훈련이 있겠지. 자신들도 있으니 능남도 그렇겠지. 그런 윤대협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면, 그러면 안 되겠지. 내 이야기 들어달라고, 내 말 들어달라고 자고 가라는 건, 호열이도 아니고 고릴라도 아닌데. 게다가 그 고릴라도 가족이랑 있어야 돼서 갔는데, 붙잡으면 안 됐는데. 두서없이 길어지는 생각에 어깨가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어쩔 줄 몰라하며 쳐다만 봤다. 함께 침묵하던 윤대협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그러고만 있었다.
[어어, 가, 가냐,]
놀라서 다급히 따라 일어나며 한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어설펐다. 일어난 윤대협과 눈을 맞추려고 몸을 허겁지겁 움직이다 겨우 시선이 맞으니 진짜 이렇게 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아쉽다 못해 목이 다 메여오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답지 않게 망설이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윤대협이 말했다.
[…늦었네, 니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나봐,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백호는 그 말에 자신의 얼굴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윤대협도, 여기에 있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안 가고 싶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다 자신의 생각이었다. 윤대협이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말한 게 맞는 건지 백호로서는 윤대협 얼굴을 아무리 열심히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려웠다. 머리 속이 물음표로 꽉 차버려 혼란한 마음에 그래도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만이 드러낼 수 있는 전부라서 백호는 일단 어색하게라도 웃었다. 근데 그러니 윤대협의 얼굴이 갑자기 훅 흐트려졌다. 거기에 깜짝 놀라버린 백호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옷까지 챙겨 나가는 윤대협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발까지 신은 윤대협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본 순간, 백호는 저도 모르게 말할 뻔했다. 붙잡을 뻔했다. 가지 말라고, 내가 더 재밌게 해줄 테니까 자고 가라고, 진짜 그리 절박하게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치만, 그래도 되는 걸까? 윤대협에게 그래도 되는 걸까?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다. 많이 울었고 많이 속상했다. 많은 위로 역시 있었으나 그 위로들은 각자 돌아갈 곳이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옆에 있어줄 수가 없었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건가? 어쩔 수 없는 건가? 윤대협도 고릴라처럼 자기 집이 있으니까, 다들 그러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 나도, 그래서 이런 거니까. 결국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가슴 속이 욱씬댔다. 그러나 백호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라도 고개를 들었다.
[조심해서 가라, 윤대협]
어떻게든 웃으며 말하려 했다. 그래도 즐거웠던 시간이 고마워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리 애쓴 자신의 인사를 받은 윤대협의 얼굴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창백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그리고 본 적 없는 윤대협의 얼굴에 당황한 백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황급히 등을 돌린 윤대협이 인사도 없이 가버릴 것도 당연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덜컹거리며 덜 닫힌 현관문과 함께 남겨진 백호는, 한참동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너무 길어져서 어쩔 수 없이 끊어 올림.
다음 편부터는 이야기 진도 나갈 거야.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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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