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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 23:03

 

 

협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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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대협은 빈 방 중 한 곳에서 혼자 잤다. 강백호랑 같은 방에서 자게 될 줄 알았지만 북산 감독의 집에는 남는 방이 너무 많았고 다들 쓸데없는 배려도 넘쳤다. 감독 사모가 강백호랑 둘이서 나란히 이부자리를 들고 따라오게 했던 방도 넓었다. 침대도 그랬다. 그런데 대협이 빈 침대에 이불과 베개를 올려놓자 강백호가 감독 사모와 같이 나가면서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거기에 놀라 뻗은 손에 강백호랑 감독 사모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 왜?”
팔을 붙잡힌 강백호는 진심으로 의아한 듯 대협을 보며 말했다. 그 순수한 눈동자에 당황해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넌 어디서 자려고?”
“?? 난 내 방 가서 자야지.”
강백호는 너무나 당연하게 말했다. 아차 싶었다. 이 집에 강백호 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 강백호가 한동안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여차하면 다시 주인을 맞이할 수도 있는 진짜 강백호의 방이 있을 게 당연했다.
“편하게 자라, 윤대협. 내일 보자.”
이어진 생각에 말을 더 잇지 못하는 대협에게 강백호는 씩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곤 대협의 어깨를 한번 톡 치곤 감독 사모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방문 너머로 감독 사모와 강백호의 말소리가 작게 들렸다가 곧 멀어졌다. 대협은 그 멀어지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 서있다가 쓰러지듯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 따뜻하고 편한 잠자리에 누워서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낯선 천장을 바라만 보다가 언제 눈을 감았는지 알 수도 없었는데 일어나니 해가 중천이었다. 시계 바늘이 거의 11시를 가리키는 걸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늦잠을 잘 자는 편이기는 했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았었다. 게다가 강백호와 있을 때는 거의 자지 않는 편에 가까웠었다. 어제 그렇게 긴장했었나 생각하며 허겁지겁 세수만 하고 머리는 올리지도 못한 채 나가니 긴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가는 길에 텔레비전 소리에 섞인 세 사람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두르던 발걸음이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멈춰 섰다. 쇼파 한가운데, 앉았다기보다는 누웠다는 표현이 적당해 보이는 강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는 감독 사모의 어깨에 기대고 무릎 아래 쪽은 감독의 다리에 걸친 채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말도 못 하게 무례해 보이고도 남았다. 그 큰 덩치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세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만큼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버릇없고 뭐 이런 것도 없고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치대는 손자로밖에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 상태로 과일을 집어선 하나는 자기 먹고 하나는 감독 사모에게 건내주는 모습마저도 그랬다. 셋이 그렇게 쇼파에 얽혀 앉아 보던 텔레비전에서 요란 떠는 소리가 나오자 다같이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은 화음처럼 울려 대협의 귀까지 와닿았다. 가만히 서서 형태마저 느껴질 듯한 세 사람의 조화로운 웃음소리를 듣던 대협은 말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눈 앞의 더없이 화목한 광경과 따뜻한 웃음소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마냥 행복으로만 충만한 어떤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에 대협은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다가설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기척을 거두고 거실 쪽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을 복도의 어두운 구석에 몸을 붙여 숨겼다. 그 상태로 세 사람을 지켜보던 시간은 짧지 않았다. 한참 후 발길을 돌려 자신이 있던 방 쪽으로 되돌아가는데 욕실 문이 열려 있었다. 급하게 나온 흔적이 남아있던 욕실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방금 일어나 엉망인 머리에 더 엉망인 얼굴을 한 스스로가 보였다. 대협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입가를 한번 굳혔다가 미간을 구기며 힘없이 웃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윤대협. 이제 일어났냐? 새해 첫날부터 완전 늦잠 잤데요!”
평소처럼 깔끔하게 머리를 올리고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장착한 채 공손히 인사하며 거실로 나오는 대협을 향해 강백호는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 대협은 거기에 답하듯 웃어주며 침대가 너무 편해서,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핑계 대기는, 하고 말하면서 쇼파에서 벌떡 일어난 강백호가 대협 옆에 딱 서더니 말했다.
“이제 세배할 시간이다.”
대협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강백호가 그대로 앞에 있는 감독과 감독 사모에게 아주 제대로 된 세배를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같이 몸을 숙이게 되었다. 당황해 고개를 드니 감독과 감독 사모가 웃고만 있어서 다시 고개를 숙이곤 강백호를 따라 세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휩쓸리듯 세배를 하고 나니 흐뭇한 얼굴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두 어른이 보였다. 강백호가 히힛, 하고 특유의 귀여운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고운 색깔의 봉투를 내민다. 그러자 강백호가 우와아! 하고 외치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세뱃돈을 받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외쳤다. 그걸 보느라 자신에게 내밀어진 봉투는 못 보고 있던 대협은 눈앞에 내밀어진 같은 색깔의 봉투에 상당히 놀랐다. 잠시 굳어 눈만 껌뻑이고 있으니 감독이 한번 더 봉투를 대협 쪽으로 내밀었다.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결국 두 손으로 받긴 했는데, 그 순간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그냥 지금처럼 잘 지내주기만 하면 고맙겠네. 농구도 그렇고.]
어젯밤에 감독이 했던 말이 다시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었다. 조금은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던, 그런 눈빛이었다. 무슨… 이렇게까지?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만 여러가지 의미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봉투를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대협은 조금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나서 다같이 점심으로 떡국을 먹은 후 둘은 감독 사모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을 산더미처럼 들고 집을 나섰다. 대협은 적당히 사양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많았다. 허나 강백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강백호는 진짜 피난 가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감독 사모의 차로 실어 나르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셋이서 강백호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강백호는 어제 자신이 한 요리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리고 요리 못하는 대협이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게 뭐라고 너무 웃기고 재미있어서 대협도 감독 사모도 배가 땡길 정도로 웃어대다가 도착했다. 사실 대협은 과하게 친절한 감독 사모가 강백호를 내려주고 자신도 데려다 주겠다고 할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자신들과 함께 내린 감독 사모는 별말없이 강백호의 집으로 들어서더니 집안을 꼼꼼하게 둘러보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싸준 음식을 꺼내는 걸 도와 주고서는 강백호와 한번 더 다정한 포옹을 하고서 떠났다. 마지막 가는 길에 대협을 향하던 눈짓은 감독의 것과 같았다. 잘 부탁해요, 잘 지내줘요. 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한 눈빛에 대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워진 마음 속 한구석이 여전히 까끌거려도, 그 순간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강백호는 현관 앞에서 떠난 감독 사모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대협도 말없이 그 옆에 서서 남은 일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은 연휴 내내 어떻게든 강백호 집에, 강백호 옆에 더 붙어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곰곰이 생각했다. 강백호가 너 왜 안 가냐는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강백호 집에서 버티는 상황과 강백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상황으로 나눠서 머리를 돌려보고 있는데 강백호가 돌아서길래 조용히 따라서 들어갔다. 여전히 고장나 있는 문이 닫히며 내는 헐렁한 소리에 조금 긴장이 됐다. 강백호가 언제쯤 자신에게 왜 아직도 있냐고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집 안에 들어온 강백호는 대협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바쁘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부엌 찬장을 열더니 있는 접시란 접시는 다 꺼내던 게 시작이었다. 그러고선 이미 충분히 깨끗해 보이는 접시를 하나하나 전부 다시 씻었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던 대협은 은근슬쩍 그 옆에 가서 씻겨진 그릇의 물기를 닦곤 차곡차곡 쌓았다. 그러는 대협을 보고 강백호가 피식 웃길래 따라 웃으니 곧 키득키득 소리가 났다. 그렇게 함께 웃으며 접시를 마저 씻고 정리했다. 그리고 나서 강백호는 대협에게 냉장고 뒤에 있는 밥상을 펴서 닦으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대협의 뒤에서 강백호는 아까 정리했던 많은 음식들을 다시 데워서 그릇에 아주 예쁘게 담았다. 점심 때 먹은 떡국의 양이 어땠는지 알았던 대협은 벌써 저녁을 먹나 싶었지만 강백호의 먹는 양 역시 알았기에 군말없이 하라는 것이나 했다. 냉장고 뒤에 있는 밥상은 2개였는데 크기도 다르고 높이도 안 맞아서 두 개를 나란히 놓으니 모양이 좀 웃겼다. 그리고 강백호가 그쪽으로 음식이 정성스레 놓인 그릇들을 가져오기 시작하자 대협은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빠는 고기 좋아하니까 여기고, 할머니는 물고기 좋아하니까 이쪽에.”
말그대로 가져온 모든 음식을 올려놓은 상 위에는 사진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최소한 대협의 눈에는 그래보였다. 하지만 강백호는 용케 빈 자리를 찾아내 향 앞에 있던 할머니의 사진과 아버지의 사진을 가져와 요령 좋게 올려놓았다. 그렇게 완성된, 상다리가 부서질 듯한 제사상은 딱히 격식에 맞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애쓴 티가 나서 그저 애틋했다. 강백호는 제사상을 내려다보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가 킁, 소리를 내며 눈가를 한번 닦아냈다. 그제서야 강백호가 왜 그리 많은 명절 음식을 굳이 직접 하고 또 가져와야 했는지 알게 된 대협은 눈앞의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여주었다.
제사 자체는 짧았다.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던 대협은 옆에 얌전히 서있다가 백호가 술 좀 따라 달라고 해서 도와준 후에 절하는 강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짙은 향 냄새를 느끼며 그 널찍한 등 너머로 강백호의 이목구비가 딱히 느껴지지 않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을 본다. 아무래도 강백호는 어머니 쪽을 닮은 것 같았다. 머리 색깔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사진에 있는 이들과 골격의 느낌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 같은 건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강백호는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집안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는 흔적조차 없다. 대협은 그런 것은 묻지 않는다. 왠지 익숙한 고통과 동질감을 희미하게 느끼며 강백호의 뒤를 묵묵히 지킬 뿐이다. 절을 마치고 일어난 강백호는 사진을 향해 뭔가를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너무 작아서 바로 뒤에 있는 대협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랬다. 대협은 뒷통수 밖에 안 보이는 강백호가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잠겨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리곤 돌아서 반짝 자신을 향해 돌아보는 강백호의 눈을 보고 다정히 웃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선, 씩씩하게 말하는 강백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랑 할머니 많이 먹었을 거야. 이제 정리하자!”
다시 음식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강백호의 냉장고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냉장고 터지겠다 싶을 때까지 테트리스 하듯이 음식들을 끼워 넣곤 과일 같은 건 밖에 내놓았다. 그래도 둘이 있으니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끝났다. 다 끝나고는 둘 다 벽에 베개를 받치고 반쯤 드러누워선 좀 쉬었다. 난방이 잘 안 되는 방이라 이불을 다리에 덮은 채였다. 한 이불 아래 두 사람의 다리, 대협은 이제 그런 걸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허리까지 이어질까봐 약간 긴장한 채 표정관리를 한다. 강백호는 속 모를 표정을 하고선 그런 대협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본다. 곧, 입술이 열린다.
“야, 윤대협.”
“응?”
그때 이불 속에서 무릎이 살짝 닿아, 대협은 슬쩍 몸을 틀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강백호가 갑자기 확 가까이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너 저녁에 할 거 없지?”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사실 질문이라기 보다는 확신에 가깝기도 했다. 그 속에 담긴 기세와 어깨에 들러붙는 특유의 높은 체온에 약간 얼떨떨해진 대협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였다. 그러자 강백호가 진지해진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대협과 관련된 건 분명했다. 그래서 대협은 기다렸다. 자그마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오후의 햇볕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강백호의 눈동자 위로 투명하게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저 입술 사이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기대하고 설레하며.
“윤대협, 있잖아. 내가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강백호가 입을 열어 이어진 말에 대협은 좀 당황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북산 감독과 감독 사모를, 어제 하루를 떠올리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릴라네 집도 맛있는 거 많이 하거든. 진짜 거기 떡국이 좀 달라. 완전 맛있다니까.”
그렇게 채치수네 집 예찬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연휴 내내 강백호와 둘이서 보내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이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기도 인복도 많은 강백호는 이미 명절 연휴 스케줄이 꽉 차있었다. 명절 전날엔 북산 감독집, 명절 당일에는 채치수네 집. 그럼 남은 연휴는 양호열이려나? 그런 기분 나쁜 생각을 하며 채치수네 집에 가서 같이 저녁 먹자는 말을 열심히 돌려돌려하는 강백호를 바라본다. 듣다 보니 거기에도 자신과 함께 간다고 이미 말을 해놓은 눈치였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대협은 알 수가 없었다. 채치수네 집이라… 채소연이 있겠지. 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가라앉는 입꼬리를 막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협과 함께 하려고, 대협이 외로울까봐 걱정하며 같이 명절 연휴를 보내려고 이 코웃음이 나는 계략을 짠 강백호가 너무 귀여웠다.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채치수네 집으로 가자고 대협을 꼬셔대는 모습이 너무너무 귀엽고 기특해 조금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마음을 이길 것이 없어 갈등은 짧았다. 발게진 얼굴과 어쩔 줄 몰라하는 손 끝, 다급히 깜빡거리는 눈과 찡그린 미간에 입술이 삐죽빼죽 움직이는 절박한 모습에 대협은 그저 함락된다. 그냥 다 강백호가 하자는 대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뻔한 걸 겨우 참는다. 마지막 이성을 붙잡아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뺀다. 어떡할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울상이 되려고 하는 강백호를 바라본다. 그래도 바로 알았다고 답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대협은 채소연과 관련되면 그게 뭐든 순순해지고 싶지가 않다. 약간은 심술마저 부리고 싶다.
“야, 너 할 것도 없잖아! 같이 가자니까아- 고릴라한테도 내가 잘 말해놨다고…”
허나 대협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말 끝을 늘이기 시작한 강백호의 어깨가 축 쳐지는 것까지 볼 생각은 없었다. 보기 드물게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지는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 속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고 입꼬리를 올리며 알았어, 알겠어. 하고 강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해주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스치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의 감촉에 반사적으로 탄성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갈게, 하고 말하며 웃어주었다. 그러자 강백호가 저답게 순식간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선 주먹으로 대협의 어깨를 치며 답했다.
“진작 그랬어야지!”
별로 세게 친 것 같지도 않은데 맞으니까 억 소리가 나는 걸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리곤 애매하게 웃고 있으니 콧김까지 뿜으며 힘차게 일어난 강백호가 개운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시간 남았으니까 저녁 전까지 1:1이나 할래?”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춥긴 하지만 어제 생각하면 못 뛸 정도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대협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기는 사람 하고 싶은 거 해주기!]
[야, 윤대협. 하고 싶은 거 말해봐.]
제멋대로 내기를 걸고, 또 제멋대로 지키던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남자, 강백호의 얼굴은 농구 할 생각에 가득 상기되어 있었다. 그걸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허나 조금은 다른 걸 시도해봐도 좋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때마침 적당한 핑계도 있고. 그래서 대협은 아주 산뜻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호야, 너 어제 1:1 이긴 사람 하고 싶은 거 해주기로 한 거 기억나?”



“근데 윤대협, 우리 뭐 보냐?”
“글쎄… 백호 넌 뭐 보고 싶은데?”
대협이 뜬금없이 꺼낸 영화 보러 가고 싶다는 말에 강백호는 좀 놀란 듯 했지만 곧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 타고 나올 때도, 극장 와서도 크게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협은 그런 강백호를 일부러 사람이 적겠다 싶은 생각되는 극장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도 명절이니 사람이 좀 있겠지 싶어서 약간 각오를 했는데 다행히 사람이 정말 없었다. 덕분에 대협은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를 신중하게 훑어보던 강백호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큰 극장은 아니라서 걸린 영화는 3개 밖에 없었다. 총을 든 근육질의 백인 남자가 서있는 액션 영화 하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던 배우들이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코메디 영화 하나, 그리고 남은 하나는,
“…이 영화, 그 유명한 거 맞지?”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강백호가 양팔을 벌리고 배 앞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는 여자와 그 여자의 뒤에서 허리를 잡아주고 있는 남자가 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묻는다. 대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도 그렇게 영화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영화는 다들 하도 이야기를 해대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거 볼래?”
그 말에 강백호는 설레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꾸닥거렸다. 그리고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 얼굴로 팜플렛도 하나 챙겼다. 그런 강백호와 함께 대협은 표도 사고 팝콘도 사고 콜라도 샀다. 무려 강백호 돈으로 샀다. 당연히 자기가 내려던 대협의 손을 저지하고선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봉투를 꺼내던 강백호였다. 본 적 있는 고운 빛깔의 봉투에서 봉투만큼 꾸겨진 지폐가 나왔다. 눈이 둥그래져선 바라보는 대협을 향해 히힛 웃으며 돈을 내고선 에헴, 하고 뻐기는 강백호를 보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가가 허물어지듯이 웃고 있다는 걸, 그런 자신의 모습이 좀 바보 같다는 걸 느끼면서도 대협은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 손엔 팜플렛, 한 손엔 제일 큰 사이즈의 팝콘통을 들고서 어린 아이처럼 들뜬 강백호 옆에 있다보니 더 그랬다. 누군가 가슴 속에 들어가 심장에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았다. 기이하게 따끈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다 못해 손톱 발톱 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들어선 어두운 상영관 안 모든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도 대협은 입가에 걸린 웃음을 거둘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백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그 모든 시간 매분 매초가 재미있었다.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반쯤은 화면의 불빛에 비치는 강백호 얼굴로 봤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강백호가 순간순간 짓는 풍부한 표정만으로도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 흠뻑 빠져든 강백호가 보는 내내 말을 해대서 더 그랬다. 맨 뒷줄에 앉은 두 사람 말고는 한참 앞 쪽에 앉은 서넛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 말하는 강백호를 말리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와, 배 진짜 크다.
아, 배 이름이 타이타닉이라서 영화 제목도 타이타닉이구만.
에이, 저 놈 저러면 안 돼지.
안돼! 이 나쁜 놈! 로즈는 너 안 좋아해!
잭이 훨씬 잘 생기고 낫구만.
그렇게 혼자 감탄했다가 좋아했다가 화도 냈다가 꿍얼꿍얼 한참 혼잣말을 하다가 옆에 있는 대협에게 저놈 진짜 웃기지? 하고 물어도 봤다가. 하찮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움직이며 변하는 입술의 모양들, 그리고 그 말들 사이사이에 새어 나오는 자그마한 숨소리마저 대협에게는 왜 그리 크게 보이고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렇게 자신이 얼만큼, 얼마나, 어떻게 강백호를 바라보는지 사실 대협은 잘 몰랐다. 모른 채 강백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여대고 같이 웃어댔다. 그런 대협의 옆에서 팝콘통을 끌어안고 거침없이 한 웅큼씩 입에 집어넣으며 감독이 반응하란 대로 다 반응하던 강백호가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던 장면은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 커플의 러브씬이었다.
“흐어헉-”
그 소리는 좀 컸다. 그래도 다른 말은 목소리를 낮춰서 하던 강백호가 순간 너무 놀라 목청 조절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그려달라고 말하곤 오로지 번쩍거리는 목걸이만 걸치고 나온 여자 주인공이 맨몸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아마 영화 속 남자 주인공도 강백호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누드를 그리는 내내 의자에 몸을 파묻은 강백호는 숨소리도 참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보았다. 그런 강백호 옆에서 대협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헉!”
자동차 유리에 손자국이 찍히는 장면이었다. 강백호는 그렇게 외치며 말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떨어지던 팝콘통을 민첩하게 잡아준 대협은 순간 너무 웃겨서 푸흡 하고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어두운 데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입을 뻐끔거리며 화면과 대협을 번갈아서 보는 강백호를 붙잡아 도로 앉힐 때도 웃느라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엔딩 타임이 왔다.
“안 돼…안 돼애…”
강백호는 이미 배가 가라앉기 전부터 훌쩍대고 있었다. 기어이 악사 무리마저 물에 빠졌을 때 즈음에는 온 얼굴이 눈물로 다 젖어 있었다. 주인공 커플이 판자에 기댄 채 손을 잡고 있을 때부터는 오열하느라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수건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살았던 대협은 다음부터는 챙겨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챙겨온 휴지로 축축해진 강백호의 볼을 부지런히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 걸로는 한참 부족해 흠뻑 젖어버린 강백호의 눈가는 화면의 빛에 반사돼 계속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 반짝거림이 무색하게도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차가운 바닷물 아래로 가라앉았고, 여자 주인공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다 살아남기 위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절박하게, 또 끈질기게. 하염없이 울며 여자 주인공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강백호는 두손마저 모은 채 애달파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이 그들이 된 것 마냥, 마치 영화 속의 그들처럼. 그리고 그런 강백호를 바라보며, 대협은 생각했다. 저 차가운 바다 위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버티는 여자 주인공의 강인함과 사그라들지 않는 선명한 눈동자가 강백호와 닮았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어도, 아무리 불리해도 포기하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와 태양과도 같은 존재감. 그 놀라운 아우라가 화면에서도 자신의 옆에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휘감아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속에 완전히 빠뜨려버리는 것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여운에 젖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강백호의 옆에서 대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눈만 깜빡이다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한 순간 설핏 웃는다. 이런 순간을 온전히 둘이서만 함께 했다는 것에, 문득 그런 웃음이 나왔다.

“와…진짜 이 영화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눈이 부은 채로 극장을 나온 강백호에게 진심을 담아 그러게, 하고 답한 대협은 아직도 코를 훌쩍이는 강백호에게 휴지를 좀더 챙겨주었다. 강백호는 대협이 대준 휴지에 킁 소리를 내며 코를 풀고 나서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 했다. 정말로 감명깊게 본 듯 코맹맹이 느낌이 남은 목소리로 두서없이 영화 얘기를 계속 했다. 그런 강백호의 모습에 대협은 이상하게 가슴 속이 떨렸다. 마치 계속 상영관에 있는 것처럼, 함께 나란히 앉아 엔딩 크레딧을 보는 것처럼. 그래서 대협은 강백호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아주 열심히 답해주었다. 그게 참 좋았다. 응, 응, 하고 눈을 맞추고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든 순간들이 좋았다. 그 순간들이 여전히 대협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난 설렘 속에 머무르게 해주었다. 그 속에 있고 싶었다. 아직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완전했던 둘만의 순간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 작은 동전노래방 부스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 많은 노래 제목 중에서 아까 본 영화의 OST가 나와있는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 노래방부스가 190이 넘는 덩치 큰 남자 2명이 들어가기엔 좀 많이 작아 보인다는 사실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좋았다. 그래서 굳이 말했다. 백호야, 여기 봐, 하고 손가락으로 그 영화 제목을 가리키며 발걸음을 멈췄다. 강백호의 시선 역시 여기 멈출 것이라 확신하며.
“와…아까 영화에 나온 노래인가보다.”
강백호는 노래 제목 위를 손으로 흩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선 안을 한번 들여다보는 뒷모습에 대고 대협은 말했다.
“한번 불러볼래?”
반색하며 돌아보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고 대협은 완연하게 웃었다. 그리곤 조금 다급해져서 바로 노래방 부스의 문을 여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 하는 소리가 났다.
“야, 윤대협, 근데 이 노래 영어 아니냐? 그러면 좀…”
망설이는 목소리에 울적해지는 강백호의 얼굴을 대협은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더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강백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대협은 자신있게 말했다.
“뭘 그런 걸 걱정해, 백호야.”

곧 대협은 그럼 내가 부를게, 하고 용감하게 말한 자신의 배짱에 스스로가 더 놀라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강백호의 놀란 눈동자가 미묘한 존경심이 섞인 감탄으로 뒤덮이는 걸 마주하자 아무래도 다 상관없어졌다.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 내릴 수가 없었다. 좁은 노래방 부스 의자에 둘이 몸을 찰싹 붙인 채 낑겨 앉는 것도 그랬다. 그렇다면 노래 신청은 자기가 해주겠다면서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동전을 집어넣고 노래 번호를 찾아 자신의 손가락에 비해 너무 작은 버튼을 꼭꼭 누르는 강백호를 본다. 전부 다, 정말 다 좋았다. 어차피 기분도 좋아졌는데 숨길 것도 없다 싶어 대협은 싱글벙글 웃기만 하면서 화면도 안 보고 있다가 강백호가 자, 하고 주는 마이크를 받았다. 기대에 찬 눈동자로 자신과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는 강백호가 반짝였다. 그 순간 대협은 자신도 함께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백호의 반짝임이 이 좁은 노래방 부스 안을 가득 채워 자신마저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 끝이 떨렸고 때마침 전주가 흘러나와 대협은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가서려 했던 입술을 꽉 깨문 채 대협은 노래의 키를 남자가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던 노래였다. 대협은 자신의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타고나길 괜찮은 목소리로 그럭저럭 말하듯이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저 영어 가사를 보고 읽는데 어려움이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협은 그냥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화면의 가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기본 음정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어려웠다. 어떻게든 부르다가 여기서 취소 버튼을 눌려야 되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렇지만 방금 본 영화의 장면들이 나오는 화면엔 눈길 한번 안 주고 자신의 옆얼굴만 뚫어져라 보는 강백호의 시선을, 그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물러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절정의 고음을 필사적으로 따라가던 대협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강백호가 어느 순간부터 웃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놀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노래를 중간에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강백호의 입꼬리가 귀 끝까지 닿으려는 듯 위아래로 흔들렸고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꺼풀 사이의 눈동자가 쉼없이 반짝였다. 강백호는 그렇게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대협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대협이 세상에서 제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인 것 마냥,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처럼. 그렇게 강백호의 그 무엇에도 단 한 톨의 거짓조차 없어 되려 대협이 부끄러워졌다. 1절이 끝나고 간주가 나오는 동안 강백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할 정도였다.
“와…윤대협…”
그렇게 결국 2절까지 다 부른 노래가 끝나고 나자 강백호는 경탄하듯 말했다. 화면에 나오는 71점이라는 민망한 점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백호 반응만 보면 71점이 아니라 무슨 710점이라도 나온 것 같아서 민망하다기보다는 쑥쓰러워진 대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힌 채 슬며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강백호는 여전히 상기된 목소리로 그런 대협을 향해 말했다.
“너 진짜 미국 사람 같다. 영어 진짜 잘 하네!”
아, 그런 포인트였나. 하는 생각에 머쓱하게 웃는 대협의 어깨를 동그란 주먹으로 톡 치며 강백호는 이어 말했다.
“노래도 꽤 하고… 신기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지만 강백호가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대협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아니, 예전에 미국에 좀 있었거든.”
“엥? 진짜?”
언제? 하고 아직 들뜬 목소리로 강백호가 묻는데 대협은 크게 숨을 내쉬듯 푸스스 웃고는 중학교 때? 하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오오- 하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강백호와 함께 노래방 부스의 문을 열고 나가면서 대협은 아직도 조금씩 콩닥이는 듯한 가슴께를 손으로 눌렀다. 여전히 따뜻하고 조금은 부끄러운 온기가 몸 속으로 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극장을 나서서 채치수의 집으로 가는 길에 둘은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좀 했다. 중학교 때 미국에 있었다는 말에 강백호가 이것저것 물었고 거기에 답하며 대협도 자연스럽게 강백호의 중학교 시절에 대해 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백호의 중학교 양아치 시절은 대협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백호가 아버지를 잃은 것 역시 그때라는 사실은 조금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강백호가 말해준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지만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래서 양호열이랑 그렇게 붙어다니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농구도 하지 않았던 때니 마음 둘 곳이 거기밖에 없었겠지, 하는 결론은 쉽게 나왔다. 자신의 중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일부러 농구 중심으로만 말해주었다. 실제로 거기서 농구를 시작하기도 했고 강백호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도 다 거기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도 말을 하다보니 미국에서 돌아와 능남에 오게 된 이야기까지 나오긴 했다. 그래서 대협은 유명호 감독님이 오라고 해서 왔다, 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말했다. 때마침 그때 둘은 채치수네 동네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길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어머니와 함께 이사 갈 집을 보러 왔을 때 봤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집이 채치수 집 근처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봤던 집도 채치수 집도 딱히 기억나지 않고 그냥 다 똑같아 보이기만 했다. 그런 골목길과 대문을 잘도 구분해서 찾아가는 강백호가 신기할 뿐이었다. 그 신기함이 여기에 얼마나 자주 왔길래 이리 헷갈리지도 않을까. 하는 기분 나쁜 생각으로 이어질 때쯤, 둘은 어느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큼큼, 하고 난데없이 강백호가 목을 가다듬더니 벨을 눌렀다. 거기에 아, 싶어져 입가가 비틀어지는 순간 학교 종소리와 비슷한 느낌의 벨소리가 울렸다.

“백호야! 왔어? 안녕하세요, 윤대협 선수.”
그렇게 대문 벨을 눌렀을 때 나온 목소리도, 현관문을 열고 반가운 목소리로 둘을 맞이한 것도 채소연이었다. 시작부터 그렇게 다 채소연이었다. 채치수는 뭘 하고 있는지 저 멀리서 왔냐, 강백호- 하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강백호는 거기엔 대답도 안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나서부터 시선도 신경도 한 곳에만 꽂혀 있었다.
“어, 소, 소연아. 안녕.”
그 채소연 앞에 섰다는 이유로 바짝 긴장해선 어색한 인사를 해대는 강백호를 본다. 편해 보이는 면바지에 낙낙한 스웨터를 걸친 채소연도 본다. 하나도 대단해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여자애 때문에 볼까지 발그레해져선 그러고 있는 강백호를 다시 한번 본다. 그리고 아주 매끈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들을 가두듯 붙잡고 생글생글 웃으며 대협은 인사에 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다시 보네요.”
그리고 뒤이어 따라나온 채남매의 부모들에게도 그랬다. 여유롭게 예의를 지키며 인사하고 미소를 지으며 묻는 말에 답했다. 반사적으로 그러고 있었다.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든 말든, 채소연이 어떻든 말든. 어떻게든 괜찮게, 멀쩡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사실상 모르는 장소, 얼굴만 아는 수준에 가까운 채소연 채치수 남매, 완전히 처음 보는 그들의 부모까지. 그 모든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아는, 흔히 생각하는 윤대협으로서 만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달리 강백호는 채치수를 뺀 다른 모든 식구 앞에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대협으로서는 처음 보는 수줍고 조심스러운 강백호의 모습이 이어졌다. 망설임과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인 채 달아오른 볼과 움찔대는 손가락을 바로 옆에서 보며, 대협은 머리 속이 탁하게 엉키는 것을 느꼈다. 어둡고 지저분한 감정이 가슴 속을 시꺼멓게 채우는 것도 느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강백호의 모습이, 그 풋풋하고 앳된 모습이 그 자체로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걸 막지 못 했다. 이게 전부 다 채소연 때문인 걸 아는데도. 복숭아색이 되어버린 강백호의 동그란 볼을 보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로.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어. 금방 된다.”
저녁 시간에 충분히 맞춰왔는데도 좀더 기다려야 했던 거실 쇼파의 두 사람에게 채치수는 그리 말하며 다가와 강백호의 손에 리모콘을 쥐어주었다. 완전 애 취급하는 태도에 곧바로 강백호가 고릴라! 하고 킥킥대면서 채치수의 손을 찰싹 내려치는 바람에 좀 놀랬다. 거기에 채치수가 곧장 이 녀석이! 하면서 강백호의 머리를 주먹으로 눌러댔을 때는 더 놀랬다. 돌이켜보면 북산과 시합할 때마다 종종 볼 수 있었던 광경이기는 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보니 너무 험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는데 이이익, 소리를 내며 그걸 받아내는 강백호의 입꼬리가 즐거운 듯 삐죽 솟아 있어 뭐라 말을 못했다. 돌아가는 채치수의 뒷모습을 보는 얼굴 역시 그랬다. 토라진 듯 튀어나와 툴툴대는 입술을 하고서도 히히덕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그렇게 편안하고 안정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대협은 자신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 소리를 들었다. 어라, 싶은 게 가슴 속이 기분 나쁘게 조여 들었다.
“다 됐다. 오세요-”
그렇게 이어진 불쾌한 감각이 온몸을 둘러싸는 바람에 부엌 쪽에서 들려온 말을 듣지도 못할 정도였다. 멍해진 얼굴로 앉아만 있는 대협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강백호가 다 됐데, 가자, 하고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어어… 하고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와! 떡국이다!”
점심에도 떡국을 몇 사발이나 먹어 놓고서도 기운차게 말한 강백호는 자신 앞에 놓인 거대한 떡국 그릇을 보고 진심으로 좋아했다. 거기에 식탁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못 말리겠다니까, 하고 말하며 피식대던 채치수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대협도 작게나마 웃긴 했다. 명절 음식들뿐만 아니라 눈에 익은 반찬들이 가득한 부엌 식탁 위를 보며, 억지로. 그리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우렁차게 말한 강백호의 인사와 함께 먹기 시작하니 진짜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반찬 맛이 다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강백호 집에서 강백호와 함께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강백호가 한 게 아닌, 강백호가 한 요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던 그 반찬들 말이다.
“…”
그리하여 결국 도란도란 이야기가 나오는 식탁 위에서 대협만 어느 순간부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티나지 않는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몰랐던 게 아닌데,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그것들이 전부 다 채치수네 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이렇게 직접 확인하는 건 달랐다. 쉽지 않았다. 속이 쓰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빠졌다. 어떻게든 젓가락과 숟가락을 움직여보지만 입에 들어가는 건 사실 별로 없었다. 먹는 척만 하면서 식탁의 다른 사람들이나 보게 된다. 우걱우걱 잘도 먹는 강백호, 그 맞은 편의 채소연, 채치수, 그리고 자신들도 식사를 하면서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웃으며 한번씩 보는 부모들. 그렇게 차례차례 보니 정말이지 그림 같았다. 놀랍도록 온화하고 평화로워 무슨 공익광고라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반듯하기 짝이 없는 광경 속에서 대협은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손 끝에서 시작된 싸한 감각이 팔뚝을 따라 섬뜩하게 타고 올라왔다. 알 수 없는 기묘한 위화감에 피가 식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대협을 한발 뒤로 물리게 했던 아침의 한 장면이 번뜩 떠올랐다. 북산 감독과 사모, 강백호 세 사람의 모습이, 셋이서 쇼파에 사이좋게 얽혀 있었던 모습이 사진처럼 또렷하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식탁의 풍경은 그보다 더, 정말로 훨씬 더 완전해 보였다.
“백호야, 벌써 다 먹었어?”
“어, 소연아, 너무 맛있어서… 여기 육전도 진짜 맛있다.”
“참나, 급하게 먹기는.”
엄청난 속도로 그릇을 비운 강백호를 향해 타박하듯 말한 채치수가 먹다 말고 일어나 한 그릇 더 푸짐하게 떴다. 강백호가 맹렬히 먹어 치우고 있는 전들도 접시에 넘칠 만큼 더 담아왔다. 그야말로 한 식구나 다름없는 모습에 대협은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음식이 다 목구멍에 걸리는 것 같았지만 남기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서 자신의 몫을 입 속에 우겨 넣듯이 해치웠다. 힘겨운 식사 시간이 끝나자 다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강백호는 대협을 자신의 옆에 앉게 하더니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집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면서 대협을 향해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 한 순간이 유일하게 대협이 숨통을 틀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허나 그 달콤하던 과일들과 함께 이어진 이야기에 대협이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나도 농구할 때 10번이었어, 백호야.”
“어, 진짜? 소연이 너도 10번이었구나!”
“오빠도 10번이었잖아, 2학년까지.”
“흠, 그럴 때도 있었지.”
“오, 고릴라도 그랬어? 우와! 여기 다 10번들 모임이네!”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대협은 그럴 때마다 들고 있던 사과를 입에 넣는 시늉을 하며 웃는 타이밍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보았다. 중간중간 강백호와 채소연이 눈을 마주치고 웃는 것을, 강백호가 그럴 때마다 기쁨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을, 그런 강백호를 보고 칫, 소리를 내면서도 미소 짓는 채치수를, 그 모든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을.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강백호는 오늘 먹은 것들이 얼마나 어떻게 맛있었는지 말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그 요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강백호에게 설명해주었다. 강백호는 그 설명을 아주 열심히 들었다. 거북이처럼 고개를 수그려가며 그 설명에 집중했다. 대협은 그런 강백호를, 강백호만 계속, 계속 보았다. 입 안에서 씹히는 사과가 모래처럼 느껴졌다. 달콤한 물기가 아니라 퍼석대는 가루가 입 안과 목구멍을 퍽퍽하게 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꾸만 이어지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기어이 대협의 머리가 이 집 부엌에 서있는 강백호의 모습을 상상해내기 시작했다. 짜증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치 본 적 있는 장면처럼 생생하게 이 집 부엌에서 이 집 가족에게 요리를 배우고 함께 하는 강백호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진실로 대협은 거기서 자신의 머리를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뇌가 통제를 벗어나 어딘가 고장나버린 것처럼 생각이 미친듯이 가지를 뻗고 나아갔다. 이렇게 좋다고 난리치고 티 내지 못해 안달인 채소연과 알콩달콩 잘도 사귀는 모습이, 결국은 결혼까지 하는 모습이, 안 그런 척하면서 싸고 돌며 온갖 것들을 다 챙겨주는 채치수와 평생을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이 사람들과 가족이 된 강백호의 모습까지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다. 순식간에 나아가는 모든 상상을 대협은 붙잡을 수가 없었고 그 끝엔 환하게 웃는 강백호가 서있었다. 이들과 함께, 이들의 가족이 되어 진실로 행복해진 강백호가 꿈결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심지어 대협에게조차 그 모든 과정이 순리처럼 느껴졌다.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해 보였다. 거기가 강백호의 자리인 것 같았다. 아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강백호에게 너무 잘 어울렸다.
“…”
포크에 꽂힌 사과는 딱 한 입만 배어 문 채였다. 대협은 그것을 내려 놓고 큰 소리로 웃는 강백호를 따라 다른 모든 가족이 웃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강백호의 꿈이라는 사실을. 바로 여기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이 강백호가 꿈꾸고 바라는 세계이자 이루고자 하는 미래라는 걸.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자리는-






진짜 진짜 오랜만.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